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도에 와 있으니 왜 이리 책읽기에 게을러지는 지. 살림이라는 게 이렇게 힘든 것인지 처음 알았다. 토요일에 지인들이 송도로 놀러와서 서울에 갔다가 부랴부랴 송도로 다시 왔고 덕분에 일요일을 송도에 있어야 했다. 이왕 있게 된 거, 온종일 늘어지게 있으면서 책이나 읽자.. 가 나의 애초 계획이었음을...

 

느즈막히 일어나긴 했다. 송도의 숙소는 오피스텔이라 창문으로부터 들어오는 햇살이 내 얼굴에 바로 꽂힌다. 이불을 얼굴까지 끌어당기고 버틸 때까지 버티다가 일어났다. 아침을 차려 먹고 설겆이를 하고... 아 졸려. 하고는 또 누웠다. 그렇게 오후까지 자고. 꾸역꾸역 일어나 샤워를 하고 옷을 주섬주섬 챙긴다. 먹을 게 없다! ㅜㅜ 어쨌든 오늘은 마트에 가야 한다는 사명감. 나가면서 아.. 빨래를 돌리고 가야지... 세탁기에 빨래를 휙휙 넣고 세제를 뿌린 후 예약 기능을 작동시키고 나간다.

 

마트 가는 길목은 왜 이리 막히나. 사람들이 다 이 시간에 장을 보나... 15분 걸리면 가는 곳을 30분 넘게 걸려서 들어갔더니 안에서도 주차 전쟁. 겨우 저 끄트머리에 주차시키고 마트로 갔다. 아. 배고프다. 아침 먹고 아직 먹은 게 없다. 국수집에 가서 따뜻한 국수 한 그릇 먹어본다. 속이 좀 풀리는 듯. 이제 본격적인 시장보기.

 

아직도 시장보는 데 익숙하지 않은 지 조금만 돌면 피곤하다. 애초에 뭘 사는 거에 그닥 취미가 없는 나로서는 이걸 고민해서 사는 게 여간 고역이 아니다. 사실, 나갈 때는 소고기 스테이크를 사와야 겠다 싶었다. 스테이크에 와인으로 일요일 저녁 기분을 낼까... 근데 헉. 한우는 넘 비쌌다..! 세상에 어째 저런 가격이. 몇 번을 저울에 올렸다 내렸다 요청하다가 안 살래요..하며 눈물을 머금고 돌아서고... 결국 삼겹살 400g에 만족하기로. (가엾게도, 비연...)

 

암튼 이래저래 해서 장 다 보고 집에 오니 벌써 저녁 때였다. 하루 왜 이리 빨리 가. 투덜거리면서 냉장고에 다 밀어넣고는 밥하고 삼겹살 굽기 시작. 그동안 빨래는 거의 다 돌아가고 있었다. 자.. 그럼 삼겹살에라도 와인을 먹어볼까 하고 한달은 구석에 있었을 법한 와인을 꺼냈다. 뜨뜻.. 흠... 방 온도가 넘 높았나. 뭐 어쩄든, 와인따개를 샤샤샥 넣고 자 이제 빼보자... 하고 빼는데 뭐가 뚜욱.. 흠? 순간 어떤 상황인 지 인지가 불가.. 그리고는 들어보니 와인 코르크마개는 그대로인데 나의 와인따개의 스크루 부분이 뚝 부러져 박혀 있는 게 아닌가. 허걱.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았지만,... 다들 아시다시피 이런 경우 방법은 없는. 와인병을 부셔버리지 않는 한... 톱으로 자를 수도 없고...결국 와인따개 버리고 와인도 버리고. 에잇. 냉장고에 있던 비장의 맥주로 대신한다. 기린맥주... 그래 맛나네. 근데 와인따개 또 사야 하나? 우잉...

 

그러고 나서 뒤를 돌아보니 널어야 할 빨래와 가득 쌓인 설겆이통. 맥주 마시며 일드 한편 (지난 분기꺼, 닥터 X 시즌 4)  보고 이것들을 다 처리했다. 벌써 9시... 피곤.... 완전 피곤... 드러누워 책을 펼친다. 얇디 얇은 파트릭 모디아노의 책을 아직 읽고 있다. 오늘은 이것만큼은 다 읽을 거야 라며 부득부득 들고 읽다가 몇 번을 얼굴에 떨어뜨리고... 아.. 안되겠어. 내일 다 읽어야지 하며 접고 잤다. 11시. 서울집에서는 12시 넘어 자도 끄덕도 없었는데.. 그게 다 내가 살림을 하지 않은 덕분이었음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철없는 비연.

