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무슨 책 읽고 계세요?
숙명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구혜영 옮김 / 창해 / 2007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내게 맞기도 하고 맞지 않기도 하다. 처음 읽었던 '호숫가 살인사건'은 내용이 파격적이긴 했지만 어쩐지 어색한 느낌이었고 '백야행'을 읽었을 때는 그 사실적인 묘사와 비참한(난 그렇게 느꼈다) 내용에 한동안 어리둥절했었고 '용의자 X의 헌신'은 아 이렇게 쓸 수도 있겠구나 라는 감탄을 안겼으며 가장 최근에 읽은 '환야'는 사실 조금 실망감이 컸었다. 전반적으로 아주 끌리는 마음으로 고르게 되지는 않는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이 작가의 이름을 발견하면 장바구니에 사정없이 넣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이번에도 이 책 '숙명'과 '붉은 손가락'을 냉큼 구입하지 않았겠는가.

숙명. 제목이 좋았다. 1990년 작품이라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창기 스타일을 확인할 수도 있겠다라는 기대감에서 출발했다. 무엇보다 작가 자신이 "범인은 누구일까, 어떤 트릭을 썼을까 하는 식으로 마술을 구사한 수수께끼도 좋겠지만, 좀더 다른 형태의 의외성을 창조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라고 말했다 하기에 이번에도 '용의자 X의 헌신'과 같은 독특한 작품을 발견할 지도 모르겠구나 했다. 그리고 아주 흡족하지는 않았지만, 마지막 책장을 덮었을 때 작가가 어떤 생각으로 이 책을 썼는가에 대해 이해하면서, 나쁘지 않은 마음이었던 듯 하다.

이야기의 두 축은 유사쿠와 아키히코이다. 초등학교 같은 반 동급생이었던 둘은 사사건건 경쟁 상대였다. 아버지가 경찰이고 어디서나 리더의 기질을 발휘하던 유사쿠는 말없고 냉정하며 자신을 관찰하는 듯한 아키히코에게 늘 신경이 쓰인다. 그렇게 고등학교까지 같이 졸업하고 대학에 올라갈 때 아키히코는 사업을 하는 아버지의 뒤를 잇지 않고 의사의 길을 선택하고 유사쿠는 그렇게도 의대에 가고 싶었지만, 낙방과 아버지의 병으로 결국 경찰의 길을 택하게 된다. 그렇게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던 중, 아키히코의 회사 중역이 살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그 사건을 통해 그 둘이 맞닥뜨려지게 된다. 그러면서 실타래처럼 풀어지는 운명의 끈들이 차분하게 전개되는데...

이 이야기는 따라서 누군가가 살해되고 그 범인이 누구이며 그 동기가 무엇인가가 촛점이 아니다. 유사쿠와 아키히코라는 동갑내기 두 남자의 운명과 그들을 둘러싼 미스테리를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더 크다. 하나의 살해사건을 통해 얽히고 맺어지는 그들의 삶이 참 녹녹하지 않게 다가오고, 마지막 몇 장에서 그 모든 비밀이 드러날 때 충격적이라기보다는 아연해지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이 책을 선전할 때 계속 말하고 있지만, 정말 '마지막 장은 절대 먼저 읽어서는' 안되는 책 중에 하나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다양한 주제로 소설을 쓰고 있지만, 사실 미스터리 자체에 대한 관심 보다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들, 그들의 본성, 운명과 같은 주제에 더 많은 관심이 있어 보인다. 대부분이 상상하기 힘든 주제들을 어렵지 않게 풀어나가면서 무리수를 크게 두지 않는 것도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대단히 잘 짜여진 구도와 전개, 속도감 등이 책을 한번 들면 쉽사리 놓지 못하게끔 하는 재주가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좀더 최근의 작품을 먼저 읽어본 사람들은 아마 이 책이 맛으로 따지자면 좀 싱겁다고 느낄 지도 모르겠다. 파격적이지 않으면서도 충격적인 결말이라는 점은 그의 경향과 거의 일치하지만, 아직 초반 작품이라 그런지 매우 번뜩이는 글솜씨라는 측면에서는 최근 것에 비해 덜하기는 하다. 하지만, 난 양념이 많이 안 들어간 슴슴한 음식을 먹는 것같은 기분이 들어서 좋았다. 어쩌면 많이 유명해진 작가들의 작품들은 기교면에서 너무 기름칠한 것처럼 매끄러워서 감당하기 버겁다는 느낌을 가끔 가지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추천할 만 하다. 다만, 결말이 좀 비약적이라는 것이 약간 걸리는 부분이긴 하다.

아. 난 책을 살 때 북디자인을 보는 편인데, 개인적으로 이 책의 북디자인이 참 맘에 든다. 파울 클레의 '계획'이라는 작품인 모양으로, 책 내용과도 잘 부합되고 디자인 자체도 괜챦은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