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움 출판사에서 나온 카뮈의 <이방인>을 둘러싸고 논란이 많다. 처음에는 "우리가 읽은 <이방인>은 카뮈의 <이방인>이 아니다"라는 카피가 하도 자신만만해 보이기에, 이전까지 확인되지 않았던 저자의 새로운 원고가 발견되었거나, 아니면 기존의 판본에서 누락된 부분을 복원시킨 새로운 프랑스어판을 옮긴 책인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알라딘 미리보기에서 휘적휘적 넘겨보고,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번역자의 해설을 읽어보니, 아무래도 구입을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원서 자체가 새로운 판본인 것도 아니고, 단지 김화영이라는 유명 번역자의 기존 작업을 비판하는 목적으로 나온 책인 듯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가장 구입이 망설여졌던 이유는, 새로 나온 번역본(즉 새움의 책)도 김화영 번역본에 비해서, 또는 내가 가진 더 옛날 번역본(무려 "방곤"의 번역본)에 비해서 딱히 번역이 월등히 나아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의구심은 어제 알라딘 배송 상자에 들어 있는 새움 판 <이방인>의 홍보용 비매품 책자를 훑어보고 나서 확신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비록 책을 직접 구해 일독한 것은 아니지만, 이 홍보용 책자에는 이번의 논란에서 핵심이 된 부분들(햇빛/칼날, 뱃고동/사이렌)이 고스란히 들어 있으므로, 대략적인 인상을 서술하는 근거로는 충분하리라 생각한다.(핵심 부분이니까 출판사에서도 홍보물에 넣었겠지).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정서의 비판은 김화영이라는 고수를 겨냥해 칼을 휘둘렀지만 옷자락만 베어버린 꼴이 되고 말았다. 왜냐하면 (적어도 내가 살펴본 내용 중에서) 그가 오역이라고 지적한 대목들 가운데 "결정적 오역"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이전에도 누누이 말해 왔지만, 비판을 하려면 "잘" 해야 한다. 확실한 근거를 잡고 비판해야 하며, 이왕 하려면 결정타를 먹이는 비판을 가해야 한다. 정말 김화영을 "엉터리 번역가"로 만들고 싶었다면, 이정서는 상대방의 번역에서 결정적인 실수, 변명의 여지가 없는 실수, 그의 명성을 삽시간에 무너트릴 만한 실수를 찾아내서, 근육과 뼈와 골수 깊숙이 칼을 꽂아 넣었어야 했다.


하지만 이정서의 비판은 결정적인 비판의 근거를 하나도 제시하지 못했으며, 어디까지나 우리말 표현의 차이, 또는 번역자가 구사한 문체의 차이에 대한 트집 수준에 머물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정서의 구구절절한 주장도 듣다 보면 어딘가 일리는 있어 보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김화영의 번역을 잘못되었다고 단정할 만한 근거까지는 되지 못하는 것이다.(그나마 이정서의 비판이 날카로워 보이는 부분은 김화영의 민음사 번역본 맨 첫 문단에서 한 구절이 누락된 것에 대한 지적뿐인데, 이 구절조차도 이정서의 책보다 일찍 나온 책세상의 일러스트판에는 멀쩡하게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단순한 편집상의 실수로 보인다).


여기서 부각되는 한 가지 아이러니는 새움 출판사가 이명원의 책을 펴낸 바로 그 출판사라는 점이다. 이명원이 누구인가. 감히 아무도 넘보지 못했던 초절정고수 김윤식을 향해 칼을 휘둘렀던 전설적인 인물이 아닌가. 물론 이명원의 일격도 치명타가 되지는 않았지만, 학계의 존경을 한몸에 받던 저 최고수에게는 적지 않은 상처가 되었다는 것은, 이미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이야기이다. 아마도 외상은 금세 아물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 일격의 정확성과 확실성을 보면 내상은 생각보다 더 심해서 근육과 뼈와 골수까지 충격이 스며들었을지도 모르고, 최고수는 지금도 종종 그때를 돌이켜보면 이를 악물며 치를 떨지도 모른다.


