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경태의 스토리 철학 18
남경태 지음 / 들녘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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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습관적인 독서가 되지 않도록 경계하는 일은 쉽지 않다. 책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많다. 책이 주는 지적인 이미지와 교양을 좋아하는 것인지, 책을 읽는 행위 자체를 좋아하는 것인지, 책을 통해 얻을 수 있는 특별한 즐거움을 좋아하는 것인지, 책이 아니면 얻을 수 없는 고유한 무엇을 좋아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아니 그것들을 구별하는 것조차 모호할 수도 있다. 책이 인간에게 주는 기능과 역할을 진부하게 나열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다만 한 권, 한 권 책을 읽어 나갈 때마다 헤어나지 못하고 책 속으로 숨어버리거나 도피하고 싶은 자신을 발견할 때도 있다.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새로운 책의 표지를 접어놓아야 불안하지 않은 상태는 중독이다. 알면서 고치지 못하고 누가 크게 나무라지 않으니 더욱 큰일이다. 책만 읽는 바보가 되어 버린 지 오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때때로 쓰고 싶은 헛된 욕망이 생기기도 한다. 나무에 대한 예의를 지킬 수 있을 때가 오려는지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여전히 가장 어려운 일은 책을 쓰는 일보다 책을 고르는 일이다. 쉽게 가자면 고전을 섭렵하면 된다. 그 안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 맞는 말이다. 현실에 대한 해석과 고전에 대한 새로운 주석에 불과한 책들이 하루에도 수십 권씩 쏟아진다. 나무에 대한 예의를 모르는 쓰레기는 수를 헤아릴 수가 없다. 책 속에서 길을 잃고 책 속에서 길을 찾는다. 그래도 읽는 행위를 멈출 줄 모르는 나는 활자중독증이다.

  중독의 쾌락은 느껴 보지 않은 사람에게 설명할 수 없다. <남경태의 스토리 철학 18>과 같은 길고도 엽기적인 제목의 책이 내게 그런 즐거움을 준다. ‘18’을 ‘씨팔’로 읽은 것은 나의 오독인지 아니면 남경태의 의도적 오류인지 모르겠다. 남경태가 이번에는 철학에게 ‘서사구조’의 옷을 입혔다. 스토리가 있는 철학은 대중화의 또 다른 신 개발품이다.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고 쉽고 간단하게 전달하기 위한 노력들이 어찌 보면 눈물겹기까지 하다. 철학의 대중화를 위한 몸부림에 가까운 책들 중에 독자들은 보기 좋은 몸부림을 선택하면 된다. 내게 남경태의 저작들은 보기 좋고 입에 달며 읽는 즐거움을 충분히 만족시킨다. <개념어 사전>이나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철학>과 같은 맥락이다. 똑같은 제품도 소비자에 따라 만족도는 다른 법이다. 내게는 아주 매력적인 제품들이었다.

  철학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독학의 한계는 극복하기 어렵다. 개별 철학자들의 주저들을 한 권씩 섭렵하기도 하지만 씨줄과 날줄처럼 정교하게 엮이지도 않고 퍼즐처럼 한 조각씩 제자리를 찾는 것도 아니다. 그럴 때 이 책을 보면 고개를 끄덕이며 읽을 만하다. 요슈타인 가아더의 <소피의 세계>가 ‘소설’의 옷을 입고 등장한 ‘서양철학사’라면 남경태의 ‘스토리 철학 18’은 주제별 철학 개념 사전에 가깝다. 18개의 철학적 기본 개념들을 가지고 주체, 인식, 타자, 지식에서부터 행복, 매체, 텍스트, 언어, 사랑, 욕망, 이념에 이르기까지 종횡무진 누비고 다닌다. 기본적인 철학적 개념에서 시작해서 일상에서 마주하는 현대적 개념에 이르기까지 철학의 주요 개념들과 핵심 쟁점들을 선별한 후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이 책의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은 이 열여덟개의 ‘스토리’에 있다. 14세기 수도원에서 수도원장과 수도사, 젊은 수사가 미래의 종교와 정치에 대해 토론하는 가상 시나리오가 등장하기도 하고 저자와 편집자, 기자와 방송국 PD의 푸념이 등장하기도 한다. 연애 편지가 등장하기도 하고 일기 형식의 나레이션과 독백이 이어지기도 한다. 철학을 소개하는데 있어서 다양하고 파괴적인 형식들이지만 독자들의 깔깔한 입맛을 돋우는 진미 역할을 한다. 결코 가볍고 식상한 방식으로 접근하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을 만하다. 저자의 노력과 고민이 여실하게 드러내는 대목이다. 하나의 스토리가 정리되면 뒤이어 이에 대한 저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명쾌하고 잘 정돈된 느낌이다. 군더더기 없고 깔끔하다.

