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불쑥 생각이 나서, 책장에 꽂혀 있는 브레히트의 시집을 모조리 꺼내서 읽었다. 우선 한마당의 ‘선집’에 수록된 <살아남은 자의 슬픔: 브레히트 시선>(김광규 옮김, 선집 1, 한마당, 1985 초판; 1992 중판)과 <시의 꽃잎을 뜯어내다: 브레히트 시론>(이승진 편역, 선집 10, 한마당, 1997)과 <흔들리는 사람에게: 브레히트 망명시집>(박영구 옮김, 선집 11, 한마당,1993)을 꺼내 읽었다. 그리고 이희원의 <브레히트 초기시 연구>(예문, 1989)에 수록된 시와, 김남주의 번역 시집 <아침저녁으로 읽기 위하여>(남풍, 1988)에 수록된 시, ‘소련-동구 현대문학 선집’ 제30권인 <동구 현대시인 선집>(중앙일보사, 1990)에 수록된 시, 그리고 <독일의 정치시>(제3문학사, 1990) 등에 수록된 시 등을 하나하나 찾아 읽었다.(말년을 동독에서 보낸 까닭인지, 1980년대 초에 나온 독일 시 선집에서는 그의 작품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딱히 세련되고 멋진 시는 아니지만, 적어도 메시지를 이해하기 쉬운 시이기는 했다. 그중 몇 가지 대목은 정말 무릎을 칠 만했다. 이전까지는 브레히트의 희곡에 비해서 시를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는 시의 이상과는 어울리지 않았고, 뭔가를 가르치려는 듯한 어조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젠가 라이히 라니츠키의 글을 읽고 나니 브레히트가 얼마나 뛰어난 시인인지를 뒤늦게야 깨닫게 되었고, 최근 어떤 책에서 그의 시를 인용한 것을 보고서 정말 무릎을 탁 치게 되었다.(정확히 어떤 책에서 어떤 시를 봤는지는 그만 까먹고 말았지만). 브레히트의 풍자시는 일찍이 1980년대에 김남주 시인이 번역해서 독자들에게 인기를 얻은 바 있었다. 지금 와서 새삼스레 브레히트의 시가 감동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두 번 다시 반복되지는 말아야 했던 역사가 지금 다시 반복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나의 시에 운을 맞춘다면 그것은

내게 거의 오만처럼 생각된다.


꽃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감동과

엉터리 화가에 대한 경악이

나의 가슴 속에서 다투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 두 번째 것이

나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한다.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 중에서, 1939, <시의 꽃잎을 뜯어내다>, 131쪽)

 


어두운 시대에

그곳에서도 노래가 불려질 것인가?

그곳에서도 노래는 불려질 것이다.

어두운 시대에 대해.


(“모토”, 1939, <시의 꽃잎을 뜯어내다>, 137쪽)

 


나도 현명해지고 싶다.

옛날 책에는 무엇이 현명한 것인지 씌어져 있다.

세상의 싸움에 끼어들지 말고 덧없는 세월을

두려움 없이 보내고

또한 폭력 없이 지내고

악을 선으로 갚고

자기의 소망을 충족시키려 하지 말고 망각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라고.

이 모든 것을 나는 할 수 없으니,

참으로 나는 암울한 시대에 살고 있구나!


(“후손들에게,” 1934/38년, <살아남은 자의 슬픔>, 110-1쪽).

 


우리가 무한하다면

모든 것이 변하겠지

하지만 우리 유한하여

많은 것이 옛날대로라네.


(“우리가 무한하다면” 전문, <동구 현대시인 선집>, 43쪽).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보살핌을 받는다.

그런데 진실을 말하는 사람은

몸조심을 해야 된다.

그러나 그를 지켜줄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당신들의 나라에서는” 중 일부, 1935, <흔들리는 사람에게>, 150-151쪽).





