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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정하고 뜯어보면 뭐가 더 나올지 모르겠지만, 일단 알라딘 미리보기로 뒤적뒤적 하다가 눈에 띈 몇 가지만 지적하자면 :

 

14쪽, 위에서 9행:
최대 암석인 에어스 록(혹은 울루루 족을 더 존중하는 의미에서 사용하는 원주민의 이름)의 본고장이다.

==> 괄호 안의 원문은 or Uluru to use its now-official, more respectful Aborginal name, 즉 "(오늘날의 정식 명칭 겸 보다 전통을 존중하는 명칭을 따르자면 '울루루')"라고 해야 한다. 울루루 족을 존중한다는 게 아니라, 백인 식 명칭인 "에어스 록"으로 일컬어지는 거대 암석의 원주민 식 명칭 겸 정식 명칭이 "울루루"라는 뜻이다.

 

14쪽, 위에서 10행:
이 나라에는 다른 어떤 곳보다 매혹적인 것이 많다. 세계에서 가장 독성이 강한 뱀 10종은 모두 이곳에 있다.

==> 황당한 오역이다. 원문은 It has more things that will kill you than anywhere else. 여기서 kill 은 "매혹적인 것"이나 "죽여주는 것"의 뜻이 아니라, 정말로 "사람 죽일 만한 것"이나 "생명에 위협이 되는 것"이 맞다.

 

15쪽, 밑에서 4행:
쿡 선장이 오스트레일리아를 발견한 장본인이 아니며, 당시에는 실제로 선장도 아니었다는 사실에 연연하지 말라.

==> 여기서 "선장이 아니었다"(he wasn't even yet a captain at the time of his visit)는 말은 아마도 쿡이 제1차 항해 당시에 "해군 대령"(captain)이 아니라 "해군 대위"(lieutenant)였다는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따라서 위의 번역문에서도 "선장이 아니었다"가 아니라 "해군 대령이 아니었다"로 옮겨야 했을 것이며, 중의적인 표현임을 드러내기 위해 "선장(Captain)이긴 했지만, 해군 대령(Captain)까지는 아니었다" 정도로 풀어 써도 나쁘진 않았을 듯하다.

 

16쪽, 위에서 7행:
날아다니는 여우(실제로 거대한 박쥐처럼 생겼다)

==> 괄호 안의 원문은 it was actually a very large bat. 즉 "실제로 거대한 박쥐처럼 생겼다"가 아니라 "사실은 아주 커다란 박쥐였다"가 맞다. 지금의 본문대로라면 호주에는 실제로 "거대한 박쥐처럼 생기고, 하늘을 날아다니까지 하는 여우"가 있다는 뜻이 된다.

 

16쪽, 위에서 8행:
무척 커서 어른이 껍질을 타고 기어오를 수 있는 갑각류도 볼 수 있었다.

==> 원문이 crustaceans so large that a grown man could climb inside their shells 이므로, "어른이 그 안에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껍질이 커다란"이 되어야 한다. 껍질을 타고 기어오르다니... 그러면 도대체 얼마나 크다는 말인가.

 

 

 

우리나라에 번역된 빌 브라이슨의 책 치고 오역과 오타에서 자유로운 경우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어째서일까? 뭔가 아주 어려운 문장도 아니고, 아주 심오한 내용도 아닌데 말이다. 결국 번역하는 사람이나 편집하는 사람이나 작업에 임하여 철저하지 못하다는 뜻일 수밖에 없다. 가령 한 문장에서 "선장"이라고 해 놓고 갑자기 "선장이 아니다"라고 정반대의 말을 한 것이 무슨 의미인지, 호주에는 정말로 "날아다니는 여우"란 것이 있는지, 또는 "어른이 껍질을 타고 기어오를 수 있는 갑각류"는 과연 얼마나 크기가 큰 것인지에 대해서 한 번쯤 의문을 품어 보기만 했어도, 위와 같은 오류는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문제는 이런 철저함의 결여, 또는 "편집의 실종"이 현재 간행되는 책 대부분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다. 최근 내가 읽은 책 중에서는 국내서(가령 이택광의 <영단어 인문학 강의> 따위)와 번역서(가령 동녘에서 망쳐놓은 월터 카우프만의 <인문학의 미래> 따위)를 막론하고, 저자와 번역자와 편집자가 사이좋게 정신줄 놓고 만든 책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다들 껍데기는 번지르르 그럴싸하게 만들면서, 막상 알맹이의 상태에는 아무 관심이 없으니... 참으로 큰일이다. 최근 수년 사이에 디지털의 공세가 강력해졌다면서 전자책이니 모바일이니 하는 이야기가 종종 나왔는데, 사실 지금 출판계가 고민해야 할 것은 전자책도 모바일도 아니다. 오히려 출판이 다른 매체와 비교해서 가장 자신 있게 내세울 수 있는 강점에 집중해야 한다. 그 강점이란 바로 "정확성"이고, 출판에서 그 정확성을 성취하는 방법은 "편집"이다. 새로운 매체인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숱한 잡동사니 지식들(출처도 없고 근거도 없는 엉터리 이야기들)에 대항하여 구식 매체인 출판이 지닌 유일한 경쟁 요소는 정확성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인터넷의 역풍이 하도 강력한 까닭인지, 맞춤법 제대로 알고 문장 제대로 쓰는 (올바르고 정확한 우리말 따위는 바라지 않는다. 주어-서술어가 제대로 호응된 문장만 써도 감지덕지다) 저자나 편집자를 찾아보기도 힘든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사람들의 눈과 손을 거쳐 나온 최종 결과물이 이렇게 엉터리일 리가 없으니 말이다. 지금 출판계 종사자들은 뭔가 새로운 것을 찾아낼 생각보다는 오히려 원래 지켜야 할 것을 지키는 데에 열중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남이 기껏 만든 책에서 사소한 흠 몇 가지를 발견하여 침소봉대하기 일쑤인 좆 같은 독자 놈의 새끼가 하는 말에도 뭔가 새길 것은 있으리라 본다.



