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 대중문화와 소녀의 계보학
한지희 지음 / 경상국립대학교출판부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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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 제429호에 실린 '장정일의 독서일기'(68~69쪽)에 소개된 책이다. 장정일의 독후감을 읽고 재미있을 것 같아서 읽었다. '소녀'의 의미와 역사를 살피고, '소녀'라는 이름에 부여된 이중적 이미지를 대중문화를 통해 살펴보는 책이다. 솔직히 무슨 말인지 단박에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았다. 그러나 대략 3분의 2지점까지는 나름 재미있게 읽었음을 밝혀둔다.

 

책 전체를 읽는 것도 물론 나쁘지는 않겠지만, 내 생각에는 앞서 말한 <시사IN> 제429호에 실린 장정일의 글을 읽는 것이 책 내용을 더욱 선명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내 이해력이 부족한 탓이겠지만 굳이 비유를 들자면, 어려운 내용의 고전을 직접 읽는 것보다 요약·해설된 글을 읽는 것이 내용을 더 쉽고 빠르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니 장정일의 글을 먼저 읽고, 책이 궁금하다면 그때 읽어도 좋겠다는 생각이다.

 

이왕 말이 나왔으니, 책의 주요 내용을 장정일의 글을 인용하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남성들의 가부장 이데올로기는 여성의 생애주기 가운데 문턱에 해당하는 소녀 시절을 육체와 정신 양면에서 봉쇄해왔다. 소녀들은 오랫동안 성적 욕망은 물론 자신의 육체마저 의식하지 못하는 중성이나 무성애자로 훈육되어왔는데, 소녀들이 중성이거나 무성애적이어야 하는 이유는 순진열렬함이 한 남자만을 위한 희귀재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걸그룹이 활개를 치는 지금은 양상이 더 나쁘게 변했다. 걸그룹을 모범 삼은 소녀들은 자신의 육체와 매너를 섹시하게 가꾸면서, 여전히 중성이나 무성애자로 남아 있어야 한다. 이런 이중적인 구속은 여성을 남성에게 종속시켜 한층 더 다루기 쉬운 여성으로 만들며 여성 자신을 자학적이고 분열적 주체로 만든다. 걸그룹의 막강한 영향력은 소녀들로 하여금 "자신의 몸을 일종의 육체 자본"으로 내면화시키고, 걸그룹에 심취한 삼촌(오빠)의 존재는 소녀들에게 사랑받기 위해서는 성적 매력을 이용하라고 가르쳐준다. 프리가 하우그와 그 동료들이 함께 쓴 <마돈나의 이중적 의미>(인간사랑, 1997)에 따르면, 여성의 사회화 과정은 그들의 육체와 매너가 남성이 만들어놓은 주형의 주형물이 되는 것으로 완료된다."(<시사IN> 제429호, 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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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섹스 - 그놈들의 섹스는 잘못됐다
은하선 지음 / 동녘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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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쎄다. 그저 재미있게 읽었어도 그만인데, 읽는 내내 생각이 아주 많았다. 글쓴이의 생각에 대해 ()공감하고 ()동의하는 것과는 별개로, 자꾸만 내 처지와 경험이 떠올랐다. ‘아 맞아, 그랬었지, 그렇지, 그럴 수도 있겠구나, 그런가등의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나의 성()역사(?)와 더불어 나라는 인간 자체에 대해, 여성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늘 안고 있는 고민들이 한꺼번에 떠올라서 숨이 막혔다. 정말 쉽고 재미있는 글인데 간단하게 읽을 수가 없었다.

 

내 생각에 여성이 약자인 증거는 스스로가 여성이라는 것에 대해 일상적으로 문제에 부딪히고 고민하는 것에 있는 것 같다. 외모, 음주, 흡연에서부터 운전, 가사, 취업, 직장생활, 옷차림, 결혼, 육아, 시댁, 말투, 섹스, 연애경험, 소비습관에 이르기까지 스스로가 여성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할 주제들은 널렸다. 너무 많아서 탈이다. 반면에 남자들은 자신이 남성이라는 것에 대해 일상적인 고민을 할까?

