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라는 병 - 가장 가깝지만 가장 이해하기 힘든… 우리 시대의 가족을 다시 생각하다
시모주 아키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살림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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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데, 타인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배우자 역시 타인이다. 가장 가까운 가족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타인이다. - 18

 

가족을 이루는 최초의 개인은 타인이다. 혈연으로 맺어진 가장 끈끈한 관계는 아이러니하게도 낯모르는 타인과의 만남으로 시작된다. 의식주를 해결하는 최소 단위, 사회 보험 기능을 담당하는 가족이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부부, 부모와 자녀, 형제자매 이 관계는 국가, 지역, 종교, 민족, 인종, 문화에 따라 그 관계 양상이 조금씩 다르다. 자식들은 부모에게 인간과 세상의 질서를 배우고 생존 방식을 터득한다. 세계관과 가치관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부모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부모의 생각, 관점, 식성, 문화적 소양을 직간접적으로 학습한다. 따라서 대화가 없는, 소통하지 않는 부부, 부모와 자녀, 형제관계는 남보다 못하다. 생물학적 혈연 관계를 끊을 수는 없으나 서류상의 관계일 뿐.

 

그러니 가족을 구성하는 일은 애초부터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가장 가까운 사이라서 가장 잘 안다는 생각은 착각이 아닐까. 부모가 자식을 안다는 말은 직립보행을 시작하면 하지 말아야 한다. 더구나 자식은 부모를 이해할 수 있을까. 평범하고 화목한 가정은 환상에 불과하지 않을까. 행복한 가족은 누군가의 희생과 인내, 굴욕과 분노 위에 세워진 신기루 같은 게 아닐까.

 

이렇게 건조하고 냉소적인 그러나 내 생각과 일치하는 작가의 책을 읽는 일은 지나치게 반갑다. 시모주 아키코는 가족이라는 병에서 가족의 의미를 독자에게 되묻고 있다. 1936년생이라는 작가의 나이를 고려하면 가족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이라고 치부하기 어렵다. 가족은 그녀에게 함부로 안다고 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구성원 각각의 내면을 들여다 보지 않는다면 우리가 아는 가족은 상상의 공동체에 불과하다.

 

친소여부를 떠나 가족을 화제로 올리는 사람들은 불편하다. 시모주 아키코의 말대로 가족 이야기는 자랑 아니면 험담이기 때문이다. 또한 가족 이야기만 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남의 가족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다. 가족 이기주의의 극단을 보여주는 사례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뉴스와 일상에서 매일 접한다. 이 책은 가족에 대한 한국인의 태도와 생각을 점검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 2차 세계대전 패망으로 일본 육사출신 아버지와 순종적인 어머니 그리고 오빠와의 관계에서 작가의 이야기는 출발한다.

 

성인이 되어 반려伴侶를 만나 한 평생을 살지만 자식을 낳지 않고 자기 삶을 꾸려온 시모주 아키코는 인간은 늘 혼자라는 것을 인식하고, 고독을 즐길 수 있어야 비로소 상대의 기분을 가늠하고 이해할 수 있다. 가족이나 사회 사람들이나 마찬가지다. 가족은 사회의 축소판이 아닌가.”라고 말한다. 지나치게 기대는 관계는 지속 가능하지 않다. 하지만 모래알처럼 각자 사는 가족 또한 가족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함께 밥을 먹지 않고, 대화를 나누지 않으며, 눈을 마주치지 않는 가족은 생활 공동체에 불과하다. 너는 너고, 나는 나다.

 

대가족에서 핵가족을 넘어 이제는 다양한 주거, 가족 형태가 등장했다. 반려견이 자식을 대신하고 비혼자들의 쉐어하우스, 1인 가구의 주거 공동체도 심심찮게 소개된다. 스트레스와 상처를 주는 가족보다 서로 존중하고 생활의 편의를 추구하는 공동 주거가 전통적인 가족 형태를 대체하고 있다. 가족이라는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가족 구성원 개인에 대한 이해가 우선이다. 전체가 아닌 부분을 들여다보고 각자 따로 또 같이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하다. 자식이니까 언제까지나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착각, 끝나지 나를 지켜줄 거라는 오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휘두르는 폭력은 대부분 가족 안에서 이루어진다.

 

