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편하지 않은 것은 

                 살고 있는 것이 아니리니  

                                     마음에 

    휘몰아치는 눈발을 만나지 않는다면 

                살고 있는 것이 아니리니 

                       ([찬란] 시인의 말) 

 

 

[끌림]의 에세이 작가로, [바람의 사생활]의 낭만적인 시인으로 나의 책장 가운데 늘 놓여있었던 '이병률'시인의 신작은 단 1초의 지체도 없이 내 책상으로 배달되어 왔다. 난, 첫 페이지를 펼치곤 '아...' 하는 탄식과 함께 책장을 덮어 버리고 말았다. 

시를 읽는 다는 것은 무척이나 불편한 행위임을, 하지만 그 휘몰아치는 눈발을 불편하게 헤쳐나가지 않으면, 살아 있는 것이 아님을, 찬란한 생을 위해선 그 불편을 감당해야만 함을 알기에 쉽게 페이지를 펼치기가 힘들었다.  

예술가의 임무는 우리의 삶을 끊임없이 불편하게 해주는 것임을, 독자는 그 고통을 즐기는 것임을 알기에, 아파할것을 알면서도 다음장을 넘길수 밖엔 없었다.  

 단연코, 지금껏 읽어본 시집 중에 손꼽을 정도로 술술 읽힌다. 누구는 시집은 아끼고 아끼어 문장하나 구둣점 하나 아껴서 찬찬히 먹어야 한다고 몇달, 혹은 몇년에 걸쳐 읽기도 하지만, 따끈따끈한 햇밥의 보슬보슬함을 사랑하는 나로서는 일필휘독해야만 하는지라 무섭게 읽어 나갔다.  

 히브리어처럼 알수 없고, 암호처럼 풀수 없던 그 수 많았던 시 읽기의 좌절 전에 이 책은 진작 나왔어야 했다.  

 깊고 어려운 것을 쉬운 말로 풀어내는 것은 대가만이 할수 있는 것인데, 이미 이병률은 어느 경지에 오른듯 했다.  

 정말 간만에 시읽기의 쾌감을 전해준 그의 낭독은 어떠할까, 설레는 맘으로 길을 나섰다. 

 그와 함께 한 그 불편함의 쾌의 순간을 즐기면서 몇자 적어본다.

 

* (이병률) 첫 시집은 발표하고 나서 막막했어요. 지금은 하는 일(출판사)이 있어 이상하게 아무런 느낌이 없어요. 미래에 대해 차분하게 생각하게 된달까 그래요.  

* (이병률) 세상을 보는 데는 타고난 천성이 있어 변화는 잘 안되는 것 같아요. 보시는 분의 생각에 달린거죠. 변화되었다면 그것은 저의 일부인 것이구요. 이번엔 눈치 안보고 시도한 시도 있었어요. 생활, 사람대하는 것 이런것은 이전보다 달라진것 같아요. 덜 불안하달까. 이전엔 힘들었던 문제를 넓게 생각해서 품을수 있어진것 같아요.  

 

[기억의 집]  

기억을 끌어다 놓았으니 산이 되겠지 

바위산이 되겠지 

여름과 가을 사이 

그 산을 파내어 동굴을 만들고 기둥을 받쳐 깊숙한 움을 만들어 

기억에게 중얼중얼 말을 걸다 보면 걸다 보면 

 

시월과 십일월 사이 

누구나 여기 들어와 살면 누구나 귀신인 것처럼 아늑하겠지 

철새들은 동굴 입구를 지키고  

집이 하나로는 영 좁고 모자란 나는 

해가 밝으면 동굴을 파고 파고 

그러면 기억은 자꾸자꾸 몰려와 따뜻해지겠지 

 

그 집은 실뭉치 같기도 하고 모자 같기도 하며 

어쩌면 심장 속 같기도 하여서 

겁먹은 채로 손을 푹 하고 찔러 넣으면 

보드랍고 따스한 온기가 잡혀와 아찔해진 마음은 

곧 남이 되겠다고 남이 되겠다고 돌처럼 굳기도 하겠지 

 

그 집은 오래된 약속 같아 

들여다보고 살고도 싶은 여전히 저 건너일 것이므로 

비와 태양 사이 

저녁과 초저녁 사이 

빛이 들어 마을이 되겠지 

 

