지난 10월 28일, 지인 한 분과 함께 정독 도서관에서 <두더지 지식 클럽>의 저자 강연회가 있어 다녀왔다.  
글쎄, 왜 거길 갈 생각을 했을까? 사실 나는 정독도서관 올라가는 그 길을 좋아한다. 거리가 워낙 멀어 일부러 가기는 뭐하고, 이렇게 갈 기회를 만들었으니 오랫만에 거리가 주는 정취가 좋다. 게다가 함께 한 지인이 평소 내가 좋아라 하는 분이라, 시간을 넉넉히 둬서 그분과 함께하는 저녁시간도 내겐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강연회의 부제가 매력적이다. 인문학 사용법을 가르쳐 준다지 않는가? 혹했다. 작고한 이윤기 씨는 그의 책에서, 곳곳의 거리 간판에서 신화의 흔적을 알려준다는데, 저자도 그런 식으로 일반 대중이 쉽게 인문학에 다가갈 수 있도록 해주지 않을까? 호기심이 발동한 것.  

 

 

一生懸命

그런데 웬걸, 막상 시작을 하고 보니 도통 무슨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처음 몇개의 사진이 넘어가고, 뭔가 심오한 얘기가 나오긴 했는데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애초부터 그 어렵다던 인문학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 주지 않을까란 나의 기대는 물건너 갔다. 하긴, 저자가 얼마나 어렵게 공부한 학문이겠는가. 나라도 그것을 호락호락 가르쳐 줄 것 같지가 않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정리는 완전하진 않지만, 저자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구나가 (대충) 파악이 되는 느낌이었다. 그날, 저자는 첫 시작을, 어느 초등학교 교문에 걸려있는 표어를 보여주면서 강연을 시작했었다. 이를테면, 그 표어는 "6학년 목숨걸고 공부하는 기간" 이란 것이었다. 이게 어느 학부모에겐 반가울 수도 있지만, 사실 알고보면 살벌한 표어다. 고3 수험생에게라면 이해할 수도 있지만 이제 초등학교 6학년에게 저런 표어를 적용하기엔 너무 심한 것 아닌가? 비슷한 의미로 유태인 집단수용소 정문엔 이런 구호가 있다고 한다. Arbeit macht frei(Work makes you free)을, 한자성어로는 一生懸命(일생현명: 일어로는 '잇쇼오겐메')라고 하는데 이것 역시 '목숨 걸고'란 뜻이란다. 다른 말로하면 필사적으로 열심히란 뜻이겠는데, 문제는 이것이 자발적이면 좋은 일이지만, 정부가 이것을 강제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얼마나 처참한 비극이 일어났는지는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지 않았는가. 나중에 그 초등학교의 문제의 표어는 철회되었다고 한다. 뭐 이런 심오한 뜻을 깨달아서 철회된 것 같지는 않고, 학부모의 반발로 떨어졌다나 뭐라나.  

하긴, 우리나라는 오래 전부터 나라에서 교육을 담당해 왔다. 아니 그보단 학생을 관리해 왔다고 해야할 것이다. 나라가 학생들을 가르고 결국 그것을 위해 一生懸命을 주입시켜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나라할 수 있는 일이란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이어야 하지 않을까?          

"카이사르의 것은 카이사르에게, 그리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이 말은 그 유명한 예수님이 율법학자들과의 논쟁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말하자면, 헌금을 가지고 이것을 누구에게 바치는 것이 좋겠냐는 율법학자의 우문에, 예수님은 현답으로 하신 말씀이다.  

사실, 그날의 저자의 강연은 그다지 친절하지는 않았다. 뭔가 아는 것도 많고, 준비해 온 것도 많은데 1시간 내에 강연을 하자니 따라잡기가 어려웠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청중이었던 나의 느낌일 뿐이지, 저자는 그것에 대해 난감해하거나 쩔쩔매는 것은 없었다. 그냥 주어진 시간안에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한다는 느낌이었다.(좀 더 신랄하게 말하면 '따라 올테면 따라와 봐' 하는 식이랄까?) 그런데 학문에 파벌이 있어서는 안되겠자만 왠지 저자에게선 좌파적(?)인 느낌이 강했다. 이를테면 학문의 장벽을 허물고 대중에게 다가가려고 하기 보다는, 독야청청하는 쪽이랄까? 오죽했으면 저자는, 출판사에서 만든 자신의 책에 대한 카피나 제목에 대해서 마뜩찮게 말했다. 하다못해 요즘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곤 하는데, 그는 인문학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고까지 했다.  

