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데이아, 또는 악녀를 위한 변명 환상문학전집 23
크리스타 볼프 지음, 김재영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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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의 재해석은 패러디라기보다 일종의 오마주가 아닐까 싶습니다. 현재적 유용성을 따지기 전에 우리에게 익숙한 고전은 인류가 공유하는 문화적 유전자인 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가 주는 재미, 서사를 통해 얻는 교훈, 인간 본성에 관한 성찰, 지나간 시간에 대한 추억뿐만 아니라 지금-여기 발 딛고 선 ‘나’를 위한 위로와 격려가 고전이 주는 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다고, 네 고통과 슬픔도 사실은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라고, 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부과 권력도 언젠간 스러지고 생은 언제든 비극적 결말을 준비하고 있다고.

크리스타 볼프는 프랑스 문학이론가 제라르 주네트Gérard Genette의 ‘아크로니achrony(시간의 흐름을 무시하고 사건들을 동시에 일어난 것처럼 배열하는 이야기 방식. 비시간적 서술.)’와 ‘마트료시카матрёшка(하나의 큰 인형 속에 여러 개의 작은 인형들을 크기가 점차 작아지는 순서로 집어넣은 러시아의 전통 인형. 비옥한 토지와 다산을 의미. 러시아어 여자 이름인 ‘마트료나Матрёна’의 애칭.)’를 소개하며 소설을 시작합니다. 문제적 여인 메데이아는 자식을 죽였는가, 동생을 살해한 범인도 메데이아일까, 아버지와 조국을 배반한 이유가 단순히 이아손을 향한 사랑때문인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이 이어질 수밖에 없는 한 여인의 삶은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이아》와 다른 버전의 이야기를 찾아 읽는 수고와 무관하게 독자 개인의 관점과 태도를 돌아보게 합니다.

평온한 일상일 때는 모릅니다, 한 인간의 본성과 내면을. 위기의 순간, 힘겨운 시절을 지나고 나면 알게 됩니다, 내 곁에 남은 사람을. 메데이아와 이아손도 다르지 않습니다. 아르고호 원정의 목적은 황금 양털이 아니라 이올코스의 왕위였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메데이아의 도움을 받아 황금 양털을 얻었으나 우여곡절 끝에 코린토스에 도착한 이아손이 ‘행복하게 잘 살았답니다~’로 끝낼 리 없습니다. 아버지 아이손이 잃어버린 왕권을 찾으려는 목적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아손의 어머니는 마미손이 아니라 알키메데입니다. 코린토스의 딸이 젊고 예뻐서가 아니라 자기 삶의 지향점을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는 이아손을 위한 변명은 비난받아 마땅한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쎈 언니의 대명사 메데이아가 눈뜨고 당할 리 없습니다. 이 과정에서 메데이아는 물론, 이아손, 아가메다, 아카마스, 글라우케, 로이콘 등 6명의 등장인물이 각각 제 목소리를 냅니다. 도대체 그때 코린토스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요.

소설의 원제는 ‘Medea, Stimmen’, 메데이와 목소리들입니다. 살로메, 유디트 같은 팜 파탈로 보는 관점에는 동의하지 않으나 메데이아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태도에 대한 평가는 시대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모임에서도 주된 논의는 메데이아에 대한 재평가, 이아손에 대한 논란, 아카마스의 욕망 뿐만 아니라 신화의 역할과 기능에 대한 이야기들이었습니다. 평소 신화에 관심이 많고 배경지식이 풍부한 분이 사회를 맡아 논의가 풍성했습니다. 소설제목처럼 다양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무엇보다 작가가 바라보는 주관적 해석과 평가가 아니라 다양한 인물의 목소리를 통해 메데이아와 당시 상황을 입체적으로 상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익숙한 이야기를 보다 깊게 들여다보고 각자의 입장과 위치에서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수많은 변명 혹은 그럴듯한 상황을 읽는 시간이었습니다.

