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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무나 시인이 될 수는 없지만, 누구나 詩人이 될 수는 있다.


  시는 늘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한 번쯤은 시라는 것을 긁적거렸을 것입니다. 기억을 되짚어보면, 학창시절 첫사랑을 품었던 순정을 주체할 수 없어 일기장에 혹은 예쁜 편지지에 한 글자 한 글자 정성껏 써내려가 본적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기억이 없나요? 없으면 아무래도 바보라고 불러야겠죠.

 

  제가 고등학생 때 무척 감동 깊게 읽은, 아니 감동 그 자체였던 시집 한 권이 있습니다.《손끝으로 원을 그려봐 네가 그릴 수 있는 한 크게 그걸 뺀 만큼 널 사랑해》라는 원태연 시인의 시집인데요, 흔히들 연애시라고 부르더군요. 그 때는 그 시집에 담긴 시구 한 구절구절이 그렇게 제 마음을 울리고 때리고 감동을 그야말로 들이 붓더군요. 여러분들도 사춘기 시절 저 같은 추억이 한 번쯤 있었을 것입니다. 없었다면 자신이 정상인지 의심해 봐야하지 않을까요?

 

  그 때 제 일기장에는 유치찬란한 사랑의 노래가 가득했었답니다. 일기라고는 그 전에도 그 이후에도 한번을 써본 적이 없는 제가 일기도 꼬박꼬박 한 달쯤을 제 사랑의 시와 함께 써 내려갔던 기억이 저를 지금 부끄럽게 하기도 하는군요.

 

  제가 왜 이런 이야기를 창피함을 무릅쓰고 이렇게 털어놓느냐 하면, 시라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렵지도, 시를 쓴다는 것이 무슨 특별한 것도 아니라는 말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시가 왜 어려울까? 시를 쓰려면 특별한 재능이 필요한가? 하는 의문을 갖고 이야기를 풀어가 보겠습니다.

 

  먼저 위의 질문을 해결하기 전에 우리는 그렇다면 시가 과연 무엇일까? 하는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괜히 따분한 시론을 늘어놓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제가 여러분들께 자세히 말씀드릴 만한 능력이 되지 못하니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생각하는 시는 이렇습니다. 그것이 꼭 정답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틀린 얘기는 아니니까 잘 한번 들어보세요.

 

  여러분들이 한 번도 읽어보지 않았지만, 많이 들어본 동양의 경전 중에 <<시경(詩經)>>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거기에 이런 말이 있어요, “시는 마음이 흘러가는 바를 적은 것이다. 마음속에 있으면 지(志)라고 하고 말로 표현하면 시가 된다.” 이 글귀를 보고 뭔가 느껴지는 것이 없나요? 저는 외마디 비명과 함께 유레카를 외치듯이 ‘야 시가 별게 아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경>>의 말대로라면 시는 마음에 있는 것입니다. 마음속에는 우리의 생각과 느낌과 감동과 기쁨과 슬픔과 아픔과 그리움과 기타 등등 여러 가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을 말로 표현하거나 글로 쓰면 시가 된다는 얘기인 것이죠. 간단하지 않습니까? 시는 이렇게 간단한 것입니다. 이것이 시의 전부는 아니지만, 시에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다시 말해 시의 출발이 되기 때문에 우리가 시를 쓰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한 가지를 기억하고 갑시다. “시는 마음이 흘러가는 바를 적은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의 마음속 감정과 정서를 있는 그대로 적어내면 시가 되는 것이죠. 이것을 알면, “시가 왜 어려울까?”라는 의문에도 쉽사리 답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를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보통 시를 읽으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앞에서 시는 “마음이 흘러가는 바를 적은 것”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을 읽으려고만 하는 사람들은 자연히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음이 흘러가는 바”는 읽어서는 안 되고, 느껴야 하는 것이죠. 시가 어렵다 어렵다 하는 사람들은 시를 느끼고 그 안의 감정과 정서를 찾아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시를 읽고 분석하고 주제가 무엇이고, 어떤 표현방법들이 사용됐는지를 파악하려고만 합니다. 그러니 자연히 어려울 수밖에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김소월 시인의 <엄마야 누나야>를 같이 보겠습니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랫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이 시의 주제가 무엇일까요?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얼마 전 타계하신 김춘수 시인도 모른다고 하더군요. 김춘수 시인의 말을 빌면, 이 시는 “메시지가 없고 정서만 있”다고 합니다. 제가 볼 때에도 이 시는 머리보다는 가슴으로 울리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이 시를 알고 혹은 애송하고 있다면 이 시에 담긴 표현방법이 어떻고, 주제가 어떻고 해서가 아니라, 읊으면 읊을수록 살아가는 가슴속의 어떤 울림 때문이 아닐까요?

