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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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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는 중국이 배출한 세계적 작가 위화의 장편소설로 피를 팔아 살아가는 허삼관의 고달픈 생애사다. <허삼관 매혈기>를 검색하면 두 권의 책이 나온다. 하나는 1999년 출간, 다른 하나는 신간도서로 소개되는 소설이다. 같은 작가의 같은 번역 소설인데, 최근에 푸른숲에서 다시 출간된 소설은 때깔이 곱다. '호오 저 자가 허삼관이군'싶은 수염난 배불뚝이 남자가 한 명 표지에 그려져 있다.

피를 팔아 산다는 것의 참혹함

<몸을 판다>거나, <피를 판다>, <장기를 판다>는 말의 참혹함은 모두 같다. 얼마나 팔 게 없으면, 자신의 신체 기관을 내어팔까 하는 상상. 우리는 누구나 부모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생물인 셈이지만, 이 모든 과정이 추상화되어 있어 좋은 옷을 입고 으쓱대며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고 말한다.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는 바로 이 으쓱댐을 걷어내고, 가장 날 것의 삶 근처로 내려간다.

피를 판다는 건 참 섬뜩한 소재다. 구석기 시대에서 신석기 시대, 청동기 시대, 철기 시대를 거쳐 정보화 시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은 진화했다. 자신의 몸을 직접 파는 게 아니라 자신이 만들어낸 무언가를 파는 시대다. 더 지적으로 고도화된 무언가를 팔면 팔수록 다치지 않는 고고한 직업군에 속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시대에 '피를 팔아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중국에서 피를 팔아 산다는 건, 과장이 아닌 모양으로 <양쯔강의 에이즈 고아>(EIDF 2007 상영작)라는 다큐멘터리에서도 나온 적이 있다. 마을 주민의 10%가 에이즈 감염자라는 양쯔강 허난 지역. 한 쪽 벽이 완전히 무너져 내린 낡은 집에서 부모를 모두 에이즈로 잃은 고아들이 방치되어 있었다. 그러고보니 우리네 화장실에도 가끔은 <장기 삽니다>라는 문구가 붙어있으며 60년대까지만 해도 피를 팔아 산다는 게 드물지 않은 시절이 존재했다.  그러니까, 이건 진짜 현실의 이야기다.

단순한 논리와 날 것의 언어로

위화는 참혹한 이야기를 전하며 가장 쉽고 가장 우스운 말투를 택했다. 가난한 시골에서 동네 친구들을 따라 물을 열 동이 마시고 피를 판 뒤, 돼지간볶음에 황주를 마시며 탁자를 탕 치는 남자 허삼관. 그는 표지에서 빠져나와 수염을 매만지는 듯, 정감가는 인물이다. 

허삼관이 그 깨진 거울을 손에 들고 먼저 자기 눈을 보고 다시 일락이의 눈을 보니, 그 눈이 그 눈이었다. 다시 자기 코를 비춰 보고 일락이의 코를 보니, 역시 그 코가 그 코였다. 그래서 그는 생각했다. '모두 일락이가 날 안 닮았다고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닮은 구석이 있구만.'(54p)

소설 속의 인물들이 행동은 지극히 단순한 논리로 이어진다. 허옥란은 하소용보다 허삼관이 가진 돈이 더 많고, 얼굴도 조금 더 잘 생겼으며, 자기 성이랑 성씨가 똑같아 허 씨를 물려줄 수 있다는 까닭으로 허삼관에게 시집을 온다. 일락이, 이락이, 삼락이를 낳을 때 허옥란은 허삼관을 저주하며 "내가 괴로울 때 당신은 병실 밖에서 희희낙락했지? 이 망할 놈의 인간. 그러니 일락이 이락이 삼락이잖아"하고 욕을 퍼붓는다.

재치있는 서술이 훌훌 흘러간다. <흥부 놀부전> 판소리 대본을 그 시대에 읽었다면, 이렇게 술술 읽혔을까. 서민들의 마당에서 벌어지던 극은 가장 쉽고도 우스운 골계미로 가득했다. <허삼관 매혈기>는 단 한 순간도 젠체하지 않고, 피를 팔아 살아가는 가난한 사람들과 그들의 아내와, 자식들을 따라가며 독자를 웃긴다.

"그런다고 천하의 내가 겁을 낼 줄 알아? 가서 너희 형 불러와. 너희 형, 너, 그리고 네 동생 모두 신나게 두들겨 패줄 테니"(80p)

사람을 울리는 부자(父子)의 대화

입술을 슬며시 말아올려 이를 드러내고 웃던 독자는, 그러다 한편에서 눈물을 떨구고 마는데. 그건 이들이 처한 어처구니 없는 상황 속에서 함께 사는 이들의 갈등을 동여매는 인간애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허삼관의 첫째 아들 일락이는, 사실 허삼관의 아들이 아닌 하소용의 아들로, 허옥란이 결혼 전 그와 관계를 맺어 뱄던 아이다. 이를 발견하며 허삼관은 격한 갈등에 빠지고, '내가 피를 팔아 남의 아들 먹이는' '자라대가리'노릇을 했다며 분해한다. 

먹을 게 부족하여 군입을 덜려는 시대, 두 아버지의 갈등 속에 정작 일락이는 누구를 아버지라 불러야할지 모르는 슬픔으로 방황한다. 그는 수시로 허삼관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지만, 대기근이 닥쳐온 어느 날, 허삼관은 자신의 피를 팔아 자신의 가족들에게 국수를 먹이며, 일락이만은 제외시킨다. 두 아버지의 집을 오가며 운명에 휘둘리던 일락이는, 결국 이날 가출을 하고 만다. 소설에서 가장 좋은 부분은, 결말도, 허삼관이 피 팔다 죽을 듯한 장면도 아닌, 바로 이 날 부자의 대화다.

