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지 않고 배불리 먹고 싶다 - 부채사회 해방선언
구리하라 야스시 지음, 서영인 옮김 / 서유재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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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제목을 보고 놀랐다.

어쩜! 나도, 나도!

내 마음을 들킨 것 같기도 하고, 이런 생각을 당당히 제목으로 붙이다니 흥미롭기도 하고.

읽지 않을 도리가 없다.

 

저자는 하고 싶은 것들을 하며 자유롭게 보낼 수 있는 세상을 꿈꾼다.

빈부나 인종, 국적, 학력, 계급, 성별 등에 따른 차별이 없고 별다른 능력이 없어도 모두가 한 데 어울릴 수 있는 세상 말이다.

사람을 특정한 잣대로 등급 매기지 않는 세상.

그는 국가도, 사회도(시민? 사회인 따위), 도덕주의도 '똥'이라고 생각하곤 한다.

그런 저자에게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마라'는 말은 가장 듣기 싫은 헛소리다.

일하고 돈을 버는 것, 그 돈을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는 데 쓰는 것, 더 나은(혹은 현재의) 삶의 질을 위해 다시금 일하고 돈을 버는 것 _ 그런 삶은 인간답지도, 즐겁지도 않다.

저자는 이런 현대 사회를 '인지자본주의'라 일컫는다.

말하자면 이 사회는 정보를 듣고 그것을 인지하여 거기에 반응하는 것만을 중요시한다. 그저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을, 한마디로 말해서 귀만을 중시하는 사회이다. 이런저런 정보가 귀에 들어오면 아무 생각 없이 그저 들은 대로 움직이라는 것. 그러니까 위에서 명령이 내려오면 거기에 따르기만 하라는 것이다. (19쪽)

옮겨 적고 보니 살짝 비약이 있는 문구지만, 앞뒤 내용을 보탠다면 모든 것이 자본주의에 따라 세팅되어 있는 현실을 꼬집은 것이다.

돈이 되는 일은 좋은 일, 돈을 잘 버는 사람은 능력 있는 사람(그 반대일까?).

우리는 '부지런히' 일해서 돈을 벌어야 제 몫을 하는 인간으로 대접 받는다.

여기서 방점은 '일한다'가 아니라 '돈을 번다'에 찍힌다.

돈을 벌어야 제대로 된 사회인으로 대접받는 것이다.

아, 분하다.

 

 

이십대 초중반 쯤인가부터 내 꿈은 이런 거였다.

배우자 혹은 파트너가 벌어오는 돈으로 실컷 책 읽고 학교 다니고 공부하고 글쓰면서 살고 싶다는 것.(그런 점에서 이건 내가 이룬다기 보다 남이 이뤄줄 수 있는 꿈이다.)

그게 어렵다면 근근히 알바나 하면서 살아도 딱히 나쁘지는 않겠다고 여겼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난 절대 결혼은 못할 줄 알았다.(그러나 세상엔 나 같은 빈대 혹은 베짱이도 좋다고 하는 너그러운 사람들이 있다. 아름다운 세상이다.)

정작 나를 들들 볶는 사람들은 내 꿈을 책임지고 있는 배우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다.

한심하다, 그 놈의 책은 맨날 읽어서 뭐에 쓰냐, 그거 전공해서 어디 취직하려고 하냐, 그렇게 빈둥대는 시간에 자격증이나 따라, 어디 써먹을 데도 없는 것 좀 하지 말아라, 요즘 세상엔 여자도 돈을 벌어야 먹고 산다 등등.

정말 저런 소리는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요즘 ***자격증 있으면 취직 잘 된다더라. 한가할 때 그거나 따지 그러냐."

"아, 저도 들었어요. 하지만 그 일은 제가 하고 싶은 게 아닌데요. 그리고 저도 나름 바빠요."

"뭐 하는데 바빠?"

"집안일도 해야 하고, 책도 봐야 하고요. 공부도 하고요."