 

성은 곧 권력이라고 했나. 책 이곳저곳에서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당연한 듯이 권력을 휘두르는 그놈들을 보면서 분개하다가 문득 그년들의 권력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까지도 내게 식은땀 폭탄을 가져오는 기억 중 하나는 나의 섹스에 대해서 가까운 친구들이 날 비난했던 일이다. 그녀들은 내 욕구나 상황을 이해하기보다 나를 탓하고 몰아붙이고 자제력 없는 애로 취급했다. 친구를 잃을까봐 두려웠던 나는 어이없게도 그녀들에게 사과를 했다. 내 사과로 사건은 일단락되었으나 지금까지도 나는 내가 뭘 잘못했는지 모른다. 오히려 그 친구들에게 사과했던 나 자신에게 화가 날 지경이다. 그녀들은 내 섹스 상대의 애인도 아니었고 가족도 아니었다(애인이나 가족이었다고 해도 그게 어쨌단 말인가).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들은 나를 이해할 필요도 없는 거였다. 왜냐하면 내가 그녀들의 이해를 바라고 섹스한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녀들의 이해를 구걸했고 친구라는 집단에서 내쳐지지 않기를 바랐다. 기껏해야 10년도 못 갈 친구사이였건만 그때는 뭐가 그렇게 두려웠는지.

 

그런 일이 있은 후 내가 깨달은 바는, 여성이 남성보다 여성의 연애나 섹스에 대해 더 억압적인 시선을 가질 수 있다는 거였다. 여성이 여성을 억압하는 논리는 주로 도덕윤리의 탈을 쓰고 있는 것 같다. 그 도덕윤리가 누구를 위한 것이고 누구의 시선으로 만들어진 것인가를 생각해보면, 여성들이 남성의 시선을 내면화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대다수의 여성이 그렇겠지만, 그러한 남성적 시선에서 나조차도 자유로운 것은 아니다. 자기 힘으로 생각하지 않고 마구 휘둘러대는 남성적 시선혹은 올바름이 무서울 뿐이다.

 

그년들이 휘두르는 권력 못지않게 깊이 생각했던 건 미성년에 대한 성인의 권력이다. 개인적으로는 미성년자들이 미숙하다고 여기고 무조건 보호해야 한다는 의견에 반대하는데, 성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보호해야 하는 측면도 있다. 기본적으로 아주 어린 사람의 경우엔 힘도 약할 것이고, 자기 의사를 솔직히 밝히기 힘든 상황도 많으니까. 하지만 어리다고 해서 성감수성과 성감대, 성욕, 몸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미성년자에게도 성적인 권리를 인정하고 스스로 선택하고 감당할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건가? 이건 생각보다 굉장히 복잡한 주제일 수 있다. 왜냐하면 미성년자에겐 주어진 권리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투표권, 일할 수 있는 권리, 결혼할 수 있는 권리, 학교에 다니거나 다니지 않을 권리, 숙박업소에 드나들 권리, 야동 사이트를 이용할 권리, 성용품점을 이용할 권리 등이 없거나 늦게 주어지거나 제약이 따른다. 그러니 자신의 성생활로 인해 발생할 일들에 대해 온전히 책임지기가 힘들고 언제나 어른들이 개입하도록 손 놓고 있어야 한다.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들을 결정할 다른 권리들은 하나도 없는데 오직 성적인 결정권만 부여하자고? 저자의 말처럼 갓 스물이 된 사람과 열아홉인 사람은 무슨 차이가 있기에? 스무 살은 스스로의 삶을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는데 열아홉 살은 안 되는 근거는 무엇일까? 그렇다면 성문제에 있어 연령 기준을 대체 몇 세로 해야 한단 말인가? 아니, 사람을 연령으로 나누어서 다루는 것 자체가 크게 타당성이 없는 건 아닌가?

