홉스봄의 재즈 책이 나왔다기에, 그 소문만 무성하던 JAZZ SCENE이 번역된 것인가 싶어 알라딘의 책 소개를 확인해 보니, 이전에 <저항과 반역, 그리고 재즈>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던 책에서 "재즈" 부분만 똑 떼어내어 번역한 것이라고 한다.(아울러 JAZZ SCENE의 출간을 위해 홉스봄 쪽 저작권 관리자와 교섭했지만, 저자가 생전에 이 책의 재간행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결국 번역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는 일화가 덧붙여져 있다. 왜 하필 그 책을 저자가 "흑역사"로 간주했는지는 또 하나의 수수께끼로 남을 것 같다). 


그나저나 알라딘의 책 소개에 나와 있는 (아마도 출판사의 "보도자료" 내용으로 보이는) 정보 가운데 한 가지 잘못된 것이 있는데, 바로 홉스봄의 저서 가운데 <원시적 반란>(Primitive Rebels, 1959)을 "재즈 책"이라고 소개한 부분이다. 사실 홉스봄의 초기작인 <원시적 반란>은 이후에 나온 <의적의 사회사(밴디트)>와 함께 이른바 "의적"이라는 사회 현상의 특징과 의의를 설명한 그의 중요한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우리말 번역본도 과거에 <원초적 반란>으로 나왔고, 개정판은 <반란의 원초적 형태>라는 제목으로 나왔다).


어쩌면 <저항과 반역, 그리고 재즈>와 <재즈 동네>, 이렇게 두 권을 거명하려다가 실수한 것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한데, 혹시나 이 두 권 말고 홉스봄의 또 다른 재즈 관련서가 있다면 제목이 무엇인지 궁금해지기도 한다.(왜냐하면 인터넷을 뒤져도 그런 게 있다는 이야기는 없으니까). 현재 <저항과 반역, 그리고 재즈>는 품절이므로, 비록 일부분이기는 해도 새로운 번역서가 간행된 것은 반가운 일이라야 하겠지만, 그렇다면 원서에서 "저항과 반역"에 해당되는 나머지 부분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건지 궁금하기도 하다.


홉스봄이 재즈 광이었다는 이야기는 익히 알려진 바 있지만, 정작 자서전인 <미완의 시대>에서는 생각만큼 많은 지면이 할애되지 않아서 아쉬운 면이 없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는 최근 들어 이 주제에 대해 다시 한 번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 얼마 전에 헌책방에서 구입한 <문화와 이데올로기와 정치>(송무 옮김, 청계연구소, 1987)라는 책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글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사회과학 편역서인 줄 알았는데, 그중 토니 코우라는 재즈 연주자가 쓴 "홉스봄과 재즈"라는 글이 있었다. 



20여 년 전에, 내가 재즈 음악가로 런던에서 일을 하기 시작했을 때에, 나는 곧 한 남자를 알게 되었다. 그는 순한 독수리 같은 외모에 어딘지 당당해 보이는 풍채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재즈 클럽이나 연주회 같은 데에 자주 드나들었는데, 지금은 없어진 올드 콤프톤 가의 다운비트 클럽 같은 데에서 종종 재즈 음악가들과 어울려 한 잔 하면서 담소를 즐기는 모습을 보이곤 했었다. 우리 재즈 음악가들은 대부분 그를 "프랜시스 뉴튼"이라는, 재즈의 충실한 지원자이며, 재즈에 관한 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었고, 사실 지금도 그렇게 알고 있다. 물론 보면 볼수록 그에게는 다른 면이 있다는 것을 느끼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런 인상은 분명히 "이것저것 잘 안다"고 할 수 있는 어떤 사람이 그를 "에릭"이라고 부르고, 사람들이 그를 "에릭 오즈본"인가로 들리는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듣고 더욱 확고해졌다. (153쪽)



이렇게 시작되는 글이다 보니, 상당히 의외의 자료이다 싶은 생각이 들어서 더 이상은 살펴보지도 않고 구입했는데, 나중에 집에 와서 찬찬히 살펴 보니, 책 표지 한구석에 아까는 못 보았던 다음과 같은 문구가 적혀 있었다. "에릭 홉스봄 기념 논문집." 알고 보니 1982년에 홉스봄의 65세 정년 퇴임을 기념하기 위해 동료와 제자의 글을 모아 만든 기념논총의 번역서이고, 맨 앞에 김우창 선생의 해제가 붙어 있다.(원서에는 17편이 글이 수록되었지만, 우리 실정에 안 맞는 4편은 제외했다고 나온다). 


여하간 홉스봄이 쓴 재즈 연주자 이야기 말고, 재즈 연주자가 쓴 "재즈 애호가" 홉스봄 이야기가 궁금한 사람에게는 흥미로운 자료가 될 것도 같다.



