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치아(齒牙)는 한 사람의 얼굴이 가진 특성을 매조지한다. 다시 한 번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치아(齒牙)는 한 사람의 얼굴에서 표현(성), 즉 기호가 가진 특질이 아닌 사물 그 자체로의 특질에 가장 근접한 부분이다. 가령 푸코의 시니컬한 웃음 뒤로 드러나는 상아빛 치아는 가장 명징한 사례가 아닐까? 우스운 생각이지만 그런 의미에서 치아는 인간을 인간과 동물의 경계 그 자체를 인간의 얼굴에서 표현하는 데 있어 가장 첨단에 선다. 인간이면서, 인간이 아닌, 동물이면서, 동물이 아닌 증거로서의 치아.

 

2.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가 3년이 지난 시점에서 그의 얼굴의 특질과 관련해서 떠오르는 것은 그의 치아(齒牙)밖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서 나는 그의 죽음이 3년이나 지난 현재의 시점에서 그의 생전의 얼굴에서 오직 치아만 내 기억 속에 각인시키려는 나 자신의 욕망에 철저히 이끌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건 전적으로 변태적인 내 정치적 미학주의의 소산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에 우리가 기꺼이 보고자 하는 것은 정치가 개인의 신체, 가령 얼굴과 같은, 속에 각인된 역사 그 자체가 가진 역사성과 물질성이다. 그건 마치 천의 물길 속에서 단 한 순간 솟아오르는 시간을 정지시키는 빛의 파편의 굴절과도 같은 것이다.

 

 

3.

 

그리고 인간의 얼굴에서 치아가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그 찰나刹那는 바로 그 순간이다. 그 순간에 드러나는 치아는 그 얼굴 주인의 존재 그 자체를 무화시키거나 날것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우리는 때로 바로 그 순간에 한 인간의 존재의 빛과 그림자를 포착할 어떤 기회를 갖게 되는지 모르겠다. 내가 기억하는, 아니 오히려 내 기억 속에서 각인되어 잊혀지지 않을 것인 노무현의 치아는 적어도 두 가지 순간에 관련된다. 이건 노무현의 정치적 유산을 계승하거나 청산하는 것과 관련이 있거나 없을 수 있다.

 

 

4.

 

첫 번째 순간은 80년대 말 혹은 90년대 초 5공청문회 때 그를 스타로 자리매김시켜 준 바로 그 때의 노무현의 치아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를 제도권 정치의 스타로 만든 것은 바로 그 때의 활약이고, 그 순간과 관련해서 내가 잊을 수 없는 것은 물론 그의 치아다. 그는 부패한 권력에 대한 분노를 냉철한 이성으로 가리우기 위해서 치아를 이용했다. 그의 치아는 카랑카랑한 목소리에 한치의 오차도 없을 것 같은 논리로 무장한 작게 오물거리듯 닫혔다가 움직이는 그의 입술이 작은 균열을 일으킬 때마타 살짝 드러난다. 정치가 노무현이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순간이다. 이 순간은 80년대를 오롯이 견디어낸 그의, 아니 이땅의 민중들이 남긴 정치적 유산 때문에 비롯된다.

 

 

5.

 

두 번째 순간은 그가 임기를 마친 후  봉하마을에서 보낸 행복한 삶의 순간에서 드러낸 그의 치아다. 우리는 그 순간에서 인간 노무현의 날것으로 상태 그 자체를 그대로 보게 된다. 거기엔 냉철한 날카로운 이성도, 분노도 혹은 직업 정치가로서의 탁월한 정치적 제스처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행복한 인간 그 자체로의 삶만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더불어 여유, 유머, 그리고 그가 꿈꿔왔던 진보에 대한 (재)구상, (재)구성에 대한 고민까지. 이 두 순간의 간격은 노무현의 모든 것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삶-정치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두 개의 간격, 거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간격 너머로 세 가지 순간이 다시 도래한다.

 

 

6.

