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6
잭 케루악 지음, 이만식 옮김 / 민음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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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을 즐기는 방법 - 구글 지도와 유투브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하이데거의 말을 문학에 적용해 보자. 공간은 사건에 선행한다. 작가는 가상공간에 인물과 사건을 배열하기도 하고, 사건을 중심으로 인물을 창조하고 공간을 만들기도 한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공간은 이미 작가의 실존적 경험이나 상상적 경험을 초월할 수 없다. 한 번도 들어본 적도 가본 적도 없는 기막힌 공간을 창조한 작가는 없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천공의 성 라퓨타걸리버 여행기에 대한 오마주다. 조나단 스위프트는 릴리퍼트와 브롭딩낵을 거쳐 라퓨타를 완벽하게 창조했을까. 수많은 신화, 전설, 민담의 공간을 차용했다. 어떤 공간을 창조하느냐에 따라 문학 작품은 전혀 다른 길을 걷는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공간성을 공간의 구조내지 성격이라고 정의했다. 이를 문학적 공간에 적용해 보면 현실상상으로 나눌 수 있다. 실재 경험할 수 있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은 실감나게 몰입하는 재미가 있다. 반면에 옷장 문을 열고 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는 나니아 연대기식 상상력은 꿈과 환상을 선물한다. 어느 쪽이든 세밀한 구조를 만들고 공간의 성격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따라 작가가 보여주고 싶은 세계는 재창조된다.

 



로드 무비의 대명사 노킹 온 헤븐스 도어(Knockin' On Heaven's Door, 1997)에서 나 델마와 루이스 (Thelma & Louise, 1991)OST를 다시 듣는다. 바다를 향해 달리는 마틴과 루디, 세상 끝까지 달릴 수밖에 없었던 델마와 루이스. 그들이 달린 길은 공간적 구조가 아니라 그들의 실존을 드러내는 공간의 성격을 잘 보여준다. 물론 그 길들은 지극히 현실적인 길이며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공간이다.

 

잭 케루악의 길 위에서(On the Road, 1957)는 공간을 따라가지 않으면 무의미한 소설이다. 1947~1949년의 미국의 길은 어땠을까. 주인공 샐 파라다이스는 히치하이킹으로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간다. 다시 타임스퀘어로 돌아오기까지 13,000킬로미터의 대장정. 덴버에서 딘을 만나지만 1부는 오로지 샐 파라다이스 자신의 여행이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미동부에서 서부로 끊어질 듯 이어진 길이 주인공이다. 소설에서 언급된 대도시와 중도시를 계속해서 찾았다. 구글 지도를 펼쳐 확대 축소를 반복하며 뉴욕 주부터 캘리포니아 주까지 샅샅이 훑었다. 책 앞쪽에 1~4부까지 이동 경로가 나오지만 항공지도와 구글 지도를 따라가며 읽었다.

 

2부는 샐과 딘, 메릴루, 에드 던컬이 함께 떠난다.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운전을 하며 이동한다. 3부는 샐과 딘, 샌프란시스코에서 롱 아일랜드까지 기록이다. 4부는 샐, , 스탠, 셰퍼드가 덴버까지 가서 남쪽으로 멕시코시티까지 간다. 뉴욕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두 번 왕복 후 국경을 넘는다.

 


강을 건너고 산맥을 넘고 눈보라와 싸우며 이어진 길들은 그대로 500쪽이 넘는 소설이 되었다. 두툼한 소설책 두 권을 홀린 듯 넘긴 이유는 순전히 구글 지도와 유투브 때문이었다. 가본 적도 없는 미국의 시골길을 샐과 딘과 동행한 이유는 자동차에서 들려오는 재즈 때문이다. ‘찰리 파커, 마일즈 데이비스, 빌리 홀리데이, 디지 길레스피, 루이 암스트롱, 로이 엘드리지, 핫 립스 페이지, 텔로니어스 멍크, 스탠 게츠, 찰리 버드, 페레즈 프라도, 듀크 앨링턴이름이 나올 때 마다 검색하고 추억의 재즈를 듣는다. 덜컹거리는 트럭 짐칸도 좋고, 메릴루와 키스하며 운전하는 딘의 차 뒷자석도 좋았다. 어차피 달려야하는 게 인생 아닌가.

