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한 신화 읽기 - 바가바드기타는 인도를 어떻게 신비화하였는가
박효엽 지음 / 글항아리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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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바라타>를 뒤적이다가 생각이 나서 이전에 구입했던 이 책을 꺼내 보았다. 출간 당시에는 <마하바라타>의 일부인 <바가바드기타>에 대한 기존의 해석을 과감하게 비판했다는 책 소개를 읽고 관심을 가졌는데, 막상 책을 읽어보고 나니 무척이나 실망스럽다. 무엇보다도 저자의 서술 방식에 문제가 많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이 책에서 저자는 자기 주장을 내놓고서도 근거를 제시하지 않으며, 기껏 제시한다 하더라도 "가상 대화" 방식으로 제시할 뿐이다. 예를 들어 <기타>를 보는 간디와 타고르의 시각이 크게 다르다는 "주장"을 내놓은 다음, 곧이어 간디와 타고르를 등장시킨 "가상 대화"를 덧붙이는 식이다. 또 <기타>를 보는 라즈니쉬의 시각은 간디의 시각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간다는 "주장"을 내놓은 다음, 곧이어 간디와 라즈니쉬를 등장시킨 "가상 대화"를 덧붙인다. 물론 <기타>에 관해 간디와 타고르와 라즈니쉬가 저마다 내놓은 설명이나 해석이나 의견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굳이 "가상 대화"라는 형식을 빌어서 소개해야 하는지는 의문이다.[*] 


저자가 정말로 <기타>에 대한 현대의 여러 가지 왜곡과 과장에 대한 비판을 내놓고자 했다면, 우선 <기타>의 배경과 내용을 정확히 설명하고, 이어서 <기타>의 왜곡 및 과장의 사례를 구체적으로 들기만 했다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기타>를 바라보는 저자의 시각도 뚜렷하지 않고, <기타>를 둘러싼 쟁점에 관한 설명도 산만하기만 해서, 책 한 권을 다 읽고 나서도 <기타>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서문에서 저자는 현대의 <기타> 해석을 비판하며 “<바가바드기타>의 위대함에는 내용이 없고 선전만 있다”는 제목을 붙였는데, 내가 보기에는 이 책도 내용이 빈약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나아가 저자는 <기타>에 대한 왜곡을 비판하면서 “이미지와 구호만이 있는 곳에는 내용이 빈약하다. 내용이 빈약하면 <기타>의 위대함에 관한 구체적인 대답을 들을 길 없다”(35쪽)고 했는데, 내가 보기에는 이 책에서도 구체적인 대답을 들을 길 없기는 마찬가지로 보인다. "글항아리" 출판사에서 펴낸 "깨진 항아리"의 또 다른 사례라고 해도 무방할 듯하다.





