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평전
안도현 지음 / 다산책방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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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서 멘토가 되는 사람이 있다면 큰 행복이다. 나의 멘토는 몇년전에 돌아가신 선배 사서다. 평범했던 내가 전국의 사서를 대상으로 강의를 하고 늦은 나이에 대학원에 입학할 용기를 주신 분이다. 이제는 가슴 한 구석에 아련한 상처로 남았다. 글을 쓰면서 도움을 받은 작가는 쉬운 문체와 여행, 문학, 음악을 사랑하는 정여울과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문체의 김훈 작가다. 그들처럼 글을 잘 쓴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며 부러워하지만 단순히 좋아하는 정도이다. '백석평전'을 읽고 나니 사람을 좋아하는 일에도 열정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철학자 강신주는 김수영을, 시인 안도현은 백석을 흠모한다. 강신주는 김수영을 닮고 싶어 했으며 육신의 아버지가 친아버지라면 영혼의 아버지는 김수영이라고 했다. 친 아버지를 영원히 보내 드리며 김수영도 함께 보냈다고 한다. 많은 시인들은 백석을 흠모하며 닮고 싶어한다. 글을 쓰는 작가로서 모방이 아닌 그의 사상이나 철학을 계승할 수 있는 제자가 되는 길은 큰 기쁨이다. 윤동주는 100부 한정판으로 찍어낸 백석의 시집 '사슴'을 구하지 못해 애를 태우다 도서관에서 빌려 읽고는 필사를 했으며  늘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신경림은 백석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시인으로 가난하고 소외받는 사람들의 삶을 따뜻하게 그려냈는데 백성의 시적 대상과 유사하다고 한다. '사슴'은 2005년 계간 '시인세계'의 설문조사에서 현역 시인 156명이 뽑은 '우리 시대 시인에게 가장 영향을 끼친 작품'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백석은 1910년대에 태어나 참으로 파란만장하고 불후한 삶을 살았다. 네번의 결혼과 세번의 이혼, 기생 자야와의 사랑, 오직 충성과 민족주의만 강조하는 획일화된 북한의 이념 등은 자유롭고 낭만적인 삶을 추구하는 백석에게 견디기 힘든 나날이었다. 수많은 지식인들이 친일파로 돌아섰지만 일본에서 유학생활을 했음에도 창씨개명에 반대하고 우리말에 애착을 갖는 애국자였다. 한동안 고향으로 돌아가 교편 생활을 하며 은둔 하고, 북한에서는 김일성을 찬양하며 현실에 순응하며 살려고 노력했지만 곧은 성품은 한때 조선일보 기자에서 시골의 양을 키우는 노동자 신분으로 전락한다. 삶은 끝까지 살아봐야 안다고 하지만 40년 가까이 되는 긴 시간을 지식인이 아닌 밑바닥 노동자의 삶으로 살았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백석의 대표적인 시는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가 있다. 안도현 시인은  "첫눈이 내리는 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는 말은 백석 이후에 이미 죽은 문장이 되고 말았다." 는 표현을 썼다. 이 시는 기생 자야에게 보낸 시인데 나타샤는 톨스토이의 소설 '전쟁과 평화'에 나오는 주인공이며 이 시를 쓸 무렵 백석은 러시아어를 공부하고 있었다.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학창시절에 문학 작품을 공부하면서 글과 연관된 다양한 에피소드를 들려주면 공부가 재미있었을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이 책에는 우리에게 친숙한 노천명의 '사슴'이 백석을 염두에 둔 시일수도 있는 점을 이야기한다. 모윤숙, 노천명, 최정희와 백석은 친했으며 세 사람은 백석을 '사슴', '사슴군' 으로 호칭했다고 한다. 키가 크고 핸섬하며 시크한 백석의 모습과 스타일을 상상하며 읽으니 시 안에 그의 모습이 보인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

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

관이 향기로운 너는

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

 

물속이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

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

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

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

 

 

몇년전 서울 성북동에 위치한 길상사를 우연히 방문한 적이 있다. 그 동네에 일이 있어 갔다가 안내 표지를 보고는 들어갔다. 시내 한복판에 7천여평의 넓은 땅이 있는것도 놀라웠다. 그때는 몰랐는데 백석의 연인이었던 기생 자야는 서울 '대원각' 요정을 운영했고, 후에 요정을 포함한 땅을 법정스님에게 시주해 지금의 길상사가 지어진 것이다. 만주로 함께 가길 원했던 백석과는 아쉬운 이별을 했지만 백석의 연인답게 "한겨울 눈이 제일 많이 내린 날 내 뼛가루를 길상사 마당에 뿌려 달라." 는 유언을 남기기도 했다.   

