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조카는 나의 유일 조카이고, 2005년 생이고, 남자아이이다. 결혼을 안한 내게는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아이이다. 그 아이가 어느새 커서 초등학교 6학년이 되었다, 올해.

 

나는 조카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쭈욱, 전담으로 책을 사주는 고모였다. 아기때 헝겊책부터 그림책, 팝업북 이런 것을 거쳐 동화책, 만화책... 안 사주는 것없이 늘 공수를 해왔다. 아이가 어려서 뭘 읽고 싶다 판단하기 어려울 수 있어 내가 골라서 사주곤 했다. 조카는 좋아하기도 하고 안 좋아하기도 하고 그랬지만 대체로 늘 환영이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마법천자문이나 등등의 학습만화는 다 내가 사주었다. 올케가 만화 자체를 그닥 좋아하지 않아서 사주기 꺼려하는 걸, 내가 다 사주었다. 괜찮아, 만화도 책이야, 읽으면 다 도움이 된다, 읽는 습관이 중요한 거야. 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렇게 한달에 두번 책을 살 때마다 반은 조카 책으로 채워 넣곤 했었다. 아이는 우리집에 오면 가장 먼저 책이 있는 방으로 달려갔고 새로 도착한 신간들의 비닐을 뜯으며 좋아했다. 만화이니, 읽는 데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진 않았지만 어쨌든 사다놓은 건 다 읽곤 했다.

 

그 아이가, 이제 책 취향이 바뀌었다. 키가 훌쩍 크고 발 사이즈가 240이 되어버리고 자기만의 세계를 가지고 이럴 때는 컸나 이 아이가 라는 생각을 하는둥 마는둥 했었는데, 아. 책 취향이 바뀐 걸 보니, 우리 조카가 정말 컸구나... 라는 생각이 번쩍 들었다. 이젠 학습만화를 거들떠도 안본다. 우리집에 오면 들어와서 책이 있는 방으로 뛰어가긴 하는데, 내가 읽는 책들의 제목을 유심히 보다가 한 권 빼들고는 "고모, 이거 봐도 되요?" 라고 이야기를 한다. 세상에.

 

 

최근에 조카가 빌려간 책.

 

 

어머나. 너 이거 이해할 수 있겠니. 100살 할아버지 얘기야. 그랬더니 "네!" 라고 해서 빌려 주었다. 어제 물어보니, 반 이상 읽었다며 재밌다고 한다.

 

솔직히 나는 아직 안 읽었는데 말이다. 내가 읽지 않은 책을 우리 조카가 먼저 읽는 사태가 발생하고야 말았다. 어머어머.

 

 

 

 

 

 

 

 

 

 

날 닮은 모양이다.... 내 동생도 올케도 추리소설을 읽지 않는다. 우리 엄마도 질색하고. 우리집에서 나만 좋아하는 장르다. 그래서 왠만한 책은 다 있다고 보면 되는데... 내가 사다놓은 셜록홈즈 전집을 찾더니 거기서 이걸 안 읽었다며 쓰윽 뽑아서 가져간다. 어머어머.

 

나는 좋다. 우리는 그래서 말이 잘 통한다. 추리소설 좋아하고 만화 좋아하고 마블 좋아하고. 서로 대화가 된다. 아 우리 조카가 나랑 대화가 되는 수준으로 자라고 있다. 감동이다.

 

 

 

 

 

 

이제 학습만화를 사는 건 그만두어야 겠다. 6학년 올라가면서부터 조금 망설였었는데, 현실로 드러났다. 함께 서점에 가서 읽고 싶은 책을 고르도록 하거나 책을 살 수 있도록 용돈을 주어야겠다 싶다. 책을 고르는 그 재미. 그런 걸 느끼게 하고 싶은 거다.

 

우리 조카가, 이렇게 커서 서운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책의 레벨이 올라가는 그 모습에 가슴 뻐근함을 느끼는 건, 대견함이겠지. 기특함이겠고. 그리고 조카에게만 느껴지는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조카가 있어서, 난 정말 행복하다. 그 아이가 이렇게 단계단계 커가는 모습이 내게 있어서는 신비 그 자체이고 樂이다.