김윤식의 표절을 고발한 이명원의 비판이 공감을 얻은 까닭은, 단순히 일개 대학원생이 원로교수를 비판했다는 스캔들때문이 아니었다. 오히려 고수를 노린 초보의 공격이 충분히 정당한 근거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김윤식의 표절에 관해 확실하고 분명한 증거를 내밀었기 때문에 이명원이 모두의 공감을 얻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정서는 김화영의 오역에 관해 그만큼 확실하고 분명한 증거를 내밀었는가? 나는 아니라고 본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번의 논쟁에서 그의 손을 차마 들어줄 수가 없는 것이다. 아울러 또 한 명의 고수를 베어버릴 좋은 기회를 어이없이 날린 것에 안타까움과 분노를 함께 느끼는 것이고 말이다.







벌써 며칠째,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그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에 인터넷부터 검색해 보게 된다. 구조 가능성을 반신반의 하면서도 혹시나 새로운 소식이 없나 궁금해 하면서, 천편일률적인 실시간 보도에서 뭐라도 하나 건지려고 귀를 쫑긋 세우는 까닭은, 한편으로 이 사건의 어마어마한 규모 때문이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 이 사건의 어처구니없는 전개 과정 때문이기도 하다. 하필이면 그렇게 큰 배가, 하필이면 그렇게 많은 인원을 실은 상태에서, 하필이면 물살도 빨라서 구조도 쉽지 않은 곳에, 하필이면 진입조차도 어렵게 거꾸로 박혀 있으니 참으로 기가 막힌 노릇이 아닌가.


이런 판국에 접하는 언론 보도는 더욱 짜증을 부채질하기만 한다. 새로운 소식도 없이, 열 마디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특보라는 제목 하에 열 시간 동안 반복, 또 반복하는 행태는 정말 사람을 질리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더욱 어처구니없는 것은 그 와중에 곁들여진 각종 오보이다.[*] 특종을 따내려는 욕심 때문인지 공중파뿐만 아니라 종편까지 뛰어들면서 차마 검증되지도 않은 갖가지 "썰"만 난무하게 되었고, 트위터를 통해 유언비어까지 퍼져나가는 통에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되고 말았다. 피터 로퍼의 <슬로우 뉴스>에서 지적된 인터넷 시대 언론의 문제점이 모조리 터져 나온다.


답답한 마음을 가라앉혀 보기 위해, 아울러 뉴스를 들으면서 떠오른 몇 가지 생각을 확인하기 위해, 책을 몇 권 꺼내 뒤적여 보았다. 맨 처음 꺼낸 책은 데니스 M. 파워스의 <캡틴 화이트로의 해난 구조 일지>이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활약했던 미국의 "해난구조업자" 토머스 H. P. 화이트로(1847-1932)의 일대기인데, 이처럼 이례적인 소재의 책이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되었다는 것은 상당히 특이한 일이라고 생각된다. 물론 화이트로가 활동했던 시기의 선박은 대부분 철제선이 아니라 목제선이었다는 차이가 있긴 하지만, 이 책은 선박 난파와 수습에 관한 흥미로운 사례집으로 볼 수 있다.[**] 


화이트로가 직접 담당한 사례까지는 아니지만, 이번 참사와 유사한 선박의 전복 사례도 하나 서술된다. 역사상 최악의 인명 피해를 냈던 선박 사고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는 1915년의 증기선 이스트랜드 호 전복 사건이다. 이 선박은 원래부터 바닥보다 꼭대기가 더 무거워서 불안정하다는 평이 있었는데, 여기다가 선체 일부를 수리하면서 콘크리트를 이용해서 무게가 수톤이나 더 늘어나 버렸다. 여기다 무려 2천 5백 명의 유람객을 태우다 보니 한꺼번에 많은 무게가 좌측, 또는 우측으로 급격히 쏠리게 되었고, 급기야 시카고의 부두를 출발하자마자 배가 심하게 기울면서 20분 만에 완전히 전복되고 말았다.


선박이 전복된 지점에서 육지까지의 거리는 겨우 6미터에 불과했지만,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구명조끼나 구명보트를 이용할 새조차 없어서 결국 승객 841명과 선원 4명이 사망했다.(이 정도면 역사상 최악의 참사로 손꼽히는 타이타닉 호의 사망자 1517명의 절반이 넘는 수준이다). 이후 이스트랜드 호를 인양하고 나머지 시신을 수습하기까지는 16일이 걸렸지만, 정확한 사고 원인은 끝내 밝혀지지 않은 채로 남았다. 심지어 이후의 재판에서도 선박의 결함 문제는 인정되지 않아서, 밸러스트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은 기관사만 처벌되고, 선박 회사는 책임이 없다는 어이없는 판결이 나왔다.