  하지만 항상 문제는 남는다. 철학도 어쩔 수 없이 세상을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이다. 주체에 대한 문제를 고민하든 대상을 관찰하든 그 관계에 대한 인식론이든. 그렇다면 가치가 개입될 수밖에 없고 저자에 의해 선별되고 편집된 개념만을 전해 들어야한다는 한계가 있다. 모든 책의 한계로 치부한다면 속 편히 넘어갈 수 있는 문제이긴 하다. 그리고 또 하나의 문제는 요약정리에 있다. 하나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한 명의 철학자 혹은 한 시대의 철학을 간단히 전달하는 과정에서 생기는 호기심과 궁금증 혹은 오해와 단정을 피하기 어렵다. ‘더 읽을 책’ 목록으로 아쉬움을 달래기는 했지만 갈증은 심해진다. 저자의 의도가 바로 그거였다면 대 성공이다!

  저자의 말대로 철학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해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를 고민하게 한다. 마르크스의 말대로 물론 생각하고 세상을 해석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세상을 변혁시키는 것이겠지만 일단 내가 생각하는 방식과 사물과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 그리고 나에 대한 주체성을 확립하고 행동으로 내 삶을 변화시키는 것이 이 책을 읽는 궁극적인 목적이다. 거창하게 접근했는지 항상 모든 이데올로기의 종점은 행동이다. 그래서 나는 얼마나 변했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오롯이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진다.


071211-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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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을 위한 변명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박정태 옮김 / 이학사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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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년 전과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사르트르식으로 말하자면 지식인들의 사회적 위치가 달라졌고 특수성과 보편성 측면에서 고민거리가 줄었다. 지배계급인 부르주아의 속내를 폭로하거나 까발릴 것도 없이 너무나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제 지식인의 역할은 행동과 실천만 남은 것일까? 그런 논리라면 모든 지식인은 활동가나 혁명가가 되어야 하나? 직접 움직이지 않는 지식인은 정체성에 혼란이 온 것이거나 사이비 지식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일본에서 사르트르가 3일간 강연했던 내용을 고스란히 살려 낸 책이 이번에 새로 발간된 <지식인을 위한 변명>이다. 고등학생까지 읽힐 목적으로 어려운 용어와 인용한 사람들에 대한 각주까지 상세하게 안내되어 있다. 가장 쉽고 이해하기 쉽게 펴낸 책이라고 볼 수 있지만 내용 자체의 어려움은 쉽게 희석되지 않는다. 구체적이고 친절한 해설이 따라붙지 않는 다음에야 한계가 있는 것이다.

