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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정원 - 김용석의 고전으로 철학하기
김용석 지음 / 한겨레출판 / 2007년 10월
평점 :
아직도, 변화 가능성이 있다면 나는 다른 길을 선택할 것이다. 전 국민에게 설문 조사를 하면 99%쯤 같은 대답을 할지도 모르겠다. 나이와 직업, 성별, 재산과 무관하게 자신의 삶을 성찰해 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타인과의 관계나 사회적 위치를 포기하고 자신의 전 생애를 보람있고 가치있게 만들어 볼 수는 없을까. 모두가 꿈꾸지만 어쩌면 아무도 갈 수 없는 유토피아처럼 우리는 항상 가보지 못한 길이나 뒤에 남겨진 길에 대한 아쉬움을 숙명처럼 짊어지고 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가지 않은 길(The Road not Taken)
-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했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책읽기와 산책보다 더 즐거운 일이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 일을 하겠다. 현실적인, 아니 사회적인 욕망들과 무관한 순수한 내적 욕망들은 지나치게 사치스럽다. 스스로에게 던져 본 질문들이지만 이기적인 욕망에 불과하며 비현실적이기도 하다. 때때로 너무 쉽고 간단한 일들이 현실에서는 아득하게 보일 때가 있는 법이다. 근처를 어슬렁거려 보지만 현실은 여전히 만만치가 않다.
철학의 정원을 꿈꾸는 철학자는 행복해 보인다. 김용석은 <철학정원>에서 고전을 읽는다. 삶이란 무엇인가, 왜 태어났는가를 묻는 대신 지금의 나는 누구일까, 행복과 행복 사이엔 무엇이 있을까, ‘함께’ 또 ‘따로’인 인간의 조건, 우리는 얼마나 놀 줄 아는가, 지팡이의 다른 쪽 끝을 집어 올린다면, 어떻게 ‘불확실성’과 공생할 것인가 등에 관한 끊임없는 질문들 속을 주유하며 사색에 잠기고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잠시 현실을 있고 싶다면 이 책을 보라.
마흔 일곱 권의 책과 여덟 편의 영화로 ‘철학’을 시도하는 이 책은 동화, 문학, 영화, 철학, 정치/사회/문화 사상, 과학으로 나누어 다양한 산책로를 만들어 놓았다. 책 한 권을 들고 조용한 가을 낙엽을 밟는 기분으로 저자와 대화를 나누면 좋다. 고전을 통해 철학을 한다는 말은 두 마리의 토끼를 한꺼번에 놓칠 위험도 안고 있다. 반대로 제대로 읽은 고전은 현실 속에 그 모습을 드러내며 살아가는 모든 장면에서 ‘사유하는 몸짓’으로 되살아나야 한다. 저자의 목적이 그것이라고 하지만 절반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둬야겠다. 한 권의 책으로 그러한 수준에 도달할 수 있다는 위험한 욕심만 접는다면 저자를 따라 산책을 나서도 좋겠다.
책을 읽고 그 내용을 소개하거나 이해시키거나 해석하는 책은 재수 없다. 참고서나 수험서가 아닌 다음에야 책을 수단으로 이용할 필요는 없다. 미처 읽어내지 못한 행간의 의미를 찾아내고 다른 사람들의 느낌과 반응이 궁금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목적이 될 수는 없다. 김용석은 ‘고전으로 철학하기’라는 새로운 시도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시범을 보일 테니 따라해 보라는 말이다.
철학적 사고란 끝없는 질문의 연속이라고 믿는다. 창의적이고 도발적인 생각과 새롭고 낯설게 바라보는 훈련은 현실 속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다만 우리가 선택하지 않고 외면할 뿐이다. 21세기에도 애국조회는 계속되고 있으며 두발 단속 때문에 학교에 등교하지 않는 아이들과 씨름하는 교사가 있고, 돈으로 온 나라의 고관대작들을 떡 주무르듯 하는 재벌 총수가 있으며, 5초에 한 명씩 10세 미만의 아이가 굶어 죽어가고 있는 현실 속에서 어쩌면 나는 눈뜬 장님으로 귀머거리로 벙어리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제 발 밑 일도 모르는 주제에 하늘의 일을 알려고 하십니까(P. 407 <테아이테토스>)”라는 플라톤의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바로 내 주변의 사람들 내 앞날도 모르는 주제에 하늘의 일에 관심을 갖는 것은 또다른 오만과 편견을 키워나가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읽고 펠리니의 <길>을 보고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를 들여다 보았지만 김용석이 말하는 ‘고전으로 철학하기’는 멀게만 느껴진다. 하지만 어디 사는 일이 생각만으로 되는가. 이렇게 또 하루 부딪치고 내일에게 희망을 묻고 책에서 책을 찾으며 검은 밤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은 아닌가.
071106-1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