이번 사건의 경우에도 세월호 자체가 원래 낡은 여객선을 개조하는 과정에서 배가 불안정해졌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데, 과연 어떤 결론이 나오게 될지 궁금하다. 시대가 전혀 다르기는 하지만, 부디 이스트랜드 호 때처럼 어물쩍 넘어가지는 말기를. 또 한편으로 이번 사건에서 모두의 공분을 자아낸 문제는 선장을 포함한 선원 상당수가 승객을 버려두고 맨 먼저 탈출했다는 점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이다 싶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야기이다 싶은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조셉 콘라드의 대표작 <로오드 짐>에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주인공인 청년 '짐'은 파트나 호라는 선박의 1등 항해사로 근무하며 수백 명의 무슬림 성지순례자들을 태우고 항해하던 와중에 망망대해에서 배가 난파하는 상황에 처하고 만다. 그러자 선장 이하 주요 선원들은 승객들을 버려두고 자기들만 살아남기 위해 한밤중에 몰래 구명정을 띄운다. 짐은 나름대로 정의감이 있는 인물이었지만, 상관들의 이런 비겁한 행동에 정면으로 반대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따르다가, 나중에 가서는 애초의 주동자들이 발뺌하자 혼자서 모든 책임을 뒤집어쓰고 재판에 회부된다. 이후 그는 선원 자격을 박탈당하고 동료 뱃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을 받는 처지가 된다.


<로오드 짐>이라는 소설에 관해 이야기하려면 문득 떠오르는 또 한 가지 사건이 있다. 바로 이번 세월호 침몰 사건 때에도 잠시 언급된 적이 있었던 1993년의 서해 훼리호 침몰 사건이다. 이 당시에도 사건 자체보다도 사건 직후에 나왔던 "선장 생존 및 탈출설" 때문에 격분하는 여론이 형성되었다. 즉 300명에 가까운 사망자를 냈던 이 참사 당시에 선장이 몰래 사고 현장에서 탈출해서 육지에 상륙했다는 주장이 신문에 보도되면서 갖가지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겨난 것이었다. 하지만 일주일 만에 사고선을 인양해 보니 선장의 시신이 배 안에 들어 있어서 모두들 할 말이 없어졌던 거다. 


내가 가진 자료 중에서는 <무엇이 오보를 만드는가>(노광선 지음, 언노련총서 1,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 1995)라는 책에서 이 오보의 전후 맥락을 잘 설명하고 있는데, 그 발단은 한겨레신문에서 "선장 백운두 씨 살아 있다"는 제목으로 내보낸 기사였다. 이후 조선, 동아, 경향, 국민, 한국, 세계, 서울, 중앙 할 것 없이 모든 일간지가 백 선장 생존설, 또는 목격설에 관한 기사를 쏟아냈고, "백 선장 생존 확률 98%", "백 선장, 최고 5년 이하 금고형", "백 선장, 군산 오식도에 있다" 등등의 표제가 기사 머리를 장식했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미 죽은 사람을 "봤다"고 주장한 사람이 이렇게 많았을까?


그 이유는 어처구니없게도 백 선장의 지인들이 사건 현장인 위도의 신임 지서장을 (기이하게도 얼굴과 체구가 비슷했던) 백 선장으로 오인했기 때문이었다고 전한다. 결국 증언에만 의존하여 기사를 쓰다 보니 생겨난 오보인 셈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오보는 많았겠지만, 워낙 극적으로 전개된 사건이기 때문인지 나로선 "오보" 하면 지금도 이 사건이 생각난다. 그런데 이번 세월호 침몰 사건을 지켜보는 과정에서도 이에 버금가는 갖가지 오보들이 양산되고 있으니,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잘 모르겠다. 어쩐지 이번 일을 계기로 해서 언론에 대한 불신과 경멸만이 더욱 강해질 듯하다. 




