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22일, 네이버에 가보니 "이혜선"이라는 이름이 실시간 검색어 1위를 달리고 있었다. 이건 또 무슨 연예인인가 싶어서 클릭해 보니 뉴스 기사가 줄줄이 떴다. 통합진보당의 최고위원을 역임한 정치인인 그가 어젯밤에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으며, 사망 원인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뉴스 아래 "실시간 검색" 창에 올라오는 트위터 의견을 살펴보니 "이혜선 사망은 이해삼 사망의 오보"라는 글도 눈에 띄었다. 알고 보니 민주노동당의 전 최고위원 "이해삼"의 사망을 통합진보당의 현 최고위원 "이혜선"으로 착각한 셈이었다. 그리고 이 오보의 시작은 다름아닌 "연합뉴스"였다.


뉴스 기사를 검색해 보니, 이해삼의 사망 사건은 이미 전날 다른 매체가 보도한 바 있었다. 그런데 뒤늦게 연합뉴스가 "이혜선"을 "이해삼"으로 착각하는 오보를 내자마자, 다른 "찌라시" 인터넷 매체들이 사실 확인도 하지 않은채 그 기사를 고스란히 받아써서 연이어 오보를 냈던 것이다. 오보가 나가고 30분쯤 지나자 연합뉴스가 슬그머니 기사에 나온 "이혜선"을 다시 "이해삼"으로 정정했지만, 그때 새로 올라오는 다른 인터넷 매체의 뉴스에서는 여전히 "이혜선 사망"을 이야기하는 판이었다. 트위터에서는 그때까지도 계속해서 "이혜선 사망" 소식이 반복, 또 반복되며 확산되었고, 그 기세는 정말 그칠 줄을 몰랐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코웃음치고 관심을 접어 버렸겠지만, 이날은 어쩐지 인터넷 뉴스의 오보며 트위터의 움직임을 한동안 지켜보고 있었다. 과연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야 인터넷 매체들이 정정 보도를 하는지, 그리고 트위터상의 헛소문 전파가 중단되는지를 한 번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결국 못 봤다!) 그 내내 머릿속에는 피터 로퍼의 <슬로우 뉴스>(유영희 옮김, 생각과사람들, 2013)라는 책의 한 구절이 떠올랐다. "트위터에 거짓 소문이 꼬리를 물고 생성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속으로 이렇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설사 그 이야기가 사실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은 왜 이런 이야기를 퍼 나르는 걸까?"(97쪽)


저자는 2011년에 텍사스에서 일어난 한 가지 유사한 사례를 소개한다. 어느 농가에서 혈흔과 악취가 발견되어 경찰이 수사중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트위터상에서는 살인이 일어났다느니, 시체가 발견되었다느니, 희생자는 수십 명에 달하며 대부분 어린아이라느니 하는 소문이 퍼지며, 급기야 경찰이 사체의 집단 매장지를 발견했다느니 하는 괴담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알고 보니 이 사건은 결국 해프닝으로 끝나고 말았다. 결국 저자의 말마따나, "트위터 글은 (...) 뉴스를 가장한 소문일 뿐이다."(96쪽) 또 누군가의 말마따나, "시민 저널리즘이란 시민 치과의사와 같은 것이다."(99쪽) 쉽게 말해 돌팔이라는 거다.


저널리스트 겸 대학 교수인 피터 로퍼는 "슬로우 푸드" 운동에서 영감을 받아 "슬로우 뉴스" 운동을 제창한다. 이 운동의 핵심은 "가치 있는 뉴스만 소비하라"는 것이고, 달리 말하자면 "내일 신문 2면에 한두 줄 기사로 나올 만한 사건이라면, [그] 사건의 추이를 살피느라 [굳이] 시간을 낭비하지 마라"(21쪽)는 것이다. 그는 마이클 폴란이 쓴 <푸드룰>을 본떠서 "비판적인 뉴스 소비자가 되기 위한" 원칙 28가지를 정리해 놓았는데, 그중에서도 핵심 중의 핵심은 '뉴스를 실시간으로 따라잡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지금 상황에서는 가치 없는 뉴스가 너무나도 많기 때문이다.


이건 어찌 보면 인터넷 이전에 CNN이라는 매체가 유행시킨 "실시간 뉴스"의 부작용이 아닐까 싶은데, 언제부턴가 사람들은 뭔가를 실시간으로 보는 것에 익숙해진 나머지, 항상 "따끈따끈한 소식"을 원하게 된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따끈따끈한 소식은 십중팔구 설익은, 때로는 무가치한 소식이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얼마 전의 보스턴 마라톤 테러 사건도 그런데, 나 역시 그날 아침에 그 뉴스를 접하고 나서 어찌 된 영문인지를 알아보기 위해 국내 뉴스는 물론이고 CNN과 BBC와 알자지라까지 뒤져 보았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사실보다 추측이 더 많을 뿐이었다. 사건의 윤곽이 드러난 것은 며칠 후의 일이었다.


저자는 실시간 뉴스에 등장하는 "토킹 헤즈"(이 책에서는 "화면 가득 얼굴이 나오는 사람"이라고 역주를 달았지만, 사실은 TV 뉴스/시사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출연자"나 "(시사/뉴스) 평론가"를 말하는 것 같다)를 피하라고 조언한다. 아나운서와 평론가는 마치 대단한 이야기를 해줄 것처럼 폼을 잡지만, 실제로는 같은 이야기를 앵무새처럼 반복하면서 이런저런 추측과 가정만 내놓을 뿐이다. 실제로 최근의 북한 핵 위협이며 개성공단 폐쇄 같은 사건의 경우, 주요 뉴스 채널의 보도 방식이 딱 이랬다. 북한이 아직 대응을 내놓지도 않은 상황에서 갖가지 "경우의 수"만 따져보고 앉아 있는 거다.


저자는 "정말 중요한" 뉴스만 보라고 조언한다. 지금의 문제는 뉴스가 많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뉴스인 척 하는 '유사 뉴스'가 많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끝없이 밀려드는 '유사' 뉴스의 공격에서 가장 좋은 방법은, 당신이 관심을 두는 기사와 당신이 자신의 삶에 중요하다고 판단한 기사를 읽는 데 시간을 소비하는 것이다. 간단한 처방인 것 같지만, 24시간 쏟아져 나오는 뉴스 때문에 불필요한 정보에 압도당하기 쉬운 현대인들에게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생성되는 새로운 자료들을 보는 법과, 흥미로운 자료를 선별하고, 나머지 것들은 버리는 법을 다시 배워야 한다."(140쪽) 


그렇다면 어떤 뉴스가 내게 가치가 있는지 아닌지를 어떻게 해야 알아낼 수 있을까? 내가 보기에는 "슬로우 뉴스"의 한 가지 역설이 여기서 발생하는데, 그건 바로 "슬로우 뉴스"의 신봉자가 되기 위해서는 누구보다도 "부지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잘못된 정보가 아니라 정확한 정보를 찾아내기 위해서는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가지 매체를 참고하고, 첫 번째로 보도한 매체를 찾아보고, 편향된 매체를 거부하되 정당한 비판에까지 귀를 막지는 말아야 하는 등, 쉽게 말해서 적극적으로 뉴스를 분석하고 평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건 실시간 뉴스에 귀를 열어놓는 것보다 훨씬 힘든 일이다.


물론 저자의 말에 100퍼센트 동의할 수도 없고, 그가 내놓은 지침을 하나하나 준수할 수도 없지만 (이는 내가 마트에 갈 때마다 마이클 폴란의 주옥 같은 조언들을 일일이 준수하지 못하는 것과도 마찬가지이다) 그래도 <슬로우 뉴스>라는 책은 우리가 어느새 당연시해 온 뉴스의 "신속성"과 "객관성"에 대한 맹신을 비롯해 여러 가지 착각을 깨트려 준다는 점에서 상당히 유용하고 고마운 책이다. 또 한편으로 이 책은 무척 "재미있다." 저널리스트로서의 현장 경험은 물론이고, 다양하면서도 흥미진진한 사례와 인용문을 적재적소에 박아넣어 읽는 재미도 만만치 않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상 깊은 사례는 "마틴 루터 킹의 명언으로 잘못 알려진 글"에 관한 내용이었다. 2011년에 오사마 빈 라덴의 사살 소식이 전 세계로 전해지자마자 한편에서는 "잘 죽었다!"는 환호성이 일었지만, 또 한편에서는 일종의 자성론이 제기되었다. 그 즈음 마틴 루터 킹의 연설문 가운데 일부라는 다음과 같은 글이 인터넷을 통해 확산되기 시작했다. "나는 수없이 많은 귀한 생명이 사라진 것에 슬퍼하겠지만, 단 한 명의 죽음에도 기뻐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적의 죽음일지라도."(92쪽) 그런데 이것은 사실 킹 목사의 말이 아니라, 킹 목사의 연설문을 인용한 미국인 여성 "제시카 도비"의 말이었다.


그녀는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설교집에서 '증오를 증오로 대하지 말고, 증오를 사랑으로 몰아내자'라는 취지의 인용문을 찾아낸 다음, 거기다가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 친구들에게 보내기 시작했다. (...) 그녀의 친구들은, 너무나 당연히, 이 감동적인 글을 자신들의 친구들에게 보냈고, 그 과정에서 인용 부호가 생략되는 바람에, 그녀의 말과 킹 목사의 말이 뒤섞이게 되었다. 결국 킹 목사의 말은 사라지고, 그녀의 말이 킹 목사의 말인 것처럼 인터넷에 퍼지게 되었다."(92쪽) 이 사례를 접하는 순간, 우리나라에도 이와 유사한 사례가 하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법정 스님의 "개고기 반대론"이라 알려진 글이다.