 

세 번째 순간은 정치가 노무현의 상징적 죽음의 순간이다. 이는 노무현에 대한 정치적 타살의 순간이다(해석하기 나름이지만, 자살은 자신의 존재 그 자체를 자신의 힘으로 부정적, 긍정적으로 생산-소멸하는, 소멸-생산하는 방식이다(그리고 이 둘 사이에 자살에 대한 해석의 부정성, 긍정성이 내재한다). 하지만 노무현의 죽음은 그러하지 않았다. 정치적으로나 실제적으로나). 이 정치적 타살은 그가 검찰의 조사를 받으러 봉하마을에서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서 비롯된다. 온 국민이 그를 감시하는 스펙터클의 풍경의 체제를 만들어냈다. 바로 그 순간 정치인 노무현은 상징적 죽음을 맞이했다. 권력은 바로 그 순간 그로 하여금 사회적 이름-자리를 강제적으로 빼앗아버린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렇게 스펙터클했던 그의 상징적 죽음의 순간에 그가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를 지금, 이 자리에서, 기억하지 못한다. 이 스펙터클한 죽음은 광화문에서 치러진 그의 노제만큼이나마 스펙터클했지만 말이다. 이는 그의 생물학적 죽음보다 더 죽음 같은 것이었다. 우리는 이를 과잉 실재화된 죽음-이미지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진정 권력은, 아니 MB는 한때는 최고 권력에 섰던 주권자마져도 그렇게 초라한 과잉 이미지의 사슬에 가두어버릴 만큼 귀신 같았나? 어쨌든 노무현 상징적 죽음은 과잉 실재화된 죽음-이미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는 적어도 두 가지 방향으로 흐른다. 이미지의 잔치-놀이가 끝나 폐허가 된 땅에 선 노모스(nomos)들의 죽음의 가치에 대한 망각과 기억. 우리는 어떤 방향을 선택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폐허가 된 그 땅에서, 그리고 한 인간의 상징적 죽음 이후에 남겨진 시체에서 어떤 치아를 골라낼 수 있을까? 아니 오히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그 순간,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던 그의 치아 그 자체도 기억하고 있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7.

 

달리 말한다면, 우리는 그가 부엉이 바위에서 뛰어내려 죽음을 맞이했던 그 순간에서의 그의 치아도 기억하고 있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이는 네 번째 순간이다. 그는 바로 그 순간에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우리는 자살하는 사람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하는 우둔함 때문에 한 인간이 공포의 순간에 직면했을 때, 그의 치아가 어떤 형상을 취하고 있는지 잘 모른다. 단 한 가지 분명하게 단언할 수 있는 것은 그때 그 순간 그의 치아는 인간과 동물의 경계 그 자체를 무너뜨리는 어떤 것(thing)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아마도 운명과 의지의 경계 그 자체를 넘어서는 그 어떤 것(thing) !

 

 

8.

 

운명과 의지의 경계 그 자체를 넘어서는 그 어떤 것(thing) ! 노무현의 치아는 아마도 유령 그 자체로서의 노무현이라는 존재 그 자체를 드러내는 분해가 불가능한 어떤 사물이 아닐까? 어리석은 생각이지만, 지금, 이 순간, 노무현은 유령이다. 더 어리석은 생각이지만, 그 유령은 오직 치아만을 남겨둔 유령이다. 치아는 상징적 죽음, 생물학적 죽음으로도 분해가 불가능한 어떤 사물로 우리 앞에 남겨져 있다. 이제 그건 기호로도 물질로도 치환될 수 없는 사물 그 자체의 특성을 지닌 것으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건 우리 앞에 그런 방식으로 남겨져 있다. 유령이면서도 기존의 유령과는 판이하게 다른 방식으로 존재하는 유령! 그 유령이 바로 노무현이라는 유령이다. 우리는 이 유령을 어떻게 환대 혹은 푸닥거리를 할 것인가? 이 해답이 다섯 가지 순간에 각인된 노무현의 치아에 숨겨져 있다. 우리는 거기서 대한민국 정치사의 환희와 열광, 그리고 실패와 좌절의 마디들이 절합되어 있는 풍경의 연쇄들을 본다. 이 연쇄들을 긍정적인 방식으로 지양하지 못한다면, 다시 말한다면, 노무현을 긍정적인 방식으로 지양하지 못한다면, 대한민국 정치사에 희망은 존재하지 않으리라 본다. 진보든 보수든 말이다. 그것이 쉽지 않으리라는 것은 누구든 잘 안다. 노무현은 어찌보면 유령이자 괴물이기에. 유령이자 괴물, 괴물이자 유령과의 싸움에 우회로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싸움은 주체에게 그냥 던져진 절대자의 절대적 힘의 현현의 순간에 대한 주체의 선택에의 강요로 결정지어지는 것도 아니다. 다만 두려움과 공포를 이겨내고 한걸음씩 내딛는 것뿐...