[*] 이번 사건 관련 오보 중에서도 최악은 MBN이 보도한 자칭 전문가의 폭로성 인터뷰가 아니었을까. JTBC의 앵커가 저지른 생존자 인터뷰도 오보는 아니지만 그야말로 선정적인 언론 보도의 문제점을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 가운데 하나였다. 흥미로운 점은 JTBC가 곧바로 손석희의 사과 방송과 아울러 "10초 간의 침묵"으로 인해 도리어 격찬을 받았다는 것인데, 평소의 냉철하던 그의 태도를 잘 아는 시청자/청취자 가운데 하나인 나로선 어쩐지 좀 석연찮은 느낌도 없지 않았다. 왜냐하면 영화 <브로드캐스트 뉴스>에서 윌리엄 허트가 인터뷰 도중에 상대방에게 공감한다는 뜻으로 보여준 "눈물"처럼 어딘가 작위적인 느낌이 없지 않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 보니 손석희의 롤 모델이라 할 수 있는 명 앵커 월터 크론카이트도 JFK의 피격 사실을 속보로 보도하면서 눈물이 맺히는 바람에 그 진위 여부를 놓고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일화가 기억난다. 크론카이트는 평생 공화당 지지자였기 때문에, 민주당 출신 대통령인 JFK의 불운을 보도하면서 눈물을 엿보인다는 것이 "악어의 눈물"이라는 일각의 비판도 없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크론카이트는 자신의 눈물이 충격과 당황에서 비롯된 순수한 반응이었다고 항변했는데, 아마 손석희의 침묵도 이와 같은 맥락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고 믿고 싶다.


[**] 세월호의 경우, 구조 작업이 지연되면서 실종자 가족을 비롯해 여론의 질타가 이어지고는 있지만, 과연 지금 상황에서 생존자 구조라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문제인지는 의문이다. 어제 오늘 사이에 실시간 검색어에도 오른 "다이빙 벨"(잠수종)의 경우, 미국 해군의 침몰 잠수함 구조 사건을 다룬 <가혹한 시간>에서도 그 사용법이 자세히 설명된 바 있었지만, 현재와 같은 악조건 하에서 그것 하나만 동원한다고 만사가 해결될 지는 의문이다. 솔직히 말해서, 나로선 이번 사건의 생존자 구조에 관해서 언론이 앞장서서 이런저런 "썰"을 푸는 바람에 공연한 기대와 오해만 자초하는 것은 아닌가 의구심이 든다. 물론 희망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론에서 사실 여부를 알 수조차 없는 추측성 기사를 쏟아내서 실종자 가족이며 시청자의 가슴을 쥐락펴락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리 기적을 바라는 것이 모두의 마음이라 하더라도, 99%의 가능성과 1%의 가능성이 있을 경우, 여기서 1%의 가능성만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희생자"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전문가에게 "생존자"라는 용어를 쓰도록 앵커가 훈계하고 있는 것을 듣고 있자면, 마치 전 국민이 참여하는 대규모 연극을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이것이야말로 이전에도 여러 번 있었던 대규모 재난 때마다 우후죽순 격으로 벌어지던 "강요된 애도"의 연장선상에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뭔가 말 한 마디 잘못했다가는 여론의 질타로 매장될 것만 같은 분위기이다. 하지만 흥분한다고 해서 만사가 해결된다면, 나를 비롯한 그 누가 흥분하지 않으랴. 문제는 지나친 흥분이 사태 해결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걸림돌만 될 수 있다는 점이다.(저 숱한 SNS의 괴담과 자칭 전문가의 MBN 인터뷰가 좋은 사례일 것이다). 여하간 이런 상황에서 냉정하고 침착해지자는 말은 참으로 하기 어려운 말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누군가는 반드시 해야 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 내가 읽은 번역서는 주우/학원사의 세계문학전집 가운데 한 권인 <로오드 짐>(조운석 옮김, 1985 재판)이었다. 지금은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 이상옥 선생의 번역인 <로드 짐>이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것 말고도 <노스트로모>라든지 <나르시스 호의 검둥이>라든지 <서구인의 눈으로> 같은 콘래드의 대표작은 예전부터 여러 권 번역되어 있어서 열심히 찾아 읽었던 기억이 난다. 물론 그때 당시에는 콘라드가 영문학사에서 그렇게 유명한 작가인 줄은 모르고, 단지 "액자식 서술 기법"을 이용해서 "해양 모험 소설"을 쓰는 특이한 작가라고만 생각했었지만 말이다.






그녀는 집안에 켜져 있는 불을 끄지도 않고 자기 침실로 올라갔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벽에 붙어 있는 선풍기를 틀었다. 


방 테이블 서랍에서 가위와 반창고 통과 염주를 끄집어내서, 물어 뜯어서 상처가 난 오른쪽 엄지손톱을 싸맸다. 