[*] 좀 더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이렇다. 저자는 <바가바드기타>가 이른바 힌두교의 ‘성서’로 오인된 결정적 원인이 영국의 식민 지배라고 지적한다. “<기타>의 신화는 식민지가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기타>가 힌두교의 위대한 바이블이 된 것은 영국 덕택이다. 인도가 <기타>의 의의를 스스로 찾은 게 아니라 영국이 인도에 <기타>의 의의를 찾아준 것이다.”(36쪽) 그렇다면 그 뒤에는 당연히 영국이 (나아가 서양이) 저지른 <기타> 왜곡의 역사에 대한 설명이 따라 나와야 맞겠지만, 이 주제에 관한 저자의 설명은 여기서 끝이다. 그리고 다음 쪽을 보면 “전술했다시피 <기타>가 힌두교의 <성경>과 같은 위상을 차지하게 된 사연은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이던 때부터 만들어졌다”(37쪽)고 하기에, 그 "전술" 내용이 도대체 뭔가 되짚어 찾아보니, 결국 위에 인용한 36쪽의 세 문장뿐이었다. 그렇다면 37쪽에서는 이 문제에 관한 구체적 설명이 드디어 나오려나 기대하고 다음 문장을 읽어보니 달랑 이것뿐이다. “영국 학자와 인도 학자가 만나 식민지 시대의 힌두교와 <기타>에 관해 회상한다면 다음과 같은 대화를 나눌 것이라고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37쪽) 그러더니 곧이어 ‘영국인’과 ‘인도인’이라는 가상의 두 인물이 등장해서 이 주제를 가지고서 이러쿵저러쿵 나누는 ‘대화’가 소개된다.(역시나 구체적인 설명까지는 아니고, 영국이 힌두교에 경전이 하나뿐이라고 오해했고, 힌두교 개혁가도 이런 식민 지배자의 태도에 부화뇌동했다는 이야기다). 저자의 설명처럼, 어디까지나 ‘상상’에 의거해 쓴 대화이다. 쉽게 말해서 저자가 쓴 대화체 ‘소설’이라는 말이다. 분명히 ‘논픽션’이라고 생각한 책에서 가장 중요한 논증의 ‘근거’가 엉뚱하게도 ‘소설’로 대체되어 있었으니 당혹스러운 일이다. 물론 저자도 어느 정도 근거를 갖고 쓰긴 했겠지만, 왜 굳이 그래야 했을까? 나로선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며칠 사이에 <마하바라타> 요약본과 완역본을 이리 뒤적 저리 뒤적 하면서 이런저런 등장인물 이름이 좀 익숙해지고 나니 새로 눈에 띄는 것이 몇 가지 있다. 그중 하나는 <마하바라타> 완역본 제1권에 있는 "가계도"에 나온 오류이다. 이 서사시는 형제지간인 드르따라슈트라와 빤두의 아들들, 즉 사촌들이 패권을 놓고 전쟁을 벌이는 것이 줄거리이다. 한편에는 빤두의 다섯 아들(빤다와)이 있고, 또 한편에는 드르따라슈트라의 아들들("악의 축" 두료다나와 100명의 형제들)이 있고, 다양한 조연들이 둘 중 어느 한편을 드는데, 이때 두료다나의 절친 가운데 하나가 까르나라는 용사이다. 


까르나는 <마하바라타>에서 "출생의 비밀"을 가진 인물로 등장하는데, 꾼띠라는 처녀가 브라만에게서 얻은 신통력(자기가 원하는 신으로부터 정기를 받아서 아들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을 시험해 보기 위해 태양을 바라보았다가 덜컥 임신해서 출산한 다음, 이 사실을 숨기기 위해 내버린 아이이기 때문이다. 이후 까르나는 한 마부에게 구조되어 그를 아버지로 알고 자랐으며, 이후 용맹을 떨치게 되면서 "악의 축" 두료다나에게 스카우트되어 빤두의 아들들을 대적하는 강적 가운데 하나로 부상한다. 그런데 꾼띠가 훗날 빤두와 결혼했기 때문에, 까르나와 빤다와는 사실상 형제지간이다.


그런데 <마하바라타> 완역본 1권의 가계도를 보면, "까르나"는 "꾼띠의 아들"로 나오는 것과 동시에, "드르따라슈트라와 간다리의 아들"로도 나온다. 심지어 그의 아래에 "두료다나와 100명의 형제들"이 선으로 이어져 있기 때문에, 이 서사시의 내용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마치 "까르나"가 "드르따라슈트라의 아들이자 두료다나의 아버지"인 것으로 오해하기 쉬워 보인다. 구글링을 해 보니 이 가계도는 아마도 위키피디아 영어판의 "마하바라타" 항목에 나온 가계도를 설명까지 그대로 베껴온 모양인데, 빤다와와 까르나를 배열하다 아래로 내려간 두료다나 등을 손자뻘로 착각한 듯하다.(#여기)


<마하바라타>나 <샤나메>처럼 인물이 많이 등장하는 작품에서는 가계도가 사실상 필수일 수밖에 없으므로, 제작 과정에서 좀 더 신경을 썼어야 했을 것이다. 완역본 1권에는 "꾸루 가문의 가계도"만 등장하는데, 이것 말고 다른 등장인물의 가계도도 함께 실어 놓았으면 더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인도네시아 버전의 <마하바라따>와 민족사의 요약본 <마하바라타>에도 빤다와 가문뿐만 아니라 야바다/야다와와 아뜨리의 가계도가 추가되어 있을 정도이다. 아울러 조연급의 전사들 같은 경우에는 일종의 인명사전(색인까지 겸한다면 금상첨화) 같은 것도 있으면 유용할 듯도 싶다.