"이 쪼그만 자식, 개 같은 자식, 밥통 같은 자식...... 오늘 완전히 날 미쳐 죽게 만들어 놓고...... 가고 싶으면 가. 이 자식아. 사람들이 보면 내가 널 업신여기고, 만날 욕하고, 두들겨 패고, 그런 줄 알거 아니냐. 널 십일 년이나 키워줬는데, 난 고작 계부밖에 안 되는 거 아니냐. 그 개 같은 놈의 하소용은 단돈 일 원도 안 들이고 네 친아빈데 말이다. 나만큼 재수 옴 붙은 놈도 없을 거다. 내 세에는 죽어도 네 아비 노릇은 안 하련다. 나중에는 네가 내 계부 노릇 좀 해라. 너 꼭 기다려라. 나세에는 내가 널 죽을 때까지 고생시킬테니....."
승리반점의 환한 불빛이 보이자 일락이가 허삼관에게 아주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버지, 우리 지금 국수 먹으러 가는 거예요?"
허삼관은 문득 욕을 멈추고 온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191-192p)


1960년 생 중국 작가 위화는 서문에서 이 소설이 <평등에 관한 이야기>라고 말한다. 자신의 유전자, 자신의 가장 가까운 것을 물려주는 자식에 관한 이야기가 욕심에 관한 이야기라면, 남의 아이를 키우는 허삼관의 이야기는 평등에 관한 이야기가 맞다. 나를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에서 엉엉 울게 만든 이 대목은, 성질 더러운 인간들이 서로 나누며 살아가는 것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작은 아이의 성장에 관한 이야기이기도 했다. 누군가의 분배 없이 아이의 성장은 불가능하니까. 

'아버지'의 이야기, 그러나 모든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석 달에 한 번씩만 팔아야하는 피를, 한 달 걸러 팔고 쓰러져 결국 자기가 수혈을 받으며 "남의 피를 가져가라"고 말해 웃음거리가 되는 허삼관. <허삼관 매혈기>는 추운 겨울, 찬 바람에 몸을 내맡기고 읽어도 가슴 한 구석을 데워주는 풍자소설임에 틀림이 없다. 허삼관의 가족들은 지지리도 가난한 시절을 거쳐 문화대혁명에 휩쓸려 생이별을 하고, '허옥란은 창녀'라는 죄목으로 대자보가 붙자 집안에서 자아비판대회를 열기도 한다.

그러나 평등에 관한 이야기라는 이 소설은, 한편으로 중국 사회의 가부장성과 '자신의 씨'에 집착하는 아버지-아들의 관계에 집중함으로 인해, 허옥란과 여성들은 잠시 제껴둔다. 일락이가 누구의 아들인지 몰라도 내가 일락이의 어미만은 맞다는 허옥란.  일락이는 "난 여자들이랑 있는 게 싫어요. 아버지랑 있을래요."라고 말하고, 허옥란은 소설의 막바지에 "늬 아버지가 늬들을 위해 얼마나 고생했는데"라며 야단치는, 부자간 관계를 끈끈하게 만들어주는 조연 어머니로 분한다.

하지만 성급해지지 말자. 세상에 누구도 온전히 모두의 이야기를 기록할 수는 없는 거니까. 이렇게 훌륭하게 구구절절 넋두리를 해주지 않았는가. 나는 <허삼관 매혈기>를 품에 안고 사막처럼 갈라져가는 입술에 한 방울 눈물을 떨구었고, 데굴데굴 굴러가는 심장을 부여안고 웃었다. 그렇다면 족하다. 중국 여성들의 이야기와, 남성 씨족 바깥 세계의 풍자, 그리고 모녀관계는 여성 작가들의 몫으로 떼어두기로 한다. 피 팔아 사는 아버지는, 현실이기도 하지만, 모두의 가난에 대한 비유이기도 할테니까.

오늘도 무언가를 팔러 먼 곳을 다녀오셨을 아버지들의 수 켤레 구두 맡에, 한 어머니의 대사가 맴돈다.

"내가 피를 판 지는 11년이 됐어요. 한 번에 30위안과 계란 빵 한 봉지를 받지요. 처음엔 몰래 갔어요. 무서워서 안 하려고도 했죠. 12번 기절하고나서야 피를 뽑을 수 있었지요."(다큐멘터리 <양쯔강의 에이즈 고아> 중에서)



 
 
실피드 2007-12-04 20:38   댓글달기 | URL
오래 전에 친구가 추천해줘서 읽었던 그 책이 알라딘 메인에서 보이길래 와봤습니다. 책이 새로 발간되었군요 ^^ 멋진 글 읽고 다시 한 번 책을 떠올려봅니다. 잘 읽고 갑니다 -

buoy.kr 2007-12-04 23:17   댓글달기 | URL
실피드 님. (알라딘) 메일로 누군가 발자국을 남겼다고 알려주길래 들어왔더니, 제 부족한 글이 메인에 있었네요. <허삼관 매혈기>를 참 좋은 책이더라죠. 이렇게 좋은 책을 진작에 알고 계셨다니-
 
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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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증언을 견디기. 프레모 레비 <이것이 인간인가>