이 글이 언제부터 인터넷에 유포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인터넷 뉴스를 검색해 보면 2004년경에 블로그 등을 통해 퍼지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출처 가운데 가장 오래 된 것은 한겨레신문사의 토론마당(일명 “한토마”)에 올라온 2003년 8월 1일자 글이다.(#여기). 그런데 이 글도 오리지널은 아니고 “1996년 9월호 <정법세계>”라는 매체에 수록된 글을 옮겨온 것이며, 심지어 그 글의 필자는 우리가 다 아는 "법정 스님"이 아니라, “법전 스님(호주 시드니 정법사)”이라고 나와 있다. "법정"과 "법전"은 철자도 비슷하고, 발음도 비슷하다. 그러면 혹시 "법전"이라는 승려의 글이 더 유명한 "법정"의 글로 오해된 것은 아닐까?


내가 의심을 품게 된 데에는 충분히 그럴듯한 이유가 있었다. 왜냐하면 법정 스님의 글로 알려진 "개고기 반대론"은 한 마디로 문장도 거칠고 논리도 엉성한 "졸작"이며 "억지"이기 때문이었다. 법정 스님의 글을 종종 읽어 왔던 나로선, 설마 이 글을 법정 스님이 썼다고는 차마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런 글이 "법정 스님의 글"이라며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걸 보니, 이건 아무래도 그분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자세히 파헤쳐 보려다가 그냥 차일피일 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슬로우 뉴스>에서 비슷한 사례를 접하고 나자,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어서 자세히 파보기로 했다.


일단은 문제의 글이 처음 발표된 지면을 찾아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한토마에 올라온 글에서는 출처를 <정법세계>라는 잡지로 밝혀 놓았지만, 도서관에서 확인해 보니 이런 잡지는 아예 있지도 않았다. 인터넷에서 "법전 스님"과 "개고기"로 다시 한 번 검색해 보면, 역시나 같은 글이 몇 가지 나오는데 그중에는 출처를 <불교세계>로 명시한 것도 있고, <월간불교>로 해놓은 것도 있었다.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찾아보니 <(월간) 불교세계> 1996년 9월호 목차에 “독자투고: 개를 잡아먹지 말자 - 법전스님 - 111쪽”이라는 항목이 나왔다. 이거다 싶어서 헌책방을 검색해 보니 <불교세계> 1996년 9월호를 판매하는 곳이 있었다.


책값보다 비싼 배송료를 들여서 결국 <불교세계> 1996년 9월호를 구입해 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개를 잡아먹지 말자"라는 문제의 글은 법정 스님이 아니라 "법전 스님"(당시 "호주 시드니 정법사" 거주)의 글이었다. 아래에 <불교세계>의 표지와 "법전 스님"의 글 원문 사진을 찍어 올렸으니, 이쯤 되면 충분히 "인증"이 되리라 생각한다. 법전 스님의 글은 당시 <한겨레21>에서 개고기를 옹호하는 기사를 실은 것에 대한 일종의 반박문이며, 특히 민속학자 주모씨(아마 "주강현"이 아닐까)의 개고기 옹호론을 정면으로 비판하고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하지만 법전 스님의 글을 찬찬히 뜯어보면, 어쩐지 논리보다 의욕만 앞선 주장이라는 인상을 받게 된다. 2002년 월드컵 개최가 기정 사실화된 상황에서 외국의 눈도 있고 하니 "불교 본연의 동물애호사상을 고취시켜 한국인들의 정서를 순화해서 그로 인한 사회의 정화에 일조하고자 한다"(111쪽)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승려인 필자의 입장일 뿐이고, 불교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리 설득력이 없어 보이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한국은 불교 전통이 강하므로 개고기는 전통 문화가 될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그에 못지않은 유교 전통에서 개고기는 본래 제삿상에 오르던 고기였다는 점을 잊어선 곤란하다.


법전 스님의 주장에는 심지어 터무니없는 억지에 가까운 것도 있는데, 바로 개고기를 전통 문화로 간주하는 논리를 반박하기 위해, 중국 역사에 기록된 인육 식습을 들먹이면서 '그렇다면 중국인이 인육 식습관도 전통 문화로 간주하고 보전하자면 찬동할 수 있느냐?'는 취지로 반문하는 것이 그렇다. 심지어 법전 스님은 <중국의 식인문화>라는 책을 근거로 삼아, "대 성인이라는 공자도 평소 '해(醢)'라는 인육요리를 즐기다가, 사랑하는 제자 자로가 살해되어 그 시신이 이 '해'라는 요리로 공자에[게] 배달되자, 그때부터는 공자도 인육을 먹지 않았다"(112쪽)는 해괴한 주장을 펼치기에 이른다. 


그런데 이는 무지에서 비롯된 억지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공자가 즐겨 먹었다는 '해'는 인육요리의 이름이 아니라, 젓갈류의 통칭이기 때문이다.(대표적인 것이 생선과 밥을 소금에 절인 "식해"(食醢)다). <예기>에 나오는 이 일화는 원래 자로가 난리통에 살해된 직후, 자로의 정적이 그의 시신으로 젓갈을 담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은 공자가 끔찍한 생각이 들어서 젓갈류 반찬을 물리쳤다는 내용이다. 그러니 이 구절을 근거로 들어서 "공자가 평소에 식인을 즐겼다"고 주장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억지에 불과하다. 그리고 사실 이것이야말로 일본 극우파가 중국인을 폄하하기 위해 종종 들먹이는 논리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인터넷을 검색해 보면 "공자가 인육을 즐겼다는 데 사실인가요?"라는 질문이 많이 떠돌아다니고, 심지어 거기다가 위와 같은 논리로 "그렇다"고 답변이 달리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어쩌면 이것 역시 "법정 스님"의 글로 오인되어 인터넷에 잔뜩 퍼져 있는 "법전 스님"의 억지 주장이 일종의 "정설"로 굳어진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을 수밖에 없다. 다시 강조하건대, 법전의 주장은 억지일 뿐이다. 그가 펼친 것과 같은 논리라면, 예를 들어 부처가 살인자를 교화했다는 설화를 근거로 들어서, 결국 부처가 평소에도 살인을 방조하고 옹호하기까지 했다고도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법전 스님의 억지 논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개고기를 먹는 이유가 정력에 대한 과도한 집착 때문이라며, 이는 "한국이 [원문 그대로임] 성폭력이 세계 3위인 점과 깊은 상관관계가 있을 것"(113쪽)이라느니, 정력에 좋다며 개구리까지 잡아먹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우리 국민들에게는 쌍스러운 측면이 있다"(113쪽)느니, "불교 자체의 입장에서 볼 때는 개는 인간 생활과 매우 가깝기 때문에 인간의 윤회환생도 잘 된다고 볼 수 있다"(114쪽)고까지 말한다. 동물 애호가 쪽에서는 개고기 반대론으로 훌륭한 논리라고 생각하는지 몰라도, 사실은 선뜻 동의하기 힘든 논리의 비약이 분명하다.


물론 동물 애호가, 또는 개고기 반대론자 쪽에서도 분명히 할 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법전 스님의 글과 같은 논리는 아무래도 일반 대중의 공감을 얻기에는 역부족이며, 다른 무엇보다도 이처럼 억지스러운 내용의 글이 마치 "법정 스님"의 글인양 오인되는 것은 더더욱 큰 문제이다. 그러니 혹시라도 지금까지 "법전 스님"의 주장을 "법정 스님"의 주장이라 잘못 알았던 사람들이 있다면, 지금 이 시간부로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똑똑히 새겨들을 것이고, 기회가 생기는 대로 이 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게 고인을 위한 최소한의 배려이자 예의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법정 스님" 아닌 "법전 스님"의 "개고기 반대론"이 수록된 <월간 불교세계> 1996년 9월호






위의 이미지는 클릭하면 더 커보인다. 

한가운데 있는 "법전 스님"이란 이름에 주목하자

법전이다, 법전, 기둥 뒤에 법전 있다고!





*** 그나저나 <슬로우 뉴스>에는 몇 가지 오역이 있다. 전설적인 헤드라인 Headless Body in Topless Bar는 "스트립 바의 얼굴 없는 몸뚱이"(82쪽)보다 "토플리스 바의 머리 없는 시체"라고 해야 정확할 것이고, "<럭키 짐>과 에드워드 고리의 불길한 커버 디자인"(141쪽)은 "에드워드 고리의 불길한 표지화가 들어 있는 <럭키 짐>"이라고 해야 맞고, "점프 기사를 건너뛰고 신문을 읽는다"(152쪽 이후)는 표현은 차라리 "점프 기사를 끝까지 따라가서 읽으라"는 표현이 되어야 맞을 것 같다.("점프 기사"는 지면이 부족해서 "다음 면으로 이어짐" 표시와 함께 여러 면에 나뉘어 실리는 기사를 말한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도서명을 모두 "가제"라고 해서 옮겨놓았는데, 그런 표시는 굳이 달지 않아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이것 말고도 몇 가지 알쏭달쏭한 부분이 있어서 인터넷에서 원문을 검색해 보니, 이 책은 특이하게도 영어판이 아니라 이탈리아어판으로만 나와 있고, 대신 저자의 홈페이지에 그가 쓴 몇 가지 기사로만 검색된다. 그렇다면 우리말 번역본을 작업할 때에는 저자가 제공한 별도의 영어 원고를 사용한 것인지 궁금하다. 