비록 그 스케일은 <마하바라타>에 미치지 못하겠지만, 역시나 가계도가 중요하고 또 유용한 고전을 하나 들라면, 나는 <겐지 이야기>를 들고 싶다. 여기서도 겐지의 여자 관계가 워낙 복잡한 데다가 "출생의 비밀"도 몇 가지 있기 때문에, 1권에서는 비교적 한가했던 그 모양새가 겐지의 말년을 다룬 7-8권쯤에 가면 완전히 거미줄을 연상시킬 정도로 복잡하게 뻗어 있게 마련이다. 나 역시 <겐지 이야기>의 소설 번역본을 읽을 때에는 이 가계도를 모두 이해하진 못했고, 나중에 야마토 와키의 만화를 보면서 비로소 이름과 인물을 어느 정도 연결시킬 수 있었다.(상당히 고마운 만화다!)


만화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이 가계도 문제가 상당히 미스터리하게 남아 있는 작품도 하나 있으니, 그게 바로 순정만화의 바이블로 손꼽히는 <캔디캔디>이다.(<유리가면>과 함께 내가 소장한 유일한 순정만화다!) 익히 알려진 것처럼, 주인공인 캔디는 원래 고아였지만 대부호의 양녀로 입양되어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데, 내가 특히 이 만화에서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그를 입양한 "아드레이" 가문이 (이름부터 뭔가 좀 억지이긴 하지만) 스코틀랜드계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이다.(그 동네의 특산품(?)인 킬트와 백파이프가 중요한 소도구로 등장하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미국 부호라면 맨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앤드류 카네기인데, 아마 <캔디캔디>의 저자도 20세기 초 미국의 록펠러나 밴더빌트 같은 유명한 "강도 귀족" 가문의 실화를 염두에 두고 작품을 구상한 것은 아닐까 싶다. 실제로 이 당시의 대부호들은 대저택을 건설하고, 친족을 등용할 뿐만 아니라 근친혼까지 시도해 가문의 부가 밖으로 새어나가는 것을 막았으며,  그 자제를 유럽으로 보내서 교육을 받게 했다. 물론 만화이다 보니 과장된 부분도 있고 미진한 부분도 있지만, 20세기 미국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만화 한 편을 보면서도 의외의 재미를 느낄 수 있다.


그나저나 <캔디캔디>를 오랫동안 거듭해 읽으면서 줄곧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던 한 가지 미스터리는 그 등장인물들의 친척 관계에 대한 것이다. 예를 들어 스테아, 아치, 안소니는 사촌지간이지만 "아들레이"라는 성이 아니므로, 이들은 어머니 쪽으로 이 대부호 가문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봐야 한다. 알버트가 아들레이 가문의 수장이 된 것은 유일한 "남성 상속자"이기 때문인데, 당시의 "강도 귀족"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가문의 승계는 모계가 아니라 부계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예를 들어 록펠러 1세만 해도 딸들과 사위는 경영에서 배제하고 모든 부를 외아들에게 승계한 바 있다.


가장 큰 수수께끼는 "에를로이 큰할머니"와 저 유명한 "이라이자"의 가족인 "라건" 가족의 위치이다. 알버트가 세간의 구구한 추측을 깨고 가문의 수장으로 전면에 나서자 큰할머니의 발언권이나 결정권도 곧바로 제약을 받았던 것으로 보아서, 그녀는 아드레이 가문의 일원이기는 하되 혼인으로 유입된 (예를 들어 알버트의 "큰어머니" 정도) 일원일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면 사사건건 큰할머니로부터 두둔을 받는 "라건" 가족의 정체는 뭘까. 작품 내에서 이들의 비중이 작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자면, 이들은 아드레이 가문의 방계이거나, 또는 큰할머니 친정 쪽의 친척일 수 있다.