 

물론 이것은 어디까지나 법적인 문제다. 그저 법적인 제한일뿐인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절대적인 기준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법이 청소년에게 여러 사회적 권리들을 제한하더라도 문화적 혹은 개인적으로는 자유를 줄 수 있지 않을까? 법이 청소년의 숙박업소 출입을 금지하더라도 부모는 아이의 성생활을 위해 방 한 칸을 내어줄 수 있다. 피임법을 가르쳐줄 수 있고, 여러 섹스토이를 즐기도록 해줄 수도 있다. 아이들과 성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그들의 성생활을 지켜줄수록 성폭력 등의 청소년성범죄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물론 이것이 목적은 아니다.) 그리고 아이들이 스스로 자신의 성적 취향이나 정체성을 찾는 데도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어디까지가 성폭력이고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금지하고 억압하는 것보다는 드러내놓고 얘기하는 게 그들의 인권을 위해서도 적절해 보인다.

 

문제는 나의 이런 생각조차 성인의 입장에서 생각한 것일 뿐이라는 점이다. 과연 청소년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어떤 의견을 갖고 있을지 궁금하다. 나도 그 시기를 거쳐 오긴 했지만 청소년이라고 다 같은 과정을 겪고 같은 생각을 하지는 않을 테니, 그들의 의견을 듣고 싶다. 성을 주제로 그놈이나 그년 그리고 모두,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자유롭게 생각을 나누는 분위기가 만들어진다면. 어쩌면 그놈들의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을 낮추고, 얼토당토않은 말과 욕설을 내뱉는 식의 권력 휘두르기를 줄일 수 있지 않을까. 이런 내 예상이 맞는지 아닌지 확인하는 것 자체(그런 열린 분위기를 만드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게 진짜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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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atros 2016-01-03 2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 번 읽어보고 싶은 책이네요.

cobomi 2016-01-04 11:51   좋아요 0 | URL
한 번쯤은 읽어볼 만한 책인 것 같아요~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
309동1201호(김민섭) 지음 / 은행나무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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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저자가 지방대 대학원생으로서, 시간강사로서 어떤 삶을 살아내고 또 어떤 생각들을 하는지 담담하게 쓴 글이다. 노동자로서 햄버거 가게 아르바이트보다 못한 시급과 처우를 받고 있는 대학의 비정규 노동자들나는 이런 종류의 이야기엔 분노하기 일쑤지만, 이 책을 읽는 동안엔 분노보다 슬픔이 밀려왔다.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일까.

 

나도 안다. 관행은 거스르기 힘들고, 다수가 침묵하며 따르는 일에는 반발하기 어렵다는 것을. 나의 장래에 막대한 영향을 끼칠 것 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의 의견에 반대하기 힘들며, 게다가 여러 사회적도덕적 관습들 때문에 서열을 거스르는 언행도 하기 힘들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자신이 처한 의 위치를 받아들이고 묵묵히 따르는 저자가 무기력해 보이기도 하지만 비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누구든 의 위치에 서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 아니 적어도 관행을 거스르기가 매우 힘들다는 것을 인정한다.

 

저마다 학교, 특히 대학에 대해 품고 있는 이미지가 있을 것이다. 대학을 다니면서 자주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 중 하나는, ‘대학이 어떤 곳인가(무엇을 하는 곳인가)?’에 대한 대답이었. 교수들은 종종 대학이 진리의 전당이라는 표현을 쓰곤 했다. 그렇다면 교수와 학생들은 진리 즉, 학문을 치열하게 추구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떤 면에서는 취업에 필요한 지식만이 중요하게 취급되었다. 인문학 강의에서는 정의’, ‘공정’, ‘인권’, ‘성찰같은 단어들이 자주 등장했지만 막상 그것을 말하고 추구하는 대학에서도 비정규직은 넘쳤고, 시간강사뿐만 아니라 근로 장학생이나 조교들의 처지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고 개선을 요구하는 교수, 교직원은 거의 없었다. 대학은 기업이 원하는 인재를 양성하는 또 하나의 기업처럼 느껴졌다.