 

  이렇듯 시는 먼저 가슴으로 느껴야 합니다. 마음은 읽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에 속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시는 하등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물론 가슴으로 느낄 수 없는 그런 시도 있습니다. 예컨대, 30년대의 모더니즘 시들이 그러하고, 현대의 해체시 등이 그러하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시는 우리가 가슴으로 느끼는데 충분합니다. 지금부터는 읽으려 하지 말고, 느끼고 감동을 찾으려 하십시오. 그러면 시가 충분히 쉬워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시를 쓰는데 있어서는 어떠하겠습니까? 시는 꼭 재능이 있는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것일까요? 이미 예측하고 계시겠지만 제 대답은 No입니다. 위에서 어려운 <<시경>>의 구절을 운운해 가면 말씀드렸듯이, 시는 “마음이 흘러가는 바를” 적으면 되는 것이니까요. 그렇다면 왜 우리는 시를 쓰는 것에 어려움을 느낄까요?

 

  그것은 우리가 솔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감정과 정서를 그냥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표현해 내야하는데, 자꾸 멋있는 말, 분위기 있는 말, 뭔가 품격이 있어 보이는 말만 자꾸 고르다 보니, 시 쓰기가 자꾸 어려워지는 것이죠. 단언하지만, 그것은 어려워지는 것이 아니라, 전혀 시가 아닌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왜냐고요? 계속 말하지만, 시는 “마음이 흘러가는 바를 적은 것”이기 때문이니까요. 자꾸 꾸미다 보면 자기 마음은 어디로 훌쩍 달아나 버리고 가짜만 남게 되니 그게 어디 시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박목월 시인의 <불국사(佛國寺)>라는 시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흰 달빛 

    자하문(紫霞門)

 

    대웅전(大雄殿) 

    큰 보살


    바람 소리 

    솔 소리 

   

    부영루(浮影樓) 

    뜬 그림자


    흐는히 

    젖는데 

 

    흰 달빛 

    자하문

 

    바람 소리 

    물 소리


  이 시는 불국사의 풍광들을 있는 그대로 나열해 놓고 있습니다. 보고 느낀 것들을 아무런 꾸밈과 수식 없이 늙어놓고 있는 것이죠. 어떤 것이 마음속에 들어와 무언가 감정과 정서를 자극할 때, 그것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풀어내면 한 편의 시가 되는 것이지, 그것을 이리저리 꾸미고 멋진 말들로 치장해버리면 처음의 감정과 정서는 온데간데없이 빈껍데기만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시를 쓰는데 재능이 있어야만 쓰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불세출의 천재만이 시를 쓰는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시를 쓰는 재능이 있다면 더 좋은 시를 쓸 수 있기는 할 것입니다. 솔직히 그 재능이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을 얼마나 잘 보는가, 자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얼마나 잘 표현해내는가, 이런 것들이 아닐까 합니다. 그런 것이라면 타고나지 않았더라도 얼마든지 길러낼 수 있습니다. 일기장에 끄적이던 한 줄 한 줄이 하나의 시가 된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자신의 느낌과 감정을 작은 수첩 한 귀퉁이에 틈틈이 적어두다 보면 자연스레 그런 능력이 길러질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렵다고 생각하고 “나는 시란 것하고는 친해질 수가 없어”하며 지레 겁을 먹고 달아나 버리는 어리석음을 버려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의 이야기를 정리해 보겠습니다. 여러분들은 장차 국어교사가 되실 분들입니다. 헌데 이 중의 많은 사람들이 시를 어렵게, 그리고 따분하게 생각하고 있는 듯 합니다. 평생 시 한 편 써보지 않고서 국어교사가 된다는 것이 어쩌면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요? 어쨌거나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해보기도 합니다.

 

  제가 중 고등학교를 다닐 적에 받은 국어수업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거의 기억이 없지만)은 중학교 2학년 때 어느 초가을 햇살이 따사하게 비칠 무렵 국어 시간에 선생님께서 대뜸 시 한 편을 낭송해 주셨을 때입니다. 지금 그 시가 무엇인지는 잘 생각나지 않지만, 그 이후로 제가 줄곧 시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 후로 학교 백일장에서 상은 도맡아 타기는 했지만 지금은 시 쓰는 것이 누구보다도 어렵다는 것을 실감하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 쓰기를 그만둘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시는 내게 기쁨도 주고 때로는 위로도 해 주는 좋은 친구와 같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시가 절대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시는 뛰어난 재능이 있는 사람만이 쓰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강조했습니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할 것은 “시는 마음이 흘러가는 바를” 있는 그대로 적어내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여러분들이 시를 써본다면, 여러분은 아주 좋은 친구 한 명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멋진 국어교사가 될 수도 있으니, 일석이조란 말이 이럴 때 쓰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시는 누구나 쓸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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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사>

   한국문학통사 1~6

   조동일 선생님의 <한국문학통사>는 국어교육을 전공하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섭렵해 두어야 할 책이다. 각 시대별로 체계적이며 핵심을 찌르는 문학사 서술은 가히 조동일만이 할 수 있는 엄청난 업적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문학사에 대한 충분하고 폭넓은 이해는 국어교육 전공자로서 필수이다. 참고로 국어교육과를 졸업한 사람의 졸업장에는 전공이 '문학사'임을 밝혀둔다. 1~2학년 방학때 큰 맘 먹고 읽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국문학사

  김윤식 교수와 김현 교수의 업적이다. 한국 현대문학사가 체계적으로 기술되어 있으며, 현대문학사의 정론이라 할 수 있다. 반드시 읽어야할 책임에 틀림없다.