영단어 인문학 산책 - EBS 이택광의 어휘로 본 영미문화 
이택광 지음 / 난장이 / 2010년 6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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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에서 반값 할인 하는 걸 보고 새삼스레 떠올린 기억. 예전에 읽다가 의외로 오류가 많아서 놀랐더라는. 며칠 뒤에 생각이 나서 다시 꺼내 보니까... 상당히 심했다. 저자는 영문학과 철학을 전공하고 외국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았으며 지금은 어디 교수로 있는 모양인데... 일단 꼼꼼하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가끔은 상식의 부족이 드러나기도 한다. 영어 단어의 어원에 관해 이야기한다면서, 자료 조사가 철저하지도 않은 듯하고, 단순한 풍문이나 인터넷 검색 결과를 무비판적으로 옮겨놓는 정도로 만족한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도 든다. 이렇게 부실한 내용에다가, 어울리지 않게끔 "인문학"이라는 거창한 이름까지 걸어 놓아서 꼴이 더욱 우습게 되고 말았다.

 

사실 영어의 역사, 또는 영어의 어원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상당히 자료 조사를 폭넓고 철저하게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분야만큼 옥석이 뒤섞인 곳이 또 없기 때문이다. 워낙 다양한 의견이 혼재되었기 때문에, 여차 하면 이런저런 근거 없는 이야기(대개는 민간어원설)에 넘어가 버려서 마치 그걸 정설인 양 내세우고 망신 당하기 십상이다. 박학다식하기로 유명한 (물론 저널리스트의 박학다식이야 십중팔구 과장된 이야기이기 쉽지만) 빌 브라이슨도 영어의 역사를 다룬 <모국어>라는 책에서 단어의 어원 몇 가지를 잘못 이야기했다가 지금까지도 두고두고 잘못했다고 씹히고 있으니 말이다.(자세한 내용은 아마존닷컴의 독자 서평을 참고하시라).

 

어원에 관한 책을 쓰려면 대략 이래야 했을 것이다. 우선 이 분야의 좋은 교양서가 많이 나와 있으므로(빌 브라이슨의 책도 그중 하나다), 일단 거기 나온 자료를 참고로 하되, 인터넷 검색을 활용해서 자료를 보강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하여 정확성을 높이는 것이다.(물론 인터넷이야말로 민간어원설의 온상임을 기억하고 최대한 조심해야 하고). 방송이야 시간 제한이 있으니 그냥 넘어가더라도, 기왕 단행본으로 가공할 생각이었다면 참고한 자료나 출전을 명기함으로써, 훗날 타인이 마음놓고 인용할 수 있을 만큼의 정확성은 갖추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쉽게 말해서 "인문학"이라는 제목에 걸맞게끔 뭔가 좀 더 생각하고, 좀 더 노력해서 만들어야 하지 않았을까.

 

현재의 이 책은 너무나도 허술하다. 영어에 관한 쉬운 교양서의 외양을 하고 있지만, 정작 그 외양을 뒷받침할 만한 내용까지는 없다. 영어 이야기를 하면서 굳이 "인문학"을 들먹이는 것도 이상하고, 정작 그 제목에 걸맞은 "인문학적" 내용이 부족하다는 점은 더더욱 이상하다. 어쩌면 이 책이야말로 최근 수년 사이에 두드러진 경향, 즉 "독자의 눈높이에 맞춘다"는 구실 아래 수준 이하의 원고를 가져다가 교양서로 포장하는 "인문학 상업주의"의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까 싶다. 초판 1쇄 기준으로 이 책에 나온 갖가지 오류 가운데 대표적인 것만 몇 가지 살펴보자. 혹시 나중에는 고쳐졌을지 모르겠지만, 애초부터 이런 오류가 나왔다는 것 자체가 큰 문제다.

 

 

31쪽, 밑에서 3행,

이탈리아로 여행하기 위해서 가출을 감행하는 '십대의 괴테'를 상상하게 만드는 단어입니다. 이 어린 괴테를 사로잡았던 것이 바로 이탈리아였습니다.

 

# 괴테의 유명한 <이탈리아 기행> 이야기를 하는 대목인데, 저자는 괴테가 "십대" 시절에 이탈리아 여행을 했다고 착각한 모양이다. 하지만 그 여행을 떠난 당시에 괴테의 나이는 이미 37세였고, 바이마르 공국에서 군주의 신임을 받으며 중책을 맡고 있었다. 그렇다면 저자는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 당시의 괴테를 "어리다"고 단언하는 것일까? 저자는 이 구절에 앞서서 "제가 청소년기에 재미있게 읽었던 책 중에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이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어째서 이 구절을 쓰면서는 그 재미있게 읽었다던 책을 한 번 더 찾아보지도 않았던 걸까?