세월호 사고가 터지기 직전에 읽던 책들 가운데 하나가 체홉의 단편집이었다. 이미 여러 권이 나와 있지만 의외로 겹치는 작품이 적어서 신기했는데, 역자해설마다 "가급적 소개되지 않은 작품으로만 꾸몄다"는 설명이 나와 있어서 흥미로웠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소개된 체홉의 단편은 정말 빙산의 일각에 (왜 "도레미 하우스"가 생각나는 거냐) 불과하다는 것일까. 내가 좋아하는 체홉의 단편은 풍자적이고 위트 넘치는 초기 단편들인데 (예를 들어 오랜만에 만난 동창이 새로운 상관이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당장 존대말을 사용하는 기회주의적인 공무원의 이야기처럼) 아쉽게도 우리나라에는 문학적으로 더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는 후기 단편(의 탈을 쓴 중편) 쪽이 더 많이 소개되는 것 같다.


한동안 다시 펼쳐보지 않은 체홉의 단편집을 새삼 다시 펼친 까닭은 "유민 아빠" 김영오 씨의 단식 때문이다. 자식의 죽음에 항의하는 아버지의 호소를 세상의 절반이 외면해 버린 상황이, 어쩐지 이전에 읽은 체홉의 단편을 연상시켜서였다. <슬픔>이라는 제목의 이 단편은 몹시 추운 겨울날 손님을 기다리는 늙은 마부의 이야기이다. 하나같이 바쁘게 갈길을 재촉하는 손님들에게 머뭇거리며 말을 건네는 이 마부는 뭔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 눈치이다. 알고 보니 하나뿐인 아들이 얼마 전에 불의의 죽음을 맞이하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각자의 일에 바쁜 사람들은 (손님부터 동료 마부까지) 모두 그의 이야기를 외면하고, 결국 그는 마굿간을 찾아가 밤새도록 말[馬]을 붙잡고 하소연을 한다.


그가 46일 동안 단식을 했다는 것도 놀랍지만, 또 한편으로는 46일 동안의 단식조차도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는 사실이 더 놀랍기만 하다. 구조가 완료되었다느니, 사실이 아니었다느니 하고 설왕설래 하는 속보가 나와서 가슴 철렁하게 만들었던 것이 벌써 4월의 일이고, 어느새 150일인가 싶더니, 이제는 160일이 지나가 버렸다. 이러다가는 200일, 300일, 1년, 어쩌면 2년 3년도 더 질질 끌고 갈지 모르겠다. 적선을 못하면 쪽박이나 깨지 말라는 말도 있는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각자의 억화심정을 엉뚱한 데에다가 퍼붓는 듯하다. 누가 봐도 잘못된 정부의 미온적인 대처에 항의하는 사람더러 '당신 때문에 민생 경제가 파탄'이라는 말을 해대는 사람들도 있으니, 참으로 어이없기만 하다.


이쯤 되면 "유민 아빠"의 처지는 모파상이 <비곗덩어리>에서 묘사한 주인공의 처지와 다르지 않다. 처음에는 다들 그의 분노와 항의에 공감하는 듯하다가도, 그의 입장이 민생이니 경제니 사회 분위기니 하는 갖가지 "대의"를 가로막고 나선다는 이야기가 들리자마자 곧바로 공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몰아 버리니 말이다. 결국 사람들이 원하는 것은 그가 굴복하고 타협하여 자기들과 마찬가지로 이 어마어마한 재난의 공범이며 방관자가 되는 것이 아닐까. <비곗덩어리>에서 한 마차를 탄 승객들이 일찌기 굶주릴 때에는 주인공의 호의를 누리며 입에 발린 칭찬을 하다가, 나중에 상대방이 결국 신념을 저버리고 "대의"를 위해 희생하자 외면한 것처럼, 이번 사건도 결국 그렇게 끝내버리려는 걸까.