  번역본이 보여주는 용어상의 한계는 ‘세계-내-존재, 준-의미작용, 비-지식’과 같은 철학용어는 그 자체의 의미가 이해되지 않는다. 사용된 맥락보다 먼저 개념이 잡히지 않으니 문맥 속의 의미를 잡아낼 뿐이다. 하이데거를 위시한 실존주의 철학이 성행했던 시기의 용어와 개념들은 우리의 사유 방식으로 이해하기가 만만치 않다. ‘존재’라는 개념 자체도 ‘be’동사가 없는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는 없는 개념이나 마찬가지라고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것은 물론 번역의 문제가 아니라 한 언어가 다른 언어로 차용되면서 발생하는 당연하고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철학적 개념을 설명하는 책이 아니기 때문에 거칠게 훑고 넘어가도 사실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는 퇴색하지 않는다. 동양사람인 일본인을 대상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고 있던 사르트르가 강연을 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흥미롭다. 서양과 동양의 구분이 아니라 패전의 멍에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일본인들은 우리 시각으로 보면 지독한 ‘빨갱이’였던 사르트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수 있는 여유가 있었던 것일까? 어쨌든 이렇게 시간이 흘러도 그 의미와 약발이 떨어지지 않는 책을 고전이라고 한다면 이 책은 이미 고전의 반열에 올라섰다고 볼 수 있다.

  사르트의 어법은 강경하고 거칠다. 한국식으로 말하면, 그가 살아온 삶이 그러하듯이 올곧은 선비의 모습이다. 부러질지언정 구부러지지 않는 모습을 엿볼 수 있다. 문장에서 느껴지는 힘은 강연을 통해 전해지는 목소리만큼 분명하고 단호하다. 3일간의 강연을 통해 ‘지식인이란 무엇인가?’, ‘지식인의 기능’, ‘작가는 지식인인가?’에 대해 이야기 한다.

  강연에서 주로 다루어지고 있듯이 지식인은 불안한 존재다. 지배계급(부르주아)와 피지배계급(프롤레타리아) 사이에 위치한 중간자의 입장으로 지배자의 특수성과 피지배자의 보편성을 모두 간직한 모순적 존재로서 살아가야 하는 숙명이다. 결국 지배계급에 기대어 살아가 수밖에 없는 이들은 피지배 계급인 노동자 계급의 목표와 일치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두 계급 사이의 모순과 갈등 속에 존재할 수밖에 없지만 노동자 계급의 포괄주의와 보편성은 지식의 전문성과 일치한다. 따라서 특수성에 기댄 지식인의 삶은 필연적으로 모순이 생기게 되는데 바로 여기에 지식인의 역할과 기능이 있다. 삶의 외적 모순을 극복하고 내적인 갈등을 해소하는 차원에서 기능해야 하는 것이 지식인의 기능과 역할이라는 것이다. 노동자 계급의 보편주의에 기초한 지식인의 전문성은 결국 지배계급의 착취와 억압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시간이 흐르고 세상이 변했지만 소수자에 의한 다수의 지배는 더욱 공고해졌다. 지배계급의 헤게모니는 더욱 강력해졌으면 네트워크를 형성해가고 있다. 서서히 그 전모가 밝혀지는 검은 괴물 그룹 삼성이 그 증거이다. 산업자본은 현대 사회의 지배계급이다. 맑스주의에 기초한 사르트르의 사유는 멈출 줄 모르고 계속되는 자본의 증식과 거대화를 예견한 듯하다.

  21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한 사르트르의 사유 방식은 거칠지만 설득력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모든 인간은 ‘상황속의 존재’일 뿐이다. 지금 우리가 이 땅에서 지식인으로 자처하거나 그런 이름으로 불리워지는 사람들을 떠올려 본다. 그들의 과연 지식인인가? 지식인의 기능에 충실한가? 더불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는 지식인인가? 지식인인의 기준은 무엇인가? 기생충처럼 자본에 달라붙어 있거나 왜곡된 시선을 선전하는 사이비 지식인은 없는가? 두 눈 뜨고 지켜보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며 지식인의 역할과 기능을 충실히 수행하는 참된 지식인을 만나고 싶은 것이 우리의 작은 소망이다. 아니, 어쩌면 우리 모두가 지식인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071127-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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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정원 - 김용석의 고전으로 철학하기
김용석 지음 / 한겨레출판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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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도, 변화 가능성이 있다면 나는 다른 길을 선택할 것이다. 전 국민에게 설문 조사를 하면 99%쯤 같은 대답을 할지도 모르겠다. 나이와 직업, 성별, 재산과 무관하게 자신의 삶을 성찰해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타인과의 관계나 사회적 위치를 포기하고 자신의 전 생애를 보람있고 가치있게 만들어 볼 수는 없을까. 모두가 꿈꾸지만 어쩌면 아무도 갈 수 없는 유토피아처럼 우리는 항상 가보지 못한 길이나 뒤에 남겨진 길에 대한 아쉬움을 숙명처럼 짊어지고 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
                   -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했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책읽기와 산책보다 더 즐거운 일이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 일을 하겠다. 현실적인, 아니 사회적인 욕망들과 무관한 순수한 내적 욕망들은 지나치게 사치스럽다. 스스로에게 던져 본 질문들이지만 이기적인 욕망에 불과하며 비현실적이기도 하다. 때때로 너무 쉽고 간단한 일들이 현실에서는 아득하게 보일 때가 있는 법이다. 근처를 어슬렁거려 보지만 현실은 여전히 만만치가 않다.

