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꼭 그럴 마음이 아니었는데 우연히 알라딘 중고샵을 뒤지다가 이 책을 발견했다. <마지막 로맨티스트 정영일>! 발견하는 순간 내 눈이 두 배는 커졌을 것이다. 발간 년도가 1994년이다. 물론 이미 절판된 책이다. 그 무렵 이 책을 살까 말까 망설이다가 구입 시기를 놓쳐 버렸다. 그리고 세월에 밀려, 아니면 다른 책에 빌려 거의 잊고 지냈었다.
정영일이 얼마나 유명한 사람인지는 알만한 사람만 알 것이다. 문학평론계에 김현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는 것처럼, 영화평론계에선 정영일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그만큼 그는 영화평론에서는 독보적인 존재였다. 7,80년 대 영화계를 풍미했고, 그 시절 KBS <명화극장>에서 방영된 영화의 해설을 맡았으며, 80년대 초중반에 원종관 아나운서와 <사랑방중계>를 맡아 그 특유의 인간미 넘치는 입담을 자랑했었다.
살아 온 모양새도 문학평론가 김현과 비슷해서, 평일엔 늘 영화계 관계자들과 대작을 즐겼고, 주말에는 책을 산더미 같이 쌓아놓고 읽었다고 한다. 김현과 비슷한 시기에 돌아간 것도 참 아이러니 하다(김현씨가 90년도에 작고한 것으로 알고, 정영일은 92년이다).

요즘엔 영화평론가 하면 정성일씨나 이동진씨를 떠올릴 사람이 많을 것이다. 정성일은 알다시피 지금은 없어진 영화잡지 <키노>의 편집장이고, 그의 백과사전적 영화 지식은 타의추종을 불허한다고 하지만, 내가 알기론 그런 그 조차 정영일의 영화평론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말을 오래 전 어디선가 들은 것을 기억한다. 그도 그렇겠지만 영화평론계의 대부라 할 수 있는 분을 어찌 감히 제대로 평할 수 있단 말인가?
나도 기억하지만, 그가 돌아갔다고 했을 때 정말 아쉽고 허전했다. 그가 한창 <명화극장>의 해설을 맡았을 땐 너무 어렸고, 영화를 볼 줄 몰라 그가 얼마나 해설을 잘 하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맡은 <사랑방중계>는 정말 재밌게 본 기억이 있다. 그의 해설을 알았더라면 나는 더 많이 그를 추앙하고, 흠모했을지 모른다. 이제 한 세대도 더 뛰어넘어 책으로 그의 영화에 대한 숨결을 느껴보게 됐다.

그래서 그럴까? 이 책이 막상 내 손에 들어왔을 때 마음 한켠이 숙연해졌다. 표지 제목 글씨를 보라. 정말 촌스럽다. 요즘 저런 체로 글씨체를 쓰지 않는다. 그래도 이 책이 내 손에 들어왔을 때 순간 묵념이라도 해야하는 것은 아닐까 싶었다.
받자마자 앞부분 조금 읽었다. 70년대 말, 그가 본 영화를 모 시사 월간지에 기고한 글이 보인다. 그가 본 영화들은 오늘 날로 치면 클래식에 속하는 영화들이다. 예를 들면, <포세이돈 어드벤쳐>나 <대부>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등. 물론 그 당시에는 시대에 뒤지지 않는 영화들이다.
재밌는 건, 그때 당시엔 '스포일러'란 말이 없었던만큼 당시의 관습에 따라 줄거리를 간략하게 소개하고 그가 느끼고 생각한 바들을 아주 깔끔하게 정리해서 한 페이지 반을 넘지 않게 썼다. 지금은 책 내용이 조금만 소개되도 몸둘바를 몰라 하는데, 모름지기 글은 좀 편하고 자유로운 상태에서 써야한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스포일러 좀 소개됐다고 뭐라하지는 말자. 글쓰는 사람 무안하지 않은가?ㅋ
아무튼 난 이 분이 잊혀진다는 게 아쉽고, 안타깝다. 정성일, 이동진도 좋지만, 정영일 같은 분은 꼭 특정시대, 특정인만 기억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물론 이런 분은 그럴 수 밖에 없는 태생적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요즘 누가 <포세이돈 어드벤처>를 보며, <대부>를 보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보겠으며, 그것에 대해 어떤 사람이 어떤 평론을 했는지 관심을 갖겠는가? 영화는 문학과 또 달라서 세월의 부침을 문학 보다 더 많이 타는 것 같다. 그러니 정영일 같은 분이 쉽게 잊혀지는 것 아닌가? 하지만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정성일이나 이동진이 요즘의 영화를 열심히 보고 평론하겠지만, 이 사람들도 앞으로 한 세대만 지나면, 지금 한창 평론한 영화들이 클래식이 되면서 제2의 정영일이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떤 영화평론가가 어떤 영화를 평론하고, 그 내용이 무엇인가만을 알려고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한 영화평론가가 어떤 시대정신으로 영화를 보고, 어떻게 사랑하며 이 세상을 떠나갔는지를 아는 것도 우리가 영화를 알아가는 중요한 길이라고 본다. 내년이면 그의 20주기다. 마땅한 평전은 고사하고, 그를 추모하는 추모집이라도 나와줘야 하는 것 아닌가? 더불어 이 책도 다시 재출간 됐으면 하는 바람도 가져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