 
 
 

시대유감時代遺憾/有感!

 

 

19대 총선에 대한 평가를 이렇게 하고 싶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박근혜는 새누리당으로 하여금 MB의 어두운 이미지를 말끔히 씻어냈다.

 

이번 총선의 승리는 박근혜의 승리인 것이다. 

 

 

 

박근혜는 진정한 MB의 희생자로서의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어냈고,

 

MB로부터 상처받은 모든 국민(들)/시민(들)의 마음을 초자아적 아버지/어머니로서의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박근혜의 새누리당은 이번 선거에서 그야말로 야당이었던 것이다.

 

 

 

결국  모든 국민(들)/시민(들)의 마음은 이렇게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MB로부터 상처받은 마음을 이명박근혜에게 예속당하기를 욕망함으로써 달래고자 한다."

 

 

 

진정, 우리에게 한국형 (신)파시즘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듯하다.

 

저들의 외침은 바로 그 도래를 알리는 서곡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 상황을 어떻게 뚫고나가야 할지에 대해서 깊이 고민해야 한다.

 

 

P.S.

 

출구조사가 시작된 6시가 되기 전 나의 예측은 다음과 같았다. 결론적으로 놓고 본다면 새누리당 의석수를 제외하고는 선거의 판세는 얼추 읽었다. 다만 새누리당이 과반을 넘길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투표율이 대략 저 정도 선에서 결정될 것이라고는 개인적으로 투표한 시각인 6시 5분이 지난, 7~8시 사이에 짐작했다. 이번 선거에서 야권 연대가 잠정적으로 실패한 이유는 뭘까? 그건 야권(민주통합당, 통합진보당 등등) 연대가 선거에서 자신만의 긍정적 프레임과 네러티브를 만들어내지 못했다는 데에 있다. 새누리는 부정적인 프레임에 부정적인 네러티브를 적절히, 교모하게 섞음으로써 이번 선거에 잠정적으로 성공했다[물론 그걸 추동하는 근원적 힘은 박근혜라는 기표다]. 대선에서는 우리들, 야권 자신 만의 승리를 위한 우발적이면서도 필연적인 이야기를 꼭 만들어내야 한다. 그렇치 않고서는 정말이지 곤란하다. 어쨌든 예방주사를 미리 맞았다고 생각하자.

 

 

투표율; 55%

 

새누리: 115~25

 

민주; 130~140

 

진보통합: 7~12

 

기타:



 
 
미지 2012-04-12 01:00   댓글달기 | URL
그런 것 같습니다. 오랜만에 들렀습니다...

무화과나무 2012-04-12 01:39   URL
더, 자세하게 쓰려고 했는데 도저히 분해서...
체력도 달리고요...

saint236 2012-04-12 07:25   댓글달기 | URL
새누리당 단독 과반은 저도 생각 못했습니다.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인가 봅니다. 이젠 민간인 사찰도 적정선에서 봉합이 되지 않을까 우려가 되네요. 검찰은 이런 판세 읽기에 기가 막히게 민감하니 말입니다.

무화과나무 2012-04-12 11:08   URL
이미 검찰은 박근혜 쪽으로 기울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언젠가 노무현 대통령은 "권력이 시장으로 넘어갔다."라고 말했다. 아마도 임기 중, 후반정도 되었을 게다. 역설적인 건 이런 발화행위가 한미FTA를 달리는 폭주기관차처럼 추진하는 과정에서 행해졌다는 것이다. 물론 시간의 선후 차이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선후 차이를 무색하게 하는 것이 노무현 의 한미FTA는 그의 정치적 위기의 타개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지가 아니라는 것에 있다. 노무현의 한미FTA는 노무현의 정치의 정초이자, 정치적 위기의 정초이다. 이 둘은 보르매우스의 매듭처럼 안과 밖의 경계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그런데 주의할 게 있다. 이 매듭을 한국에서 누가 만들어낸 것일까? 단적으로 말하면, 신자유주의적 경제 행위자들이다.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삼성공화국의 경제 행위자들이다. 노무현은 그 행위자들과 겉으로는 싸우는 듯한 액션을 취하면서 속으로는 그들의 은폐된 공범자가 되었다.