인상 좋은 할배로세...













마루에 쌓인 책더미 속을 뒤지다가 의외의 책을 발견했다. <나보코프의 러시아 문학 강의>라는 책이다. 예전에 사다 놓고 비닐 커버를 씌운 다음 (비싼 책인데, 코팅 좀 해라! 코팅!) 숨을 죽이기 위해 책더미 아래 깔아놓았던 것인데, 그래놓고 한동안 까먹었다가 이번에야 도로 발견한 셈이다.(이럴 때마다 어쩐지 횡재한 것 같은 기분이 들다가도, 문득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음과 같으니라"라는 성경 구절이 떠오른다). 이왕 책을 꺼낸 김에, 이참에 이 책에 수록된 <안나 카레니나>에 관한 에세이를 범우사의 <안나 카레니나> 구판에 실려 있는 나보코프의 해설과 비교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혹시 두 가지가 결국 같은 글인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나보코프의 소설은 꽤 오래 전부터 짬짬이 번역되어 왔지만, 그의 에세이는 의외로 구경하기가 힘들어서 <안나 카레니나>에 수록된 이 해설, 그리고 을유신서 가운데 하나에 수록된 고골의 <외투>에 관한 에세이가 전부였다고 기억한다.(고골에 관한 에세이는 <러시아 문학 강의>에 전문 수록되었다). 범우사 판 <안나 카레니나>를 꺼내서 확인해 보니, 문제의 해설은 <러시아 문학 강의>에 수록된 나보코프의 글 “안나 카레니나”의 9분의 1에 해당하는 분량이었다. 즉 총론에 해당하는 부분만을 수록하고, 그 뒤의 각론(꽤나 세밀한 분석이 나온다)은 모두 빼버린 것이었다. 


그런데 범우사 판에 실린 해설이 끝난 부분, 즉 총론이 끝나고 각론이 시작되는 부분(<강의>에서는 282쪽 아래)을 보니, 조지프 콘래드가 <안나 카레니나>의 영어판 번역자 콘스탄스 가넷의 남편 에드워드 가넷에게 보낸 편지(즉 "자네 부인"의 번역이 훌륭하다는 칭찬)가 인용되어 있고, 곧이어 나보코프의 다음과 같은 평가가 나와 있었다. "나는 어이없는 망언을 한 조지프 콘래드를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사실 가넷의 번역은 형편없다."(282쪽) 이 구절을 보고 약간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영어권에서 러시아 문학의 "가넷 번역본"은 꽤나 유명하다고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콘스탄스 가넷(1861-1946)은 문필가였던 남편의 소개로 출판사의 외주 원고 검토자로 일하다가 러시아어를 배웠으며, 이후 근대 러시아 문학의 여러 대표작을 대부분 최초로 영역하여 명성을 얻었다. 예를 들어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 <죄와 벌>, <백치>, <악령>, 고골의 <죽은 농노>, 체호프의 단편들과 희곡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와 <전쟁과 평화>, 투르게네프의 <아버지와 아들>과 <사냥꾼의 일기> 등이 그런 작품들이다. 그런데 나보코프는 <강의>에 수록된 <안나 카레니나> 해설에서 가넷의 번역문을 인용하면서도, 종종 틀린 부분을 지적하며 수정하고 있다.


그럼 혹시 나보코프가 가넷 번역본의 문제점에 관해 별도로 쓴 글이 있는지 궁금해서 <강의>의 목차를 살펴보았는데, 그중에서 맨 뒤에 수록된 "번역의 예술"(원제가 "The Art of Translation"이기 때문에 차라리 “번역의 기술”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이라는 제목이 눈에 띄었다. 가넷에 관한 논의는 없었지만 (나중에 확인해 보니, 영어판은 권두의 "해설" 말미에 가넷 번역본에 관한 이야기가 들어 있는데, 한국어판에서는 "해설"에서 하필 그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왜죠?) 그래도 번역에 대한 나보코프의 견해를 알 수 있는 글이어서 흥미로웠는데, 중간에 뭔가 좀 이상한 문장을 발견했다.

 

나보코프는 "언어 지식의 부족으로 (...) 아주 일상적 표현이 (...) 의미심장한 것으로 탈바꿈하는 경우"에 해당하는 오역의 사례를 이렇게 소개한다. “Bien etre general(전반적인 안락함)이 건장한 남자의 주장 It is good to be a general(장군이 되어서 기쁘다)로 탈바꿈한 것이 그 예다. ‘전반적인 안락함’을 ‘장군’으로 바꾸어 준 <햄릿>의 프랑스어 번역가는 이 용감한 장군에게 캐비아도 대접했다고 한다.”(554쪽)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general이란 단어가 "전반적인"에서 "장군"으로 오역되었다는 것은 알았지만, 도대체 저 뒤에 나오는 "캐비아"는 무슨 뜻인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또 하나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이 두 가지 문장이 "<햄릿>의 프랑스어 번역가"의 솜씨라는 나보코프의 말이었다. <햄릿>은 영어로 쓴 작품인데, 그렇다면 "<햄릿>의 프랑스어 번역가"는 이 희곡을 "영어에서 프랑스어로" 옮긴 사람을 말할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Bien etre general을 It is good to be a general로 잘못 번역하는 일이 생길 수 있다는 걸까? 오히려 반대로, 즉 It is good to be a general을 Bien etre general로 잘못 번역했다고 설명해야만, 바로 뒤에 나오는 “<햄릿>의 프랑스어 번역가”라는 나보코프의 말과 앞뒤가 맞아 떨어지지 않을까? 난 처음에 이 부분, 즉 두 가지 예문의 위치를 바꿔놓은 것이 오역인줄 알았다.


하지만 아마존에서 원문을 확인해 보니 이랬다. “Bien etre general” becomes the manly assertion that “It is good to be a general”; to which gallant general a French translator of "Hamlet" has been known to pass the caviar. 이것만 놓고 보면, 위의 문장에서 인용문의 위치는 틀리지 않았다. 하지만 어째서 나보코프는 "<햄릿>의 프랑스어 번역가"가 "프랑스어 문장"을 "영어 문장"으로 옮기는 과정에서 오역을 만들어냈다고 지적하는 것일까? 아무래도 위의 두 문장은 뭔가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봐야 할 듯했다. 그리고 "캐비아"라는 단어가 그 열쇠가 될 것 같았다.


우선 <햄릿>과 “캐비아”가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지 궁금했다. 구텐베르크 프로젝트에서 <햄릿> 원문을 찾아서 caviar라는 단어로 검색해 보니, 제2막 2장에 'twas caviare to the general라는 구절이 등장했다. 신정옥 번역본에서는 “일반 대중에게는 돼지 앞에 진주라”(82쪽)로 의역했고, 김정환 번역본에서는 “보통 사람에게 철갑상어알이랄까”(77-8쪽)로 직역해 놓은 구절이다. 두 가지 번역본을 근거로 판단해 보건대, 여기서는 “일반 대중; 보통 사람”으로 번역되어야 맞는 general을 나보코프는 왜 굳이 gallant general(용감한 장군)이라고 써놓은 것일까? 좀 더 생각해 보니 비로소 답이 나왔다. 


결국 그는 general(전반적인)을 a general(장군)로 잘못 옮긴 한 가지 사례를 소개한 다음, 이번에는 the general(대중)을 a general(장군)로 잘못 옮긴 또 한 가지 사례를 소개하는 셈이다. 즉 여기서 <햄릿>과 연관된 오역은 나중 것뿐이다. 위에 인용한 나보코프 저서의 두 번째 문장은 원래 원문을 정확히 옮긴 것이지만, 두 개의 문장이 별개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번역자가 굳이 첨언(“‘전반적인 안락함’을 ‘장군’으로 바꾸어 준”)을 하는 바람에 졸지에 오역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이 첨언을 떼어 버린 “<햄릿>의 프랑스어 번역가는 이 용감한 장군에게 캐비아도 대접했다고 한다”도 직역이기는 하지만 좋은 번역은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나보코프는 독자가 'twas caviare to the general라는 구절을 익히 알고 있다고 가정한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그 정도로 <햄릿>을 숙독한 독자는 많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번역자가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한 배경 설명을 덧붙이거나, 또는 아예 이해하기 쉽도록 적당히 문장을 첨삭하는 편이 나았으리라. 나 같으면 원문에 충실하기보다는 차라리 의미 전달을 우선시하고 싶다. “그런가 하면 <햄릿>의 프랑스어 번역가 가운데 한 명은 the general(대중)을 a general(장군)으로 오독한 나머지, ‘대중에게 캐비아’(대략 ‘돼지에게 진주’라는 뜻)라는 유명한 구절을 ‘장군에게 캐비아’로 잘못 옮기기도 했다.”