 

요즘은 일하면서 엄마에 주부 역할도 하는 여성들을 진심으로 다르게 보고 있다. 이게 살림이 끝도 없다. 청소에 빨래에 설겆이에 상차리기에 심지어 장보기에 쓰레기버리기에... 결혼해서 남편이랑 이런 일로 매번 싸우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정말, 표도 안나는 반복적인 일이 계속이라 뭔가 여유를 찾기가 쉽지 않다. 여기에 육아가 보태어지면... 헉. 난 아마 결혼해서 아이가 있었으면 회사는 굿바이 굿바이 였으리라. 도저히 못 버텼을 거란 생각이 드는 거지...

 

결론적으로, 지난 주는 책을 한 권도 다 읽지 않고 지나갔다는 거다. 이래선 안되지.. 이래선 안돼... 오늘부터는 근처 스타벅스라도 나가서 읽고 와야겠다. 집에 있으면 계속 청소를 하고 어쩌고 하느라 뭔가 안정이 안된다.

 

그나저나, 와인따개와 와인을 다시 사야 하는데. 근처 홈플에 또 가야 하나. 으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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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1-16 09: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인 따개는 다시 사시고요, 비연님 ㅠㅠ

저 역시 이제부터 엄마가 다시 저랑 생활하게 되시는데, 거기에서 큰 힘을 얻습니다. 그간 빨래하고 설거지하고 하는 일들을 하노라면 하루가 금세 가고 지쳤거든요. 오늘 아침에 엄마가 아침 밥 챙겨주셔서 아아 엄마 좋아 ㅠㅠ 엄마 있는 거 너무 좋아 ㅠㅠ 했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제가 조금 더 편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제 대신 고생을 하고 있는 거겠지요. 대부분의 가사노동에서 벗어나있는 남자들이 그걸 절실히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출근 하기도 전에 퇴근하고 싶었어요, 비연님.
아니, 퇴사하고 싶어요 ㅜㅜㅜ

비연 2017-01-16 09:46   좋아요 0 | URL
락방님.. 정말 백퍼 이백퍼 동감이에요... 누군가의 희생으로 본인의 생활이 평안하게 유지된다는 걸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지금의 저처럼. 새삼 느끼게 되는 거죠. 소공녀처럼 집에 오면 모든 게 다 되어 있던 생활이 사실은 엄마의 지난한 노력 끝에 이루어지는 거라는 걸. 남자들은, 정말, 무조건 군대처럼 전업 가사노동 복무를 시키던가 해서 이걸 느끼게 해야 합니다~!

마지막 말씀에 격하게 동감.. 퇴근.. 아니 퇴사하고 싶네요..ㅜㅜ

책읽는나무 2017-01-16 11: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가끔 집안일을 하다가 하다가 한 번씩 성질이 올라오면 그래도 일과 육아 살림 세 가지를 한꺼번에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참곤 합니다^^
늘 제자리인 살림하는 시간들은 정말 독서의 큰 적이죠.전 그래서 때론 부러 애들 데리고 도서관으로 도망갈때가 있어요.집안에 있으면 계속 아이들 뒤치닥꺼리에 하루가 금방 가거든요ㅜ
요즘은 시간들이 왜그렇게나 아까운지ㅜㅜ
암튼 그래도 살림 잘하시는? 비연님이시라면 조용하고 아늑한 오피스텔에서 책 읽을 맛이 날 것같아요.아이들이 많은 집에선 시끄러워서 도저히ㅜㅜ
암튼 파이팅입니다^^

비연 2017-01-16 12:49   좋아요 1 | URL
책읽는나무님... 정말 저혼자 있어도 욱 올라오는데....ㅜㅜ 살림은 전혀 못하고 이제 겨우 적응단계...
다 치우고 독서하는 비연의 모습을 보여드릴게요 조만간..ㅎㅎㅎ;;;

mira 2017-01-16 1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혼자살면 내가 일으키는 모든 공간에 대한 뒤처리를 내자신이 해야하니까 , 혼자사는게 만만치 않다는것을 잘 몰라요 . 사람들이 하기야 여자들은 결혼하면 그모든일들을 다떠안아야 하니까 ,역시 여자들은 대단해요

비연 2017-01-16 12:50   좋아요 0 | URL
mira님.. 대단하다는 데에 백만번 좋아요를 누르고 싶습니다... 정말 이건 뭐 거의 철인삼종경기 수준이에요ㅜ
혼자서 살아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지를 절감하고 있는 중이라... 오늘은 책을 좀 읽어야 할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