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틴어 수업 - 지적이고 아름다운 삶을 위한
한동일 지음 / 흐름출판 / 2017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Vulnerant omnes, ultma necat.
모든 사람은 상처만 주다가 마침내 죽는다. - 254
  
공부한다는 것살아간다는 것은 우리 마음속의 아지랑이를 보는 일입니다그리고 이 단어가 원래 의미하는 대로 보잘것없는 것’, ‘허풍과 같은 마음의 현상도 들여다보기를 바랍니다.”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선생님을 만날 수 있는 행운은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습니다세상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무언가를 가르치려 들지만 배우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라틴어를 기막히게 가르치는 교수법의 달인이었다면 한동일의 라틴어 수업은 다른 내용이었을 겁니다한때 지나가는 바람인지 오래오래 대기를 순환시킬만한 움직임인지 지켜보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습니다이 책도 그랬습니다베스트셀러에 대한 호기심과 매번 부딪치는 실망감 사이에서 자신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넉넉하게 점수를 주자면 배울 게 없는 책은 없습니다책의 형태로 묶였다면 굳이 욕할 필요도 없이 나름의 장점이 있을 겁니다단 한 가지라도하지만 책을 고르고 돈 들여 구입하고 시간을 내 읽는 수고를 갈음할만한 배움도 깨달음도 감동도 없을 때가 더 많습니다제 평가가 짠 탓은 아마도 기대가 크고 늘 두근거리며 무언가 배우고 싶은 열망이 있기 때문이겠죠한동일 선생님은 수강생에게 어떤 이야기를 어떤 목소리로 들려주었는지 모르지만 제가 책으로 만난 라틴어 수업은 전공과 이력이 주는 희소성오프라인 수강생의 반응이 더 커보였습니다기대가 너무 컸던 탓입니다아마 어떤 독자도 이 책을 통해 라틴어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을 기대하지는 않았을 겁니다문법 체계와 교수법을 공부하고 싶었던 독자가 있었을까요쉽게 접하지 못하는 라틴어 문화권의 이야기가 궁금했을 겁니다제가 그랬거든요그 기대만큼은 충분히 충족할 수 있는 책입니다한 편 한 편의 이야기가 라틴어 단어 하나문장 하나를 통해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으니까요.
  
이 책이 좋았던 건 한동일의 태도였습니다. ‘공부한 사람의 포부는 좀 더 크고 넓은 차원의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나만 생각하기보다 더 많은 사람더 넓은 세계의 행복을 위해 자기 능력이 쓰일 수 있도록 하겠다는한 차원 높은 가치를 추구했으면 좋겠습니다배운 사람이 못 배운 사람과 달라야 하는 지점은 배움을 나 혼자 잘 살기 위해 쓰느냐 나눔으로 승화시키느냐 하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라는 말이 얼마나 좋은가요. ‘배워서 남 주는’ 그 고귀한 가치를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진정한 지성인이 아닐까요공부를 많이 해서 지식인을 될 수 있으나 그 지식을 나누고 실천할 줄 모르면 지성인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너무나 당연한 말이지요제 한 몸 출세를 위해 몸부림치고제 가족의 잇속을 챙기고입으로는 그럴듯한 가치를 내세우면서 부와 명예를 챙기는 사람을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훨씬 많습니다진보와 보수젊은이와 노인여자와 남자기독교와 불교한국과 미국백인과 흑인 가릴 것 없습니다사람은 저마다 다른 프레임으로 세상을 봅니다이념종교직업나이성별학벌인종국가......그게 무엇이든 틀렸습니다나눔과 실천배려와 소통은 입으로 내세울 수 없습니다제가 가진 인간에 대한 평가 기준은 명확합니다누구의 이익에 복무하는가이타적인 삶이웃을 위한 희생더 나은 가치를 위한 실천 등 보통 사람이 흉내내기 어려운 삶의 목적을 설정했느냐를 따지는 게 아닙니다결국 자신의 이익을 위해, ‘출세와 명예를 지키고, ‘이 되는 쪽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너무 많이 본 탓일까요진영 논리도이념의 잣대도 이 큰 틀을 허물지 못합니다어디든 분쟁이 생기고 갈등이 심화되고 고통이 따르는 이유는 욕망과 이익 때문이 아닐까요그래서 한동일의 라틴어 수업을 읽는 동안 마음이 조금 맑아지는 느낌이었습니다출판사가 내세운 동아시아 최초 바티칸 대법원 로타 로마나 변호사라는 타이틀 운운이 아니라 스스로 공부하는 노동자로서 자세를 바로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그 마음이 그 태도가 물론 수강생과 독자들에게 전달되었다고 믿습니다
  