메데이아의 동생과 이아손 사이에 낳은 아이 둘을 과연 메데이가 죽였을까요, 코린토스의 공주까지? 제작비를 고려한 흥행 압박으로 에우리피데스가 막장 드라마를 쓴 건지 알 수 없으나 가장 강력한 캐릭터 중 하나인 메데이아는 입체적이고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여전히 매력적입니다. 키르케, 판도라, 카산드라 등 새로운 시각으로 재조명해 보고 싶은 인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모임을 마무리했습니다.

생명과 분별력을 가진 만물 중에 우리 여자들이 가장 비참한 존재예요. 첫째, 우리는 거금을 주고 남편을 사서 우리 자신의 상전으로 모셔야 해요. 이 가운데 두 번째 불행이 첫 번째 불행보다 더 비참해요. 다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얻는 남자가 훌륭하냐 나쁘냐 하는 거예요. 헤어진다는 것은 여자들에게 불명예스럽고, 남편을 거절하기도 불가능하니까요. 새로운 관습과 규범 속에 뛰어든 여자는 집에서 배운 적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 남편을 가장 잘 다룰지에 관해 점쟁이가 되지 않으면 안 돼요.

- 「메데이아」중에서, 메이아의 독백(코로스에게), 230행~(38쪽)

에우리피데스가 쓴 비극의 일부입니다. 번역가 천병희는 “메데이아는 결론에서 인간을 움직이는 대립적인 두 힘은 격정thymos과 숙고bouleumata며, 이 가운데 격정이 숙고보다 우세해지면 그것이 곧 인간에게 재앙의 원인이 된다고 말하고 있다.”라고 해석합니다. 과연 우리는 ‘격정’과 ‘숙고’ 중 어느 쪽에 무게 중심을 두고 살까요. 나이, 성별, 직업,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열정과 냉정 사이에서 망설이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메데이아의 목소리는 전혀 다르게 들릴 지도 모릅니다. 정답 없는 인생이라고 삶은 계속 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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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크 - 제28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김희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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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였을까. ‘그리움’이란 단어를 잊고 살았다. 잊고 사는 단어들을 떠올리는 순간이 온다. 제임스 W. 페니베이커는 『단어의 사생활』에서 “결국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는 단어들의 총합이다.”라고 했다. 빈번하게 사용하는 단어가 바로 자기 정체성을 드러내는 법이다. 그러니 한곳에 머물지 않고 흐르듯 사람도 변한다. 어제와 같은 나는 없다. 존재의 연속성은 단순히 습관과 기질 혹은 기억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비관적인 평가일지 모르나 모든 사람은 매일 죽는다. 그리고 매일 다시 태어난다.

그 허망함을 견디지 못한 인간의 최고 발명품이 종교다. 상상의 질서를 유지하는 종 특성을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에겐 ‘믿음’이 내재한다. 대상이 무엇이든, 기간이 얼마든, 방법이 어떠하든. 김희재의 『탱크』는 종교소설이 아니다. 그러나 믿음의 이쪽과 저쪽을 다룬다는 점에서 해석의 다양성을 열어 놓은 좋은 소설이다. 소설의 탱크는 ‘Subconscious Tank(잠재의식 탱크)’의 준말이다. 텅빈 컨테이너 박스가 탱크 역할을 한다. 믿음의 대상과 종교적 도그마는 없다. 자기 자신을 믿는 사람들을 위한 ‘공간’이 필요할 뿐. 통렬한 자기반성이든, 현실적 욕망 실현의 기원이든, 미래를 향한 염원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자기만의 시간과 공간이다.

한겨레문학상 수상작으로 데뷔한 김희재는 영화를 전공했다. 장면 전환이나 구성이 탄탄하고 인물에 대한 거리가 객관적이다. 서사는 기본이다. 재미없는 소설을 읽는 독자는 이제 거의 없다. 소설은 이제 ‘재미’로 경쟁이 불가한 대상이 너무 많아졌다. 과거에 누린 영광은 다시 돌아올 가능성이 없다. 나름의 역할과 기능을 찾지 않으면 텍스트 시대의 추억만 곱씹게 된다. 시나리오를 염두에 두지 않았더라도 이 소설은 흡입력이 높다. 등따시고 배불러 걱정 없는 인물이 소설에 등장할 리 없지 않은가. 실패와 좌절은 주인공의 필수 스펙이다. 문제는 일반화와 공감력이다. 도선과 둡둡과 양우와 황영경과 손부경과 강규산은 제 역할을 충실히 해낸다. 탱크를 향해 자기 서사에 충실하다.