<이것이 인간인가> 서평 마감일을 약 일주일 넘긴 것 같다. 맙소사. 웬일인지, 글이 잘 써지질 않아, 모니터 앞에서 하릴 없이 이것저것 다른 푸념들을 늘어놓다가 금세 지워버리곤 했다. 읽을 당시에도 책장이 잘 넘어가지는 않았었다. '지독한 책'으로 분류되는, 독자를 꽤 괴롭히는, '바람직한 여가 선용'과는 아주 거리가 있는 힘든 독서였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인간인가>는 홀로코스트 생존기다. 다른 곳도 아니고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10개월간 강제노역에 시달리다가 기적적인 확률로 살아남은 생존자의 회고록이다.
저자 프레모 레비는 러시아 수용소와 아우슈비츠 수용소와의 차이점을 묻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대답한 바 있다.
"아우슈비츠는 1944년 8월의 단 하루 동안 2만 4,000명의 포로가 사망한 초유의 기록을 가지고 있다. 정적을 제거하거나 겁을 준다는 오래된 목적과 함께, 한 인종과 문화를 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제거해버리겠다는 현대적이고도 무시무시한 목표가 자리잡고 있었다. 대략 1941년부터 그 수용소는 거대한 죽음의 장치가 되어버렸다." (p.286)

"지친 짐승에 불과할 뿐이다"

프레모 레비는 이탈리아 화학자 출신으로 아우슈비츠에서 다른 국가에서 온 유태인들과 뒤섞여 숙소를 쓰게 된다. 인간의 노동력을 정점으로 끌어내고, 인간을 소모품으로 만들어버리는 아우슈비츠의 악랄함 속에서 이들은 생존의 투쟁을 하게 된다.
그저께 잠깐 시청했던 자연 다큐멘터리 '동물극장'에서 어미를 잃은 새끼 여우들은 같은 종족임에도 불구하고 다른 여우들로 인해 영역에서 쫓겨났었다. 어미는 힘든 산고를 견디지 못해 죽었고, 아빠 여우는 사냥을 하러 나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상태였다. 그걸 보면서, 동물들의 세계에서 경쟁이란 목숨을 내놓고 하는 원초적이고 잔인한 투쟁이란 생각을 했었다. 유태인을 노동의 과정에서 '소모'시키고 그걸 통해 '절멸'시키려는 나찌의 의도는, 유태인들에게서 문명의 모든 혜택을 앗아간 채, 이들을 극단적인 수용소에 가둠으로써 '동물의 왕국' 진행하듯이 진행된다.
고된 노동으로 동료들이 가스실로 끌려갈 때(가스실은 갇혀있던 이들에게는 '소문'에 불과했다), 하루 하루 살아남기에 지친 이들은 "우리는 그저 지친 짐승에 불과할 뿐이다"(p.62)라고 되뇐다.
수용소의 동료 슈타인라우프는 이런 극한 상황 속에서 정성들여 몸을 닦는다. 저자에게 그것은 '절멸이 의례를 반복하는 기계적인 습관'일 따름이지만, 슈타인라우프에게 '청결'은 최소한의 인간성을 지켜가며 살아남기 위한 '자신에 대한 존중'이다. "우리는 최소한 문명의 골격, 골조, 틀만이라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 그 능력이란 바로 그들에게 동의하지 않는 것이다"(p.58)

성실하고도 인간적인 이치, 파시즘

철저한 보안으로, 명령을 내리는 핵심자가 누구인지는 알아낼 수 없다. 분노의 적절한 방향을 찾지 못한 채, 이들이 미워하게 되는 것은, 바로 자기의 하룻밤 침상의 폭에 침입하는 동료 수용자다. 허약하고 서툴러서 자신에게 노동의 짐을 떠넘기는 '폭탄'같은 동료 수용자다. 생존 경쟁에 지친 이들은 차라리 '그들이 죽기를' 바란다.
참혹하다. 본래 피차별자는 차별자에 의해 분리되고, 소통이 단절되는 경향이 있다. 흑인 노예제나 여성에 대한 차별에서도 마찬가지로 등장했던 이런 강제된 분리와 내부에서의 잘못된 경쟁은, 서로가 벗어날 수 없는 억압에 희생되는 '동료'임에도 불구하고 서로간에 적대심을 키우게 만든다. 상대를 이기면 자신이 좀더 나은 조건에서 생존할 수 있으리란 것이 '최선의 선택'이 되곤 한다. 이런 무의미한 경쟁은 결국 어떤 체계도 바꿀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물론 이는 그들에게 가해지는 억압이 극심한 탓이라는 것을, 안다.
"다시 한 번 우리는 받침대 더미 밑에 선다. 미샤와 갈리치아 인이 무쇠 받침대를 들어 우리 어깨 위에 거칠게 올려놓는다. 그들의 자리는 제일 편한 곳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열성을 과시한다. 꾸물거리는 동료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주의를 주고 견디기 힘든 속도로 일을 시킨다. 그래서 나는 몹시 화가 난다. 물론 나는 특권층이 비특권층을 억압하는 것이 세상사의 일반적인 이치임을 잘 알고 있다. 수용소의 사회구조를 지탱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인간적인 이치였다."(p.62-63)
인간적인 이치. 사람을 인간이 아닌 동물이게 하는 어떤 비인간적인, '인간적인 이치.' 프레모 레비는 파시즘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좀더 교묘하게 일상화되어 우리 곁에 숨어 있다고. 나찌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저지른 범죄의 악랄함은, 바로 이러한 '인간적인 이치'를 이용한 '인간성 말살'에 있었다.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로 이송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독일인은 '그저 직무에 성실히 임했을 뿐'이었다.

