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민기야...”

 

평소에도 붉은 기가 도는 그녀의 앳된 얼굴이 마치 때깔 좋은 자두처럼 불그스레해졌다. 그녀는 지나가는 교인들 한가운데 멈춰서 있었고 나는 방해가 되지 않도록 서둘러 앞장을 서 걷기 시작했다. 주춤대던 그녀가 곧 뒤따라 왔다. 거리가 어느 정도 좁혀졌을 때 나는 목소리를 낮추며 물었다.

 

어제 우리 가게 왔었지?”

 

.”

 

?”

 

교회에서 가끔 보긴 했지만 썩 친한 사이도 아닌데다, 설령 친구 집이라 하더라도 나이트클럽 같은 곳엘 무턱대고 혼자 찾아올 수 있는 애가 아니었다. 당연히 이유가 궁금했다.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는 질문을 하고 있는 내가 바보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냥.”

 

역시나 안 물어 보는 게 나았다.(아는 이도 없는 집엘 혼자 찾아와서는 귀신화장을 한 접대부 환대를 받고 갔으니 도대체 어떤 말을 할 수 있겠나?) 나는 진짜로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그녀의 무심한 반응에 살짝 기가 죽긴 했지만, 어쨌든 난 지금이 오는 길에 버스 안에서 연습했던 그 말을 해야 할 때라고 생각했다. 여기서 늦어지면 더 어색해 진다. 나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는 준비한 그 말을 꺼냈다.

 

우리, 같이 좀 걸을래?”

 

나름 최선을 다해 폼을 내 봤는데 아무래도 많이 어쭙잖았나보다. 그녀가 말이 없었다. 긍정이나 부정의 표시만을 염두에 두었지 멍청하게도 대답을 회피했을 때의 경우에 대해선 전혀 고려해보지 않는 나는 갑자기 난감해졌다. 하지만 다행히도 공백은 그리 길지 않았다.

 

그래.”

 

귀엽긴 했지만 퉁명함이 묻은 목소리였다. 아무래도 괜한 짓을 했나 싶은 후회가 바로 들었다. 적어도 앞으로 함께 걸을 동안은 말을 섞어야 할 텐데 얘기하는 내내 이런 식의 단답형 대화라면 평소에 말을 많이 하지 않는 나로서도 피곤해질 수밖에 없다. 별안간, 느긋해야할 일요일 오후에 이 무슨 쓸데없는 고민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심란해진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가 어디로 갈건 지를 태평하게 물어왔다. 서로 옥신각신하는 사이, 범위는 우리 둘 중 하나의 집으로 좁혀졌고 최종 결론은 결국 내가 사는 방으로 내려졌다. 표면적인 이유는 그 곳이 -작년에 이사해 여기서 버스 다섯 정거장 거리인- 그녀의 집보다 좀 더 가깝다는 이유에서였지만, 실은 내가 사는 곳을 보고 싶다는 그녀의 고집에 어영부영 밀린 탓이었다. 이 동행이 더욱 마뜩찮아졌다.

 

한 가지 주제가 끝나자 대화는 다시 소강상태로 돌아갔다. 서먹한 분위기가 오래갈 것 같아 뭐라도 해야겠다며 우물쭈물하고 있는데 고맙게도 소정이 그 고민을 덜어 주었다.

 

너 영화 좋아하니?”

 

진짜 궁금해서가 아닌, 이미 그 답을 알고 있다는 뉘앙스를 풍기는 질문이었다.

 

"그렇게 보였어?"

 

". 매점 소파에 앉아 있는 모습이 제법 익숙해 보이더라고."