 

 

59쪽, 밑에서 11행,

실제로 bite 에는 속이다(cheat)의 뜻이 있는데, 가령 '그가 우리를 속였다'라는 걸 He bites us 라는 식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같은 맥락에서 "Dog bites man" 이라는 말은 특정한 개가 사람을 물었다는 게 아니라, 평소에 잘 일어나지 않은 사건이 일어난 걸 뜻합니다. 좀 의아하지요. 우리 상식으로 보면 개가 사람을 무는 건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인데, 잘 일어나지 않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라니요. 오히려 사람이 개를 문다면 그게 사건이 될 텐데 말이에요. 하지만 여기서 'bite' 는 개가 사람을 문 것이 아니라 '개가 사람을 속인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이건 사실 일어나기 힘든 일이잖아요. 그래서 'Dog bites man' 과 'Man bites dog' 라는 말은 비슷한 말이예요.

 

# "개가 사람을 물었다"와 "사람이 개를 물었다"는 저널리즘의 속성을 이야기할 때 나오는 유명한 말이다. 즉 전자는 일상이므로 뉴스거리가 되지 않지만, 후자는 이변이므로 뉴스거리가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Dog bites man 은 "뻔한 사건; 일상적인 일"이라는 의미로, Man bites dog 는 "희한한 사건; 뉴스 거리"라는 의미로 통용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저자는 He bites us 라는 표현이 "그가 우리를 속였다"라는 뜻이므로, Dog bites man 도 "개가 사람을 속였다"라는 뜻이라고 해석한다. 무척이나 참신한 해석이긴 하지만... 솔직히 뭘 모르고 하는 소리일 뿐이다. 사실은 양쪽 모두 "물었다"는 1차적인 의미가 맞고, 다만 사람의 경우에는 "속였다"라는 2차적인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저자는 지금 어떤 것이 먼저고 어떤 것이 나중인지를 혼동하는 셈이다. 가령 저널리즘의 속성에 관한 이야기만 보아도, Dog bites man 과 Man bites dog 는 물고 물리는 대상이 서로 뒤바뀌었을 뿐이고 피차 같은 뜻이어야만 한다. 하지만 저자의 논리대로라면 이것도 결국 "개가 사람을 속였다"와 "사람이 개를 속였다"로 해석해야 하는 것인가? 

 

또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저자의 논리대로라면, "학생이 수업시간에 떠들다가 걸려서 선생님에게 뒤통수를 맞았다"라는 문장의 의미는 사실 "학생이 선생님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의미이다. 왜냐하면 "뒤통수를 때리다/맞다"라는 표현에 "배신을 하다/당하다"라는 부차적인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논리대로라면 "뒤통수를 때리다/맞다"의 1차적인 의미가 폭행이라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오로지 2차적인 의미가 배신이라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이다.

 

 

99쪽, 사진,

 

# 이건 사실 저자가 아니라 출판사의 삽질일 것인데, "에라스무스"라고 캡션을 붙인 도판 속에다가 홀바인이 그린 "토머스 모어"의 초상화를 집어넣었다. 물론 이걸 제대로 확인 안 하고 넘어간 저자의 책임도 무시할 수 없을 듯하지만.

 

 

124-129쪽,

 

# 스팸에 관해 설명한다면서, 정작 스팸에 관한 가장 중요한 사실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없다. 즉 스팸은 저자의 말처럼 "양념된 돼지고기 햄 통조림"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구체적인 부위조차도 알 수 없는 "잡고기"로 만든 가공품이라는 점이다. 초기의 스팸(어원은 "양념된 햄")은 창자나 부스러기 고기 같은 것을 갈아서 만드는 가공품 햄이었다. 한편으로는 워낙 살코기 함량이 적었기 때문에 "햄"이라는 단어를 쓰면 안 된다는 규제를 받았고, 그로 인해 "스팸"이라는 단어를 고안했다는 설도 있다. 그래서인지 "스팸"은 애초부터 "싸구려 물건", 또는 "가짜 햄"이라는 느낌이 강했고, 결국 나중에 가서는 "스팸"이라는 말 자체가 뭔가 저열한 것, 열등한 것, 쓰레기, 가짜 등등의 의미를 담게 되었다. 저자는 몬티 파이톤의 코미디에서 스팸에 관한 에피소드를 장황하게 설명하는데, 애초에 그런 에피소드 자체가 나오게 된 배경에도 스팸의 싸구려 이미지가 있었음을 간과하면 곤란하다. 비유하자면 지금 저자의 서술 방식은 "싼 게 비지떡"이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정작 "비지"가 두부를 만들고 남은 일종의 찌꺼기, 또는 부산물이라는 사실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하지 않는 식이다. 그렇다면 왜 "비지떡"에 "저급한 품질"이나 "싸구려"의 이미지가 있는지를 어떻게 설명한다는 것인가?