지나친 기대와 믿음도 위험하지만 침묵과 증오도 가족을 해체하는 결정적인 요소다. 이 책은 가족에 대한 오해와 진실을 담고 있다. 한 평생을 살면서 작가가 경험한 가족 이야기를 바탕으로 주변 사람들이 가족을 대하는 태도를 비판한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가족에 대한 생각은 어떤가. 가족과의 관계는 어떠해야 할까. 정답은 없지만 나는 시모주 아키코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서로 기대고 힘이 되어주는 가족을 누가 마다하겠는가. 그러나 그 웃음과 기쁨이 유지되기 위한 희생과 노력은 누가 얼마만큼의 비율로 나눠가져야 하는 걸까. 보이지 않는 무수한 폭력과 상처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는 가족은 왜 필요한가.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오빠까지 떠나보낸 작가는 4부에서 그들에게 비로소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다. 그들의 인생을 보여주고 자신과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가족을 객관화한다. 한 인간에게 가족은 삶의 행복이며 존재 이유가 될 수도 있다. 하지만 벗어나고 싶은 굴레와 영혼의 감옥일 수도 있다. 사회적 지위, 부와 명예는 복권처럼 손에 거머쥔 가족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또한 가족 안에서만 느낄 수 있는 인생의 희로애락을 설명하기 어렵다. 수많은 문학 작품에서 다루는 인간의 관계양상은 사랑 혹은 가족의 다른 이름이다. 그것이 사회적 관계로 어떻게 전환되는지에 따라 우리 삶은 천국 혹은 지옥이 된다. 당신은 어떤 가족과 함께 살아왔는가, 아니 어떤 가족과 함께 살고 있는가?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나, 어둡고 먼 길을 홀로 걸어왔던 것처럼 마지막에는 결국 혼자라는 것을 마음속으로 수도 없이 되뇌면서 말이야. -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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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란하고 화목한 가족이라는 환상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개인의 인격을 되찾는 것, 그것이 진정 가족이 무엇인지를 아는 지름길이 아닐까 한다. - 13

 

자신에 대해서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는데, 타인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배우자 역시 타인이다. 가장 가까운 가족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타인이다. - 18

 

거짓은 화목하지 않은 가정보다 화목한 가정에 있다. 솔직한 심정으로 마주하면, 부모와 자식은 대립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 나는 겉으로 화목해 보이는 가족보다는 사이가 나빠 뿔뿔이 흩어진 가족을 선택할 것이다. 42

 

가족 사이에는 산들산들 미풍이 불게 하는 것이 좋다. 상대가 보이지 않을 만큼 지나치게 밀착하거나 사이가 너무 벌어져 소원해지면 가족만큼 까다로운 것도 없다. - 66

 

우리는 평생을 살면서 무수한 일을 화제로 삼는데, 그중에 삼 분의 일이 남 얘기다. 삼 분의 일은 남자와 여자에 관한 얘기, 그리고 나머지 삼 분의 일이 필요한 애기라고 한다. 즉 삼분의 이는 하나 마나 아무 상관 없는 애기라는 뜻이다. 가족 얘기는 어디에 속할까. 남 얘기다. 삼 분의 일이나 그런 화제에 할애하다니 놀랍다.

가족 얘기는 왜 하나 마나 한 시시한 얘기일까. 그래봐야 자랑이거나 불평이며, 발전성이 없어서다. 대화를 나누는 사람끼리 가족 얘기를 하면 서로의 상처를 위로하든지, 일방적으로 듣기만 하는 패턴이 반복된다. 어느 쪽이든 그리 유쾌한 일이 아니다. 76

 

나이를 먹으면 화제가 빈곤해진다. 관심의 범위가 좁아지는 탓이 클 것이다. 병이나 건강에 관한 얘기, 그다음으로 이어지는 것은 보나 마나 가족 얘기다. - 77

 

가족 얘기를 늘어놓는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자기 가족 외에는 전혀 돌아보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 다른 일에는 관심이 없다. 자기 가족만 좋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가족 이기주의다. - 78

 

가족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하다고는 할 수 없다. 반대로 가족이 없어서 불행하냐 하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을 것이다. - 114

 

인간은 늘 혼자라는 것을 인식하고, 고독을 즐길 수 있어야 비로소 상대의 기분을 가늠하고 이해할 수 있다. 가족이나 사회 사람들이나 마찬가지다. 가족은 사회의 축소판이 아닌가. - 129

 

무슨 일이 생기면 상대를 배려하고 돕는 것이 가족이다. 진정한 가족은 핏줄로 이어진 가족을 뛰어넘는 곳에 존재한다. - 174

 

네가 이 세상에 태어나, 어둡고 먼 길을 홀로 걸어왔던 것처럼 마지막에는 결국 혼자라는 것을 마음속으로 수도 없이 되뇌면서 말이야. -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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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 : 삶의 군더더기를 버리는 시간 배철현 인문에세이
배철현 지음 / 21세기북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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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나 자신을 위하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위할 것인가?

내가 나 자신을 위한 유일한 존재가 아니라면, 나는 누구인가?

지금이 아니면, 언제란 말인가?

힐렐, 선조들의 어록, 114

 

이제는 이십대 후반이 된 녀석들과 추억을 더듬었다. 생각나지도 않는 내가 했던 말과 행동을 듣고 있자니 민망하면서도 아련했다. 그 무렵 내게 간절했던 건 통찰력이었다는 걸 다시 확인했다. 20, 30대를 거치면서 저절로 흐르는 시간에 맡긴다고 해서 사람이 달라지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됐을 뿐이다. 살아남은 자의 슬픔, 먹고살기 위한 몸부림, 고통을 견뎌야 했던 경험, 혼자라는 사실을 깨다는 과정이 나이를 먹는 과정이지만 저절로 혜안이 생기지는 않는다. 특정 정당, 종교, 이념, 가치, 윤리에 빠진 사람들을 자주 본다. 흔들리지 않는 그들의 신념은 아무도 깨트릴 수 없는 도그마로 굳어진다. 경험과 나이를 내세우는 천박함, 지위와 권력을 드러내는 허접함, 돈과 물질을 앞세우는 비루함인 줄도 모르는 사람들로 세상은 가득하다.

