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기에 걸렸다. 난데없이 기침감기. 콜록콜록... 에어컨을 너무 틀었던 걸까.

 

암튼 며칠 참다가 어제 급기야 병원에 갔고 간 김에 수액도 거나하게 맞아주시고 퇴근길에 약국에 들러 약을 탔다.

저녁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저녁 약을 먼저 먹어야겠다 싶어서 약국 안에 있는 정수기로 가서 약을 먹고 기침용 시럽도 들이켰다. 강렬한 플라시보 효과 덕분인지 왠지 기침도 좀 잦아든 것 같고 몸도 좀 거뜬해진 것 같고.

 

룰루랄라... 약속장소로 갔다. 내가 계속 가고 싶어했던 가로수길 '몽리'. 와인바.

오랜만의 와인이야 하면서 끼안티 클라시코 한병을 주문하고 피자와 파스타를 안주로 한다. 아. 끼안티 클라시코를 먹으면 로마가 생각난다. 천지가 다 끼안티 류였는데, 내가 많이 먹었던 게 끼안티 클라시코. 거기선 만원 좀 넘었던 것 같은데 여기선 와인바라 그렇겠지만 81,000원이다. 아마 내가 로마에서 먹었던 거랑 빈티지나 와인의 질이 다른 걸거야 라고 애써 누르며 음미. 안주도 다 맛있다. 여기 괜찮은 걸? 애용해줘야겠어.. 라며 수다 삼매경.

 

근데, 뭔가 허전. 계속 뭔가 허전한거다.

왜 허전하지? 내가 뭘 잊어먹고 있나? 뭐지뭐지? 계속 머리를 맴도는 이 찝찝함... 그리고... 알았다.

 

약을 약국에 두고 왔다!!!!

 

아 정말. 그러니까 정수기에서 약 먹는다고 위에 올려두고는 약만 먹고 바로 뒤돌아 룰루랄라... 나온 거다. 아예 까맣게 잊고는. 철푸덕. 이거 뭐냐. 노환이냐. 치매냐. 건망증이냐. 정신상실이냐... 자책자책. 밤에 기침약 먹고 자야 하는데...으앙. 덕분에 새벽에 깨서 기침하느라 잠을 못 주무시고.... 와인도 먹었겠다 잠도 못잤겠다 퀭한 눈과 거칠한 얼굴로 출근 중... 버스에서 졸다가 뒤로 목이 꺾이는 신공까지 발휘하고.. (목뼈 나가는 줄 알았다. 너무 뒤로 확 젖혀져서.) 아 챙피해...

 

약국이 8시 30분부터 한다길래 일부러 시간 맞춰 갔으나 출근 전.

아니, 자영업자가 왜 시간을 안 맞추고 난리야. 괜히 투덜거리고. 9시 넘어 전화해봤더니 그제야 나온.... 그리고 다행히 나의 약을 잘 보관되어 있었다. 이따 찾으러 가야지.......................... 아. 비연. 도대체 왜 그러냐.

 

(...)

 

그 와중에 어제 밤엔 달밤 운동을 했다. 집앞 중학교가 항시 잠겨 있는데 (세상이 하수상하니) 가끔 밤엔 문을 열어둔다. 아주 멋진 육상트랙이 있는 고로, 어제 열려 있길래 내려가서 트랙을 돌기 시작했다. 사실 난 항상 걷는다. 걷는 게 어디냐. 근데 어제는 보니, 중고등학교 애들이 시험 연습을 하는 건지, 야밤에 몇몇이 나오더라. 그러더니 그들은 요이땅.. 하고는 뛰기 시작했다. 십대들의 저 뜀박질. 내 옆을 쉭쉭 지나가는 그 아이들을 보며 나의 십대가 떠올랐다.

 

나는 체육을 정말 싫어했고, 그 시간이 늘 고역이었다. 구르기도 안되고 평행봉도 안되고 뛰기도 안되고 던지기도 안되고... 악몽같은 체력장이 떠오른다. 그 중 장거리 달리기. 몇 미터였지? 4,000미터였던가 2,000미터였던가. 운동장을 대여섯바퀴 뛰는 거였던 거 같다. 심지어 지구력도 없어서 장거리 달리기 매번 꼴찌. 일등이 나와 나란히 뛰는 게 한두번이 아니고. 장거리 달리기 점수 없으면 체력장 점수를 받을 수가 없어서 정말 죽을 각오로 뛰어야 했다. 으. 생각해보니 정말 기억하기 싫은 십대의 날들이었다.

