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드팀전 > 이것은 글렌 굴드가 아니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유명한 말이 떠오른다.

글렌 굴드의 새로운 녹음이 나왔다.알라딘 음반 검색을 보다 그냥 저냥 컴필레이션 음반이겠거니 생각했다.무심코 클릭 했다.글렌 굴드의 대표작이라 할 만한 <골든베르크 변주곡>이다.굴드의 <골든베르크 변주곡>은 두 종류가 대표적이다.55년 그의 첫 녹음과 81년 녹음.두 음반은 같은 사람의 연주지만 또 완전히 다른 연주다.그래서 음반 애호가 사이에서도 두 종류에 대해 선호가 나뉜다.55년 연주가 훨씬 빠르다.

자켓 디자인은 시리즈에 따라 다르다.LP 자켓형.SONY 굴드에디션 형.

 

 

새로 나온 음반은 이것이다.하이브라이드 SACD 로 나왔다.

 이 음반은 55년 녹음을 새롭게 리마스터링(?)한 음반이다.즉 앞의 음반과 동일 음원이다.자켓만 바꾼 거라고...문제가 그렇지가 않다.녹음과 관련되 미학적인 문제를 던지는 새로운 음반이 나온 것이다....예상할 수도 있었지만 별로 상상해보지 않았던 방식이라 자못 충격적이다. 이 음반은 55년 글렌 굴드의 녹음 음원을 가지고 그의 페달링,타건압력,음량 등 모든 것을 컴퓨터 데이터화 해서 그가 사용했던 야마하 피아노로 재연주한 것이다.

즉 글렌 굴드의 연주정보 자체를 그대로 수치화해서 피아노로 재현하는 방식이다.그리고 그 소리를 녹음해서 음반화 한다. 기존의 리마스터링이란것이 원본 마스터를 가지고 소음을 없애느니 밸런스를 조정하느니 하는 차원의 것과 완전히 다르다.

기술의 발전과 실험이 여기까지 왔다.기술복제시대에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그러나 한번도 이런 방식을 생각해보지 않았다.

피아노는 예전에 자동 피아노라는 장치도 있었으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실험방식이다.자동피아노 전성시대에는 유명한 피아니스트들이 자신의 연주를 펀칭해서 자동피아노로 재현하는 방식이 성행했다.자동피아노 방식의 새로운 변종일까?

이 연주는 아마 올 상반기 가장 화제가 될 음반임에는 틀림없다.

이것은 글렌굴드의 연주인가 아닌가? 녹음된 음반 자체가 아우라를 갖는가? 실제 녹음도 시간이 지나면 연주와음반 자체가 하나의 미술작품처럼 고정화된다.그 음반 자체가 하나의 아우라를 갖는다.글렌 굴드의 55년 녹음은 그 자체로 아우라가 있었다.그렇다면 이것은 뭐란 말인가? 글렌 굴드는 통조림 음악을 좋아했다.스스로도 녹음 테이크를 조합하는 놀이를 즐겼다.그렇다면 이것은 글렌 굴드가 좋아했을 방식일지도 모른다.아니 글렌 굴드라면 55년 녹음과 81년 녹음을 가지고 또 제 3의 음반을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녹음과 음악 사이의 미학적 질문들을 많이 남기게 될 음반이다.기술의 발전에 따라 앞으로 이런 논쟁은 더 많아 질 것이다.

이것은 글렌 굴드인가? ...그 대답 자체도 무의미할 수 있다.

글렌굴드글렌굴드글렌굴드글렌굴드글렌굴드글렌굴드글렌굴드글렌굴드글렌굴드글렌굴드글렌굴드글렌굴드글렌굴드글렌굴드글렌굴드글렌굴드글렌굴드글렌굴드글렌굴드글렌굴드글렌굴드글렌굴드글렌굴드글렌



 
 