강경대가 죽었을 때, 아들의 죽음에 항의하는 그 아버지를 주요 언론이 일제히 "도박꾼"으로 모는 기사를 냈었다.(내 기억으로는 강경대인데, 인터넷을 검색해 보아도 관련 기사가 나오지 않으니 만에 하나 틀릴 가능성도 없지는 않다). 나중에 유족 측의 해명을 들어 보니, 한때 동네 복덕방에서 내기 고스톱을 치다가 경찰의 단속에 걸려서 파출소에 갔다가 훈방된 사실이 있었다고 하는데, 그걸 가지고 언론이 (그리고 그 배후의 "누군가"가) 마치 강경대 아버지는 애초부터 질이 안 좋은 사람인 것처럼 흑색 선전을 퍼트렸다는 거다. 당장 나만 해도 강경대의 죽음과 관련된 다른 내용은 잊어버렸어도, 그 아버지의 도박 이야기는 아직 기억나는 걸 보니, 흑색 선전도 제법 효과적이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가 하면, 저 유명한 "이윤상 군 유괴 사건" 당시에는 희생자의 중학교 담임 교사가 범인으로 밝혀지면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범행 동기로 인해 괴소문까지 돌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즉 희생자의 어머니와 담임 교사가 불륜 관계였으며, 훗날 관계가 틀어진 것에 대해 앙심을 품고 결국 유괴 살해를 저질렀다는 이야기이다. 인터넷도 없던 시절인데 이런 소문이 얼마나 자자했던지, 나중에 희생자의 어머니가 쓴 수기(단행본으로도 나와 있다)에서 이런 헛소문이 돌아다니는 사실을 거론하며 분노를 표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혹시나 해서 우리 엄마한테 물어봐도 그 사건의 진상보다는 오히려 헛소문을 "기정 사실"로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흑색 선전의 효과는 정말 무섭기만 하다.


세월호 사건이 과연 어떻게 마무리될지는 모르겠다. 어쩌면 마무리조차도 되지 않고 흐지부지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조차도 든다. 손석희 뉴스에서도 팽목항 소식은 뒤쪽으로 배치되었고, 동네 곳곳에 매달아 놓았던 노란 리본은 이미 색이 바래기 시작하고, 나 역시 이런저런 구체적인 사실들을 하나하나 잊어버리기 시작하고 있다. 도대체 실종자 수색은 어떻게 된 거고, 특별법 협상은 어떻게 된 거고, 유족들의 생계는 어떻게 된 걸까. 이러다가 몇 년이 지나고 나면 결국 "세월호 사건"이란 말에서 사람들이 기억하는 것이라고는 "유가족 과도한 보상 요구"나 "유가족 경찰에 욕설"이나 "유가족 대리기사 폭행" 같은 흑색 선전, 또는 지엽적인 사실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참으로 끔찍하다.






얼마 전에 알라딘에서 신간도서 중에 <멀티를 선물하는 남자>라는 것이 있기에, 제목만 보고서는 무슨 IT 업계 종사자의 성공 실화나 자전 에세이인 줄 알았다. 제목의 "멀티"라는 단어에서 "멀티미디어"나 뭐 그런저런 IT 업계 전문 용어를 떠올린 까닭이었다.(그나저나,언제부턴가 이 단어를 볼 때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제5원소>라는 이상한 코미디 영화에서 밀라 요요비치인가 하는 아가씨가 주절대던 엉터리 영어 버전의 "물띠 빠쓰"(Multi Pass)이다. 왜냐). 그런데 막상 책 정보를 확인해 보니, 여기서 말하는 "멀티"라는 것은 "멀티미디어"도 "물띠 빠쓰"도 아닌, 무려 "멀티 오르가즘"이었다. 결국 성생활 지침서였던 거다.


한편으로는 제목의 "멀티"가 바로 "그 멀티"라는 것에 놀라고, 또 한편으로는 꽤나 "찐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이런 내용의 책이 19금 처리 없이 미리보기까지 가능하다는 것에 놀랐다.(그렇다면 이건 아이핀 인증 없이도 구입이 가능한 걸까). 그런데 막상 미리보기를 휘적휘적해 보니, 저자의 경력도 책의 주제와는 걸맞지 않게 좀 엉뚱해 보이는 데가 있고, 뭐, 내용 역시 딱히 새롭거나 대단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 않아서 좀 미심쩍었는데 (예를 들어 여성 독자를 향해 "남자에게 절대 협조하라"고 신신당부하는 것이 그러했는데, 이건 좀 이상한 당부 아닌가) 최근 다시 확인해 보니 이런 의구심을 확인해 주는 비판 리뷰도 올라와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 뭔가 대단한 이야기처럼 포장해 놓은 "멀티" 이야기도, 사실은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에 이미 화제와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바로 서갑숙이 <나는 포르노그래피의 주인공이고 싶다>라는 자전 에세이에서 "멀티" 경험을 언급했기 때문이었는데, 아마도 이 책이 예상 외로 "대박"을 터트린 이유 역시 바로 그 소문만 자자했던 "멀티"의 실체를, 누구나 (최소한 "얼굴"은) 알만한 배우가 단언했다는 점이 아니었을까.(물론 자기가 몇 시간 동안이나 그런 것을 경험했다는 식의 설명이었을 뿐, 구체적인 지침까지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만약 거기서 방법까지 모조리 설명해 놓았다면 지금 와서 이런 책이 나오진 않았겠지).