 

 

   한국소설사

  한국현대소설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는 책.

 

 

  한국현대시문학사

  젊은 비평가들의 업적이다. 가장 최근에 나온 책으로 현대시문학사를 쉽게 정리해 볼 수 있다. 하지만 비판적으로 읽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이들의 말이 정론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젊기 때문이다.

 

 

<문학 일반>

  한국문학의 이해

  우리나라 문학에 대해 장르별 접근으로, 간략한 설명들이 들어있다. 기본서로서 한국문학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한국 구비문학의 이해

  구비문학에 대한 체계적인 서술과 쉬운 설명, 구체적인 자료제시 등이 돋보인다. 각 분야의 최고 권위자들이 함께 이루어낸 업적이다.

 

 

  문학이론입문

  다소 어렵지만 꼭 한번은 읽어두어야 할 책이다. 현대문학이론들이 이만큼 체계적으로 서술되어 있는 책이 거의 없다.

 

 

  문학비평용어사전

  문학에서 사용되는 용어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4

  둘 말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문학과 예술, 나아가 세계의 문화를 읽고 내는 것은 국어교육만이 아니라 지성인으로서 반드시 알아야할 것들이다. 다소 딱딱하고 지루한 내용일 수 있지만, 마음먹고 달려든다면, 충분히 빠져들 수 있는 유익한 책이다.

 

 

<국어학>

  국어학개설

  국어학의 가장 기본적 입문서. 국어학 전반에 대한 개괄적 설명이 그리 어렵지 않게 서술되어 있음. 저자 이익섭 선생의 이 책은 현대 국어학의 정설이라고 할만 함.

 

 

  학교문법론

  이 책은 교육문법, 즉 학교에서 가르치는 문법[학교문법]에 대한 체계적으로 분석 기술하고 있음과 동시에 그에 대한 저자의 견해와 비판이 담겨 있다. 국어교육 전공자로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관문. 단 학교 문법의 내용에 대한 대략적인 이해가 된 상태에서 이 책을 보는 것이 효과적.

 

  국어의 역사

  국어사에 대해 이해가 쉽게 설명되어 있으나, 비판적인 읽기가 필요.

 

 

  표준중세국어문법론

  중세국어 문법에 대한 체계적인 서술이 돋보임. 현재 간행된 중세문법서 중 단연 최고의 정설이라할 수 있음. 독파하기에 다소 난해하고, 고문 등에 대한 어느 정도 이해가 필요함.

 

 

  문법교육의 이론과 실제

  현행 학교 문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있으며, 이에 대한 문제점과 보완 설명이 친절히 기술되어 있음. 그 구성체계가 다소 빈약한 점이 있으나, <학교문법론>과 함께 읽으면 보다 효과적.

 

 

 

 

 

 

<국어교육학>

  국어교육학 원론

   국어교육학 이론의 엑기스를 모아놓은 책이다. 국어교과학의 토대가 될 수 있는 이론들, 7차 교육과정에 반영된 이론적 배경들을 실어놓고 있다. 다만, 우리 국어교육학의 이론 정립이 모자라 다양한 외국의 자국어 교육 이론을 도입하고 있어 다소 어수선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한 권의 책으로 묶으려다보니, 각각의 이론들을 맛보기 식으로만 간략히 나열하고 있고, 편집체계가 조잡하고, 많은 오탈자 등이 보여 계속된 수정 보완이 필요하다. 그러나 아직까지 이 만한 개론서가 없다는 것이 울며 겨자먹기식으로라도 이 책을 보게되는 이유가 된다.

 

  국어과 교수 학습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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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지 2005-12-20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공감할 만한 목록이군요. ^-^

멜기세덱 2005-12-27 13: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할 만한 목록이긴 하지만 共讀하기는 참 쉽지 않은 목록이기도 하죠. ㅋㅋ

2007-10-31 12: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호호아줌마 2008-12-30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책들이네요
 
체 게바라 평전 역사 인물 찾기 10
장 코르미에 지음, 김미선 옮김 / 실천문학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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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0년 초, 우리 사회는 이상야릇한 열풍을 경험했다. 세번째 천년의 시작과 더불어 찾아온 이 태풍은 자본주의의 망망대해에 거대한 물결로 온 사회에 휘몰아쳤다. 그것은 다름아닌 '체 게바라'의 붉은 물결이었다. '체 게바라'는 과연 누구인가? 혁명의 상징과도 같은 빛나는 별이 박힌 베레모, 아메리카 민중 해방을 위해 끝없이 제국주의와 싸운 그의 게릴라 활동을 보여주듯 길게 풀어헤친 장발, 그가 언제나 입고 다녔던 게릴라의 자존심 군복. 이러한 모습은 온 거리의 포스터에서, 이 나라 청년들의 티셔츠에서, 상점에서, 그리고 서점에서, 책에서, 이곳 저곳에서 우리에게 전시되고 있었다.