  철학의 정원을 꿈꾸는 철학자는 행복해 보인다. 김용석은 <철학정원>에서 고전을 읽는다. 삶이란 무엇인가, 왜 태어났는가를 묻는 대신 지금의 나는 누구일까, 행복과 행복 사이엔 무엇이 있을까, ‘함께’ 또 ‘따로’인 인간의 조건, 우리는 얼마나 놀 줄 아는가, 지팡이의 다른 쪽 끝을 집어 올린다면, 어떻게 ‘불확실성’과 공생할 것인가 등에 관한 끊임없는 질문들 속을 주유하며 사색에 잠기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잠시 현실을 있고 싶다면 이 책을 보라.

  마흔 일곱 권의 책과 여덟 편의 영화로 ‘철학’을 시도하는 이 책은 동화, 문학, 영화, 철학, 정치/사회/문화 사상, 과학으로 나누어 다양한 산책로를 만들어 놓았다. 책 한 권을 들고 조용한 가을 낙엽을 밟는 기분으로 저자와 대화를 나누면 좋다. 고전을 통해 철학을 한다는 말은 두 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놓칠 위험도 안고 있다. 반대로 제대로 읽은 고전은 현실 속에 그 모습을 드러내며 살아가는 모든 장면에서 ‘사유하는 몸짓’으로 되살아나야 한다. 저자의 목적이 그것이라고 하지만 절반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둬야겠다. 한 권의 책으로 그러한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위험한 욕심만 접는다면 저자를 따라 산책을 나서도 좋겠다.

  책을 읽고 그 내용을 소개하거나 이해시키거나 해석하는 책은 재수 없다. 참고서나 수험서가 아닌 다음에야 책을 수단으로 이용할 필요는 없다. 미처 읽어내지 못한 행간의 의미를 찾아내고 다른 사람들의 느낌과 반응이 궁금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목적이 될 수는 없다. 김용석은 ‘고전으로 철학하기’라는 새로운 시도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시범을 보일 테니 따라해 보라는 말이다.

  철학적 사고란 끝없는 질문의 연속이라고 믿는다. 창의적이고 도발적인 생각과 새롭고 낯설게 바라보는 훈련은 현실 속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다만 우리가 선택하지 않고 외면할 뿐이다. 21세기에도 애국조회는 계속되고 있으며 두발 단속 때문에 학교에 등교하지 않는 아이들과 씨름하는 교사가 있고, 돈으로 온 나라의 고관대작들을 떡 주무르듯 하는 재벌 총수가 있으며, 5초에 한 명씩 10세 미만의 아이가 굶어 죽어가고 있는 현실 속에서 어쩌면 나는 눈뜬 장님으로 귀머거리로 벙어리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제 발 밑 일도 모르는 주제에 하늘의 일을 알려고 하십니까(P. 407 <테아이테토스>)”라는 플라톤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바로 내 주변의 사람들 내 앞날도 모르는 주제에 하늘의 일에 관심을 갖는 것은 또다른 오만과 편견을 키워나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읽고 펠리니의 <길>을 보고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를 들여다 보았지만 김용석이 말하는 ‘고전으로 철학하기’는 멀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어디 사는 일이 생각만으로 되는가. 이렇게 또 하루 부딪치고 내일에게 희망을 묻고 책에서 책을 찾으며 검은 밤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은 아닌가.