 

그런데 한국사회에는 노무현과 같이 겉과 속이 일치하지 않는 삼성공화국의 건설의 공범자들이 수없이 많다. 삼성공화국 비판의 문제설정에 있어서 겉과 속이 일치하는 삼성공화국의 건설자와, 그 공범자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오히려 문제가 되는 것은 겉과 속이 일치하지 않는 삼성공화국의 건설의 공범자들이다. 자신은 삼성공화국에 비판적 입장을 가진 행위자라고 주장을 하지만 실제로는 그것의 약하거나 강력한 공범자가 되는 그런 공범자들. 그들은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왜 그럴까?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우리가 삼성공화국이 점점더 대한민국 국민들, 인민들, 시민들의 주체 형성의 선험적 조건으로 작용하는 현실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삼성공화국의 최정점에 있는 지배자들, 주권자들은 이제 한국사회의 경제, 사회, 문화의 실질적 통치자들이 되었다. 그들은 우리로하여금 우리가 왜 그들에게 예속당해야 하는지 모른 채로 예속당하게 만들어낸다. 이로써 우리들은 삼성공화국의 최정점에 있는 지배자들, 주권자들에 대한 양가감정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양가감정의 가장 전형적인 예를 청년 세대의 우울한 얼굴에서 엿볼 수 있다. 한편으로 그들은 삼성을 한국사회를 좀먹는 존재로 규정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삼성에 입사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긴다.



 
 
saint236 2012-02-29 11:23   댓글달기 | URL
재벌에 의해 생각까지 지배를 당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겠죠.

무화과나무 2012-02-29 11:59   URL
네 맞습니다. 개인의 영혼까지를 포함해서 모든 것을 지배하는...
 

니체는 참회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쓴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죄를 참회하고 나면 그 죄를 잊어버린다. 그러나 대개 다른 사람은 그의 죄를 잊지 않는다(니체, <혼자 있는 사람>,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Ⅰ』, 412쪽).

 

 

 

죄의 문제에 직면한 인간은 모두다 그렇지만 인간은 죄로부터 빠져나가고자 발버둥치면 칠수록 더욱더 그 늪에 빠져들게 된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인간은 대개 죄에 대한 고백이나 참회로 일관한다. 고백이나 참회하는 행위에서 중요한 것은 다음과 같은 측면들이다. 1) 그것은 사람들이나 인격신에 대해서 이루어진다. 사람이나 신에게 죄를 뉘우치는 행위는 무신론적 신학정치학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 인간적인 것에 대해서 의지하는 행위에 다름 아니다. 2) 1)의 측면은 결국 자기자신의 내면으로의 침잠에 다름 아니다. 이것은 니체의 표현처럼 자기자신의 죄를 잊어버리는 행위인 동시에 그것을 영원히 기억하는 행위이다. 3) 2)는 결국 간괴하고 야비한 타자가 주체 내면의 은밀한 비밀을 빌미로 기생한다는 것을 방증한다. 4)결국 1)~3)에 이르는 참회하는 행위의 악순환의 고리를 깨트리기 위해서 주체는 자신의 죄를 오직 사물(thing)에게만 고백하고 참회해야 한다. 자신의 지난날의 죄, 그리고 그것이 형성된 상황과 맥락, 현재 상황에서 그것에 대한 감각, 미래에서까지의 그것에 대한 보상, 그리고 이 모든 것들에 대한 망각까지를 희망하면서 말이다.



 
 
 

[<나꼼수> 비키니 논쟁](대충 이렇게 부르자. 머리 아프니까]이 점입가경이다. 우리 모두는 이 논쟁의 발단-전개-위기-절정-결말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 모두 궁금해 하고 있는 것 같다. 시쳇말로 끝을 보고자 하는 것 같다. 우리는 여기서 [<나꼼수> 비키니 논쟁]이라는 사건의 원인은 무엇이며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해서 묻지 말자. 우리가 궁금한 것은 이것이다. 소위 여성인권을 대리표상한다는 일부 페미니스트이나 그밖에 <나꼼수>를 비난, 비판하는 사람들이 최종적으로 목적하는 것처럼 "사과는 누가 누구에게 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어가는 과정, 아니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과정에서 우리는 이번 사태를 통한 교훈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  이번 사태를 바라보기 위한 전제들의 설정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이 전제들은 우리가 이번 사태를 바라보는 기본적 관점(주의)을 그 자체로 표현하고 있다.