그러나 개연성과 핍진성이 결여된 장면이나 표현은 홍범도 장군 영화 배경에 KTX가 지나가는 것과 같다. 회계사 시험 준비를 하는 황영경은 “내년에 시험 합격하면 나갈 세무사도 알아봤고.”라고 말한다. 1, 2차 시험 시기까지 확인한 작가가 왜 이런 표현을 수정하지 않았는지 편집과정에서 걸러내지 못했는지 안타깝다. 앞뒤 문맥을 몇 번이나 읽어봐도 당황스럽다. 춘천교대를 졸업한 손부경이 초등교사 임용시험에 계속 떨어지는 설정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지역별 경쟁률이나 합격률 등을 조사하지 않았을 리 없을 텐데. 옥의 티를 찾아내자는 게 아니라 재밌는 소설을 읽으며 잠시 몰입의 즐거움을 누리려던 욕심이 지나쳤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으려는 이기심 때문일 수도.

어쨌든 감각적 문장과 표현을 즐기는 소설과 결이 다르지만 문제의식과 고민의 깊이는 충분해 보인다. 소설도 취향이다. 좋아하는 작가도 제각각이다. 논픽션을 읽는 재미와 달리 소설에서 찾고 싶은 혹은 찾으려는 ‘쾌락원칙’에 대한 욕망의 모양과 부피가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리라. 적어도 내게는 충분했다. 입체적인 방식으로 인물과 사건을 배치한 구성뿐 아니라 인물에 대한 작가의 지나친 감정 몰입이나 감상적 태도가 없다고 느꼈다. 추천의 말에서 김건형은 “지리멸렬하고 상투적인 세속의 질서에 흡수되지 않도록, 고유한 자신을 유지할 수 있는 자기 수행의 형식에 대한 믿음.”이라는 말로 이 소설을 평가했다. 어차피 문학은 현실 너머, ‘세계의 바깥’을 향한 그리움이 아니겠는가.

소설에 썼듯 “모든 미래는 빠짐없이 과가 된다는 사실을 믿으며, 그 희망을 잃지 않기 위해 계속” 쓰시기를. 소설가 김희재의 건투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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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타닐 - 기적의 진통제는 어쩌다 죽음의 마약이 되었나
벤 웨스트호프 지음, 장정문 옮김 / 소우주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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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자본주의를 통제하기 어렵다면, 신종 마약 거래를 통제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 37쪽

2023년 8월, 신모씨는 오후 8시쯤 서울 강남구 신사동 압구정역 4번 출구 인근 도로에서 롤스로이스 차량을 운전하다가 인도로 돌진해 20대 여성을 뇌사 상태로 만들고 도주했다. 검찰에 따르면 신모씨는 사고 전날 오전 11시부터 오후 8시까지 성형외과에서 시술을 받은 뒤 미다졸람, 디아제팜 등 향정신성의약품을 두 차례 투약하고, 정상적인 운전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차량을 운전한 것으로 조사됐다.