071106-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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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11-06 2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이 책 읽으셨네요^^ 저두 마지막 몇꼭지 남기고 앞부분은 읽었는데.
'돈으로 온 나라의 고관대작들을 떡 주무르듯 하는 재벌총수가 있으며' 이부분에서 오늘
어떤 교수님은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나쁜 것이 아니라고 하더군요
돈 있는 사람이 피해자에게 물질적으로 손해배상을 해주는 것으로 피해자와의 합의를 이끌어내면 법질서의 회복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고.
국가기관의 힘을 빌리지 않더라도 당사자의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중요한 수단이 된다는 점에서 무시할 수 없는거라고요.
돈있는 사람들이 집행유예로 풀려나는 것도 1심에서 사회적파급효과 때문에 실형을 선고하고, 피고인은 불복해서 항소하고, 그렇게 미결구금일수가 길어지면서 사실상 형집행을 받은 것과 같은 효과가 있기 때문에 양형에서 참작사유가 되는- 짜여진 시나리오라고요.
근데 그거 바꾸어 말하면, 없는 사람은 몸을 사리고 살아야 하고, 있는 사람은 지멋대로 행동해도 된다는 말. 아닐까요?

sceptic 2007-11-07 08:28   좋아요 0 | URL
피해자에게 물질적으로 손해배상을 해주는 것으로 피해자와의 합의를 이끌어내면 법질서의 회복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게 된다는 말이 논리적으로 합당한가요? 법의 목적이 과연 그러한가요? 씁쓸하게 우울해지는데요...

이건희나 김용성 같은 사람들은 김승현처럼 돈이 곧 힘이라는 사실을 폭력적으로 보여주고 있는데도, 현실은 많은 사람들에게 잘못됐다는 교훈대신 부러움을 유발하고 좀 더 많은 돈을 욕망하도록 만들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황소걸음이라도 현실이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맹목적인 희망만으로 심하게 갑갑증을 느낄 때가 많습니다.

재밌는 전공을 하시네요. 넓고 깊게 그리고 소수자의 입장에서도 고민해주셨으면 좋겠다는 당연한 바람을 갖고 있습니다.

2007-11-07 20: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7-11-07 2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HOW TO READ 비트겐슈타인 How To Read 시리즈
레이 몽크 지음, 김병화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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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지깽이를 들고 칼 포퍼를 위협했다는 선정적인 내용 때문에 처음 읽은 책이 <비트겐슈타인은 왜?>였다. <열린사회와 그 적들>에서 칼 포퍼는 전체주의와 폭력에 의한 혁명을 혹독하게 비판하며 ‘닫힌 사회’로 규정지었다. 개인주의를 옹호하고 점진적인 개혁에 의한 ‘열린사회’를 꿈꾸었던 이 책의 저자는 초청 강연을 위해 캠브리지에 대학을 방문했다. 10분에 비트겐슈타인이 한 판 뜨자고 덤빈 이유가 궁금해서 펼쳐든 책으로 기억한다.

  철학자의 삶과 기질에 대한 호기심과 궁금증으로 시작해서 천재라고 명명되는 이유가 궁금했다. <논리-철학 논고>를 읽으면서 참 독특한 형식과 내용의 철학책이라고 생각했다. 반도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명제를 분석하는 장은 어차피 내 능력 밖의 범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포기하고 흐름을 따라 읽었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는 구절을 멋대로 해석하며 전혀 다른 상황에도 적용해보며 내가 얼마나 용감하고 무식하게 상상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에 대한 호기심과 사유의 흐름을 짐작하기 어려웠다. 얼마전 <청갈색책>에 도전했으나 비슷한 낭패감을 맛보았고 다른 방법을 고민하며 날개를 접었다.