 

 

183쪽, 밑에서 7행,

그런데 scapegoat 라는 말은 사실 오독의 산물입니다. 16세기에 틴들리라는 사람이 만들어낸 말이 scapegoat 인데요, goat sent into the wilderness on the Day of Atonement, symbolic bearer of the sins of the people 이라는 뜻으로 쓰였습니다. 번역하자면 "최후의 심판 날에 인간의 죄를 대신 지고 황야로 보내질 염소"라는 말입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goat 는 히브리어 azazel 이라는 말의 오역입니다. 틴들리라는 사람이 azazel 을 ez ozel 로 읽은 거죠. ez ozel 은 염소라는 뜻지만, azazel 은 유태 신화에 나오는 악마의 이름이거든요. 말 그대로 심판의 날이 오면 악마가 쫓겨날 것이라는 말이 염소가 쫓겨난다는 말로 전혀 엉뚱하게 바뀐 겁니다.

 

# 영문학과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의 필수적인 배경 지식 가운데 하나인 성서에 대한 저자의 무지가 드러나는 대목이다. 저자는 우선 Day of Atonement, 즉 매년 있는 "속죄의 날(욤 키푸르)"을 세상 종말의 "심판의 날"로 오독한다. 아울러 Tyndale 을 "틴들리"라고 써 놓았는데, 보통은 "틴들"이라고 하지 않던가. 아울러 azazel 에 대한 설명도 뭔가 어설프다. 구약 레위기에 보면 매년 속죄의 날이 되면 염소 두 마리를 골라서, 그중 한 마리는 하느님에게 바치고, 또 한 마리는 "아사셀을 위하여 희생 염소"로 삼는다는 설명이 나온다. 즉 이 염소는 "아사셀을 위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모두 짊어지고 황야로 쫓겨나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서 저자가 언급한 "아사셀"이 무엇이냐인데, 이에 대해서는 성서학자들 사이에서도 아직까지 논란이 분분하다. 

 

히브리어 원문의 "아사셀을 위하여"(영어로는 for Azazel)는 "아사셀을 향하여"나 "아사셀로 삼아서"라고도 해석이 가능하다. 첫 번째의 경우, "아사셀"은 어떤 신이나 악마를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 있다. 두 번째의 경우, "아사셀"은 광야나 언덕 같은 지형지물을 가리킨다고 해석할 수 있다. 세 번째의 경우, "아사셀"(azazel)은 "보낼 염소"(ez ozel)의 오기라고 해석할 수 있다. 흔히 사람들이 "틴들의 오역"이라고 일컫는 것은 이 영어 성서 번역자가 "아사셀로 삼아서"을 "보낼 염소로 삼아서"로 해석해서 "희생양(염소)"(scapegoat)라는 영어 단어를 고안한 것을 가리킨다. 하지만 앞서 말한 것처럼 "아사셀"의 의미가 확정되지 않은 상황이라면, 이 해석을 어느 누구도 "오역"이라고 단정하기는 곤란하다. 실제로 틴들 말고 70인역(그리스어)이나 불가타(라틴어) 성서 역시 "아사셀"을 "보내질 염소"라고 옮기고 있으므로, 이쯤 되면 "아사셀"을 "희생양"으로 옮긴 것도 충분히 이유가 있어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의 본문에 나온 저자의 단언, 즉 "심판의 날이 오면 악마가 쫓겨날 것이라는 말이 염소가 쫓겨난다는 말로 전혀 엉뚱하게 바뀐 겁니다"라는 주장은 틀린 것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실제로 "속죄의 날"에 "염소가 쫓겨난다"는 것은 성경에도 나온 엄연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틴들의 번역에서 엉뚱하게 바뀐 것이 있다면, "아사셀"이라는 뜻모를 단어를 그 "쫓겨나는 염소"를 가리키는 명칭으로 옮긴 것뿐인데,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이것도 아직 틀렸다고 단언하기는 곤란하다. 그리고 저자의 주장과 달리, "아사셀"이 정말로 "악마"인지, 또 다른 무엇인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짐작컨대 이 단어가 "악마"로 여겨지는 것은 더 후대의 전통에서 수립된 해석일 것이며, 결국 그것 역시 레위기의 해당 구절에 대한 해석의 어려움을 보여주는 사례에 불과할 것이다.

 

 

184쪽, 위에서 8행,

히브리어로 낙타(gamta)와 밧줄(gamla)의 발음이 비슷해서 오역을 했다는 주장이 바로 그겁니다.

 

# 신약성서에 나오는 예수의 유명한 비유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처럼 어렵다"에 대한 설명이다. 저자의 실수는 구약성서가 히브리어로 작성된 반면 신약성서는 아람어와 그리스어로 작성되었다는 점을 몰랐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대목에서 "히브리어"를 운운 하는 것이 첫 번째 잘못이고, 그러면서도 정작 아람어 gamta 와 gamla 를 버젓이 적어놓고 히브리어라고 우긴 것이 두 번째 잘못이다.("아람어"를 "아랍어"나 "히브리어"로 잘못 쓰는 경우는 다른 책이나 기사에서도 제법 흔히 찾아볼 수 있다. 가령 이미도 같은 자칭 영어 전문가의 기고문에도 그런 실수가 나타나 있다. 그 사람도 결국 어디서 들은 풍월을 따라 적었다는 뜻이다). 사실 이 오역 논란 역시 진위 여부는 불확실하다. 어떤 사람은 그리스어의 낙타(kamelos)와 밧줄(kamilos)의 유사성을 근거로 드는데, 이처럼 낙타와 밧줄이 애초부터 비슷한 어원에서 시작되었다면, "밧줄과 바늘귀"를 "낙타와 바늘귀"로 바꿔 부르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지"가 "당근이지"로 변한 것처럼 자연스러운 말장난이었을 수 있다. 그렇게 보자면 이건 사실 오역까지는 아닐 것이다.