최소한 ‘Do ut Des’ 정도만 지켜도 세상은 달라집니다기브 앤 테이크give and take가 한국인의 정서에는 야박한가요한국 사회에서 성장하고 배우고 벌었다면 그만큼 돌려주는 게 예의입니다그것이 지식이든 명예든 금전적 이익이든 말입니다저 혼자 잘나 그 자리에 오른 줄 아는 사람의 착각은 도 우트 데스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이 책에는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경구도 많이 등장합니다익숙한 문장이 라틴어에서 파생되었든 어느 지역에나 있는 금언이든 상관없습니다한동일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그저 살아가는 일이란 수천 년 전 라틴어를 사용하던 로마 사람들이나 한국어를 사용하는 우리들이나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우리가 라틴어의 단수복수남성여성중성에 따른 격변화 단어를 어디에 쓰겠습니다한글이 얼마나 위대한 글자인지 다시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될 뿐입니다하지만 언어는 사고입니다그 자체가 생각의 틀입니다라틴어가 가진 특성이 문화이고 그들의 생각이며 문명의 기틀입니다한국어도 마찬가지일 테지요여러 사람이 지적했지만 개인적으로 저도 늘 안타깝게 생각하는 한국어의 약점은다른 사람들은 그것이 동양 문화의 미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존대법입니다직장의 회의 장면을 떠올려 보세요예를 들어 직급이 낮은 사람은 부장님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라고 말해야 합니다하지만 직급이 높은 사람은 !’ 12글자와 두 글자아니 !’ 한 글자면 어떨까요과장해서 표현했나요의사표현 도구로서 언어는 출발부터 다릅니다평등하지 못한 인간관계 자기 생각을 말하고 표현하고 감정을 드러내는 데 익숙하지 않은 이유는 잘못된 교육가부장적 사회구조수직적 직급체계장유유서에 대한 사회적 관습 등 다양한 요소 때문이겠지만 그 출발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 때문이 아닐까요자신의 노력으로 얻은 게 아닌 나이성별외모국적부모의 직업출신지역......’ 등은 어쩔 수 없는 운명이면서 차별을 구조화하는 도구로 활용되어서는 안 될 요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라틴어가 가장 우수한 언어라서 그 정신과 문화를 배우기 위해 이 책을 읽는 건 아닙니다낯선 곳에 대한 호기심시간을 견뎌낸 언어가 안고 있는 문화와 전통그것이 지금 여기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살펴볼 뿐입니다물론 제가 밑줄 친 곳은 뻔합니다이 책을 읽은 다른 분들은 어떤 라틴어 문장에 밑줄 그었는지 궁금합니다
  
In omnibus requiem quaesivi, et nusquam inveni nisi angulo cum libro.
내가 이 세상 도처에서 쉴 곳을 찾아보았으되마침내 찾아낸책이 있는 구석방보다 더 나은 곳은 없더라. - 토마스 아 켐피스(1380~1471), 독일의 수도자이자 종교사상가, 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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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원할 자유 - 현대의학에 빼앗긴 죽을 권리를 찾아서
케이티 버틀러 지음, 전미영 옮김 / 명랑한지성 / 201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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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요즘 내가 겪은 모든 문제들에 대한 답은 수용이다. 내 마음이 불안해지는 것은 어떤 사람, 장소, 일 또는 상황(내 인생의 한 단면)을 내가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사람, 장소, 일 또는 상황은 그 순간에 정해진 방식대로 일어난 것이라는 사실을 수용해야만 평온을 찾을 수 있다. 어떤 일도, 신이 창조한 이 세상에서는 어떤 일도 결코 실수로 일어나지 않는다.

 

케이티 버틀러는 심박조율기를 달고 연명하는 아버지를 간호하는 어머니와 갈등을 겪는다. 남동생 조너선에게 전화를 걸어 험담을 늘어놓자 동생은 미국 알코올중독방지회에서 발행한 책자의 한 문단을 크게 읽어준다.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왜 나는 이런 생각을 할까, 라고 생각해도 자신이 겪어야 하는 일을 과거로 돌이킬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수용은 아무나 도달할 수 있는 삶의 경지가 아니다. 부처님도 힘들다는 관용과 수용의 자세를 아무렇지도 않게 말하는 사람들은 실천하며 살고 있을까.

 

책장을 뒤적여 일단 죽음에 관한 책들을 뒤적인다. 직접 죽음을 다룬 책들이다.