 

백석의 시에는 그의 고단한 삶이 보인다. 제목에서 쓸쓸함이 묻어나는 시 '흰 바람벽이 있어' 에는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는 자조적인 글이 슬픔으로 다가온다. 삶은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것이라지만 백석의 노년은 쓸쓸하고 행복하지 못했다. 그는 살아서보다 사후에 인정을 받았다. 매서운 겨울 바람이 불었던 주말 백석과 함께 보낸 시간은 참으로 소중하고 행복했다. 지금이라도 백석을 알게되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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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4-12-06 18: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음 주 `TV 책을 보다`에 이 책이 소개된다고 하더군요. 안도현 시인도 출연하는데 무척 기대되는 방송입니다.

세실 2014-12-06 21:33   좋아요 1 | URL
꼭 봐야겠습니다^^
이 책 꽤 재미있어요~~~
소개한 시가 고어(?)로 되어있어 읽기는 힘들지만요^^

blanca 2014-12-06 19: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은 못 읽었는데 백석 좋아해요. 아웅, 낭만 가득해요. 세실님.

세실 2014-12-06 21:34   좋아요 0 | URL
백석을 좋아하신다면 이 책은 필수입니다~~~
평전은 시인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어서 참 좋아요^^

보물선 2014-12-06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랑 카페 가고 싶어지네요^^

세실 2014-12-06 21:36   좋아요 1 | URL
가끔 아이랑 가서 각자 책 읽으면 속도가 빨라요~~~ 집에선 할일 생각에 집중력이 짧죠^^

바람돌이 2014-12-06 2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석은 저 시로 인해서 모든 연애시를 종결시킨듯.... ㅎㅎ
고새 백석평전을 읽으시다니 진짜 빠르셔요. 전 읽을까 해도 실제로 손에 들기까지는 한참 걸리는데 말입니다. ^^

세실 2014-12-06 22:36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지금 읽어도 설레이니ㅎ 저 편지를 받은 받은 여자는 얼마나 행복했을까요. 두여자한테 보내서 바람둥이 소리도 들었다네요.
우리 인문학 동아리 1월 토론도서라 의무감에 읽고 있답니다. 재미있어요^^

수이 2014-12-06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사놓고 아직 읽지도 않았는데 세실님 글 읽으니 펼쳐봐야겠어요. :)

세실 2014-12-06 23:18   좋아요 0 | URL
백석의 삶, 사랑을 알아가는 재미 쏠쏠합니다~~~ 페이지 주는것이 아까워요^^
얼른 시작하세요.

살리미 2014-12-07 0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석이 북에서 찍은 가족사진을 보니 짠한 마음이 들더군요. 왠지 `외롭고 높고 쓸쓸한` 모습이어서요.

세실 2014-12-07 07:41   좋아요 0 | URL
그쵸?
`외롭고 쓸쓸한` 사람....
격동기속에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네요. 사랑도 그렇고....

희망찬샘 2014-12-14 07: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희 도서관에도 꽂혀 있는 책이에요. 백석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지요?! 저도 꼭 읽어봐야겠어요. 월요일 당장 빌려야겠다는 생각! 까먹을 확률 80% 이상이라 생각되지만... 메모는 해 놓고 잘 보지도 않는 지경이라~ ㅎㅎ~

세실 2014-12-15 01:01   좋아요 0 | URL
오늘 이 책으로 서평 쓰려고 하는데 어떻게 써야할지 고민스러워요.
안도현 시인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후반부 북한 생활 기록들은 자료 찾는것도 어려웠을듯요.

저도 도서관에 신간이 들어오면 메모 해놓고 메모를 어디에 해놓았는지 기억을 못해요. ㅜㅜ


cocomi 2015-04-04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오 직업이 사서예요? 요즘 제가 가장 부러워하는 직업이에요~

세실 2015-04-07 09:38   좋아요 0 | URL
호호호 그러세요?
사서 고생하는 사서이기도 합니다만 나름 보람있고, 재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