힘든 독서를 마치고, 표지 뒷면 책날개의 저자 소개를 한참 들여다보았다. 흑백 사진 밑으로는 이런 소개가 쓰여 있었다.
파시즘에 저항하는 지하운동에 참여하다 체포당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고, 1945년 토리노로 살아돌아왔고, 1977년까지 니스 공장에서 관리자로 일하며 작품들을 발표했다. 1987년 토리노의 자택에서 돌연한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아우슈비츠가 대학이었다'고 말하고, '문체가 우스웠다'고 말할 만큼 절실한 경험을 했으며, 그것을 기록하기 위해 살아남았다는 그가, 어째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까. 이해되지 않았다. '인간적인 이치'로 가장한 파시즘이 아우슈비츠가 아닌 곳에서도 끊임없이 재생됨을 목격했기 때문일까. '이제 다 알았다'며 그의 증언을 들으려 하지 않는, 현대인들의 세련된 무관심 때문이었을까.

또 다른 유대인의 증언, 거다 러너 <왜 여성사인가>

그리고 사실, 서평을 쓰기 힘들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요코 이야기> 사태와 관련하여, '전시에 여성에게 가해지는 폭력'이라는 관점에서, 민족적 상처를 이유로 또다른 역사적 폭력인 '여성(에게 가해진) 폭력'을 '침묵하라고 강요할 수 없다'는 요지의 기사를 오마이뉴스에 기고했다. 그리고 데스크도 예상했던 대로, 악플 백여개와 쪽지 몇 통 등 사이버 테러를 한바탕 치렀다.
이 얘기만 나오면 아직도 글 쓰고 싶은 의욕이 떨어진다. 아마도 상처를 받았던 것 같다. 그리고 확신이 흔들리고, 글을 쓸 힘이 없어진다는 게 가장 큰 상처였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족사와 여성사가 교차되는 그 지점을 끈질기게 찾고 싶어서 거다러너의 <왜 여성사인가>를 찾아 읽었다. 이 여자는 어머니를 아우슈비츠에서 잃었으며 자신은 미국으로 도피해 빈곤한 생활을 하다가 여성사학자가 된 유태인이다.
오스트리아의 비엔나 중산 가정출신인 거다 러너는 '홀로코스트'나 '아우슈비츠'에 초점을 맞추지 않는다. 그는 '유대인 여성에게 초점을 맞추는 일이 불가능했다'고 털어놓았다. "파시즘을 경험한 나로서는 민족주의는 모두 충돌과 전쟁을 야기할 뿐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오히려 거다 러너는 방향을 급선회하여 '여성사'에 초점을 맞춘다.

"나는 중세에 일어난 일련의 반유대주의적 참사에서 유대인들이 보여준 영웅적 행위와 저항, 항쟁의 무수한 예를 알고 있다. 그 참사는 서유럽 유대공동체의 3분의 2를 파괴하고 포르투갈과 에스파냐에서 유대인들을 완전히 추방하는 15세기 홀로코스트를 낳았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여성사의 존재와 마찬가지로 이러한 역사를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유대교 회당에서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내가 남자 아이였고 탈무드Talmud를 공부했다면, 유대인의 역사를 긍정적으로 배웠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자 아이였고 유대 학문의 생명줄, 즉 딸무드와 미슈나Mishuna, 미드라시Midrash를 접할 수 없었다. 나는 다만 성적 제약들을 주입받고 철저한 침묵을 세뇌당했을 뿐이었다. 과거는 부정되었고 목소리는 차단되었으며, 여성 영웅은 없었다."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담보로 유지된 민족의 순혈성

거다 러너와 프레모 레비는 유대인이고 같은 '민족'이다. 그들은 모두 홀로코스트가 벌어지는 참혹한 동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이다. 그러나 거다 러너는 '저항적 민족주의' 등으로 회귀하거나 유대인의 종교적 의식을 '민족적 정체성'이라는 이름으로 유지해 나가는 데에는 별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프레모 레비에게서는 엿보이지 않았던 면모, 즉 유대인 내부의 페니스 파시즘을 정면으로 거론하고 비판한다. 거다 러너에 따르자면, 여성은 지난 5000여년 동안 역사에서 배제되어 왔으며, 문자와 문화 전통을 이룩하는 상징계에 참여하지 못했다. 여성이 공적 영역에 침입하기 시작한 건 불과 200여년도 되지 않았을 뿐이다.

순혈주의와 민족적 정체성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담보로 유지된다. 가족의 큰 테두리 밖으로 튀어나가 급진적 성애를 주장한 근대의 여성들은 참혹하게 전시되고 처형되었다. 민족의 테두리 밖으로 튀어나가 민족 외의 남자와 성교하거나, 그의 아이를 배는 것은 여성에게는 용서받을 수 없는 변절이자 '매춘'이었다. 그리하여 가부장제의 주변부에서 '가혹하게 처형당하고' 발이 묶인 여성들을 통해, 어느 종족의 혈통과 문화적 전통은 유구히 보장되어왔다.

거다 러너는 홀로코스트, 즉 독일인이 유대인에게 가한 끔찍한 참상의 앞에 남성사가 여성에게 가해온 참상을 먼저 놓고 있다. 거다 러너가 유대인이 당한 참상이나, 스스로가 유대인으로서 미국에서 맞닥뜨리는 포비아와 테러의 위협을 눈감아버리는 것은 아니다. 그는 연구실 방문앞에 나찌 표식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보기도 했으며, 한동안 '독일어 발음이 혐오스러웠다'고도 말한다. 거다 러너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시즘에 접근할 때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이 아닌 <여성>이라는 정체성을 선택한다. 그가 유대인들의 역사를 인용할 때에는 마치 외부자가 된 듯한 인상을 준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다. 유대인 여성이라는 것은 '이중 억압'이었으며, 그것은 유대인 내부에서도, 외부에서도 마찬가지인 '배제된 존재'였다.