 

1. 철학 : 죽음이란 무엇인가(셸리 케이건)

2. 철학 : 죽어가는 자의 고독(로베르트)

3. 의학 : 우리는 어떻게 죽고 싶은가(미하엘 데 리더)

4. 에세이 :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데이비드 실즈)

5. 문화 : 임사체험(다치바나 다카시)

6. 인문 : 죽음, 또 하나의 세계(최준식)

7. 인문 :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김열규)

 

책 모임을 통해 읽게 될 책은,

 

1. 문학 : 이반 일리치의 죽음(레프 톨스토이)

2. 사회 : 자살론(에밀 뒤르켐)

3. 철학 : 죽음에 이르는 병(키에르케고르)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책을 한 권 더 읽어볼 생각이다.

 

미국은 세계적인 의료 선진국이다. ‘생명 연장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메치니코프요구르트를 마시는 대신 각종 첨단 의료기기에 기대 집중치료실에서 발버둥치는 생의 마지막 장면은 비참하다. 이 책은 아버지의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심박조절기에 의존한 후 치매에 걸려 여든 다섯에 심박조절기를 끌 때까지의 기록이다. 간병에 지쳐 어머니의 남은 생은 피폐해졌고 경제적으로도 무너졌다. 이 책의 저자인 딸 케이티 버틀러 또한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는다. 그렇다고 해서 가족을 위해 빠른 죽음을 선택하라고 주장하는 책은 절대 아니다. 현대 의학이 우리의 품위있는 죽음을 어떻게 방해하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무병장수의 꿈은 인류의 오랜 꿈이다. 그러나 아무리 의학이 발달해도 인간은 영원히 살 수 없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순간, 죽어야 하는 사람도 그 가족과 친지도 함께 불행해진다. 죽음을 터부시하는 동양의 오랜 전통으로 인해 우리는 서양보다 더 큰 죽음에 대한 공포를 안고 살아간다. 그러나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거나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삶은 죽음을 전제로 시작된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는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훌륭한 안내자가 된다.

 

케이티의 아버지 제프리 어니스트 버틀러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한쪽 팔을 잃고 미국으로 이주한 후 웨슬리안 대학의 교수가 된다. 미국의 평범한 중산층이었지만 그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종교와 문화에 따라 죽음을 대하는 태도와 방법이 다르다. ‘시작을 전제로 한다. 유한한 삶에 경배할 수 있어야 하루가 소중하다. 우리는 마지막이 언제인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오늘은 어제 죽은 이가 그토록 바라던 내일이 아니라 내일은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미래다. 삶의 예측 불가능성이야말로 순간을 소중하게 사는 유일한 방법이 아닐까.

 

뇌종양 진단을 받은 마틴과 골수암 말기의 루디는 생의 마지막 여행을 떠난다. 한 번도 바다를 보지 못한 루디를 위해 어마어마한 돈이 실린 악당의 차인줄도 모르고 두 사람은 스포츠카를 훔쳐 타고 달린다. 어차피 미래가 없는 둘은 바다를 향해 질주하는 게 아니라 그야말로 천국을 노크(노킹 온 헤븐스 도어Knockin' On Heaven's Door, 1997)하러 떠난 게 아닐까.

 

현실 같은 영화보다, 영화 같은 현실은 매일 우리 눈앞에 펼쳐진다. 케이티 버틀러의 구구절절한 이야기와 부모와의 시시콜콜한 추억담까지 곁들여져 380여 페이지나 되지만 저자의 주장은 명료하다. 현대의학에게 빼앗긴 죽을 수 있는 권리를 돌려 달라, 좋은 죽음이 무엇인지 고민하라, 어떻게 죽을 것인지 준비하라.

 

살아있다는 걸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 물론 의학적 관점에서가 아닌 방법으로. 소설가 김연수는 하루키처럼 달린다. 지지 않는다는 말은 그가 살아있다는 외침에 불과하다. 그가 누구든 사생활과 개인적인 취향에 관심이 없는 독서 취향상 이 책은 지루하다. 소설가의 경험과 사물을 낯설게 바라보는 방식, 사람을 대하는 태도, 살아가는 자세를 통해 배울 게 없다는 뜻이 아니다. 산문집은 자신의 경험을 일반화시켜야하는 이론서가 아니다. 하지만 주관적 감상과 판단이 궁금하지 않은 사람에겐 무용지물이다. 다만, 걷고 달리면서 자신이 살아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지지 않는다 말은 이겼다는 말과 다르다. 비교 대상이 없다면, 승부를 걸지 않는다면 질 수 없다. 지지 않는다는 말은 꼭 이겨야겠다는 말이 아니다. 성공이라늘 말과는 더욱 거리가 멀다. 김연수가 달리기를 통해 터득한 깨달음처럼 지지 않는다는 건 결승점까지 가면 내게 환호를 보낼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안다는 뜻이다. 아무도 이기지 않았건만, 나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다. 그 깨달음이 내 인생을 바꿨다.’ 환호하는 사람이 없어도 좋다. 인생은 이기고 지는 게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도 한참이 걸린다. 승자독식 시대, 성공에 대한 집착과 욕망, 자기계발에 대한 환상은 우리를 지치게 만들고 지게 만든다. 자기 속도에 맞춰 결승점이 아니라 지금 달리고 있는 이 순간에 내 뺨을 스치는 바람과 나뭇잎 사이로 비치는 눈부신 햇살을 한 번쯤 올려다 보면 세상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사람은 절대로 지지 않는다. 누구도 지지 않아야 한다. 아무도 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기는 사람이 생기겠는가. 스스로 이겼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사실은 졌다.

