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랑 소설집 『옥상에서 만나요』 수록 소설

「효진」 4회


방문 연구원이었지만 연구는 열심히 하지 않았어. 다음 논문이 어쩌면 내 안에 없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나는 서울에 처음 갔을 때처럼 이번엔 도쿄의 과자 지도를 그렸지. 너 없이 나 혼자. 내가 케이크 사진을 찍어 보내면 너는 당뇨를 걱정했어. 괜찮아. 딱 한번씩만 먹어. 윤곽이 대충 잡히고 나면 그것도 훨씬 덜 먹고. 서울에 있을 때보다 6킬로가 쪘지만 여전히 표준 미달인걸. 몸의 어떤 부위가 다공성인지 다 새어나가나봐.


유학생들 모임에서 제과학교 이야기를 들었을 때, 처음에는 전혀 생각이 없었어. 그런데 자꾸 떠오르는 거야. 나는 계속 도망치고 도망치고 도망치는 인간인데 그러면서도 줄곧 좋아해온 건 단것밖에 없지 않은가 했어. 태어난 곳으로부터, 소속된 모든 집단으로부터, 제대로 된 관계로부터 도망쳐왔어. 남아서 싸우는 사람들도 있다는 걸 알아. 남보다 못한 가족들과도 어떻게든 연을 이어가려고 애쓰고, 처음 하기로 마음먹은 일을 끝까지 해내고, 지옥 같은 회사를 개선시키고, 성격이 안 맞는 애인과 다투고 다퉈서는 안정적인 관계에 다다르지. 그런 사람들을 좋아해. 그런 사람들처럼 살고 싶었어. 그런데 나는 그러지 못하고 끊임없이 도망쳤어. 위기의 순간이 오면, 핑글 돌아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지. 정말은 위기의 순간이 오기도 전에 도망친 걸지도 모르고.



불러주신 교수님한테 죄송했고 서류 문제로 몇번 한국에 오가야 했지만 결국 제과학교에 입학했어. 우리 반에서 내가 나이가 제일 많아. 어쩌다보니 한중일 가리지 않고 동생들이 인생 상담을 해오지만 웃는 얼굴로 거절하고 있어. 계속 도망친 사람이 무슨 상담을 해주긴 해줘, 그게 내 솔직한 마음이었어. 그런데 타르트 가게에서 알바를 시작하고, 눈 감고도 베리타르트를 만들 수 있게 된 다음에 조금 바뀌기 시작했어.


혹시 나의 특장은 도망치는 능력이 아닐까? 누구나 타고나게 잘하는 일은 다르잖아. 그게 내 경우에 도주 능력인 거지. 참 잘 도망치는 사람인 거야. 상황이 너무 나빠지기 전에, 다치기 전에, 너덜너덜해지기 전에 도망치는 사람. 타이밍과 속도를 조절해서 도망치는 사람. 똑같은 타르트를 삼백개쯤 만들었을 때, 스스로에게 조금 너그러워졌어. 마음 안쪽에 베리타르트의 어떤 궁극적인 완성형을 그릴 수 있게 되었을 때 말이야. 가게에서 파트를 바꿔 다른 맛의 타르트를 만들라고 시키면 혹시 이 평정심도 무너질까? 궁금하네.



그리고 오백개, 천개를 만들었을 때는 최초로 도망치기로 마음먹었던 때가 언제인지 기억해냈어. 초등학교 2학년 때였어. 시골 학교였기 때문에 선생님들과 학생들의 사이는 유난히 가까웠는데, 딱 한 사람만 그런 분위기를 못 견뎌 했어. 가면을 쓴 것 같은 얼굴로 걸어다니는 남자 선생님이었지. 어느날 그 선생님이 심부름을 시켰어. 과학실에서 알코올램프를 가지고 오라고. 나는 그 선생님 반도 아니었고 종례도 끝난 후였지만 그래도 가져다 줬어. 그걸 건네니까, 교실엔 나랑 그 선생님밖에 없었는데, 선생님이 심지를 빼고 램프 병에 든 알코올을 마시기 시작했어. 아무 말 없이 내 눈을 똑바로 보면서. 나는 어렸고 당황했지만 그게 내가 봐서는 안될 장면인 건 알고 있었어. 대충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그 오후엔 아무것도 못했던 기억이 나. 한동안은 그 선생님만 보이면 피해 다녔어. 학년이 올라가고 그 선생님이 전근을 가면서 잊을 수 있었지만, 고등학교에서 메틸알코올에 대해 배우면서 문득 다시 떠올랐어. 알코올램프에 든 게 메틸알코올이 아니라 에틸알코올이었구나. 아니면 눈이 멀고 죽어버렸겠지, 하고. 더 나이가 들어서는 아마 과학실 담당 선생님으로부터 먼저 들은 게 있었겠거니 싶었고.


직접 가지러 갔어도 되었을 텐데. 내가 가길 기다렸다가 마셔도 되었을 텐데. 그 선생님은 그러지 않았어. 상처를 주고 싶었던 거라고 생각해. 인생은 아주 불행한 거라고 아홉살짜리 아이에게 각인시키고 싶었던 거라고 말이야. 잔인하고 이상한 어른이었지. 만지지 않았지만 만진 것만큼 나빴어. 보이지 않는 곳에 흔적을 남긴 거야. 나는 그때부터 도망쳤던 것 같아. 예고된 불행으로부터 도망쳤어. 만약 도망치는 걸 멈추면 알코올램프보다 더 나쁜 걸 마시게 될지도 모른다고, 나도 모르게 스스로 암시하게 되어버렸던 거야.



