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민기야...”
평소에도 붉은 기가 도는 그녀의 앳된 얼굴이 마치 때깔 좋은 자두처럼 불그스레해졌다. 그녀는 지나가는 교인들 한가운데 멈춰서 있었고 나는 방해가 되지 않도록 서둘러 앞장을 서 걷기 시작했다. 주춤대던 그녀가 곧 뒤따라 왔다. 거리가 어느 정도 좁혀졌을 때 나는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어제 우리 가게 왔었지?”
“응.”
“왜?”
교회에서 가끔 보긴 했지만 썩 친한 사이도 아닌데다, 설령 친구 집이라 하더라도 나이트클럽 같은 곳엘 무턱대고 혼자 찾아올 수 있는 애가 아니었다. 당연히 이유가 궁금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는 질문을 하고 있는 내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냥.”
역시나 안 물어 보는 게 나았다.(아는 이도 없는 집엘 혼자 찾아와서는 귀신화장을 한 접대부 환대를 받고 갔으니 도대체 어떤 말을 할 수 있겠나?) 나는 진짜로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그녀의 무심한 반응에 살짝 기가 죽긴 했지만, 어쨌든 난 지금이 오는 길에 버스 안에서 연습했던 그 말을 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늦어지면 더 어색해 진다. 나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는 준비한 그 말을 꺼냈다.
“우리, 같이 좀 걸을래?”
나름 최선을 다해 폼을 내 봤는데 아무래도 많이 어쭙잖았나보다. 그녀가 말이 없었다. 긍정이나 부정의 표시만을 염두에 두었지 멍청하게도 대답을 회피했을 때의 경우에 대해선 전혀 고려해보지 않는 나는 갑자기 난감해졌다. 하지만 다행히도 공백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래.”
귀엽긴 했지만 퉁명함이 묻은 목소리였다. 아무래도 괜한 짓을 했나 싶은 후회가 바로 들었다. 적어도 앞으로 함께 걸을 동안은 말을 섞어야 할 텐데 얘기하는 내내 이런 식의 단답형 대화라면 평소에 말을 많이 하지 않는 나로서도 피곤해질 수밖에 없다. 별안간, 느긋해야할 일요일 오후에 이 무슨 쓸데없는 고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심란해진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가 어디로 갈건 지를 태평하게 물어왔다. 서로 옥신각신하는 사이, 범위는 우리 둘 중 하나의 집으로 좁혀졌고 최종 결론은 결국 내가 사는 방으로 내려졌다. 표면적인 이유는 그 곳이 -작년에 이사해 여기서 버스 다섯 정거장 거리인- 그녀의 집보다 좀 더 가깝다는 이유에서였지만, 실은 내가 사는 곳을 보고 싶다는 그녀의 고집에 어영부영 밀린 탓이었다. 이 동행이 더욱 마뜩찮아졌다.
한 가지 주제가 끝나자 대화는 다시 소강상태로 돌아갔다. 서먹한 분위기가 오래갈 것 같아 뭐라도 해야겠다며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고맙게도 소정이 그 고민을 덜어 주었다.
“너 영화 좋아하니?”
진짜 궁금해서가 아닌,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질문이었다.
"그렇게 보였어?"
"응. 매점 소파에 앉아 있는 모습이 제법 익숙해 보이더라고."
난 학교 매점을 가지 않는다. 그러니까 여기서 매점은 지난 주 토요일 우리가 만났던 영화관 안의 그곳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리라. 영화관은 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2편 동시상영관, 그녀는 친구들과 함께 장국영 주연의 홍콩영화를 보고 나가는 길이었고 나는 뒤이어 상영될 실베스타 스탤론의 '오버 더 톱'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교회이외의 장소에선 만난 적이 없었던 우린 서로 어색한 인사를 교환했고, 이후 어찌하다 우리 가게 이름까지 (가까워서 자주 들른다고 했던 게 화근이었다.) 알려주고 말았다.
"뭐, 영화가 좋아서라기 보단 토요일이라고 딱히 할일도 없고 해서 가는 거야. 언젠가 재미삼아 한번 갔는데 시간 때우기가 괜찮더라고."
나는 재미삼아 본 그 첫 영화의 포스터에 벌거벗고 끌어안은 두 남녀가 서로의 등에 칼을 꽂고 있었다는 얘긴 덧붙이지 않았다. 소정은 그러냐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후로 우리는 서로가 싫어하는 요일 및 싫어하는 과목, 그리고 싫어하는 선생님의 체벌 방법과 강도에 대해서 한동안 떠들었다. 또한 동남아 순회공연 가수 타이틀을 달고 우리 가게 무대에 서고 있는 동남아에는 한 번도 가본 적도 없는 구레나룻 아저씨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누었다. 긴 시간 얘기를 끌고나가야 한다는 부담감에 들뜬 척도 하고 적당히 맞장구를 치기도 했지만 낯간지럽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얼마 전 파혼한 교회 전도사에 관한 얘기가 나왔을 때 이제 좀 재밌어지나 했는데 그것도 잠깐, 그냥 그가 그럴만한 사람이었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으로 싱겁게 끝이 나고 말았다.