 

 

15-0104-00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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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톰프슨은 말했다. ‘우리는 모두 타인의 고통 속에 태어나고, 자신의 고통 속에 죽어간다.’ 에드워드 영은 말했다. ‘태어난 순간 죽음은 시작된다.’ 프랜시스 베이컨은 말했다. ‘우리에게 남은 것이 무엇이뇨? 그저 울부짖을 뿐 아예 태어나지 말 것을, 태어났으니 얼른 죽을 것을.’ 블라디미르 나보고프의 말하라, 기억이여는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요람은 심연 위에서 흔들거린다. 그리고 상식적으로 생각해보건대, 우리는 단지 영원이라는 두 어둠 사이 잠시 갈라진 틈으로 새어나오는 빛과 같은 존재다.’ - 27

 

삶이란 무엇인가. 어떻게 살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죽을 것인가. 세 가지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사람들은 쉼 없이 책을 읽고 공부하며 생각하고 토론하는 것은 아닐까. 생물학적인 삶의 한계를 인식하지 못한 채 영원히 살 것처럼 경쟁하고 욕망하는 사람들에게 이 문제들은 한담에 불과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삶의 절대 조건에 대해 조금 더 깊이 그리고 심각하게 고민할 때 삶은 우리에게 또 다른 이야기를 건넬지도 모른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걷는 것은 넘어지지 않으려는 노력에 의해서, 우리 몸의 생명은 죽지 않으려는 노력에 의해서 유지된다. 삶은 연기된 죽음에 불과하다.”는 비관적 태도를 보였을까. 하루하루 견뎌내는 일이 힘겨울 때도 있고 가슴 벅찬 환희로 영원히 살고 싶을 때도 있는 것이 삶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수만 가지 사연 속에서 우리는 매일 죽음을 맞이하고 새로운 탄생을 준비한다. 하지만 당장 내일 나에게 죽음이 다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 듯하다.

 

데이비드 실즈는 너무 당연해서 웃음이 나올 법한 제목으로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다만 외면할 뿐. 죽음을 대하는 태도와 방법은 각양각색이다. 죽은 사람도 살아있는 사람도 죽음에 대해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우리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데이비드 실즈는 97세 되신 아버지와 오십이 넘은 자신의 삶을 통해 죽음에 이르는 길을 안내한다. 10대 딸을 둔 가장으로 죽음을 앞둔 아버지를 둔 아들로 삶의 한 복판에서 선 저자의 목소리는 떨림이 없다. 담담하게 자신의 인생을 스토리텔링한다. 어렵지도 난해하지도 않지만 결코 감상에 치우친 에세이나 낭만적 자기고백은 아니다.

 

죽음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태도가 반드시 진지할 필요는 없다. 미국식(?) 글쓰기 특유의 유머와 편안한 입담이 즐겁지만 자신의 경험을 통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더듬는 동안 저자 자신은 아마도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얻지 않았을까 싶다. 독자들은 물론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또 다른 방식의 자신의 삶을 성찰하리라.

 

하지만 내게는 그리 큰 감동이나 깨달음을 주지 못한 책이다. 편안한 서술, 가독성 있는 문장, 간간이 섞여 있는 금언들이 양념처럼 버무려져 있지만 선뜻 추천할 만하다고 하기엔 2% 부족하다. 그것은 평범한 저자의 삶에 대한 자기고백에 대한 부담감일 수도 있고 한 유년기에서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서술하는 과정에 대한 지루함일 수도 있지만 책을 읽고 나서 느껴야 하는 울림 때문인지 모르겠다. 이전에 읽었던 죽음에 관한 많은 책들의 간섭현상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다시 한 권의 책을 더 펼쳤다.