물론 여성만이 역사 기록에서 '잊혀진' 유일한 집단은 아닙니다. 지배 엘리트들은 어느 곳에서나 선택적으로 망각했고, 노예와 프롤레타리아, 식민지인과 같은 하층계급의 성원들을 역사의 가장자리로 밀어냈습니다. 해방 투쟁을 전개한 이후, 각 집단의 성원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재구성하고 새롭게 규정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보았을 때, 여성들은 가장 오랫동안 종속적 지위에 처해 있었고, 다른 어떤 집단보다 해방운동을 펼치는 데 오랜 시간을 소요한 유일한 집단입니다. 더욱이 종속 계급 혹은 특권 계급 내에서도 여성의 위치는 해당 집단의 남성의 위치와는 언제나 본질적으로 달랐습니다. (...) 모든 여성들은 자신들의 역사가 남성의 관찰 렌즈를 통해 굴절되고, 남성 중심적인 가치체계를 통해 또 한 번 굴절된 채로 전해진다는 점을 공유합니다. (...) 여성들에게 20세기까지 진행된 모든 역사는 진실로 전사(前史)였습니다.

선택적 망각을 그만두고 전부를 기억하라

거다 러너가 제안하는 방법은 '선택적 망각을 그만두고 전부를 기억하라'는 것이다. 그는 이를 통해서만 성차별주의, 계급차별주의, 인종차별주의, 반유대주의가 자라나는 왜곡된 절반의 역사와 싸울 수 있다고 말한다. '선택적 망각'에 전략적 민족주의가 겹쳐서 떠오르는 것은 우연일까.

<요코 이야기에 쏟아지는 비난, 한국은 전쟁강간에서 자유로운가>에 대한 댓글 반론 중에는 <기자는 논점을 흐리지 말라>라는 제목의 글이 있었다. 볼록렌즈를 통해 초점을 하나로 모아서 종이를 태우듯이, 한국은 유독 '민족'을 통해서 격렬한 분노를 응집시키고 '한강의 기적'을 일궈낸 동력을 재생시킨다. 상대국을 '축구'로 '정복'하기도 한다. <저열한 민족주의 시각 경계한다. 그러나..>라는 댓글에서는 '저항적 민족주의'를 거론했다.

그러나 어느 편이든, 민족적 정체성은 여성에게 불편한 관계로 다가오는 측면이 있다. (물론 이것은 대항적 범주인 민족을 또 다른 대항적 범주인 여성으로 모두 치환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거다 러너에 따르면, 이것은 서로 '다른 범주'이다. 그리고 서로간의 선후관계나 우열을 매기지 않을 때에, 연대가 가능하다.) '그남들의 스펙트럼과는 다른 문제다'라고 표명한다면, '역사 의식 없는 편협한 꼴통 페미'라는 답이 날아온다. 사실 인류 절반인 여성의 역사를 망각한 편협함은, 상대적으로 취약한 페미니즘을 쉽게 공격하는 모든 종류의 반-페미니즘에도 마찬가지로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조심스럽게 본심을 고백하자면, 나는 논점을 '제대로' 흐리고 싶었다. 그리고 그 논점을 흐리는 데에 있어서 '여성'이라는 또 하나의 피억압층이 열쇠가 됨을 인지하고 있다. '어머니 대지'나 '순결한 누이'로 눈물을 머금게 하는 민족의 '젖줄', 그래서 여성이 대항적 민족주의의 입장에 설 때, 더욱 강렬한 최루탄이 된다. <요코 이야기>를 거부할 수 있었던 것은 재미 동포 '소녀'와 '소녀의 어머니'였다. 이에 대항하는 일본군 성노예 소설을 창작할 수 있는 것도 '여성 작가'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민족적 테두리'내에서 이들은 왜곡되어 소비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는 '여성'이라는 또 하나의 타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남성적 섹슈얼리티로 '보복'의 형태를 띠었던, 요코에 대한 자국의 가해를 부정한다면, 한국 여성들의 이야기는 완전해지지 못한다.

다시 <요코 이야기>로 돌아온다. 나는 아직도 이 책과, 이 책을 소비하는 한국 사회의 단순한 패턴이 무섭도록 괴로우므로. 그러나 더욱 괴로운 것은, <국제적 자매애>를 거론하며 민족적 차이를 무화하기에는, 여성들 간의 현실적 토양이 그남들의 절반의 지배적 역사에 뿌리깊게 깃들어 있다는 사실이다. 전망을 이야기할 만큼의 여성사적 축적이 부족하다는 예감 때문이다.

단지 '금서는 안 된다', 어느 전략상의 이유로도 '선택적 망각'은 안 된다라는 선에서만, 완강히 요코를 변호해본다. 요코를 비난할 수 있다면, 그리고 설혹 그의 아버지의 행적과 그에 대한 의도적 왜곡이 요코의 소설에 드러난다 하더라도, 비난의 주체는 한국 남성이 아니라 한국 여성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것은 일단 수많은 한국 여성들이 요코를 읽고 나서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중억압을 다루기 위해, 누구를 찾아가 만나야 하고, 무엇을 기록해야 하는 걸까. 괴로운 기록들을 연달아 읽으며, 몇 번이고 입을 닫고 싶었다. 그러나 부끄러운 흔적이나마 지우지 않고 남기는 것은, 이에 대한 메아리만이라도 충실히 새겨지길 원하기 때문이리라. 자살한 프레모 레비, 언젠가 만나서 자매애 사이의 차이에 대해 묻고 싶은 거다 러너, 성별이 다른 두 유대인과 그들을 가로지른 파시즘을, 앞으로도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다. 고민은 어디로 흘러가야 할까. 무엇 때문에 이토록 괴로운 걸까.

