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차르트 - 한 천재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지음, 박미애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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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차르트 다시보기

  천재는 시공을 초월한다는 자명한 사실. 모차르트(1756~1791)는 그 사실에 부합하는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가 떠난 지 200년이 지났으나 그는 여전히 살아있는 전설이다. 수많은 음악가들이 명멸했으나 모차르트가 남긴 영향은 누구보다 강렬하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불운의 천재라는 세간의 평가는 헛말이 아니다. 음악 신동으로 다섯 살부터 작곡을 시작했고 경외와 찬사를 한 몸에 받으며 성장했으나 그의 음악인생이 결코 행복으로 가득했다고 볼 수는 없다.

  독일의 사회학자 노베르트 엘리아스는 조금 특별한 시선으로 『모차르트』를 이야기한다. 우리는 일상생활에 대한 미시적 분석과 사회변동에 대한 거시적 분석이 통합될 때 모차르트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어떤 대상이나 현상이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게 보이는 것을 파악하는 것이 사회학자들의 오래된 연구 주제이다. 다만 그것을 어떤 합리적 근거와 논리적 기준으로 바라보느냐 하는 것은 개인의 능력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문명을 바라보는 나름의 기준과 정확한 관찰과 분석이 이루어져야 사람들은 그 사회학자의 판단을 귀 기울여 듣게 된다. 그런 면에서 엘리아스의 첫 책 『모차르트』을 통해 나는 그의 관점을 신뢰하게 되었다.

  이 책은 사회학적 관점으로 바라본 ‘모차르트의 일생’이다.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 당시 궁정 귀족과 예술가의 관계, 모차르트의 기질 등이 어떻게 내면적 갈등으로 이어지고 그것이 결국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는지 살펴 볼 수 있는 책이다. 수많은 모차르트에 관한 책과 영화 자료들이 넘치고 있지만 사회학자의 담담한 이야기가 설득력을 얻는 것은 모차르트의 천재성에 대한 감탄이 아니라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차르트와 그의 시대를 객관적으로 살펴보는 눈에 있다.  


사회적 맥락과 천재성

수공업 예술의 시대에 주문자의 취미 규범은 창조자 개인의 예술적 환상보다 더 중요한 예술 창작의 기본틀이었다. 예술가의 개인적 상상력은 체제 내의 주문자 계층의 취미 규범에 맞춰 엄격하게 조종되었다. - P. 65

  궁정 음악가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모차르트는 태어나면서부터 음악 속에서 길러졌다. 어떤 재능과 천재성이 있는지 경험하지 못하고 그러한 환경에 노출되지 않으면 알 수가 없는 법이다. 하지만 아무리 천재적인 예술가라 할지라도 수공업 예술 시대에 궁정 음악가는 왕과 귀족들의 시종에 불과했다. 유럽 연주여행을 통해 찬사를 받지만 그것은 왕과 귀족들이 원하는만큼 지급하는 급료를 받는 일시적인 경외에 지나지 않는다. 안정적인 일자리를 원했던 아버지와 달리 모차르트는 자신의 자유의지에 따른 음악을 원한다. 개인적 상상력보다 주문자 계층의 취미를 우선했던 공급자의 옷이 천재에게 맞을 리 없었던 것이다.

  궁정 사회에 대한 모차르트의 이런 이중적이고 모순적인 태도는 그의 삶과 작품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생계를 책임지고 그의 음악을 인정해 주는 궁정사회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도 없고 시민계급으로서 완전한 자유와 예술적 창조성을 발휘할 수도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모차르트는 공격적인 인간이었다. 괴팍하고 다혈질의 성격을 갖고 태어났는지 알 수 없으나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지배층에 대한 공격성이 나타났고 훗날의 경력은 이를 증명해 준다.

  자유 예술가로서 충분한 음악적 감수성을 펼쳐냈다고 볼 수 없는 것은 모차르트의 생애와 사회적 상황이 잘 설명해 준다. 결국 모차르트의 천재성도 사회적 맥락을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제도적 틀과 한계 때문에 음악적 완성도가 떨어졌다는 말이 아니라, 그의 삶을 사회적 맥락 안에서 이해하고 그의 고민과 방황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모차르트는 독립된 개인이 아니라 시대를 읽어낼 수 있는 음악적 코드이다. 그의 음악을 제대로 이해하고 그가 표현하려고 했던 예술적 환상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시대를 이해하고 사회적 맥락을 읽어 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일 것이다.     