 

 

Ⅰ. 이번 사태는 한국사회에서 가장 취약한 세 가지 고리들[기독교 문제, 지역차별, 성차별]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고리들에 걸리면 발생하는 사태와 관련해서 어떤 주체들일지라도 결코 만족할 만한 해답을 얻지 못한다.

 

Ⅱ. 그런 만큼 이번 사태도 아마 어떤 결정 (불)가능성의 영역 안에 머무를 공산이 크다.

 

Ⅲ. 사건과 관련되는 주체들은 어떠한 관계성에 놓이게 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태를 긍정적으로 지양할 수 있는 방법은 이번 사태를 통해 우리들 각자가 어떤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2. [<나꼼수> 비키니 논쟁]과 관련해서 사과는 누가 누구에게 해야 하는가?

 

에둘러가지 말자. 소위 페미니스트를 대리표상한다는 일부 여성들이나 그밖에 <나꼼수>를 비난, 비판하는 사람들이 최종적으로 목적하는 것은 단 하나다. "<나꼼수>가 사과를 해라!" 이 문제와 관련해서 사과의 주체는 분명해 보인다. 그러면 사과의 대상은 누구인가? 사과를 하는 행위가 합리적으로 성립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하는 사람과 받는 사람 간의 관계성이 성립되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그건 <합리적이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소위 여성인권을 대리표상한다는 일부 페미니스트이나 그밖에 <나꼼수>를 비난, 비판하는 사람들은 <사과하는 행위> 그 자체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사과를 받는 사람의 존재의 명확성이다. <나꼼수>가 유령에게 사과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정말 누구에게 사과를 해야 하는가? 비키니 응원의 당사자인 아가씨? 삼국카페 회원들? 숙대 총학생회? 공지영? 조중동? 여성인권을 무시하는 마초들? 도덕적으로 순결하고 고매하다고 자위하는 순혈주의 진보 및 좌파 지식인들/운동가들? 이땅의 모든 여성들? 꼴통 수구 보수파들? 정말 그럴리 없겠지만 가까? 안타깝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사과의 주체-사과하는 행위-사과를 받는 대상 간의 관계성은 철저히 분열적이다. 이게 <나꼼수>의 전적인 잘못이라고 치부할 수 있는가? 그건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맹목적으로 "<나꼼수>가 사과를 해라!" 라고 외치는 모든 주체들의 정치적 목소리는 사과의 주체-사과하는 행위-사과를 받는 대상 간의 관계성의 분열적 양상을 극단으로 치닫게 할 뿐이다. 즉 맹목적으로 "<나꼼수>가 사과를 해라!" 라고 외치는 모든 주체들의 정치적 목소리는 오직 행위의 목적과는 상관 없는 수단, 즉 사과를 하는 행위/사과를 받는 행위 간의 관계성에 토대를 두는 수단 그 자체만을 정당화 할 뿐이다. 그 과정에서 이 사태의 본질과 교훈은 망각된 채 사라져버린다. 지금 이 논쟁의 역설적 귀결은 이미 그러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 심지어 어떤 이는 <나꼼수>의 멤버이지만, F4 중 이 사건과 관련해서 자신을 방어하는 데 있어 가장 불리한 위치에 있는 정봉주에게 폭력을 가하고 있다. <폭력의 증거>가  맹목적으로 "<나꼼수>가 사과를 해라!" 라고 외치는 모든 주체들의 정치적 목소리가 생산하는 정치적 효과를 직접적으로 표상한다. 어쩌면 우리는 이번 사건에서 어떤 부재하는 유령을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놓고 그것을 갈기갈기 찢기 위해 거룩한 신성동맹을 맺고 있는 것이 아닌가?

 

[폭력의 증거]

 

 

3. 누가 누구의 욕망을 대리표상하는가?