어딜 가도 보이는 부분만 달콤할 거라고 생각해. 무지개 퀼트로 장식된 가게 안쪽 주방은 스테인리스스틸이지. 마감이 좋지 않은 산업용 냉장고 문으로 이마를 찢는 선배들은 하와이에도 헬싱키에도, 세상 가장 친절한 사람들의 도시라 해도 분명 있을 거라 확신해. 그래도 어떤 휴지기가 필요했어. 타르트 반죽의 휴지기처럼, 사람에게도 그 비슷한 게 필요하지 않을까? 아, 휴지기를 모르는구나. 반죽을 잘 식히지 않으면 구멍이 나. 처음 일하기 시작했을 때 구멍을 몇개나 냈는지 몰라. 단계마다 15분씩 냉장고에서 식히지 않으면 축축 늘어져서 백 퍼센트 구멍이 나버려. 적당히 차가운 곳으로 도망쳐 잠시 숨을 고르는 것, 거기서 얻는 것들은 분명히 있어.


남자친구? 글쎄, 남자친구…… 남자친구로부터는 당분간 도망치지 않을 것 같아. 너는 남자친구 사진을 보자마자 근이를 닮았다고 했어. 그리고 근이가 나랑 꼭 닮은 여자애랑 결혼했다고도 했지. 너희 둘은 대체 뭘 하는 거냐며 화를 냈지만 각자의 일관된 취향일 뿐일 거야. 지금 남자친구가 좋아. 좋아해. 남자친구는 요리를 제법 잘해서 내가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중화요리 육첩반상을 차려놓을 때가 있어. 불 맛이 중요하다고 방을 구할 때는 4구짜리 가스레인지가 있나 없나 엄청 따지더라고. 전기 인덕션만 보면 치를 떨어. 그따위 걸로는 요리할 수 없다나. 내가 짜장밥을 한번 해줬을 때 이런 건 개밥이라고 해서 그날 죽자 사자 싸웠는데, 그다음부터는 자기가 도맡아서 요리를 해. 편하게 된 셈이긴 하지. 아, 그래서 6킬로가 쪘나. 그래도 불과 요리에 대한 집착 말고는 괜찮은 애야. 질투도 잘 안한달까. 가끔 한국에서 친한 오빠들이 전화를 걸어오는데 내가 오빠, 하고 반갑게 전화를 받으면 남자친구가 막 웃어. 오빠가 일본어로 어린아이들 말로 가슴을 뜻하는 ‘옷빠이’랑 발음이 비슷하거든. 남자친구가 막 웃으면서 너는 너한테 없는 걸 그렇게 반갑게 부르는구나, 그러는 거야. 난 중국어를 분명 욕부터 배우게 되겠지만 같이 도망치기에는 좋은 파트너야. 짐 싸라고 하면 중국식 요리 칼만 챙길걸. 그 칼로 당근 꽃도 만들더라. 대단해.



오랜만에 길게 통화했다, 그치? 나도 갈지자걸음을 제대로 했지만 너도 참, 소설이라니…… 하긴 같이 살 때 새벽마다 그렇게 키보드를 기글기글 긁더니만. 손톱으로 치니까 그런 소리가 나지. 자판이 남아나질 않았잖아. 시끄러웠냐고?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엄청 시끄러웠어. 손톱 말고 손가락으로 좀 치라고. 소설이 되면, 음, 특별히 보여줄 필요는 없어. 그런 것쯤 아무렇지 않을 만큼 신경 줄이 굵어졌나봐. 인터넷에 사진이 돌아다니는데 소설쯤이야.


그보다 베리타르트를 직접 만들겠다니…… 그냥 내가 보내주는 게 낫지 않나? 비행기에 아이스박스 태워서 보낼게. 굳이 직접 만들겠다면, 딸기 씨부터 깨끗하게 빼야 해. 씨가 있으면 안 예뻐. 빨간 딸기를 기본으로 블랙베리, 블루베리, 라즈베리, 프랑부아즈를 넣어. 프랑부아즈는 나무딸기로 만들 리큐어야. 반죽에는 소금을 한꼬집 넣는 거 잊지 말고. 필링을 크림치즈로 할지 아몬드크림으로 할지 커스터드로 할지 마음을 정해. 부풀지 않게, 바삭하게 타르트 지를 굽고 필링을 넣은 다음 딸기를 올려서 다시 구워야 해. 레시피는 있니? 어디서 얻은 레시피니? 막 만드는 거 아냐.


아무래도 못 미더우니까 영상통화를 켜고 해. 그래, 각도 좋다. 내가 여기서 같이 봐줄게. 응, 얼굴 좀 괜찮아졌지? 그봐. 나도 도쿄도 잘 있다니까.    (끝)


우리에게 설레는 이름이 된 작가 정세랑 첫 소설집!

“적당히 차가운 곳으로 도망쳐 잠시 숨을 고르는 것,

거기서 얻는 것들은 분명히 있어. 옥상에서 만나, 시스터.”


장편소설 『이만큼 가까이』로 창비장편소설상을, 『피프티 피플』로 한국일보문학상을 수상하며 한국 장편소설에 새로운 활력을 더해준 작가 정세랑이 드디어 첫번째 소설집을 출간한다. 2010년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래 8년 만에 선보이는 이번 소설집은 결혼과 이혼, 뱀파이어, 돌연사 등 다양한 소재를 통해 신선하고도 경쾌한 상상력을 펼쳐놓는다. 보이지 않는 폭력과 부조리에 맞서는 매력적인 인물들은 정세랑 특유의 명랑한 필치에 실려 지금 이곳에서 함께 견디는 이들에게 따듯한 연대의 힘을 보여준다. 이번 소설집은 또한, 표지 일러스트를 맡은 『며느라기』 수신지 작가와의 컬래버레이션으로 기존 독자들의 기대를 한층 높일 것이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키아벨리 2018-12-04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피프티 피플의 정세랑 작가님 신작 기대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