 

이렇게 무럭무럭 커다오, 우리 조카.

고모가 책은 끊임없이 공수해줄테니 읽고 싶은 책 언제든지 얘기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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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03-28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앗 너무나 좋은 페이퍼네요.
제 조카들도 좀 더 크면 제 방에서 책을 골라서 읽을 수 있게 될까요?
지금은 이 아이들이(7살, 4살) 책 자체를 별로 좋아하는 것 같지 않은데요.
제가 바라는 모습이 바로 비연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조카들이 찾아와 제 책장에서 자신들이 읽고 싶은 책을 골라 읽는 거거든요. 아아, 제가 그리던 걸 비연님은 이미 이루고 계셨군요! 부러워요!!

비연 2016-03-28 13:34   좋아요 0 | URL
락방님 락방님... 저도 그게 로망이었는데 아이가 그닥 흥미가 없어 보여서 내심 그냥 접고 있었거든요. 근데, 그게 갑자기! 되더라구요...우히히. 기대해보삼요~

무해한모리군 2016-03-28 1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들 자라는걸 보니 세월이 흐르는구나 싶어요... 비연님 좋은 고모군요 오호

비연 2016-03-28 13:35   좋아요 0 | URL
좋은 고모가 되고자 늘 노력하는데... 조카는 그렇게 생각하는 지..^^;;;
제가 나이 먹는 건 잘 모르겠더라도 (마음은 늘 청춘 ㅜ) 아이가 부쩍부쩍 달라져 있는 거 보면 시간이 흐르는구나... 이게 사는 거구나 싶어요.

cyrus 2016-03-28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카가 홈즈의 매력을 잘 아는군요. 저도 조카 나이 때 한창 홈즈 시리즈를 즐겨 읽었어요. ^^

비연 2016-03-28 16:39   좋아요 0 | URL
cyrus님. 저도 제 조카 나이 때 홈즈랑 아가사 크리스티랑 참 즐겨 읽었었거든요! 그래서인지 조카가 더 귀여운 거에요 ㅋㅋㅋㅋ

moonnight 2016-03-28 16: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제 큰 조카아이는 이제 4학년 되었는데 아직은 책보다 만화책을 (훨씬) 더 좋아해서 이번 주말에도 놀러와서는 제게 만화책 주문해놓고 갔어요. 제 오빠와 새언니는 만화책 사주지 말라고 하지만 못 들은 척^^; 언젠간 제 조카아이도 제 책장에 꽂혀있는 책들을 골라가는 날이 오겠죠. 두근거리기도 하고 뭔가 아쉬운 기분일 것 같기도 해요. 더이상 아이가 아니구나. 싶은. ㅜㅜ; 하여간에, 비연고모님의 유일조카는 복받았네요.^^

비연 2016-03-29 07:01   좋아요 0 | URL
moonnight님.. 기다리시면 곧 책장 책을 빼서 가져올 날이 옵니다~ 멀지 않았어요!
제 조카도.. 제가 가끔 글자 많은 책들을 사주곤 했었는데 거들떠도 안 봤었거든요ㅜ 그래서 아... 그럼 아직은 만화인가봐 하고 그냥 만화만 사주었었는데 어느새 훌쩍 커서 알아서 만화를 안 보네요 ㅎㅎㅎ 물론 웹툰 이런 걸로 돌린 거죠. 학습만화 대신에. 제 유일조카 덕에 제가 복을 받은 거랍니다.. 참.. 기뻐요. 그 아이가 있어서.

꿈꾸는섬 2016-03-28 17: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의 수준이 05년생 제 아들과 차이가 확 나요.ㅜㅜ 조카가 지적호기심이 넘치는군요. 부럽습니다.

비연 2016-03-29 07:02   좋아요 0 | URL
꿈꾸는섬님.. ㅎㅎ 제 조카도 평소에는...ㅜㅜ 그냥 가끔 이렇게 감동을 줘요.
호기심은 많은 것 같은데.. 그냥 아이에요. 남자애라 아직은 한참 어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