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의 신앙 맥 잡기 - 무디가 전하는
D. L. Moody 지음, 장광수 옮김 / 가나북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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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시골 청년이 집을 떠나 대도시, 그것도 세계적인 대도시에서 살아가려면 그의 앞에는 파멸로 이끌기에 좋은 유혹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기 마련입니다. 삶의 전환점을 맞은 이 청년처럼 다니엘 앞에도 성공과 패배의 갈림길이 놓여 있었습니다"(22).

이 책은, 세계적인 복음 전도자인 D. L. 무디가 <다니엘서>를 본문으로 전하는 설교입니다. 특별히 온 세상의 풍조와 맞서야 하는 젊은이들에게 전하는 복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전도자, 무디는 오늘날 젊은들이 처한 '현실'을, 세계적인 대도시였던 바벨론에 포로로 사로잡혀 와 살아야 했던 다니엘의 상황과 연결시킵니다. 그리고 "젊었을 때 한 번 잘못 출발하게 되면 99%는 실패한 인생이 되고 만다"(30)고 경고하며, 다니엘과 같이 젊었을 때, 믿음 안에서 뜻을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합니다.

오늘날 직장에서, 사회에서, 또 문화라는 이름 아래 어쩔 수 없이 타협해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고 한탄하는 믿음의 청년들에게 <무디가 전하는 다니엘의 신앙 맥 잡기>는 그 어떤 설교보다 강력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뜻을 정해 믿음으로 지키려고 했던 다니엘과 세 친구들에게도, 그런 유혹이 그 어느 때보다, 그 누구에게보다 강력했다는 사실을 기억하다고 인도합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포로로 끌려온 나라에서 포로가 자신의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단정하고, 다니엘에게도 '현실'을 직시하라고 조언했을 것입니다. "너희가 조국에서 산다면 얼마든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수 있을 거야. 하지만 여기는 바벨론이니까 너희 고국에서처럼 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해서도 안 돼!"(25)라고 말이지요. 신앙적 기준을 내세우며 남보다 튀어 보이려고 하지 말라고 손가락질 했을 수도 있습니다. 조금 더 현실적으로, 현명하게 판단하라고 충고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작은 자'가 되어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았던 세계적인 복음 전도자 무디는, 이 세상의 풍조를 거부할 수 있는 용기가 없다면 하나님을 위해 참된 믿음을 소유하거나 하나님을 위해 살 수 없다고 잘라 말합니다. 반드시 충돌할 수밖에 없는 하나님 나라와 이 세상 사이에서, 우리가 따라야 할 믿음의 본이 무엇인지를 일깨워줍니다. "그들은 천국을 위해 사는 쪽을 택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을 위해 살기로 결심했다는 말입니다. … 그들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기로 다짐했습니다. 하나님과 보이지 않는 세계를 위해 사는 쪽을 택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 큰 보상을 받기로 작정한 셈입니다(58).

<무디가 전하는 다니엘의 신앙 맥 잡기>는 그 어떤 다니엘서 설교보다 더 생생한 우리의 현실을 성경에 대입할 수 있도록 인도해줍니다. 그러니까 다니엘이 처한 환경이나 다니엘의 신앙 이야기가 멀고 먼 지역의, 이제 우리와는 거리가 먼, 옛날 옛날 다른 나라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힘이 있습니다!

오늘 많은 믿음의 청년들은 다니엘과 세 친구들처럼, '믿는 것을 부끄러워하라는 유혹' 속에 살고 있습니다. 더구나 코로나19 이후, 많은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무디는, 오늘날 젊은이들에게 다가오는 유혹을 이렇게 함축적으로 표현합니다. "'세상의 명예를 주세요. 그러면 천국에 대한 소망도 포기할 수 있어요. 은 삼십냥을 주세요. 그러면 그리스도라도 당신에게 넘기겠어요.' 이것들이 오늘날의 세상이 요구하는 것입니다"(60).

<무디가 전하는 다니엘의 신앙 맥 잡기>는 이러한 세상(바벨론) 한복판에서 우리가 싸워야 할 믿음의 싸움이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는 어떻게 그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지를 일깨워줍니다. 그 영원한 승리를 위해 우리가 붙들어야 할 믿음, 우리를 붙잡아 줄 성경의 약속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그 이름의 명성대로 아주 쉽게 복음을 이해할 수 있으면서도, 우리 안에서 뜨거운 무엇이 올라오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특별히 믿음과 삶, 신앙과 현실 사이의 괴리로 괴로워하는 청년들, 고민하는 젊은이들에게 일독을 권합니다! 상황(바벨론)이 '현실'이 아니라, 믿음(하나님)이 '현실'이 될 수 있도록 인도해줄 것입니다.