 

(<요코 이야기> 기사와의 관련성에 따라 오마이뉴스에 동시송고합니다)



 
 
 
파리의 포도주 
마르셀 에메 지음, 최경희 옮김 / 작가정신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하느님이 아니라 어머님, 감사합니다.

작년 언젠가 지인의 편지를 받은 적이 있다.

그의 아끼는 후배 하나는 폭력적인 남자친구와 8년여에 걸쳐 교제해 왔다. 그 남자친구라는 사람은 술을 마신 밤이면 후배를 옆자리에 태우고 차를 마구 모는 과속을 하고, 틈틈이 구타를 하는 남자였다. 후배가 사무실로 출근하지 않고 연락 두절이 된 아침에는, 그가 후배의 번호로 대신 전화를 걸어와 "오늘 갈 수 없다"는 짤막한 멘트를 날려주곤 했다. 지인은 그 상황에서 '왠지 모를 범죄의 냄새가 난다'고 했다. 그가 후배를 감금해둔 게 아닐까 하는 추측이었다. 지인은 그 후배의 이야기를 할 때면 "여자애가 너무 훌륭해서 그래, 너무 훌륭해서 구제불능인 남자, 지가 변화시킬 수 있다고 착각하는 거야, 어떻게든 걔네 떼어놔야 하는데"라고 걱정하곤 했다.

그리고 얼마 후 도착했던 지인의 편지에는 그들의 후일담이 있었다.

후배는 오랫동안 교제하면서도 그와의 결혼만은 끝끝내 피해왔었다. 하루는 남자친구의 폭력을 피해 어머니의 집으로 도망갔는데 남자친구가 그곳까지 찾아와 자신의 여자친구를 내놓으라며 생떼를 쓰고, 결국 그 어머니의 머리를 내려쳐서, 어머니는 병원에 입원해 몇 바늘을 꼬매야 한다고 했다. 이런 사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남자친구는 그의 친구들이 모인 술자리에서 "결혼하려 들지 않는 이기적인 여자"를 함께 욕하며 위로받고 있었다고 했다. 이 사건을 전하는 지인의 코멘트는 "차라리 다행이다. 결혼하면 이런 꼴 두 번 세 번은 진작에 벌어졌다. 어머니가 자기 몸 다치면서까지 이 남자 개새끼구나 알려주신거"라고 "하느님이 아니라 어머님,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그 둘은 헤어졌을까. 그림을 누구보다 잘 그렸다던 그 후배는 자신의 고향을 떠나 어느 도시에서 유학생활을 준비 중이라 했는데, 남자친구가 주소를 수소문해 찾아오지는 않았을까. 간혹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남류작가가 그리는 낙오자들

"망할 망할 제기랄! 가르쳐줘! 왜 나야? 왜 내 목숨으로 저 영혼들을 구제해야 해? 억울해! 가르쳐줘, 빌어먹을! 알아낼 거야, 알아내고야 말 거야......!"
(...)우리는 멋들어지게 예를 표했다. 한편, 내 안에서는 잊혀져 있던 어떤 울분이, 아직 막연하긴 했지만 불신감과 회의감으로 이미 짙어져가고 있는 울분이 꿈틀대고 있었다. 흔히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느끼는, 사람이든 짐승이든 흔히 그토록이나 미치게 되고 마는 반발심의 시초였다. (P.170~171 <죄악의 구렁> 中)

그 이후 꽤 오랫동안 잊고 지냈는데 최근에 마르셀 에메(1902~1967)의 단편집 <파리의 포도주>를 읽고 책장을 덮은 뒤 엉엉 울다가, 갑자기 그이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단편선의 제목으로 쓰이기도 한 <파리의 포도주>에는 포도주를 너무 사랑했는데 가난으로 마실 수 없게 되자 미쳐버린 나머지 장인을 살해한 주인공이 나온다. 오십년도 전의 프랑스를 무대로 하는 소설 속의 이야기는 어떻게 보면 지인의 후배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이야기였다. 공통점이란 세상의 '구제불능' 이야기를 뭐라 덧붙일 표현도 없이 빼곡하니 전하고 있었다는 점 뿐이었다.

전쟁 후의 가난과 위선, 빵 한 조각을 벌기 위한 사기꾼 생활의 숭고함, 오르골 소리 하나를 위해 일가를 살해한 백치같은 범죄자. 스타카토 끊어가듯 고전의 조건일 법한 사회의 온갖 추악한 면을 빠짐없이 짚어가는 <파리의 포도주>는 내 '머리가죽의 피를 마르게(랭보)' 하는 책이었다. 한 편 한 편이 모두 농밀하게 쟁여져 '머리가죽'을 알싸하게 만들지만, 그 중 <당통>이라는 살인자의 이야기가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인생의 불가해함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되어 줄거리를 잠깐 실어볼까 한다.

오르골 소리를 듣고 싶어서 창밖에서 그 소리를 훔쳐 듣던 범인은, 일가가 창문을 잠궈버리자, 일가를 살해해 버렸다. 살인자는 자신이 한 일에 대해 한치의 후회도 없다. 오르골을 독차지했던 일가족이 탐욕꾼들이며 죄인이고, 그들은 천국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라고 그는 믿고 있다. 재판관들은 이 자의 뻔뻔함에 개탄하여 사형을 선고한다. 그의 마지막 기도도 "천국에서 오르골 소리를 듣게 해주십사"하는 것 뿐이었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다. 사형집행일 당일, 범인은 갓난아기로 돌아가 천진난만하게 울고, 살인사건은 애초에 없었던 일로 '리셋'된다. 일가는 살아났으며 범죄의 기억도 없다. 오르골 하나만이 영영 종적을 감췄을 뿐.