뒤늦게 하나 추가. 위에서 "신약성서는 아람어와 그리스어로 작성되었다"라고 했는데, 신약성서의 각 편 가운데 오로지 아람어로만 이루어진 편은 없다. 다만 그리스어로 이루어진 본문 중에 "달리다굼", "에바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처럼 일부 아람어 구절이 등장하는 것뿐이다. 멜 깁슨의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패션 오브 크라이스트)>에서는 대사 가운데 상당수를 아람어로 처리했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는데, 사실 여기서 사용된 아람어는 예수 당시가 아니라 훨씬 더 후대의 아람어에 근거해서 재구성한 인공물에 불과하다. 그러면서 정작 영화를 홍보할 때에는 마치 아람어를 이용해서 더 예수 당시의 실상에 가깝다고 주장해서 성서학자들로부터 빈축을 산 바 있다.

 

 

202쪽, 위에서 8행,

서인도 제도에서 들여온 기니피그라는 애완동물을 거래할 때 지불하는 화폐로 기니라는 금화가 사용됐는데, 한 마리에 1기니라는 비싼 가격으로 팔렸다고 합니다.

 

# 기니피그의 이름에 관한 설명인데, 이것도 조금만 더 조사해 보았으면 근거가 없는 이야기임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위키피디아의 "기니피그" 항목을 보면, "기니피그"라는 이름이 처음 영어에 등장한 것이 1653년의 일인데, 정작 "기니"라는 화폐가 처음 도입된 것이 1663년의 일이라고 나오기 때문이다. 기니피그의 이름 어원에 대해서는 이것 말고도 여러 가지가 있다. 내가 저자에게 바란 것은 차라리 이런 다양한 "썰"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해 주는 거였다.

 

 

242쪽, 밑에서 1행,

이들은 다소 재밌는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는데, 애플 컴퓨터 로고와 아이비엠 컴퓨터 로고를 번갈아 보여주는 실험을 했답니다. 그런 뒤에 장난감 브릭을 사용해서 할 수 있는 만큼 이름을 짓도록 했는데, 그 전에 비해 훨씬 창조적인 결과가 나왔다고 합니다.

 

# 저자는 <사이콜로지 투데이>라는 잡지에서 "제이 딕시트와 매츄 헛슨이라는 싸람이 쓴 글 중에서 Logos: Branded for Life 라는 게" 있다면서, 그 기사에 나온 심리학 실험 결과를 위와 같이 설명한다. 그런데 나는 솔직히 "장난감 브릭을 사용해서 할 수 있는 만큼 이름을 짓도록" 하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는 거다. 구글에서 Logos: Branded for Life 라는 제목으로 검색해 보니 <사이콜로지 투데이>에 나온 짤막한 기사(마치 박스 기사 같은)를 열람할 수 있었는데, 원문은 이러했다. Then they were asked to name as many uses for a brick as they could think of. 즉 "곧이어 장난감 브릭의 용도를 최대한 많이 생각해 내서 말해 보라고 요청했다"는 뜻이다. 여기서 name 은 "이름을 짓다"가 아니라 "말하다"로 해석해야 맞다. 원문의 요지는 아이비엠보다 애플 로고를 보여주었을 때, 사람들이 내놓은 답변에서 창의성도 더 높아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애플"이라는 브랜드를 "창의성"과 연결시켜 생각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결국 저자의 설명은 원문의 짧은 기사를 잘못 옮긴 것은 물론이고, 그 요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셈이다.

 

 

320쪽, 위에서 9행,

license 에는 이외에 방종, 제멋대로 하다는 뜻도 있습니다. 007 영화 시리즈 중에서 16탄 제목이 <살인면허>이지요. 여기에 쓰인 license 가 그 이중적 의미를 잘 드러낸 제목이기도 해요. 허가증이면서도 제 맘대로 죽일 수 있는 권리를 뜻하니 말입니다. 이렇게 license 가 방종의 의미로 쓰이게 되는 것은 15세기 중엽부터입니다. 허가증을 남발해서 고충을 겪는 이들이 생겨서 이런 게 아닐까 싶군요.