 
 전출처 : 로렌초의시종 > 늦은 감상, 10월 1일 다니엘 하딩, 말러 체임버 오케스트라


역시 잘생겼다.ㅋㅋ

 다니엘 하딩이라는 젊은 지휘자의 이름을 들은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아마 작년 여름에 음악애호가로 유명한 박종호 씨의 책에서 처음 이름을 접했던 것 같고, 그 뒤로는 여기저기서 이름을 들었는데 잘 기억나지는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건 그의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는 별 느낌이 없었고, 점점 그에 대해 자세히 알아갈수록 그라는 사람에 대한 흥미가 깊어졌다는 것이다. 영국에서 태어나 고등학교 시절부터 현재의 베를린 필 음악감독인 사이먼 래틀 경의 주목을 받았고, 이후에는 그 당시 베를린 필 음악감독이었던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지원을 받으며, 사상 최연소로 베를린 필의 정기 연주회를 지휘했다는 그의 이력은 충분히 대단하다고 할 만 했다. 물론 예술에 있어서 '경력(經歷)'이란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나 역시 적지 않은 의문을 던지는 편이지만, 아무리 그래도 역시 이 정도의 배경이라면 그냥 과감하게 무시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젊은 나이에 베를린 필의 전 현 음악감독 모두의 총애를 받고 급기야는 아바도가 몸소 창단한 말러 체임버 오케스트라의 음악감독 자리를 물려받았다는 것은 그가 단순히 운 좋은 반짝스타는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기에 크게 부족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단순히 언론이나 평단의 극찬을 통한 홍보가 아니라 앞선 선배들의 추천에 의해 등장한 신예(新銳)는 대부분 기대를 무너뜨리진 않는다. 정명훈이 거장(巨匠) 줄리니의 인도로 피아니스트에서 지휘자의 길을 택하게 되었듯이. 더구나 정명훈이나 하딩은 전적으로 그들의 능력에 의해 선진(先進)들의 주목을 받았다. 그들의 경력을 단순히 불신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그는 잘생기기까지 했다!

 사실 말러 체임버 오케스트라나 그 음악감독인 다니엘 하딩이나 한국에서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다. 차마 무명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겠지만, 그나마 공연을 앞두고 부지런히 그에 대해서 알렸던 신문 기사들이 없었다면 확실히 그의 국제적인 명망에 비해서 한국에서의 지명도는 현격하게 낮았을 것이다. 그래도 역시 베를린 필 음악감독들의 보증이 헛된 것은 아니었는지, 좌석은 거의 매진 수준이었다. 공연 시간은 예술의 전당에서 열리는 여느 악단의 공연과는 달리 오후 4시였다. 대개는 저녁 먹고 공연을 관람하도록 8시에 시작하는 것이 거의 관례이다시피 한데, 약간 이례적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해가 높게 떠있는 시간에 예술의 전당에 찾아가는 기분이 묘했다. 좌석은 합창석 가운데 블록의 세 번째 줄 가운데 좌석이었다. 간단히 말하면 그의 잘 생긴 얼굴을 가장 정면에서 볼 수 있는 좌석이었다. 크레디아에서 이 공연의 티켓이 오픈되자마자 예매한 좌석이었다. 합창석은 소리도 의외로 선명하게 잘 들리고, 지휘자에게 집중하기가 쉽고, 저렴하기까지 해서 요즘엔 자주 이용하는 편이다. 더구나 실력에 뒤지지 않는 수려한 외모로 유명한 그의 첫 공연에서 합창석을 굳이 마다할 이유가 내게는 없었다. 그런 까닭에 같이 갈 사람도 기약 없이 두 장을 예매했다가, 동행자를 못 구해서 먼 지방에 사는 친구를 닦달해서 같이 관람하게 되었다. 이 젊은 지휘자와 역시 젊은 악단의 첫 내한 공연에서 어떤 감동을 받을 수 있을지 기대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프로그램은 모차르트-슈만-브람스였다. 언뜻 보수적으로 보이는 정통 레퍼토리로 무장한 듯 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꼭 그런 것도 아니었다. 나름대로 자주 연주되는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을 제외한다면 모차르트의 작품은 초기 교향곡인 6번(K. 43)이었고, 브람스의 교향곡은 통상적으로 주로 연주되는 1번이나 4번이 아니라, 2번이었다. 박수 속에 하딩이 입장하고, 모차르트의 교향곡이 울려 퍼졌다. 보통 공연의 첫 곡으로 연주되고는 하는 오페라 서곡이 아니라, 간소하나마 4악장 형식을 완비하고 있는 교향곡을 선택한 그의 안목이 이미 맘에 든 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주곡은 역시나 생소해서 인터넷 클래식 동호회를 통해서 한두번 들었지만, 역시 고풍스러운 칼 뵘의 연주로는 그저 이 곡이 어떤 곡이구나 싶었을 뿐, 하딩의 연주에 대한 상상을 자극할 수는 없었다.

 각설하고 하딩의 연주는 정말이지 산뜻했다. 젊은 지휘자와 젊은 연주자의 실내악단이 빚어낸 젊은 모차르트의 교향곡은 더할 나위 없이 일사불란하게 돌아가면서도 동시에, 각자의 개성이 충실하게 빛나는 자유분방한 연주였다. 말 그대로 어떤 카리스마에 의한 연주가 아니라, 지휘자로부터 팀파니 연주자에 이르기까지 서로가 음악에 대한 깊은 애정을 맺어진 우정의 연주 같다고나 할까. 통상 41곡으로 알려진 모차르트의 교향곡은 어느 것 하나 버릴 수가 없다는 누군가의 말을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모차르트의 음악적 깊이가 비단 장중함으로만 구현되는 것이 아니라, 화사함과 민활함으로도 얼마든지 펼쳐질 수 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었다. 1악장부터 4악장에 이르기까지 신속하되 경박하지 않았고, 침착하되 지루하지 않았다. 어쩌면, '젊음'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이 악곡에 대해서 그리고 이 악곡에 대한 그의 지휘와 그들의 연주를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곡이 끝나는 순간 나는 이미 그들의 숭배자가 되었다.