 

배철현의 수련은 출판사의 기획력은 높이 평가할 만하지만 깊은 성찰과 고민의 시간을 갖고 싶었던 독자에게는 아쉬움이 많다. 전체 428개의 키워드는 그 자체로 충분히 깊고 넓은 함의를 가진다. 하지만 300페이지가 넘는 책에서 본문은 200페이지도 안 된다. 이 작은 판형의 하드커버로 담아놓은 책의 분량을 문제 삼는 것은 화려한 학벌과 방송으로 알려진 이름값으로 기획한 냄새가 심하기 때문이다. 심연에 이어 수련이 나왔으니 곧 정적과 승화도 나올테다.

 

저자에겐 문제가 없어 보인다. 고전 문헌학자의 진정성은 간략한 원고에도 충분히 묻어나기 때문이다. 위대한 개인을 발견하고 완성시키는데 도움이 되는 네 가지 단계인 심연-수련-정적-승화중 두 번째 단계에 해당하는 수련에는 방법론이 제시되어 있다. 감추고 싶은 나를 마주하는 시간인 직시, 삼의 군더더기를 버리는 연습인 유기, 본질을 찾아가는 훈련인 추상, 나를 지탱해주는 삶의 문법인 패기가 그것이다. 정교한 그물처럼 각각 7개의 실천 방법을 소개한다. 저자의 고민과 수고로움이 배어 나오는 대신 숙성과 깊이가 드러나지 못해 아쉽다. 조금 천천히 쓰더라도, 독자들의 호흡이 짧아지더라도, 여전히 길고 느린 호흡으로 숨을 쉬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 필요하다.

 

교황이 즉위식에서 건네받는 지팡이의 이름인 ‘sic transit gloria mundi! 세상의 영광은 어찌 이리 빨리 사라지는가!’는 최고의 종교 지도자로서 삼가야 하는 태도가 아니라 우리처럼 평범한 범인들에게 더욱 필요한 삶의 지침이 아닌가. 아주 잠시 머물다 간다는 사실을 실감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수련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이유는 그 찰나의 순간을 어떻게 견딜 것인가의 고민이 담겨 있다.

 

내일은 오늘과 다를 바 없다. 어제가 오늘과 크게 다르지 않았듯이. 수련은 오늘의 나를 변화시키는 훈련이다. 그 변화는 물론, 내 안에서 시작된다. 군더더기를 버리기 위해서는 용기가 필요하다. 욕망을 덜어내야 한다. 하지만 이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덕목이다. 덜고 비우는 연습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자신의 욕망조차 알기 어렵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바라보고 있는가. 어디를 향해 걷고 있는가. 왜 그러한가.

 

지적 통찰을 얻을 수 있는 책은 아니지만 간과해버린 삶의 태도를 점검할 수는 있다. 부디 자기 안에 쌓인 이기심을 포장하지 말고 수련을 통해 거듭날 수 있기를. 타인의 말과 행동을 판단하기 전에 먼저 거울 앞에 설 용기를. 절대 진리와 영원한 가치가 없다는 정도는 파악하기를. 무엇보다 먼저 헛되고 헛됨을 확인하는 수련의 시간이 필요하기를.

 

저는 인간이 고통을 당하거나 창피를 당할 때마다, 그런 고통과 창피를 당하는 장소에서 항상 침묵하지 않을 것을 맹세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편을 들어야 합니다.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은 압제자를 돕는 것이지 피해자를 돕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침묵은 폭력의 주동자를 독려합니다. - 102, 엘리 위젤Elie Wies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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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미래를 예측할 것인가 - 역사 속 시그널을 읽으면 미래가 보인다
자크 아탈리 지음, 김수진 옮김 / 21세기북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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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년이 훌쩍 넘는 세월동안 얼굴 한 번 보지 못해도 소식을 전하고 반갑게 맞는 사람이 있다반면에 십년 넘게 곁에서 보고 얼굴을 마주했던 사람도 하루아침에 인연을 끊는 사람도 있다사람의 관계는 알 수 없다다수의 심리학자와 정신의가 공통적으로 손에 꼽는 행복의 제일 요소는 관계작게는 인간관계부터 크게는 인류의 운명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미래를 예언하거나 예측하기 어렵다
  
아주 오래 전 원시사회부터 눈부신 과학기술 문명을 이룩한 오늘에 이르는 동안 인간이 알 수 없는 일은 죽음 이후의 세계와 미래다당장 내일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에 비행기가 충돌하고 김광석이 자살하고 대통령이 구속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현재를 사는 우리는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는 자괴감이 들 때가 있다반면에 그래서 인생은 살만한 것인지도 모른다미치도록 궁금하지만 절대 알 수 없는 미래자크 아탈리는 대담하게도 어떻게 미래를 예측할 것인가라는 책을 썼다
  