한 여름 내리쬐는 볕에 시답잖은 얘기를 하며 걷다보니 –그녀는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 금방 지쳤다. 그래서 난 평소에 늘 궁금해 했던 걸 물어보는 것으로 뭔가 돌파구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집사랑 권사가 뭐가 다른 거야?"
그녀의 어머니가 권사, 아버지가 집사라는 사실을 알고 던진 질문이었다.
"미안한데, 실은 나도 잘 몰라."
그렇게 대답한 소정이 나를 흘끗 보더니 배시시 웃었다. 나는 또다시 바보가 되었다. 아무래도 타고난 재주인가 보다.
그 질문을 끝으로 나에게는 더 이상의 -적어도 그녀를 앞에 두고서 할 수 있는- 화제꺼리는 남아있지 않았다. 또한 첫 만남에서 오는 어색한 긴장감도 이제 슬슬 그 신선함을 잃어가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조금씩 빨리하기 시작했고 소정은 순식간에 뒤쳐졌다. 그 때였다. 그녀가 마치 자기만 아는 은밀한 비밀을 털어놓는 다는 듯이 얘기를 꺼낸 것은.
"아까 네가 물어본 거."
나는 그 자리에 섰다.
"어제 너희 가게 왜 갔었느냐고."
이어 그녀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실은 엄마가 이전부터 너 어떻게 지내는 지 늘 궁금해 했었거든. 그러니까 네 어머니 그렇게 돌아가시고 난 이후로 말이야."
그러고 보니 소정의 어머니와 죽은 내 엄마가 교회에서 가끔 얘기하는 걸 본 적이 있다. 근데, 둘이 그렇게 친한 사이였나? 죽은 지 벌써 2년이 다된 그 여자의 아들 사는 모습이 궁금할 정도로.
"혹시 너한테 도움이 될 일이 있으면 뭐라도 해주고 싶다, 라고도 하시더라고."
나는 앞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리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혼자 걸으니 편했다. 애당초 누군가와 보조를 맞춰 함께 걷는다는 귀찮은 계획을 세운 자체가 잘못이었다.
"미안해."
소정이 재빨리 뒤 쫓아와 내 어깨를 잡았다.
"부탁이니 오해하지는 마. 엄만 그저 네 걱정이 되서 그러는 거니까."
네 엄마 염려 따윈 필요 없다고 하려했으나 동그란 눈을 크게 뜬 채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얼굴 앞에선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한없는 무력함을 느꼈다.
"가자. 오래 서 있으니 더워."
소정이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갑작스러웠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낯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익숙한 느낌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엄마. 부드러우면서도 편안한, 그래서 상대가 누구든 그 경계를 단번에 풀어버릴 것 같은 그녀의 얼굴은 죽은 엄마와는 전혀 닮지 않았다. 하지만 그 외모에서 오는 따듯함이, 어린 시절 먹을 것을 사주지 않는다며 거리 한복판에서 칭얼대던 나에게 그 자리에서 혼을 내고서는 이후 집에 돌아와 아까는 미안했노라며 카스테라를 만들어 주시던 엄마의 그것과 너무나 똑같았다. 오해하지 말라던 소정의 강인하면서도 따스한 표정이, 그리고 미안하다며 내민 그 편안한 손이 나를 돌아가신 엄마 옆에 다시 세워 놓았다.
집까지 오는 동안 서로 아무 말이 없었다. 부끄러워 서로 쳐다보지도 못했지만, 땀으로 범벅이 된 손을 놓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우리 둘은 어느 덧 내가 사는 집 현관 앞에 도착했다. 현관문을 열려는 그 순간이었다. (정말이지, 왜 그때까지도 생각이 나지 않았을까?) 머릿속에 아수라장 같은 방안 풍경이 떠올랐다. 며칠 신다 둘둘 말아놓은 양말, 땀이 배어 누렇게 변한 속옷과 대충 접어 구석에다 던져놓은 바지, 그리고 어젯밤에 본 이후 펼쳐진 그대로 두고 온 포르노 잡지까지. 나는 소정에게 미안하다며 밖에서 잠깐만 기다려 줄 수 없겠냐고 물었다. 그녀는 괜찮으니 먼저 들어가라고 했다. 그녀의 입가에 웃음이 지는 걸 보니 대충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나는 얼른 내 방을 향해 뛰어가 문을 열었다. 하지만 방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걱정했던 속옷이며 양말이 아니었다. 나는 다시 현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멀뚱하게 서있는 소정에게 지금 집에 누가 와있으니 미안하지만 나중에 다시 초대하겠다고 했다. 그녀는 불쑥 찾아오자고 한 자기 잘못이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는 땅바닥에 손으로 뭔가를 썼다.
“집 전화번호야. 시간 날 때 전화 줘.”
나는 그녀가 적어놓은 전화번호를 머릿속에 새겨 넣고는 ‘각진 코’가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