저항과 요절

  잘츠부르크에서 다시 빈으로 돌아간 모차르트의 반란은 아버지에 대한 반란이면서 견고한 사회적 구속에 대한 저항이었다. 모차르트의 평생 ‘인정’과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했다. 그것이 개인적이고 이성적인 사랑이든 사회적이고 예술적 감수성이든. 하지만 궁정 사회와 아버지의 요구를 벗어나는 것이 모차르트에겐 절체절명의 숙명이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저자는 이런 모차르트의 상황을 ‘결혼’이 해결했다고 본다. 해방의 완성이라고 표현하고 있지만 어쩌면 이 말은 반어처럼 들린다. 사랑을 지키고 예술가로서 인정받고 싶었지만 상황은 만만치가 않았다. 경제적 곤란과 심리적 고독감은 천재를 지치게 했다. 철저하게 아버지에 의해 관리되었던 미성숙한 어른 모차르트는 이 상황들을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35세, 이른 나이에 요절한 모차르트가 더 오래 살았다면 얼마나 많은 혹은 얼마나 뛰어난 곡들을 더 만들 수 있었을까. 역사에는 가정법이 없다지만 사람들이 아쉬움을 토로하는 천재 중의 하나가 모차르트이다.

  천재는 한 분야에 특별한 능력을 가진 개인을 이르는 말이 아니라 기존 체계의 문제점과 한계를 벗어나 창조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사람이 아닐까. 서평을 쓰기 시작하면서 교향곡 41번 C장조 KV 551 “주피터”(브루노 발터 Bruno Walter (지휘), 컬럼비아 심포니 오케스트라 Columbia Symphony Orchestra)를 듣고 있다. 이 곡이 음악적으로 얼마나 완벽한지 당시에 얼마나 충격적 변화를 이끌었는지 알 수 없으나 시대를 거슬러 사회적 구조와 틀의 한계를 벗어나고자 했던 비운의 천재를 생각하며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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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책쟁이들 - 대한민국 책 고수들의 비범한 독서 편력
임종업 지음 / 청림출판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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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이 불고 해가지는 것처럼 사소한 일들이 매일 반복된다. 하지만 그 사소한 자연의 질서보다 위대한 인간의 일은 무엇일까? 구름 따라 흘러가듯 인생을 즐기며 살아갈 수 있던 시대가 따로 존재했던 것은 아닐 것이다. 다만 조금 더 여유 있고 한가롭게 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았던 시대가 20세기 이후에는 없었으리라.

  가끔 책에 관한 책을 읽는다. 고수들의 독서 편력이나 글 쓰는 사람들의 노하우를 공개하는 책들을 읽다보면 세상에 책이 없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싶어진다. 우선 학교가 없어지고 아이들이 환호성을 지를까? 사서들과 서점 직원들은 뭘 할까? 도서관과 서점은 뭘 팔아야할까? 가상 시나리오지만 책이 없는 세상을 생각해 본다.

  일요일 아침은 유일하게 저절로 눈을 뜰 때까지 잘 수 있는 날이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침대에서 뒹굴며 12시까지는 책만 본다. 절대독서시간. 평소에 읽는 것도 모자라 절대 독서 시간을 정해 두냐고 할지도 모르지만 정말 아무생각 없이 가장 편안한 자세로 책에 푹 빠져 있는 이 시간이 나는 가장 행복하다. 그 시간에 일을 해야 하는 분들에게는 죄송하지만 등산을 하든, 산책을 하든, 공부를 하든, TV를 보든 사람들은 누구나 가장 행복한 일을 한다고 믿는다. 아무것도 안하고 매일 그렇게 살 수 있을 때까지 나는 가능하다면 일요일 오전의 편안한 책읽기 시간을 행복하게 즐기고 싶다.