  이 책 <체 게바라 평전>은 이 나라에서 이 물결을 선도했다. 사실, 이 물결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우리나라 사회가 이 공산주의자에 대해 관대할 수 있기 이전에 이미 서구 유럽에서는 '체 게바라'라는 인물이 엄청난 물결로 밀어닥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이전 체는 남미에서 영웅이었고, 신격화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이 체 게바라는 어떤 인물이기에 그러한가?

  체 게바라는 아르헨티나 태생으로 의학도였다. 하지만 그는 쿠바의 혁명 전쟁에 피델 카스트로와 뜻을 같이하여 승리를 이끌어낸 혁명가이자 게릴라였다. 그는 쿠바의 혁명 전쟁에서 승리를 이끈 일등공신으로서 쿠바 국립은행 총재, 산업부장관, 그리고 외교관에 이르기까지 한 인간으로서, 혁명가로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 만족하고 안주하지 않고, 모든 것을 버리고 다시 혁명가로서 아프리카의 콩고, 남미의 볼리비아 등에서 게릴라 활동을 하다 결국 죽음을 맞는다.

  체 게바라는 마르크스주의자요, 공산주의자이며, 사회주의자이다. 그는 중국의 마오쩌둥을 존경했던 인물이며, 민중 혁명을 위해 총을 든 혁명가요, 게릴라였다. 그런 그가 서구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반공의 이데올로기의 잔재가 아직도 남아 꿈틀거리고 있는 이 사회에서 강한 태풍을 일으킨 이유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솔직히 나는 그 물결을 살짝 피해왔다. 사실 내가 그 물결을 피한다고 해서 피할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단지 이 '체 게바라'의 물결 한 가운데로 들어가고 싶지 않아서, 아니 그것이 두려워서 이 책 <체 게바라 평전>을 멀리했던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지만 사실 나는 이 물결을 결코 피할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온 거리에 나붙은 포스터에서, 유행처럼 입고다니던 티셔츠에서 나는 이 인물을 대면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술집 이름에서까지.

  체가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거대한 물결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참 아이러니다. 체 게바라와 자본주의는 절대 공유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자본주의의 거대한 바다는 이 혁명 전사 체 게바라까지도 집어 삼킨 것이 아닌가? '체 게바라'는 이제 자본주의 사회의 한 상품이 되었으며, 유행이 된 것이다.

  이 상품화된 유행이 되어버린 체를 나는 거부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반공의 교육에 세뇌되어 막연한 반감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지금 체 게바라를 읽게 되었다. 왜 이 인물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체가 그토록 벗어나고자 싸웠던 제국주의 문화에서 상품화되고 열광을 일으키고 유행이 되었는지를, 내가 가지고 있던 반공의 이데올로기의 거미줄을 이제는 조금씩 걷어버리고 싶어서, 나는 그를 읽게 되었다.

  나는 이 책을 읽어 가면서 체라는 인물이 왜 이 시대에, 이 사회에, 이 문화에 거대한 물결, 거대한 태풍, 거대한 파도와 같이 몰아쳤는지 나름대로의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말하자면, 체는 더이상 혁명 전사도 아니요, 마르크스주의자도 아니요, 공산주의자도 아니요, 총을 든 게릴라도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감히 주장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체는 아르헨티나의 그리 부유하지는 않지만 넉넉한 집안에서 귀한 아들로 태어나 의학을 전공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그가 늘 안고다니던 천식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다방면에서 뛰어난 재능을 보이기도 했다. 그가 혁명가가 된 가장 큰 계기는 대학 졸업을 앞두고 친우와 함께 한 남미여행 때이다. 그가 살아가고 있는 아메리카의 민중들의 삶과 그 고통과 아픔을 몸으로 체험하고 그는 마음속에 이 민중들의 아픔을 위해 싸워야겠다는 의지를 다지게 된다. 그리고 그의 두번째 여행에서 쿠바의 카스트로와의 만남을 계기로 쿠바의 혁명전선에 가담함으로써 혁명가의 삶을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혁명가로써 볼리비아의 한 시골 마을 학교에서 총살됨으로써 그 삶을 마감하게 된다.