 두 번째 곡은 얼마 전부터 주목받고 있는 역시 젊은 피아노 연주자 라르스 포그트와의 슈만 피아노 협주곡이었다. 사실 슈만의 피아노 협주곡은 이미 들어본 적이 있지만 좀처럼 와닿지가 않는 곡이었다. 어디까지나 슈만 자신만이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느낌이랄까. 절절한 듯 하지만 그 절절함이 너무도 깊어서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산지사방에 퍼져나가는 가운데, 나는 그 중에 어느 감정을 붙잡아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그저 우두망찰 서 있는 듯한 망연함을 느꼈다. 물론 나 자신도 내면에서 이런 감정을 느낄 때가 적지 않다. 이룰 수 없어서 더욱 절실하고, 그래서 그 집요한 감정이 결국은 사방으로 흩어져버리는, 집착의 결과로 오히려 집착할 수 없는 결과를 낳게 된다. 어쩌면 슈만은 일생 동안 이런 감정에 사로잡혔던 청춘이었는지도 모른다. 나이를 먹으면 더 이상 집착하지 않고, 그런 까닭에 감정은 차분해져서 오히려 무엇인가에 집착해버리는 결과를 낳게 되니까. 그런 까닭에 하딩과 말러 체임버 그리고 포그트라는 같은 또래의 청년들의 연주가 더욱 기대되었다.

 그렇지만, 솔직하게 내 생각을 이야기하자면 약간은 내 기대에 미치지 못한 연주였다고 생각한다. 기본적으로 지휘자와 악단, 독주자의 조화는 훌륭했지만, 아쉬움이 남는 연주였다. 그들의 슈만은 슈만이 말하고자 하는 곡의 느낌을 살려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느낌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수반되는 기백(氣魄)은 아무래도 부족했다. 곡이 담고 있는 순간순간의 감정의 변화에 최대한 예민하게 반응하는 그들의 노력에 설득력을 줄 수 있는 힘이 실려 있지 않았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물론 내가 합창석에 앉아있었던 탓에 독주자의 피아노 소리를 듣는데 다소 어려움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전체적으로 곡의 감성이 풍부한 정조(情調)에 상응하는 설득력을 주기에는 역부족이라는 느낌을 받는 순간이 적지는 않았다. 스코어에 담겨 있는바 작곡가의 복잡미묘한 정서를 표현하는 데는 훌륭했지만, 재현에 신경을 쓰느라, 그 재현의 맥락 자체에 대해서는 미처 신경을 쓰지 못한 것 같다. 슈만의 자유분방하게 펼쳐지는 선율은 단순한 예민함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변화의 밑바닥에 있는 때로는 유약하지만 때로는 광폭할 정도의 힘에 있는 것이 아닐까. 때문에 예술적 열정을 주체 못하는 거침없는 느낌을 주여야 할 슈만의 선율이 가꿈은 그저 아침밥상이 맘에 안 들어서 짜증을 내는 어린애의 종잡을 수 없는 투정 정도로 비치는 듯한 아슬아슬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단순히 젊은이들이라는 이유로 ‘막 나가는 듯한’ 힘과 속력을 과시하지 않겠다는 그들의 절제와 의지가 느껴지기도 했지만 역시 섬세함보다는 대범함이 아쉬운 순간이었다.