 

난 학교 매점을 가지 않는다. 그러니까 여기서 매점은 지난 주 토요일 우리가 만났던 영화관 안의 그곳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리라. 영화관은 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2편 동시상영관, 그녀는 친구들과 함께 장국영 주연의 홍콩영화를 보고 나가는 길이었고 나는 뒤이어 상영될 실베스타 스탤론의 '오버 더 톱'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교회이외의 장소에선 만난 적이 없었던 우린 서로 어색한 인사를 교환했고, 이후 어찌하다 우리 가게 이름까지 (가까워서 자주 들른다고 했던 게 화근이었다.) 알려주고 말았다.

 

", 영화가 좋아서라기 보단 토요일이라고 딱히 할일도 없고 해서 가는 거야. 언젠가 재미삼아 한번 갔는데 시간 때우기가 괜찮더라고."

 

나는 재미삼아 본 그 첫 영화의 포스터에 벌거벗고 끌어안은 두 남녀가 서로의 등에 칼을 꽂고 있었다는 얘긴 덧붙이지 않았다. 소정은 그러냐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후로 우리는 서로가 싫어하는 요일 및 싫어하는 과목, 그리고 싫어하는 선생님의 체벌 방법과 강도에 대해서 한동안 떠들었다. 또한 동남아 순회공연 가수 타이틀을 달고 우리 가게 무대에 서고 있는 동남아에는 한 번도 가본 적도 없는 구레나룻 아저씨에 대해서도 얘기를 나누었다. 긴 시간 얘기를 끌고나가야 한다는 부담감에 들뜬 척도 하고 적당히 맞장구를 치기도 했지만 낯간지럽다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얼마 전 파혼한 교회 전도사에 관한 얘기가 나왔을 때 이제 좀 재밌어지나 했는데 그것도 잠깐, 그냥 그가 그럴만한 사람이었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으로 싱겁게 끝이 나고 말았다.

 

한 여름 내리쬐는 볕에 시답잖은 얘기를 하며 걷다보니 그녀는 아닌 것처럼 보였지만- 금방 지쳤다. 그래서 난 평소에 늘 궁금해 했던 걸 물어보는 것으로 뭔가 돌파구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집사랑 권사가 뭐가 다른 거야?"

 

그녀의 어머니가 권사, 아버지가 집사라는 사실을 알고 던진 질문이었다.

 

"미안한데, 실은 나도 잘 몰라."

 

그렇게 대답한 소정이 나를 흘끗 보더니 배시시 웃었다. 나는 또다시 바보가 되었다. 아무래도 타고난 재주인가 보다.

 

그 질문을 끝으로 나에게는 더 이상의 -적어도 그녀를 앞에 두고서 할 수 있는- 화제꺼리는 남아있지 않았다. 또한 첫 만남에서 오는 어색한 긴장감도 이제 슬슬 그 신선함을 잃어가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조금씩 빨리하기 시작했고 소정은 순식간에 뒤쳐졌다. 그 때였다. 그녀가 마치 자기만 아는 은밀한 비밀을 털어놓는 다는 듯이 얘기를 꺼낸 것은.

 

"아까 네가 물어본 거."

 

나는 그 자리에 섰다.

 

"어제 너희 가게 왜 갔었느냐고."

 

이어 그녀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실은 엄마가 이전부터 너 어떻게 지내는 지 늘 궁금해 했었거든. 그러니까 네 어머니 그렇게 돌아가시고 난 이후로 말이야."

 

그러고 보니 소정의 어머니와 죽은 내 엄마가 교회에서 가끔 얘기하는 걸 본 적이 있다. 근데, 둘이 그렇게 친한 사이였나? 죽은 지 벌써 2년이 다된 그 여자의 아들 사는 모습이 궁금할 정도로.

 

"혹시 너한테 도움이 될 일이 있으면 뭐라도 해주고 싶다, 라고도 하시더라고."

 

나는 앞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리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혼자 걸으니 편했다. 애당초 누군가와 보조를 맞춰 함께 걷는다는 귀찮은 계획을 세운 자체가 잘못이었다.

 

"미안해."

 

소정이 재빨리 뒤 쫓아와 내 어깨를 잡았다.