 

완벽한 평면과 텍스트로 이루어진 세계문학에 공간성을 부여하는 건 순전히 독자들의 몫이다. 작가의 묘사와 서술에 따라 길을 만들고 건물을 짓고 인물을 창조한다. 그러나 지루하게 나열되는 미국의 지명을 따라가는 게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엉뚱한 방법 같지만 구글 항공지도를 확대 축소해가며 샐과 딘과 메릴루, 에드, 스탠, 셰퍼드의 위치를 추적하는 재미가 제법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일은 유투브가 맡았다. 찰리 파커의 앨토 섹스폰 소리와 함께 뉴올리언스의 전성시대를 듣는다.




1부 샐

; 뉴저지패터슨~뉴욕~시카고~대븐포트~아이오와시티~디모인~덴버~스튜어트~오마하~그랜드아일랜드~셸턴~고센버그~노스플랫~샤이엔~롱몬트~덴버~센트럴시티~솔트레이크시티~리노~샌프란시스코~LA~플래그스태프~달하트~세인트루이스~인디애나폴리스~콜럼버스~피츠버그~해리스버그~뉴욕타임스퀘어(13,000킬로미터)

 

2부 샐, , 메릴루, 에드 던컬

; 뉴욕~워싱턴~리치먼드~테스터먼트~노스캐롤라이나 던~메이컨~모빌~뉴올리언스~배턴루지~보몬트~휴스턴~앨패소~라스크루시스~벤슨~투손~베이커필즈~툴레어~오클랜드~샌프란시스코

 

3부 샐,

; 샌프란시스코~새크라멘토~솔트레이크시티~크레이그~덴버~오갈랄라~고센버그~커니~그랜드 아일랜드~콜럼버스~디모인~뉴턴~대븐포트~시카고~디트로이트~롱 아일랜드

 

4부 샐, , 스탠 셰퍼드

; 워싱턴~오하이오~신시내티~인디애나~세인트루이스~미주리~캔자스~애벌린~덴버~스프링스~달하트~프레더릭스버그~샌안토니오~러레이도~몬테레이~그레고리아~멕시코시티~뉴욕 

 


 
길을 떠나는 이유는 익숙한 것들과 결별하기 위해서다. 세월은 가고 사람은 늙는다. 그럼에도 공간은 더디게 변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영원히 살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여행은 낯설게 바라보기 위한 노력이다. 나와 세상을 낯설게 보지 못하면 살아있는 박제다. 잭 케루악은 마리화나 벤제드린 그리고 재즈로 이 소설을 썼다.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구두점도 문장부호도 없이 길고 긴 두루마리를 토해냈다고 한다. 타자기를 두드리며 그는 소설을 쓴 게 아니라 달뜬 여행의 피로감을 느꼈을까. 동부에서 서부로 다시 동부로 다시 남북을 가로지르는 잭 케루악의 여행기에는 두근거림이 없다. 희망이나 꿈을 찾아 떠나는 식상한 구성이 아니라서 단숨에 읽혔는지도 모른다. 길에서 만난 사람은 새로운 깨달음을 주거나 생의 전환점을 만들어주지 않는다. 그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 피곤하고 지친 여행자일 뿐이다. 샐과 딘처럼. 이 소설의 미덕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독자에게 묻는다. “네가 인생에서 바라는 건 뭐야?”(1, 95)

여행에서 돌아오면 역시 일상이다. 일상보다 피곤한 여행을 하는 사람을 딘은 이해할 수 없다. 아니 무언가 돈과 시간을 들여 여행에서 기대하는 게 있다는 건 위험해 보인다. 샐과 딘에게 여행은 인생의 다른 이름이다. 머물지 못해 떠나는 게 아니라 그저 떠날 뿐이다. 길 그 자체가 인생이므로.