  책에 관한 책이 눈에 띠면 여러 번 망설이다가 한 권씩 사서 읽는다. 임종업의 『한국의 책쟁이들』도 여러 번 망설이다 읽었다. 사실 어떤 특별함이 없기 때문이다. 책에 미친 사람들의 성향이나 방법은 정상인의 눈으로 보아 이해할 수 없을 테지만 그건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어떤 분야의 매니아가 되면 상식 수준을 넘게 된다. 다만 그것이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고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느냐에 따라 우리의 평가는 조금 달라질 수 있겠다. 하지만 세인들의 평가와 무관하게 지극한 행복과 한 우물을 파는 즐거움을 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확인하기는 힘든 일이다.

  한동안 토요일마다 한겨레신문에 북섹션이 들어왔다. 두고두고 일주일 내내 읽었는데 어느 날부터 사라졌다. 그 한 코너에 실린 글들과 빠졌든 글들을 모은 『한국의 책쟁이들』은 책에 미친 사람들의 이야기다. 제목 그대로다. 책밖에 모르는 미련퉁이들의 이야기다. 누구보다 책을 좋아하는 나는 이 책을 읽는동안 부러움과 불편함이 동시대 밀려왔다. 그들의 이야기에 감탄하다가 비슷한 상황과 처지에 공감하기도 했다.

  이 책은 평범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한 권의 책으로 인생이 바뀌었거나 책 때문에 부와 명예를 얻은 사람들의 성공 스토리가 아니다. 한 평생 책을 좋아하며 책 속에 묻혀 살아가는 사람들의 소박하고 따뜻한 이야기다. 저자는 이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인터뷰를 하고 그들이 아껴둔 책들을 사진으로 담아냈다. 주로 헌책방에서 정보를 얻고 알음알음으로 소개받아 찾아낸 사람들이지만 이 사람들을 통해 아날로그 시대 책의 운명과 책에 대한 마지막 사랑을 확인하는 것 같아 슬픈 감동을 느꼈다.

  스물 여덟명의 책쟁이들은 직업도 나이도 성별도 다양하지만 책에 미쳤다는 단 하나의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만화 마니아부터 동두천의 시인부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소개되었지만 내 눈길을 끌었던 사람은 단연 『전작주의자의 꿈』 조희봉씨. 화천에 내려가 아버지가 운영하던 우체국을 물려받아 상서우체국장이 된 조희봉씨의 변신도 생활도 반가웠다. 농촌에 내려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하는 그의 삶이 이제 책이 되어 버린 느낌이었다.

  책쟁이들의 공통점 중 한 가지는 가족들의 눈치를 본다는 공통점이 있다. 정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다른 것에 미친 것보다 낫다는 위안을 삼으려 이들 곁을 지키는 가족들의 노고도 이해가 갔다. 읽고 난 후의 책은 단순하게 소유물에 대한 집착으로 껴안고 있는 것과 다르다. 얼마전 10여 년간 정기 구독했던 <현대문학> 세 박스를 집 밖으로 내놓았다. 책꽂이 이외의 공간은 용서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2천권도 안 되는 책을 갖고도 이런 고민을 하는데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의 책들은 또 어떤 운명을 맞게 될지 안타깝다. 마니아들의 특징이라면 죽음 이후를 걱정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그들도 모두 그런지 모르겠다.

  이 책을 통해서 대한민국의 책 고수들에게 배울 것은 단순하게 책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나름의 비범한 독서 편력을 가지고 있다. 한 분야에 대해 혹은 다양한 분야에서 종횡무진 고수의 진가를 발휘하는 책 수집과 독서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 할만큼 각별하다. 작가의 세세하게 인터뷰해내지 못한 것들이 많아 답답하기도 했지만 행간에서 보여지는 공력과 그들의 공간을 점령하고 있는 수많은 책들을 통해 독자들은 그들의 특별함과 비법을 짐작할 수 있다.

