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좌우 대립이 심각하다. 오늘은 한글날 휴일인데 모이지 않고 쉬었을라나. 다시금 이데올로기 대립의 시대가 오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 지금 이 시대에 더욱더 세계관을 정립하고 말씀을 붙들어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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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름지기 인간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을 때 가징 살아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기 전까지 인간은 전혀 살아 있지 않다고도 말할 수 있다. 다윗은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다. 인간 다윗은으로만 볼 때 그는 별로 대단하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 없이 인간다울 수 없다.”

“그러나 그렇게 거부 할 때 우리는 부족한 존재가 된다 we’re less. 근본적인 인간다움이 부족한 것이다. 우리의 삶은 그만큼 좆아지고 빈궁해진다.” (17p)

대부분의 다른 성경 이야기들처럼, 다윗 이야기 역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가공된 이상(ideal)이 아니라, 인간됨이 형성되는 장(場)인 있는모습 그대로의 실재(actuality)를 제시한다. 다시 말해, 현세/인간의 상황 속에서의 하나님의 임재를 보여주는 것이다. (1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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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방식은 다름이 아니라 이야기다.”

그래서 간증 - 진실하고 진정한 - 이 무엇보다 효과가 있고 중요하다.

“다윗 이야기를 통해 온전하고 충만한 삶에 대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무엇보다도 온전하고 충만한 삶이란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삶이라는 것을 배운다. ..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 땅과 이 땅의 상황이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상황을 정의한다.” (15p)

초지일관 한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는 이 다윗 이야기는 성경에서 너무도 많은 공간을 차지하는 이야기인지라, 우리는 이 훌륭하고 영감을 주며 위엄 있는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익숙해지고 별 무리 없이 젖어든다. 그러나 그러다가도 우리들 대부분은 성경 이야기 속에서 소위 거창한 ‘영적 원리‘나 ‘도덕 지침‘ 혹은 ‘신학적 진리‘를 뽑아 내려고 하는 평상시의 나쁜 습관에 다시 빠져들기 일쑤다. 그러고는 우리 삶에 경건한 모양을 부과하기 위해 억지로 그것들 속에 자신을 끼워 맞추려 한다. 자신의 상태를 개선시켜 보겠다고 하는 일이지만 참으로 무리가 가는 방식이 아닐 수 없다. 게다가 그런 시도는 복음의 방식이 아니다. 복음의 방식은 다름이 아니라 이야기다. (1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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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기도하는 상상력을 현세에 집중시키는데 사용..”

“이야기는 하나님의 계시가 주어지는 가장 주된 통로다.” - 같은 페이지.

“이야기가 우리에게 그렇게 중요한 까닭은 삶 그 자체가 바로 이야기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12p)

후에 나는 그런 식으로 교육 받은 것이 얼마나 큰 복이었는지를깨달았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기독교는 바로 그런 식으로 다윗 이야기를 사용해 왔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즉 그 이야기는, 이야기를 통해(narratively) 사고하도록 신앙적 상상력을 훈련시키고, 기도하는 상상력을 현세(earthiness)에 집중시키는 데 사용되었던 것이다.

1. 이야기_ 다윗과 예수님 (1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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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그렇다. 목적이 있어서 사는데 그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살아내는 데 있다.” 말씀대로 살아 내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뚜렸한 길이 하나 존재하는데 “바로 예수님이 계시 하신 길이다.” 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이 바로 말씀이니까.

“예수님이 계시하신 길” 이란 무얼까. 이것과 “이 길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세세한 일에 유심히 주목하는 작업” 이라는 “영성신학”과 어떤 관계일까?!

예수님는 결국 십자가를 지고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는데 이 길 위에서 일어나는 일을 볼 수 있을까?!

12월 책으로 선정된 “다윗, 현실에 뿌리 박은 영성”과 같이 읽을 책이다.

우리는 끝(end)에서 출발한다. "내 끝에 내 시작이 있다" (T. S.Eliot). 결말이 시작보다 앞선다. 우리는 먼저 종착지를 정한 다음여정을 시작한다. 우리는 앞두고 있는 것에 대비하기 위해 정보를모으고 상상력을 발휘한다. 삶은 삶이 목적(end)이다. 우리는 살기위해, 더욱 풍성히 살기 위해 산다.

기독교의 모든 신조와 순종, 증거와 가르침, 결혼과 가정, 여가와 일, 설교와 목회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살아내는 데 있다. 즉, 더욱 풍성히 사는 데 있다. 만일 목적지가 없다면, 우리에게 모든 길은 매한가지일 것이다. 그러나 목적지가 존재한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삶이 우리 삶의 목적이라면, 거기에는 뚜렷한 길이 하나 존재한다. 바로, 예수님이 계시하신 길이다. 영성 신학(spiritual theology)이란 바로 이 길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세세한 일에 유심히 주목하는 작업이다. 영성 신학은, 하나님 에 대한 정보로 추락해 버린 비인격화된 신학에 대한 항의다. 영성신학은, 하나님을 좌지우지하려는 전략적 계획 프로그램으로 추락 해 버린 기능화된 신학에 대한 항의다.

- 들어가는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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