"무슨 공부?"

"이것저것 관심 있는 거요."

"그거 공부하면 무슨 일을 할 수 있는데?"

"그건 저도 잘....(별로 생각해 본 적도 없음...) 그냥 재미있어서 하는 거예요."

"사람이 재밌는 일만 하고 어떻게 사냐!"

"....."

 

대화는 대충 이런 식으로 전개된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말하는 '일'이란 돈으로 보상받는 걸 뜻하고, 나는 그런 쪽엔 잼병이다.

사람 일이라는 게 어떻게 될 지 모르니 아주 가망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재까지는 그렇다.

아니, 재밌는 일을 하는 게 뭐 어떠냐 말이다.(직접 대꾸하진 못하는 소심함.)

나도 외치고 싶다.

일하지 않고 배불리 먹고 싶다!

딩가딩가 놀고 싶다!

 

 

유쾌하게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읽었다.

친한 친구 만나서 수다 삼매경 빠진 것처럼 이야기가 여기저기로 샜다가 돌아오길 반복하고, 이런저런 에피소드가 뒤섞여서 혼자 큭큭거리기도 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무엇보다 옮긴이가 번역을 아주 맛깔나게 한 덕분이다.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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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섬 2016-09-24 1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나...제 이야기를 옮겨 놓으신줄 알았어요. 제가 요새 듣는 말들, 그리고 제가 하는 말들이거든요.
저희 친정엄마가
˝만날 뭐가 그리 바빠?˝
˝바빠..할 일이 너무 많아. 집안일에 육아에 책도 봐야하고 공부도 해야하고 봉사도 해야하고˝
˝뭔 공부를 여태해. 돈 벌 궁리는 안 하고˝
입병나서 아프다, 매일 잠 못 자서 피곤하다면서 정작 경제활동을 하고 있지는 않거든요.
일이라는 게 꼭 돈을 창출해야만 일은 아닐텐데 말이에요.
여튼 동지를 만난 느낌이에요.^^


cobomi 2016-09-24 10:29   좋아요 0 | URL
헐! 베짱이 동지, 반가워요ㅎㅎ
 
나는 항상 패배자에게 끌린다 - 내 취향대로 살며 사랑하고 배우는 법
김경 지음 / 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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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럽다.

글 잘 쓰는 사람을 보면 그 글에 매료된 나머지 잠시나마 글쓴이의 생각에까지 동화된다.

나와 다른 '취향'을 펼쳐놓는데도 어쩐지 따라하고 싶어진달까.

 

김경의 글을 연달아 읽으면서(<뷰티풀 몬스터>와 이 책) 난 내용도 물론이지만 에피소드, 표현방식, 단어 선택, 연상의 고리들 같은 것에 더욱 끌렸다.

그것이야말로 김경이란 사람을 보여주는 장치들이다.

이를테면 특정한 상황에서 지난 일을 떠올리고, 어떤 예술가를 떠올리고, 문장을 떠올리고, 다시 자신의 삶에 끌어오는 그런 것들.

자주 사용하지 않아서 오랜만에 접하는 단어들과 '어쩜 저걸 저렇게 표현하지?' 싶은 문장들.

왠지 이 사람은 고상하고 지적인 것 같으면서도 어딘지 속물적이고 우중충하며 애틋한 구석이 있다.

 

 

읽고 나니 미묘한 느낌이 든다.

읽을 때는 '아, 이 사람 매력 있네'라며 뭔가 친근한 느낌마저 가졌는데 읽고 나니 모든 것이 희미하다.

"나는 항상 패배자에게 끌린다"는 것 말고는(사실 이것조차도) 김경의 '취향'이 정확히 어떤 것인지 두루뭉술하다.(대충 읽은 건가...)

더불어 그녀의 '스타일'은 그녀 말에 따르면 '그런지'한 스타일이라는데 쉽게 상상이 가질 않는다.