      



왜 나는 자꾸 이 두 가지가 똑같다는 생각이 드는 걸까. 코스프레를 하겠다며 네모난 종이 상자에 GUNDAM이라고 적어 놓는다고 건담이 되지 않는 것처럼, 평범한 유리병에다가 CAMUS라는 이름을 적어 놓는다고 그게 과연 카뮈와 무슨 연관이 있는 물건이 되겠는가. 차라리 모 출판사의 기념품처럼 저자 얼굴 캐리커처라도 집어 넣는다면 그건 또 이해가 되겠지만, 달랑 이름만 적어 놓고 기념품이라니, 이건 아무리 봐도 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옆에 있는 "박스 건담"의 경우처럼, 또는 언젠가 본 "한글 인공기"의 경우처럼 이름과 대상의 괴리랄까 하는 것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로 기록해 두어야 할 듯.



*** 그나저나 언제부턴가 알라딘 서재에 사진을 올리면 크기 조정이 안 된다. 얼마 전에 지인과 통화를 하다가 소프트웨어 최신 업데이트를 하면 유용한 기능은 슬그머니 빼버리고, 쓸데없이 자잘한 기능만 마구마구 추가해서 움직임만 둔하게 만든다고 투덜거렸는데, 알라딘 서재도 예외는 아닌 것 같다. 마이리뷰와 마이페이퍼를 오락가락 하게 해서 (사실은 오락가락도 제대로 안 되고... 하여간 이상하다) 이상한 카테고리에 들어가 있게 하고... 어째서 그럴까. 하긴 언제부턴가는 저작권 위반이니 뭐니 헛소리까지 하면서 흔한 "짤방"조차도 못 올리게 했었지. 이상하다 이상해.





그레이스 슬릭의 DREAMS(시완레코드, 1998)를 오랜만에 꺼내서 듣다가, 문득 그 속지의 해설을 읽다 보니 한 가지 의아한 구절이 등장한다. 즉 슬릭과 전 남편 폴 카트너(Paul Katner)가 BLOWS AGAINST THE EMPIRE라는 앨범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앨범은 Hugo Award를 과학 소설 작가로 널리 알렸던 최초의 음악 작품이 되었다”라는 구절이 등장한 것이다. 하지만 ‘휴고 상’은 말 그대로 SF 분야의 권위 있는 ‘상’이지 ‘작가’가 아니다. 도대체 무슨 영문인가 싶어서 위키피디아의 이 앨범 페이지를 살펴보니 이런 설명이 나온다.


폴 카트너는 SF 팬이었던 관계로, 이 작품을 일종의 ‘컨셉 앨범’으로 삼고 ‘자유를 찾아서 지구를 떠나 우주선을 타고 우주로 향하는 사람들’에 관한 SF 줄거리를 덧붙였다. 이 아이디어는 로버트 하인라인의 <므두셀라의 아이들>로부터 차용한 것이어서, 내친 김에 저자에게 편지를 보내서 그 내용을 써도 되느냐고 허락을 구했더니, 하인라인은 지금껏 자기 아이디어를 차용한 사람은 많았지만 정식으로 허락을 구한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라면서 흔쾌히 허락했다고 한다. 심지어 1971년에는 휴고 상 ‘최우수 극작품’ 부문에 후보로도 올랐다.


짐작컨대 시완레코드에서 쓴 해설의 이상한 구절은 아마도 이 내용을 오역/오해한 것으로 보인다. 즉 문제의 구절은 “이 앨범은 과학 소설 분야의 권위 있는 상인 Hugo Award 후보로 오른 최초의 음악 앨범이 되었다” 정도가 어울리지 않을까. 아쉽게도 1971년의 휴고 상 ‘최우수 극작품’ 부문에는 ‘(후보 가운데) 수상작이 없다’는 결론이 나오고 말았다.(참고로 그해의 ‘장편소설’ 부문 수상작은 최근 다시 재출간된 래리 니븐의 <링월드>였다). 아쉽게도 내가 가진 하인라인 전기는 1948년까지의 이야기라서 이 앨범 관련 정보는 없었다.


여하간 시완 레코드의 실수를 보니, 문득 예전, 그러니까 자료가 지금처럼 많지 않았던 시절에는 참 답답하게도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렇게 궁금한 것이 있어도 제꺽제꺽 해결되는 걸 보면, 나처럼 궁금한 것 많은 사람에게는 어쨌거나 세상 살기가 더 좋아지기는 좋아졌다고 해야 할는지.