 

"부탁이니 오해하지는 마. 엄만 그저 네 걱정이 되서 그러는 거니까."

 

네 엄마 염려 따윈 필요 없다고 하려했으나 동그란 눈을 크게 뜬 채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얼굴 앞에선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한없는 무력함을 느꼈다.

 

"가자. 오래 서 있으니 더워."

 

소정이 내 손을 잡으며 말했다. 갑작스러웠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낯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이 익숙한 느낌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엄마. 부드러우면서도 편안한, 그래서 상대가 누구든 그 경계를 단번에 풀어버릴 것 같은 그녀의 얼굴은 죽은 엄마와는 전혀 닮지 않았다. 하지만 그 외모에서 오는 따듯함이, 어린 시절 먹을 것을 사주지 않는다며 거리 한복판에서 칭얼대던 나에게 그 자리에서 혼을 내고서는 이후 집에 돌아와 아까는 미안했노라며 카스테라를 만들어 주시던 엄마의 그것과 너무나 똑같았다. 오해하지 말라던 소정의 강인하면서도 따스한 표정이, 그리고 미안하다며 내민 그 편안한 손이 나를 돌아가신 엄마 옆에 다시 세워 놓았다.

 

집까지 오는 동안 서로 아무 말이 없었다. 부끄러워 서로 쳐다보지도 못했지만, 땀으로 범벅이 된 손을 놓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우리 둘은 어느 덧 내가 사는 집 현관 앞에 도착했다. 현관문을 열려는 그 순간이었다. (정말이지, 왜 그때까지도 생각이 나지 않았을까?) 머릿속에 아수라장 같은 방안 풍경이 떠올랐다. 며칠 신다 둘둘 말아놓은 양말, 땀이 배어 누렇게 변한 속옷과 대충 접어 구석에다 던져놓은 바지, 그리고 어젯밤에 본 이후 펼쳐진 그대로 두고 온 포르노 잡지까지. 나는 소정에게 미안하다며 밖에서 잠깐만 기다려 줄 수 없겠냐고 물었다. 그녀는 괜찮으니 먼저 들어가라고 했다. 그녀의 입가에 웃음이 지는 걸 보니 대충 눈치를 챈 모양이었다.

 

나는 얼른 내 방을 향해 뛰어가 문을 열었다. 하지만 방안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걱정했던 속옷이며 양말이 아니었다. 나는 다시 현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멀뚱하게 서있는 소정에게 지금 집에 누가 와있으니 미안하지만 나중에 다시 초대하겠다고 했다. 그녀는 불쑥 찾아오자고 한 자기 잘못이라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는 땅바닥에 손으로 뭔가를 썼다.

 

집 전화번호야. 시간 날 때 전화 줘.”

 

나는 그녀가 적어놓은 전화번호를 머릿속에 새겨 넣고는 각진 코가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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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이 내린지 한참 지났지만 눅눅하고 습한 공기는 여전했다. 거리 양 옆으로 다닥다닥 붙은 유흥업소에선 토요일 밤이라 좀 더 분주해진 마담들이 서둘러 장사 채비를 하고 있었고, 엎어놓은 맥주 상자에 걸터앉아 매니큐어 칠을 하던 여자는 나를 보며 안으로 들어오라는 손짓을 했다.

 

싸게 해줄게.”

 

싸게 해주겠다는 말의 의미가 나는 늘 아리송했지만 만약 가격을 깎아주겠다, 라는 것이라면 그 이유가 내가 학생이어서인지 아니면 클럽 사장 아들이기 때문인지가 실은 더 궁금했다. 그녀는 한 번 더 재촉했고 나는 못 본척 그 앞을 지나갔다.

 

사는 집정확하게 말해 자는 방-은 클럽 건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2층 양옥의 1층 깊은 구석에 들어선 쪽방이었고, 현관에서 방향을 틀어 집 외벽과 담 사이의 좁은 통로를 간신히 비집고 지나가면 그 입구가 나왔다. 입식 부엌도 없는 말 그대로 잠만 자는 방이었다.