선한 싸움을 싸우라

- 호라티우스 보나르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모든 악한 것과의 평생 전쟁이?

여러분의 싸움은 비천한 자와

이기적인 목적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거인들과 왕들과의 싸움입니다.

어떻게 되어가고 있습니까,

죽음과 어둔 권세와의 싸움이?

강한 자보다 더 강하신 주님이

가장 모진 시간에 여러분을 위해

여러분과 함께 계시지 않습니까.

소음과 담배 연기,

열띤 분위기의 숨막힐 듯한 장소에서도 두려워 마십시오.

용기를 내십시오. 그것은 우리 주님의 싸움입니다.

가서 주님을 위해 용감하게 싸우는 법을 배우십시오.

만인이 실패하고

사랑하는 자의 죽음으로 너른 들이 뒤덮인다 해도

믿음의 방패와 말씀의 검을 더욱 굳게 붙잡고

여러분 혼자라도 끝까지 싸우십시오.

만인이 두려워하여

조그만 두려움을 보고 도망친다고 해도

많은 사람의 두려움에 흔들리지 마십시오.

우리의 선장이 되신 주님이 약속하신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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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을 걷는 기도 - 위기의 동반자가 되어 줄 존 던의 하나님 대면 기록
필립 얀시 지음, 홍종락 옮김 / 두란노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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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밖의 시련이

삶을 멈춰 세울 때,

어떻게 오늘을 살고,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어느 작가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인간의 목숨은 지구보다 무겁다." 그러나 "목숨을 중이 여기는 당연하지만, 인간의 목숨이 최우선이라는 과대평가 때문에 과보호와 에고이즘이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얼마나 나약하게 만든 것인지 우리는 알고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죽음과 시체를 금기로 여기고 철저히 은폐해왔다. 어리석은 선택이었다. 우리는 지나치게 묵숨을 과대평가했고, 죽음이 우리 곁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믿어왔다." 코로나19는 우리 곁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여겨졌던 '죽음'과 '시체'를 우리 눈앞에 가져다 놓았습니다. 바이러스 하나 때문에 정상적인 삶이 멈춰서 버렸고, 불과 몇 달만에 경제는 심각한 곤경에 처했습니다. 삶을 유희로만 여겼던 현대인들은 어쩔 줄을 몰라 하고 있습니다.

"존 던은 죽음이 주변에 널리고 널렸던 시절, 아이들의 절반이 어른이 되기 전에 죽고, 기대수명이 33년이었던 시절에 이 글을 썼다"(24). 인류가 경험하는 펜데믹은 코로나19가 처음이 아닙니다. 이 책은 "코로나19보다 4세기 앞서 세상에 나온 책"으로, 영국 런던에서 치명적인 역병(페스트)이 유행하던 1623년에 존 던이 쓴 <비상시의 기도문>을, 필립 얀시가 21세기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만든 것입니다(12).

역병이 창궐하던 시절, 어느 날, 존 던에게도 병증이 시작되었고, 존 던은 병상에 누워 사람들의 죽음을 알리는 교회 종소리를 한 달 동안 들으며, 질병 때문에 극도로 쇠약해진 육체를 가지고 영적인 고갈, 무기력, 죽음의 공포를 솔직하게 고백하는 일기를 써내려갔습니다. 그러나 존 던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비상시의 기도문>, 그리고 그것을 21세기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만든 <한밤을 걷는 기도>가 의미 있는 것은, 죽음이라는 극한 위기의 상황에 하나님과 대면한 기록이라는 것입니다.

 

 

고통 때문에 힘들 때 제가 당신을 바라보게 하시고,

저 혼자서는 아무것도 아님을 고통이 드러낼 때

하나님이 제 전부이심도 깨닫게 하옵소서.

주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십니다.

무엇이 찾아오든 주님에게서 옵니다.

무슨 일이 다가와도 제가 주께로 가게 하소서.