그렇게 감옥에 갇혔으면 하고 생각한다 

감옥에 갇혀 사전을 끌어안고 살거나 

감옥에 갇혀 쓸데없는 이야기나 줄줄이 적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 기억하는 일 말고도 

무슨 죄를 더 지을 것인가를 생각한다 

성냥을 긋거나 

부정을 저지르거나 

거짓말이라도 해야 하는 건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세상을 끊는 일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또 태어나야 할 거라고 생각한다 

 

 

 * (이병률) 여행을 가서 시를 생각하곤 해요. 튀니지 사막에서 기다릴 시간이 있었는데, 동굴에 가보았죠. 햇빛이 따가웠거든요. 그곳에서 딱히 할일이 없기에 먼저 다녀간 사람들의 흔적을 보고, 깡통을 집어오고 그랬죠. 시적이잖아요. 이런 막연한 느낌을 가지고 살다가 어느날 문득 써야 겠다라는 순간이 오면 쓰곤해요. 예민하신분은 눈치 채셨겠지만, 중간에 조가 좀 바뀌죠. 밤새 쓰고 회사 직원인 시인 이영주에게 읽어보라 건넸어요. 괜찮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마무리 할수 있었죠.  

* (김민정) 산문 보고 광화문서 일산까지 달려가 무턱대고 만났어요. 병률오빠가 방바닥에 앉고 제가 컴 앞 의자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했죠. 어디를 여행다녀왔다며, 어느 나라를 찝어도 다 다녀온거에요. 참 대단하더군요. 지구본을 돌리면서 막 찍어대는 기분이었어요. 참 식물성의 인간이에요. 함께 울기도 했고, 많이 아픈적도 있었어요. 좀 둔해서 그런척을 전혀 안해요. 무슨말을 건네도 다 알거 같고 그런 느낌이죠. '찬란' '봉지밥' 이런 거는 이제 제가 못 쓸듯해요.  

* (김근) 등단작을 보고 이사람은 도대체 누군가 했어요. 파리거주중이라는 약력도 그랬죠. [인기척]이라는 시가 좋아서 한동안 외고 다니고 했어요. 열렬히 사랑하다 헤어진 누군가의 기억이 피부의 어딘가에서 되살아난 아련한 쓸쓸함이 묻어났어요. 제가 가지지 못한것에 대한 부러움 같은 것이 있어요.  

* (김민정) 등단때 사진이 기억나요. 어머 시인이 잘생겼네 했었죠. 유독 한편이 아른거리지 않고, 시집 전체가 아른거려요. 어디를 펼쳐도 될듯한 말이죠. 눈물의 넓이를 줄인듯 해요. 전 아프리카에 벌거벗고 돌아다니는 아이 같은데, 무슨 북유럽 같잖아요. 고급스럽고, 차이가 있죠. 

 

[얼굴을 그려달라 해야겠다]   

세상 끝에 편의점이 있다니  

무엇을 팔까  

 

장화를 팔까 

얼음 가는 기계를 팔까 

이 여름 냄새를 팔까 

 

여즉 문을 닫지 않았다면 

그림을 그려달라고 해야겠으니 

생각나는 한 사람 얼굴을 그려달라고 해야겠으니 

도화지가 있느냐 물어야겠다 

 

사람은 가장 사랑했던 사람의 얼굴로  

다시 태어난다 하니 

 

주인게게 그림을 그려달라 해야겠다 

얼굴 그림을 그려달라 해야겠다 

 

그 그림이 나의 얼굴이거나 

혹은 한 사람의 옆얼굴이어도 

 

얼은 영혼이란 뜻이라니 

굴이라는 말이 길이라는 뜻이라니 

 

세상 모든 나머지를 파는 편의점에 가서 

 

조금만 틈을 맞추고 와야겠다 

세상 끝을 마주하다가 낯을 씻고 

아주 조금만 인사를 하고 와야겠다 

  

[내가 본 것]  

 눈에 뭔가 들어가 있다. 괜히 필요하지도 않은 눈물을 흘렸고 그것도 모자라 인공눈물까지 샀다. 병원은 커다란 안경을 통해 내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유리 조각이 박혀 있다고 했다. 