얼마 전에 <마녀사냥>이라는 프로그램을 보았더니, 한 여성이 보낸 사연 중에서 자기 애인이 "하루에 열일곱 번"을 했다는 이야기가 나와서 신동엽 이하 모든 사람이 기겁하는 (심지어 신동엽의 지인인 비뇨기과 의사까지 전화로 연결해서 그게 가능한지 물어보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사실 "회수"에 대한 이야기는 종종 이렇게 과장이나 오해를 수반하는 경우가 없지 않은 듯하다. 일반적으로 여성의 경우에는 성생활에서도 "양보다 질"을 우선시한다고 알고 있었는데 (물론 이것도 내 착각일 수 있지만) 이제는 "질보다 양"이 된 걸까.[**] 무려 15년 만에 다시 돌아온 "멀티" 열풍을 지켜보며 이래저래 격세지감을 느끼게 된다.




[*] 비판의 핵심은 내용 가운데 과장과 오류와 모순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그중 상당수가 충분히 비판의 여지가 있어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어쩌면 이 책도 외관상으로는 "여성의 만족"을 이야기하지만, 실제상으로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편견"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던져봄직하겠다.


[**] 운우지락에서의 "한 번"이 과연 어떤 것인지를 놓고서는 오래 전부터 남녀간에 의견 차이가 있었다. 그중 조선 시대에 벌어진 이에 관한 논쟁의 사례(?)는 <어수신화>의 "홑바지도 오히려 아까워"라는 이야기에 나온다. 쉽게 말해 남성은 "진퇴 한 번"을 "한 번"으로 치는 반면, 여성은 수백 번의 진퇴 끝에 "소리는 목구멍에 있지만 나오지가 않고, 무엇을 보고자 하여도 눈을 뜰 수 없는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한 차례"(188쪽)로 친다는 것이다. 잠자리 중에 갑작스레 벌어진 부부의 이런 논쟁을 바깥에서 엿듣던 닭서리꾼이 "아주머니 말씀이 옳다"면서 역성을 들자, 집주인 여성이 기뻐하면서 닭은 아무래도 좋으니 얼마든지 잡아가시라고 흔쾌히 말하는 것이 웃음의 포인트다.







<왜 나는 법을 공부하는가>를 반값에 할인 판매하는 모양이다. 나온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책인데 어째서 이런 일이 가능한가 궁금해서 확인해 보니, 누군가가 이미 리뷰에서 그 "편법"을 지적해 놓았다. 내용은 에세이인데 분류는 실용서로 해놓았기 때문에 출간 기간 1년 6개월이라는 규정에 얽매이지 않고 처음부터 얼마든지 할인 판매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저자가 그런 편법까지 일일이 지시했을 가능성이야 희박하니, 이 일을 가지고 저자를 비난할 수야 없을 것이다. 십중팔구 좋은 책을 한 권이라도 더 독자와 맺어주고자 불철주야 노심초사하는 출판사가 선의에서 떠올린 "마케팅" 전략의 일환이 아니었을까. 하긴, 다른 출판사도 비슷한 편법을 사용한 지 오래이고, 그런 방법을 통해서 한몫을 단단히 챙긴 곳도 있다고 하니 말이다. 