 

방 안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퀴퀴함이 코를 파고들었다. 나는 닫아놓은 창문을 연 뒤 선풍기를 틀어 회전으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주위를 대강 정리하고는 가게에서 가져온 맥주를 꺼내 병째 들이켰다. 작은 사이즈의 업소용 맥주라 양은 많지 않았지만 후덥지근한 날씨 탓인지 생각보다 일찍 술기운이 돌았다. 나는 쓰러지듯이 바닥에 누웠다. 처음 왔을 때 두 명은 넉넉히 누울 수 있었던 방이 그 동안 늘어놓은 책이며 옷가지들로 인해 이젠 한 명이 다리 펴기도 빠듯해져 버렸다. 방바닥은 차가왔다. 하지만 낮 동안 한껏 달아오른 방안 공기는 쉽게 식지 않았다. 덩달아 내 몸도 빠르게 달아올랐고 곧이어 머릿속이 흐릿해졌다.

 

가게로 들어오라며 눈웃음을 보내던 주점 아가씨의 탄력 있는 다리, 끈적한 눈으로 하늘거리듯 춤추던 무희의 봉긋한 가슴, 그리고 오후 나절 동네 재개봉관에서 본 에로 영화 속 여배우의 요염한 얼굴이 감은 눈앞에서 서로 뒤엉키고 있었다. 무질서하게 오버랩 된 세 개의 이미지는 마치 3단 변신로봇처럼 차츰 하나의 완성체로 구현되더니 어느덧 몽환적인 꿈을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빠른 속도로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순간, 바로 그때, 난데없이 불쑥, 그녀가 끼어들었다. ‘멜빵치마’-오늘 클럽에 찾아왔던 그녀-. 도대체, 왜 온 걸까? 그러니까 내말은 우리 가게가 아니라 한창 재미를 보고 있는 이 순간에 말이다. 난 깨진 흥을 다시 살리기 위해 바닥에 굴러다니는 포르노 잡지를 펼쳐들었다.

 

눈을 떴을 때 방안은 이미 후끈해져 있었다. 밖으로 나온 나는 집 마당에 설치된 간이수도에서 대충 세수를 마친 뒤 다시 방으로 돌아가 밤새 땀에 전 옷을 갈아입었다. 오늘은 일요일이다. 아니 오랜 신자답게, 주일이다. 언제부터 교회에 다녔는지 기억이 잘 안나는 걸 보면 아마도 엄마 뱃속에서 부터지 싶다. 엄마가 죽고 이 세상에 신 따위는 없다고 단정했지만, 이후론 그저 습관처럼 다니고 있다. 게다가 오늘은 교회에 가야할 이유가 따로 있었다.

 

버스 두 정거장 거리의 교회에 들어섰을 땐, 늘 입구에서 깍듯한 인사로 신자들을 맞이하던 집사, 권사들도 이미 교회 건물 안으로 사라지고 난 후였다. 따라서 나도 서둘러 예배당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평소에 앉던 2층 맨 뒷좌석이 아닌 1층 앞쪽에 자리를 잡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기도 하겠습니다.’란 소리가 들려왔고, 난 고개를 숙이는 척 하면서 누군가를 찾기 시작했다. 앞에서 세 번째 줄, 나이 드신 할머님 두 분 사이에 그녀-멜빵치마-가 있었다. 오늘은 그녀가 자주 입고 다니는 멜빵치마가 아닌 흰 블라우스에 밋밋한 청바지 차림이었다. 매끈하고 귀여운 그녀의 다리를 볼 수 없는 것이 아쉽긴 했지만 몸에 바싹 달라붙은 블라우스도 나쁘지는 않았다.