  책읽기에 관한 한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 터득하는 것이다. 다만 곁눈질과 앞서 간 사람들의 방법을 참고할 뿐이다. 책쟁이들의 서재를 통해 슬쩍슬쩍 호기심 어린 눈길을 던져보는 재미와 그들의 생활이 묻어나는 모습을 몇 장의 사진을 통해 확인하는 일은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즐거움이다. 날이 저물고 밤이 깊어가면 모두들 책장을 펼쳐 들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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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의 홀쭉한 배낭
구광렬 지음 / 실천문학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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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대가 생각한대로 살지 않으면 머지않아 그대는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는 폴 발레리의 말은 단순한 금언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사람이 한 평생을 살면서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간다는 것은 대단한 신념과 용기가 필요하다. 신념과 용기는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며 누구나 그렇게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신념은 때때로 흔들리고 용기는 경우에 따라 만용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인간의 이기적 속성과 사회적 관계는 한 사람이 살아가는 태도를 결정한다. 또한 뚜렷한 목표가 정해지면 과정과 수단을 선택해야 한다. 과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에게 그리고 타인에게 당당하고 존경받는 삶을 살아가는가. 그렇게 살았다고 자부하더라도 세간의 평가는 달라지게 마련이고 후회와 아쉬움이 남는다.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는가?

  사르트르가 ‘20세기의 가장 성숙한 인간’이라고 평가했던 에르네스토 게바라의 삶은 평범에서 한참 거리가 멀다. 그에 대한 세계적인 관심과 열광은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다. 상업적 목적으로 그를 이용하는 사람들도 있고 혁명의 코드로 추앙받기도 하지만 그에 대한 진짜 이야기는 지금부터가 아닐까 싶다. 왜 사람들은 그에게 열광하는가?

  아마도 그것은 성공한 쿠바 혁명의 열매를 포기했기 때문일 것이다. 피델 카스트로에 이어 확고부동한 2인자였던 그가 혁명의 축제도 끝나기 전에 또다시 콩고로 떠난 이유를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 순수한 혁명 정신을 잃지 않고 콩고로 떠나는 체 게바라의 모습은 진정한 휴머니스트의 모습이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혁명가이기 이전에 인간에 대한 진정한 믿음을 발견할 수 있는 순결한 인간이 바로 체가 아닐까 싶다.

  그는 독서광으로 유명하다. 전쟁터에서 책을 놓지 않고 항상 책 속에서 꿈을 꾸었던 몽상가는 아니었을까? 무모한 도전을 통해 민중의 해방을 꿈꾸었던 그는 이 시대 마지막 순결한 혁명가다. <체 게바라의 홀쭉한 배낭>은 총이 아니라 펜을 든 혁명가의 모습을 조망한다.

  1967년 10월 9일 죽음을 맞이할 때 마지막 유품이었던 그의 배낭 속엔 색연필로 덧칠된 지도 한 장과 두 권의 비망록 그리고 녹색 스프링 노트 한 권이 들어 있었다. <체 게바라의 일기>로 출판된 두 권의 비망록과 달리 녹색 노트에 필사된 69편의 시들은 주목받지 못했다. 멕시코 국립대학에서 중남미문학을 전공한 뒤 현지에서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구광렬은 바로 이 노트에 주목한다.

  체에 대한 평전들과 달리 최후 3년간 그의 행적을 추적하는 이 책은 오로지 녹색노트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파블로 네루다, 세사르 바예호, 니콜라스 기옌, 레온 펠리뻬 등 네 명의 시인이 쓴 시들이 필사된 노트는 혁명가로서, 한 인간으로서 고뇌했던 체의 마지막 모습을 반추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저자는 체와 이 시인들의 관계를 살핀다. 개인적인 친분과 유대 관계를 가지고 있기도 한 시인들의 시는 단순히 애송시에 대한 체의 관심이 아니라 그의 영혼과 신념에 대한 간접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마지막 순간까지 배낭 속에 지니고 있던 이 노트는 크게 세 시기로 나뉜다. 아프리카 시절(1965년 3월~1966년 3월), 쿠바 시절(1966년 4월~1966년 10월), 볼리비아 시절(1966년 11월~1967년 10월 초) 등 시간과 장소의 관계를 유추해 낼 수 있는 입체적 구성이다. 필사된 순서나 시인들의 특성을 통해 체의 사상을 연구한다는 것은 지나친 해석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에게 영향을 미친 혹은 그의 신념을 다지게 한 원동력이 되었음은 틀림없어 보인다.