<한밤을 걷는 기도>는 하나님과의 한판 씨름이기도 합니다. 코로나19로 갑작스럽게 가족을 잃은 신앙인이라면, 죽음 그 자체에 직면하는 일보다, 하나님 앞에 서는 일이 더 고통스러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상황을 허락하시고, 이 상황을 지켜보시는 전능자의 '뜻'을 이해하려는 몸부림이 더 고통스러울테니까요. 코로나19 이후, 카페를 경영하며 한 달, 한 달이 고통스러운 동생도, 망해가는 가게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습니다. <한밤을 걷는 기도>에서 역병으로 죽어가는 한 사제가 절규하듯 소리치는 것도 그것입니다. "하나님,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것입니까?"(20)

"나는 태어날 때 울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매일 그 이유를 알게 된다"(29). 코로나19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강력한 메시지는 무엇보다 우리 모두가 죽을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 가운데 삶의 유희를 즐기기에 바빴던 현대인들에게, 코로나19는 인간이라는 존재에게 고통이야말로 가장 확실한 실존적 현실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줍니다.

"주님은 이 병상을 제단으로 만드셨습니다"(61). <한밤을 걷는 기도>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가장 큰 질문, 가장 핵심적인 질문, 가장 중요한 질문은 아마도 "우리는 무엇에 소망을 두고 사는가?"일 것입니다. 결국 한 줌 흙으로 돌아갈 운명에 처한 우리들이 질병 가운데서도, 고통 가운데서도, 홀로 죽어가면서도, 낙담하지 않고, 위안을 얻고, 소망을 붙잡을 수 있는 길이 있는가?

"제게 회개를 허락하셔서 후회할 것이 없게 하신 것처럼 제가 두려워하지 않도록 제게 두려움을 주소서"(88). <한밤을 걷는 기도>는 죽을 준비, 즉 신자로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 임종에 어떻게 임할 것인가를 깊이 묵상하도록 이끕니다.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 살 것인가와 같은 질문이기도 합니다. <한밤을 걷는 기도>가 신앙인들에게 던지는 가장 큰 충격은, 죽음에 대한 새로운 시각입니다.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이 바뀌면서 던에게 전환점이 찾아왔다. 그는 죽음을, 삶을 영원히 망치는 질병으로가 아니라 삶이라는 질병을 다스리는 유일한 치료제, 우리를 하나님께로 데려다주는 인생 여정의 마지막 단계로 보기 시작했다"(242). <한밤을 걷는 기도>는, 그것이 무엇이든, 역병이든, 죽음이든, 고통이든, 그것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한다면, 그것은 선한 것이라는 사실에 눈 뜨게 해줍니다.

필립 얀시는, 선조들이 지옥을 두려워한 것처럼, 우리는 천국을 두려워한다고 말합니다(245). 언제부터인가 신앙인들에게조차 천국은 가상 세계가 되고 있는 느낌입니다. <한밤을 걷는 기도>는 병상에 누워 죽어가는 한 신앙인을 따라, 우리도 마지막 날을 준비하도록 도와줍니다. 그리고 그것은 새로운 소망 가운데로,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는 첫 발걸음이기도 합니다. 하루에 한 편씩 읽으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해주신 영생을 묵상해볼 수 있기를 권합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영원'을 말씀하실 수 있으며, '영원'을 약속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진리 앞에 다시 전율할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주님의 영광, 주님의 기쁨이 있는 곳에서

주님을 바라보며 영원히 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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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뮬러가 경험한 기도의 재조명 - 뮬러의 생애가 이시대의 신앙인들에게 재조명되어야 할 이유
조지 뮬러 지음, 장광수 옮김 / 가나북스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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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없는 내가 어떤 사람의 재정적 도움도 받지 않고 기도와 믿음만으로 고아원을 세우고 운영할 수 있다면 하나님의 자녀들의 믿음을 굳게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불신자들의 양심에도 하나님이 살아계시며 역사하는 분이심을 확증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고아원을 세운 핵심 이유이다"(28).

기도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지 뮬러는, 5만 번의 기도 응답을 받은 사람, 기도가 전부 응답된 사람, 가진 것 하나 없이 오직 믿음과 기도만으로 고아원을 운영한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조지 뮬러가 경험한 기도의 재조명>은 조금 더 본질적인 것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조지 뮬러가 목적한 것은 고아원 운영 자체가 아니었습니다. 조지 뮬러가 원했던 것은 기도 응답 자체도 아니었습니다.