 

# license to kill, 즉 "살인면허"라는 것은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서 영국의 비밀 기관에서 활동하는 주인공에게 부여된 면책 특권을 말한다. 즉 이 특권을 지닌 사람은 임무 수행을 위해서라면 심지어 살인을 하더라도 무방하다는 뜻인 것이다. 이 시리즈에서는 "살인면허" 소지자를 특유의 암호명으로 부르는데 그게 바로 00- 이라는 숫자다. 즉 007은 "살인면허" 소지자 가운데 "일곱 번째 사람"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여기서 license 는 말 그대로 "면허"일 뿐이지, 이걸 "방종"과 연관시켜 이야기하는 것은 과도한 확대 해석이다. 그렇게 따지자면 driving license 역시 "방종"과 연관시켜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결과만 놓고 보면 driving license 역시 종종 인명 사고를 낸다는 점에서는 "살인면허"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바깥양반 따라서 옆 동네 도서대여점까지 마실 갔다가, 난생 처음 그 안에 들어가 보았다. 평소에는 좁고 사람 많은 데 있기 싫어서 항상 밖에 있었지만, 날씨도 쌀쌀하니 어쩔 수 없이 들어가 본 거다. 뭐가 있으려나 하고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한쪽 구석에 꽂혀 있는 나가이 고의 <마징가 Z>와 <그레이트 마징가>를 발견했다. 오오... 이거 <마징가 Z>의 1권과 2권만 갖고 있던 참이라서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 아직 모르던 차였다. <그레이트 마징가>는 나왔다는 이야기만 듣고 실물은 처음 보는 셈이었고. 양쪽 모두 지금은 절판이고 중고도 가격이 제법 센 편이어서, 여간 운이 좋지 않은 한 내가 입수하기는 쉽지 않을 듯했다. 그래서 이왕 도서대여점에 왔으니 이거나 빌려가야겠다 싶어서, <마징가 Z>의 3권과 <그레이트 마징가>를 빌렸다. 집에 돌아와서 1-2권을 꺼내놓고 다시 읽기 시작했다.

 

<데빌맨>에서 실감한 바이지만 나가이 고의 만화를 보면 즐겁고 발랄한 느낌보다는 어딘가 어둡고 섬뜩한 느낌이 두드러지는데, <마징가>의 경우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주인공인 카부토 코지는 과학자인 할아버지가 비밀리에 만들어 놓은 초합금 로봇을 조종하게 되는데, 이때 죽어가던 할아버지는 그에게 "너는 어마어마한 힘을 얻었다. 이제 너는 신도 악마도 될 수 있다"고 단언한다. 이것이야말로 <데빌맨>에서 주인공이 거대한 힘을 지닌 존재로 각성할 때의 상황과도 비슷하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든다. <마징가>의 1권, 그러니까 앞부분은 주인공이 이 거대한 힘을 어떻게 장악하고 활용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이후의 2-3권은 분위기가 반전되어 이전보다는 더 경쾌한, 또는 (보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뭔가 대충대충 넘어가는 듯한 감이 두드러진다.

 

물론 1972년의 작품이라는 시대적인 한계도 없지는 않겠지만, 나가이 고라는 작가 자체가 아주 섬세하거나 설득력 있는 작품을 만들기 위해 깊이 고민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이에 비해서 잔혹 및 노출 묘사에 관해서라면 확실히 시대를 앞선 것이 사실이기도 한 모양이다. <파렴치 학원>이라는 책을 통해서 학부모의 지탄을 받았던 것은 유명한 일화로 알고 있는데, <마징가 Z>에서도 사람 몸뚱이가 갈기갈기 찢겨 나가는 장면이며, 남녀를 불문하고 불쑥불쑥 알몸으로 등장하는 장면이 종종 나온다. 그중에서도 가장 충격적인 것은 저 유명한 "아수라 백작"의 샤워 씬이다. 제3권 뒷부분에 등장하는 이 장면이 충격적인 까닭은... 일단 샤워를 하는 데에도 특유의 "두건"은 여전히 쓰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결국 샤워를 하더라도 머리는 절대로 안 감는다는 뜻인가.

 

그리고 이보다도 더... 그러니까 가장 충격적인 점은 아수라 백작의 알몸 노출이다. 문제는 이 양반...  단순히 얼굴만 남녀 반반인 줄 알았더니 온 몸이 남녀 반반이라는 거다. 그래서 샤워 씬을 보면 몸의 왼쪽 절반은 털이 부숭부숭한 남자고, 오른쪽 절반은 매끈한 여자다. 상상이 가시는가? 즉 가슴을 예로 들어보자면, 왼쪽은 널찍한 남자 가슴이지만, 오른쪽은 봉긋한 여자 "슴가"인 거다. 제1권 말미에 헬 박사가 아수라 백작의 모습을 본떠 만들었다는 괴수 로봇 역시 가슴 왼쪽은 납작한 사각형이고, 가슴 오른쪽은 봉긋한 반구형인데, 그야말로 모델을 상당히 정확하게 본뜬 셈이다. 다만 문제는... 아수라 백작의 "사타구니"는 과연 어떤 모습이냐 하는 것인데, 하나씩이 아니라 반반씩... 음, 이건 솔직히 상상이 잘 안 된다. 원작자는 상상을 해본 적이 있을까?

 

드디어 시리즈 완독을 마치고 드는 느낌은... 그래도 이 분야의 문법이랄까, 규범을 제시한 기념비적인 작품으로서의 가치는 분명히 있으리라는 것. 그러나 이제 와서 예전과 같은 벅찬 감동("기운 센 천하장사~")을 느끼기는 역부족이라는 것이었다. 그나저나 절판되어 아쉽기는 한데, 마침 <게게게의 기타로>와 <바벨 2세>를 펴낸 바 있는 AK (여기 참으로 훌륭한 출판사일세) 에서 나가이 고의 또 다른 걸작 <데빌맨>을 최근 정식 간행한 것으로 미루어... 어쩌면 조만간 "마징가" 시리즈도 다시 한 번 만나보게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해보게 된다. 그러고 보니 80년대에 간행된 해적판 만화 중에는 <마징가와 데빌맨>이라는 제목으로 마징가, 그레이트 마징가, 데빌맨(여기서는 외계인으로 묘사)이 나란히 등장하는 작품도 있었던 것 같은데...