 

노베르트 엘리아스의 죽어가는 자의 고독이다. 한 사회에서 배제되는 현상을 죽음의 사회학적 표현이라고 하면 지나칠까. 군대에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느꼈을 법 한 그 느낌이다. 내가 없어도 가족도 친구도 애인도 이 세상 전부가 아무 일도 없이 잘 돌아가는구나 하는 그 느낌. 현대사회에서 죽음의 특수성은 수명, 체험, 구조적 경험적 특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개인화로 요약한다. 저자가 바라보는 죽음은 한 마디로 고독이다. 그런데 다른 관점에서 삶은 또한 고독이 아닌가. 앤서니 스토는 고독의 위로에서 친밀한 인간관계를 건강과 행복의 기준으로 강조하는 것은 비교적 최근의 현상이다. 예전 세대는 인간관계를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 같다. 그날의 일과 의무를 다하는 것으로 필요한 것은 모두 얻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먹고사는 일에 너무 바빠서 인간관계라는 복잡한 문제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을지도 모른다.”라는 말로 삶에서 고독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강조했다. 삶이 고독인데 죽어가는 자의 고독이라니. 아니 어쩌면 삶이 고독이었으니 죽음이라도 고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일까.

 

오늘날처럼 조용하게, 위생적으로, 고독감을 조장하는 사회적 조건 속에서 죽게 되는 건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다. - 92

 

사회, 문화, 역사적 상황에 따라 죽음을 대하는 태도와 죽음을 맞이하는 개인의 생각도 달라진다. 하물며 예술은 어떠하겠는가. 루이스 멈퍼드는 고도의 기술 발전의 시대에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이야기한다. 예술과 기술은 그렇게 우리 시대를 간파한다. 우리는 재미난 시대에 살고 있으며 그 재미는 수많은 충격과 모순과 비극적 역설에 있다는 말로 포문을 연다. 그러나 우리가 궁금한 것은 예술과 기술의 상관관계가 아니다. 예술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기술과 예술이 하나였던 시대를 넘어 이제 예술과 기술의 영역이 분리된 시대를 어떻게 살 것인가의 문제다.

 

생활의 달인이라는 TV프로그램이 있다. 한 분야에서 숙련된 기술을 보유한 사람을 보여주는 것은 생활과 기술이 곧 예술의 경지에 올랐음을 증명하는 것은 아닌가. 예술 작품을 보고 미적 충격을 받거나 절로 감탄사가 나오는 일은 흔치 않다. 우리를 감동시키는 것은 오히려 현란한 인간의 기술이다. 그것이 몸으로 체득된 것이든 기술로 구현된 것이든 말이다. 백남준처럼 기술적 토대가 없으면 예술 자체가 불가능해진 미디어 아트 시대에 멈퍼드의 예술에 관한 관점과 주장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처럼 보이지만 과학과 기술 그리고 물적 토대가 신앙이 되어버린 시대에 유기체와 인격 전체를 향한 관심의 촉구로 읽힌다.

 

기계의 무력한 동반자나 수동적인 희생자가 되는 대신 상실한 개성을 찾고 창의성과 자율성을 회복하는 것이 우리 시대의 과제가 아닐까. 윌리엄 블레이크의 말처럼 예술은 타락하고 상상력은 부정되며, 전쟁이 모든 나라를 지배하고 있습니다.”라고 외치지 말고 멈퍼드처럼 예술은 고양되고 상상력은 강화되며 평화는 모든 나라를 지배합니다.”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해 본다.

 

우리의 눈만큼 단 한 순간도 쉬지 않고 혹사당하는 귀에 대해 살펴보려면 에두아르트 한슬리크의 음악적 아름다움에 대하여를 천천히 읽어보면 된다. 이 책은 음악 애호가를 위한 감상능력 배양 프로젝트가 아니다. 미학적 관점에서 예술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우선 한슬리크는 음악이 절대 감정 미학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장하는데 할애한다. 음악에 내용이 있느냐는 논쟁으로 마무리하고 있지만 시작부터 음악에서 감정을 걷어내는데 주력한다. 물론 여기서 음악은 클래식에 해당한다. 가사는 음악이 아니다. 대중가요가 주는 감동과 눈물에만 익숙하다면 한슬리크의 책은 집어던지게 된다.