그리고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얼마 후 자기 자신도 모르게 염주를 왼손으로 옮겼다. 왜냐하면 붙인 반창고를 통해서 염주알을 셀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 순간 멀리서 울리는 천둥소리를 들었지만, 곧 새우등을 한 채 잠에 떨어졌다. 


염주를 든 손이 옆으로 흘러내렸다. 


그녀는 뜰에서 무릎에 하얀 홑이불과 한 개의 빗을 들고 엄지손가락으로 이를 잡아 으깨고 있는 마마 그란데를 보았다. 


그녀에게 몬띠엘 미망인이 물었다.

-- 전 언제 죽을까요? 


마마 그란데가 머리를 치켜들었다.

-- 너의 팔에 힘이 다 빠질때야.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몬띠엘의 미망인" 중에서,[*]




아침에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사망 소식을 듣고, 문득 그의 초기 단편 가운데 하나인 "마마 그란데의 장례식"이 생각났다.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민음사, 1977)에도 같은 작품이 수록되어 있지만, 이번에는 바르가스 요사의 소설과 합본된 전집 가운데 한 권에 수록된 번역으로 골라 읽었다. "마마 그란데의 장례식"은 이 소설가의 가장 유명한 장편에서 그 무대가 된 마콘도 마을의 지배자인 가모장의 죽음과 장례를 해학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훗날 초기 단편을 모아 놓은 단편집의 제목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내가 갖고 있는 두 권의 번역본 모두 이 작품집에 수록된 단편들 가운데 일부(또는 전부)를 옮기고 있어서, 책을 꺼낸 김에 오랜만에 모두 다시 읽어보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정적 관계인 치과의사에게 사랑니 치료를 받으러 온 시장의 이야기인 "어느 날"이라는 짧은 단편이지만, 저자의 사망 소식을 듣고 나서 그런지 "몬띠엘의 미망인"이라는 단편의 결말이 유독 마음에 와닿았다. 마콘도의 반전설적 존재인 마마 그란데는 <백 년의 고독>에서도 몇 번인가 언급된 적이 있다고 기억하는데 (예를 들어 뭔가 대규모의 사건이 일어날 경우, "마마 그란데의 장례식 이후 이런 어마어마한 사건은 처음" 운운 하는 설명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단편에서도 마마 그란데는 주인공의 눈앞에 나타나서 그가 이미 현실 세계와는 다른 세계로 들어왔음을 알리는 역할을 담당한다. 자기가 그려낸 "마술적 사실주의" 성향의 작품조차도 사실은 남아메리카라는 상상 초월, 규모 초월의 땅에서 살아간 사람으로서 최대한 "사실주의"에 충실한 작품이었을 뿐이었다는 그의 재치 있는 해명을 떠올려 보면, 자칫 아무도 모르고 지나갔을 법한 작은 마을 마콘도를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그의 마지막 가는 길에도 마마 그란데가 불쑥 나타나 동행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문득 들었다. 명복을 빈다.




[*] <빤딸레온과 위안부들 / 마마 그란데의 장례식>(민용태 옮김, 오늘의 세계문학 11, 중앙일보사, 1982), 318쪽.






제목이 <느리게 배우는 사람>이라고 해서 뭔가 싶었더니만, 알고 보니 토머스 핀천의 단편집 SLOW LEARNER의 새로운 번역본이었다. 굳이 "새로운 번역본"이라고 말한 까닭은, 이 가운데 "은밀한 통합"이라는 제목의 한 작품을 뺀 나머지는 (저자의 "해설"까지 포함해서) 이전에 지학사/벽호에서 나온 김성곤 교수의 <제49호 품목의 경매>에 <늦게 깨닫는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합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알라딘의 <느리게 배우는 사람> 상품 소개 페이지에 나온 출판사의 소개 자료에는 "국내 초역"이라는 말이 버젓이 들어 있다. 물론 "은밀한 통합"까지 포함한 완전한 단편집의 형태로는 "국내 초역"이 맞긴 하지만, 작품 수로나 분량으로나 3분의 2에 해당하는 내용은 이미 한 번 번역된 적이 있으니, 엄밀히 따져보면 아주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수는 없어 보인다. 최근에 이처럼 "새로운 번역본"이 나올 때마다 이전의 번역본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는 경우가 흔히 있는데, 정말로 몰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건지 모르겠다.(여하간 참고삼아 그런 것도 있었노라고 한 마디 거들어 본다). 혹시 이러다가 이미 두 가지 번역본(주우/학원사, 민음사)이 나와 있었던 <브이>조차도 "국내 초역"을 자처하며 재간행되는 것은 아닐까.[*]