 

그런데, 어제 밤, 십대 아이들이 뛰는 걸 보니 문득 나도 몇 십년 만에 뛰고 싶어진 거다. 한번 뛰어봐? 하고는 슬슬 뛰어보기 시작했다. 처음엔 제자리걸음 하듯이 뛰어지더니 좀 뛰니까 다리가 앞으로 나간다. 십대 애들 빠르기에는 영 못 미쳐서 그냥 내 페이스대로 뛰었지만, 나중에 한 바퀴 정도는 내 나름의 전력 질주도 가능해졌다.

 

아. 근데, 너무 상쾌했다!

 

이런 기분 백만 년 만이야 이럴 정도로. 마지막으로 한 바퀴 뛰고는 두 팔을 벌려 하늘을 보는데 정말 상쾌하고 통쾌하고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음주 뜀박질이었는데 말이다. 순간, 무라카미 하루키 아저씨 머릿 속에서 뿅. 떠오르고. 이래서 사람들이 뛰는구나. 뛰다 보니 마라톤이란 것도 하게 되고. 그런 거구나.. 를 어제 처음으로 이해하게 되었다.

 

 

이제 계속 걷기는 하되, 한번씩 트랙을 뛰어봐야겠다... 생각한다. 스트레스 해소에 이 만한 게 없는 거라는 걸 알아버렸다. 뭔가 비밀을 알아버린 이 느낌. 좋다.

 

몇 년 뒤에 스페인 산티아고를 가려고, 그게 하루에 20km 씩 걸어야 한다고 해서, 요즘 걷기량을 조금씩 늘리고 있었다. 하루 10km씩은 걷기로. 이제 뛰기도 넣어 봐야겠다. 산티아고가 다 평탄한 길은 아닐테니 폐활량을 좀 늘려놓을 필요가 있겠다 싶기도 하고, 우선, 이 스트레스를 다 버려 버릴 수 있는 좋은 방안이 생겼으니 뛰지 않을 이유가 없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장소] 2016-09-07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재미있게 읽고 가요!^^ 감기는( 몸) 좀 좋아지셨나요?( 응? 감기가 좋아질리..없잖아!)ㅎㅎㅎ

비연 2016-09-07 11:07   좋아요 1 | URL
그장소님..ㅜㅜ 약을 안 먹어서인지 기침이 점점 심해져서 사무실에서 눈총을...ㅜㅜ
얼렁 가서 약 도로 찾아와 입에 밀어넣어야겠어요... 이넘의 부실한 성격 땜에 고생입니다..흑흑.

[그장소] 2016-09-07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얼렁 얼렁 약 투척해쥬세욧~^^
사무실근처에 라도 약국이 있다면 요!
눈총 ㅡ그만 받게요~~

비연 2016-09-07 15:11   좋아요 1 | URL
약국에서 어제 잃어버린 약을 조우하였나이다 ㅎㅎㅎㅎ
먹었더니 좀 낫긴 한데 아직도 약간 콜록콜록... 감기가 심하게 들린 모양이에요..ㅜ

[그장소] 2016-09-07 19:30   좋아요 0 | URL
결국퇴근후 드시는군요! 에고고~ 기침 목 ..감기엔 꼭 목에 손수건을 두르세요 ..기침이 한결나아져요! 밤사이 안녕하자고 ㅡ감기한테 !

비연 2016-09-08 11:16   좋아요 1 | URL
그장소님... 먹으니 좀 낫긴 한데. 어제 모임 갔다가 늦게 귀가해서 완전 피곤하네요..ㅠ 쉬어야 하는데 말이죠.
감기야, 얼렁 떨어져라 하고 있어요. 손수건도 둘러야겠어요. 감사~

[그장소] 2016-09-08 11:20   좋아요 0 | URL
약도 잘 챙겨드세요! 무리 말아야하는데~ ㅎㅎ

비연 2016-09-08 13:14   좋아요 1 | URL
네네~ 오늘은 가서 좀 쉬려구요~^^

[그장소] 2016-09-08 22:55   좋아요 0 | URL
저도 오늘은 문닫고 푹 쉬어야겠어요!^^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