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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의 궁전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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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오스터에 대한 평가는 참 상반되는 것 같다. 도대체 뭘 쓰려고 하는 지 모르겠고 비약과 은유가 너무 심하다라고 평하는 사람부터 정말 몽환적이고 상상력 풍부한 문체를 구사하는 보기드문 작가라는 찬사를 보내는 사람까지. 나는 그 스펙트럼에서 후자에 조금 더 가까이 가있는 편이다. 가장 먼저 읽은 책이 '뉴욕 3부작'이었는데, 알 듯 모를 듯한, 어느 면에서는 기괴하기까지 한 설정 속에서도 인간이란 무엇인가, 사람들 사이의 관계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끊임없이, 그리고 진지하게 성찰하는 작가라는 느낌을 받았었다.

이 책, '달의 궁전'은 그런 맥락에서 고른 책이다. 사실 내용도 잘 모르고 무작정 집은 책이라서 한참을 버려둔 채 구석에 나몰라라 두었다가 어느날 문득, 생각이 나서 보게 되었지만. 그리고는 참 재미있게, 정말 쉴새없이 빠져서 읽었다. 난해하지 않으면서도 천박하지 않은 유머가 있고 그 와중에도 인간이라는 화두에 대해서, 인연과 운명이라는 화두에 대해서 늘 염두에 두고 있는 작품이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르고 자랐고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클라리넷 연주자인 외삼촌과 살아온 마르코 S. 포그는 외삼촌마저 돌아가신 후 컬럼비아 대학을 억지로 졸업하고 자발적인 파산자가 되어 거의 밑바닥에 가까운 생활을 하게 된다. 안 먹고 안 입고 그렇게 살다가 결국 공원에서 부랑자 비슷한 생활을 하던 중 키티 우라는 중국계 아가씨를 만나 다시금 일상생활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어느 100세 가까운 노인인 에핑의 비서 역할 속에서 그는 에핑의 지나온 방랑과 기만과 고통의 인생을 글로 적는 일을 하게 된다. 노인이 죽은 후 그의 아들인 솔로몬 바버-누구나 한번쯤 돌아볼 정도의 거구에 대머리인 역사학 교수-를 만나게 되고 그가 자신의 아버지임을 알게 되면서 그들 사이의 인연의 끈이 이어지게 됨을 느낀다.

포그를 따라다니는 화두, <태양은 과거고 세상은 현재고 달은 미래다>라는 문구는 이 책의 많은 부분을 시사한다. 무엇보다, 인간이 정복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환상의 대상이며 땅에 발을 디디지 않은 사람들의 로망인 달을 지향하던 포그가 마지막에는 '언덕 위에 떠오른 달이 어둠 속에 자리를 잡을 때가지 눈한번 떼지 않고 밤하늘로 솟아오르는 모습을 지켜봄'으로써, 왜곡된 운명과 삶에 대한 알 수 없는 좌절, 그래서 현재에 천착해 사는 것에 대해 태생적인 거부감까지 가지고 있던 젊은 영혼이 이제 모든 것을 뒤로 한 채, 자신의 많은 방황들을 버리고 현실로 돌아오게 되는 장면은 거의 감동에 가까왔다.

아울러, 에핑과 솔로몬 바버와 포그의 유전적인 운명성을 띈 배회와 모험과 삶에 대한 회의들은 인연의 끈처럼 서로를 엮어서 결국 포그에 이르러 완전성을 띄게 되는 구성 또한 좋았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에핑의 서사시에 가까운 인생은 포그의 짧은 방황의 인생에 집약되고 솔로몬 바버의 사랑, 큰 몸집 속에 가려진 작은 모습들은 그와 닮은 포그의 푸른 눈에서 표현된다. 그런 인연과 우연에 가까운 운명들을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구성하면서 삶과 운명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힘은, 전적으로 작가인 폴 오스터의 재능이다.

3대에 걸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결국 폴 오스터는, 그 긴 여정들이 사람의 내면에서 비롯되는 여행이며 따라서 내면에의 성찰은, 누구에게나 몽롱하고 희미하게 느껴지는 인생에 대한 어렴풋한 느낌들이 점차 윤곽을 띄고 현실의 눈으로 바라보게 될 수 있도록 한다라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폴 오스터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라도 이 책만큼은 한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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