[*] 핀천의 소설을 처음 접한 것은 꽤 오래 전에, 김성곤 교수의 번역과 해설을 통해서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에 속하는 이런저런 미국 소설을 만나면서부터였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핀천의 소설을 썩 좋아하지는 않는데, 지금은 구체적인 줄거리보다도 뭔가 "정신사나웠던 느낌"만 남아 있다.(혹시나 지금 와서 다시 읽어보면 뭔가 또 다르게 느껴질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또 한편으로는 그의 초기에 명성을 확립하는 데에 적잖이 도움을 주었다고 해도 무방할 듯한 "은둔 작가" 행각이 결국에 가서는 단순한 변덕, 또는 허세로 판명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막연한 의구심도 없지는 않다.(예를 들어 그는 TV 애니메이션 <심슨 가족>에 목소리 출연을 한 적도 있고, "도피 작가" 샐먼 루시디를 초청해서 만난 적도 있는데, 이런 "반(半)은둔" 행각은 아무래도 또 다른 "은둔 작가" 샐린저와 비교되는 대목이다). 그도 이미 76세인데, 사후의 갖가지 폭로며 평가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비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한때 그의 "진짜 정체"로도 추정되었던 샐린저의 사망 전후에 벌어진 일을 보면서 나름대로 궁리를 해놓지 않았을까. 적어도 그가 "진짜" 은둔 작가라면 말이다.



밀림이야기 - 가족이 함께 보는 동화 3
오라시오 실베스트레 키로가 지음, 안금영 옮김 / 사람과책 / 200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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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의 전설>을 읽고 나서 원래 있던 책장에 도로 꽂아놓다가, 같은 책장에 나란히 꽂혀 있는 창비세계문학 단편선 가운데 한 권에 눈길이 갔다. <날 죽이지 말라고 말해줘!>라는 묘한 제목의 스페인/라틴아메리카 단편집인데, 책등에 대표 저자의 이름이 "후안 룰포"라고 되어 있었다. 마침 크누트 함순-헨리 밀러-알랭 로브그리예-오다 마코토로 이어지는 "작가 대 작가의 난처한 상황"에 관한 이야기를 알아보려고 꺼낸 책들 중에 오다 마코토의 세계 일주 여행기 <나는 이렇게 보았다>가 있었는데, 필요한 부분을 확인하고서 다른 부분을 마저 뒤적이다가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즉 오다 마코토가 세계 일주 도중에 멕시코에 잠시 들러서 여러 현지 작가들을 만났는데, 그중 한 명이 바로 "후안 루루호(룰포)"였다는 것이다. 문득 오에 겐자부로도 훗날 멕시코에서 교환 교수로 있을 때, 어느 술집에서 후안 룰포를 우연히 만났다는 (좀 더 극적인) 이야기가 <오에 겐자부로, 작가 자신을 말하다>라는 대담집에 수록되어 있다는 기억이 났다. 마침 후안 룰포의 대표작인 <뻬드로 빠라모>도 이미 우리말로 번역되어 나왔으니, 그의 단편들을 더 찾아보고 나중에 기회가 되면, 이번에는 후안 룰포-오다 마코토-오에 겐자부로, 이렇게 세 명의 작가를 엮어서 이야기를 해 봐도 재미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내친 김에 그 책의 표제작인 후안 룰포의 단편을 읽어보고 (내용만 놓고 보면 가르시아마르케스의 중편 <어느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와도 유사하다. 물론 제목에 깃든 절박함과 아이러니는 오히려 르완다 내전 논픽션인 <내일 저희 가족이 죽게 되어서 알려드리려고 합니다>[*]에 더욱 가깝겠지만 말이다) 이왕 책을 꺼낸 김에 다른 작품이 뭐 있나 싶어 살펴보니, 훌리오 꼬르따사르와 오라시오 끼로가의 이름이 눈에 띈다. 양쪽 모두 기괴하고 환상적인 내용의 단편들을 남긴 작가들이니 반가운 마음에 "드러누운 밤"과 "목 잘린 암탉"을 읽어보았다.(읽다 보니 이전에 다른 데에서 본 작품들이었다).