비판적 관점으로 언론을 바라보면 가짜뉴스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으며 팩트체크 능력을 스스로 기를 수 있다. 한스 로슬링은 『팩트풀니스』에서 전문가와 지식인조차 속기 쉬운 팩트와 확증 편향에 대해 점검한 적이 있다. 인지부조화를 극복하기 위해 자신의 정치적 신념, 종교적 믿음에 부합하지 않는 객관적 사실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주변에서 자주본다. 학력, 직업과 무관하게 타인과 세상을 바라보는 왜곡된 시선은 짤막한 뉴스에서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마약 사건과 뉴스가 자주 등장하는 건 언론사 데스크의 선택과 집중 덕분일 수 있다. 매일 벌어지는 비슷한 사건, 사고 중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할 주인공, 신문에 실리지도 않는 기사가 어디 한 둘인가. 중요한 건 과거에 비해 최근들어 마약 중독자의 수가 급격하게 증가했거나, 사회적 영향이 심각해졌는지의 문제다. 신모씨 뿐만 아니라 재벌 2세, 정치인 자녀 등 마약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과 재력을 보유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복용자를 늘리기 위해 싼값의 마약류, 향정신성 의약품이 할인 판매를 하거나 다량으로 살포됐다는 흔적은 발견하기 힘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변에서 이제 어렵지 않게 마약 복용과 관련된 사람들, 뉴스를 접하게 됐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탐사 전문 기자 벤 웨스트호프의 『펜타닐』은 언론의 역할과 기능을 상기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문제의 원인, 사건의 본질을 따라가며 객관적 사실을 확인하고 인과관계에 합리적이고 이성적 판단을 돕는 사회의 등불 역할을 해야 할 언론을 비교, 평가해 보면 우리 사회의 현재와 미래가 선명하게 보인다.

미드 <페인킬러PainKiller>는 옥시코돈으로 억만장자가 되는 퍼듀제약 회사의 실화를 다룬다. 이 책에도 소개되는 이야기의 일부다. 펜타닐Fentanyl은 마리화나, 대마초처럼 자연에서 채취한 환각제가 아니라 실험실에서 제조된 오피오이드를 일컫는다. 마약성진통제로 개발된 약품의 오남용을 지적하기 위한 책이 아니라 펜타닐로 대표되는 새로운 약물의 등장 메커니즘을 파헤치고 다크웹과 결합된 유통, 공급 과정을 파헤치는 르포다. 중국 현지까지 찾아가는 위험을 감수하며 모스크바, 뉴질랜드, 멕시코에 이르는 마약류의 과거와 현재를 살핀다.

미국은 오늘도 ‘좀비마약’ 펜타닐 제조, 유통 중국 기업과 개인에 대해 무더기 제재를 발표했다. 펜타닐은 모르핀보다 50~100배 강력한 마약성 진통제다. 카펜타닐 등 수많은 변종을 양산했으나 시작은 선한 목적이었다. 고통을 덜기 위한 약물. 그것이 펜타닐의 본래 기능이었다. 그러나 오펜하이머가 살상용 핵무기를 만든 것처럼 어떤 과학, 기술의 발전도 오히려 인간에게 죽음과 고통을 줄 수 있다.

때때로 차라리 죽음을 원할 만큼 커다란 고통을 경험한다. 육체적 고통보다 잔인한 정신적 고통을 주는 타인 혹은 세상을 향한 반항으로 자살을 선택하거나 반사회적 행동을 하는 경우도 있다. 펜타닐은 우리 시대, 인류가 겪는 고통을 상징하는 게 아니라 피폐해진 영혼과 바늘이 고장난 삶의 나침반을 불안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위안을 주는 희망이 아닐까. 아니러니하게도 환각의 세계는 현실보다 행복하고, 현실은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의 고통을 선물하기 때문이다.

1959년, 벨기에 천재 화학자 폴 얀센이 개발한 펜타닐은 말기 암 환자의 극심한 통증을 완화하는 기적의 진통제로 칭송받았던 펜타닐. 그러나, 치사량은 단 2mg! 선악의 저편을 넘나드는 두 얼굴의 약물. 결국 인간의 선택과 자유의지 문제로 치부할 수만은 없다.