적어도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미래를 알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스웨덴의 역사가 스벤 린드크비스트의 말대로 네가 서 있는 곳을 파헤쳐라.’는 말이다나와 상관도 없는 먼 과거를 파헤치기 보다는 우선 가까운 과거를 돌아보라는 충고다개인이든 국가든 지금까지 걸어온 길의 연장선상에 미래가 놓여 있지 않을까물론 예기치 못한 돌발 상황이 벌어지기도 한다전혀 엉뚱한 곳에서 나비효과를 일으키기도 하고 우연히 타인의 삶에 개입할 때도 있다그러나 대부분 큰 틀에서 현재는 과거의 결과이며 미래는 미래의 원인이다
  
자크 아탈리는 이렇게 궁금한 미래를 예측하는 방법을 제시한다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과거를 돌아본다우리는 신의 권능에 기대어 하늘이 예언을 하던 시대시간을 통제하며 인간이 권능을 가진 시대를 거쳐 이제는 기계의 권능을 앞세워 우연을 통제하려는 시대를 살고 있다여기서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예언과 예측이다비과학적주술적 행위가 예언이라면 예측은 이성적 논리적 전략이다자크 아탈리는 체스와 같은 전략 게임음악문학유머로 예측을 훈련할 수도 있다고 조언한다프랑스의 대표적 지성인 그가 인류사에서 벌어진 미래와의 전쟁을 어떻게 정리하고 있는지 살펴보는 과정은 놀랍다다양한 분야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그 지식을 하나의 키워드로 연결시키는 통찰력이 감탄스럽다현학적이지 않으면서도 탄탄하고 정연한 지식의 네트워크를 경험할 수 있는 대목이 여럿이다
  
서술어가 마지막에 나오는 한국어처럼 뜸을 들여 자크 아탈리는 마침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회고적 예측
수명 예측
환경적 예측
감정적 예측
계획적 예측

  
이것이 바로 미래를 분석하는 다섯 가지 영역이다이중 과거를 돌아보라는 충고가 바로 회고적 예측이다나머지 영역은 개인타인기업국가인류의 미래를 어떻게 예측할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한다자기주장의 오류를 피해가려는 일반화추상화 전략을 구사하지 않는다실제 점검 방법을 제시하고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조언한다그것이 시중에 떠도는 성공전략자기계발서와 비교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다자크 아탈리는 더큰 이익을 얻을 수 있고 경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미래를 예측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게 아니다인간의 삶을 가장 근본적인 측면에서 살펴보고 미래를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한다백짓장 같은 차이지만 바라보는 지점은 전혀 다르다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노력하는 이유는 자유롭게 살고 자기 자신이 될’ 준비를 위해서다

  
자유와 환상에 취한 대부분의 인간은 더 이상 다른 사람이나 미래를 걱정하지 않은 채 체념하고 현재를 살아간다이제 영원은 그들의 안중에 없고심지어 자신이 살아갈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대해서도 그들은 생각하려 들지 않는다인간은 자신이 죽음을 면치 못하는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부조리한 위희慰戱에 빠져 있다본질적인 문제를 외면하게 하는 유희적인 활동을 말하는 위희는 수많은 미래 분석 연구에 영향을 끼친 블레즈 파스칼이 이론화한 개념이다인간들은 이제 그들의 미래 변화를 예언하는 책무를 기계에 맡긴 채 자신이 갇혀 있는 감옥의 벽안에 머물러 있다. - 140
  
본질적인 문제를 외면한 채 미래를 예측하려는 사람들의 세속적 욕망은 뻔하지 않은가그들은 감옥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다이 책은 우리가 어떤 미래를 원하느냐에 따라 미래가 달라진다는 헛소리를 하지 않는다노력하면 무엇이든 얻을 수 있고 운명은 개척하는 자의 것이라는 위로를 건네지도 않는다. ‘어떻게 미래를 예측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이유는 자유로운 삶을 위한 근본적인 고민 때문이다노마드nomad를 위한 그의 노력은 계속된다.


미래를 ‘알기 위해’ 또는 ‘예언하기 위해’ 애쓰는 것은 그냥 체념하고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반면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본인이 원한다면 자유롭게 살고 ‘자기 자신이 될’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 14쪽

자유와 환상에 취한 대부분의 인간은 더 이상 다른 사람이나 미래를 걱정하지 않은 채 체념하고 현재를 살아간다. 이제 영원은 그들의 안중에 없고, 심지어 자신이 살아갈 얼마 남지 않은 시간에 대해서도 그들은 생각하려 들지 않는다. 인간은 자신이 죽음을 면치 못하는 유한한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 부조리한 위희慰戱에 빠져 있다. 본질적인 문제를 문제를 외면하게 하는 유희적인 활동을 말하는 위희는 수많은 미래 분석 연구에 영향을 끼친 블레즈 파스칼이 이론화한 개념이다. 인간들은 이제 그들의 미래 변화를 예언하는 책무를 기계에 맡긴 채 자신이 갇혀 있는 감옥의 벽안에 머물러 있다. - 140쪽