  서점에 갔다가 눈에 띠는 ‘How to read……'시리즈를 보고 다시 <How to read 비트겐슈타인>에 또 다시 현혹됐다. 도대체 이 철학자의 매력은 무엇일까? 지극히 개인적인 호기심에서 출발했지만 그의 철학이 주는 매력은 독특하다. 특히 ‘언어에 대한 감각과 개념에 대해서 조금씩 그 의미들을 짚어나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이 책에게 감사한다. 하나의 텍스를 간접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에 개인적인 거부감을 가지고 있다. 깨지더라도 일단 부딪히고 만져보고 냄새 맡고 엉겨봐야 짐작이라도 할 수 있다. 그러고 나면 뭔가 아쉽고 부족한 부분들이 보인다. 그때, 이런 종류의 책들을 접하면 가뭄에 단비처럼 거의 모든 것들이 흡수되고 이전의 남아있던 의문들과 모호함이 안개처럼 사라진다.

  나머지 시리즈도 마찬가지겠지만 그들의 저작을 읽지 않고 이 책들을 읽는다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간접적인 독서에 불과하다. 다른 사람이 읽은 내용의 해설을 엿듣고 그 텍스트를 읽은 것으로 착각하거나 오히려 주관적인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할 위험성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후기 철학을 대표하는 <철학적 탐구>보다 오히려 그가 생의 마지막에 관심을 가졌던 ‘심리철학’이 보고 싶어졌다. 기회가 될 때마다 부딪히며 생각하고 한 줄 한 줄 음미하는 즐거움을 가질 수 있다면 기꺼이 비트겐슈타인에게 손을 내밀고 싶다.

  철학에 관한 모든 문제를 해결한 것으로 생각하며 철학을 떠났던 비트겐슈타인이 단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는 음악에 대한 깊은 이해와 애정이 있었다는 사실이 새롭다. 이것은 그가 살았던 시대와의 갈등과 고민 속에서 철학의 문제를 단지 해결해야할 과제 정도로 여겼던 그의 생각들을 짐작하는 데 또 하나의 상상력을 발휘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말할 수 있는 것과 보여줄 수 있는 것들 사이의 간극을 아직도 확실하게 정리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언어와 사물과의 관계, 사물들과 사실들 사이의 관계에 대해 그가 가졌던 깊은 고민과 철학적 해결 방법들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조금은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준 고마운 책이다. 이 책의 저자 레이 몽크는 영구의 대표적인 철학자로 비트겐슈타인의 전기도 썼다. 한 인가의 삶과 사상에 대해 지극한 애정과 객관적인 시선으로 독자들에게 이해의 폭과 깊이를 더해 주는 좋은 안내서를 제공해 준 그에게 감사해야겠다.

  책의 형식과 분량은 가볍다. 비트겐슈타인의 첫 리뷰인 <케임브리지 리뷰>에서부터 <철학적 탐구>에 이르기까지 연대기별로 발표된 저작들을 인용하면서 그의 핵심 사상을 설명하는 방법을 택하고 있다. 사이사이 그의 생애를 사상과 연결시키고 있지만 평전이 아니기 때문에 간략하게 정리하며 그의 철학적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데 관심과 정성을 기울이고 있다. 대표적인 부분들을 발췌하고 그 부분들이 전체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으며 어떻게 기능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일은 레이 몽크의 해설이 전부일 수 없겠지만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날카롭고 예리한 분석과 객관적인 관점을 유지하는 글쓰기는 읽는 사람들에게 깊은 신뢰감을 갖게 한다. 잘 차려진 밥상이 아니라 숟가락 같은 역할을 할 수 밖에 없는 책이지만 숟가락 없이 밥을 먹기도 곤란하다. 좋은 숟가락은 맛있는 밥을 위해 준비된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070705-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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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갈색책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지음, 진중권 옮김 / 그린비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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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것에 대해 알고 있다.” 내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말을 했다면 그 사람은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을까? “이가 아프다.”라고 말했을 때, 타인은 나의 고통을 느낄 수 있을까?