문제는 만화 안에서는 이런 친척관계에 대한 설명이 구체적으로 나오지 않고, 그냥 "사촌"이라느니 "친척"이라느니 하는 정도로 설명되고 넘어간다는 점이다. 아마 원작 소설이 별도로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거기서도 명쾌한 설명은 없었는지, 인터넷을 뒤져 보면 일본의 열혈 독자들이 나름대로 작성한 가계도에서는 "에를로이 큰할머니"와 "라건" 가족의 관계 부분만큼은 조카라고 나오기도 하고, 아예 "알 수 없다"고 나오기도 하는 등, 의견이 일치되지 않는 듯하다. 혹시 애초에 저자는 별 생각 없이 "친척"이라고 둘러댔을 뿐인데 공연히 독자만 힘들게 머리를 굴리는 것일까.


이런 식의 "옥의 티"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을 하나 짚으라면, 나는 아드레이 집안의 상속자인 알버트의 정체가 세간에 드러나지 않은 채 오랫동안 유지되었다는 점을 들고 싶다. 이건 사실 영국의 귀족 사회에서 "아드레이 경"의 작위를 일찌감치 물려받은 상속자가 영지에 내려갔을 때, 그의 나이나 생김새나 등등을 전혀 모르는 시골 사람들이 "아드레이 경"은 나이 지긋한 노인이라 넘겨짚고 젊은 알버트를 하대한다는 식의 희극에서나 설득력을 얻을 법한 설정이다.(지금도 무슨 드라마에서 재벌 2세가 젊은 "신입사원"으로 등장해서 사람들이 깜빡 속는 것과 비슷하달까).


반면 20세기 초의 미국 사회에서 대부호의 상속자가 세간의 눈을 피해 20대까지 정체를 감추고 살아갔을 가능성은, 아무리 100년 전의 일이라 하더라도 희박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일단 언론 보도를 통해서 그의 출생이며 상속 소식이 널리 퍼져 나갔을 터이고, 설령 언론의 눈을 피한다 하더라도 사교계의 눈이나 소문까지 완전히 피할 수는 없어 보일 터이니 말이다. 물론 만화 한 편을 가지고 뭘 그렇게 정색하느냐는 비판도 있을 수 있겠지만, 언제부턴가 <캔디캔디>를 읽을 때면 나도 모르게 그 가계도를 떠올리며 궁리하게 되다 보니 생각난 김에 해 보는 말일 뿐이다.






요 며칠 알라딘 중고샵에서 안도 다다오에 관한 책을 연이어 구입했다.(누가 내놓으셨는지 모르겠지만, 복 많이 받으실 듯). 먼저 구입한 책은 <예술의 섬 나오시마>라는 것이었는데, 저자가 안도 다다오로 되어 있기에 그의 단독 저서인 줄 알았는데 실제로는 공저였다. 후쿠타케 서점(출판사도 겸하는가?)이라는 기업인이 창업주인 선친의 유지를 받들어 한때 폐기물 처리장으로도 사용되었던 일본 근해의 몇몇 섬에 현대 미술관을 건립하는 이야기인데, 안도 다다오가 만든 유명한 건물도 거기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개인적으로는 책 자체의 내용보다는 오히려 안도 다다오 관련서 가운데 하나로 생각하고 읽어야 제격일 듯하다.


그리고 며칠 뒤에는 <안도와 함께 한 건축여행>이라는 책이 있어서 구입했는데, 막상 받아 보니 딱 내가 싫어하는 "겉표지 없는 물건"이다.("이보시오, 알라딘 양반. 이게 무슨 소리요.") 건축 전문 출판사인 도서출판 국제에서는 안도 다다오에 관한 비슷한 포맷과 디자인의 책을 모두 세 권 펴냈는데, <건축을 말한다>와 <주택에 관한 사고>, 그리고 <안도와 함께 한 건축여행>이다. 앞의 두 권은 이미 갖고 있었지만 마지막 책은 없었는데, 어쨌거나 이번 기회에 짝을 다 맞췄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그나저나 <주택에 관한 사고>는 알라딘에서 "안도 다다오"가 아니라 "안등충웅"의 책으로만 나온다. 모르는 사람이 많을 듯).