  체가 죽지 않고 오래 살았다면 그는 말년에 시인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책 속에서 길을 찾고 책을 통해 세상을 인식했을 지도 모르는 혁명가의 생애는 아련한 추억과 그리움이 아니다. 현실 속에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생활 속에서 스스로 찾아가야 하는 길잡이다.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해도 민중들의 삶의 조건은 상황만 달라졌을 뿐 결코 나아지지 않았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들의 우매함은 오늘도 반복된다. 영원할 것이라 믿는 권력과 욕망의 노예들은 끝없이 확대 재생산 되고 있다. 자유와 평등, 민주주의에 대한 실현은 멀기만 하다. 지구의 반대편 라틴 아메리카에서 벌어졌던 혁명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체제를 전복하고 세상을 갈아엎자는 폭력과 혼란이 아니라 잘못을 바로잡고 보다 많은 사람들이 행복한 세상을 꿈꾸는 소박한 희망은 혁명이 아니면 불가능한 것인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차창에 부딪히는 빗방울은 책을 읽는 내내 한숨과 눈물처럼 부딪혔다. 흔들리는 버스에서 체의 홀쭉한 배낭을 상상하는 일은 즐거운 일도 편안한 일도 아니었다. 안타까움을 넘어선 경외와 두려움이었다. 안개처럼 뿌연 창밖으로 펼쳐진 한 여름의 들판에도 선명한 길은 보이지 않는다. 없는 길을 걸었던 체의 발걸음과 힘겨웠을 그의 마지막 뒷모습이 환영처럼 잠시 눈앞을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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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반하다 - 자기성공을 이룬 나르키소스 12인
안병찬.안이영노 지음 / 도요새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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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선화에게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안치환이 불러 유명해진,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는 시집에 수록되어 있는 정호승의 시이다. 잠언 형태의 구절들이 수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시인은 이 시에서 외로움을 말했다. 그러나, ‘수선화’라는 꽃을 통해 외로움의 정서를 독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했는지는 의문이다. 수선화의 학명은 Narcissus.

  도도한 자기애(自己愛)로 인해 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사랑하게 되어버린 나르키소스의 운명은 외로움과 조금은 거리가 멀어 보인다. 그것은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길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정신분석학에서 사용하는 나르시즘의 어원이 되기도 한 이 신화 속의 주인공은 결코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에코를 외면한 죄로 네메시스의 저주를 받았다고 하지만 결국 나르키소스는 단 한 번도 진정한 사랑에 빠져 보지 못했다. 신화의 내용에 따르면 자신을 사랑하는 일은 불행의 시작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에게 나르시즘은 자신감의 상징이며 경쟁력의 출발이 되기도 한다. 타인에 대한 사랑은 자신에 대한 사랑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은 채 타인을 사랑하게 되면 맹목과 집착이 되고 그가 없으면 자신의 존재는 소멸하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만 키우게 된다.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스스로 홀로 설 수 있는 존재만이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는 것은 아닐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진정한 나르키소스는 과연 누구일까? 쉽게 말할 수 없을 수도 있고 너무 많아 헤아리기 어려울 수도 있다. 언론인이자 언론학자 안병찬과 그의 아들 안이영노는 그들을 찾아 나섰고 그들을 만났으며 만나고 돌아와 대화를 나눴다. 그 결과물이 <나에게 반하다>라는 책으로 태어났다.

  이 책은 형식과 내용면에서 몇 가지 특별함을 갖고 있다. 안이영노가 세운 문화기획자들의 모임 ‘기분좋은 QX'에서 기획하고 80세 청년 안병찬의 인터뷰로 진행된 프로젝트이다. 인터뷰가 끝나고 아들 안이영노와 후일담을 나누며 인물들을 다시 분석한다. 그 과정과 책이 나오는 과정이 하나의 놀이처럼 유쾌해 보인다. 힘겹고 어려운 작업이었을 것으로 짐작하지만 인터뷰를 준비하는 저자와 그들을 묶어내는 일들이 즐거움으로 여겨진다. 이렇게 색다른 작업이 가능한 것은 안병찬의 에너지와 열정을 전제로 하고 있다. 나이를 무색케 하는 그의 추동력은 삶에 대한 열정과 나르시즘 때문은 아닐까?