우리가 "이번 사건에서 어떤 부재하는 유령을 마치 존재하는 것처럼 만들어놓고 그것을 갈기갈기 찢기 위해 거룩한 신성동맹을 맺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믿는 이유는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는 이번 사건을 둘러싼 다양한 욕망하는 주체들 간의 욕망이 상충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그렇게 상충하는 욕망은 어떤 대리자들에 의해서 결코 대리표상될 수 없다는 것이다. 정봉주를 제외한 <나꼼수>의 김어준, 주진우, 김용민은 2월 4일 열린 <시사인 2012콘서트>에서 이번 사건과 관련하여 그들의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히고 있다. 여기서 그들은  <나꼼수>뿐 아니라 그간의 삶에서도 여성에 대해 취한 스탠스를 포괄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우리는 <한국일보>에 보도된 내용은 오해의 소지가 있어 콘서트에 직접 참여한 사람의 기록에 의거하고 있다). 여기서 그들은 <비키니> 문제보다 더 심각하게 여겨졌던 <코피> 문제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그들의 입장을 스스로 해명한다. 물론 그들의 행위와 관련된 해명의 촛점은 물론 가카라는 대타자에 대한 욕망의 역동일시(화)에 맞추어져 있다. 어쩌면 이 부분에서 그들은 <진정성>에 호소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반응은 나꼼수 측의 사과와 관련하여 두 가지로 이끌려 나올 수 있다. 한편으로, 그들의 진정성을 믿고자 하는 반응이 있을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꼼수>의 사과를 끝까지 받아내기 위해 압박하고자 하는 반응이 있을 것이다.

 

 

[시사인 2012콘서트]

 

 

우리는 현재의 상황에서 이 두 가지 반응 중 어느 것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1) 결국 사과의 주체-사과하는 행위-사과를 받는 대상 간의 관계성의 분열적 양상을 극단으로 치달아 어떤 아포리아적 상황에 이를 것이다. 적어도 관념적으로는 말이다. 2) 사과의 주체-사과하는 행위-사과를 받는 대상은 이 사태와 관련될 수 있는 어떤 주체도 가능적 주체가 될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특정한 주체가 다른 주체의 욕망을 대리표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가령 삼국카페가 모든 여성주체들의 욕망을 <여성인권>이라는 언표 아래 동일성의 이름으로 묶어둘 수 없다. 이에 대한 사례는 82COOK 여성 회원들의 정치적 목소리를 통해서 증명된다. 그러므로 사과의 주체-사과하는 행위-사과를 받는 대상 간의 관계성의 분열적 양상이 돋보이는 현재적 시점에서 <나꼼수>의 사과/사과하지 않음은 어떤 동전 던지기의 상황에 놓여있다. 앞면과 뒷면에 따라서 그 결과가 판이하게 달라질 수 있는 <나꼼수>의 사과/사과하지 않음은 어떤 한 집단 혹은 몇몇의 주체들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는 있지만, 다른 집단 혹은 몇몇의 주체들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는 없다. 즉 그들의 사과하는 행위의 선택은 모두를 위한 선택이지만, 그 어느 누구도 위하지 않는 선택일 수 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는 맹목적으로 "<나꼼수>가 사과를 해라!" 라고 외치는 모든 주체들의 정치적 목소리는 오직 행위의 목적과는 상관 없는 수단, 즉 사과를 하는 행위/사과를 받는 행위 간의 관계성에 토대를 두는 수단 그 자체만을 정당화 할 뿐이라는 무서운 진리도 도사리고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82COOK]

 

 

4.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는 자 누구인가?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번 사태와 관련하여 맹목적으로 "<나꼼수>가 사과를 해라!" 라고 외치는 모든 주체들의 정치적 목소리는 오직 행위의 목적과는 상관 없는 수단, 즉 사과를 하는 행위/사과를 받는 행위 간의 관계성에 토대를 두는 수단 그 자체만을 정당화 할 뿐이다. 이를 정당화하는 낙인은 바로 "<나꼼수>는 <마초>다"라는 것이다. 나는 이것 만큼 사태의 본질을 왜곡하는 표현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건 <나꼼수>가 진정 <마초>인 것과 아닌 것과는 전혀 상관 없다. <마초>는  오직 행위의 목적과는 상관 없는 수단, 즉 사과를 하는 행위/사과를 받는 행위 간의 관계성에 토대를 두는 수단 그 자체만을 정당화 할 뿐인 모든 주체들의 정치적 목소리들이 공명하는 공통의 기표일 뿐이다. 이 기표 아래 좌파/진보 지식인, 운동가뿐 아니라 여성인권주의자, 심지어 조중동 같은 수구 꼴통들의 신성동맹이 이루어진다. 이것이야말로 그들이 그토록 혐오하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마초 아닌가? 마초의 진정한 의미는 그것을 둘러싼 생물학적 차이의 단순성이 결코 아니다. 차라리 마초의 진정한 의미는 여성/남성과는 상관 없이 어떤 젠더적 주체들도 권력관계 안에서 폭력(성)의 주체로 생산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제와 관련된다.  