놀랍게도 여러 법 집행관과 마약 딜러를 포함한 대다수가 피해 감소의 필요성에 대해 이야기했다. 마약 금지론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면서, 사용자를 투옥하는 것보다 NPS의 부정적인 영향을 제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라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 3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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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 - 원자에서 인간까지
김상욱 지음 / 바다출판사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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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 중 하나인 환원론은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는 논리 앞에 무력하다. 급기야 에드워드 윌슨은 ‘통섭consilience’을 들고 나왔으나 번역어에서부터 논쟁이 여전하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만물의 끝판왕인 원자는 인간은 물론 산과 바다 하늘과 우주를 이해하기 위한 출발 지점이다. 김상욱은 만물의 근원인 원자를 들여다보는 물리학자다. 원자가 사는 세상은 수학이 지배하는 차가운 곳이지만 『떨림과 울림』에서 보여준 그의 온기와 상상력은 이 책에서도 여전하다. 윤동주의 시집 제목에 인간을 보탠 아이디어가 누구의 것이든 물리학적 상상상력이 인문학과 만났을 때 얻을 수 있는 효과는 ‘시선’ 혹은 ‘관점’이다. 낯설게 보는 연습도 필요하지만 이미 전혀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려는 ‘노력’과 ‘태도’가 중요하다는 걸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책의 구성과 체계는 명확하다. 1부에서는 원자 이야기로 시작한다. 2부에서는 지구와 태양, 3부에서는 생명, 4부에서는 인간을 다룬다. 1, 2부가 물질의 세계라면 3, 4부는 우리들의 이야기다. 인문학적 상상력이 결여된 과학은 공허하고, 과학적 사고가 부족한 인문학은 허무하다. 물리학자도 결국 질문의 끝은 말할 수 없는 부분, 어쩌면 밝혀지지 않을지도 모르는 경계 지점에 닿기 마련이다. 오직 알 수 없을 뿐이라는 선문답을 하자는 게 아니다. 물질과 비물질, 양성자와 전자, 인간과 세상 사이를 가르는 경계뿐 아니라 기본 입자에서 원자로, 원자에서 분자, 분자에서 생명으로 창발하는 과정의 신비는 여전하다.

과학이 호기심의 영역이라면 철학은 질문은 영역이다. 비슷한 듯 다른 두 영역은 스스로 묻고 답하거나 관찰하고 연구하며 인과관계를 밝힌다. 분명한 근거와 합리적 설명은 군더더기 없이 논리의 세계를 아름답게 만든다. 그것은 과학과 철학 어느 쪽이든 마찬가지다. 버트런드 러셀은 “과학은 우리가 아는 것이고, 철학은 우리가 모르는 것”이라고 말했으나 과학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건 우주의 먼지만큼도 안 된다. 당연히 우리가 모르는 것이 훨씬 많다. 겸손은 태도가 아니라 경험과 배움의 자연스러운 결과다. 알 수 없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가 아니라 알고자 하는 욕망과 의지가 더 필요하다. 물리학자 김상욱은 나름 독자들을 배려하려 ‘쉽게’ 설명하고 있으나 물리, 화학, 생물, 지구에 관한 지식과 구조는 흘려들어도 좋다. 사람마다 이 책을, 아니 어떤 책이든 읽는 목적이 다르다. 읽은 후에 얻는 것과 잃은 것도 다르다. 호기심과 질문으로 가득한 김상욱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인간은 원자에서 출발해서 인간에 이르는 머나먼 여행이다. 동참 여부는 독자의 몫이겠으나 여행 후에 느낀 감상 또한 제각각일 터.

대개 읽을 만한 글을 쓰는 사람들은 분야와 상관없이 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와 같다. 창을 통해 자신이 속한 세계 ‘너머’가 궁금한 사람들이다. 책은 창이다. 벽으로 가로막힌 경계를 넘어 이쪽과 저쪽이 어떻게 다른지, 어떤 관계인지 살피려는 자들의 고민이다. 물리학과 인문학을 통섭하기 위해 이 책이 필요한 건 아니다. 김상욱은 돌멩이와 인간이 결국 원자 수준에서 다를 바 없고 인간은 결국 흙으로 돌아간다는 지극히 과학적인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이 책을 쓴 것 같지는 않다. 스스로 자기 안에서 길어 올린 질문을 따라간다. 호기심과 질문의 답을 찾는 고민의 과정에 동참을 호소하는 듯 보인다. 다 알고 있는 이의 자만이 아니라 여전히 질문하는 자의 답답함이 느껴진다.