 

이 글의 또 다른 대목에서도 나보코프는 <햄릿>의 또 한 가지 유명한 구절을 독자가 익히 알고 있으리라 가정하고 이야기를 펼쳐 나간다. “오펠리아가 갖고 있던 잡초들,” 즉 “젓가락풀, 쐐기풀, 데이지, 자주개자리”를 졸지에 “제비꽃, 카네이션, 장미, 백합” 같은 “예쁜 꽃으로 탈바꿈시킨 셰익스피어 러시아어 번역본”(555쪽)을 비판하면서, 이 인용문 바로 다음에 이렇게 말한다. “각양각색 꽃의 향연은 왕비에게 품위를 선사하면서 그녀의 일탈을 삭제하고 자유로운 양치기마저 같이 해치워버린다. 에이번 강변에서 이 같은 식물 채집을 어떻게, 누가 할 수 있는가는 별개의 문제다.”(556쪽) 


그런데 나는 여기서 저자가 왜 ‘오필리어’를 이야기하다가 ‘왕비’라고 하는지 언뜻 이해가 안 가는 것이다. 뒤늦게 <햄릿>에서 문제의 대목을 다시 찾아 읽어보고서야, 비로소 이 꽃다발 관련 인용문은 햄릿의 어머니인 ‘왕비’가 오필리어의 죽음을 전하는 대사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면 방금 인용한 번역문에는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각양각색 꽃의 향연은 왕비에게 품위를 선사하면서”라는 문장은 마치 ‘왕비’가 그 꽃다발을 들고 있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기 때문이다. 만약 번역자가 <햄릿>의 해당 대목을 꼼꼼히 확인해 보았다면, 과연 이걸 이렇게 번역했을까? 


지금 설명한 전후 사정을 반영하고, 원문과 정확히 대조해서 위의 인용문을 다시 옮기면 대략 이런 뜻이다. “[잘못된 러시아어 번역에 나온] 꽃들의 모습이 장관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덧붙이자면 이 표현은 왕비의 여담을 무단으로 삭제하는 셈이어서, 그로 인해 슬픔 때문에 결여된 고상함을 왕비에게 부여해 버리고, 방종한 목동들에 관한 이야기는 깡그리 무시해 버린다.” 이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위에 인용된 왕비의 대사에서 앞뒤 문맥을 알아야 한다. <햄릿>의 4막 7장에서 왕과 레어트스(오필리아의 오빠)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왕비가 등장하여 오필리아의 익사 사실을 전한다. 


왕비는 오필리아가 개울가에서 “야생꽃들, 쐐기풀, 데이지, 그리고 어린 자주빛 난초”를 가지고 화환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로 대사를 시작하더니, 갑자기 그 꽃 가운데 하나의 이름에 관한 ‘여담’을 늘어놓는다. 즉 맨 마지막에 등장하는 자주빛의 “이 난초를 방종한 목동들은 좀 숭한 이름으로 부르지만 / 우리나라 정결한 처녀들은 죽은 사람의 손가락이라”(김정환 번역본, 164쪽)고 부른다는 것이다. 짐작컨대 이것은 식물의 일반적인 명칭과 속칭의 차이가 아니었을까 싶다.(예를 들어 ‘개불알꽃’과 ‘복주머니란’이 같은 식물을 가리키는 말인데, 하나는 그나마 좀 점잖고, 또 하나는 상당히 점잖지 못하게 들린다). 


결국 나보코프가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것이다. 그가 비판하는 러시아어 번역본 <햄릿>에서는 이 대목에서 왕비가 언급한 꽃들의 속명(“젓가락풀, 쐐기풀, 데이지, 자주개자리”)을 전혀 종류가 다른, 그리고 더 흔히 볼 수 있는 꽃들의 명칭(“제비꽃, 카네이션, 장미, 백합”)으로 바꿔 놓았기 때문에, 결국 목동들과 처녀들이 서로 다르게 부르는 이름들에 관한 왕비의 ‘여담’은 아예 ‘무단으로 삭제’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방종한 목동들’에 관한 대목은 통째로 날아가 버리고, 뿐만 아니라 오필리아의 익사를 목격하고 왕에게 알리려 달려온 왕비의 대사도 변해 버린다.


즉 오필리어의 죽음을 목격하고 놀란 나머지 이야기를 하다 말고 갑자기 엉뚱한 ‘여담’까지 들먹이며 횡설수설하던 왕비의 대사가, 졸지에 평소와 마찬가지의 ‘고상함’을 드러내는 대사로 변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위에 인용한 나보코프 강의록의 번역을 다시 손질하자면 이렇게 된다. “[위의 잘못된 번역에 나온] 꽃들의 모습이 장관이라는 것은 자명하다. 덧붙이자면 이 표현은 [꽃의 여러 가지 속칭에 관한] 왕비의 여담을 무단으로 삭제하는 셈이어서, [오필리아의 죽음에서 비롯된] 슬픔 때문에 결여된 고상함을 왕비에게 부여해 버리고, [꽃의 속칭을 민망하게 부르는] 방종한 목동들에 관한 이야기는 깡그리 무시해 버린다.” 


말이 나온 김에 누락된 부분도 하나 지적해 보자. 바로 다음 문장에 나온 “에이번 강변에서”도 원문은 the Helje or the Avon이라고 나오는데, the Avon과 마찬가지로 강의 이름이 아닐까 싶은 the Helje는 아예 우리말 번역에서 빠져 버리고 말았다.(물론 이런 지명은 인터넷에서도 안 나오는 것으로 보니 번역자로서도 고충이 있었을 듯하다. 하지만 철자가 비슷한 Helge River라는 강은 스웨덴 남부에 있긴 한데, 혹시 나보코프도 Helge를 Helje라고 오해한 것일까?). 앞에 언급한 영어판 편집자의 "해설"도 마찬가지이지만, 다른 부분에서도 이렇게 소소하게 누락되거나 뭉그러진 구절이 눈에 띄었는데, 과연 신뢰할 만한 번역본이라고 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리고 최근의 <롤리타> 오역 논란에 드러난 것처럼) 나보코프의 책에는 독자가 무심코 넘어갈 법한 부분에도 의외의 함정이 종종 숨어 있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현학성"이 아닐까? 마치 “자, 이거 모르는 사람은 없겠죠?" 하고 물어보는 듯한 과시적인 태도가 은연중에 드러나는데, 단순히 (보르헤스의 경우처럼) 이방인 출신인 자신이 영문학에 대해 갖고 있는 지식을 과시하려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미가 있었던 것인지 잘 모르겠다. 여하간 번역의 ‘예술’인지 ‘기술’인지를 설명하는 글에서 의외의 오역이 나타났다는 것은 적잖은 아이러니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제프 다이어 지음, 한유주 옮김 / 사흘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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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 뮤지션에 관한 에세이라기에 무슨 내용인지 궁금해서 알라딘 미리보기로 넘겨보다가 이상한 대목을 발견했다. 색소폰 연주자 레스터 영에 관한 대목에서, 그의 동료였던 "호크" 콜먼 호킨스가 “화가 난 채로 무대에서 내려왔고, 그의 색소폰을 자동차 뒷좌석에 집어던지고는 그날 밤 공연이 예정되어 있던 세인트루이스로 가는 동안 내내 그것을 불어댔다”(31쪽)는 구절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호크가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색소폰을 불었다는 이야기로 보이는데, 솔직히 이해가 잘 되지 않았다. 아무리 화가 났다고 해도, 도대체 무엇 때문에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색소폰을 분단 말인가. 만약 직접 운전을 했다면 색소폰을 불었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이야기이고, 설령 다른 사람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갔더라도 흔들리는 차 안에서 악기를 연주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서 결국 아마존에서 원문을 검색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황당무계한 오역이었다. 원문은 Hawk walked off the stand, threw his horn in the back of his car, and gunned it all the way to St. Louis for that nights gig, 즉 호크가 "화가 났다"는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고, 번역문에 나온 "그것"은 악기가 아니라 "자동차"였다. 즉 gunned it은 "악기를 불어댔다"가 아니라 "자동차를 몰았다"는 뜻이다. 다시 번역하자면 "호크는 무대에서 내려오더니, 자기 악기를 자기 차 뒷좌석에 던져 넣고, 그날 밤 공연을 위해 세인트루이스까지 줄곧 차를 몰았다"고 해야 맞다. 그런데 문제는 오역이 이것만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한 페이지에 두어 개씩은 꼬박꼬박 오역이 출몰하는데, 문맥이나 단어/숙어를 잘못 이해해서 생겨난 실수들이 정말 수두룩했다. 몇 가지를 열거하자면 이렇다:



30쪽, 

그는 자신을 묽게 희석하려는 듯, 빼빼 마른 사내가 되려는 듯 술을 마셨다. 

--> 그는 자신을 희석하려는 듯, 자신을 더 묽게 만들려는 듯 술을 마셨다.

*** 원문은 He drank to dilute himself, to thin himself down even more. 여기서 dilute와 thin down은 양쪽 모두 "희석하다; 물을 타서 연하게/묽게 만든다"라는 뜻이다. 바로 뒤에는 그가 하도 술을 많이 마셔서 피의 색깔조차도 옅어졌을 것만 같았다는 내용의 문장이 나온다.



30쪽, 

결국 같은 날 호크가 찾아왔다.