그나저나 <예술의 섬 나오시마>를 읽다 보니, 거기 나온 미술관의 모습을 다른 사진으로 보고 싶어서 베개맡에 쌓아놓은 책들 가운데 하나인 TADAO ANDO: LIGHT AND WATER (New York: The Monacelli Press, 2003)를 뒤적여 보았다. 지난번에 서울국제도서전에 갔다가 미메시스에서 나온 안도 다다오 주택 작품집을 구입한 이후, 그 책을 읽으면서 참고 삼아 꺼내 놓았던 것이었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오사카에 있는 아스카 박물관이라는 건물을 보고 새삼스레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평면도를 보니 건물 대부분이 널찍한 계단으로 뒤덮여 있고, 그 아래에서 오른쪽으로 대각선 방향으로 통로인지 뭔지가 가로지른 특이한 형태였다.


그런데 평면도만 봐서는 이게 통로인지 뭔지 모르겠어서 조감도를 살펴보았는데, 그래도 여전히 이게 뭔지 잘 모르겠는 거다. 실물 사진을 찾다 보니 141쪽에 작은 사진으로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 모습이 나오는데, 가만 보니 2층 높이의 계단 아래로 마치 계곡처럼 훅 파여 있는 통로였다. 짐작컨대 이 박물관을 입장하는 사람은 그 통로를 지나가야만 비로소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도면과 사진을 비교해 보니 의문만 점점 늘어났다. 도면에 나타난 계단의 위치와 사진에 나타난 계단의 위치가 딱 맞아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통로 반대편에서 찍은 사진인 건지, 한정된 증거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안도와 함께 한 건축여행>을 배송받아서 혹시나 하고 펼쳐보았더니, 아니나다를까, 영어책에서 본 바로 그 사진이 여기에도 흑백으로 나오는 거다. 그런데 내가 본 사진과는 반대, 즉 좌우가 바뀌어 있었다. 그제야 도면과 비교해 보아도 딱 맞아 떨어지는 것을 보아서, 이 번역서에 수록된 사진이 원본이고 영어책에 수록된 사진은 그걸 뒤집어서 잘못 수록한 것으로 짐작되었다.(나중에 TADAO ANDO: DETAILS 2 (ed. by Yukio Futagawa, Tokyo: ADA Edita, 1997)를 보니 더 크고 선명한 사진이 실려 있었다. 역시나 <안도와>에 수록된 것과 좌우가 똑같이 되어 있다. 진즉에 꺼내 확인할 것을! 왜 이 책은 도면만이라 생각했을까?).


솔직히 지금까지는 국내 도서와 외국 도서의 차이가 있을 경우, 십중팔구 외국 도서에서는 맞는 내용을 국내 도서 제작 과정에서 번역이나 편집을 잘못했을 것이라고 넘겨짚는 경우가 많았다.(사실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특히 값비싼 화보집 같은 경우에는 더더욱 그렇다고 믿게 마련이었는데, 이번 사례에는 외국 도서의 경우도 어이없이 틀리는 경우가 분명히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 셈이다. 다른 출판사라면 몰라도 도서출판 국제의 책 내용이 (여기서는 "사진"이) 오히려 "맞았다"는 사실은 오히려 더 당혹스러운 데가 없지 않다. 위에 언급한 안도 다다오 책 가운데 일부는 번역이 아니라 맞춤법 수준에서부터 틀린 게 허다했으니까.