조지 뮬러가 소원했던 것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하여 고통 받는 신자들에게 믿음의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는 일이었습니다! 조지 뮬러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계시며 역사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성경 시대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임을,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녀들을 도우실 수 있는 능력과 사랑을 지닌 분이라는 사실에 대해 확실한 증거를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조지 뮬러가 고아원을 운영하게 된 것은, 자신의 이러한 소망을 가장 잘 이룰 수 있는 길이 고아원을 세우는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이 중점으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조지 뮬러가 경험한 기도의 재조명>을 통해 하나님께서 조지 뮬러의 기도에 그토록 신실하고 놀랍게 응답하실 까닭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또한 조지 뮬러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역사하는 분이시며,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심을,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녀들을 능력과 사랑으로 도우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드러내기 원하셨던 것입니다. 조지 뮬러가 5만 번의 기도 응답을 받을 수 있었던 비결은 조지 뮬러의 소원과 하나님의 소원이 만난 결과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조지 뮬러와 하나님은 심정이 통했던 것입니다.

조지 뮬러가 이렇게 하나님과 심정이 통할 수 있었던 비결은,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습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입니다. <조지 뮬러가 경험한 기도의 재조명>을 보면, 조지 뮬러는 항상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간구하기에 앞서 말씀을 펴서 하나님의 뜻을 확인했고, 말씀을 묵상하며 찾아낸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기도를 드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 속에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에 합한 일이라고 확인이 되면 더욱 담대하게 간구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했기에, 때로 실망스러운 상황이 닥쳐도, 사람에게 의지하고 싶은 유혹이 밀려올 때도, 응답이 지연될 때에도, 하나님을 기뻐하며, 오직 하나님께만 의존하여 고아원을 운영할 수 있었습니다.

<조지 뮬러가 경험한 기도의 재조명>에서 우리는 조지 뮬러가 성도들에게 가르쳐 주고 싶었던 또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이 있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조지 뮬러'라는 특별한 믿음을 가진 사람만 이러한 기도 응답을 경험할 수 있다는 거짓말에 속지 않는 것입니다. 조지 뮬러는 자신이 경험한 이러한 기도 응답은 자신만이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일이 아니라고 힘주어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릴 줄 아는 자녀라면,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축복이라고 강조합니다.

<조지 뮬러가 경험한 기도의 재조명>은 기도자에게 닥친 고난을 주님이 어떻게 큰 축복으로 바꿔주시는지를 증언합니다. "어려운 문제를 만나서 포기하지 않고 주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전심으로 기도하면, 주님이 원하시는 때에 원하시는 방법으로 응답하신다"는 믿음만 있다만 말입니다(101).

오늘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기도하는 많은 신자 중에, "기도로 필요한 것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으로 기도하는 자가 몇 명이나 될까요? 어쩌면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삶이 풍요로워질수록,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기 보다, 내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더 익숙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잠잠이 하나님의 역사를 기다리는 성도를 찾아보기 어려운 시대가 아닌가 하는 애통이 있습니다. 이 책에서 또 한 가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방법은 얼마나 다양한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함으로 기도하고 기다리는 사람만이 하나님께 놀랄 수 있을 것입니다! 조지 뮬러처럼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함으로, 조지 뮬러처럼 날마다 하나님께 놀라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간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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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서적으로 건강한 제자 - 삶의 깊은 변화를 동반한 제자의 길 Emotionally Healthy 시리즈 4
피터 스카지로 지음, 정성묵 옮김 / 두란노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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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회는 역동적으로 움직였지만 리더들, 특히 우리 부부에게는 전혀 즐거운 곳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 사역자들의 사임이 잦았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영적 전쟁과 뉴욕 시의 혹독한 목회 환경 탓으로 돌렸다. 주변에서는 그것이 큰 조직과 사업체에서 흔히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성장통이라며 나를 격려했다. 하지만 우리는 사업체가 아니었다. 우리는 교회였다!(13)

<정서적으로 건강한 제자>는 한 사역자의 충격적인 고백으로 시작됩니다. 그는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 나라를 위한 열심으로 천하를 얻고도 자기 영혼을 잃은 자들이었다"고 합니다. 성공적인 교회 개척, 급성장 하는 교회, 가난한 사람들을 창의적으로 섬기는 사역들, 수많은 리더의 양성, 끊임없이 늘어나는 소그룹, 이토록 열심이었고, 눈부신 성과도 거두었는데 무엇이 문제였던 것일까요?