하지만 왜 하필이면 <왜 나는 법을 공부하는가>라는 제목의 책이 그런 "편법"을 사용해야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차라리 다른 책이면 그러려니 할 터인데, "법"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을 "편법"으로 판매하다니, 뭔가 좀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어찌 보면 <정의란 무엇인가>가 무려 100만 부 넘게 팔렸는데 (최근의 세월호 정국에서 드러나듯) 이 나라에서 "정의"를 찾을 수 없는 것과도 유사한 아이러니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론 비난이 내 목적은 아니다. 다만 "술은 마셨지만 음주운전은 하지 않았다"는 명언과 함께, 앞으로 즐겨 인용할 만한 아이러니의 또 한 가지 사례를 얻게 된 것이 반갑고도 신기해서 한 번 적어볼 뿐이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는 "정치에 관여했지만 대선에 개입하지는 않았다"는 판결을 얻어낸 전직 국가정보원장도 있었지...





알라딘에서 가야트리 스피박의 <교육기계 안의 바깥에서>를 40% 할인 판매하기에 구입해 뒤적이다가, 거기 수록된 강연 “그(녀)가 타자의 자리를 점유한다고 말하는 것은 신선하지 못하다”의 말미에서 이런 구절을 발견했다. “시간이 허용된다면 헤게모니적 인도 텍스트에서 나오는 한 가지 예, 즉 <마하바라타>에 나오는 유명한 순간을 ‘윤리적 미래에 대한 부름’으로 다시 읽어내는 페미니즘 독법을 진행하려고 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없으니, 이제 이 독법에서 나올 몇몇 결론을 그냥 지적하고 최종 결론은 열어두는 게 이 발표의 정신과 좀더 맞을 것 같다.”(327쪽). 


스피박이 결론 대신 마하스웨타 데비의 소설 “드라우파디”의 일부분을 제시하는 것으로 미루어, 결국 위의 구절은 그 소설의 소재를 제공한 <마하바라타>의 ‘드라우파디 옷 벗기기’ 대목을 언급한 듯하다. 내친 김에 스피박의 <다른 세상에서>에 수록된 데비의 소설 “드라우파디”를 재독했는데, 영역은 어떤지 몰라도 번역으로는 적잖이 난해한 느낌이었다.(오역도 없지 않다. 예를 들어 ‘무능한 판두’라고 옮긴 impotent Pandu는 <마하바라타>에서 판두가 수사슴의 저주로 ‘성불구’가 된 것을 가리킨 것이다. <스피박 넘기>라는 해설서에서는 이 부분을 ‘성불구’라고 제대로 옮겼다).


스피박은 데비의 소설에 나오는 반란군 드라우파디가 윤간을 당한 뒤에 자신의 망가진 몸을 정부군 장교에게 태연자약하게 들이밀어서 오히려 상대방을 질리게 만든 것이 <마하바라타>를 전복적으로 해석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마하바라타>에서도 드라우파디의 태도는 무기력한 남편들과 위선적인 군주 및 여러 용사들의 태도에 비해서는 오히려 더 명예롭고 총명하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즉 드라우파디는 데비의 재해석 이전에도 <마하바라타>의 그 유명한 대목에서 유일하게 ‘상식’과 ‘용기’를 갖춘 사람으로 묘사된다는 것이다.


<마하바라타>에서 판다와 5형제 가운데 맏이인 유디슈티라는 “악의 축” 두료다나의 꾐에 넘어가서 (잘 하지도 못하는) 주사위 도박을 벌이고, 상대방의 속임수에 휘말려 왕국은 물론이고 형제와 본인까지 내기에 걸어서 잃어버리고 만다. 급기야 그는 5형제 공동의 아내인 드라우파디까지 내기에 걸어서 잃고 마는데, 이에 두료다나는 드라우파디를 사람들 앞에 불러내고 옷을 홀라당 벗겨 망신을 주려고 한다. 드라우파디는 심지어 달거리 중이기 때문에 더더욱 나서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아랫도리에만 옷을 걸친 채 억지로 사람들 앞에 끌려오게 된다.