 그런데, 정작 터지지 못한 정열은 그 이후에 준비되어 있었다. 일부러 그랬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슈만의 협주곡이 끝나고 커튼콜이 거듭되는 가운데 악장, 첼로 수석, 비올라 수석이 포그트의 피아노 중심으로 모여들고, 하딩은 포그트 뒤에 섰다. 그리고 브람스의 현악 4중주 4악장이 말 그대로 ‘쏟아져 내렸다.’ 애초에 작곡자인 브람스가 의도한 대로 집시 유랑 악단이 유럽의 어느 시골 장터에서 펼쳐내는 듯한 과감하고 거침없는 연주가 작열했다. 그들이 얼마나 젊은지 얼마나 기운이 넘치는지 얼마나 섬세한지를 한순간에 압축해서 보여주었다. 서로 뒤쳐질 세라 거침없이 질주하면서도 서로와 긴밀하게 결합되어 하나의 선율로서 달려 나가는 연주에 그야말로 넋이 나갔다. ‘지금 이 순간이 어떠한 순간인가?, 바로 축제의 순간이다’라고 그들이 우리에게 외치는 기분이었다. 더욱이 놀라운 것은 포그트의 뒤에서 페이지 터너(Page Turner)역할을 맡은 다니엘 하딩이었다. 잘생긴 얼굴에 똑똑해보이는 안경을 끼고 나와서 때로는 팔짱을 끼고 네 사람의 연주를 감상하고, 순간순간마다 포그트의 악보를 넘겨주는 모습을 합창석에서 바라보면서 그저 감탄할 뿐이었다. 지금 내 앞에서 펼쳐지는 연주, 보여지는 광경 모두가 그동안 상상할 수 없는 것뿐이었으니. 같은 또래의 연주자들과의 음악을 향한 열정을 지휘자로서의 권위보다 우선한다는 사실을 그는 무언의 공연자로서 우리에게 알려주었다. 얼마나 사랑스러운 모습이었는지. 브람스가 끝나고 포그트는 마지막으로 모차르트의 피아노 소나타 11번 3악장(터키 행진곡)을 연주해주었다. 마치 미국 어느 선술집의 재즈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듯한 경묘(輕妙)한 터치와 신명나는 선율이 돋보이는 재치만점의 연주였다. 아무래도 슈만의 얕은 아쉬움을 매워주기에는 너무도 훌륭한 앙코르였다.



 인터미션 후에 이어진 공연은 브람스의 교향곡 2번이었다. 통상적으로 자주 연주되지는 않지만, 라이브로는 2004년에 리카르도 무티와 라 스칼라 오케스트라의 공연을 통해 들었고, 이미 위대한 거장 카를로스 클라이버의 DVD를 통해서 여러 번 들어 본 곡이었다. 처음에는 역시 1번이나 4번에 비하면 낯선 느낌을 어찌할 수 없었는데, 들으면 들을수록 맘에 드는 곡이었다. 역시 빈 필과 클라이버의 연주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지만, 과연 다니엘 하딩과 이 악단의 공연은 어떠할지 더욱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전통과 대규모 편성의 빈 필, 클라이버와 신생의 소규모 편성의 말러 체임버와 하딩은 과연 어디가 어떻게 다를까.

 하지만 역시 나로서는 우열을 가리기에는 내가 부족하다는 사실만을 절감할 뿐이었다.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건 라이브로 들은 하딩의 연주가 결코 부족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1악장의 소박함과 화려함의 선명한 대비부터 아늑한 목가적 분위기에서 갑자기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2악장의 비애감, 화사하고 아기자기한 현과 관의 조화가 돋보이는 3악장, 웅장한 선율을 안고서 거침없이 질주하는 4악장까지, 그는 지금 이 시대가 원하는 브람스를 들려주었다고 말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부담 없고 명쾌하면서도 곡의 본질인 소박함과 장중함과 조화를 이루는 연주였다. 무엇보다 실내악단 규모의 소편성으로 브람스의 교향곡을 연주한다는 것이 약간은 경박하다거나, 역부족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딩의 지휘는악단에 대한 확고한 장악력를 통해 소수정예의 일사분란한 합주력을 끌어냄으로써 그러한 공백의 우려를 무리 없이 뛰어넘을 수 있었다. 간단히 정의하면 역시 그는 중력의 법칙을 무시하고 무겁게 질주하는 브람스의 경지를 보여주었다. 그것이 보편타당한 브람스의 이상인지에 대해서는 아직 짧은 견식으로 확신할 수는 없지만, 그는 앞으로 클래식 음악이 나아가야 할 중요한 열쇠에 가까이 다가간 사람임이 분명했다.

 브람스는 끝났어도, 아직 '축제(祝祭)'는 끝나지 않았다. 당장 나부터가 그러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었다. 기립해서 박수를 치고 환호성을 지를 수밖에. 인심 후한 젊은 거장은 먼저 드보르작의 슬라브 무곡 4번을 연주해주었다. 앞선 곡에 이어서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5번 같은 경쾌한 곡을 들려주리라 생각했던 기대는 빗나갔지만, 역시 그의 선택은 탁월했다. 앞선 브람스의 화사하기 그지없는 목가적 풍경을 바라보면서 들떴던 마음이 한결 차분해지는 느낌이었다. 말러 체임버의 목관 악기 주자들의 역량이 십분 발휘된 우울한 듯 차분한 선율은, 무곡의 정취는 격렬함이나 단정함이라는 표면의 율동만이 아니라, 무한할 듯한 선율의 순환(循環) 그 자체를 즐기는 속에서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즐겁게 깨우쳐 주었다. 
 