 

 

 

 

 

 

 



모로호시 다이지로를 알게 된 것은 언젠가 우연히 구입하게 된 <사가판 조류도감>을 통해서였다. 처음에는 정말 무슨 "도감"인 줄 알고 구입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단편 가운데 몇 개는 상당히 인상적이어서, 언젠가 기회가 되면 이 작가의 다른 책도 좀 읽어보자... 했더니 마침 중고샵에 "시오리와 시미코" 시리즈가 있어서 주문했다. 마침 <게게게의 기타로>로 시작해서 괴담 만화 읽는 데에도 재미를 붙이던 차였으니.

 

처음 구입한 것은 <살육시집>과 <한밤의 무서운 이야기>였는데, 시리즈이기는 해도 단편 모음이기 때문에 읽는 데에 별다른 불편은 없었다. 표지만 보면 괴담 같지만 막상 내용은 잔혹 코미디라고나 할까. 특별히 인상적인 내용이나 개성적인 주인공이 눈에 띄지는 않지만, 몇 편을 읽다 보면 어느새 동네 주민처럼 익숙해진 시끌벅적한 인물들이 모여서 벌이는 한바탕 소동이 정답게 느껴지기도 한다.

 

이 시리즈는 모두 여섯 권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처음 구입한 두 권 말고 나머지 네 권은 며칠 전에 또다시 중고샵에서 추가로 주문했다.(현재 새책도 30% 할인을 하고 있으므로 중고라고 해야 가격차도 별로 나진 않지만). 시리즈 가운데 <살아있는 목>의 맨 끝에는 저자의 후기가 붙어 있는데, 이 시리즈를 만들면서 의외로 H. P. 러브크래프트의 "크툴루 신화" 설정을 몇 가지 가져다 썼다는 언급이 나와 있었다.

 

그제야 이 책에서 소설가 단 선생의 딸인 불가사의한 아이 "쿠트르"가 사실은 "크툴루"(Cthulu)를 잘못 표기한 이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살육시집>를 보면 단 선생 집을 찾아온 마도사들이 "베르제부르부르의 따님" 아니냐고 묻자, 쿠트르의 어머니는 "그분은 먼 친척 아주머니"라고 대답하는 대목이 나오는데, 어쩌면 "베엘제붑"(바알세불)의 친족인 악마의 하나라는 의미인지도 모르겠다.

 

그나저나 이 시리즈의 또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에피소드 가운데 상당수가 희귀본 수집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주인공 중에서 항상 해결사 역할을 도맡는 시미코의 집은 우론당(宇論堂)이라는 이름의 고서점인데, 이곳에 있는 희귀본 가운데 한 권이 종종 사건 해결의 단서이거나 또는 사건의 발단이 된다. 특히 "헌책 지옥 저택"과 "라비린스"라는 에피소드는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에 대한 패러디이다.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그림체는... 글쎄... 아무리 봐도 아주 대단하다고 감탄할 만한 정도까지는 아니다. 오히려 약간 어깨에(또는 손목에) 힘이 덜 들어간 듯한 그림체이고, 어찌 보면 뭔가 좀 엉성하고 산만해 보이기까지 하지만, 한참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럭저럭 또 익숙해지게 된다. 역설적인 표현이지만 이 만화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만화에서 정말 중요한 것은 그림이 아니라 글, 즉 이야기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알라딘 들어올 때 첫화면이 아니라 국내도서 메뉴로 들어온다. 그러다 보면 종종 뭔가 놓칠 때가 있는데... <단단한 공부>라는 이 책도 나온 지 거의 일주일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냥 우리말 제목만 봤으면 모르고 넘어갔겠는데, 흰 표지에 커다랗게 새겨진 영어 제목을 보니 윌리엄 H. 암스트롱의 책이 아닌가. 놀랍고 또 반갑다. 하여간 요즘은 원서 갖고 있기가 무서울 정도로 번역이 많이 나온다니까. 그나저나 제목이 왜 하필 <단단한 공부>가 되었는지는 모르겠는데... 여하간 나로선 <공부는 어려운 일이다>라는 원제로 더 친숙한 책이다. 원서를 구입한 것은 아마 어느 헌책방을 통해서였던 것 같은데... 저자의 아동 소설을 한 권 읽고 크게 감동받은 까닭에 혹시 이 사람의 다른 책이 있나 검색을 해보다가 알게 된 것이 아니었나 싶다.