--> 훗날 호크도 같은 길을 걸었다

*** 원문은 Hawk went the same way eventually. 무슨 뜻이냐 하면, 레스터 영이 재능을 만개하지 못하고 불우한 말년을 보낸 것처럼, 그의 친구이자 라이벌인 "호크" 콜먼 호킨스도 "같은 길을 걸었다"는 뜻이다. 이에 관해서는 불과 두 페이지 뒤에서 저자가 다음과 같이 부연하기도 한다. "그들은 결국 같은 방식으로 생을 마감했다. 술독에 빠져 생을 잃어버리고 만 것이다."(32쪽)



32쪽,

이러한 소리를 내기 위해 그는 항상 거리낌 없이, 자신이 어떻게 연주하게 될지를 전혀 모르는 채, 멋대로 연주할 자세가 되어 있었다.

--> 결코 그럴 리야 없었지만, 그가 내는 소리는 마치 금방이라도 고삐를 끊고 멋대로 떨어져 나가려는 것처럼 들렸다.

*** 원문은 Sounding like he was always about to cut loose, knowing he never would. 번역문만 봐서는 도대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다. 저자는 레스터 영의 색소폰 소리가 가볍고 부드럽고 나른하면서도, 어딘가 날이 서 있었다고 지적한다. 즉 위의 문장처럼 그의 연주가 "불안정성"(멋대로 떨어져 나가려는 성향)과 "안정성"(그렇다고 해서 실제로 떨어져 나가는 일은 없음)을 동시에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에, 묘한 긴장감이 전달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31쪽

함께 어울려 즉흥 연주를 할 때마다 호크는 그를 밴드에서 해고하기 위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시도했지만 언제나 불발로 끝났다.

--> 언젠가 두 사람이 함께 즉흥연주(잼)를 할 때, 호크는 그를 누르기 위해 최대한 실력을 발휘해 보았지만, 결국 누르지 못하고 말았다.

*** 원문은 When they jammed together Hawk tried everything he knew to cut him but he never managed it. 도대체 ‘즉흥 연주’(jam)에서 무슨 ‘해고’란 말인가. 여기서 cut은 “누른다; 이긴다”라고 해석해야 맞다. 빌 크로의 저서인 <재즈 우화>(매우 좋은 책이지만 발췌 번역이기 때문에 진가를 발휘하지 못하는 책이기도 하다. 제목 역시 ‘재즈 우화’가 아니라 ‘재즈 일화’가 맞다)를 보면 재즈 연주자들 사이에 벌어지는 일종의 연주 대결인 ‘커팅 콘테스트’(cutting contest)라는 것이 있었다고 나온다. 아울러 호크와 영의 이 대결에 관한 일화도 거의 그대로 (그리고 정확한 번역으로) 실려 있다.



32쪽,

그는 색소폰을 한쪽으로 기울여 잡았는데, 그가 솔로 연주에 심취하기 시작하면 악기는 마치 플루트처럼, 그가 수평적으로 잡고 연주할 때보다 다소 수직적인 위치로 이동하고는 했다.

--> 그는 색소폰을 한쪽으로 삐딱하게 기울여서 붙잡고 연주했는데, 그가 솔로에 더 깊이 빠져들수록 악기는 수직 상태에서 몇 도씩 옆으로 더 기울어지게 되어서, 급기야 그는 색소폰을 마치 플루트처럼 수평으로 붙잡고 연주하기에 이르렀다. 

*** 원문은 He played with sax tilted off to one side and as he got deeper into his solo the horn moved a few degrees further from the vertical until he was playing it horizontally, like a flute. 즉 "수직"에 가까운 상태로 악기를 붙잡고 연주를 시작해도, 연주에 심취할수록 악기가 점점 "기울어지게" 되어서, 나중에는 급기야 "수평" 상태로 놓이게 된다는 뜻이다. 레스터 영의 사진을 검색해 보면 실제로 이렇게 옆으로 붙잡고 연주하는 모습이 나온다. 그런데 이 책의 번역문은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게 되어 있다.



32쪽,

다른 연주자들은 그에게는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며 그의 가치를 폄하하곤 했다.

--> 다른 수많은 연주자들이 그에게서 [연주법을] 가져갔기 때문에, 그에게는 남은 것이 전혀 없었다.

*** 원문은 So many other players had taken from him that he had nothing left. 레스터 영의 연주법이 워낙 독특했기 때문에, 나중에 가서는 그를 모방하는 연주자가 우후죽순으로 나오게 되었고, 급기야 그 "원조"인 레스터 영이 도리어 "아류"로 몰려서 폄하되는 지경에 이르렀다는 저자의 설명이 이어진다.



34쪽,

달콤한 화장수 냄새를 맡으며 프레스는 ~ 깜찍한 구두 두 짝을 신고 책상 위에 발을 올려놓고 있는 어떤 순간을 상상했다.

--> 향수 냄새를 달콤하게 풍기며 프레스는 ~ 마치 금방이라도 자신의 앙증맞은 신발을 그들 앞의 책상 위에 턱하니 올려놓을 것처럼 보였다.

*** 원문은 Smelling sweetly of cologne ~ looking as though he might at any moment rest his dainty shoes on the desk facing him. 레스터 영이 "냄새를 맡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몸에서 향수 냄새가 풍겼다는 뜻이다. 징병 검사를 받으러 갔을 때의 상황이었으니, 책상 앞에 앉아 있던 세 명의 징집관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었겠는가.



34쪽,

그들이 던지는 질문들 사이로 그의 답변이 춤추듯 민첩하게, 동시에 불분명하게 흘러나왔다.

--> 그들의 질문에 그가 내놓은 답변은 뭔가 겉도는 느낌이었으며, 민첩하기는 했지만 [알아듣기 힘들 만큼] 발음이 불분명했다

*** 원문은 His answers danced around their questions, nimble and slurred at the same time. 여기서 danced around는 정확한 답변이 아니라 "빙빙 돌리는 답변"이라고 해야 맞다. 레스터 영이 징병 검사를 받기 위해 갔을 때의 이야기인데, 이때 그는 징집관 앞에서도 술병을 꺼내 보여줄 정도로 안하무인이었음은 물론이고, 술(또는 약물)에 취했는지 약간 정신이 오락가락 했던 것으로 묘사된다. 다른 책을 살펴보면 영은 약물 중독에 성병까지 걸린 상태여서 당연히 면제가 되리라 생각하고 일부러 "맛이 간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예상 외로 현역 판정이 떨어져서 이후 군대에서 엄청나게 고생을 하게 되었으며, 이는 그의 재즈 뮤지션으로서의 경력에도 치명타가 되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이런 식의 오역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위의 사례만 보아도 이 책은 신뢰할 만한 품질의 번역본이 "결코" 아니다.(그런데 이렇게 번역이 엉망인 책을 무려 "추천"씩이나 한 사람들은 뭐지?)[*] 이 책을 번역한 한유주라는 사람은 본래 소설가인 모양인데, 왜 굳이 번역에도 손을 대서 망신을 자초했는지 모르겠다. 물론 소설가나 시인이 번역가로 활동하는 일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며, 실제로 뛰어난 창작자가 뛰어난 번역가인 경우도 있다. 하지만 창작과 번역은 전혀 다른 종류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곤란하다. 창작에서는 "글쓰기"가 중요하겠지만, 번역에서는 오히려 "글읽기"가 중요하다. 따라서 소설가가 번역을 하더라도 "글쓰기"보다는 "글읽기"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왜냐하면 소설가와 달리 번역자의 미덕은 유려함이 아니라 정확함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 "당연한" 사실을 무시하는 사람들이 많고, 심지어 전문 번역가를 자처하는 사람들 중에도 많다는 점이다. 정확성보다 유려함을 좋은 번역의 기준으로 생각하다 보니, 심지어 기존의 번역본을 베끼고 "윤문"에만 신경쓴 엉터리 고전 번역본이 오히려 "좋은" 번역본으로 간주된다.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이제는 창작을 주로 하는 사람들까지도 얄팍한 글재주를 믿고 "번역 겸업"을 선언하고 나서는 것을 보면, 아직까지도 번역을 우습게 보는 ("영어만 알면 누구나 된다!") 대중의 사고방식은 여전한 것만 같다. 번역과 창작의 가장 큰 차이는 "원문"의 유무이다. 창작이야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쏟아내도 그만인지 몰라도, 번역은 저자의 의도를 독해하고 표현하기 위해 최대한 신경 써야 한다. 제대로 못 읽어낸다면, 아무리 잘 표현해도 소용없다. 이 책이 그 증거다.


한유주라는 사람이 소설가로선 어떤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책을 갖고 판단하자면 그는 "번역가"로서도 불성실하고, 남의 글을 읽는 "독자"로서도 불성실해 보인다. 번역 이후 교정교열 과정에서 위처럼 뜻이 안 통하는 문장을 봤으면 고쳐야 하지 않았을까? 출판사도 문제다. 독자가 보기에도 이상한 문장이라면, 편집자가 미리 알아채고 고쳐야 하지 않았을까? 같은 번역자와 같은 출판사가 합작한 같은 저자의 또 다른 책도 미리보기로 확인해 보니 비슷한 상황인 것 같다. 거듭 말하지만 창작과 번역은 전혀 성격이 다른 일이다. 그러니 소설을 쓰고 싶으면 아예 그냥 소설을 쓸 것이지, 이렇게 원문과는 전혀 동떨어진 문장을 구구절절 창작해 놓고서 번역을 했다고 우기면 곤란하다. 글쓰기를 업으로 삼은 사람이 정작 남의 글조차 존중하지 않는다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 이 책에 관한 <동아일보>(2013. 5. 11)의 서평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된다. "보는 것을 이해한다는 것. 그건 달리 말하면, 우리의 눈을 이해해 가는 비밀의 문을 여는 일이다. 그런 맥락에서 미국 논픽션 작가 제프 다이어의 ‘그러나 아름다운’을 읽는다는 건 작가의 눈을 이해하는 데 시간을 들여야 한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 같으면 차라리 이렇게 말하겠다. "이 책을 읽는다는 건, 번역자의 오역을 찾아내는 데 시간을 들여야 한다는 뜻이 분명하다."