<정서적으로 건강한 제자>의 저자 '피터 스카지로' 목사님은 겉만 화려할 뿐 내적 상태는 그리 좋지 못했다고 털어놓습니다. 갈등이 끊이질 않았고,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불타오르고 있었지만 사람들에게는 비판적이고 믿을 만하지 않은 부담스러운 사람으로 인식되었으면, 무엇보다 교회는 역동적으로 움직였지만 그 교회가 전혀 즐거운 곳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미성숙하고 유치한 행동이 반복될수록 분노와 상처로 가득한 모습을 감춘 채, 사역은 점점 무거운 짐이 되어갔고, 탈진했으며, 결국, 교회를 그만 다니기로 결정했다는 것입니다!

피터 스카지로 목사님의 이 고백이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까닭은, 이것이 정확히 대형 교회에서 사역할 때의 제 모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칭찬받는 사역자, 열심 있는 사역자, 성과를 내는 사역자였지만, 나의 내면은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을 잃은지 오래였고, 동역자들과의 갈등이 끊이지 않았으며, 그럴수록 교회의 '일'을 더 잘해내려고 했고, 몸은 이미 오래전에 탈진 상태였지만, 성과에 더 집착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무엇이 문제였던 것일까요?

<정서적으로 건강한 제자>는 한마디로 우리의 '제자훈련'에 문제가 있다고 일갈합니다. 제자로 훈련받고 제자를 키워 온 방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람들의 표면적인 삶 아래를 다루어 그들이 깊은 변화를 이루고 나아가 세상에 장기적이고도 지속 가능한 영향을 미치도록 만드는, 완전히 새로운 방식의 제자훈련", "바로, 변화적인 모델이 필요했다"(23)고 증언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성공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어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나님의 방식과 시간표대로 하는 것"이다(55-56).

이 책이 새롭게 제안하는 것이 바로 "정서적으로 건강한 제자훈련"(EHD)입니다. 기존의 제자훈련 방식과 가장 큰 차이점이 있다면 '규격화'된 제자훈련이 아니라, '맞춤형' 제자훈련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제자훈련을 쉽게 할 수 있도록 규격화하여, 똑같은 훈련방식을 '모두'에게 적용해왔습니다. <정서적으로 건강한 제자>는 이것이 "제조공장의 컨베이어 벨트"와 같은 방식으로 제자를 양산하는 것과 같다고 지적합니다. 우리의 가장 큰 실수는 규격화된 프로그램에 매달리느라, 예수님이 본을 보여 주신 관계적 제자훈련을 놓쳤다는 것입니다(59).

<정서적으로 건강한 제자>에서 얻은 가장 큰 유익, 가장 큰 교훈은, "하나님이 주시는 감정의 소리에 귀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동안 어떤 상황에서든, 어떤 문제를 대하든, '믿음'으로 반응하는 것을 강조하며, '감정적'으로 동요하는 것을 경계해왔습니다. 어떤 역경과 문제 앞에 마음이 흔들리고, 감정이 무너질 때마다, 그 감정을 부인하고, 믿음의 눈을 들어 승리를 바라보며, '이김'을 선언할 것을 강요해왔습니다. 감정은 거짓된 것이며, 믿음을 약하게 만드는 것으로, 극복해야 할 무엇으로 간주해왔습니다. "그리스도와 올바른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내 감정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크리스천 리더로서 나는 깊은 내면의 여정을 뒷전으로 한 채 조직을 정비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식의 '활동'에만 매달렸다"(98).