과학은 인간을 다른 존재와 구별하는 이성적 사고의 결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라는 유기체는 지극히 불합리하고 비논리적으로 행동한다. 인간의 한계를 인정해도 일상에서 부딪치는 사람들의 이해할 수 없는 비과학적 사고와 행동에 자주 놀란다. 가방끈의 길이, 직업, 나이, 성별, 종교와 무관하다. 믿음의 영역으로 치환시키거나 인지부조화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자기 합리화를 시도하는 사람들의 말과 행동은 타인과 세상을 불행하게 만든다. 그런 짓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 이유, 상대를 향한 분노와 비난, 억울함과 변명으로 일관하는 태도는 법정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에서 비일비재하다. 과학과 철학의 경계만큼 모호한 옳고 그름, 합법과 불법 사이에서 길을 잃을 수도 있지만 결국 사실은 진실을 밝히며 상황과 맥락은 논리를 뒷받침하기 마련이다.

물리학자의 상상력과 호기심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게는 ‘떨림과 울림’의 작가로 기억되는 김상욱의 진지함과 탐구심을 배우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하늘과 바람과 별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인간을 이해할 수는 없다. 그러나 자연과 다른 인간의 놀라운 이야기를 계속 들여다보는 것만큼 흥미진진한 일이 있을까. 사람 사는 세상은 언제나 과학적 상상력을 뛰어넘는 일들로 가득하다. 오늘도 내가 아닌 너, 우리가 아닌 그들이 사는 세상은 많이 다르다. 그러나 너와 나, 우리가 합의할 수 있는 최소한의 세계는 제대로, 단단하게 만들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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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대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9
윌리엄 골딩 지음, 유종호 옮김 / 민음사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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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악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으며 인간의 도덕 체계가 근본적으로 천박하다는 사실의 새로운 발견이다.” - E. L. 엡스타인

인간과 세상을 보는 상반된 시선은 어느 시대나 갈등과 충돌을 일으켰다. 긍정과 부정, 낙관과 비관, 희망과 절망, 기대와 실망 사이에서 사람들은 서도 다른 말들로 설득한다. 철학자, 사회학자, 소설가, 정치가 등 각자의 위치에서 현재를 살피고 미래를 전망하는 관점이 다르다. 같은 직업, 같은 시기에도 성향과 기질, 경험과 생각에 따라 인간 존재에 대한 평가, 사회 구성체의 향방이 엇갈린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을까.

인간은 언제든 ‘악’을 행할 수 있는 존재다. 생물학적 DNA나 이기적 유전자 때문인지 타고난 본성인지 알 수 없으나 지루한 성선설과 성악설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인간 ‘악’의 본성은 지울 수가 없다. 생존에 위협을 느끼는 상황이 아닐 때, 나와 무관한 일이어도 마찬가지다. 합리화할 수 없는 악행과 사건 사고가 없는 날은 단 하루도 없다. 법과 질서로 통제된 규율 사회가 악을 제거할 수는 없다. 인간 내면의 선한 아이가 숨어 있지만 그 아이들은 대체로 그 존재를 숨기거나 활동 의지가 없는 경우가 더 많다. 한 인간의 선악 갈등, 공동체 내의 선한 인간과 악한 인간이 뒤섞인 사회를 살면서 ‘인간의 도덕체계가 근본적으로 천박하다’라는 엡스타인의 말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책꽂이 한쪽 구석에 나란히 서 있는 에드워드 윌슨의 『인간 본성에 대하여』와 스티븐 제이 굴드의 『인간에 대한 오해』를 한참씩 쳐다본다. 생물학자가 바라본 ‘인간’은 데즈먼드 모리스의 말대로 ‘털 없는 원숭이’에 불과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외딴 섬에 불시착한 소년들의 무리는 짐승에 가까운 본성을 드러낼 가능성이 크다. 겨우 초등학생 정도의 나이라면 합리적 이성보다 생존 본능이 앞설 가능성이 높다. 규율과 통제는 인간의 본성과 거리가 멀다. 법과 질서는 군집 생활의 효용 때문이다. 윌리엄 골딩은 이 소설을 통해 “인간 본성의 결함에서 사회 결함의 근원을 찾아내려는 것이 이 작품의 주제다.”라고 말했다. 인간은 완전하지 않다. 의도치 않은 실수를 하고, 누군가는 의도적으로 범죄를 저지른다.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는 상상에 불과하다. 인류는 한 번도 그런 공동체를 유지한 적이 없다. 그 이유가 근본적으로 인간 본성의 결함 때문이라는 윌리엄 골딩은 『파리 대왕』이라는 우화소설로 증명하려 애쓴다.

