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 전 그날, 기타가마쿠라의 언덕을 내려온 나는 철길옆 좁은 골목을 터덜터덜 걷고 있었다. 하얀 반팔 셔츠가 땀으로 흠뻑 젖어 등에 찰싹 달라붙었다. 매미 소리가 귀 따가울 정도로 가깝게 들렸다. 여기저기 수국이 아직 지지 않았는데, 장마가 끝나자마자 벌써 여름이 시작되어 있었다. - P7
"할미는 네가 책을 좋아하는 아가씨와 결혼하면 좋을 것같다. 네가 읽지 못해도 이것저것 책 이야기를 해줄 테니 말이야. 하기야 책 좋아하는 책벌레들은 끼리끼리 어울리는 법이니 어려울지도 모르겠다만." - P27
"에리하고 똑같은 소리를 하는구나. 어쩜 모자가 똑같이 할머니 마음을 몰라주니." 이모는 침울한 표정으로 한숨을 지었다. "다른 사람들보다 할머니를 오래 봐온 나는 알아. 할머니는 너와 에리를 제일 예뻐하셨어. 돌아가시기 전에 갔던 마지막 여행에도 너희 둘을 데려갔잖아. 처음에는 우리 바깥양반이랑 내가 따라가겠다고 했는데, 할머니가 싫다고하셨어."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 P80
고우라가에서 키가 큰 사람은 어머니와 나뿐이고, 나머지는 전부 덩치가 작았다. 우리 둘은 할아버지와는 닮은 구석을 찾아볼 수도 없었다. - P89
"책등빼기가 뭡니까?" . . "고서점에서 싸게 파는 책을 사들여 높은 값에 되파는 일이나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말해요. 시다 씨는 이 일대의 서점과 고서점을 매일같이 돌고 계시죠." - P115
절판본이란 뒷권으로 갈수록 구하기 어려운 법이라고. 상권만 샀다가 하권을 놓치는 사람은 있어도 그 반대는 없잖아? 하권은 시장에 얼마 나오지 않으니, 그만큼 값어치가 올라가는 거지. - P118
나는 빤히 그녀를 바라보았다. 일전의 ’소세키 전집‘때도 그랬지만 사소한 실마리를 가지고 용케도 여기까지 생각해내다니 대단하다. 그것도 병실에서 한 걸음도 나가지 않고. - P129
책장을 넘기는 시노카와 씨의 벌어진 입술 사이에서 희미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휘파람을 부는 모양이었지만, 여전히 본인은 의식하지 못하는 듯했다. - P175
‘지금 아가씨는 삼단논법에 따라 말했어. 멍청한 사람은 그러지 못하지. 아가씨는 바보가 아냐.‘ - P208
지난 두 달 동안 왜 오바는 시노카와 씨에게 아무런 연락도 하지 않았을까? 「만년」을 양도해 달라고 했다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손에 넣을 수 있을 리 없다. 대체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던것일까? 어쩌면 만년을 손에 넣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 P280
"극히 적은 부수만 발행되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책이 이렇게 완벽한 형태로 남아있는 건 기적이야. 나로서는 이걸 이해하지 못한다는 게 더 놀랍군. 책의 내용뿐 아니라 이 책이 거쳐 온 운명에도 이야기가 존재해. 나는 그 이야기까지 가지고 싶은 거다." - P287
"고우라 씨는 책을 읽지 않으니까...." 시노카와 씨는 주저하며 중얼거렸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좋아하는 책을 곁에 두고 싶은 마음을 이해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고작 책 한 권에 불과하니까요." - P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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