 

이는 "누가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와 관련된다. 이 문제와 관련하여 직접적으로 도출될 수 있는 답은 매우 간단하다. 즉 "<나꼼수>는 <마초>다"라고 외치는 모든 주체들( 좌파/진보 지식인, 운동가뿐 아니라 여성인권주의자, 심지어 조중동)과 그 역의 주체들이 "나는 과연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자인가?"라고 묻고, 그에 대한 긍정적 답을 얻으면 된다. 이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고 긍정적인 대답을 얻기를 노력하지 않는 모든 자들은 이 사태와 관련해서 <나꼼수>를 단순히 도덕주의적이고 허무주의적인 관점으로 낙인찍는 자다. 이와 관련해서는 심지어 <나꼼수> 자신도 마찬가지다. 다시 말해서 수구든, 보수든, 좌파든, 진보든 우리를 둘러싼 정치적 상황과 국면들을 그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어내기 위한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면 되는 것이다. 이는 사과의 주체-사과하는 행위-사과를 받는 대상 간의 관계성의 분열적 양상을 극단으로 치달아 어떤 아포리아적 상황에 이른 현재의 시점에서 <나꼼수> 로부터 사과를 이끌어내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일이다. 삼국카페가 성명서를 발표한 것은 분명 이러한 맥락에서일 게다.

 

이런 상황을 두고서 진보의 분열이니 갈등이니 하는 수구적이고 꼰대 같은 해석은 그만두자. 다만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우리 각자의 길을 가자. 적어도 우리 좌파/진보의 영역에서만 한정하여 서도 말이다. 하지만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다. 우선 <나꼼수>를 지양하자. 즉 우리 좌파/진보의 영역에서 긍정적 방식으로 <나꼼수>를 비판하고자 한다면 그것을 극복하자. 더 분명히 말해 우리 좌파/진보의 영역에서 <나꼼수>가 생산한 정치적 가치들을 낡은 가치들로 전락시킬 새로운 정치적 가치들을 생산하자. <나꼼수>가 보여준 상상력을 뛰어넘자. 그것이 사과를 받아내는 행위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그래야만 진보/좌파가 그토록 비판하는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심지어 <나꼼수>는 극복될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는 아직 노무현조차도 제대로 지양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 부정하지 말자. 그런 상황에서 <나꼼수>를 지양하자는 것은 엄청나게 지난한 일일 것이다. 쉽게 비판하지만 말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잔 말이다.

 

한 가지만 분명히 말하자. <나꼼수>가 생산한 새로운 가치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수없이 많다. 그 가치를 제대로 지양할 진보/좌파만이 아포리아적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 것이다. 안타깝지만 이는 정말 힘든 일일 뿐만 아니라 만약 그게 된다면 매우 고귀하며, 진정 우리 좌파가 원하는 그런 세상이 올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볼 땐 그런 세상에 대한 열망은 민주통합당, 통합진보당, 진보신당보다 새누리당이 더한 것 같다. 적어도 형식적으로라도 말이다. 지금 상황에서 민주통합당, 통합진보당, 진보신당뿐 아니라 진보/좌파는 생존에 대한 위기의식조차도 없다. 그들이 진정 <가까>[이는 단순히 MB라는 고유명사가 아니다. 그것은 이미 <나꼼수>가 폭로했듯이, MB라는 고유명사의 껍데기를 빌린 이땅의 모든 기득권자들의 집합을 현시하는 일반명사일 뿐이다. 따라서 <가까>에 대한 투쟁은 바로 그런 관점에서 다시 읽히고, 씌어져야 한다.]로 대리표상되는 이 땅의 기득권을 전복하고자 하는 자들인가?