나딘 고디머의 타계 소식을 아침에 바깥양반이 스마트폰으로 확인해 말해준다. 그러더니 잠시 후 ‘에이즈로 죽은 모양이다’라고 덧붙인다. 그가 에이즈 환자였다는 사실은 금시초문이어서 구글링을 해 보았더니, 생전에 HIV/AIDS 퇴치를 위해 노력했다는 이야기는 나오지만 본인이 감염자였다는 이야기는 안 나온다. 기사 하나 똑바로 못 읽고 헛소문을 퍼트리느냐고 핀잔을 주었더니만, 경향신문 기사에 그렇게 나와 있다는 거다. 해당 기사를 검색해 보니 실제로 “HIV에 감염된 고디머는 만델라의 뒤를 이은 타보 음베키 정권이 에이즈 근절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등 말년까지도 사회 참여에 헌신했다”고 나온다.(#여기)


아마도 위키피디아에 나온 “HIV/AIDS 관련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She was also active in HIV/AIDS causes)라는 구절을 기자가 잘못 옮긴 것이 아닐까.(active 와 positive 를 헛갈리기라도 했나). 평온히 숨을 거둔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우리나라에서만큼은 졸지에 에이즈 환자로 돌변한 셈이 되었다. 이런 간단한 내용조차도 틀려 버리면 도대체 뭘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과연 얼마 만에 고쳐지는지 궁금해서 댓글이나 이메일로 지적해주지 않고 가만 기다려 보았는데, 하루가 다 지난 지금까지도 전혀 고쳐지지 않은 상태이다. 요즘 수준 미달의 기자를 가리켜 ‘기레기’라고 부르는 것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알라딘 로그아웃을 하다 보니 문예출판사에서 나왔던 마야 앤젤루의 <새장의 새> 신판 광고가 나오기에, 도대체 왜 또다시 멀쩡한 책을 표지 바꿔서 내놓는가 궁금해서 클릭해 보니 뜻밖에 저자의 타계 소식이 나온다. 벌써 한 달도 넘은 이야기라는데 신문도 방송도 열심히 보지 않다 보니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트위터인지 뭔지 하는 걸 하면 이런 소식은 좀 더 빨리 접할 수 있는 걸까? 원래도 늘 한 박자 늦게 소식을 전해 듣고 하는 버릇이 있었지만, 요즘에는 어쩐지 이렇게 까맣게 모르고 살다가 뒤늦게 먹먹해지는 기분이 드는 경우가 늘어나서 해 보는 말이다. 


<새장에 갇힌 새가 왜 노래하는지 나는 아네>는 그녀의 자전 소설이고, 대단한 베스트셀러였으며, 상당한 논란을 (예나 지금이나) 불러 일으켰고, 무엇보다도 무척이나 감동적인 책이었다고 기억한다. 내가 처음 읽은 판본은 <아칸소는 깊은 생각에 잠겨 있다>라는 다소 뜬금없어 보이는 제목의 (마침 클린턴 정권 때에 나온 책이다 보니, 어쩐지 아칸소 주지사 출신의 대권 주자를 둘러싼 정치 스릴러처럼 보이기도 했다) 번역본이었는데, 이걸 읽고 너무 좋아서 사방팔방에 소문을 내고 다녔던 (그러나 이후에 나온 신판의 판매지수를 보면 별 성과는 없었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난다. 


저자가 어린 시절 겪었을 법한 인종차별에 대한 고발로도 읽어볼 수 있지만, 또한 최근 들어 자주 논의되는 아동 성폭행과 관련해서는 범죄 피해자의 수기로도 읽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의붓아버지에게 강간당한 이후에 재판까지 가지만, 피해 아동이 당시의 상황을 조리 있게 설명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무죄 판결이 나오는데, 이런 상황은 오늘날과도 크게 다르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이 책이 두 번 번역되었던 것을 제외하면, 에세이집 <떠날 때는 아무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와 <딸에게 보내는 편지>가 번역된 것으로 기억한다.


두 권 모두 주저인 <새장의 새>를 읽은 사람이라야만 제대로 재미를 만끽하며 읽어볼 만한 (역시나 인종과 여성에 관한 생각이 주를 이루는) 소품 모음집이다. 이 사람을 이야기할 때에는 그 이름의 "표기" 때문에 약간 헛갈리곤 하는데, 왜냐하면 지금 알라딘에서 판매되는 책들도 "마야 안젤로", "마야 엔젤루", "마야 안젤루" 등으로 제각기 표기되기 때문이다. 위키피디아의 발음 표기를 보면 "마이어 앤절루"가 그나마 비슷해 보이는데, 어쩐지 혼동의 가능성을 또 하나 늘려놓는 것도 같다. 늦었지만 명복을 빈다. 어쩐지 올해에는 세상을 뜨는 작가가 유난히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