물론 그것을 필요로하는 소수의 사람은 있다. 이를테면 정신분석학자나, 종교가나, 점쟁이 정도. 그러나 요즘 학생들, 경영인들, 심지어 홈리스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친다는 것이 무슨 의미냐고 말한다. 그저 예수님의 저 말씀처럼, 홈리스들에겐 빵과 일자리를 주고, 경영인들은 돈 잘 벌고 잘 쓰는 방법을 가르치면 그만 아니냐고 반문한다. 확실히 그의 언사가 좀 파격적이다. 하지만, 이 말은 저자가 처음하는 말은 아니다. Marx는, "각자는 그의 능력에 따라서, 각자에게는 그의 필요(욕구)에 따라서"란 말을 했다고 한다.  

 인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듣고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인문학을 하려고 하는 것일까? 역사적으로 인문학이 융성했던 시기가 두 번이 있었다고 한다. 그것은 플라톤이 살았던 고대 그리스 시대와 르네상스 시대. 가장 사치스럽고, 모든 학문이 융성했던 시기. 또한 그 시대는 한가하고, 다소는 게으른 여가, 즉 자유 시간이 충분히 보장된 시대이기도 했다. 저자는 바로 이때가 인문학을 할 때라고 말한다. 즉, 인문학적 소양을 쌓으려면 여가가 필요하다.  

나는 이때야 비로소 왜 저자가 초두에 초등학교 표어와 일련의 몇 장의 사진을 보여줬는지 알 것 같았다. 문제는, 우리가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기 전에 과연 인문학을 할 만한 여건과 환경이 되어 있는가를 점검해 보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저자는 말하기를, 인문학을 하려면 적어도 자기의 방. 또는 자기만의 공간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그래서 점점 원룸, PC, 개인 블로그, 스마트폰 등이 중요하게 부각이 되고 있지 않은가? 저자는 그러면서, 정신분석학자나 종교가들이나 보는 어려운 인문학 책을 보기 보다 소설을 읽고, 영화나 드라마를 보는 것이 훨씬 낫다고까지 충고한다.   

저자의 말을 들으니, 또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사실 인문학이라는 게 뭔가? 인간답게 사는 방법을 가르치는 학문이 아닌가? 그러나 배고픈 사람에게 빵을 주고, 일자리를 마련해 주는 것이 급선무인 것마는 사실이다. 당장 내 배가 고프고, 일자리가 없어 돈을 벌지 못하는데 정신적인 양식부터 공급해 주겠다면 그건 또 얼마나 어불성설인가?  

이렇게 오늘 날, 우리 사회는 이 빵의 문제를 급선무로 해결해 줘야할 사람과 인문학적 소양이 필요한 사람. 이 둘로 극명하게 갈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나는 가난한 사람이나, 부한 사람이나 다 같이 인문학적 소양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저자는 인문학을 굳이 공부하지 않아도 사는 데 지장이 없다고 했다. 물론 그것은 맞는 얘기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인문학을 평가절하할 것은 뭐가 있는가? 저자는 일생을 바쳐 그 어려운 공부를 했으면서 말이다. 

처음과 나중의 달랐던 강연회 

저자는 그러면서 수를 쓰려했는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래도 인문학을 해야한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야 말로 진짜 인문학을 할 사람이라고. 솔직히 사람은 빵의 욕구가 채워지면, 그땐 또 다른 곳으로 눈이 돌아가게 되어 있다. 그중엔 건전한 것도 있지만 불건전한 것도 있다. 그런 것에 마음을 빼앗기느니 인문학에 입문하면 좋지 않은가? 

아무튼, 그날은 뭔가 딱히 정리된 느낌은 없지만 뭔가의 생각할 꺼리는 가지고 그 자리를 떠날 수 있어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저자가 다소 나에겐 벅찬 느낌이긴 하지만, 처음 나의 얄팍한 기대 보다 묵직한 뭔가를 얻은 느낌이었다. 같이 간 지인 역시 나와 같은 느낌이었던 모양이다. 처음엔 저자의 책에 그다지 관심을 안 보이더니, 너무 좋아하는 것 같아 현장에서 책을 선물했다. 좋은 강연을 한 저자에게 감사한다.                     
                

   

(같이 간 지인이 찍은 골목 사진 한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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