리셋된다면, 이야기는 어디로 돌아갈까

가끔 그런 생각을 했다. 사적 권력의 구조의 희생자로 면면이 이어져내려온 여성들의 삶을 뒤집기 위해서는 수많은 살인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저와 제 뒤를 잇는 동족(동성에 한정)의 착취에 눈 감아, 가부장제에 굴종한 여성들이 안타까웠다. 역사 속의 많은 여성들이 살해보다는 자해를 택해왔기에.  인격 수양이라는 이름 하에 보다 부드럽고 보다 인자하게 형성되어왔을 참을성. 일찍이 거세된 폭력성.

괴로워서 견딜 수 없는 상황이 있을 때, 누군가는 자신을 죽이고, 누군가는 다른 이를 죽인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인간 생명에 대한 끔찍한 범죄임에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에너지의 폭발하는 방향성이 다르다는 것은, 전자의 분출구 없는 상황을 역설적으로 보여준다. 광기의 폭력적 배출도 일종의 탄탄한 권리에 기반하고 있었다. 가난이 내 목을 조를 때 누군가를 패거나 죽이거나 강간해도 좋다는 것, 이것은 역사가 남성에게 발행한 면죄부가 아니었던가.  

말이 없고 겨울 싸릿나무처럼 말랐던 친구 하나는, 아버지의 가정폭력을 묵묵히 참아왔던 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술을 진탕으로 마신 날에는 여지없이 어머니를 때렸고, 강간이 수반됐다. 어머니가 방문을 잠근 날에는 톱으로 문을 뚫었다고 그렁그렁 눈물을 삼키며 자취방 침대맡에서 친구가 조근조근 털어놓던 이야기는 좀체 잊히질 않았다. 난 이야기를 들으며, 차라리 시간을 돌려 그를 죽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물론 이것은 마음 뿐, 무책임한 발언을 할 수 없어 가정폭력 상담소와 쉼터의 연락처가 인쇄된 종잇짝(종잇짝! 경험 앞에 서류는 그야말로 종잇짝이었다)을 내밀며 그저 눈물을 뚝뚝 같이 흘려주는 일만이 최선이었지만.

따지고 보면, 이와 비슷한 상황은 얼마든지 감자캐듯 딸려 나왔다. 그리고 상황이 열악할 수록, 피해는 사적 구조의 가장 약자인 여성에게로 집중 포화됐다. '여자와 북어는 삼일에 한 번씩 패야 한다'라는 교훈적 '속담'까지 당당히 내려온 마당에, 가정폭력 비율이 50%를 넘는 현실보고 같은 건 그다지 충격적 사실도 아니었다. 마르셀 에메는 '남류 작가'라는 그의 작가적 성별로 인해, 여성들의 삶의 기반을 옹호하거나 설명해 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참혹함을 꺼내어 소통하고 싶은 의욕이 들게 한다는 점에서 훌륭한 소설을 쓰고 있었다.

"아기 예수님께 드리는 편지예요." 당통이 웃으며 말했다. (...) '아기 예수님. 부탁드릴 게 있어서 편지를 썼어요. 제 이름은 당통이에요. 이제 곧 크리스마스가 다가와요. 변두리의 세 늙은이를 해치운 건 탓하시지 않는다는 건 잘 알아요. 그 나쁜 놈들의 집에서는 안 태어났을 거예요. 머지않아 끝일 것 같으니까. 여기서는 달랄 게 아무것도 없어요. 제가 바라는 건 일단 천국에 가게 되면 멜로디 상자를 내려주십사 하는 거예요. 먼저 감사드리고요. 건강하길 빌게요. 당통 드림'(p 188-189 <당통> 中)

그리고 나는 책을 덮으며, 일가를 살해한 완력과, 가난한 자를 위로한 예술의 축복이 여성들에게까지 내려지기를 빌어보는 것이다. 아기 예수가 아닌 아기 망아지님, 아기 개구리님 그 누구에게라도.

 



 
 
 
까칠한 가족 - 과레스키 가족일기 
죠반니노 과레스끼 지음, 김운찬 옮김 / 부키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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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래치 기법을 연상시키는 까칠판 필선이 표지를 장식한다. 손에 묻어날 듯한 검은 바탕 위로 구리빛 얼굴이, 하얀색 제목의 첫인상을 슥하고 긁었다.

까칠한 수염의 깐돌이 삼촌

까칠한 가족? 나는 문득 어린 시절 아주 많이 좋아했던 '깐돌이 삼촌'을 떠올렸던 것 같다. '깐돌이 삼촌'이라는 굴욕적인 칭호를 대수롭지 않은 장난으로 받아넘기고 함께 웃을 수 있었던, 그는 우리(조카)들에게 참 인기가 많았다. 벽장 속에 숨기도 하고 기타를 치기도 하던 깐돌이 삼촌은 늘상 추리닝 차림을 하고 있었다. 다 자란 어른인데 양복입은 어른들과 어딘가 다른 그는 어린 나이의 나에게 마치 기인(奇人)같아 보였다.

그물같은 그림자를 마당에 드리우던 오래 묵은 나무 사이로 '나비'라는, 이름이 똑같은 고양이가 대를 이어 지나갔다. 역시 이름이 늘 '누렁이'인 여러 마리 개가 대청 마루 아래 나타났다 사라졌다 했다. 바로 그 오래된 한옥집에 살던 깐돌이 삼촌은 우리가 놀러가면 화장실에 가는 척하며 사라지곤 했다. '깐돌이 삼촌이랑 놀기 위해' 외가에 가던 동생과 나는 그가 화장실 가는 길을 미행하곤 했다.