가끔 알라딘에서 책을 찾다가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책들 중에서도 유독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하는 느낌을 주는 표지들이 있다. 어떤 것은 컨셉 자체가 비슷하기도 하고, 어떤 것은 색깔이나 레이아웃의 유사성 때문에 비슷하다고 착각하기도 하고, 어떤 것은 (남들 눈에는 전혀 안 똑같아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유독 내 눈에만 비슷하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또 한편으로는 디자인이란 것이 어느 때보다도 더 중요해진 시대라고는 하지만, 사실 디자이너들도 아이디어는 대개 거기서 거기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 어쩌면 아래의 사례들은 일종의 출판 디자인 매너리즘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르고, 또는 인간의 상상력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터넷"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예전 같았으면 책 표지를 이렇게 나란히 비교할 기회조차도 얻기 힘들었을 터이고 (물론 예전에는 책 표지 따위에 이렇게 신경 쓰지도 않았지) 설령 비교한다 하더라도 그 사실을 보여주는 것조차도 힘들었을 테니까. 점점 비까번쩍해지는 껍데기와는 달리, 알맹이는 교정교열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엉터리가 난무한다는 것도 또 한 가지 아이러니다. 껍데기에 나름 신경 쓴다고 해서 만든 게 결국 거기서 거기일 뿐이라면, 차라리 껍데기에 들일 공을 알맹이에 들이는 편이 더 현명한 것은 아닐까? 여하간 눈에 띄는 대로 구구절절 기록해 보자면 대략 다음과 같다(계속 업데이트 중이다):

 

 

 

 

 

1. 스티븐 존슨, <바보상자의 역습>, 비즈앤비즈, 2006

2. 임성순, <컨설턴트>, 은행나무, 2010

 



1. 김별아, <영영 이별 영 이별>, 창해, 2005

2. 리카이저우, <공자는 가난하지 않았다>, 에쎄, 2012

*** 이거 말고 또 하나가 있었는데, 정확히 뭔지 까먹었다. 쯧.

 



1. 정수일, <씰크로드학>, 창비, 2001

2. 이지상, <실크로드 여행>, 북하우스, 2003

3. 조정래의 <오 하느님>과 그 개정판인 <사람의 탈>




1. 존 카스티, < X 이벤트>, 반비, 2013

2. 이명우, <적의 칼로 싸워라>, 문학동네, 2013





1. 데이비드 브룩스, <보보스는 파라다이스에 산다>, 리더스북, 2008

2. 서동욱, <철학 연습>, 반비, 2011




1. 오에 겐자부로, <책이여 안녕>, 청어람미디어, 2008

2. 이미나, <사랑 고마워요>, 걷는나무, 2009

 



1. 노엄 촘스키, 질베르 아슈카르, <촘스키와 아슈카르, 중동을 이야기하다>, 사계절, 2009

2. 카너 폴리, <왜 인도주의는 전쟁으로 치닫는가>, 마티, 2010




1. 스타니슬라프 그로프, <환각과 우연을 넘어서>, 정신세계사, 2007

2. 티모시 윌슨, <내 안의 낯선 나>, 부글북스, 2012




1. 커스틴 셀라스, <인권, 그 위선의 역사>, 은행나무, 2003

2. 마빈 조니스 외, <빅맥이냐 김치냐>, 지식의날개, 2004

 

 


1. Alain de Botton, STATUS ANXIETY, Vintage, 2005

2. 최주연, <불안 버리기>, 소울메이트, 2011

 



1. 데이비드 버스, <이웃집 살인마>, 사이언스북스, 2006

2. 마거릿 밀러, <내 안의 야수>, 영림카디널, 2011

 

 


1. 사사키 조, <폭설권>, 북홀릭, 2011

2. 크레이그 톰슨, <담요>, 미메시스, 2012

 



1. 나카타니 아키히로, <마음이 예뻐지는 내 영혼의 비타민>, 소담출판사, 1999

2. 마이클 폴란, <욕망의 식물학>, 서울문화사, 2002

 



1. 녹색당, <녹색당 선언>, 이매진, 2012

2. 참여사회연구소, <스웨덴 스타일>, 이매진, 2013

*** 아마도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기 때문에 비슷해 보이는 것이 아닐까.

 



1. 헨리 페트로스키, <이 세상을 다시 만들자>, 1998

2. 브라이언 크루버, <탐욕의 실체>, 영진닷컴, 2003

 

 


1. 필리스 레이놀즈 네일러, <샤일로>, 서돌, 2004

2. 백승자, <해리네 집>, 청개구리, 2012

 



1. 존 어빙, <가아프가 본 세상>, 문학동네, 2002

2. 표트르 바르소니, <피카소가 모나리자를 그린다면?>, 내인생의책, 2013

 

 

 

 

1. 이기호, <최순덕 성령 충만기>, 문학과지성사, 2004

2. 야마다 에이미, <베드타임 아이스>, 민음사, 2008

 

 

 

 

1. 보리스 폰 슈메르체크, <지금이라도 네 삶을 흔들어라>, 다른우리, 2005

2.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 <최후의 세계>, 열린책들, 1999; 2006; 2009

 

 

1. 데니스 루헤인, <운명의 날>, 황금가지, 2010

2. 스티븐 킹 외, <종말문학 걸작선>, 황금가지, 2011

*** 한쪽의 폐허, 그리고 마치 폐허처럼 보이는 또 한쪽의 이미지 때문에 비슷하게 느껴진 것인지도.

 

 

 

1. 정승현, <경제학의 탈을 쓴 자본주의>, 황매, 2009

2.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외,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 강, 2003

 

 

 

1. 김숨, <여인들과 진화하는 적들>, 현대문학, 2013

2. 마거릿 애트우드, <그레이스>, 민음사, 2012

 

 

 

 

1. 마이클 델라니, <새집머리 아모스>, 시공주니어, 2004

2. 토베 얀손의 "무민 시리즈"

*** 이건 표지보다는 캐릭터가 비슷한 경우랄까.




1. 아이코닉스, <태극천자문 9>, 풀빛미디어, 2008

2. 도리야마 아키라, <닥터슬럼프 1>, 학산문화사, 2004



1. 막스 갈로, "로마 인물 소설" 시리즈, 예담, 2007

2. 앤 맥카프리, "퍼언 연대기" 시리즈, 북스피어, 2007



1. 지그문트 바우만, <리퀴드 러브>, 새물결, 2013

2. 이언 매큐언, <암스테르담>, 미디어2.0, 2008



1. 다니엘 D. 엑케르트, <화폐 트라우마>, 위츠, 2012

2. 스즈키 고타로, <무서운 심리학>, 뜨인돌, 2010

*** 이거 말고 비슷한 표지가 또 하나 있었던 것 같은데, 뭐더라.




1. 전경남, <내가 보여>, 사계절, 2009

2. SOON, <탐묘인간>, 애니북스, 2012



1. 한승태, <인간의 조건>, 시대의창, 2013

2. 폴리 토인비, <거세된 희망>, 개마고원, 2004

*** (2)의 저자 폴리 토인비는 유명한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의 손녀이다. 기자 신분을 숨기고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한 경험을 서술한 책인데 (이 분야의 선구자는 바버라 에렌라이히인가로 알고 있다) 무척 재미있다.




1. 아이작 더스트, <아이작의 영어공식: 30개로 말해봐>, 뉴런, 2008

2. 움베르토 에코 외, <책의 우주>, 열린책들, 2011



1. 모치즈키 미네타로, <동경괴동 1>, 삼양출판사, 2010

2. 정필원, <지상 최악의 소년 1>, 재미주의, 2012



1. 최상운, <고흐 그림여행>, 샘터사, 2012

2. 임마누엘 칸트 외, <별이 총총한 하늘>, 이학사, 2002

*** (2)는 빌헬름 바이세델이 편집한 칸트 어록인데, 무척 재미있다. 칸트의 핵심 사상을 보여주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그의 인간적 매력만큼은 확실히 보여준다. 