게으름은 예측의 최대 적이다. 반면 예측은 자유의 최고 동맹이다. 우리 각자뿐 아니라 인류 전체에 있어 최악인 블랙 시나리오가 현실이 되지 않도록 막아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예측이다. – 2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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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서문
버크.베카리아.니체 외 27인 지음, 장정일 엮음 / 열림원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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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에 장정일을 시인으로 처음 만났다. 민음사에서 펴낸 햄버거에 대한 명상이었다. 이후에 독서일기시리즈를 한동안 탐독했다. 김현의 행복한 책읽기와 더불어 스무살 언저리에서 실존적인 고민에 빠지게 했던 책들이다. 아마도 내 책읽기의 모태가 된 책이 아니었나 짐작한다. 다양한 시인과 소설가 그리고 많은 작가들의 영향을 받았겠지만 책읽기는 좀 다른 분야다. 가장 쉽고 만만하게 혹은 가장 속물적이고 과시적으로 여길 수 있는 대상이 책이다. 책은 자기계발이라는 이름으로, 성공의 비법으로 여전히 과분한 헌사를 받는다. 여기에 편승한 11책 쓰기, 자서전 쓰기, 저자가 되는 법 등을 더하면 책을 읽고 책을 쓰는 방법과 사람은 이제 차고 넘친다. 타이틀이 필요하다면 누구나 책을 낼 수 있다. 원한다면 언제든 작가님이 될 수 있다.

 

동사무소 직원이 되어 책을 읽겠다던 소년이 지금은 작가가 되었다. 동사무소 직원이 되는 것이나 작가가 되는 것이나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일 뿐이니, 현재의 내가 소년 시절의 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는 차마 말 못 하겠다. 그런데도 지금의 내가 소년 시절의 희망대로 동사무소 직원이 되었더라면, 도리어 작가가 되어보겠노라고 블로그를 만들어 글을 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뭐라고. 안타까운 일이다. - 5

 

위대한 서문첫 문단이다. 장정일이 지울 수 없는 인상을 남긴 대목은 바로 이 대목이다. 그의 동사무소 직원 운운. 독서일기서문에서 그는 동사무소 직원이 되어 새벽 두 시까지 책을 읽다가 잠이 들고 싶은 어릴 적 꿈을 이야기했다. 발칙한 상상력과 시니컬한 글쓰기가 마음에 들었다. ‘~하지 않는 작가다. 글을 쓰는 것보다 책을 읽는 일이 훨씬 행복하다는 사실을 그는 일찍부터 주장해 왔다. “나는 책을 읽는 데서 느끼는 즐거움만 한 것을 한번도 글을 쓰는 일에서 느낀 적이 없다. 글쓰기란 먹고살기 위해 이 재주밖에 부릴 게 업는 사람이 마감이라는 채찍을 맞으며 노역을 하는 것일 뿐, 그 일을 하면서 기쁨마저 누린다면 도착倒錯이다.”는 그의 말에 백 번 공감한다.

 

결혼은 물론 아이를 낳아 기를 생각도 없이, 다만 딱딱한 침대 옆자리에 책을 쌓아놓고 원없이 읽는다는 꿈은 이루었을까. 인간 장정일은 나는 잘 모른다. 그의 시와 소설 그리고 잡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책을 보다가 이제는 그가 엮은 서문까지 읽는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책은 장정일의 말대로 그가 한 일이 별로 없다. 하지만 그것은 가장 겸손한 태도다. 서문을 모았을 뿐이라고 말하지만 모을 수 있는 능력과 안목을 기르고 통찰력 있게 엮는 데 그는 한 평생이 걸렸다.

 

위대한 서문의 서문도 위대하다.

 

서문은 늘 본문보다 짧지만, 저자의 욕망이 고스란히 투영된 서문은 그것의 실현물인 본문보다 크다. 어쩌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계속 글을 쓰게 되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서문을 끝내 완성하기 위하여. - 13

 

그가 서문에서 읽어낸 작가의 욕망은 긴 세월 탐독의 결과일 뿐 아니라 스스로 글을 쓰며 느낀 작가의 굴레를 드러낸다. 허명을 드러내고 작가의 타이들을 얻기 위한 글쓰기가 아니라, 세속적인 욕망이나 사회적 평판을 얻기 위한 책이 아니라, 한 생명을 바쳐 만들어낼 만큼 가치 있는 책읽기와 글쓰기는 가능한가.

 

우선 이 책에 실린 서른 권의 책 목록이다.