그렇게 열광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나이가 들어 그의 까칠한 수염이 남아있는 턱에 얼굴을 부비는 일이 부끄러워졌다. 학교 다니느라, '공부 하느라' 바빠서 외가를 찾는 나의 발길이 뜸해졌던 것도 그쯤인 것 같다.

'망가지는 아버지'의 미덕

커갈수록 모른 척 하고 살지만 사실 삶의 질에 있어서 유머는 참 중요하다. 모두가 근엄하고 진지하게 폼 잡고 있으면 유머는 통하지 않는다. 어깨에 힘을 빼고 솔직해질 때, 때로 '망가짐의 미덕'으로 우리를 행복해주는 것이 유머다. 그리고 역설적이게도 가장 권위있는 자가 망가질 때 기쁨은 배가 되는 것 같다. 가진 자를 끌어내려 희화화하는 것과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약자를 희화화하는 폭력은 참 다르다.

그래서일까 사랑받는 '아버지'들은 자고로 망가질 줄을 알았다. 권위 대신 사랑으로 자신을 기꺼이 낮추어 어린 아이에게 목마를 태워주었던 아버지 덕분에, 나치에게 끌려가는 아버지를 두고도 인생은 아름다울 수 있었으며 (로베르토 베니니, <인생은 아름다워>), 동시대의 여성 작가들이 아버지를 증오하고 부정할 때 한국문단의 총애받는 신인 김애란은 우스운 아버지를 사랑으로 추억할 수 있었다.(김애란, <달려라 애비>)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50년 전에 망가졌던 아버지 과레스키가 <까칠한 가족>이라는 에피소드 모음집으로 다시 우리를 찾아왔다. 가끔 연극적 상황을 연출하며 바가지를 긁는 부인과 여기에 질새라 날카로운 자의식으로 성장 중인 막내딸 파시오나리아, 과묵하다가도 어디선가 눈을 빛내며 허를 찌르곤 하는 알베르티노가 화자의 가족이다. 화자 자신은 작가인데 가족들에게 그다지 인정받고 있지는 못하다. 소설에 대해서는 아들 알베르티노에게서 '대충 썼다'는 평가를 받는다.

"여기는 미치광이들의 집이야. 나는 질렸어. 언젠가 짐을 싸서 떠날 거야." 마르게리타가 냉소적으로 물었다. "어디로?"

<까칠한 가족>에서 모녀가 주고 받는 대화다. 마치 고슴도치 가족 같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고 하던가. ( 참고로 여기서 '함함하다'는 털이 보드랍고 윤기가 흐른다는 뜻이다. ) 아버지는 날카롭고 냉소적인 대사가 오가는 집을 한없이 정감있게 그리고 있다.

그는, 유산을 미리 떼어 용돈으로 달라는 딸내미의 요청에 '난 너희들에게 빚진 게 없어. 너희들에게 유산을 남겨줄 의무도 없어.'라고 신랄하게 거절하면서도 '우리는 일자리를 잃은 두 명의 미장이 보조원입니다. 우리를 도와주실 수 있으시면...'이라고 실업보조금을 요청해오자 기꺼이 거금을 내어준다. 그래놓고 원칙을 지켰다며 희희낙락하는, 어찌보면 좀 실없는 아빠다.

가족을 품는 어미닭의 온도처럼 온유하다

같은 소재를 놓고도 작가가 어떤 프리즘을 통해 세계를 보느냐에 따라, 글은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작가들이 모두 동일한 사회적 환경에 처해있다거나, 금새라도 상처를 도려낸 듯 줄글마다 폭발하는 문학의 뜨거움과 깊이를 무시하려는 건 아니다. 저마다의 온도와 위치가 있으니까. 다만 이 책을 읽으면서 누군가는 따뜻한 온도를 지켜가는 글을 쓰기도 한다는 게 그만큼 중요한 역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는 말을 하고 싶다. 사람을 안심시키는 과레스키의 글은 가족을 품고 있는 어미닭의 온도처럼 온유하다.

하긴, 그가 길길이 날뛰며 허리띠를 끌러 식탁을 내려치는 날에도 아내 마르게리타와 딸 파시오나리아는 눈 하나 꿈쩍 안 하는 강적들이 아니겠는가. 폭력의 질주 같은 건 애초에 다른 구성원들로부터 '까칠하게' 무시당하는 민주적 집안이다. '튀김 요리 사건'부터 '편지 개봉 사건'까지 책에 살아있는 것은 작가의 자의식뿐만이 아니라, 집안 여기저기서 분출하는 까칠한 여론들이다. '당신 정말 얼간이같아요.' (-부인 마르게리타)

조반니노 과레스키(1908~1969)는 1928년 '코리에네 에밀리아노(Corriere Emiliano)'라는 이탈리아 신문의 교정일을 보면서 각종 신문과 잡지에 글을 기고하기 시작했다. 우리 나라에는 '돈 카밀로와 페포네'('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가 알려져있는 유명한 작가로, 저널리즘적 글쓰기를 했다는 이유에서인지 문학 평단에서는 그다지 주목 받지 못했다.

골방이 아닌 광장에서, 하루하루 독자들과 얼굴을 맞대고 글을 썼던 탓인지 과레스키의 글은 경쾌하고 편안하게 읽힌다. 독자의 입장에서는 참 좋다. 짧게 짧게 나뉘어져 거의 45개에 달하는 친절한 챕터 구성도, 시트콤 보듯이 유쾌하다. 물론 딸을 국가의 제도 교육으로부터 내빼오는 '10월 혁명'이나 유산 분쟁을 해결하기 위한 '대표단' 파견 등의 사회 의식도 첨예하게 살아있다. 현실을 깔아두고 웃는 일상의 즐거움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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