확실한 건, 그녀는 책도 읽고 음악도 듣고 미술관에도 가고 영화도 보고 여행도 다니며, 강원도에서 화가 남편과 함께 여러 가지를 만들면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녀는 그녀의 취향대로 잘 살고 있다.

그게 어떤 취향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자본과 사회가 인정하고 종용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과 느낌, 가치관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사는 거다.(그런 거라고 생각한다)

여기까지 적고 보니 김경이 말한 취향이란 삶의 방식이자 그 사람과 그의 인생을 담고 있는 뭔가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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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의 식탁에서 고기가 사라진 이유 - 고기를 굽기 전, 우리가 꼭 생각해봐야 할 철학적 질문들
최훈 지음 / 사월의책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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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만 보고도 대충 내용을 짐작할 수 있지만, 왜 채식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책이다.

이때, '해야 한다'는 윤리적 당위의 표현이다.

채식이 윤리와 무슨 상관이냐고?

저자는 채식이 윤리적인 행위라는 것을 친절하고 쉽게 설명하고 있다.

 

피터 싱어의 <동물 해방>이나 <실천 윤리학>을 읽어 본 사람이라면 이 책의 내용이 잘 이해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피터 싱어의 책보다 쉽게 읽혔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생활한 사람이 쓴 책이라서 친숙한 예시가 많다.

 

10년 전쯤 <실천 윤리학>을 읽고 채식에 관심을 가졌는데, 실천은 하지 못했다.

그러다 3년 전에 드디어 채식을 실천하려 했지만 한 달도 안 돼서 실패했다.

실패한 이유는 여러 가지다.

우선 나의 의지가 그리 강하지 못했다는 것.

나는 고기를 무척 좋아한다는 것.

갑자기 먹을 수 있는 메뉴가 급격하게 줄었다는 것.

너무 기분 내키는 대로 시작해서 어찌해야 할 바를 잘 몰랐다는 것.

그리고 가족 및 지인들의 끊임없는 설교, 잔소리, 협박, 훼방, 조소 등에 시달려야 했다는 것.

특히 마지막 이유는 치명적이었다.

대단한 이해를 바란 건 아니었다만, 동참해 달라고 한 적도 없다만 사람들은 생각보다 '고기를 안 먹겠다'는 데에 참견하기를 좋아했다.

고기를 먹을 때는 받지 못했던 관심이 집중적으로 쏟아지니까 이만저만 피곤한 게 아니었다.

 

처음엔 왜 고기를 안 먹느냐고 묻는다.

그래서 설명을 한다.

하지만 귀담아 듣지 않는다.

내가 말을 재미 없게 했을 수도 있지만, 말을 재미 있게 했더라도 사람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였을까 싶긴 하다.

어쨌든 내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특히 어른들의) 걱정과 비웃음 등이 쏟아진다.

'얼마나 버티나 보자'

'그래도 고기를 먹어야 기운이 나지'

'음식은 골고루 먹어야 된다'

'야, 그럼 고깃집 갈 때 넌 오지마라ㅋㅋㅋㅋ'

등등.

내 설명을 귀담아 들었다면 적어도 한 명쯤은

'애쓴다. 하지만 너 하나 고기 안 먹는다고 동물들이 고통을 덜 받을까...?'

정도의 말은 했을 법한데 현실은 생각보다 더 냉정했다.

 

 

나는 여전히 채식을 지향한다(지금 채식을 하고 있다는 말이 아니다).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이 옳은 행위라는 데 대해 (아직은) 반박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피터 싱어의 책을 읽은 이후 10여년 동안 고기를 (좋아하지만) 먹을 때마다 마음이 무거웠다.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을 때 느껴지는 가책이랄지, 그런 기분이었다.

 

나는 윤리적인 삶을 살고 싶다.

인간이라면 마땅히 윤리적인 삶을 지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덕 교과서대로 해야 한다는 게 아니다(오히려 도덕 교과서는 형편없다고 여긴다).