 

교장선생님 훈화만큼이나 지루한 설교와 십일조를 포함한 감사헌금 기부자에 대한 기도 형식의 명단 발표가 끝나자 예배는 곧 막바지로 내달았다. 성가대 찬송에 이어 순서 끝에 위치한 주기도문 낭독이 시작됐고 나는 그 틈을 타 예배당을 빠져나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르르 신도들 무리가 몰려 나왔고, 그 사이에서, 두꺼운 성경책을 가슴에 안은 멜빵치마가 보였다. 나는 기다렸다 슬쩍 무리들 틈에 끼어들었고 가까스로 간격을 좁힌 뒤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소정아.”

 

그녀가 멈칫하더니 뒤돌아섰다. 나와 눈이 맞은 그녀의 얼굴이 내 추측이 틀리지 않았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녀는 어제 우리 가게에 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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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내려오는 동안 마스카라의 마지막 말과 그 야비한 표정이 자꾸 신경 쓰였다. 쓰레기가 내가 아버지라는 인간을 부를 때 쓰는 호칭이다- 클럽 여 종업원들이랑 같이 잔다는 건 여기서 일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알고 있었다. 심지어 2년 전 암으로 죽은 엄마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그 여자도 그저 귀찮은 문제를 만들기 싫어서 모르는 척 넘어가고 있는 판이다. 그렇게 볼 때 그녀의 그 과장된 표현은 꽤 의뭉스럽다. 이런저런 생각들이 한꺼번에 떠올랐지만 딱히 짚이는 것이 없어 그냥 가볍게 넘기기로 했다.

 

찜찜한 기분을 털어내기 위해 2층 클럽 문을 힘차게 밀고 들어갔다. 토요일이긴 하지만 아직은 이른 시간이라 빈 테이블이 듬성듬성 보였다. 하지만 한가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는 아니었다. 채워진 테이블엔 인근 자동차 공장 작업복 차림의 젊은 공원들이 쓰레기가 고용한 20대 초반의 여종업원들이랑 시시덕거리고 있었고, -마스카라도 그 여종업원들 중의 하나다- 좀 더 점잖은 자세를 하고 앉은 50대중반쯤의 아저씨들은 속이 훤히 비치는 한복 저고리의 여성 무희가 스테이지 위에서 흐느적거리는 모습을 멋쩍게 쳐다보고 있었다.

 

홀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엔 공원들 나이 또래의 웨이터 두 명이 꾸부정한 자세로 서서 얘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내가 문을 열었을 때 슬쩍 이 쪽을 쳐다본 그들은 이내 별일 아니라는 듯 하던 얘기로 다시 돌아갔다. 나는 홀 구석에 있는 주방 쪽으로 걸음을 옮겼고, 그들이 가는 길을 막고 있어 그 옆을 지나쳐야만 했다.

 

사장 그 새끼 이제 좇됐다. 씨발

 

그들 중 한명이 말했다. 평소 쓰레기를 욕할 때처럼 내가 옆에 있다는 것 따윈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말투였다. 뒷이야기가 궁금하긴 했지만 그 자리에 멍청히 서있는 것도 우습고 해서 그냥 지나가기로 했다.

 

다행히 주방엔 그 사장 새끼가 없었다. 대신 그가 돈도 안주고 부려먹고 있는 늙은 호빵이 안주 접시들이 올려진 테이블 옆에 구부정하게 선 채 들어오는 나를 맞이했다. 둥글 넙데데한 얼굴에 주름이 많아 늙은 호빵이라고 별명을 붙인 그녀는 돌아가신 엄마를 대신해 일하고 있는 새엄마다.

 

밥은?”

 

한눈에 봐도 피곤한 기색의 그녀가 변색이 제법 진행된 사과 한 조각을 베어 물며 말했다. 테이블 귀퉁이엔 삼분의 이쯤 비워진 맥주병이 세워져 있었다.

 

대충.”

 

좀 더 길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피곤하긴 나도 마찬가지였다.

 

과일이라도 좀 썰어줄까?