안도 다다오의 건축물이라고 하면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그가 악조건을 극복하고 지은 미니 주택들이고, 그 다음으로는 그의 건축 사무소이다. 여기는 지하부터 지상 2-3층까지인가가 탁 트여 있고, 특히 한쪽 벽면이 완전히 서가로만 채워져 있어서 마치 도서관을 연상시키는 분위기이다. 언젠가 그 사진을 바깥양반에게 보여주며 우리도 이런 집에 살았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아래에서 고등어 구우면 온 집안이 비린내 천지일 것이다"라면서 오히려 반대한다. 생각난 김에 이미지를 찾으러 구글링하다가, 이번에는 안도 다다오의 자서전에 잠깐 나왔던, 책장이 빼곡한 도서관이 "시바 료타로 기념관"의 일부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 기억에는 자서전에서 안도 다다오가 그곳을 배경으로 앉아 있는 전면 사진이 나왔는데, 별다른 캡션이 없었기 때문에 이게 과연 어디인가 싶어서 무척이나 궁금했던 기억이 난다. 대략 4-5층 높이로까지 빼곡이 쌓여 있는 책장에 가지런히 책이 꽂혀 있는 모습은 무척이나 장관이지만, 한편으로는 책을 읽는 서재가 아니라 전시용 서재가 아닐까 의구심도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시바 료타로가 생전에 간직했던 2만여 권의 장서를 보관하기 위한 일종의 진열장(공식 홈페이지에서는 大書架라고 했다)인 모양인데, 나로선 어쩐지 그중에서도 하필 2층 높이에 있는 책을 꺼내야 하는 난감한 상황이 자꾸 연상되어서 볼수록 마음이 편치 않다.[*]




[*] 안도 다다오의 건축 사무소는 "ando tadao atelier"로 구글링하면 나오고, 시바 료타로 기념관의 대서가는 "ando tadao shiba ryotaro"로 구글링하면 나온다. 다들 여기저기 퍼나르기 된 것들이어서 중복되는 것들도 있긴 하지만, 그래도 대강은 모습을 짐작할 수 있을 듯.





바깥양반이 발터 벤야민의 "이야기꾼"을 새로운 번역본으로 꺼내 읽기에 (이전에 반성완 번역본으로 몇 번 보고, 중간에 영어로도 한 번 읽는 것 같더니, 길에서 나온 "선집" 판본으로는 처음이었던 듯하다) 나도 호기심이 동해 나중에 그 책을 펼쳐 보았더니 역자의 주석에서 한 가지 오류가 보인다. "이야기꾼"은 선집 9권의 <서사, 기억, 비평의 자리>에 수록되어 있는데, "<이야기꾼> 관련 자료"로 수록된 "(아널드 베넷의 소설에 대한 서평) 벽난로 가에서: 한 소설의 출간 25주년에 부쳐"(1933)이란 글이 함께 실려 있다. 벤야민의 원주 1에 덧붙인 역자의 주석 말미에 베넷에 관한 약력 소개와 함께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한국에는 아직 그의 <시간관리론> 정도가 번역, 소개되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벤야민이 언급한 "아널드 베넷의 소설"인 OLD WIVES' TALE은 이미 우리나라에도 번역된 적이 있었다. 1960년에 을유문화사 세계문학전집 제68권으로 간행된 <어느 자매의 생애>(박진석 옮김)가 바로 그 작품이기 때문이다. 물론 반세기 전에 나온 작품이므로 역자가 미처 몰랐을 수도 있지만, 이왕 조사를 하려면 좀 더 꼼꼼하게 조사했어야만 했다. 당장 한국교육학술정보원 사이트의 도서관 통합 검색에서 "Arnold Bennett"로 검색하고 "한국어" 자료만 골라내도 금방 나오고, 게다가 웬만한 대학 도서관에는 모두 소장된 책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위와 같은 첨언을 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실용서 이외의 작품은 나오지 않았다고 단언하다 보니 명백한 오류가 되어 버렸다.[*] 


아닌 게 아니라, 아놀드 베네트를 (또는 "베넷"을) 아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지금은 아마 소설가로서가 아니라 실용서 저자로서 기억하는 사람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10여 년 전쯤에 갑자기 "자기계발서" 붐이 새삼스럽게 일어나면서 그의 실용서가 우후죽순 식으로 중복 간행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시대착오적인 세계문학전집 붐이 다시 일면서 혹시 그의 저서의 새로운 번역본이 간행되나 싶어 기대해 보았는데 아쉽게도 아직 소식이 없다. 덕분에 되블린의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의 번역본은 무려 세 개나 되는 반면, 베네트의 <어느 자매의 생애>를 비롯한 몇몇 작품들은 여전히 반세기 전 을유문화사의 세계문학전집으로만 접할 수 있는 실정이다.