 하지만 결정타는 이것이 아니었다. 정말 아니었다. 하딩은 내 마음을 읽었고, 내 꿈을 이루어주었다. 그는 모차르트의 교향곡 41번 주피터의 4악장을 내게 선사해주었다. 그 순간만큼 그의 잘 생긴 얼굴이 더욱 빛나 보일 때가 없었다. 이 곡은 그와 말러 체임버의 이번 아시아 순회 공연 중에서 일본에서만 모차르트 후기 3대 교향곡을 연주하는 프로그램에 들어있었다. 그렇다. 사실 내가 듣고 싶은 것은 슈만이라던가, 브람스 따위가 아니었다. 나는 정말이지 그의 모차르트가 듣고 싶었다. 그 연주가 누구에게 어떤 평가를 듣던 그건 내게 중요하지 않았다. 나는 어디까지나 젊은 지휘자와 젊은 연주자의 생기가 흘러 넘치고, 명쾌함으로 눈이 부시는 연주를 듣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감히 말하건대 음악이 도달할 수 있는 절대적인 아름다움의 질서를 구현한 '주피터', 그중에서도 4악장을 듣고 싶었다. 이런 바람은 그의 모차르트 6번을 듣고서 가라앉기는 커녕 오히려 더욱 커져버리기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들었다. 그의 손이 올라가고 주피터 4악장의 선율이 울려 퍼지는 순간, 난 이미 제 정신이 아니었고, 곡이 끝나고서야 내 넋은 다시 예술의 전당 합창석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4악장의 피날레를 앞두고 여기저기서 난무하듯 펼쳐지던 다양한 선율들이, 그야말로 꿰맨 곳 없는 천녀의 옷자락처럼 눈 깜짝할 새에 다듬어지면서 찬양의 피날레로 화하는 순간에 감탄할 수 있었다. 그의 모차르트는 화사하면서도 나약하지 않았고, 질주하면서도 광폭하지 않았다. 관은 울려 퍼지되 요란하지 않았고, 현은 겸손하되 침묵하지 않았다. 이제는 그저 기립박수에 환호성 밖에 나는 그에게 보답할 것이 없었다. 다른 무엇도 줄 것이 없었으니까. 그는 이런 관객들의 정성에 감동했는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쥬피터의 3악장을 선물해주었다. 졸지에 서울에서 동경에 갈 목적을 절반이나 이뤄버린 셈이다. 정말이지 피아노 소나타, 사중주, 협주곡, 교향곡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들려주었고, 모든 것에 만족할 수 있었던 연주회였다. 덕분에 다시금 내 삶에는 윤기가 돌게 되었다. 그것도 순식간에. Thank you, maestro Harding.



 
 
 
 전출처 : 로쟈 > 쇼스타코비치의 두 얼굴

언젠가 모차르트 탄생 250주년인 올해가 소비에트 러시아의 최대 작곡가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탄생 100주년이기도 하다는 소개 기사를 옮겨온 적이 있는데, 며칠전 교수신문(06. 05. 04)에 '쇼스타코비치 탄생 100주년에 부쳐'라는 부제를 단 음악비평 기사가 게재되었기에 이 또한 옮겨온다. 그의 생일은 9월에 있으므로 가을에야 보다 성대한 기념행사들이 개최될 듯하지만, 미리 그의 음악세계를 조명하는 기사를 가끔씩 읽어보기로 한다. 클래식 음악에는 문외한에 가까운지라 대개는 다른 이들의 의견을 옮여오는 식이 될 것이다. 이번 기사는 허영한 한예종 교수가 기고한 것으로 '冷戰은 그의 음악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을까'가 그 타이틀이다.

-레닌과 스탈린, 흐루시초프의 소련을 대표하는 작곡가인 드미트리히(*'드미트리'가 맞다) 쇼스타코비치(1906~1975)는 격변하는 20세기의 세계사와 소련의 역사가 그대로 반영된 흥미로운 주인공이다. 조연급이면 피할 수 있었던 비난의 초점이 됐고 그를 사이에 둔 소련과 서방세계의 지속적인 갈등은 지금까지도 많은 음악학자들의 연구 대상이 되고 있다.

-논란의 핵심은 쇼스타코비치가 진정으로 소련 공산당의 충실한 당원이었는지 아니면 겉으로만 그렇게 행세를 한 것인지의 문제다. 절묘하게도 이 문제에 대해서 작곡가 자신은 아무런 답을 남기지 않았다. 공식석상에서 자아비판을 하면서도,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애국지사의 모습을 보이면서도 그 이면에는 또 다른, 어쩌면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숨기고 있는 듯한 수많은 암시를 흘리고 있었다.

-교향곡 1번(1925)으로 약관 스무 살의 나이에 세계적으로 알려지면서 소련이 최고로 아끼고 자랑스럽게 여긴 쇼스타코비치에게 위기가 오기 시작한 건 그의 오페라 <맥베스 부인> 때문이었다(*얼마전 이 오페라의 원작인 레스코프의 <므첸스크군의 멕베스 부인>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1934년에 초연됐던 이 오페라에 대한 반응은 그야말로 열광적이었다.