키로가의 작품 중에서 내가 맨 처음 읽은 "깃털 베개"도 상당히 섬뜩한 편이었는데, "목 잘린 암탉"도 그보다 더하면 더하지 못하지는 않은 내용이었다.(한편으로는 뭔가 좀 작위적이라는 느낌도 들고, 또 한편으로는 지금처럼 "정치적 공정성"에 목을 매는 세상에서는 자칫 논란이 될 것도 같은 내용이다). 창비세계문학 단편선에서는 각 작품 말미에 "더 읽을거리"라고 해서 그 저자의 다른 번역본을 소개해 놓았는데, 키로가의 경우에는 단편 "깃털 베개"와 단편집 <밀림 이야기>가 나와 있었다. 그제야 이전에 사다 놓았던 키로가의 책이 하나 더 있다는 생각이 나서, 책장을 뒤져 <밀림 이야기>를 찾아보았다. 


우루과이 출신의 작가 오라시오 실베스트레 키로가(Horacio Silvestre Quiroga, 1878-1937)가 1918년에 발표한 이 단편집은 러디여드 키플링의 <정글북>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으로 평가된다. 원래는 아홉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우리말 번역본 <밀림 이야기>는 여기에다가 단편 "아나콘다"(1921)를 덧붙여서 모두 열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위에 언급한 키로가의 다른 "섬뜩한" 단편들을 읽고 나서 적지 않은 기대감을 품은 (나 같은) 독자로선 실망스러울 수밖에 없게도, <밀림 이야기>는 오히려 동물 우화에 가까운 내용이고, 번역서 표지에 나온 것처럼 "가족이 함께 보는 동화" 수준이다.


그것도 단순히 밀림에 사는 동물들 사이의 이야기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종종 인간과 동물의 접촉이 이루어지는데 이때마다 인간은 동물에 비해 좀 더 우월한 존재로 묘사되거나, 또는 동물이 적극적으로 인간을 도와주는 것으로 묘사되기 때문에, 어쩐지 천편일률적이라서 재미가 없게 느껴진다. 그나마 맨 마지막에 첨부된 "아나콘다"에 가서야, 이전까지의 단순한 우화보다는 좀 더 복잡하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현대 독자의 구미에 맞는 작품이 등장한다.(다시 말해 '침입자'인 인간 대 '자연의 수호자'인 뱀들의 대립 구도가 펼쳐진다는 것인데, 이것 역시 현대 독자가 선호하는 또 다른 천편일률성은 아닐지).


키로가의 이전 단편들에서 너무나도 강렬한 느낌을 받았던 나로선, '어린이를 위한 잔인하지 않은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이 책의 어조며 내용에 적잖이 당혹스러웠다는 (솔직히 말해서 '실망스러웠다는') 말을 슬그머니 덧붙이고 싶다. 물론 불평하는 것은 아니다. 번역자는 콜롬비아의 보고타에 있는 서점에서 우연히 원서를 발견해서 번역을 하게 되었다고 회고했는데, 덕분의 키로가의 다른 작품을 읽게 된 한국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감사해야 할 이유가 차고도 넘칠 것이다. 특히 번역자가 맨 끝에 덧붙여 준 인간과 뱀들의 전쟁 이야기만으로도 학살과 폭력과 유혈은 충분하다고 할 수 있을 터이니까.





[*] 이거... 나중에 언젠가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내일 우리 가족이 죽게 될 거라는 걸 제발 전해주세요>라고 정해놓은 우리말 번역본은 제목을 상당히 잘못 붙여 놓았다. 원래는 본문에서 대학살의 희생자 가운데 한 명인 목사가 대학살의 공모자 가운데 한 명인 자기 상관 목사에게 편지를 보내서 구명을 요청하는 내용인데, 여기서 핵심은 절박한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웃사람에게 보내는 편지인 까닭에 최대한 감정을 배제하고 사무적인 어조로 끔찍한 소식을 전한다는 아이러니에 들어 있다. 우리 식으로 표현하자면, 대략 "내일 저희 가족을 죽이겠답니다! 제발 살려주세요!" 하는 격한 외침을 "연락 드린 까닭은 다름이 아니오라, 내일 저희 가족이 죽게 되었다는 연락을 받아서입니다" 운운 하는 사무적인 어조로 서술했다고나 할까. 그런데 번역 제목은 본문의 해당 구절과도 다를 뿐더러, 절박한 용건과 사무적 어조라는 두 가지 이질적인 상황이 맞물리면서 빚어내는 처절한 아이러니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