흥미로운 점은 이 대목에서 드라우파디가 체념하지 않고 자기 운명을 놓고 당당하게 항변을 내놓는다는 점이다. 이때 그녀가 내놓은 항변의 근거는 ‘다르마()’에 근거했을 때에 과연 이 행동이 정당한지 여부이다. 이 서사시에서 ‘다르마’는 곧 의무와 원칙과 명예 모두를 의미하는데, 유디슈티라는 (마치 <삼국지>의 유비와도 같이) 워낙 다르마를 잘 지키기로 유명한 인물이다. 심지어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원리원칙주의자이기 때문에, 자기에게 불리한 것이 뻔해도 차마 남의 간계를 물리치지 못하는 (얼핏 보기에는) 유약하고 무능한 인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신화나 전설의 주인공이 종종 그러하듯이, 이 서사시에서는 모든 등장인물이 갖가지 다르마와 맹세에 얽매여 있으며, 종종 그로 인해 부과되는 딜레마에서 (종종 정정당당한 방법으로, 또 때로는 간교한 방법으로) 벗어나는 것이 중요한 내용을 차지하고 있음을 생각해 보면, 단순히 현대의 논리로 재단하여 공리공론이라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여하간 졸지에 남들 앞에서 벌거벗겨지는 치욕을 당하게 될 처지에 놓인 드라우파디가 반박을 제기하며 사용한 논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소유권도 없는 사람이 자기 아내를 또다시 내기에 걸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즉 유디슈티라는 이미 내기에 져서 자기 소유는 물론이고 자기 자신조차도 남의 손에 넘겨주었기 때문에, 더 이상 자기 아내에 대한 소유권이 없는 상태이므로, 그녀를 걸고서 한 내기 자체도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상대편에서 ‘그래도 약속은 약속이지 않으냐’면서 다르마를 지키라고 반론하자, 드라우파디는 ‘순진한 유디슈티라를 속여서 억지로 주사위 노름을 하게 만들고, 거기다가 속임수까지 써서 그의 소유를 강탈하는 행위’ 자체가 다르마에 어긋난다고 눈물로 호소한다. 그러나 주위에 모인 여러 군주와 용사는 그녀의 호소를 외면하고 모두 침묵을 지킨다.


이 상황을 답답하게 생각한 누군가가 드라우파디의 주장을 지지하지만, 곧바로 상대편은 드라우파디가 상식과 어긋나게 5명의 남편을 두고 있으므로 창녀나 마찬가지라고 반론하며, 그렇기 때문에 그녀를 공개적으로 욕보이는 것은 전혀 다르마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물론 판다와 5형제가 두료다나의 덫에 걸린 것은 사실이지만,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피차의 합의에 따라 이루어진 내기이므로 다르마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것이 이들 모두의 의견이었다. 한편으로는 두료다나가 워낙 기세등등했기에 모두들 그를 적대시하지 않으려는 의도도 있었다. 


하지만 이들의 행동은 다르마를 핑계 삼아서 불의를 눈감아주는 것에 다름아니었다. 문제는 판다와 5형제 역시 이런 "다르마의 사슬에 걸린"(267쪽) 상태였다는 것이다. 절망에 빠진 드라우파디가 다섯 남편들의 무능과 어리석음을 공개적으로 비난하자, 공동 남편인 판다와 5형제 가운데 가장 성격이 급한 비마가 그녀를 욕보이는 자를 당장 맨손으로 찢어 죽이겠다며 길길이 날뛰지만 (비마는 충분히 그럴 만한 힘과 혈기 모두를 가진 장사로 묘사된다) 아르주나는 최대한 형을 말리며 크샤트리아로서의 ‘다르마’를 지켜 인내해야 한다고 타이르는 것이다.