1. 홍진경, <인간의 얼굴, 그림으로 읽기>, 예담, 2002

2. 마이크 레스닉, <담비를 안고 있는 여인>, 파란자전거, 2007

*** (2)는 <키리냐가>의 저자 마이크 레스닉의 청소년 (판타지) 소설이다. 미술 작품을 소재로 여러 유명 작가들이 쓴 청소년 소설 시리즈 가운데 하나인가 그렇다.




1. 조한성, <한국의 레지스탕스>, 생각정원, 2013

2. 퀜틴 스키너, <마키아벨리의 네 얼굴>, 한겨레출판, 2010




1. 프랭크 페어모일렌, <에스더의 싸이언스 데이트>, 예가람, 2007

2. 알론소 데 콘트레라스, <콘트레라스 선장의 모험>, 글항아리, 2013





1. 하버드 철학 리뷰 편집부, <하버드 철학을 인터뷰하다>, 돌베개, 2010

2. 정운현, <친일파는 살아 있다>, 책보세, 2011










얼마 전, 진인각에 관한 자료를 찾다가 마주친 뜻밖의 책들 (뭐, 그런 책이 한두 권이 아니었다는 게 아직까지도 이 일을 매듭짓지 못하고 있는 이유이긴 하지만, 하여간에...) 가운데 하나가 아청(阿城)의 <아이들의 왕>(박소정 옮김, 지성의샘, 1993)이었다. 차이나하우스라는 출판사에서 간행된 수수께끼의 진인각 전기(이 책을 검색해 보면, 인터넷 서점에서는 아예 검색되지도 않고, 국립도서관에 한 부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전국의 그 어떤 국공립도서관에도 소장되어 있지 않으며, 심지어 시중에 유통되었다는 흔적조차 전혀 없다. 우여곡절 끝에 구해서 읽어보긴 했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희한한 책이다. 얼마 뒤에 바깥양반이 필요하다고 해서 폴 벤느의 <빵과 놀이>(신상화 옮김, 새물결, 2007)이라는 책을 수소문했을 때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는데, 뭐냐 하면 이게 소리소문없이 나왔다가 소리소문없이 사라진 일종의 "유령" 책이라는 거다. 알라딘과 네이버 등에서는 서지사항이 잡히지만 정작 전국의 그 어떤 국공립도서관에도 소장되어 있지 않은 책이라는 거다. 자세한 내용은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이야기하겠지만, 어쩌면 우리 주위에 이런 "유령" 책들이 적지 않을 것도 같다. 또 한 가지 생각나는 것은 매튜 그레고리 루이스의 책인데, 이 사람 이름으로 검색해 보면 "국내도서"에 2건이 뜨지만 정작 클릭을 해 보면 <몽크>라는 책 한 권만 뜬다. 음, 이거 한여름에 했어야 좀 오싹한 느낌이 들지도 모르는데... 이건 아마 다른 출판사(예담이었나?)에서 이 책을 "근간"으로 올려놓았다가 슬그머니 빼버린 흔적이었다고 알고 있다. 이전에 검색했을 때에는 "근간 예정"의 서지정보도 떴었는데, 지금은 사라진 듯하다)를 번역했던 나선희라는 중문학 연구자가 쓴 “진인각의 중국학 연구방법론과 학문적 지향”(<중국학보> 제65집, 2010)이라는 글을 읽다 보니, 그 말미의 참고문헌에 레이 초우의 <디아스포라의 지식인>(장수현 옮김, 이산, 2005)이 들어 있었다. 진인각에 관한 한글 자료 자체가 워낙 드문 상황이다 보니, 혹시 그에 관한 내용이 한 마디라도 들어 있을까 하는 기대가 생겨서 (이택후의 <중국현대정치사상사론>(김형종 옮김, 한길사, 2005)을 뒤져본 것도 그래서였다. 색인에 진인각의 이름이 대여섯 번쯤 등장하는데, 해당 페이지를 찾아보면 그냥 이름만 띡 언급하는 넘어가는 식이라 별 도움은 되지 않았지만, 그래도 노신과 호적에 관해서 흥미로운 고찰을 발견해서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 꽤 오래 전에 사다만 놓고 들춰본 적 없었던 그 책을 꺼내 뒤적여 보였다. 아쉽게도 진인각에 관한 언급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의외의 또 한 가지 낯익은 이름이 눈에 띄었는데, 바로 아청의 소설 <아이들의 왕>이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중국 소설을 모아 놓은 책장을 정리하다가 그 책을 본 기억도 나기에, 이번 기회에 한 번 읽어보려고 <아이들의 왕>을 꺼내 놓았다. 레이 초우의 책에 잠깐 언급된 내용만 보면, 아청의 소설은 문화혁명 당시에 하방(下放. 모택동의 지시로 주로 학생과 전문직 등을 시골로 보내 농공업 등의 생산 작업을 담당하게 했던 조치로 기억하는데, 그 당시에 탄압을 받은 지식인 중에는 정말 자기 전공이나 주특기와는 무관한 일을 해야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어서, 결과적으로는 일종의 처벌 더하기 시간낭비였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예를 들어 애청 같은 유명한 시인은 졸지에 벽지에 가서 공동 변소 청소 일을 해야 했다니 [그의 아들이며 미술가인 아이웨이웨이의 인터뷰집(미메시스, 2011)에 그 이야기가 잠깐 나온다] 정말 말 다하지 않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농업 생산에 지식인을 투입했다는 사실 때문에 브나로드의 일종으로 여기고 오히려 긍정적으로 판단하려는 사람들도 일부나마 있는 듯한데, 그건 어디까지나 대약진운동의 후유증으로 생긴 대기근과 문화혁명 같은 일련의 파국까지 모두 감안해서 장단점을 파악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쉽게 말해서 지식인이 도시를 떠나 농촌으로 가서 식량 생산에 뛰어들었다는 것은 일면 갸륵해 보이지만, 문제는 그게 자발적인 행위가 아니라 강제적인 조치였다는 데 있는 거니까)을 당한 도시 지식인의 이야기인 것도 같았는데, 마침 진인각의 생애를 추적하면서 문화혁명에 관한 책을 다시 한 번 뒤적여 보아야 할 필요성을 느끼던 참이었기 때문이다. 진인각은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에게 물리적인 위해까지는 당하지 않았지만, 연로하고 실명하고 쇠약해진 상태에서 폭언에 시달리며 정신적으로 심한 고통을 겪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제자인 계선림(이번에 진인각 관련서를 본격적으로 찾아보기 전까지만 해도 "지셴린"과 "계선림"이 동일인이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지셴린"은 최근 몇 년 사이에 간행된 이런저런 "인생론"이나 "회고담"의 저자로만 알았고, "계선림"은 꽤 오래 전에 나온 문화혁명 회고록인 <우붕잡억>의 저자로만 알고 있었으니까. 문제는 이 사람이 동아시아 및 중앙아시아와 문명 교류사 등의 분야에서 권위자임에도 불구하고 [예를 들어 "깐수" 선생도 이 사람 제자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 음, 그나저나 나는 어쩐지 이 양반이 아직도 한국 사람 같지 않아서 지금도 "정수일" 대신에 "깐수"라고 부르고 있다. 황석영은 그의 이력을 소개한 장문의 글에서, 대단한 학식을 쌓은 학자가 한국에 와서 고정간첩 노릇을 해야 했다는 것이야말로 한국사의 "비극"이라는 취지로 이야기한 바 있었지만, 내가 보기에는 단순히 외모 때문에 아랍인 시늉을 했다는 것 자체며, 거기에 모두가 껌벅 속아 넘어갔다는 사실은 둘도 없는 "희극"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정체가 밝혀지기 직전에 있었던 호산방 박대헌 씨와의 표절 논란 같은 것은 이제 기억하는 사람도 없겠지만, 글쎄, 아무리 뛰어난 학자라 하더라도, 그의 저서를 대할 때면 뭔가 씁쓸한 느낌이 없지 않다] 우리나라에 나온 그의 책은 하나같이 "가벼운" 것들이기 때문에, 그의 학문적 명성을 직접 확인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뭐, 그나마도 논문 한 편을 빼면 아예 번역된 저술이 없는 진인각보다야 낫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또 한편으로 계선림의 "인생론" 역시 과도한 편집 때문에 온전한 뜻이 모호해지는 경우가 없지 않은 듯하다. 당장 우리나라에 나온 두어 권의 책에 중복으로 실려 있는 에세이를 보면, 같은 내용인데도 불구하고 제목 뽑기와 편집의 묘미 덕분에 오히려 정반대의 뜻[한쪽은 "-하라", 또 한쪽은 "-하지 말라"]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은 당연히 더 심한 꼴을 당했고, 저명한 소설가 파금은 더더욱 심한 꼴을 당한 것은 물론이고 줄곧 어벙벙한 모습을 보여주어서 "외양간"에서 함께 고생한 왕서언에게 비웃음까지 당하고 말았다. 내 경우에는 왕서언의 문화혁명 당시 회고록인 <구린내 나는 아홉 번째 놈>(길정행 옮김, 동과서, 1997)을 먼저 읽어서 파금을 좀 우습게, 또는 가볍게 생각하는 마음가짐이 없지 않았는데, 조만간 양쪽의 증언 모두를 다시 한 번 살펴봐야 할 것 같다. 그나저나 문화혁명 당시에 관한 파금의 증언은 <매의 노래>(홍석표 외, 황소자리, 2006)라는 에세이집에 들어 있는데, 그 제목은 다름아닌 막심 고리키의 단편소설에서 따온 것이다. 지난 번에 황장엽의 회고록을 읽다 보니 그 역시 이 단편소설에 나온 매의 처지(하늘을 날다 상처를 입고 땅에 떨어진 매가 뱀과 이야기를 나누며 다시 한 번 날기 위해 절벽에서 몸을 던진다. 그러나 뱀은 매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에 자신의 처지를 빗대어 이야기하기에, 도대체 무슨 내용인가 싶어서 고리키의 단편집을 뒤적여 본 기억이 난다. 여하간 진인각과 레이 초우를 거쳐서 아청이라는 이름을 다시 기억하게 되었지만, 정작 그 작가나 작품에 관해서는 사실 아는 바가 없는 상태였다. 책 뒤표지를 살펴보니 "아름다운가게"(그나저나 최근 신논현역 근처에 가 보았더니, 강남점은 없어지고 광화문점으로 합병된 모양이다. 