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광우의 <뒤샹과 친구들>(미술문화) 중에서
달리는 초현실주의 그룹에서 추방되었다
1928년 브르통은 『초현실주의와 회화Le Surrealisme st la Peinture』란 제목으로 책을 출판했다.
책에는 무의식에 관한 언급과 젊고 예쁜 정신장애자 소녀 나자에 관한 연구도 있었으며, 초현실주의와 회화의 관계를 자세히 설명했다.
부누엘은 달리에게 “네가 나자를 아주 좋아하게 될 것이다”고 했다.
달리가 브르통의 그룹에 가세한 것은 1929년 여름이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파리에서 온 친구들의 방문을 받았다.
친구들 중에는 마그리트와 그의 아내 게오르게트, 그리고 엘뤼아르와 러시아 태생 아내 갈라가 포함되었다.
갈라는 달리의 낯설고 밉살스러운 태도를 발견했지만 곧 매력 있는 사내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방문이 끝날 무렵 사건이 발생했는데 달리의 일대기를 쓴 플레우르 카우레스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달리의 열정은 거의 치매의 한계에까지 다 달았고, 하루는 언덕에서 갈라를 밀어뜨리려고 했다.
갈라는 달리가 자신에게 그렇게 하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달리는 그녀를 밀어뜨린 후 머리채를 잡아당겼다.
비열한 히스테리아로 떨어지면서 달리는 갈라에게 자신이 그녀에게 무엇을 해주기를 바라느냐고 명령했다.
달리는 “나의 눈을 바라보면서 내게 천천히 말하라. 그리고 야만적이고 호색적인 말로 우리 두 사람 모두 대단히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도록 하라!”고 했으며, 갈라는 “네가 나를 죽이기 바란다!”고 대꾸했다.
갈라는 남편 엘뤼아르와 함께 9월 초에 파리로 돌아갔다.
그해 1929년 11월 그를 위한 전시회가 파리에서 열렸는데 카탈로그 서문을 브르통이 썼다.
브르통은 다른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그림은 사지 않았지만 달리의 그림은 구입했다.
브르통을 감동시킨 그림은 <음침한 스포츠>였는데 그것을 비콤트 드 노아유가 구입해서 식당방에 걸었다.
노아유가 달리에게 재정적으로 도움을 주었으므로 달리는 리가트 항구의 낚시꾼들의 오두막집을 구입하여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갈라와 동거할 수 있었다.
달리의 그림은 잘 팔렸고, 갈라의 기민한 재정 관리로 두 사람은 곧 저택을 사서 꿈같은 성으로 개조했다.
달리가 초현실주의에 가담하고부터 자동주의와 자발적인 행위보다는 환상적인 기교가 두드러진 그림이 사람들에게 더욱 알려졌다.
유령이 출몰하고 꿈속에서나 있을 법한 그의 사실주의 그림들을 달리 자신은 “손으로 그린 꿈의 사진들”이라고 했다.
초현실주의에 새로운 주제와 개인적인 환상을 더해 이성적으로 정교하게 묘사하는 방법을 그는 파리 미술계에 소개했다.
그는 자신의 화법을 “편집광의 사고”라면서 “비평적이고 무아지경의 환상적이며 조직적인 객관성에 기초한 비이성적 지식의 자발적 동화작용”이라고 했다.
초기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이 선호한 자동주의의 꿈같은 열광적인 상태에 달리는 일그러진 영상의 원리와 미혹하게 하는 사고의 배양을 보태었다.
프로이트가 오이디푸스 왕의 이야기를 분석했듯이 그는 청순한 윌리엄 텔의 이야기를 자식으로서의 애착으로부터 근친상간적 다변의 추문적인 주제로 변경시키기도 했다.
그는 “나는 힘 있는 편집광적 사고의 과정에 의해 순간이 가까이 있음을 믿으며, 그것은 가능하고 … 조직적 혼돈과 실제 세계의 온전한 불신을 제공한다”고 했다.
프로이트는 달리를 만난 후 다른 예술가들보다 그에게 각별한 관심을 나타냈다.
프로이트는 달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나는 너의 그림에서 무의식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의식을 찾는다. 대가들인 레오나르도 혹은 앵그르의 그림이 내게 흥미를 유발시키고 그들의 그림들이 신비스러우며 내게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그림들 안에 특별히 숨어 있는 수수께끼, 무의식의 개념들을 내가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달리가 브르통의 그룹에 가세한 시기는 브르통의 공산주의에 대한 지지와 개인적인 독선으로 초현실주의가 막 붕괴될 즈음이었다.
달리의 영향이 커지자 브르통은 몹시 염려했고, 그는 달리의 회화경향에 우려를 표시했다.
브르통은 참다못해 1934년 2월에 달리를 초현실주의 예술가들의 여론재판에 회부했다.
“반혁명적인 행위”에 대한 심판 대상은 <윌리엄 텔의 수수께끼>에 나타난 반은 벗겨진 레닌의 모습과 다른 그림에 나타난 히틀러의 강박관념에 대한 묘사였다.
달리는 “나의 견해로는 히틀러의 고환은 네 개이고, 포피는 여섯 개다”라고 한 적이 있어 히틀러를 위대한 혁명가로 여긴 브르통과 그 밖의 예술가들을 화나게 만들었다.
여론재판이 있던 날 달리는 감기에 걸렸다는 이유로 스웨터를 여러 개 껴입고 재판에 나가 답변을 하지 않으려고 체온계를 입에 물고 있었다.
그는 브르통의 알려진 동성연애를 무례하게도 브르통과 자신이 항문에 성행위를 하는 모습으로 그려서 초현실주의 예술가의 무한한 자유를 시위했다.
달리는 자신이 프롤레타리아의 적이 아님을 동료예술가들 앞에서 맹세했지만 결국 그는 1939년에 그룹에서 추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