그나저나 외국에서는 다른 방면에서 유명한 인물인데 유독 우리나라에서는 "자기계발" 저자로만 각인된 사람은 베네트 말고 또 하나가 더 있다. 바로 존 러보크라는 (또는 "러복"이나 "러벅"이라는) 사람인데, 이 사람 역시 알라딘에서 검색해 보면 갖가지 "인생론"의 저자로만 나온다. 하지만 그는 어려서부터 생물학에 관심이 많았고, 이웃에 살던 노년의 찰스 다윈과도 종종 함께 시간을 보냈다고 전한다.(일설에는 다윈이 말년에 우울증을 앓을 때, 모든 방문객을 거절했어도 소년 존만큼은 예외적으로 만났다고 전할 정도이다). 훗날 그는 고고학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오늘날 자주 사용하는 prehistoric(선사시대의)이라는 단어를 대중화시키기도 했고, 스톤 헨지 유적 보존에도 앞장섰다고 한다.


나중에는 금융업에 종사하고, 대학 총장을 역임하고, 국회의원으로 당선되는 등 다방면으로 활동했다고 하는데, 정작 우리나라에서는 "인생론" 저자로만 알려져 있으니 이것 역시 아이러니한 일이다. 나 역시 한동안은 그에 관해서 잊고 있었는데, 얼마 전에 우연히 알라딘 중고 매장에서 접한 어느 곤충학자의 저서에서 존 러보크의 이름을 발견하고 다시금 흥미를 갖게 되었다. 바로 메이 R. 베렌바움의 <벌들의 화두>라는 책이었는데, 거기 수록된 첫 번째 에세이에서 저자는 곤충 관련 서적을 구입하러 자주 방문하는 단골 헌책방에서 에이브베리 경이란 사람이 1916년에 간행한 <개미, 꿀벌, 그리고 나나니벌>이라는 희귀본을 구입했다고 자랑한다. 이 "에이브베리 경"이 바로 "존 러보크"이다.


아쉽게도 베렌마움의 책에서 존 러보크에 관한 언급은 더 이상 나오지 않지만, 그래도 저자가 헌책방을 돌아다니며 남들이 잘 모르는 고서를 사 모은다는 사실이 재미있었던 데다가, 시험 삼아 읽어본 몇몇 대목에서 뭔가 무척이나 독특한 유머 감각이 드러난다는 점, 게다가 존 러보크에 관한 이야기에서 좋은 인상을 받았기에 결국 그 책을 구입하고 말았다. 아직 완독하지는 못하고 여기저기 뒤적이고 있는데, 곤충학이라는 전문 분야에 대한 지식에다가 일상 생활의 여러 가지 이야기를 잘도 버무려냈다는 느낌이다. 심지어 평소에 위어드 알 얀코빅의 광팬이어서 그의 사인회에 자기 책을 들고 가서 선물하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보니 어딘가 취향이 비슷한 건가 싶어 반갑기도 하고...