 

내가 읽은 문제의 아동 소설은 그 전설적인 ABE 시리즈 가운데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라는 제목의 권에 수록된 두 편 가운데 하나인 <하느님의 땅>이다. 원제는 아마 Sour Land 인가 그랬지. 기억을 더듬어 보면... 20세기 초쯤의 미국 남부 한 농장이 배경인데, 어머니를 잃고 농장주인 아버지와 살아가던 3남매가 새로 들어온 흑인 일꾼 할아버지와 친해진다는 내용이다. 알고 보니 이 사람은 흑인임에도 불구하고 제법 공부를 많이 했기 때문에, 농장 식구들도 점차 경계심을 버리고 그와 친해지며 나중에는 작은 학교를 운영하도록 도와준다. 하지만 인종차별의 서슬이 시퍼렇던 당시였기 때문에 "유식한 깜둥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일부 동네 사람들이 결국 흑인 일꾼을 린치하고, 그 고용주인 백인 가족까지 위협 하면서 긴장감이 조성된다.

 

아동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인종차별과 폭력이라는 상당히 민감한 소재를 다루고 있다는 점도 특이했고, 암울한 비극(그렇다. 안타깝게도 비극이다)임에도 불구하고 값싼 용서와 화해 따위의 정형화된 결론을 내리지 않는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책을 다 읽고 나서야 윌리엄 H. 암스트롱의 다른 책이 있는지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사운더>라는 책이 눈에 띄었다. 이거... 읽어보지는 못했어도 워낙 유명한 아동 소설이고, 역시나 20세기 초의 인종차별 상황에서 흑인 가족의 애환을 다루었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버지의 남포등>이라는... 솔직히 좀 마음에 들지 않는 제목으로 나오기는 했는데, 제목이 좀 그래서인지 나로선 이 즈음에 읽은 다른 흑인 회고담류 소설보다는 좀 처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하느님의 땅>을 읽다 보면 <아버지의 남포등>과의 한 가지 흥미로운 연결 고리가 등장한다. 즉 흑인 일꾼과 주인집 아이들이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연히 "개" 이야기가 나오게 되는데, "할아버지도 개를 키운 적 있어요?" 하고 한 아이가 묻자, 흑인 일꾼이 "키운 적 있다"고 대답한다. "개 이름이 뭐였어요?" 하고 묻는자, 흑인 일꾼은 대답한다. "사운더라고 했지." 여기서 말하는 "사운더"(우리말로는 아마 "쩌렁이"라고 옮겼지)는 소설 <사운더>에 등장하는 주인공의 애완견이다. 즉 <하느님이 땅>의 주인공인 흑인 일꾼은 알고 보니 <아버지의 남포등>의 주인공 소년이었던 것이다. 시기상으로 보면 <아버지의 남포등>이 먼저이고, <하느님의 땅>은 그로부터 수십 년 세월이 흐른 다음의 이야기인 것이다.

 

언제부턴가 아동서 분야에서도 흑인 회고담류 소설이 간행되고 있는데, <아버지의 남포등> 이외에도 밀드레드 테일러의 <천둥아, 내 외침을 들어라>도 상당히 좋은 책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분야의 진짜 걸작은 마야 안젤로의 <새장의 새가 왜 우는지 나는 아네>(우리말 번역본은 제목이 하도 많이 바뀌어서 기억도 안 나네)라고 생각하지만... 음, 이건 사실 아동보다는 어른을 위한 소설이라고 해야 맞겠지. 여하간 별 다섯 개 만점으로 치자면, 별을 최소한 일곱 개 반은 줘야 할 만한 작품이다. 인종차별 문제가 미국 역사에서 참 껄끄러운 부분인데, 아동서에서도 이런 소재가 다뤄지는 걸 보면 참 대단하다. 사실 이제는 우리나라의 아동서에서도 전쟁이나 사상이나 지역 갈등 같은 민감한 소재를 다룬 작품들이 좀 활발히 나올 법도 한데...

 

그나저나 <단단한 공부>의 부제를 "내 삶의 기초를 다지는 인문학 공부법"이라고 한 것에 대해서는 약간 이의가 있다. 이 책은 단순히 인문학 분야만이 아니라 공부 전반에 대한 요령을 소개한 책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차례만 살펴 보아도 외국어, 수학, 과학, 역사를 공부하는 방법이 한 장씩 배당되어 있지 않은가. 이것만 보아도 이 책을 "인문학 공부법"이라고 단정한다는 것은 무리임을 알 수 있다. 나로선 이렇게 모든 공부를 인문학으로 환원시키는 사고방식이 상당히 못마땅하다. 월터 카우프만이 <인문학의 미래>에서 시인한 것처럼, 모든 사람이 인문학을 할 필요는 없으며, 또한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오히려 더 많은 의사와 기술자가 배출되는 것이 인류 전반의 행복을 위해서는 더 좋은 일일 수 있다.

 

따라서 학문에 입문하는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인문학적 사고방식"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과학적/논리적 사고방식"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도 논리적 사고방식과 문제 해결 방법을 소개한다는 점에서는 전자보다 오히려 후자 쪽에 더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인문학 공부법"이라는 부제는 아무리 생각해도 어울리지 않는다. <단단한 공부>라는 번역서에 대한 아쉬움은 또 한 가지가 있다. 본문이 비교적 짧고 평이한 문장으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막상 알라딘 미리보기로 서문을 훑어보니 심심찮게 오역이 엿보인다는 것이다. 출판사에서는 아마도 아동이나 청소년을 겨냥해서 내놓은 모양인데, 그렇다면 우리말로 옮기고 다듬는 과정에서 좀 더 신경을 써야 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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