 

나는 괜찮다는 표시로 손을 가볍게 저은 뒤 주방 냉장고 쪽으로 갔다. 냉장고 안엔 업소용 병맥주들이 일렬로 진열되어 있었고, 그 중 하나를 꺼내 가방에 넣었다.

 

"오늘은 그냥 가. 네 아빠 손님 와 있으니까.“

 

내가 테이블로 다가가 마른안주 더미에서 오징어 다리를 빼냈을 때 늙은 호빵이 남은 맥주를 마저 비우며 말했다. 벌써 세 번째 쓰레기 얘기다. 갑자기 무슨 일인지 궁금해졌지만 묻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얘기가 길어지면 지금 물고 있는 아이스크림이 녹을 거고, 흘러내리는 아이스크림만큼 귀찮은 건 없다.

 

하는 둥 마는 둥 인사를 던진 뒤, 빵이나 사먹으라며 늙은 호빵이 쥐어준 천 원짜리 한 장을 들고 주방을 나왔다. 이대로 집에 갈까 하다 곧 생각을 바꾸어 홀 깊숙한 곳에 위치한 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손님이 있다 했으니 그 룸들 중 한 곳에 있을 게 분명했다. 늘어선 세 개의 룸들 중 쓰레기는 맨 마지막에 있었다.

 

"문 닫아, 이 새꺄.“

 

아들한테 하는 인사치곤 험악했으나 타인이 보는 앞이라고 행세를 달리하지 않는다는 면에서 쓰레기다웠다. 손님으로 온 사람들은 그와 비슷한 나이의 남자와 여자였는데 언뜻 부부처럼 보였다. 얼굴에 느긋한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이 쓰레기의 그것과 완벽한 대조를 이루었다. 재미난 구경을 좀 더 오래 하고 싶었지만 일전에 그가 던진 재떨이에 맞아 시퍼렇게 멍이든 웨이터 얼굴이 떠올라 이내 문을 닫았다. 문이 닫히기 직전, 테이블위에 올려진 돈뭉치인 듯한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방 안의 분위기로 보아 아마도 쓰레기 쪽에서 준비한 것이리라.

 

타이트한 여종업원의 미니스커트 속을 파고들려 낑낑거리고 있는 공원들, 어느덧 스테이지에서 내려온 무희의 가슴 사이로 돈을 꽂으며 헤실 거리는 아저씨들, 그리고 여전히 쑥덕거리고 있는 웨이터 둘을 뒤로하고 나는 클럽을 빠져나왔다. 바깥 거리엔 밤이 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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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여름

 

, 아까 오후쯤에 어떤 여자 애가 너 찾아왔어.”

 

아래로 길게 뻗은 짙은 마스카라에 파우더가 두툼하게 입혀진 그녀의 얼굴은 그 틀마저 각이 져 볼 때마다 경극 배우 생각이 났다. 그녀 앞엔 칠이 다 벗겨진 좌식 밥상이 펼쳐져 있었고, 멀찌감치 떨어져 거의 눕듯이 벽에 기댄 그녀의 손에선 필터까지 타 들어간 담배가 반짝거렸다.

 

여자?”

 

나는 방문 옆에 가방을 털썩 내려놓고는 방 한가운데에 들어선 밥상 쪽으로 가며 물었다. 방이라고는 했지만 실은 허름한 2층 나이트클럽 건물 옥상에 휑하니 들어선 옥탑방이다.

 

. 그냥 가게이름만 대충 알고 온 것 같던데, 좇나 겁먹고 갔어.”

 

실실 웃는 마스카라의 코에서 뿌연 연기가 한 움큼 쏟아져 내렸다. 흘러나온 연기가 밥상 위에 올려진 양은 냄비까지 퍼져나가더니 불어터져 곤죽이 된 라면 면발위에서 사라졌다.

 

근데 걔, 쫌 귀엽게 생겼더라.”