 기다란 바늘이 눈으로 들어왔다. 손가락으로 두려움을 움켜쥐는 사이, 눈은 수면처럼 출렁한다. 빛난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유리 조각이 바늘 끝에 끌려나오고 있었다.  

 눈 내리는 하얀 밤을 잊을 뻔하였고 그 거리의 무성한 힘들의 기억을 잃을 뻔하여서 나는 말했다. 그 유리 조각을 저에게 주세요.병원은 작은 병 속에 

 유리 조각을 담아주었다. 

 조각은 날카롭기보다 푸르렀다. 박히기는 좋으나 찌르기엔 부족한 조각은 턱으로 밝기를 받치고 있었다. 여태까지 본 모든 것을 기억하겠다는 것은 살아 온 것보다 본 것이 더 단단하리란 것을 믿기 때문일 것이나 

 유리 조각은 내가 본 모든 것을 가지고 갔다. 

 나는 불필요한 부위를 영원히 떼어내기라도 한 듯 모호하게나마 마음이 간절해졌다. 

 

 * (김민정) 예전에 같이 오빠랑 샤브샤브 먹다, 눈이 아프다고 병원에 갔던 기억이 떠올랐어요. 저도 사랑니를 뽑아 달라고 한 적이 있어요. 엄마는 지질한 자기애 때문에 안된다며 혀를 찼죠. 과산화수소에 넣어두니 너무 이뻤어요. 색깔이 빠지면 정말 그래요. 사귀는 남자에게 줘서 이젠 2개밖에 안남았죠.

 

[불편]    

어젯밤 구걸하던 이를 찾습니다. 

내가 완강히 지나쳤으며 왼쪽 곁을 지나친 자입니다 

 

어둔 밤 나에게 손을 내민 것인데 

큰 칼을 내 심장 깊숙이 집어넣을  것 같아 

피하려는 기색 감추느라 

그가 다 지나간 다음에야 미친 듯 심장이 뛰었던 이 

 

그를 피하고서야 그가 멀리서 왔다는 걸 알아차립니다 

 

어젯밤 내 왼쪽 곁으로 스쳐 지나간 이를 찾습니다 

 

심장을 가라앉히고 어둠 때문에 어슷해 보이는 길 한쪽에 

차에 치여 죽은 고양이 주변으로 몰려든 어린 고양이들 

시체를 혀로 핥으며 감정을 나구고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주지 못했습니다 

하여 여태 서늘한 내 왼쪽을 데워줄 

어제 늦은 밤길 구걸하던 이 

맵게 손목을 잡아 골목으로 끌고 가 

이 어쩔 줄 모르는 삶이 방도를 조용히 물을 

그 새처럼 마른 이 

못 보셨습니까 

 

 * (이병률) 시인은 슬프게 태어나는 것 같아요. 슬픔의 함량이나 농도가 높아요. 리듬을 그쪽으로 몰아가거나 시가 찾아왔을때 확 몰아서 쓰기도 해요. 누군가 와서 써준것 같이 말이죠. 저를 운전하는 누군가가 쓰는게 아닐까 생각하곤 해요. 그때를 기다리고 기다리다 한번에 휙 쓰여지기도 해요. 어려운 한줄이 오고 가끔 꺼내어 보다가 뼈를 갖추고 살을 입혀 보며 기다렸다 쓰면 풍성해질때도 있어요.   

* 시는 어렵지 않다고 하면 매 맞을거에요. 혼자 중얼거리는 예술의 형태죠. 좋아하기도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렵고, 나누기도 어려워요. 또 시인이 이해한다고 해서 자기 것이라고 노래하는 것도 아니죠. 자기가 알고 싶은 시인이 누군지 잘 찾아보고, 집중해서 읽다보면 다른 시인의 글도 읽게되고 그러면 좀 시 읽는 것이 쉬워지지 않을까 해요.  

* 영화를 보면서 사진쪽으로 옮겨가고 했어요. 이런 수줍게 혼자 한 작업들이 시에 도움이 된듯 해요. 영화적인 한 장면같은 요소가 많아요. 머릿속에는 너무나 선명한 편집, 순서가 있어요. 영상적인 무엇, 느낌들을 물고 늘어지곤 해요.  