 

어떤 사람들은 저자가 자신의 꿈을 위해”,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으니까다소 부당하고 힘겨운 일이 있더라도 감내해야 한다고 말한다. 혹은 허울만 좋은 '꿈'을 위해 그렇게 사느니 당장 취업전선에 뛰어드는 게 현명하다는 의견도 있다. 그게 최선인지도 모르겠으나, 오히려 그러한 생각들이 저자와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들의 삶을 더욱 힘겹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네가 선택했으니 참고 견디렴. 못 하겠으면 떠나든가.”라는 논리는 대학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든 폭력적이지 않은가. 어떠한 선택이든 최소한의 생활 유지는 되어야 하고, 인간 대접은 받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특히 화가 나는 것은 네 주제를 알라는 논리다. 맞다. 어떤 점에서 주제 파악은 매우 중요한 일이고, 생존(생계유지)은 절대적이고 필수적인 문제다. 하지만 주제 파악이 모든 가치판단과 선택의 유일한 잣대일까? 주제 파악의 그 '주제'라는 것이 반드시 경제적 능력을 말하는 것인가? 가난한 사람은 언제나 주제에 맞게공부보다 취업을 선택해야 하는가? 공부는 공부하기를 좋아하고 또 잘하는 사람이 해야지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사람만 해야 하나?

 

저자의 말처럼 책에 등장하는 모든 문제적인상황들은 특정한 개인이 나빠서라기보다 구조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구조가 잘못된 것이라면 구조를 바꿔야지 개인의 책임으로 떠넘기면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2, 33091201호가 끊임없이 이어질 뿐이다. 물론 구조는 바뀌기 힘들다. 때문에 개인이 현실과 타협하는 편이 빠르고 편하다. 하지만 그런 타협적인 개인만 있다면 구조는 더욱 바뀌지 않을 것이고, 개인의 삶을 주제 파악의 잣대로만 평가한다면 모든 을들의 삶이 더욱 힘겨워질 것이다.

 

얘기가 거창하게 흘렀지만, 저자는 자신이 겪고 생각한 바를 담담히 글로 옮겼을 뿐 구조개혁을 주장하거나 특정한 개인의 태도를 지적하며 문제 삼지는 않는다. 나는 저자의 그런 태도가 오히려 슬펐다. 차라리 대학의 부조리한 측면을 하나하나 따지는 글이었다면 덜 서글펐을 것이다. 저자는 이 글을 내가 이후에 어떠한 삶을 살아가든 나의 과거를 미화하거나 추억하지 않고 기억하기 위해, 썼다.”(15)고 했다. 그것이 저자가 들려준 이야기가 슬펐던 지점이다. 저자의 경험이 미화하거나 추억하지 않고’, 또한 더 과장하거나 나쁘게 말하지 않은, 이 시대의 대학과 젊은이들의 모습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저자를 비롯한 많은 지방시들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걸어갈 것이다. 나는 저자가 들려준 이야기를 통해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내 아이에게는 어떤 삶과 길을 보여주어야 할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어려운 문제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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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23 1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23 14: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커피소년 2015-12-10 23: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글 잘 쓰시네요. 누군가의 공감을 얻어내는 글쓰기에 뛰어나신 듯합니다.

cobomi 2015-12-31 14:06   좋아요 1 | URL
과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송히 2015-12-18 0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 글을 읽고 정말 이책이 어떠한지 읽고 싶어지네요.

cobomi 2015-12-31 14:06   좋아요 0 | URL
한 번 읽어보시길 권합니다.
 
책벌레와 메모광
정민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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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란 무엇인가? 평화학 연구자 정희진이 쓴 인문학, 열풍에서 개념으로”(Vol.19 201405월호, 98~103)라는 글이 있다. 그 글에서 정희진은 우리 사회에서 보통 공부로 간주되는 행위를 세 가지로 든다. 첫째, 입시 공부로 대표되는 지식과 정보의 습득. 둘째, 평생교육, 교양인으로서 독서, 여행, 인간관계, 실연 등 폭넓은 인생 경험. 셋째, 생각하는 노동. 정희진은 세 번째 공부가 가장 생산적”인 공부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선생님, 연구자, 학자라는 표현을 넘어 사상가’(thinker)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하는 공부다. 사상이 거창한 것 같지만, 단어 그대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스피노자, 푸코, 니체만이 사상가가 아니다. 자기만의 사유 방식체계입장을 추구하는 사람, 자신만의 렌즈로 현실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사람이 공부를 잘하는 사람이다. 실력, 콘텐츠가 있는 사람이다.”