그런데 <정서적으로 건강한 제자>는 하나님께서 바로 '감정'을 통해 말씀하신다는 사실에 눈이 열리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정서적으로 건강한 제자>를 통해 감정을 느끼고, 침묵의 시간을 가지며, 예수님과 교제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최근 몇 주 동안, 나의 감정과 사역과 관계 가운데 놀라운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나와 동역자의 감정을 더 예민하게 살핀 덕분에 함께 훨씬 기분 좋은 상태에서 동역할 수 있었고, 감정을 통해 예수님과 교제할수록 사역이 '일'처럼 느껴지기보다 훨씬 더 큰 '기쁨'으로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감정에 귀를 기울이자 하나님을 위한 '일'이 아니라, 하나님과 '함께'하는 데에 더 집중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또한 <정서적으로 건강한 제자>를 통해 큰 위로도 경험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약함을 바탕으로 한 교회로 변화하라"(301)는 가르침"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함을 통해 일하신다는 것을 알았지만, 정직하게 돌아보니 대형 교회에서 오랫동안 사역하는 내내 "강함"과 "강점"에만 매달려왔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교회 개척을 시작한 지금, 나의 약함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나의 한계와 나의 약함을 고백하는 일이 자연스러워졌는데, <정서적으로 건강한 제자>는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능력을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경험할 수 있는 비결이라는 확신을 더하여 주었습니다! "리더는 진정성을 보여 줌으로써 건강한 제자훈련 문화를 창출해야 한다. 그래서 약함과 흠이 드러나는 순간에 어떻게 헌신할 것인가는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그런 순간은 우리 모두에게 찾아온다"(302).

사실 그동안 제자훈련이라고 하면, 예수님 안에서 잘 훈련된 하나님 나라의 군대, 강한 군사를 세워가는 일이라는 이미지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서적으로 건강한 제자>는 이런 이미지를 박살내주었습니다. 하나님의 강한 군대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성과를 통해서가 아니라 슬픔과 상실을 통해 성장하는 법을 배우며, 약함을 통해 일할 줄 아는 제자였던 것입니다.

<정서적으로 건강한 제자>는 하나님을 향한 열정으로 타올랐으나, 실패한 제자, 실패한 사역자라는 쓰라림 속에서 고통받고 있는 리더들에게 먼저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입니다. 실패한 제자, 실패한 사역자라는 고통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은, 그만큼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뜨거웠다는 반증일 수도 있습니다. 열심을 내본 사람만이, 그런 실패도, 그런 쓰라림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니까요. <정서적으로 건강한 제자>는 그런 분들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출구와 같은 역할을 해줄 것입니다.

또한 <정서적으로 건강한 제자>는 제자훈련을 담당하고 있는 모든 리더(사역자)들이 읽어야 할 필독서라고 생각합니다. 프로그램화된 제자훈련의 맹점이 무엇인지, 한 영혼, 한 영혼에게 초점을 맞춘 제자훈련이란 무엇인지 중요한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무엇보다 제자훈련을 담당하고 있는 모든 사역자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같은 '쉼'이 주어지지 않을까 예상해봅니다. 이제 제자훈련은 교회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발걸음이 될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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앨저넌에게 꽃을 (아트 리커버 에디션) - 운명을 같이 했던 너
대니얼 키스 지음, 구자언 옮김 / 황금부엉이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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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와 의심이 내 주위의 세상을 향한 첫 번째 반응이었던 것이다"(93).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내 인생의 책'으로 꼽았다는 이 책을 읽으며,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가'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했습니다. 그리고 인간이란 얼마나 대단한 착각 속에서 오만하게 살아가는 '이기적인 개새끼(개에게 미안)'인가 하는 자괴감이 들어 슬펐습니다.

지능이 낮아 어눌한 '찰리'는 항상 똑똑하고 싶고 바보가 아니기를 바랐습니다. 뇌수술로 인간의 지능을 높이는 실험을 하고자 했던 과학자들은 찰리를 실험대상으로 선택합니다. 찰리가 선택된 것은 낮은 지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배우려는 의지가 강했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제목에 등장하는 '앨저넌'은 찰리와 똑같은 실험의 대상이었던 쥐의 이름입니다. 앨저넌은 수술 후 높은 지능을 유지하는 최초의 동물이었고, 앨저넌과 미로 찾기 대결에서 늘 지기만 했던 찰리 또한 뇌수술 이후, 지능이 좋아진 최초의 인간이 됩니다.

찰리가 똑똑해지고 싶었던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친구들을 사귀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찰리는 자기가 주변 사람들처럼 똑똑해지면 많은 친구를 사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들과 더 잘 소통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찰리가 똑똑해질수록 더 많은 문제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찰리는 똑똑해질수록 가슴속이 텅 빈 것처럼 느꼈습니다. 사람들의 겉모습 뒤에 무엇이 있는지가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사람들의 웃음이 그를 향한 미소가 아니라, 멸시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과 함께 웃었던 자신을 떠올리며 그는 부끄러움을 느꼈고, 지금까지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대해왔는지 진실을 알아낼수록 그는 친구라고 믿었던 사람들을 잃어갔습니다.