[*] 이전에도 같은 역자가 채플린의 영화 "서커스"에 관한 벤야민의 글을 오역한 것을 본 적이 있는데, 그때에도 문제는 역시나 자료 조사의 미비였다. 채플린의 그 영화는 유튜브에서도 얼마든지 쉽게 검색해서 볼 수 있는 단편이었으니만큼, 이왕 번역을 하려면 최소한 저자가 묘사한 장면이 정확히 무엇인지를 이해하기 위해 영화라도 한 번 찾아서 보았어야 했을 터이다. 하지만 실상은 그러지 않아서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오류가 번역에서 등장하고 말았다. 조이스도 그렇고 벤야민도 그렇지만, 그 한 사람의 머릿속을 연구자나 번역자 한 사람이 온전히 알기란 불가능하다. 따라서 현대의 기술 안에서 가능한 자료는 최대한 섭렵함으로써 가급적 신중한 태도로 어떤 글의 외적 배경과 내적 의미를 파악해 나가는 수밖에 없다. 과거 같으면 활용 가능한 자료가 미비하다는 점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을 변명하는 이유라도 될지 모르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런 변명도 불가능한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지난 주말에 바깥양반이 "꽃보다 청춘"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더니 나스카 유적에 관해서 이것저것 물어본다. 출연자 세 사람이 경비행기로 나스카 유적 위를 한 바퀴 돌면서 저 기기묘묘한 지상화를 구경하는 장면이 나왔던 모양이다. 그런데 나로선 TV에서 나스카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즉 우리나라 방송 촬영팀이 그곳에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반갑다기보다는 약간 찜찜한 기분이 드는 것이, 꽤 오래 전에 우리나라 광고 촬영팀이 그곳에서 촬영 중에 유적 가운데 일부를 파괴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 때문이다. 심지어 나스카 유적의 보호에 평생을 바친 마리아 라이헤의 일대기인 (그러나 제목은 뭔가 참 안 어울리는 듯한) <나스카 유적의 비밀>이라는 책에도 그 이야기가 잠시 언급될 정도다. 여하간 촬영은 무사히 끝낸 모양이고, 출연진도 구경을 잘 해서 이참에 시청자도 그 불가사의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게 되었다니 한편으로는 반갑기도 하다.


사실 이럴 때를 틈타서 <나스카 유적의 비밀> 같은 책이 왕창왕창 팔리면 좋겠는데, 절판된 지 오래인 책이다 보니 참으로 안타깝게 되었다.(나스카 유적에 관해서는 워낙 구구한 억측이 많이 나왔는데, 에리히 폰 데니켄처럼 그걸 "외계인의 비행장"으로 우기는 사람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이런 식의 주장은 하나같이 근거 없다는 것이 지금은 정설이고, 한 마디로 "왜 생겼는지 모른다"고 하는 것이 아직까지는 가장 정직한 답변이 아닐까 싶다). 그나저나 오랜만에 남미 유적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들으니 꽤 오래 전에 읽었던 전규태의 남미 유적 기행문집이 생각나서 책장에서 꺼내 보았다. 전규태는 본래 국문학자로 알고 있는데, 1970년대 말에 남미 여러 나라를 여행한 체험을 토대로 잉카, 마야, 아스텍이라는 3대 고대 문명에 관한 저서를 한 권씩 펴냈다. 관련 서적이 많지 않다 보니, 비록 흑백이기는 하지만 사진 자료가 많은 이 책들이 귀중한 자료였다.[*]


이후로는 C. W. 세람의 저서라든지, 또는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등의 단행본이 여럿 간행되었고, 심지어 마추피추를 처음 서양에 소개한 하이럼 빙엄의 기행문도 번역되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 남미의 유적이라고 하면 맨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전규태의 기행문이다.(이건 영화 관련 단행본을 이야기할 때에 맨 먼저 떠오르는 것이 <신과 악마의 동화>인 것과 매한가지이다). 물론 남미를 고대 유적으로만 기억하는 것 역시 일종의 서양중심주의를 답습한 결과라고 비판하면 할 말은 없지만, 나스카 평원의 유적에서 보이듯이 참으로 수수께끼에 다름 아닌 기이한 존재들을 지켜보면 아무래도 고대 문명 쪽에 눈길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한때는 뭔가 의도와 목적이 있어서 만들어졌을 법한 것들이 어느새 그 의도와 목적이 망각되어 수수께끼로 여겨지는 것 역시 시간의 방대함과 인간의 유한함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인가 싶기도 하고.




[*] 단순히 언제 어디를 둘러보았는데 좋았다 어쨌다 하는 내용을 서술하는 기행문이 아니라, 본인의 체험보다는 자기가 방문한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자세히 설명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3대 문명에 대한 개론서 역할을 하는 책이었다. 지금 와서 다시 꺼내 보니 권말의 참고문헌 (이런 걸 적어놓는다는 것 역시 당시로선 상당히 예외적인 일이었으리라) 가운데 영어권 자료가 많은 듯한데, 사실상 저서라기보다는 오히려 편역서라고 해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