  아들의 취재 명령에 아버지가 현장을 뛰는 형식의 이야기를 들어본 적도 없다. 책 제목처럼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 책에 소개된 열 두 명의 나르키소스는 다양하다. 스물 여섯 살의 아가씨 이꽃별, 지천명의 나이가 넘어서 예술가의 길에 전부를 건 씨킴, 세상을 누비는 1인 프로덕션 김진혁, 언제나 화제의 중심에 섰던 백지연, 가수협회 회원인 한나라당 국회의원 정두언, 우리를 즐겁게 했던 야동 순재 등 한 사람 한 사람 각자가 가진 끼와 개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종횡무진 시대를 질주하는 사람들이다.

  이들과 함께했던 시간이 인터뷰어에게는 더없이 행복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치밀한 준비와 꼼꼼한 분석이 뒷받침되어 인터뷰를 했겠지만 다만 아쉬운 것은 분량의 소략함이다. 지나치게 요약하고 대강의 인상만을 적었으니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크다. 분량과 형식의 제약이 선행되는 신문매체의 특성을 잘 알지만 책으로 묶어낼 때는 후일담이나 보다 풍부한 내용을 담아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열 두 명의 초상에서 나르키소스를 읽어내고 그것을 세상과 예술 혹은 타인에 대한 열정으로 승화시키는 모습들이 깊은 인상을 남긴다.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든 아니든 그들의 인생은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재미있는 것은 마지막 주자로 나선 안병찬이다. 스스로를 나르키소스 열 두 명 중 한 명으로 포함시킨 것은 어쩌면 당연하게도 이 책의 주제를 강변하고 있다.

  사람을 읽어내는 것은 세상의 어떤 텍스트보다 소중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 책 한 권이 지니는 소중함이나 책 자체의 의미보다 나는 이 책을 만들어 낸 과정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그리고 그들의 색다른 열정과 실험에 큰 박수를 보내고 싶다. 우리 모두 나르키소스가 되어 미칠 듯이 자신을 사랑하고 여세를 몰아 자신의 삶은 물론 세상을 살아나갈 힘을 얻어내는 것은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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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행복하니? - 보통 아이들 24명의 조금 특별한 성장기, 2004년 올해의 청소년 책
김종휘 지음 / 샨티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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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에 유일한 희망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아이들 때문이라고 믿는다. 아직도 그런 순진한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고 반문한다면 할 말이 없지만 그래도 그것마저 버릴 순 없다. 아이들의 기준과 나이가 모호하긴 하지만 나는 오늘도 믿고 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이 변하고 있다. 부모와 학교와 세상에서 배운 것들을 모두 버려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아이들이 많지 않다. 사실 우리들은 아이들에게 뭘 가르치고 있을까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은 있나? 수많은 사람들이 교육에 목숨을 걸고 교육이 미래라고 외치지만 어쩌면 모두 껍데기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제도권 공교육의 현실은 참담하기만 하다.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 혹은 성인이 되기 위해, 혹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발판으로 삼는 곳이 학교라면 일리히의 말대로 ‘학교 없는 사회’가 가장 행복한 사회가 될 지도 모른다. 학교의 어원은 ‘여가’에서 출발했다. 할 일 없어 모여 놀고, 부모들의 노동력을 착취하기 위해 아이들을 모으기 시작한 곳이 학교다. 지금은 학교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었다.

  지나치게 부정적인 해석일까? 언제까지 학교에서는 아이들의 머리 길이와 치마 길이에 목숨을 걸고 지각했다고 운동장을 돌릴 것이며 강제로 보충 수업과 야간 자율 학습을 시킬 것인가? 죽기 전에 그것이 사라진 학교를 볼 수 있을까? 대한민국의 모든 학교의 상황이 동일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교는 여전히, 아직도 19세기식 사고 방식과 전근대적인 관점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0대의 아이들과 20대에서 60대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교사들이 모여 곳이라서 애당초 소통이 불가능한 것인가? 결론적으로 학교는 행복한 곳인가? 아이들이 거의 모든 시간을 보내는 학교는 행복한가? 이 질문에 대답할 수 있어야 김종휘의 <너, 행복하니?>라는 질문에 답할 수 있을 것 같다.