 

정민 교수의 신간 책벌레와 메모광에 등장하는, 제목 그대로 책벌레와 메모광들은 정희진이 말한 생각하는 노동으로서의 공부를 했던 사람들이 아닐까.(정희진의 글 전체의 취지에 비춰보면 의미가 조금 다를 수 있다.) ‘책벌레와 메모광들은 무엇보다도 몸이 부지런한 사람들이었다. 어찌 보면 미련스러울 만큼 우직하고 부지런했기 때문에 자신만의 생각도 꾸준히 발전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교서(校書)는 잘못된 부분은 없는지 살펴보아 교정해가며 읽는 것이다. 읽다가 궁금하거나 의문이 생기면 그냥 넘어가지 않고, 관련 자료를 뒤져서 내용을 확인한다. 잘못된 부분이 나오면 이를 바로잡고 여백에 메모를 남긴다.”(115)

얼핏 생각하기에도 시간이 많이 걸리는 독서법(공부법)이다. 제대로 꼼꼼하게 공부하려면 이런 태도가 필요하다 싶지만, 말처럼 쉽지 않다. 요즘처럼 인터넷이 발달한 시대에도 궁금한 것을 일일이 찾아서 확인하며 책을 읽기가 힘든데, 정보도 자료도 기술도 부족했던 조선 시대 사람들이야 오죽했을까. 웬만큼 부지런하지 않고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이지 싶다.

 

메모도 마찬가지다. 떠오르는 생각이나 보고 듣고 느낀 것, 일정 등을 메모하는 것이 유용한 줄 알면서도 막상 실천하기는 어렵다. 종이와 필기도구를 꺼내고 넣는 번거로움 때문만은 아니다. 스마트폰을 항상 들고 다니면서도 메모 기능을 잘 활용하지 않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글쓴이의 말처럼 뭔가를 메모한다는 것 자체에 익숙하지 않은 탓일 텐데, 찰나의 것을 글로 적는 행위 자체가 귀찮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그 모든 귀찮다는 생각을 이겨내는 부지런함이 있어야만 메모광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역시나 공부는 몸으로 하는 것이다. 정희진의 말처럼 생각하는 노동에서 강조점은 생각이 아니라 노동에 먼저 찍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몸으로 부지런히 읽고 써야 생각이 발전하고, 그걸 또 읽고 쓰며 확장하는 것이 공부 아닌가.

 

책벌레와 메모광에 등장하는 옛 사람들과 글쓴이가 책을 대하는 태도, 독서와 메모 방법, 공부 방법 등을 엿볼 수 있어서 재미있었다. 책벌레도 좋고 메모광도 좋다. 그들을 통해 공부란 무엇이며 어떻게 공부해야 하는지 생각해볼 수 있었기에 또한 좋았다. 글쓴이는 그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의 삶이 그대로 보인다”(238)고 했다. 옛 사람들과 글쓴이는 진정으로 책과 메모, 공부를 좋아했기 때문에 천천히 오래, 그래서 멀리”(246) 갈 수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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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7 00: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07 00: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가족이라는 병 - 가장 가깝지만 가장 이해하기 힘든… 우리 시대의 가족을 다시 생각하다
시모주 아키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살림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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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이 가득한 단어 중 하나가 가족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직접 겪고 있는 것과는 다른 바람직한모습을 상상하고, 그것을 가족이라 여기는 것이다. 이를테면 화목한가족, 너그럽고 인자하며 희생적인 부모님, 집안에 보탬이 되고자 노력하는 자식들의 모습, 서로의 고민을 털어놓고 의논 및 조언하는 모습 등이 바로 가족에 대한 환상이 아닐까.

 

나는 나와 가족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참견하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특히 바람직한가족의 모습을 멋대로 정해놓고, 내가 거기에 어긋나게 행동하는 것을 못마땅한 투로 간섭하는 사람들이 싫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니, 나처럼 살아보지 않았으면서 함부로 말하는 걸 볼 때면 화가 나는 걸로도 모자라 다시는 그 사람과 마주하고 싶지가 않다.