 

 

 

-그러나 2년이 지나 다시 무대에 오른 <맥베스 부인>을 관람하러 온 스탈린의 말 한마디에 그토록 사랑받던 오페라가 순식간에 비판의 초점이 됐다. 1936년부터 시작된 대숙청의 시대가 온 것이다. 이 위기를 넘기게 한 작품이 바로 지금도 가장 자주 연주되는 교향곡 제5번이다. 이 교향곡이 1937년에 초연된 그 날 밤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그 정도로 이 교향곡이 감격적이었다는 것이다. 다시 한번 소련 최고의 작곡가로 복권된 그는 1938년 신문과 인터뷰에서 “교향곡 5번이 정당한 비판에 대한 소비에트 예술가의 실질적이고 창조적인 응답이라고들 하니 매우 기쁘다”는 애매한 태도를 취한다. 잘못을 반성했다고 보기에는 충분치 못한 답변이었다.

 

 

 

-교향곡 5번에 ‘정당한 비판에 대한 응답’이라는 말이 수식어처럼 따라 다닌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마지막 악장 피날레는 다소 급격하다고 할 정도로 분위기가 급전되면서 활발하고 밝은 분위기로 작품을 마무리한다. 일부 학자들은 이러한 분위기의 급변과 체제 순응적인 쇼스타코비치를 연결지으려한다. 긍정주의적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일부러 그러한 피날레를 만들어 넣어 정부의 비난을 피하려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 소련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라는 다소 인위적인 미학적 잣대를 내세워 서방세계의 음악계가 추구하던 모더니즘을 비판했다. 쇼스타코비치의 오페라는 바로 그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음악으로 비판을 받았고 그보다 다소 쉬운 음악적 내용을 지닌 교향곡 5번은 사회주의 리얼리즘을 실현한 작품으로 보았던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음악은 소리라는 추상적 매체를 사용하는 장르여서 가사를 사용하지 않는 한 그 구체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가사가 없는 순수 기악음악의 경우 아무리 구체적 내용이 명시된 표제음악이라 하더라도 그 제목과 달리 감상되고 해석되어질 여백이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작곡가의 직접 언급이 중요해진다. 다시 말해서 작곡가가 직접 이 곡은 강이다, 또는 이 선율은 나무다, 라고 말하지 않는 한 작곡가가 진정으로 담으려고 한 내용을 짐작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해석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쇼스타코비치가 교향곡 5번에 대한 인터뷰 내용을 보면 그 곡에 대한 사람들의 해석과 자신의 의견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의도가 분명하다. 말하자면 “당신들이 이 곡이 이러하다고 하니 나는 기쁘다” 정도에서 멈춘다. 일반적으로 작곡가들은 자신의 작품이 하나의 내용으로만 이해되기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 쇼스타코비치의 이러한 태도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의 마지막 교향곡인 15번은 천박하기까지한 로시니의 <윌리엄 텔 서곡>의 선율이 등장하는가하면 엄숙한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에 사용된 ‘운명’ 모티브까지 나온다. 사람들은 이 희한한 조합에서 의미를 찾느라 부산했지만 정작 작곡가는 이 곡의 특별한 내용의 존재를 부인했고 단순히 ‘장난감 가게’와 같은 분위기라는 설명만 제공했다. 또 한번 그의 알다가도 모를 작품 해설(?)에 모두들 어리둥절했다.