  이런 체의 삶에서 우리에게 주는 바는 더이상 '민중 혁명'이 아니다. 더욱이 이 시대 청년들에게는 이런것은 전혀 먹혀들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이 시대 청년들을 열광케할 다른 것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내가 볼 때 '열정'이다. 그는 혁명가 이전에 '열정'을 가득담은 한 젊은이였던 것이다.

  체 게바라 아니,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라는 한 인간의 열정이 이 땅의 청년들에게 강하게 어필한 것이 아닐까? 그의 의학도로서의 모습, 다재다능의 면모, 멀고 험한 고생길이 분명한 모험의 감행, 가족에 대한 사랑, 친구와의 우정, 부하들을 아끼고 배려하는 인간적 면모, 무엇이든 철저하고 완벽하게 이루어 내려는 집념, 민중에 대한 사랑, 혁명에 대한 끝없는 헌신 등등. 그는 무엇하나 하찮은 것이 없었다. 모든 것에서, 모든 일에서, 모든 생각과 삶에서 열정으로 살아온 인간 게바라였던 것이다.

  "우리 모두 리얼리스트가 되자. 그러나 가슴속에 불가능한 꿈을 간직하자!"

  그런 그였기에 그는 그가 그토록 혐오하고 타파하고자 하던 제국주의의 신식민사회의 청년들에게 깊은 꿈 하나 던져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이 지금은 '혁명'의 붉은 물결이 아닌 '열정'의 더욱 강한 물결로 말이다.

  체 게바라의 삶을 읽어가면서 나는 몇가지 점에서 그가 영웅이 될 수 있었고, 그의 삶이 많은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고 여전히 살아 숨쉬는 존재가 될 수 있었는지를 찾아낼 수 있었다. 앞서 말했지만, 그는 열정을 가지고 살았다는 점이 그 첫째다. 둘째는 그는 독서광이었다는 사실이다. 게릴라의 야전 생활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누구보다도 늦게 잠에 들었다. 이유는 물론 독서라는 사실. 그가 그토록 많은 역할을 그 누구보다도 잘 감당해 낼 수 있는 완벽한 영웅이 될 수 있었던 점도 어쩌면 이 점에서 연유하는지도 모른다.

  세번째, 그는 가족을, 친구를, 부하를, 민중을, 조국을 사랑할 줄 알았다. 언제 어디서나 가족을 생각하고 걱정하며, 친구와의 우정을 소중히 여기고, 부하들을 다스리고 명령만 하는 것이 아닌, 가르치고 인도함으로써 그들이 스스로 진정한 혁명가가 되도록 도움을 주며, 민중들의 삶의 고통과 아픔을 몸소 느끼고 그들과 같이 그 고통과 아픔을 나누고, 조국을 위해, 나아가 민중해방을 위해 삶을 바쳤던 체, 그는 이 땅의 모든 것을 사랑했던 것이다.

  네번째, 그는 자기를 돌아볼 줄 알았다. 이 책을 보면 그의 다양한 필적들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그의 게릴라 생활의 기록돌이 잘 정리되어 있다. 그는  그렇게 자신의 삶을 되돌아 보며, 반성하고 앞으로의 미래를 설계하고 계획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체 게바라였기에 이 땅, 이 나라 청년들에게 강한 열풍으로 다가온 것이 아닌가 한다. 이것은 자본가들의 눈에도 강한 상품성을 가진 매력적인 인물이었고, 이 사회가 이제는 아무리 체 게바라가 살아온다 하더라도 총을 들고 무작정 산 속으로 들어가 게릴라전을 펼쳐봐야 돈키호테로 봐주면 다행이요, 곧장 교도소아니면 정신병원으로 들어가야할 처지가 될 만큼 성숙(?)했기 때문에 체의 그 열정과 모험, 다이나믹한 삶 등을 박진감 있게 그려내고 있는 이 책에서 재미와 감동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나는 이 리뷰를 마무리하며, 그의 혁명정신과 투쟁, 사회의 변혁 등에 대해 그 중요도를 전혀 감안하지 않고, 단지 그의 열정만을 찾아내려고 했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체 게바라가 주는 한가지 금언 만큼은 우리에게 혁명의 진정한 의미를 이 21세기에 어떻게 펼쳐낼 것인가를, 그리고 우리들 마음속에 체 게바라의 뜨거운 열정과 정신은 무엇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지를 알려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세계 어디선가 누군가에게 행해질 모든 불의를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키웠으면 좋겠구나. 누구보다 너희들 자신에 대해 가장 깊이. 그것이야말로 혁명가가 가져야 할 가장 아름다운 자질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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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犧牲’의 詩的 形象化

 

Ⅰ. 緖論

 

  우리의 詩史에서 ‘희생’은 시적 주제로서 많은 시들을 통해 나타난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형기 시인의 「낙화」나, 한용운 시인의 여러 시들에서 ‘희생’을 노래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희생’이라는 것은 우리의 삶, 나아가 전 우주적 삶에서 반드시 필요한 요건이라고 할 수 있다. 어머니의 ‘희생’을 통해 자식은 성숙한 인간이 되고, 자연의 그것을 통해 인간들은 풍요와 번영을 누릴 수 있었다. 세상사의 많은 일들은 그 ‘희생’을 전제로 이룩된 것이라 하겠다. 이렇듯 우리의 현실 속에 ‘희생’이 있는 이상, 시적 주제로서 ‘희생’을 노래하는 시들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 분명하다.