소설은 대립하는 두 소년 랠프와 잭을 통해 인간 본성의 어둠을 들여다본다. 도덕적 우화이자 정치적 우화소설로 읽으면서 개별 독자들은 무슨 생각을 할지 궁금하다. 인간과 사회의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이 이 소설의 미덕이라면 작가의 회의적이고 비관적인 인간관과 사회관에 대한 상찬과 비판이 엇갈릴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말대로 “가장 위대한 생각이란 가장 단순한 법이다.”(194쪽) 절망적인 공포 상황에서 인간의 본성이 드러난다. 자기 안에 숨어 있는 ‘악’이 발현되고 타인에 대한 태도가 드러난다. 사회적 가면인 페르소나가 없는 무인도의 소년들은 점점 본능에 따라 행동한다. 생존에 필요한, 약육강식의 논리대로 움직이는 인간 본성을 비난할 수는 없다. 파괴적이고 잔혹한 충동은 모든 인간의 내면에 숨은 기질일까.

도덕적 알레고리로 가득한 장편소설의 스토리는 단순하다. 점점 가열되는 폭력과 잔인한 행동에 놀랄 무렵 ‘어른’들이 섬에 도착한다. 영국 해군이 문제의 해결사로 등장하는 건 아니지만 소년들만의 세계는 끝이 나고 무인도에서 구조된다. 양계초는 인간이라면 ‘신독愼獨’에 힘써야 한다고 했다. 공적인 장소나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가 아니라 방안에 혼자 있을 때가 자신의 본모습이다. 신독은 혼자 있을 때야말로 삼가고 조심해야 한다는 의미다. 타인과의 관계와 시선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말과 행동의 주인으로 살려면 극기하고 신독하여 ‘악’의 본성을 억눌러야 한다는 충고가 아닐까 싶다. 소년들의 리더로 선출된 랠프는 “잃어버린 천진성과 인간 본성의 어둠과 돼지라고 하는 진실하고 지혜롭던 친구의 추락사가 슬퍼서 마구 울었다.” 지도자의 전형을 보여주는 주인공 랠프는 소년이라고 보기 어렵다. 우화소설의 특성상 개별 인물에 대한 몰입도는 낮고 개연성이 떨어지는 묘사가 많다. 행동이 둔하고 겁이 많으며 천식을 앓는 안경 쓴 ‘돼지’, 공포의 대상인 짐승은 소년들의 내면 모습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사이먼, 잔혹한 사형 집행인으로 친구를 고문하는 로저는 랠프나 잭 메리듀와 또 다른 모습으로 다양한 캐릭터를 잘 소화한다.

소설을 읽는 내내 한가지 거슬렸던 점은 번역문의 표현과 문장이다. 문학평론가 유종호의 번역은 가독성을 떨어뜨릴 때가 많았다. 현재 사용하지 않는 한자어, 우리말 어휘는 얼마든지 새로 번역하거나 손봐야 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귀쌈을 질러박았다” “납덩이 같은 감정을 치지도외하고” 같은 표현이 무인도에서 겪는 소년들의 심리와 행동 묘사에 어울리는지 의문이다. 얼마든지 편하고 쉬운 우리말로 번역이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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