 

하지만 음악적 아름다움은 형식미학에서 출발한다는 한슬리크의 주장이 설득력 있게 들리는 이유는 음악에서 화성, 리듬 등에 대한 요소 때문만은 아니다. 막귀에 닥치는 대로 음악을 듣는 입장에서 한슬리크의 이야기는 이론에 불과하다. 바흐의 바이올린 협주곡을 틀어놓고 제주 해안도로를 달리던 감동을 잊지 못하는 것은 20대의 감수성 때문이지 렌트카의 음질이나 바흐의 음악적 아름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살아가면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이 너무 많다. 눈멀과 귀멀어 사는 헛똑똑이들의 관심사는 몇 가지로 수렴되는 것이 아닐까. 심봉사 지팡이를 더듬듯 보이지 않는 곳을 두드리며 손 끝에 신경을 집중하고 더듬으며 살고 싶다. 얼마 남지 않지 않았을까, 우리는 언젠가 죽을 테니까.

 

 

141130-115~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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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 - 사랑과 희망의 인문학 강의
류동민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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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혁명은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시작된다.

 

라는 말로 시작되는 책의 시작은 말하지 않아서 모르는 것은 말해 줘도 모른다는 저자의 도발적인 프롤로그로 요약된다.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은 굳이 말로 확인할 필요가 없으며 말해도 모르는 것 때문에 설득하거나 설명할 수 없다는 말이다. 자발적인 변화와 인식의 태도를 바꾸지 않는 한 인간의 사유는 그가 살아온 테두리 안에서 결정되며 그 밖의 것들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설령 관심을 갖는다 해도 공감이 아니라 관찰의 대상 정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말하자면 혁명은 인간에 대한 사랑에서 시작되는 것이라는 낭만적 혁명론은 부정되어야 한다. 이기적 인간의 본성에서 벗어나 이타적 사랑에 대한 갈급한 욕망은 오히려 혁명을 비현실적 꿈의 세계로 안내할 뿐이다. 고독한 존재로서 인간에 대한 본질을 들여다보고 그 의지의 나약함을 인정하는 데서부터 혁명은 시작될 수 있으며 사랑은 그 나머지 것들에 대한 작은 인정에서 비롯되는 것일 뿐이다.

 

어느 더운 여름 일요일 저녁 공원을 거닐 듯 가벼운 마음으로 치유 받고 싶을 때 권할 만한 책, 마르크스가 내게 아프냐고 물었다는 인문학적 산책의 동반자로 어울린다. 류동민은 마르크스 뿐만 아니라 책 말미에 덧붙이듯 열 명의 저자와 한 편의 영화를 소개한다. 가리타니 고진, 알랭 바디우, 김훈, 슬라보예 지젝, 홍상수의 <북촌방향>, 알랭 드 보통, 루이 알튀세르, 마오쩌뚱, 폴 스위지, 프리드리히 엥겔스, 장하준이 그들이다. 폴 스위지를 제외하고 모든 작가의 책들을 한 두 권씩 읽어보았고 <북촌방향>도 보았다고 해서 류동민의 이야기에 더 공감할 수 있었던 건 아니었다. 마르크스를 통해 우리의 삶을 돌아보고 나 자신의 삶을 성찰할 수 있느냐는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만 남겨지는 이 책은 자본주의적 삶에 대한 마르크스식 힐링 캠프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단기적인 일상에 파묻히지 않고 개인의 행동이 사회 전체의 구조와 연결되는 지점과 방식을 이해하는 것, 즉 사회과학적 시야를 가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6이라고 강조하고 세월이 흐르면서 인문학적 상상력으로부터 유리된 사회과학적 논리는 무가치할 뿐만 아니라 해롭기까지 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6)라고 선언한다. 고개를 들고 문득 인문학적 상상력사회과학적 논리사이의 간극에 대해 고민한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거리가 좁혀질 수 있는 것인지, 그것은 어떤 소통과 믿음으로 인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사랑이나 배려라는 이름으로 위무되는 행위인지.

 

책을 쓰면서 책 읽기를 통해서보다 살아가면서 만나는 이들과의 관계로부터 훨씬 더 많은 것을 배운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7)라는 말에 밑줄 그는 내 손을 바라보며 나는 점점 더 그 배움의 의미 반대편을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했다. 배운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모르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의미와 생각하지 못했던 것에 대해 깨닫게 된다는 의미가 그것이다. 서로 가 닿지 못할 것에 대해 노력하는 것은 자기파괴적 행위에 불과하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의 열 한 번째 테제를 자기 묘비명으로 삼았을까.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세계를 해석하기만 해 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다”(33)라고.

