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에서 예술 찾기 - 예술 도시를 말하다 Newyork
조이한 지음 / 현암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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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과 뉴욕의 예술을 다시 보다!

"누군가의 글을 통해 그림을 다시 보기도 한다"(139).

 
"당신이 나를 채워줘." 영화 <제리 맥과이어>에 나오는 (톰 크루즈가 했던) 사랑 고백이다. 미국인이 아직도 가장 사랑하는 명대사라고 한다. <뉴욕에서 예술 찾기>를 읽고 난 느낌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나를 채워주는 책"이라고 하고 싶다. <뉴욕에서 예술 찾기>는 독일 유학으로 미술사와 젠더학을 공부하고 일반인들을 위한 미술사를 강의하는 이가 "모퉁이만 돌면 미술관, 걷기만 해도 갤러리"라는 뉴욕을 여행하며 "뉴욕 미술"에 대해 쓴 에세이다. 여행과 뉴욕, 그리고 미술 작품에 관심이 있는 독자의 흥미를 끌만한 책인데, 일단 읽기 시작하면 이런 분야에 관심이 없던 독자들까지 새로운 관심을 불러일으킬 만한 흡입력이 있다. 큰 기대 없이 읽었는데, 대어를 낚은 느낌이라고 할까.

뉴욕 여행 경험 3차례, 체제 기간 총 6개월이 '다'라고 고백하는 저자는, <예술 도시를 말하다> 시리즈 두 번째로 뉴욕에 대해 쓰는 것이 조금은 막막하다고 말한다. 가본 적이 없어도 어쩐지 익숙하게 느껴지는 뉴욕은 "너무나 많이 노출되어 새로운 눈으로 보기 힘든 도시"이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이 책의 초점은 '관광'이 아니라 '미술', 그것도 '뉴욕의 현대미술'에 맞추어져 있다. 저자가 직접 말하는 이 책의 기획은 이렇다. "<뉴욕에서 예술 찾기>는 서양 미술사를 통째로 쓸 수 있을 만한 자료와 작품들이 모여 있고 세계에서 가장 커다란 미술시장이 형성되어 있는 곳, 젊은 예술가들이 성공을 위해 모여들며 그들이 세계 미술계의 트렌드를 움직일 수 있도록 방송과 비평계, 문화계의 주요 인사들의 네트워크가 형성되어 있는 뉴욕을 여행하며 '이곳의 예술은 어떠한가?'를 둘러본 후의 기록이다"(18).

<뉴욕에서 예술 찾기>는 뉴욕의 주요한 미술관을 중심으로 그 미술관에서 만난 작품과 작가 이야기를 주(主)로 한다. 그리고 사이사이에 뉴욕과 뉴욕 여행에 관한 짧막한 스케치를 덧붙인다. 그런데 나는 무슨 이야기가 그토록 재미있었을까.

먼저, "미국이 현대미술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계기는 역설적이게도 전쟁 덕분이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26-27). 유럽이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는 동안, 전쟁 물자를 만들며 경제력이 상승한 미국은 승전국의 이점을 다 누렸다. 유럽의 아방가르드 예술인들, 특히 유대계 예술인들이 전쟁을 피해 미국 땅으로 망명을 했고, 뉴욕 미술관에 있는 작품들 가운데 상당수가 전쟁 틈에 건너왔다. "나치는 이들 작품을 불태워 없애버리기 전에 대부분을 경매나 화상을 통해 헐값에 처분했는데 이를 계기로 뉴욕의 수집가, 화상 등이 그 작품들을 '수렁'에서 건질 수 있었고 그 덕분에 화려한 컬렉션을 만들 수 있었던 것이다"(28). 세계사의 큰 흐름을 바꿔놓는 '전쟁'이 미술사의 큰 흐름까지 바꿔버렸음을 알 수 있다. "내가 뉴욕에 도착한 것은 꿈이 아닐까요? 그리고 뉴욕 그 자체가 놀라운 꿈이 아닐까요? 하지만 이 꿈을 창조한 것은 내가 아닙니다. (...) 여러분은 내가 이 꿈을 보고 경회할 기회를 주었으니까요"(31). 미국의 부호와 미술 관계자들의 도움으로 "목숨뿐만 아니라 예술까지 건진" 마르크 샤갈의 연설문 중 일부이다.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뉴욕이 이토록 화려한 예술의 중심에 설 수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인류 문화의 한 켠도 텅 비어버렸을 것"이라고 하지만, 전쟁으로 폐허가 되고 있는 한반도 옆에서 전쟁의 부가 이익을 챙겼던 일본을 보는 것처럼 솔직히 미국이 억세게 운이 좋다는 생각이 먼저 든다.