합리적으로 옳고 그름을 따져서 보편적으로 옳은 것을 추구하는 게 윤리 아닌가?

 

 

이 책은 채식을 해야 하는 윤리적 이유를 잘 설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윤리적인 삶에 대해서도 다시금 성찰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해준다.

설명도 쉽고 여러 에피소드도 곁들여 있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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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오세요, 오늘의 동네서점
땡스북스 + 퍼니플랜 지음 / 알마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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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내 꿈은 서점 주인이었다.

동네에 서점을 열고 내가 좋아하는 책, 읽고 싶은 책으로 채워넣고 싶었다.

손님이 오면 책을 팔거나 얘기를 나누고, 손님이 없을 때는 혼자 책을 읽겠다는 생각이었다.

단순하지만 진심이었다.

 

그런 꿈을 꾸며 살았을 때는 지나다가 작은 동네서점들을 꽤 볼 수 있었다.

아이들 학습 교재와 잡지를 주로 팔거나, 문구류를 함께 판매하는 서점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마저도 언제부터인가 거의 멸종하다시피 했다.

내 기억엔 시내 중심가에 교보문고가 들어서면서 지역 서점들이 문을 닫았고, 인터넷이 보급되면서 동네에 있던 서점도 하나 둘 사라진 것 같다(정확하진 않다).

2000년대 초중반에 집중적으로 사라졌던 것 같은데 이것도 정확히는 모르겠다.

어릴 때 자주 들렀던 서점들은 아예 자취를 감췄다.

아쉽고 속상하다.

가깝게 들릴 서점이 사라지니 나도 별 수 없이 인터넷 서점을 이용한다.

시내 중심가에는 교보문고와 알라딘 중고 서점이 있지만 우리집에서 너무 멀다.

이사 가듯이 날 잡고 가야만 한다.

자가용이든 버스든 이용할 수 있긴 하다. 

시내 중심가라 몹시 번잡해서 인내심이 필요할 뿐이다.

가끔 들리는데, 서점에 도착하면 녹초가 되고 만다.

차분하게 책을 고르기는커녕 북적대는 사람들을 피해다니느라 제대로 구경도 못한다.

신간코너만 겨우 기웃거리다 지쳐서 대충 한두권 사서 나온다.

그까지 갔는데 빈손으로 오기가 왠지 억울해서다.

흡족한 느낌을 받은 적이 거의 없다.

아, 서점에 그렇게나 사람이 많은데 어째서 독서율이 낮다는 걸까.

 

 

<어서오세요, 오늘의 동네서점>은 나처럼 서점 주인이 꿈이었던 사람의 이야기도 실려 있다.

나는 작은 서점들과 제법 규모가 컸던 지역 서점들이 문 닫는 걸 목격하면서 서점 주인의 꿈을 접었는데...

이 책을 읽고 보니 작은 서점을 꾸리고 싶은 마음도 다시 생겼지만, 한편으로는 그냥 손님이자 독자로 지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기도 하다.

이만큼 살아오면서 현실적이 되었거나 현실에 찌들었거나 겁이 많아졌거나 그 모두가 한꺼번에 생긴 탓이다.

 

각각의 서점에 얽힌 이야기, 책 이야기, 무엇보다 사람 이야기가 실려 있어 소소한 즐거움을 만끽했다.

전국의 동네서점 정보와 몇 군데 서점에서 추천한 책의 목록도 실려 있다.

책값도 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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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케스 찾기 2016-09-08 1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역시 동네 작은 서점을 꿈꾼,, 그러다 헌책들을 무심한 듯 아무렇게나 쌓아놓은 것 같지만 금새 찾아낼 정도의 애착을 가진,, 그런 작은 서점의 주인이 되고 싶었어요ㅋㅋ

cobomi 2016-09-09 06:57   좋아요 0 | URL
상상만으로도 즐겁네요~
 
여성 혐오가 어쨌다구? - 벌거벗은 말들의 세계 우리 시대의 질문 2
윤보라 외 지음 / 현실문화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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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주일 동안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입이 트이는 페미니즘>, <그 남자는 왜 이상해졌을까?>, <여성 혐오가 어쨌다구?> 세 권을 연달아 읽었다.