 

이 책의 구조는 --사회의 단순하지만 복잡한 관계 양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 안에서 각각의 작동원리를 살펴보고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적 삶의 태도를 기웃거린다. 관계의 비대칭성과 권력관계로 민주주의를 분석하거나 투명한 커뮤니케이션을 꿈꾸는 공산주의를 들여다보는 일은 언제나 그러하듯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에 불과하다. 인생은 뚜렷한 목표와 자명한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우연과 엇갈림의 클리나멘이 때문이다. 저자는 클리나멘은 사물의 변화와 그로 말미암은 결과가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움직이는 직선 운동이 아니라 엇갈림의 운동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78)라고 정리하지만 인과관계와 논리에서 벗어난 사건에 대해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권력은 또한 관계의 비대칭성으로부터 나옵니다. 무엇보다도 권력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이지, 사람과 권력의 대상 사이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권력은 사람들 사이에서 어떻게 힘이 배분되는가의 문제이지, 대상에 대한 절대적 힘의 문제는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프루스트가 얘기한 것처럼 질투가 사랑의 중요한 구성요소인 것과 마찬가지 논리입니다. - 203

 

타인에 대해 함부로 지껄이는 모든 인간의 내면에 자리 잡은 욕망과 질투는 스스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자화상이다. 권력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생겨나는 것이지만 그 작동원리는 사회적 관계가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낸 고정된 틀로부터 비롯된다. 그런 면에서 나의 자유를 위해, 내 생각과 행동의 합리화를 위해 만들어낸 논리를 객관적으로 검증받으려는 노력은 게으른 자의 또다른 자기 합리화에 불과하다. 류동민은 이 책에서 남의 자유를 해치지 않는 모든 자유를 허락하라는 경구는 그래서 거꾸로 읽으면, 남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은 이미 자유라는 이름으로 용인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229)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지극히 일반적인 원칙에 불과하다. 현실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는 1인치의 논리도, 합리적 판단도 없이 맹목적인 자기애로부터 출발한다. 자기 소외로부터 벗어나려는 몸부림은 사회적 관계로 나아가고 그 사회적 관계들이 자기 자신으로 환원된다. 그래서 이 책은 결국 자신을 찾으려는 여정에 불과하다고 본다. 저자 류동민과 함께 떠나는 마르크스식 자기 치유 산책 프로그램에 동참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기꺼이 추천한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가 선택했던 여정, 즉 개인의 자기소외로부터 출발하여 사회관계로 올라갔다가, 다시 그 사회관계에 의해 규정되는 개인으로 돌아오는 과정은 자본주의 경제의 구조와 발전을 분석하는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의 냉철함과는 다른 여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 270

 

 

120624-0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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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떻게 죽고 싶은가? - 첨단 의학 시대에 우리가 알아야 할 죽음의 문화
미하엘 데 리더 지음, 이수영 옮김 / 학고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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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과 끝

 

모든 에는 시작이 있을까. 생명의 기원, 우주의 근원, 세상의 시작은 언제 어디에서부터일까. 눈에 보이지도 손에 잡히지도 않는 연속적인 흐름을 분절시켜 놓은 인간의 시간 단위. 만남은 이별을 전제로 하듯 탄생은 죽음을 예비하고 시작은 끝을 맞이한다. 어느덧 시작과 끝이 아니라 끝과 시작이 맞닿는 시간이 되었다. 길이 끝난 곳에서 길은 다시 시작된다. 인위적인 인간의 시간이든 편리에 의한 단위이든 한해는 저물고 새해는 밝는다.

 

무한 반복되는 시간과 달리 생명을 가진 것들은 탄생, 성장, 소멸을 반복한다. 개체는 계통발생을 반복하며 다음 세대에게 유전자를 남긴다. 식물이든 동물이든 그 흔적들이 시간을 견디고 또 변화하며 이전의 흔적들을 지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하루에도 수많은 세포들이 죽고 머리카락이 빠지고 손발톱이 자란다. 말하자면 한 우리의 존재 자체도 매일 매일 사라지고 다시 태어나는 일을 반복하다가 완전히 소멸하게 된다.

 

인간이 만든 모든 사물과 제도도 마찬가지다. 만들어지고 사라지고. 그렇게 이룩한 문명은 세월을 견디고 인류의 문화가 되고 지식으로 축적되고 세상을 변화시킨다. 그 목적과 방향에 대한 무수한 철학적 고민과 무관하게 우리는 오늘을 살고 세계는 존재한다. 시작과 끝은 매 순간 반복되며 그 모든 의 시작은 알 수 없으나 그 은 예정되어 있는 것만 같다. 그러한 무지(無知)의 지()를 얻기 위해 인간은 종교와 철학을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 모든 세계와 무관하게 한 인간의 탄생은 죽음과 더불어 모든 것을 소멸케 한다. 주체적인 를 확인하고 세계는 인식하는 순간부터 존재하게 된다. 그러므로 세계는 내가 존재하는 순간에만 존재한다는 좁은 의미의 존재론이 가능하다. 이전의 시작과 끝은 무의미하며 내 죽음과 함께 모든 세계는 점등된다.