 

1 플라비우스 베게티우스 레나투스, 군사학 논고

2 제바스티안 브란트, 바보배

3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뮈스 로테로다뮈스, 격언집

4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 신학정치론

5 조너선 스위프트, 걸리버 여행기

6 샤를 루이 드 스콩다 몽테스키외, 법의 정신

7 장 자크 루소, 인간 불평등 기원론

8 에드먼드 버크, 숭고와 아름다움의 이념의 기원에 대한 철학적 탐구

9 체사레 보네사나 마르케세 디 베카리아, 범죄와 형벌

10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여권의 옹호

11 도나시앵 알퐁스 프랑수아 드 사드, 사랑의 범죄

12 노발리스, 파란꽃

13 앙리 벵자맹 콩스탕 드 르베크, 아돌프

14 카를 필리프 고틀리프 폰 클라우제비츠, 전쟁론

15 쇠렌 오뷔에 키르케고르, 죽음에 이르는 병

16 요한 카를 프리드리히 로젠크란츠, 추의 미학

17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악의 꽃들

18 프리드리히 막스 뮐러, 독일인의 사랑

19 찰스 로버트 다윈, 종의 기원

20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옙스키, 카라마조프네 형제들

21 프리드리히 엥겔스, 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22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도덕의 계보학

23 앙브루아즈 폴 튀생 쥘 발레리, 테스트 씨

24 앙드레 기욤 폴 지드, 지상의 양식

25 에밀 에두아르 샤를 앙투안 졸라, 나는 고발한다

26 앙리 루이 베르그송, 웃음

27 지그문트 슐로머 프로이트, 꿈의 해석

28 게오르그 짐멜, 렘브란트

29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인상과 풍경

30 요한 하위징아, 호모 루덴스

 

이 목록에서 겨우 3분의 1쯤 읽어 자괴감이 든 것이 아니라, 분명히 장정일이 썼을 각 서문 앞에 놓인 작가와 책에 관한 간략하지만 명쾌한 해설 때문에 잠시 숙연해졌다. 인터넷에 떠도는 정보를 모으고 정리하는 것과 조금 다른 결이 느껴진다. 곳곳에 품이 든 흔적은 서른 개의 서문과 어울려 이 책을, 이 책의 목록을 두고두고 참고하게 할 것 같은 느낌이다. 아직도 갈 길은 멀고 날은 금세 저문다.

 

우리는 사실 우리 자신에게 필연적으로 낯선 존재로 있고,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며, 우리 자신을 혼동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가장 먼 존재이다라는 명제는 우리에게 영원한 의미를 지닌다. 우리 자신에게 우리는 인식하는 자가 아닌 것이다……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도덕의 계보학, 286

 

책 띠지에 붙은 당대 최고 독서가라는 장정일에 대한 수식어가 가장 적절하다. 당대 최고의 작가보다 독서가라는 명명이 빛난다. 수많은 사람들이 책에 대해 이야기한다. 나름의 노하우를 전하고 겁을 주고 비법을 뽐내며 명예를 드높인다. 지극히 이기적인 책읽기는 그리 권할만한 일이 아니라는 샤를 단치의 말 속에 숨어 있는 의미를 새겨듣는 사람은 많지 않다. 책읽기의 본질은 우리 자신을 이해하기 위한 일이다 겨우 나를 인식할 수 있을 정도의 힘을 갖는 데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자신은 얼마나 낯선 존재인가.

 

서른 권의 고전에서 뽑아 낸 주옥같은 서문을 읽는 동안 나는 책읽기와 글쓰기에 대해 다시 한 번 깊이 고민하게 되었다. 어렵고 두려운 일이다, 글을 쓴다는 행위는. 그러나 즐겁고 행복하다, 책을 읽는 동안은. 사드의 말대로 구두를 만들지언정 책은 쓰지 말라는 충고를 조금 더 깊이 고민해 봐야겠다. 누군가를 지겹게 하고 있다면.

 

그대가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 널려 있으니, 구두를 만들지언정 책은 쓰지 말라.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대를 무시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대가 우리를 지겹게 만들지 않는다면 아마 우리는 그대를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 - 알퐁스 프랑수아 드 사드, 사랑의 범죄, 191

 

동사무소 직원이 되어 책을 읽겠다던 소년이 지금은 작가가 되었다. 동사무소 직원이 되는 것이나 작가가 되는 것이나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일 뿐이니, 현재의 내가 소년 시절의 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었다고는 차마 말 못 하겠다. 그런데도 지금의 내가 소년 시절의 희망대로 동사무소 직원이 되었더라면, 도리어 작가가 되어보겠노라고 블로그를 만들어 글을 올리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게 뭐라고. 안타까운 일이다. - 5쪽

나는 책을 읽는 데서 느끼는 즐거움만 한 것을 한번도 글을 쓰는 일에서 느낀 적이 없다. 글쓰기란 먹고살기 위해 이 재주밖에 부릴 게 업는 사람이 마감이라는 채찍을 맞으며 노역을 하는 것일 뿐, 그 일을 하면서 기쁨마저 누린다면 도착倒錯이다. – 6쪽

서문은 늘 본문보다 짧지만, 저자의 욕망이 고스란히 투영된 서문은 그것의 실현물인 본문보다 크다. 어쩌면 바로 그렇기 때문에 저자는 계속 글을 쓰게 되는지도 모른다. 자신의 서문을 끝내 완성하기 위하여. - 13쪽

