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한번 보고 싶은 중국 옛 그림 - 중국 회화 명품 30선
이성희 지음 / 로고폴리스 / 2017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미지 속에서 길을 잃어보지 않았다면,

길이 사라지는 안갯속에서 정처를 잃고 헤매보지 않았다면,

그리하여 방황의 끝에서 달빛처럼 서리는 낯선 길을 황홀하게 발견해보지 못했다면

아직은 그림을 제대로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적어도 그림 속으로 들어가 보지 못한 것입니다.


- <꼭 한 번 보고 싶은 중국 옛 그림> 서문 中에서


 

사랑은 만남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이 책이 다시 일깨워주었습니다. 일단은 만나야 사랑에 빠질 수 있는 것이지요. 그동안 중국 옛 그림에 관심도, 애정도 없었던 이유는 중국 옛 그림을 만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중국의 옛 그림을 비롯해 우리나라의 회화나 동아시아의 회화보다는 서양의 회화에 더 익숙할 것입니다. 서양의 회화가 더 많이 공부되고, 모사되고, 소비되는 탓입니다. <꼭 한 번 보고 싶은 중국 옛 그림>은 이런 독자들에게 중국의 옛 그림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책입니다. 그것도 중매인으로서가 아니라, 중국의 옛 그림과 사랑에 빠진 작가가 자신의 연인을 소개하듯이 말입니다.


그림을 몰랐을 땐, 그림은 그저 즐기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시선을 잡아끄는 색채와 선과 모양과 구도와 대비와 이야기에 주목하면, 마음은 저절로 경탄을 쏟아놓을 것이라고. 그것이 명품, 명작이 지닌 힘이 아니겠는가 하고 말입니다. 설명이 없어도 아름다움과 섬세함이 고요하게 전해지는 신비말입니다. 그러나 감상의 본질이 아무리 설명을 초월한다 해도, 그저 느끼는 것만으로는 채울 수 없는 '앎'을 향한 허기가 우리 안에 있습니다. 알고 싶다는 욕망의 허기를 채우려면, 느낌보다는 '이해'가 필요합니다. 중국의 옛 그림 속에는 "중국 각 시대의 삶과 욕망을 치열하게 담으려 했던 화가들"(6)의 일격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 때, 그전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느낌이 주는 감명만큼이나 이해가 주는 희열도 감동적입니다. <꼭 한 번 보고 싶은 중국 옛 그림>은 느낌이 주는 감명과 이해가 주는 희열을 동시에 선물해줍니다. 중국 회화사의 큰 흐름을 따라 한 폭의 그림이 품고 있는 삶과 역사와 미학적 원리들을 설명하며 한 작품 안에 오래 머물도록 하지요. "한 작품과 만난다는 것은 한 인간의 삶과 만나는 것이며, 그 삶에 스며든 역사의 추억과 만나는 것"(6)이니, 가볍게 스쳐 지나가지 말라는 뜻일 겁니다.


그런데 이 책은 그림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그림 이야기가 아니라, 어쩌면 역사, 어쩌면 철학, 어쩌면 문학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철학과 시"를 함께 꿈꾸는 작가의 독특한 이력 때문인 듯합니다. "그림을 만나는 것은 감각적인 즐거움의 욕망이면서 동시에 이미지를 통한 내밀한 사유의 욕망"이라고 말하는 저자는 자신의 이러한 시도를 "텅 빈 언어로 이미지를 포착하려 했던 불가능하고도 진지한 문학 행위"라고 설명합니다(5-7).


풍부한 이야기가 읽는 재미를 더하지만, 저자가 가르쳐주는 중국 옛 그림을 감상하는 방법은 사뭇 독특합니다. 그것은 "그림 속의 길을 따라 거닐어보는 것"(32)입니다.

"서양의 풍경화는 떨어져서 보면서 시각으로 느낀다면 동아시아의 산수화는 그 산수 속에 들어가 거닐면서 마음으로 만"(46)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길이 끊기는 곳에서 비로소 우리 시선 안으로 들어오는 풍경, 물과 버들로 표현되는 여성성의 공간이 주는 설렘과 연모, 해조묘(나뭇가지를 게의 발처럼 그리는 묘사법)가 주는 소슬한 분위기, 모든 형상과 빛깔을 완성시키는 쓸모없는 여백의 쓸모 있는 반전, 여백을 품고서 끊어지면서 이어지고 이어지면서 끊어지는 공간의 긴장감, 격렬한 주름의 진동을 느끼면서 붉은 꽃들이 흐드러진 골짜기 속으로 완보하며 올라가는 즐거움은 그림 속을 거닐어 보아야 만날 수 있는 풍경이요, 알 수 있는 즐거움입니다. 또 하나, 중국의 옛 그림들은 서양의 회화에 비해 화폭이 자유로우며 참으로 웅장한 시선을 가졌다는 생각이 듭니다. 산수화가 품은 풍경이 얼마나 웅장한지 서양의 풍경화와는 그 스케일이 사뭇 다르다는 사실이 새삼 흥미롭게 다가옵니다. 대륙의 가상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들의 눈에 담긴 풍경이 그들의 사고의 폭까지 좌우했다고 해야 할까요.


그림 앞에 서는 삶을 꿈꾸었지, 그림 속으로 들어가 거닐 생각은 해보지 못했습니다. 그림 속의 길을 따라 거니는 방법을 배워보고 싶은 독자에게, 이미지가 주는 느낌적인 느낌보다는 이해가 주는 희열을 탐하는 독자에게, 미학적 원리에서 포착되는 동양철학의 진수를 만나고 싶은 독자들에게 추천해주고 싶은 책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