친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찰리가 자신들보다 열등하다고 느꼈을 때는 괜찮았는데, 그 바보가 놀랍게 성장하자 그들은 위축되었고, 그 '바보' 앞에 자신들의 무능력함이 드러날수록 똑똑해진 찰리를 증오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내게 지식과 이해력이 있다고 미워한다"(163). 이것은 찰리가 미처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기대했던 방식으로 날 자랑스러워하지는 않는다"(105).

지능이 천재적 수준으로까지 좋아진 찰리는 그가 천재적일수록 새로운 친구도 사귈 수 없었습니다. 누구도 그의 지식을 따라오지 못했고,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찰리이 높은 지식은 지식인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에게 모멸감을 안겨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똑똑하게 말할수록 사람들은 그에게 적의를 느꼈고, 찰리는 똑똑해질수록 모든 즐거움이 사라져갔습니다.

'나도 사람이에요, 사람. 부모도 있고, 지난 일도 기억하고, 과거도 있어요. 그리고 당신들이 나를 저 수술실로 옮기기 전부터 난 존했다고요!"(238)

찰리와 유일하게 소통하는 과학자들에게도 찰리는 하나의 실험대상일 뿐이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실험 쥐와 같은 취급을 한다는 사실에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그의 높아진 지능을 관찰하고, 놀라고, 자랑스러워하는 사람들조차, 그를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지 않다는 사실이 그를 고독하게 만들었습니다. "니머 교수가 나를 창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과연 어떻게 그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215)

찰리는 고독해지고 말았습니다. 과학자들이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했지만, 그것이 아무리 근사한 일이라고 해도, 그를 실험실 동물처럼 다룰 권리는 없다는 사실을 이해시킬 수가 없습니다(357).

"들꽃 한 다발을 앨저넌의 무덤에 올려놓으며 나는 울었다"(372).

지능이 낮은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학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학대의 의미조차 이해할 수 없음을 비웃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행위를 우리는 과연 지능 있는 태도라고 할 수 있을까요? 그 어줍잖은 '지능'이 우리의 삶을 스스로 고독 속으로, 지옥 속으로 몰아넣고 있음을 봅니다.

이 세상에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한 사람, 의미 있는 친구이고 싶었던 찰리에게 유일한 친구는, 같은 운명을 지녔던 '앨저넌'뿐이었습니다. 찰리는 기꺼이 앨저넌과 친구가 되었습니다. 누가 더 똑똑한지 앨저넌과 경쟁하기를 원하지 않았고, 앨저넌과 함께 놀기를 원했던 찰리는, "바보 같고 감상적이지만", 앨저넌이 죽었을 때 소각로에 넣어져 태워질 앨저넌을 뒷마당에 묻어주었고, "들꽃 한 다발을 앨저넌의 무덤에 올려놓으며" 울었습니다(372).

누군가는 실험실의 '쥐'였던 앨저넌의 무덤에 꽃을 올려놓는 것을 어리석게 여겼고, 생쥐와 친구였다고 말하는 찰리를 미친 사람 취급했지만, 찰리의 행동을 보며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지능이 낮은 사람이 보통 사람들과 친구가 되기 위해 부단히 애쓸 것이 아니라, 지능이 높은 사람들이 그들과 친구가 되기 위해 부단히 애써야 하는 것 아닌가. '지능'은 그렇게 쓰라고 신이 우리에게 허락한 능력이 아닐까. 지능이 높은 사람이 서로 소통하는 방법을 더 잘 찾을 수 있을 텐데도, 우리를 왜 그 노력을 지능이 낮은 사람의 몫으로 여기는가. 우리는 어째서 이처럼 엄청난 모순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가는 것인가!

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왜 <앨저넌에게 꽃을>이라는 이 책을 '내 인생의 책'으로 꼽았는지 알 것 같습니다. 이 이야기는 슬픈 이야기입니다. 사랑을 갈구하지만 누군가를 사랑할 능력이 우리에게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책입니다. 그 사랑 없음으로 인해, 지능과 지식이 아무리 높아져도 우리는 사실 죽은 것과 다름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아프게 깨닫게 해주는 책입니다. 시합만 할 줄 알았지, 함께 노는 법을 잊어가는 인간은 점점 더 고독해지리라는 것을 슬프게 보여주는, 애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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