  하자 센터의 김종휘가 만난 아이들은 보통 아이들이다. 24명의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였고 그것을 한 권의 책으로 정리한 <너, 행복하니?>를 통해서 바라본 대한민국의 아이들은 행복의 반대편을 서성이고 있다. 진짜 행복은 무엇이며, 내가 하고 싶은 것은 어떤 것인지, 내가 잘 할 수 있는 건 뭔지, 정말 그걸 하면 안되는 건지 고민해 본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다가 이 보통 아이들의 특별한 성장기를 들여다 보다가 울컥 눈물이 쏟아질지도 모르겠다.

  한국식 교육 풍토와 한국식 경쟁 사회에서 그래도 살아남을 수 있느냐는 반문에 당당히 대답할 수 있는 이 24명의 아이들은 우리 주변의 모든 아이들과 다르지 않은 아이들이다. 김종휘는 그들을 통해 새로운 교육과 삶의 방식을 이야기한다. 우리가 잃고 살아가는 것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과연 우리의 학창 시절은 행복했나? 우리는 행복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나? 아이들에게 행복해지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 할 수 있나? 행복이 무엇인지 가르쳐 준 적이 있나?

  밤하늘의 별만큼이나 행복해 질 수 있는 방법이 많은데도 아이들을 네모난 교실과 네모난 틀 속에서 규격품으로 자라고 비슷한 미래와 당연한 과정을 상상하며 어른들의 방식으로 길러진다. 경쟁은 필수고 이기심은 선택이다. 그 순수하고 맑은 영혼들을 물들이는 자본과 경쟁의 논리, 억압과 복종의 순응적 이데올로기는 오늘도 헤게모니를 장악해가고 있다.

  한 우물이 아니라 여러 우물을 파서 행복해 진 아이들, 가족의 경계 너머에서 행복을 찾은 아이들, 타고난 ‘끼’를 무기로 행복해지는 아이들, 시민운동을 통해 나를 찾고 행복을 얻은 아이들, 세계를 무대로 뛰는 아이들, 자신이 학교를 만들어가는 아이들, 개혁을 위한 정치를 시작한 아이들, 새로운 기업을 만들어가는 아이들.

  스물네 명을 몇 개의 범주로 묶을 수는 없지만 그들은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서로 다른 빛깔을 가지고 있다. 이들이 대한민국에서 가장 행복한 아이들이라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꾸는 꿈이 비슷해질수록 경쟁은 치열해지고 행복은 멀어질 수도 있다. 꽃밭에 핀 꽃들의 모양과 크기가 다르듯이 그들도 제각기 다른 모양과 향기를 가지고 있다. 그들을 살릴 수 있는 교육과 사회는 불가능한가? 어른들은 아직도 정신을 못차리고 있다.

“내기할까? 내가 세상을 바꾸는지, 세상이 날 바꾸는지”라는 당시 리바이스 청바지 광고 문구를 개인의 신념으로 삼아 준표는 머리를 기르기 시작했다. - P. 117

  어른이 된다는 것은 세상과 타협하는 일이며 꿈을 포기하는 일이며 이기심으로 가득해지는 일이며 돈이 최고라는 생각을 갖게 되는 일이며 나만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며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일이다. 하지만 준표가 옳다.

  아이들이 희망인 이유는 ‘내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는다. 절대로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어른들보다 준표같은 아이들이 훨씬 더 많아지기를 그래서 세상을 바꿔주기를 기대해 본다. 아니, 팔짱끼고 옆에서 구경하지 않고 그들과 함께 어깨 겯고 함께 걸어갈 것이다. 그래서 ‘너, 행복하니?’라는 질문에 ‘나는 행복하다’고 대답할 수 있다.


080527-0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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