-이번에는 다소 다른 예를 들어보자. 대표적인 전쟁 교향곡인 교향곡 7번은 흥미있는 일화와 함께 순수 기악음악으로도 일정한 구체적 내용을 담을 수 있는 예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의 나치군이 소련을 침략하자 쇼스타코비치는 곧바로 군에 지원하지만 시력이 좋지 않아 레닌그라드 음악원의 지붕을 지키는 소방부대에 편입된다. 소방 모자를 쓰고 지붕을 지키는 그의 모습을 찍은 사진은 소련의 거의 모든 신문에 실렸고 서방 언론에서도 군인으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변신한 작곡가의 모습을 흥미롭게 다뤘다. 같은 해 8월 레닌그라드가 독일군에 의해 포위되기 시작했다. 많은 사람이 피난을 떠났지만 쇼스타코비치는 남아서 그의 교향곡 7번의 일부를 완성한 후 라디오 방송을 통해 직접 이 사실을 알리기도 했다. 사태가 위태로워지자 당 지도부는 레닌그라드를 떠나라는 명령을 내렸고 모스크바에 도착한 그는 이번에는 전쟁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교향곡 7번에 대해서 작곡자는 긴 내용의 줄거리를 직접 밝히고 있어 그 내용의 해석에 있어 논란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고통받는 레닌그라드 도시와 소련 동포를 묘사하는 1악장으로 시작해 전쟁에서 승리하는 4악장으로 끝나는 교향곡이라는 것이 작곡자의 변이었다. 비록 가사는 없지만 작곡자의 설명이 수긍이 가는 음악적 분위기를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쇼스타코비치는 생애 말년에 이 교향곡이 레닌그라드가 포위되기 전에 이미 구상됐고 성경의 94번 시편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어쨌든 이 교향곡에서 전쟁 분위기를 피하기는 어렵다. 행진곡 풍의 리듬과 북소리는 전쟁을 암시하기에 충분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쇼스타코비치를 철저하게 체제 순응적인 작곡가로 보기 어려운 부분이 있기에 그처럼 극적으로 작곡된 교향곡이라 하더라도 또 다른 측면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스탈린 사후, 쇼스타코비치가 선보인 첫 작품이 프로그램이 없는 교향곡 10번이라는 것은 의미가 있다. 이 곡을 작곡할 무렵 쇼스타코비치는 자신의 학생이었던 24살의 피아노연주자 엘미라 나지로바와 은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그녀의 이름 ‘엘미라’로부터 이끌어낸 선율 동기(미-라-미-레-라)와 작곡자 자신의 이름으로부터 나온 선율 동기(D-Es-C-H/우리말 음이름으로 옮기면 레-미b-도-시)를 서로 얽혀 놓고 있다. 교향곡 10번은 다시 한번 비평가들 사이에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정치적 상황이 변해가고 있음을 감지한 쇼스타코비치는 평소와는 달리 강력한 어조로 자신의 주장을 폈다. 그러나 결국 1954년 4월 초에 열린 작곡가 연맹 대회에서 이 불필요한 논쟁의 종지부를 찍듯이 작곡가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는 연설을 하며 “이 작품에서 나는 인간의 감정과 열정을 전달하고 싶었다”고 끝맺는다. 이 교향곡은 어떤 정치적 해석도 어려워 보인다. 극히 사적인 쇼스타코비치만이 존재하며 이 점을 그는 반성해야만 했다.

-그의 정치적 정체성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그의 교향곡을 해석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가 진정으로 체제 순응 작곡가였다면 그의 교향곡은 철저하게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 해석되고 그렇지 않다면 부당한 정부의 압력에 대항한 서구식으로 위대한 작곡가가 되기 때문이다. 20세기 서방세계의 음악관은 철저하게 미학적 자율성을 중시했기에 미학적으로 사회주의 리얼리즘과는 상반되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이런 논란의 배경은 쇼스타코비치의 진정성과는 다소 거리가 먼 당시로서는, 또 어쩌면 지금까지도 지속되는 냉전 시대적 대결 구조다. 쇼스타코비치를 소련의 작곡가로 보려는 세력과 그를 서방 세계의 작곡가로 보려는 세력 사이에 벌어지고 있는 암투가 지금도 진행 중이라는 생각이다. 분명한 건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에는 양면성이 존재한다는 것. 그 양면성 중 한 면을 강조하며 자기편으로 유도하려는 노력은 오히려 그의 음악을 이해하는 데에 지장을 줄 수도 있다. 그 양면을 모두 진정한 쇼스타코비치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06. 05. 08.

 

 

 

 

P.S. 한번쯤 읽어보고 싶은 게 쇼스타코비치의 평전인데, 국내에는 아직 솔로몬 볼코프의 <증언>(이론과실천, 2001)밖에 나와 있는 책이 없다(진의성에 대해서 많은 의심을 받고 있는 책이다). 유력한 평전(들)이 조만간 출간되기를 기대한다.



 
 
 
 전출처 : mannerist > 이 남자의 조용한 방한.

모 신문에서 예프게니 키신의 뒤를 이어 줄줄이 한국에 오는 피아니스트를 소개한 모양이더라. 낡은구두님 페이퍼를 읽어보니깐(http://www.aladin.co.kr/blog/mypaper/867495). 근데 역시나. 이 남자를 빠뜨린 거 보니깐 평소에 최근 서양고전음악 흐름에 지대한 관심 있는 사람이 친 기사같진 않다.