 

다시 돌아오면 일상은 그대로. 뉴욕은 뉴욕이다. “나는 러시아워 중에서도 가장 복잡한 시간에, 길에 익숙해진 순진한 눈으로 수백 수천만의 사람들이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끝없이 서로 으르렁대는 뉴욕의 절대적인 광기와 환상적인 혼잡함을, 그 미친 꿈을 보았다. 움켜쥐고 낚아채고 건네주고 한숨 쉬고 죽음을 맞아서 결국은 롱아일랜드시티 너머의 끔찍한 공동묘지 도시들 중 하나에 묻히는 것이다.”(1, 174)

 

소설 도입부에 딱 한 번 소설의 제목에 걸맞은 작가의 목소리가 들린다. 잠시 들어보자.

 

노을이 붉게 물들 무렵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 순간은 평생 단 한번밖에 없었던, 아주 독특하고도 묘한 순간이었다. 나 자신이 누군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집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었고 여독에 지쳐 뭔가에 홀린 듯한 상태였는데, 한 번도 본 적 없는 싸구려 호텔 방 안에서, 밖에서 들려오는 증기기관의 씩씩거리는 소리, 호텔의 오래된 나무 바닥이 삐걱거리는 소리, 위층의 발소리, 그리고 온갖 종류의 슬픈 소시들을 들으며 금이 간 높은 천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이상하게도 한 십오초 동안 내가 누군지 정말로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겁이 나진 않았다. 나는 그저 다른 누군가, 어떤 낯선 사람이 되었고, 나의 삶 전체는 뭔가에 홀리 ㄴ유령의 삶이 되었다. 내가 미국을 반쯤 가로질러 와서 과거의 공간인 동부와 미래의 공간인 서부 사이의 경계선 위에 있었다는 사실, 아마도 그 때문에 바로 그 자리에서 이상한 붉은 오후의 그 순간에 그런 일이 벌어진 것이리라. - 1, 33

 

길 위에서 낯설게 자신을 바라보는 대목이다. 이후의 여행은 길을 따라 일상을 사는 것처럼 때로는 지치고 피곤하며 때로는 충동적이다. 매일매일 낯설지 않다면 여행도 일상이다. 샐은 딘을 만나면서 길을 떠난다. 딘은 샐이 아니었다면 길을 나서지 않았을지 모른다. 만남이 여행이다. 여행은 곧 새로운 관계 맺음이다. 우리가 사는 모든 순간이 여행이다.

 

1920년대 대공황 시대에 태어나 2차 대전을 직접 경험한 비트 세대beat generation’는 제1차 세계대전 후에 환멸을 느낀 미국의 지식계급 및 예술파 청년들을 가리키는 잃어버린 세대lost generation’와 구별된다. 비트 세대는 다시 혁명가 기질을 가진 힙스터hipsters’와 방랑자 기질을 가진 비트닉beatniks’으로 분류한다. 샐과 딘은 기성 사회를 떠나 글을 쓰고, 재즈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춘다. 그리고 다시 길을 떠난다. 떠나기 위해 떠나고 떠나기 위해 정착한다.

 

그리고 한 권의 책이 또 다른 책으로 연결된 구절을 찾았다. 번역은 좀 다르지만 길은 곧 삶이라는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깨달음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이해하는 데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릴 수도 있겠다. 아니 먼 길을 떠날 날이 멀지 않았을 수도.

 

우리의 찌그러진 여행 가방이 다시 인도 위에 쌓였다.

아직 갈 길이 멀다.

하지만 문제되지 않았다.

길은 삶이니까.

- 2,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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