 

죽음, 존재의 소멸과 또 하나의 세계

 

인간의 죽음은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받아들여졌다. 우리는 죽음에 대한 태도와 인식방법, 장례절차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지 않은가. 동양문화에서는 죽음을 터부시하는 오랜 전통에 따라 여전히 삶이 끝나는 순간 죽음이 시작된다는 불연속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삶과 죽음이 하나이며 삶의 그림자가 곧 죽음이라는 연속적 세계관을 가진 문화와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죽음은 통곡의 대상이며 건너고 싶지 않은 두려움의 강이다.

 

김열규는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에서 한국인에게 죽음은 너무 먼 곳에 있다는 사실을 역사와 문화적 전통을 통해 확인시켜 준다. 또한 최준식의 죽음, 또 하나의 세계한국죽음학회창립 이후 근사체험을 통해 삶과 다른 영역으로서의 죽음에 대해 문화와 종교적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임사체험 (), ()은 세계 각국의 임사 체험자를 면담하여 동서양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통해 사후세계에 대해 실증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이에 비해 독일인 의사 미하엘 데 리더의 우리는 어떻게 죽고 싶은가?는 매우 현실적으로 읽힌다. 앞서 언급한 책들이 시대와 문화 혹은 임사체험자들을 통해 죽음 자체에 대해 성찰하고 있다면 이 책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맞이해야할 죽음에 대해 다루고 있다.

 

생명을 아주 짧은 시간 연장할 수 있다 해도, 1퍼센트의 가능성만 있어도 치료를 하려 드는 것이 의료계의 일상적인 형태다. 그러나 때로는 실낱같은 가능성이라는 미명 아래 엄청난 불행을 안겨준다. - 25

 

30년간 응급의료 전문가로 일하면서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과 태도에 대해 깊이 고민한 저자의 생각을 들여다 볼 수 있는 문장이며 이 책의 화두가 되는 생각이다. 생명 연장의 꿈은 인간의 본능이다. 살고 싶다는 기본적인 욕망에서 출발하는 의학은 우리에게 좀 더 긴 삶의 시간을 선물한다. 그러나 끝까지 버틸 수 있을 때까지 생명을 연장하는 것만이 옳은 일인가.

 

우리에게는 인간답게 죽을 권리, 고귀한 삶의 연장선에서 품위 있게 죽음을 맞이할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닐까. 첨단의학 시대에 살면서 인간의 생명은 그 어느 시대보다도 연장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떻게죽고 싶은가의 문제는 우리에게 깊은 고민을 남겨 놓았다. 넓은 의미에서는 안락사의 문제까지도 언급되고 있는 이 책은 소극적 안락사에 대한 고민과 일부를 공유한다.

 

정확한 기준을 마련할 수 없으나 소생 불가능한 뇌사, 고통만이 남아있는 치유 불가능한 질병 등 세상에는 오로지 죽음만을 기다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원하는 것에 대해 귀 기울여야 하는 것은 아닐까.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한 의사들이 단 하나의 목적이 생명 연장에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저자는 우리 사회에서도 충분히 논의해야할 문제들을 제기한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의학적으로 심장사와 뇌사의 의미를 살펴보고 우리가 죽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먼저 숙고해보자. 임종을 앞둔 환자에 대한,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지 못하는 환자에 대한 죽음에 대해서도 고민해야 한다. 간병을 받으면서도 비참한 죽음을 맞는 사람들, 통증 치료와 죽음의 문제, 완화의학의 경계 등 죽음에 이르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애매한 경계와 논쟁들이 독일 사회를 배경으로 진지하게 설명되어 있는 이 책은 의료복지가 제대로 갖추어진 선진국 의사의 배부른 투정으로 볼 수는 없다. 기초의약품이 없어 하루에도 수백 명씩 죽음을 맞이하는 아프리카의 현실과 동떨어진 이 책은 또 다른 측면에서 우리에게 생각거리를 제공한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은 인간답게 살다가 품위 있게 죽고 싶어 한다. 하지만 가족의 태도, 의사의 결정, 사회적 제도에 따라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선택권이 없을 수도 있다. 환자와 가족, 의사만 합의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다. 이 책에서는 풍부한 사례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측면에서 사람답게 죽는 방법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대책에 대해서도 고민하고 있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죽음 가꾸고 죽음과 함께 살아가는 태도는 건강한 우리들의 삶을 위해서 더욱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이다.

 

 

2011123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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