미술을 전공하는 학도는 아니지만, 미술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요소 중 하나는 작품 뒤에 숨은 화가들의 이야기이다. 아마도 가장 극적인 요소는, "사람들은 예술가가 불행할수록 열광하고 그 열광의 열매는 작가가 아닌 엉뚱한 사람이 차지한다"(76)는 안타까운 공식 안에 있다. <뉴욕에서 예술 찾기>에도 화가들의 다채로운 삶의 이야기가 가득하다. 추상 화면으로 단숨에 미국 최고의 화가로 급부상했으나 44살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여 '불행한 천재 신화'를 남긴 '폴록'과, "흰색 꽃잎 속에 숨은 꽃술을 관능적으로 그린" 조지아 오키프의 이야기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젠더학을 공부한 저자의 이력을 다시 확인하게 되는데) '너무나' 아름다웠고 '지나치게' 성적으로 보이는 조지아 오키프의 꽃 그림이, "비웃음당하는 '예쁜 것'을 버리는 대신 '예쁘다'는 말을 열등한 것으로 취급하는 남자들의 사고를 뒤집으려는 시도"(68)라는 해석이 그녀의 그림을 다시 보게 해주었다.

또 하나 흥미로웠던 이야기는, 가장 창조적이며 가장 앞서가는 예술 분야로 꼽히는 미술계도 '전통'을 벗어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사실이다. "어떤 경우에는 무게중심을 살짝 바꾸거나 선을 잠깐 비트는 것에 이르기까지 수백 년이 걸리기도 한다. (...) 고정관념과 인습에서 벗어나는 것을 우리는 간단히 '창조력'이라 말하지만 그 창조력을 발휘하기란 얼마나 어려운지"(72). <뉴욕에서 예술 찾기>는 "이념의 도구로 전락하는 예술을 거부하고 그 자체로 순수하게 형식적인 아름다움을 구현"하고자 한 추상화의 등장과, 팝아트의 등장을 비교하며 '도전과 저항'이라는 역사의 반복 공식을 보여준다. "현대에 팝아트에 이르러 저속한 대충매체의 이미지가 화폭에 등장했을 때", "기성세대가 되어버린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은 젊은 작가들의 이러한 도전이 기가 막혔고 과거에 자신에게 향했던 비난을 그들에게 쏟아냈다"고 한다(107-108). 아무것도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음으로써 전혀 위험하지 않게 된 추상미술 처음 등장했을 때, 그들도 똑같은 비난을 받았다. 그런데 저자가 짚어주는 것처럼, "저항 없이 도입된 혁신"은 그 가치가 제대로 인식되기 쉽지 않다. 역설적이게도 "새로운 것은 기존의 것과 충돌을 일으키면서 가치 논쟁을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좀더 치밀해지고 세련되어질 수 있으며 그 만큼 인류의 문화는 풍요로워"(108)지기 때문이다. "새로운 것이 너무 흔해 빠져서 더 이상 아무것도 새롭지 않게 된 오늘날, 지켜야 할 예술적 가치가 없어져 버린 요즘의 풍토가 더 공허하게" 느껴진다는 저자의 말에 괜히 내 가슴도 뻥 뚫린다.

예술은 배고픈 직업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역설적이게도 예술의 꽃은 경제력, 즉 자본주의의 한 가운데서 피어나나 보다. 세계 경제의 중심이라 일컬어지는 뉴욕에서 현대미술이 화려한 꽃을 피우고 있으니 말이다. 어쩌면 이것이 당연하다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술의 역사는 이제 돈과 함께 쓰여진다"(287)는 저자의 말이 씁쓸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소장은 커녕, '그들만'의 문화 유산을 구경하는 것조차 쉽지 않은 남루(?)한 삶을 살고 있지만, 인간을 위대하게 만드는 '진, 선, 미'의 가치, 그 아름다움을 살짝 엿본 것만으로도 이렇게 충만한 채워짐을 경험하고 있으니 나도 참 어지간히 소박하다.

<뉴욕에서 예술 찾기>는 뉴욕에 대한 불편한 마음까지 그대로 드러낸다. 뉴욕 여행에 대한 환상이 아니라, 뉴욕의 속살을 보여준다고나 할까. 쥐와 이가 드글거리는 화려한 도시의 이면, 악취가 심하고 환풍이 잘 되지 않는 지하철, 빚으로 생활하는 뉴요커, 불편한 화장실, 생각보다 맛 없는 음식 이야기도 들을 수 있다. 뉴욕 여행을 계획하며 여행을 위한 '정보'가 아니라 '채워지는 여행'을 꿈꾸는 독자라면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여행기로 읽어도 좋지만, 현대미술사라는 큰 흐름 하나를 따라가며 그림을 공부하는 재미도 솔솔한 에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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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여자집 2011-11-28 1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평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