 

냄비 옆에 놓인 플라스틱 재떨이 위엔 이빨 자국이 선명한 꽁초들이 무덤을 이루고 있었고, 마스카라가 그 위에 자신의 담뱃재를 털어내며 말했다. 그리고는 잠시 틈을 두더니 야릇한 실눈을 하고서는 툭 내뱉었다.

 

, 걔 따먹었지?”

 

한손을 살짝 말아 쥐어 타원형을 만들고 다른 손으로 그 원통 윗부분을 탁탁 내리치는 모습이 마치 오랜 경력의 마술사가 자기 손안으로 손수건을 감추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웠다. 나는 천박한 호기심을 상대하기가 귀찮아졌고 그래서 다음 질문까지 한참을 뜸을 들였다.

 

이름 물어봤어?”

 

평소엔 쳐다보는 것도 역겨워 눈인사나 억지로 하는 사이인데 오늘은 벌써 두 번째 질문이다.

 

아니. 어떻게 왔냐고 물으니까, 그냥 네 이름 대면서 여기가 네 집 맞냐고 하더라고.”

 

사실 여긴 밥만 먹고 가는 곳이다. 잠자는 곳은 따로 있다.

 

그래서 하루에 한번 씩 들르긴 하지만 집은 따로 있고, 걔네 아빠가 아래층 나이트클럽 사장이라 학교 야자 끝나면 여기 와서 밥도 먹고 가끔 용돈도 챙겨가고 그런다 그랬지.”

 

확실하게 하기위해 이름을 알아냈느냐고 묻긴 했지만 가게 이름을 알고 왔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이미 떠오른 애가 있었다. 오후쯤 왔다고 했으니 아직 손님 받기 전이라 클럽 안은 들어가 보질 못했을 것이다. 그 애 주변 환경을 생각하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생각이 정리되자 비스듬했던 시선이 다시 정면의 마스카라에게로 옮겨졌다. 그녀가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계속 쳐다보고 있었고, 수명을 다한 담배는 재떨이에 쌓인 꽁초더미 위에서 짓이겨지고 있었다.

 

나는 일어서서 구석에 세워진 냉장고로 갔다. 먹을 거라곤 김치에 식어빠진 밥, 그리고 냉동실에 처박힌 막대 아이스크림 몇 개가 전부였다. 아이스크림 하나를 꺼낸 뒤 들어올 때 던져놓은 가방을 챙겨 나가려는데 마스카라의 탁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너도 조심해 새꺄. 네 애비나 따라하지 말고.”

 

못들은 척 그냥 가려 했지만 갑자기 그녀의 표정이 궁금해져 뒤를 돌아다보았다. 경멸하는 듯 한 웃음. 기분이 좋지 않았다. 다시 돌아 나오려 할 때, 그녀가 카악 하며 가래침을 끌어올리는 소리가 들렸고, 이어 퉤 뱉는 소리가 뒤따랐다. 난 그 타깃이 라면 냄비가 아니라 재떨이 위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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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다른 골목의 추억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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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해주신 책은 잘 읽었어요.감사합니다.

이전부터 알고는 있었지만, 이 책을 읽는동안 다시 깨달은 게 있어요. '그래도 세상은 살만한 곳이니, 힘내서 살아 보아요.'하며 다독이는 글보다는 '세상이 지옥이고 천지에 쓰레기들인데, 너라고 다를쏘냐.'하고 엿을 먹이는 글을 더 사랑한다는거.

똑같은 굴뚝을 타고 왔어도 누구 얼굴은 새하얗고 반대로 검댕이 잔뜩 묻은 얼굴도 있을텐데, 전 그 시꺼먼 얼굴 보는게 더 좋아요. 현실 속 대개의 사람들은 가면을 쓰고 있으니, 실제로 제가 얼마나 검은지는 이런 글을 통해서가 아니면 알 방법이 없으니까요.

뭐, 아니면 제가 정말로 그런 부류의 사람이기 때문이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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