역시 서울 번화가에서 헌책방을 운영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가. 각지에 생겨나는 알라딘 중고서점들이 과연 언제까지 버틸지도 궁금한데, 이미 잘 버티고 있다는 점만 봐도 알라딘 중고서점은 "헌책방"이라고 할 수 없다. 최근 들어 더해진 "헌책방"의 정의 가운데 세 번째는 "점차 없어지는 추세이다"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알라딘 중고서점은 중대한 결격사유를 지니고 있다. 여긴 "헌책방"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새책 재고 중심의 중고 서점"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에서 구입했다는 가격표가 붙어 있는 것으로 보아, 생소한 작가의 생소한 소설임에도 불구하고 "싼 맛"에 집어든 숱한 책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다. 장편소설이 아니라 중편 모음집이라는 사실도 이번에 책을 읽으려고 펴들고 나서야 비로소 알았다. 내가 읽은 <아이들의 왕>에는 "장기왕"(棋王), "나무의 왕"(樹王), "아이들의 왕"(孩子王)이라는 세 편의 중편소설이 들어 있다. 원래는 중국어판에 다섯 편이 들어 있었지만, 우리나라의 사정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과연 무슨 이유일지?) 나머지 두 편은 번역을 하지 않았다고 역자가 밝혀 놓았는데, 어째서인지 2010년에 다른 출판사에서 다시 나온 번역본(역자가 다르다)에서도 이 세 편만 수록하고 있다. 가장 유명한 작품은 천카이커(이 사람도 문화혁명 당시에 홍위병으로 활동한 적이 있었고, 그때의 회고록이 <어느 영화감독의 청춘>(푸른산, 1991)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나라에도 번역된 적이 있었다)가 1987년에 영화화한 "아이들의 왕"인 모양이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작품은 바로 "장기왕"이었다. 문화혁명 당시에 하방 길에 오른 주인공(나)은 기차에서 "장기 머저리"로 통하는 왕이셩이라는 동년배의 인물을 알게 된다. 별명처럼 그는 장기에 미친 사람, 또는 장기 이외에는 아무 것도 못하는 사람이었고,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도 "장기 둬요?"라고 다짜고짜 물어보면서 휴대용 장기판을 펼치며 한 수 두자고 권하는 사람이다. 애초의 당혹감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장기 머저리"의 맹목적이다 못해 안타깝기까지 한 열정에 점차 감화된다. 이 소설의 압권은 "장기 머저리"가 그 지역 장기 선수권대회에 참가한 최고수 10명을 동시에 상대하며 "장님 장기", 즉 장기판을 보지 않고 머릿속으로 형세를 암기하여 장기를 두는 대목이다. 슈테판 츠바이크의 "체스"라는 단편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얼마 전에야 완독한 ("왜 그걸 그렇게 오래 읽느냐"고 바깥양반이 한동안 타박했었다) 게이비 우드의 <살아 있는 인형>(김정주 옮김, 이제이북스, 2004)에서 저 유명한 "체스 두는 터키인" 인형(발터 벤야민도 역사 철학에 관한 에세이에서 언급한 적이 있었던 "그 안에 난쟁이가 들어가 있는 터키인". 그나저나 그 대목은 어쩐지 "마르크스주의는 사실 기독교 이단 가운데 하나"라는 농담을 연상시키는 데가 있다. 겉은 터키인/역사적 유물론인데 속은 난쟁이/(기독교)신학이니까)에 관한 대목을 보면,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루진의) 방어"라는 중편도 유사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고 한다.(예전에 <동서문학>에 번역이 실린 바 있는데, 역시나 읽으려고 꺼내놓았다가 차일피일 중이다. 그러고 보니 게이비 우드의 책도 영화 <괴물들>[그러고 보니 이 영화는 앨리슨 래퍼와 토마스 크바스토프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유튜브로 주요 장면만 감상한 적이 있었다. 다른 건 괜찮았는데, 거기 나오는 기형 인간들 중에서도 가장 지켜보기 불편했던 사람은 사지가 없는 "리빙 토르소"[실제로 바넘 서커스단 등에서 공연하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한 인물이다]였는데, 최근 들에 케이블에서 방영되는 <라바>라는 애니메이션을 볼 때마다 그가 생각난다. 유튜브를 보면 <괴물들>에서도 나왔던 그의 담배 불 붙이기 "신공"이 등장하는데, 그걸 보면 정말 그런 생각이 든다]이며, 그림책 <위고 카브레>와 영화 <휴고> 등등을 살펴보느라 꽤나 차일피일 했었다. 심지어 그 와중에 설마 했던 (왜냐하면 몇 년 전에 릴라당의 단편집을 펴냈던 출판사에서 "근간"으로만 걸어놓고 한동안 소식이 없었으므로) 릴라당의 <미래의 이브>가 번역되어 나오기도 했다). 이 중편집의 나머지 작품인 "나무왕"과 "아이들의 왕"은 어제오늘에 와서야 비로소 차례차례 읽어보게 되었다. 세 편 모두 문화혁명 당시 하방 당한 도시 출신의 지식 청년을 화자("나")로 삼고 있으며, 그 대척점에는 순박하면서도 어딘가 어리석은, 심지어 신비스럽고도 맹목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열정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하나둘씩 등장하는 식이다. 하지만 전편을 관통하는 정서는 다름아닌 부조리와 허무라고 해야 할 것도 같다. "나무왕"에서 화자와 동료들은 경제적으로 유용한 나무를 심는다는 명목으로 원시림을 베어 없애라는 정부의 조치에 순응하며, "아이들의 왕"에서 고1 중퇴 학력으로 중3 학생들을 가르치게 된 주인공은 교과서도 갖고 있지 못한 아이들에게 교과서를 베껴쓰게만 하는 겉치레뿐인 수업에 대해 환멸을 느낀다. 이렇게 이야기해 놓고 보면 상당히 묵직하고 어려워 보일지도 모르지만, 의외의 상황에서 더욱 의외의 인물이 등장하며 벌이는 너무나도 의외의 사건들을 설명하는 저자의 어조는 상당히 경쾌하고 발랄하며, 어찌 보면 그런 가벼운 느낌이 오히려 아이러니를 더욱 강화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레이 초우의 또 다른 책(이며, 이 분야를 잘 아는 모 선배의 주장에 따르면 "아주 중요한 책")인 <원시적 열정>(정재서 옮김, 이산, 2004)을 보면 아청의 소설보다도 천카이커의 영화 쪽에 더욱 비중을 두어 설명하는 부분이 있는데, 영화를 못 본 까닭인지 그리 공감이 가는 내용까지는 아니었다.(물론 루쉰의 "회심" 계기를 다룬 유명한 "영화" [그나저나 "슬라이드"도 영화라고 해야 하는지?] 상영 사건에 대한 첫 번째 논문에는 흥미로운 고찰이 있었지만... 역시나 완전히 공감하기는 어려웠다). 오히려 이 책의 맨 앞에 나온 "폴 드망"(요즘은 "폴 드 만"이라고 하지 않던가)의 말마따나 "비평적 맹목성"의 또 한 가지 사례는 아닐까 하는 의구심도 없지 않은데, 뭐냐하면 이론가와 비평가는 사소한 차이를 필요 이상으로 부풀려 말하는 경향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짧은 인용문에 불과하니, 읽고 나서도 내가 제대로 읽었는지 모르겠다. 나중에 <이론에 대한 저항>이라는 저서를 훑어보았는데 상당히 난해했다. 어쩐지 읽고 나서 오히려 더 잘 모르겠는, 그런 느낌). 물론 그런 사소한 차이에 의외로 중대한 암시가 들어있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일종의 집착이나 과대망상에 불과한 경우도 있다. 그리고 때로는 "차이 드러내기"에 집착하는 나머지 "상식"을 저버리는 비평도 생기곤 한다.(내가 확인한 가장 최근(?)의 사례는 조재룡의 <번역의 유령들>(문학과지성사, 2011)이라는 비평집에 들어 있는 만화 <먼나라 이웃나라>의 몇 장면에 대한 분석의 사례를 들겠다. 이론, 또는 "결론"에 대한 맹목성이 근거, 또는 비평의 대상을 어떻게 왜곡해서 해석할 수 있는지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음, 이것도 까려고 책을 꺼내놓은 지 오래인데 역시나 차일피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알라딘 같은 데서도 비판 서평을 하나 쓰면 알바들의 가짜 서평이 우두두 따라 올라와서 진실을 덮어 버리는 판에, 이러쿵저러쿵 내가 짖어봐야 뭔 소용인가 싶기도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결국 그쪽은 헛소리를 해봤자 유명 대학의 교수님이잖아, 나야 바른말을 해봤자 좆도 아닌 독자 새끼고). 적어도 상식에 근거해서 책을 읽는 나 같은 "평범한 독자"(버지니아 울프가 이야기한 것과 같은 의미에서)에게는 이런 풍조가 한편으로는 흥미로우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매우 부조리하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여하간 아청의 소설에 담긴 더 대단하거나 의미심장한 암시나 의미까지는 파악하지 못해서 유감이지만, 적어도 문화혁명 당시의 풍조를 알 수 있는 흥미로운 작품 가운데 하나이기는 분명한 것 같다. 그리고 간만에 읽은 "무척이나 재미있는 소설"이라는 점도 분명하다. 적어도 내가 아청의 소설에 관해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바로 거기까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