나는 경건을 가장하여 채용된 편견들이 정신 안에서 얼마나 깊게 뿌리내렸는지 알고 있다. 나는 또한 대중이 두려움에서와 마찬가지로 미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마지막으로, 나는 그들이 완고함에 있어서 불변이며, 이성에 의해 인도되지 않는다는 것과, 그들의 칭찬과 비난이 충동에 의해 좌우된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나는 보통 사람들에게 이 책을 읽도록 권하지 않으며, 그와 동일한 감정적 자세의 희생양인 모든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진실로, 나는 그들이 습관에 따라서 이 책을 그릇되게 해석함으로써 스스로 성가신 존재가 되려고 하기보다는 철저하게 이 책을 무시했으면 좋겠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에게는 아무런 이익도 없는데, 그들이 이성은 신학의 하인이 되어야만 한다는 믿음에 의하여 철학적 문제들에 대해 좀더 자유롭게 접근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방해할 것이기 때문이다. - 스피노자, 『신학 정치론』(1670년), 103쪽

그대가 선택할 수 있는 직업이 널려 있으니, 구두를 만들지언정 책은 쓰지 말라.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대를 무시하지는 않을 거이다. 그대가 우리를 지겹게 만들지 않는다면 아마 우리는 그대를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 - 알퐁스 프랑수아 드 사드, 『사랑의 범죄』, 191쪽

우리는 사실 우리 자신에게 필연적으로 낯선 존재로 있고, 우리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며, 우리 자신을 혼동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 가장 먼 존재이다’라는 명제는 우리에게 영원한 의미를 지닌다. 우리 자신에게 우리는 ‘인식하는 자’가 아닌 것이다…… -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 『도덕의 계보학』, 2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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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한 모독자 - 시대가 거부한 지성사의 지명수배자 13
유대칠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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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존재한다단일한 사건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관찰하면 놀랍다일반적으로 동일한 팩트서로 다른 분석과 비판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주장하는 팩트 자체가 다르고 같은 증거와 사실 관계를 보는 눈 자체가 이미 객관과 거리가 멀다확증 편향을 가진 사람들끼리의 설전은 지옥이다어떤 사실이 밝혀져도 어떤 증거가 나와도 생각을 바꾸지 않으며 인정할 줄 모른다그래서 나는 신념이 강한 자를 믿지 않는다
  
언론과 SNS에 노출되는 정보를 보며 흥분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할 수 없다아니 이해할 필요도 없다동일한 사안에 대해 사람들이 다양한 의견을 갖는 게 당연하다그런데 놀라운 건 같은 사람의 논리적 판단 근거가 매번 달라질 때다사형제에 찬성하는가인간은 누구나 기본적으로 태어나면서 누려야할 권리즉 인권을 가진 존재인가언론은 비판 기능을 수행해야 하는가검찰과 경찰은 권력이 아니라 민중의 편에 서야 하는가소통과 배려의 가치는 언제나 유효한가?
  
유대칠의 신성한 모독자는 최근 읽은 책 중에 단연 최고다곧바로 슈테판 츠바이크의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가 떠올랐다물론칼뱅에 맞선 미카엘 세르베투스가 이 책에도 등장한다열세명의 신성한 모독자는 중세 천년 역사의 이단아들이다지금처럼 다양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생각을 누구도 하지 않았던 시절이다. ‘민주주의라는 말은 들어본 적도 없는 신성神性한 시대를 떠올려보자. 21세기의 아웃사이더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시대적 배경 때문에 더욱 신성神聖한 열세명의 면면을 살펴보자

  
아집我執이란 변하지 않으려는 욕심이다과거의 모습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자기 욕심의 중력이다그리고 많은 이들은 이러한 아집으로 살아간다그것이 편하다원래 있던 그대로 있는 것이 편하다굳이 다르게 되는 것보다 익숙한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 편하다오늘도 어제처럼 살고 내일도 어제처럼 사는 것이 편한 사람들이 많다생각보다 너무나 많다. - 95 
  
에리우게나이븐 시나로저 베이컨오컴의 윌리엄조르다노 브루노갈릴레이데카르트스피노자 등은 철학과 역사를 뒤적이다 한 번쯤 만났던 사람들이다이들은 왜 개인적 이익에 반하는 생각과 행동으로 성공명예권력을 뒤로했을까바보 천치가 아니라면 어떤 말과 행동어떤 처세가 세속적 성공을 가져다주는지 알 만한 사람들이다이들은 왜 모두가 라고 할 때 아니오라고 말했고모두가 아니라고 말할 때 그렇다고 외쳤을까가진 자권력자기득권층에서 이들은 고집스런 인물들이었을 게다. ‘진리를 무기로 자기 확신에 찬 사람의 신념을 바꿀 수 있는 건 물리적 폭력과 세속적 비난이 아니다열세명의 신성한 모독자들은 신의 권위에 도전한 오만한 사람들이 아니다그들은 이성이 시키는 대로 합리적 사고에 따라 생각하고 말할 줄 아는 아주 단순한 사람들이었다
  
좋은 게 좋은 거다튀지 마라가만히 있어라중간만 해라모난 돌이 정 맞는다누구한테 싫은 소리 하지 마라어른들 얘기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부모가 자식 잘 되라고 하는 말이다너도 나이 들면 알게 된다먼저 살아본 사람 말 들어라...... 
  