  ‘희생’은 각각의 시들에서 다양한 성격의 ‘희생’으로 주제화된다. ‘희생’이 필요한 이유와 원인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며, 그것을 통한 결과와 모습도 다양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희생’이 주제화된 두 편의 시를 통해 그 ‘희생’이 어떠한 모습으로 다르게 형상화되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각각의 시를 분석적으로 독해하면서 ‘희생’의 시적 형상화가 어떻게 다른가를 확인하도록 하겠다.


 

Ⅱ. 本論

 

  “詩者持也, 持人情性”(劉勰,『文心雕龍』)이라는 말이 있다. “시에는 사람의 감정을 담고 있다”는 말이다. 모든 시에는 감정과 정서가 담겨있다. 여기서 살펴볼 두 편의 시에는 ‘희생’에서 비롯되는 감정과 정서가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이성복 시인의 「금빛 거미 앞에서」와 김혜순 시인의 「추수(秋收)」두 편의 작품을 차례로 분석하면서 ‘희생’의 시적 형상화를 대비해 보겠다.

 

1. ‘强要된 犧牲과 아픔’으로의 形象化 ― 이성복의 「금빛 거미 앞에서」

 

        오늘은 노는 날이에요, 어머니

        오랫동안 저는 잠자지 못했어요

        오랫동안 먹지 못했어요 울지 못했어요

        어머니, 저희는 금빛 거미가 쳐놓은

        그물에 갇힌 지 오래 됐어요

        무서워요, 어머니

        금빛 거미가 저희를 향해 다가와요

        어머니, 무서워요

        금빛 거미가 저희를 먹고

        흰 실을 뽑을 거예요

            - 이성복, 「금빛 거미 앞에서」,『남해 금산』, 1986.

 

  제목이 “금빛 거미 앞에서”이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금빛 거미”이다. ‘거미’는 많은 사람들이 싫어하는 곤충이다. 독거미의 공포감이나 그 잔인한 살인행위―먹이를 실로 감아 조이고 말려 죽여 먹는 그런 잔인한 행위―를 기억하기에 우리에게 ‘거미’는 매우 부정적 이미지로 고정되었다. “금빛 거미”는 그러한 ‘거미’의 이미지 덕분에 다소 아이러니하다. ‘금빛’이라는 색체 이미지는 정지용의「향수」에서 보이는 “금빛 게으른 울음”에서 보이듯 아름답고 환상적인 이미지로 기억된다. 그렇다면 ‘금빛 거미’는 모순형용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적화자는 여성이다. ‘이에요’, ‘했어요’ 등의 어투에서 우리는 시적화자가 여성임을, 나아가 어린 나이의 소녀나 처녀 정도일 것임을 추측할 수 있다. 시적화자의 상황은 매우 처절하다. “잠자지 못했”고 “먹지 못했”으며 그렇다고 ‘울지’도 못 했다. 게다가 시적화자는 “갇힌 지 오래 됐”으며 무서움에 떨고 있는 비참한 상황이다. “노는 날”에는 그저 ‘어머니’를 생각하고 마음으로 하소연할 뿐이다.

  이런 비참한 상황에 처한 원인은 무엇인가? 그 원인은 “금빛 거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금빛 거미”는 모순 형용이며 반어적 표현이다. ‘금빛’으로 치장된 ‘거미’를 생각해보면 아픔답다기보다는 환상적인 이미지가 강하게 떠오른다. 이것은 ‘거미’의 이미지를 한층 공포스럽게 부각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금빛 거미”의 상징적 의미가 무엇일지 궁금해진다. 마지막의 두 행에서 이 “금빛 거미”가 시적화자를 먹이로 하여 “흰 실을 뽑을” 것이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거미’에게 이 ‘실’은 삶의 필수 수단이다. 집을 짓고 먹이를 구하는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도구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금빛 거미”는 시적화자의 희생을 강요하여 취하는 것이다. 시적화자의 상황을 고려할 때 시적화자가 공장에서 착취당하는 노동자일 수 있다는 생각을 쉽사리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금빛 거미”는 시적화자를 착취하고 빨아먹는 악덕 자본가정도로 생각할 수 있겠다.