 

우리 사회는 유난히 가족을 좋아하는 것 같다. “가족끼리”, “가족이니까”, “가족 같은”, “또 하나의 가족”, “가족 구함. 그리고 가족에 대해 너그럽다. 명백한 잘못도 가족이 저지르면 감싸주는 것을 미덕으로 생각한다. 가족이라면 나서서 돕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고통도 함께 해야 한다고 믿는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가족이라서,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못하는 경우도 많다. 어느 정도는 타당할지도 모르겠다. 과연 그럴까.

 

사실 가족은 가장 가깝지도, 내 마음과는 전혀 다른 집단인지도 모른다. ‘가족을 내세워 상처주고 짐을 지우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가족이라는 거대 권력은 당사자가 원하지도 않는 여러 가지 기대를 퍼붓기도 한다. 사소한 일도 가족이기 때문에 오히려 큰 상처가 된다. 가족은 서로에 대해 기대만큼 잘 알지도 못할뿐더러 남보다 더 잘 이해하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가족에 대해서 모종의 그리움과 연민, 사랑을 갖(고 있다고 착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은 가족에 대해서만큼은 특별히 더 큰 도덕적 책임을 느끼는 이유가 무엇일까?

 

시모주 아키코의 가족이라는 병은 내가 갖고 있던 궁금증을 해소해주지는 못했다. 저자의 경험담과 함께 가족에 대한 생각들을 풀어놓고 있는 책이었다. 공감하는 부분도 있고, 전혀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있었다. 중요한 것은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스스로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졌던 게 아닌가 싶다. 핏줄로 이어져야만 가족인가, 함께 살아야만 가족인가, 가족의 역할은 무엇인가, 가족과 개인의 관계는 어떠해야 할까. 뾰족한 답은 없지만 적어도 가족에 대한 환상을 깰 수 있는 시간을 가진 것에 의미를 둔다.

 

또 하나. 가족 혹은 가정과 관련하여 갖고 있는 환상 중 이런 것도 있다.

지금도 우리는 어떤 사건이 벌어지면 그 가족을 걸고넘어진다. “부모가 자식을 어떻게 교육한 거야!” “대체 어떻게 돼먹은 가정이야!” ”(52)

국가도 나서서 가족을 예찬한다. 전시 중에 그랬던 것처럼, 가족이 화목하고 단합이 잘되면 통치하기가 쉽다. ‘내 고장 살리기캠페인은 다름 아닌, 관리하기 쉬운 가족을 각지에 만들자는 운동이다. 그런 의미에서 가족은 작은 국가라 할 수 있다.”(146)

 

인터넷에 자주 등장하는 유형의 댓글들이 떠올랐다. ‘자식교육을 어떻게 시켰길래운운하는 유형이다. 가정교육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가정에서 모든 교육이 이루어질 거라 믿고 기대하는 것 같은 표현들이 기가 막힐 때가 있다. 무슨 일만 터졌다 하면(특히 어린이, 청소년이 주체가 된 사건들) 가정교육과 학교교육을 들먹이며 분노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게 광분하는 사람들 스스로도 가정과 학교에서 교육받은 그대로 잘하기만 했는지 궁금하다. 어쩌면 일상에서 심심치 않게 벌어지는 모든 사건들은 가정교육이나 학교교육 때문이 아니라, 말 그대로 일상적인 풍경들이 가장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무심코 던진 한마디, 일상적으로 보는 TV나 동영상, 일상적으로 마주치는 어른들의 모습 등. 그러나 어떤 사건이 발생했을 때 가정교육탓을 하면 그만큼 비난과 관리가 쉬워진다. 모든 책임이 가족에게 돌아가기 때문에 그 문제 가족만 관리하면 되는 것이다. 가족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가정교육만 잘하면 된다는 생각)은 위험한 환상이다.

 

썩 재미있는 책은 아니지만, 가족으로 인해 힘들어하고 있거나 고민하는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가족에 대한 나름의 해답을 찾게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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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0 23: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31 14:0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