  관념론과 실재론의 두 축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근대 철학의 기본 토대를 뒤흔들었던 비트겐슈타인의 사유는 철저하게 ‘언어’에 근거하고 있다. 언어가 지시하는 의미와 역할은 늘 그 한계를 보이고 엄밀하고 명징한 분석과 구분으로부터 모든 사유는 출발한다. 하나의 사물에 대해 우리가 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이름을 불러주는 것에 불과하다. 그것을 우리가 얼마나 확실한 진리로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명칭 자체에 대한 불확실성에 대해 의심을 거둘 수가 없다. 비트겐슈타인은 언어를 통한 사유의 방식을 두 권의 책을 통해 탐구하기 시작한다.

  <청갈색책>은 제목이 없는 강의 노트이다. 제자에게 자신의 강의를 기록시켜서 청색 표지와 갈색 표지로 복사본 몇 부만 남기고 그 중 하나를 스승인 버트란드 러셀에게 보낸다. 그것이 출판되어 ‘청색책’과 ‘갈색책’이 되었고, 한 권으로 묶여 <청갈색책>이 되었다. 이 책은 <철학적 탐구>가 나오기 전에 비트겐슈타인의 사유의 단초를 읽어낼 수 있는 책으로 의미를 지닌다고 하는데, <철학적 탐구>를 읽어보려다 미루고 있어 내용은 알 수 없다.

  개인적인 지식과 이해력의 한계 때문에 자괴감이 들었다. 한 권의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 단순히 글자와 어휘를 아는 정도의 문식성은 문제가 되지 않는 책이다. 그의 주저인 <논리-철학 논고>는 오히려 나름대로 재미있게(?) 읽었다. 전부 이해할 수는 없었겠지만 철학적 사유의 단초들을 읽어낼 수 있었고, 체계적이고 논리적인 내용의 구조와 분량과 상관없이 치밀하고 조직적인 구성이 읽는 사람을 압도했다. 비트겐슈타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상황에 따라 되새겨 볼만한 내용으로 기억하고 있다. 반복해서 읽어봐야 할 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책은 강의 형식의 노트라고 그런지 몰라도 장점과 단점을 모두 가지고 있다. 자유분방하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모두 쏟아내며 자신의 생각의 흐름을 거침없이 쏟아내고 있는 느낌이다. 하지만 체계가 잡혀있지 않아 강의를 듣는 입장이 아니라 기록된 활자로 번역되어 읽어야하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이 많았다. 비트겐슈타인이 사용하는 언어 자체가 어렵고 난해한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언어의 의미와 사유와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끊임없는 질문과 탐구 과정을 따라가기 어렵다.

  언어의 인간을 다른 종과 구별하게 해주는 유일한 수단이라면 철학적 사유는 당연히 언어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언어철학적 관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이 철학에 끼친 영향력이 무엇이든 이 철학자가 말하고 싶었던 사유의 방식이나 과정들이 몹시 궁금하다. 혼자 책을 보고 이해하고 사유하는 것의 한계가 분명하고 절실하게 느껴지게 한 책이다.

  기회가 된다면 세미나든 강연회든 체계적으로 알고 싶은 호기심이 생긴다. 연구 공간 ‘수유+너머’ 같은 곳이든, 철학아카데미든 찾아가야 하는 적극적인 자세가 남겨진다. 책이 지니는 한계는 소통의 문제로 남는다. 이해되지 않는 문장들과 행간의 의미들을 찾으려는 노력들이 필요하다. 절실하지 않으면 끝까지 버틴다. 호기심이 생기고 생각의 지평을 넓히고, 다른 분야의 학문이나 다른 책들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 위해서라도 욕심이 생기지만 언제가 될 지는 알 수가 없다. 누구든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인문학이나 철학 강좌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면 좋겠다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을 해 본다.


070622-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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