결국 두료다나의 재촉을 받은 누군가가 나서서 드라우파디의 옷을 벗기자, 그녀의 몸에는 또 한 겹의 옷이 생겨나는 기적이 벌어진다. 그리하여 (마치 보르헤스가 묘사한 ‘모래의 책’처럼) 벗겨도 벗겨도 그녀는 여전히 옷을 입은 상태가 된 것이다. 심지어 주위에 벗겨진 옷이 수북하게 쌓일 지경이 되어도, 그녀의 몸에는 여전히 한 겹의 옷이 남아 있게 되자, 상대편도 이를 보고 두려워하여 더 이상 그녀를 해코지할 생각을 못하게 된다. 그리고 판다와 5형제의 큰아버지이며 두료다나의 아버지인 왕도 비로소 두려움과 동정심을 느끼고 그녀의 간청을 들어준다.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던 현자 위두라는 말한다. "드라우파디는 질문을 던지고, 지금은 마치 주인 없는 여인인 듯 처절하게 통곡하고 있습니다. 회당에 모여 있는 왕들이시여, 당신들이 그녀의 물음에 답하지 않는다면 이곳에서 다르마가 고통에 허덕일 것입니다. 고통에 허덕이며 회당에 온 사람은 마치 활활 타는 불과 같습니다. 회당에 있는 사람들은 진실한 다르마로 그를 위로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고통에 허덕이며 다가와 회당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르마에 관한 의문을 던지면, 성냄과 욕심을 버리고 그 의문에 답해야 하는 것입니다."(259쪽)


소원을 들어주겠다는 왕의 제안에, 드라우파디는 판다와 5형제를 예속 상태에서 풀어주어 노름 이전의 상태로 만들어 달라고 요구한다. 왕이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었으므로, 결과적으로 그녀의 용기와 지혜 덕분에 판다와 5형제가 큰 위기를 벗어나게 된 셈이 된다.(그러나 곧이어 유디슈티라는 또다시 주사위 노름을 하고... 이번에는 정말로 ‘지못미’가 되어서 형제와 아내까지 모두가 숲속에서 은둔생활을 하는 처지가 되고 만다. 하지만 유디슈티라의 이런 고지식함이 형제와 아내 모두를 구하는 일화도 있으니, 그를 어리석다 탓할 수만도 없는 노릇이다).


아마도 페미니즘의 독법에서 주목할 수밖에 없는 것은 과거의 서사시와 현대의 소설 모두에 나타난 '여성의 나체'일 것이다. 그리고 한쪽은 ‘결코 드러나게 할 수 없는 나체’이고, 또 한쪽은 ‘완전히 드러나고 망가진 나체’라는 점에서, 후자는 전자의 전복적인 해석이라는 주장도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이야기한 것처럼, 양쪽 모두에서 드러나는 또 하나의 공통점인 치욕을 당하면서도 용기를 발휘하는 주인공의 태도’ 역시 주목할 만한 필요가 있어 보이는데, 이쪽에 초점을 맞추고 보면 과거의 서사시와 현대의 소설 모두는 사실상 똑같은 이야기를 하는 셈이다.


아울러 데비의 소설에서 윤간당한 드라우파디가 들이미는 나체 앞에서 장교가 느낀 당혹감은, 단순히 여성의 신체나 윤간의 흔적 같은 요소 때문만이 아니라, (서두에 나오듯이) 그가 벵골에서 작전을 수행하며 ‘검은 피부의 사람’을 미신적으로 두려워하게 된 경향의 결과이기도 하다. 따라서 <마하바라타>의 원래 문맥까지 계산에 넣을 경우, 데비의 소설에 대한 스피박의 해석은 지나치게 피상적이지 않나 하는 의문도 제기해 볼 만하다. 물론 이것 역시 현대의 여성 소설가며 비평가보다는 과거의 서사시를 선호하는 독자인 나만의 편견일지도 모르지만.[*]




[*] 세월호 특별법을 둘러싼 논란을 지켜보면서, 문득 여기서도 "다르마에 관한 드라우파디의 질문"과 같은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당이 강조하는 갖가지 "원칙"이 허울뿐인 핑계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따라서 이런 교착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원칙을 방패 삼아 그 뒤에 숨는 야비한 행동이 아니라, 서사시에 나온 왕의 행동처럼 원칙과 의무를 뛰어넘는 결단이 필요할 것이다. 왜냐하면 현자 위두라의 말마따나, 고통에 허덕이며 찾아와 질문을 던지는 사람에게는 각자의 이익과 입장을 따지지 말고 반드시 답변을 해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과연 정부는 드라우파디의 질문에 답할 태세가 되어 있는가? 세월호 사건 150일이 훌쩍 넘은 지금 상황에서는 이에 대한 답변조차도 어쩌면 영영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앞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