귀를 막고 눈을 뜨게 하는 건 이런 말을 듣고 자란 환경과 무관하다책 속에서 길을 찾는다는 건 콜린 윌슨의 아웃사이더를 읽고 왜 나는 다른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싶은 자괴감을 느끼는 일이다모든 사람에게 주어진 다른 의견을 가질 권리를 내세우는 일이다긍정과 희망과 순종은 주체성과 거리가 멀다맹목적 비판과 부정적 시선이 아니라 합리적인 판단이성적 사고논리적 사유를 통해 얻은 선택과 행동은 신성한 모독자들의 공통점이다이런 삶은 개인적으로 불행하다행복한 일상과 거리가 멀 수도 있음을 알기 때문에 사람들은 외면하는 것일까

  
생각보다 현실은 단순하다이런저런 문제들로 복잡해 보이지만사실 누군가의 이기적 욕심을 가리기 위한 의도된 복잡일 수 있다사실 진리는 단순한데 그 진리를 숨기기 위해 어렵고 복잡하고 까다로운 말들을 늘어놓는 것을 흔히 보게 된다그 복잡한 이야기들은 결국 누군가의 욕심을 감추기 위한 의도된 가리개일 때가 있다. - 113
  
백미터 달리기 출발 신호를 기다리며 들었던 두근거리는 심장소리조금이라도 더 빨리 도착하고 싶은 열정과 기다림잊었던 기억이 떠오른 이유는 신성한 모독자들의 치열함 때문이었다왜 우리는 사고의 근육생각의 속도에 두근거리지 않을까신 중심 세계관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진리의 빛을 따라가야만 했던 사람들에게 내적 갈등과 심리적 고통이 없었던 게 아니다그들은 신의 존재가 아니라 성직자와 권력자들이 내민 눈가리개를 거부했을 뿐이다. ‘있음이 곧 하느님이다.Esse est Deus.’(마이스터 에크하르트, 149)라는 말은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꿰뚫는다가난한 자힘없는 자병든 자를 위한 종교의 타락은 성직자권력자를 위한 도구로 변질된다생각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은 대가는 고스란히 민주사회에서 유권자의 피해로 돌아오고견제와 감시 장치가 결여된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자명한 사실을 왜 인정하지 않는 걸까박근혜와 이명박은 안 되고 노무현과 문재인은 괜찮고비판과 감시 기능에 문제가 생기고 유권자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순간 vice versa!
  
의심은 새로운 세상의 시작이다다르게 생각하면 오랜 과거의 끝이다작은 의심은 오랜 시간 유지된 과거의 견고함에 작은 균열을 일으킨다의심 자체가 이미 한 시대의 붕괴이자 새로운 시대의 시작을 의미한다. - 183
  
양비론과 양시론만큼 위험한 건 모두 까기다그보다 더 위험한 진영논리와 맹목적 신뢰다유대칠이 열세명의 신성한 모독자를 내세워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중세 천 년의 역사와 철학이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들의 행복이 아니었을까그 행복의 방식은 사람마다 다르겠으나그 행복의 조건은 언제든 달라질 수 있으나 지금까지 철학이 안내한 행복은 질문과 의심이다길들여지지 않는 자유와 절대 고독이다그런 아웃사이더들이 세상을 조금씩 바꿨고 사람들에게 아주 작은 이야기를 들려줬으며 그들이 안내한 길을 우리는 여전히 걷고 있다
  
우리 모두 이단이 되어야 한다지금 우리가 믿는 게 무엇이든 그 신성함을 깨뜨리지 못하면 미래는 밝지 않다만들어진 길만 걷는 사람주어진 조건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람다른 길을 생각해 보지 않는 사람은 신성한 모독자와 거리가 멀다순종적인 사람적응이 빠른 사람을 이단이라고 하지 않는다먼 훗날 가지 않은 길에 대해 아쉬움이 남겠으나 후회하지는 말자그 길도이 길도 아닐 수 있겠지만 사유하지 않고 변화를 꿈꾸지 않는다면 거기 멈춰 침묵할 것

  
참다운 철학은 바로 이렇게 세상을 바꾸기 위한 외로운 외침이다권력자들과 다투고 싸우기에 철학은 참으로 무력해 보일지 모른다때로는 싸우는 과정에서 상처받고 버림받고 실패할지도 모른다그러나 철학은 실패마저도 흡수하여 자신의 존재 방식으로 삼는다그 실패로 얻게 된 고통도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고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고통을 통해 아직 더 많은 것을 해야 할 존재의 이유를 더욱 강하게 자각하는 것이 참다운 철학의 힘이다. - 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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