 

[대림동]  

 

구멍가게는 사라지고 없었다 

골목길을 들어서는데 좁은 골목 한가운데 억지스런 낮달이 서성이고 

집집마다 빨래 마르는 냄새가 하늘하늘 

담벼락에 위태로이 올려둔 양동이에 고구마 순이 자라고 있었다 

사오년 전 내가 살던 곳  

눈 속 낭만을 뜷고 달리는 전철을 올려다봤는데 

그때 옆에 있던 누구에게 낮게 무어라 속삭였던 것도 같아 그때를 볼려고 불을 켰는데 

햇빛은 찬란하고 나를 둘데가 없다 

시를 생각하느라 여기까지 왔다 

 

 * (이병률) 대림시장. 옥탑방에서 한동안 얹혀 살았어요. 옷방에서 시를 쓴적도 있어요. 그래서 공간에 대해 절실하고 예민해요. 2호선 전철타고 가다보면 높이 지나가는 주택들이 보여요. 죽기전에 꼭 한번 살아봐야지 했어요. 헌데 도둑이 들어 이사를 하게 되었는데 바로 그 대림동 옥탑방 집에서 4년정도 살게 되었네요. 시적인 시간들이었죠. 습작도 많이 했고, 분실을 하기도 했고, 여러가지 일이 있었어요.   
  

* (이병률) 제 시를 잘 안읽어요. 밤에 쓴 일기 다음날 보면 머쓱한 것 처럼 말이죠. 지금도 대림동 자주갑니다. 걷다가 또 살고 싶기도 하고 해요.  

 

[바람의 날개] 

 

산에 올라 두리번거렸다 

나무 그림자가 사라질 때까지 걷고 걸어 나무 하나를 찾았다 

나무를 찾고 산의 마음에 표시를 하였다 

반을 얻었다 

 

다시 나무 하나를 찾았다 

하지만 아직은 서쪽으로 더 자랄 일이 있는 나무여서  

나무에 돌을 매달고 다시 산의 마음에 표시를 하였다 

 

일 년쯤을 기다려 두 나무에서 큰 가지 하나씩을 베었다 

사개를 맞대고 질빵을 걸으니 

반은 절반을 마주 보며 어깨가 되었다 

어깨 위에 또 하나의 어깨를 메고 

그 위에 세상을 얹고 걸어나갔다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세계를 지났다 

 

한번 얻은 지게는 버릴 것이 못 되었다 

어깨를 자른대로 지게는 나를 따라왔다 

내 살을 지고 내 터를 지고 풍경마저 한몸처럼 옮겼다 

 

누구나 죄진 사람같이 지게로 태어나 

죄처럼 업혔던 시절이 있었다 

 

업힌 것이 날개인 줄 알고  

퍼드득퍼드득 살려고도 하였다 


* (김민정) 오빠를 모를때는 왜 이게 좋은 지 몰랐어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어두워 지면서 좋아지네요. 그건 뒤끝이 아름다움, 아련함 같은건데 느끼셨으면 좋겠어요. 밥을 참 잘하는데, 요리가 먹고 싶네요. 

* (김근) 이 시집 때문에 찬란해 지셨으면 좋겠어요. 따뜻한 감정 가지고 돌아 가셔서 오늘밤은 조금 쓸쓸해져도 좋을듯도 해요.  

 

  

시는 문자로 읽을 때와, 독자로 소리내어 읽을때, 또 낭독을 들을때 사뭇 느낌이 다르곤 하다. 그중 최고는 단연 낭독이다. 노래가 시이고, 시가 노래이지 않은가. 시 낭독의 밤은 멋들어진 콘서트이자, 오페라이자, 뮤지컬이다. 낭독은 시인이 노래하고, 독자들이 코러스를 하는 살아 숨쉬는 또 하나의 예술인 것이다.  

이병률의 목소리는 그의 시와 참 닮았있다. 차분하면서도 또렷하고, 느릿하면서도 템포가 있다. 물론 그 깊은 곳엔 시인의 따스함이 있다. 서글서글한 미소와 단아한 품세가 참으로 섬세하고 식물성인 그의 시를 자꾸 떠올리게 한다.  

2010년 이른 봄. 

홍대에서의 아련한 싯구들을 과산화수소에 담아 이쁘게 방 한켠에 놓아 두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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