불편하고 답답하고 부끄럽고 속상하고 화나는 등의 여러 감정이 엉켜서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지를 모르겠다.

 

"여성들이 흔히 경험하는바, 익숙하게 들리므로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뭔가 불쾌하고 분한 감정이 드는 말을 들으면 이에 대해 당황하고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자신을 스스로 탓하게 된다."(108쪽)

나는 이런 경험을 자주 하는데, 적절한 대응을 못할 때마다 내가 공부가 부족해서 말을 잘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는 논리나 지식과 같은 개인의 역량 문제가 아니다. 내가 사회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따로 공부해야 하는 문제"(108쪽)

라니 위안이 되면서도, 그저 나 하나 공부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문제이니 답답하다.

 

책에 너무 심취한 나머지 일주일 내내 내 머릿속엔 온갖 억울했던 일들과 대응할 말들, 행동들 같은 게 떠올랐다.

그러다 이틀 전 밤에 남편에게

"여성이 약자라고 생각해?"

라고 물었다.

"아니. 뭐, 물리적으로는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왜 약자야?"

헐.

 

나: "그럼 장애인은?"

남편: "어떤 면에서는."

나: "그럼 어린이는?"

남편: "어린이는 약자지."

나: "왜?"

남편: "어린이는 어른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삶이 망가지기 쉽고, (이하 생략)"

나: (... ...)

남편: "(....내 눈치를 보며) 왜, 아니야?"

나: "하아......"

 

내가 결혼생활을 답답하고 힘들게 느끼곤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나.

나는 어디서부터 어떻게 말할까 생각하다가 갑자기 짜증나고 울화가 치밀었다. 

그리고 남편에게 말했다.

"지금 이 상황 자체! 내가 왜 약자인지를 설명해야 하는 것 자체가 약자라는 증거야."

남편: "응?"

나: "그런 거 몰라도 불편한 거 없이 잘 사는 게 권력 아니야? 기득권을 갖고 있으면 뭐가 불편해서 그걸 매사 공부하고 설명하고 극복하고 바꾸려고 하겠냐고. 알아야 할 필요성을 전혀 못 느꼈으니까 모르고도 잘 지냈겠지. 오히려 알려고 하는 게 더 수고롭고 거슬리니까 알려고 하지 않는 거 아닌가."

남편: "(....)"

나: "아니야?"

남편: "(비장한 어조로)그래서 어떻게 하면 돼?"

나: "어떻게 하고 싶은데?"

남편: "....."

 

그럼에도 남편은 깊게 생각하지 않는 눈치다.

'또 이상한 책 읽고 히스테리 부리는구나'하는 표정.

 

정말이지 저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하다는 듯이 내뱉을 수 있는 게 권력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게 권력이지.

 

 

 

나도 누군가에게는 그랬을지 모르겠다.

아무 생각없이 내뱉은 말 자체가 내가 가진 알량한 권력을 드러내는 건 아니었는지.

그래서 누군가는 불편하고 억울하고 상처받지 않았는지.

나의 생각없는 말이 누군가를 멋대로 규정하거나 없는 존재로 취급하지는 않았는지.

 

나는 페미니즘이 뭔지 아직도 잘 모른다.

그런데 페미니즘 관련 책을 보면 시야가 트이는 느낌이랄까.

나와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유연하고 유용한 틀을 제공해주는 것 같다.

 

 

남편은 그날 밤 대화를 잊어버린 것 같다.

여전히 그날 밤 어떻게 말했어야 더 좋았을까를 생각하는 나는 약자가 아니고 뭐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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