  이상을 정리해 보면 시적화자는 그 희생을 강요당하고 있다. 그 희생의 대가는 과연 무엇일지 알 수 없다. 시적화자는 희생을 강요당하면서도 분노하고 저항하지 못하고 있다. 울지도 못하고 누구에게 말할 수도 없었다. 시적화자는 그저 마음속으로 울며 어머니를 그리워하면서 하소연하고 있는 것이다.

 

2. ‘自然의 獻身的 犧牲’으로의 形象化 ― 김혜순의 「추수(秋收)」

 

        다 이루었도다 하면서

        드디어 드러눕는다 너른 들판

        다 싸웠도다 하면서

        드디어 목을 내어 주는 가을 열매

 

        절대로지지 않으리 하면서

        폭양(暴陽)을 안고 뒹글던 것

        절대로 울지 않으리 하면서

        칠흑(漆黑) 같은 폭풍우 밤에

        두 주먹 불끈 쥐고 소리소리 지르던 것

        어느 것 하나 내색하지 않고

        다 이루었도다 하면서 머리를 숙이고

        지프라기 마른 가지 불쏘시게 잿더미로 스러져

        내려앉은 천만 년 묵은 어머니 품

                        ― 김혜순, 「추수(秋收)」, 1994.

 

  가을은 무엇보다도 결실의 계절이요, 수확의 계절이다. 우리에게 가을은 ‘추수’의 풍경으로 많이 기억된다. 풍요와 축복의 계절인 가을은 과연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가? 이 시는 바로 이러한 질문의 해답을 제공한다.

  『신약성서』에서 예수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면서 “다 이루었다”고 말하며 생을 마감한다. 예수는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온 메시아로서 그 구원의 사역을 죽음으로써 “다 이루었”던 것이다. 그것은 인류를 위한 희생의 결과이며, 그 희생은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아가페적 사랑인 것이다.

  이 시에서는 예수의 말을 인유하며 시작한다. “다 이루었”다는 말의 주체가 여기서는 예수가 아니라 우리에게 결실과 풍요를 주는 땅이요, 자연인 것이다. 그 자연은 예수와 같은 헌신적인 희생을 우리에게 바쳤기에 예수처럼 “다 이루었도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처럼 생을 마감한다. 우리에게 “목을 내어 주”고 “폭양(暴陽)을 안고 뒹굴”었으며, “칠흑(漆黑) 같은 폭풍우”를 감내 했던 자연, 곧 이 땅은 이제 “드러눕는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했던 것처럼 이 땅 또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고 “드러눕는” 것이다.

  자연의 이러한 헌신적 희생은 곧 우리의 ‘어머니’와 동일시된다. 말하자면 자연의 우리 인류의 ‘어미니’인 것이다. 이 땅은 곧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결실을 주고 풍요를 준다. 이 또한 우리의 생명을 잉태하고 양육하는 ‘어머니’와 같음을 확인할 수 있다. 시적화자는 시 전체에서 예수와 자연, 그리고 ‘어머니’를 일치시킨다. 그럼으로써 자연의 그 ‘희생’의 의미를 고취시킨다. 그 헌신적이고 무대가적인 ‘희생’은 얼마나 고귀하고 가치있는 것인가? 그렇기에 이제는 “다 이루었도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 시적화자의 어조는 다소 슬픔과 비애감을 느끼게 한다. 단순히 자연의 ‘희생’의 가치를 예찬하고 있지만은 않은 것이다. 기독교에서 예수의 십자가 죽음을 기념하여 울며 기도하듯이, 우리가 ‘어머니’의 그 헌신적 사랑을 회상하며 눈물로 통곡하듯이, 시적화자는 다분히 눈물을 머금고 자연과 이 땅의 그 ‘희생’의 위대함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Ⅲ. 結論

 

  이상에서 살펴본 두 시에서 우리는 ‘희생’이라는 공통된 기류를 포착할 수 있었다. 하나는 강요된 ‘희생’이요, 다른 하나는 헌신적 ‘희생’이다. 결국 이 둘의 ‘희생’은 전혀 다른 이유에서의 ‘희생’인 것이다. 그것은 또한 전혀 다른 모습으로 형상화된다. 이성복의 시에서는 강요된 ‘희생’이 주는 비참함과 잔인함을 형성하며 그 ‘희생’이 얼마나 비극적이고 비인간적인가를 형상화하고 있다. 반면 김혜순의 「추수(秋收)」에서 보이는 헌신적 ‘희생’은 그 가치와 고귀함을 형성하며 우리에게 자연에 대한 깊은 인상을 형상화한다.