오늘 모처 배너를 별 생각없이 클릭했다가 깜짝 놀랐다. 저 남자의 내한공연이 다다음주에 잡혀 있다니. 그것도 최근 발매한 음반과 거의 동일한 레파토리로 말이다. 예전에도 한번 소개한 적 있지 싶은데(http://www.aladin.co.kr/blog/mypaper/769798), 안그래도 이 양반의 데뷔 음반을 듣고 반해버린 차라 언제 한번 한국 오면 가봐야지... 생각하긴 했지만 이리 빨리 닥칠 줄이야. 뭐 서울 간 지도 이삼주쯤 됐구, 타이밍 맞으니 표를 끊어볼까. 하던 순간 날짜를 다시 한 번 확인하니... 글렀다. 애인의 생일 이틀 전이자, 손잡고 다니기로 한 지 100일 하루 전이다. ㅠ_ㅠ

(이 피아니스트의 데뷔 음반. 호로비츠에게 바침. 이 아니라 호로비츠와 맞짱. 정도가 정확한 표현일게다. 다섯 트랙 모두 훌륭하지만 두 번째 트랙, 카르멘 환상곡 편곡 버젼 한곡만으로도 이 앨범의 값어치는 충분하다)

 

 

 

 

 

 

"내 테크닉은 완벽하다. 내가 소화하지 못하는 곡이란 없다."라던 지독한 자의식과 거만이 허언이 아님을 확인할 기회가 조금 멀어져 아쉽다. 차이콥스키의 사계(아쉬케나지의 연주로 처음 듣고 반했고, 플레테뇨프의 연주를 맘에 들어하는 매너다), 스트라빈스키의 페트루슈카(폴리니의 인간 같지 않은 연주에 열광하는 바다)와 리스트의 메피스토 왈츠, 레파토리도 최상인데 말이다. 휴... 아쉬운 건 아쉬운대로 돌리고... 혹시 5월 14일 시간과 이만 이천원의 여유가 있으신 분들, 왠만하면 가보시길 강력히 권한다. 매너 생각엔 다음번 그가 한국에 올 때, 저 표값은 가볍게 두 배 정도 뛰지 싶다.

 

넋두리_하나_그나저나. 아르헤리치 여사 물 건너간 건 그렇다 치고, 아믈랭 오는거야 마는거야? -_-a

 

 

 

넋두리_둘_저 다섯장의 음반 중, 두 장은 매너가 '어둠의 통로'를 통해 입수해서 들었고, 한 장은 샘플 듣고 반해버려 바로 구입했으며, 나머지 두 장은 아믈랭에 열광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스고이를 외치고 있는 음반이다. 매너가 가장 구하고 싶은 건, 어느 걸까.



 
 
 
 전출처 : 이리스 > “키신 다음엔 우리가 간다”

“키신 다음엔 우리가 간다”
[조선일보 2006-04-29 03:05]    

러 피아니스트 2명 내한공연

[조선일보 김성현기자]

한용운의 ‘님의 침묵’처럼 러시아의 피아니스트 예프게니 키신은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을 남기고 떠났다. 지난 8일 첫 내한 리사이틀에서 10곡의 앙코르 연주, 밤 11시15분을 넘겨 끝난 연주회, 자정을 훌쩍 넘겨버린 팬 사인회 등 갖가지 진기록도 덧붙였다.

키신의 ‘후폭풍’을 러시아의 또다른 피아니스트들이 이어간다. 첫번째 후보는 1994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우승자인 니콜라이 루간스키(34). 피아노 교습을 받기도 전인 다섯 살 때, 순전히 귀로 익힌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를 이웃 집에서 연주했다는 에피소드가 전설처럼 남아있다. 콩쿠르 우승 후 쇼팽의 연습곡과 전주곡, 라흐마니노프의 전주곡, 베토벤의 소나타를 차근차근 음반으로 녹음하고 있다.

“청중들 앞에서 연주하기 위해 콩쿠르에 나간다는 말을 절대 믿지 않는다. 상을 타지도 않을 거면서 왜 콩쿠르에 나가는가?”라고 반문하고, “옛 소련 시절, 러시아 인은 누구나 베토벤과 브람스를 알았다. 자본주의가 도입된 이후에는 돈에만 관심을


쏟는다”고 단정할 정도로 직선적이다. 슬라브식 솔직담백일까.

베토벤 소나타 16번, 쇼팽 전주곡 작품 45번과 소나타 3번 등 자신의 녹음 궤적을 연주회에서 그대로 보여준다. 13일 오후8시 LG아트센터.

그 나흘 뒤에는 1985년 쇼팽 콩쿠르 우승자였던 스타니슬라브 부닌(40)이 바통을 이어받는다. 지난해 임동민·동혁 형제가 3위 공동 입상하며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그 콩쿠르. 부닌은 당시 역대 최연소 우승자로 등극했다.

그가 올해 탄생 250주년인 ‘모차르트의 해’를 맞아 5월 17일 오후8시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바이에른 쳄버와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23번을 협연한다. 그동안 독주회는 몇 차례 있었지만, 부닌이 한국에서 오케스트라와 협연하는 건 이번이 처음. 바이에른 쳄버는 ‘코지 판 투테’ 서곡과 교향곡 41번 ‘주피터’ 등 모차르트의 곡으로만 연주회를 꾸민다.

(김성현기자 [ danpa.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