  시에는 감정과 정서를 담고 있다고 하였으되, 그 감정과 정서는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음을 우리는 여기서 재삼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서론에서 언급한 이형기의 「낙화」에서 보이는 ‘희생’은 인생의 젊음에서 성숙을 위해 필요한 자기 수양으로써의 ‘희생’이며, 한용운의 시에서 나타나는 ‘희생’은 ‘님’에 대한 자기 사랑의 표현으로써의 그것이다. 이처럼 다양한 ‘희생’의 시적 형상화를 통해 우리는 ‘희생’의 의미에 대해 더욱 다각적인 접근을 할 수 있게 된다. ‘희생’은 언제나 아름다울 수 없으며 그 ‘희생’을 우리는 가벼이 볼 수 없음을 또한 음미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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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노바는 책을 더 사랑했다 - 저술 출판 독서의 사회사
존 맥스웰 해밀턴 지음, 승영조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카사노바는 책을 더 사랑했다>에 끌려 나는 이 책을 과감히 선택했다. 카사노바가 정말 책을 더 사랑했나? 그럼 나도 책을 더 사랑해볼까? 카사노바처럼? 그래, 카사노바처럼 여자도 사랑하고 책도 더 사랑하면 그야말로 일석이조, 이루 말할 것 없이 좋은 것.

이 책의 제목은 나를 끌어당겼다. 카사노바가 여자만 잘 유혹한 것이 아닌가보다. 나는 내가 알고 있던 카사노바에게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사랑, 책을 더 사랑했다는 이 책의 제목에 큰 호기심이 발동했던 것이다. 책 제목만 보면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 무척이나 큰 호기심이 발동할 것이 분명하다. 이 책의 내용대로라면 책을 파는 기술이 여간 높은 것이 아니다.

이 책은 카사노바에 대해 잠깐 언급한다. 책 제목만 보고 괜히 카사노바 전기나 평전같은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카사노바와는 많이 거리가 먼 내용이기 때문이다. 카사노바에 대한 기대와 호기심으로 거금 18000원을 투자한 자신이 바보같은 것이 자명하기 짝이 없을 테니까.

이 책 부제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책은 '저술 출판 독서의 사회사'에 관한 내용이라 하겠다. 말이 좋아 사회사지 쉽게 말하면 책에 관한 잡史라 해야 겠다.

내가 이 책을 사서 읽게된 큰 동기가 카사노바때문이었다면, 내가 이 책을 끝까지 읽게된 이유는 이 잡史가 나름대로 흥미있고 재치있고 읽을 만 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신선한 충격이기도 했다. 단적인 예로 나는 처음 이 책 편집이 아주 형편없이 잘못된다고 느꼈다. 곳곳에 빈 페이지가 나온다. 간혹 엉뚱하게 보이는 그림 한 조각들이 그려져 있기도 하다. '뭐 이런 책이 다있어'의 불쾌감은 잠시, 어느새 재밌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서 작가는 우리에게 이런 경고를 날린다. "종이에 베일 수 있음. 장갑을 끼시오!" 나는 한없이 웃었다. 그렇게 이 책은 번역자가 말하듯이 '해학'으로 일관한다. 간혹 신랄한 비판도 있지만 인상을 찡그리기 보다는 웃음짓게 한다. 말하자면 이 책은 책에 관련한 우리가 알지못했던 다양한 에피소드 혹은 책의 뒷면, 책 갈피속의 숨은 이야기, 즉, 책의 야사라할 만하다.

곳곳에서 보이는 작가의 재치와 해학의 시선은 나를 줄곳 이 책에 빠지게 했다. 옛날의 저술가들의 뒷얘기들이 그러했고, 책을 파는 기술, 감사의 글이 얼마나 가식적이고 웃기는 것인지, 서평에 대한 이야기들, 책이 대박이 나기까지 어떤 운이 작용했는지, 미국의 대통령들이 글을 얼마나 잘 쓰는지 등등등.

이 책에는 이런 이야기도 있다. "가장 잘 도둑맞는 책은?" 정답을 공개하는 것은 이 책에 대한 예의가 아니리라. 이렇게 다양하고 폭넓고 우리가 알지 못하던 책의 뒷 이야기들을 재치있게 전달해 준다.

하지만 이 책을 누구나 재미있게 읽기는 어려울 듯 하다. 일반인들에게는 나름대로 따분하게 느껴지기도 할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곳곳에서는 따분함을 느꼈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런 따분함을 느낄때 다음으로 확확 넘어가면서 읽어도 좋을 것이다. 가장 먼저 읽어야 할 부분은 "가장 먼저 도둑맞는 책"이라는 장일 것이다.

저자 존 맥스웰 해밀턴의 박식에 혀를 내두를 수 밖에 없는 이 책은, 방대한 자료 수집과 연구를 통해 탄생한 노작이라 할 만하다. 그와 함께 우리나라 저술 출판 독서의 뒷 이야기들을 엮어 보아도 흥미있을 듯 하다. 예를 들면 백석이 조만식의 비서였다는 것, 그리고 누구는 세금을 걷으러 다녔다는 것 등등.

나는 이 책을 강력히 추천하지는 않는다. 다만 읽을만 하다. 단, 꼭 이것 하나만은 명심하길 바란다. '카사노바'에 대해서는 이 책은 책임지지 않는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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