 

 

 

P.S. 이 사건과 관련된 몇 가지 판단 자료들을 첨부한다.

 

 

1. 주요일간지 반응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view.html?cateid=1067&newsid=20120206141815953&p=mediatoday

 

 

2. 팬덤 현상/이분법주의 비판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view.html?cateid=1067&newsid=20120202155446218&p=mediatoday

 

http://search.daum.net/search?nil_suggest=btn&nil_ch=&rtupcoll=&w=news&m=&f=&lpp=&bw=1261&bh=658&sug=&cluster=y&q=%B3%AA%B2%C4%BC%F6%C1%F6%BD%C4%C0%CE

 

 

3. 진보진영의 도덕주의 프레임 비판

 

http://www.mediaus.co.kr/news/articleView.html?idxno=23014

 

 

4. 전문가 진단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2062115555&code=940705

 

 

5. 비키니 논쟁의 SNS 분석

 

http://nakkomsu.blogspot.com/2012/02/blog-post_8600.html

 

 

 

6. 정봉주의 사과 편지문

 

정봉주입니다. 삼국의 책임자들과 접촉할 공식 Route가 없기 때문에
댓글북 작업책임자인 OOO님,
저에게 항의성 편지를 보냈던 OOO님,
나꼼수 Concert 알바로 만났던 OOO님 등 3인에게 공동으로 보냅니다.
삼국가족들의 오해가 없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2012. 2. 8
홍성교도소
수인번호 271 정 봉 주



홍성교도소의 정봉주입니다.
감옥사는 저를 제일 힘들게 하는 것은 저를 초월적 능력을 갖고 있는, 전능한 존재로 인식하며, 그런 기초위에서 이러저러한 일을 해결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미권스 내부 문제를 상세하게 말하면서 문제해결 하라고 압박하는 것, 이번 ‘코피사건’을 설명하면서 질타하는 것 등은 저를 너무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글들은 가급적 보지 않았습니다. 편지 또한 그러했구요.
그런데, 삼국 ‘나꼼수 지지철회’ (=‘동지 의식을 내려놓는다’는 구절)라는 기사를 보고는 피해갈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나꼼수의 80% 이상을 차지하는 입장에서, 그리고 저를 지지하는 ‘정봉주와 미래권력들’ (미권스) 또한 이 문제에 한 발을 넣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른 바 진보진영 매체와 인사들에게 한 말씀 드려야겠네요.


노무현대통령님 죽음으로 몰아갈 때, 한명숙 대표 금품수수 관련 재판 때, 곽노현 교육감 사태 때 당신들은 늘 똑같은 입장과 자세를 취했습니다.


김어준총수는 이렇게 말했죠. “진보는 우리 진영까지도 비판할 정도로 도덕적이다. 우리 진영이라고 봐주지 않는다.” 라고요. 저는 한 발 더 나아가겠습니다. 저는 비겁하고 치졸한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작 보수진영의 강자하고 붙여야 할 때는 당신들은 꼬랑지 내리고 골방에 숨어있었죠. 이번 사건에 광분하고 ‘기사를 써대는’ 분들에게 묻습니다. 당신들이 언제 한 번 제대로 MB정권과 맞서 싸우는 삼국카페를 제대로 보도한 적 있었나요. 불모지, 아무도 MB와 맞서지 않고 숨죽여 있을 때 깃발 들고 나선 ‘나꼼수’에 대해서 잘 한다며 어깨 두드려주는 기사를 써 본적 있나요? 정봉주는 나꼼수 하지 않았으면 구속되지 않았겠지요.


정봉주는 어떤 이유로 왜 구속되었는지? 그리고 왜 석방되어야 하는지 제대로 한 번 보도한 적 있었나요? 그런데 이번 사건에 대해서는 신이 났습니다. 비겁한 짓이죠. 정작 자기가 써야할 기사를 피하고. 우리 내부를 조지는 일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비겁함 저변에는 당신들의 진정한 심리적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진보진영의 담론은 내가 주도해야 한다는 헤게모니적 발상, 내가 권력을 쥐고 있어야 한다는 진정한 마초이즘적 우월주의의 발상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당신들이 보기에 나꼼수는 ‘허접한 것’ 이겠지요. 언론인도 아니면서 언론인 척 하는 김어준, 마이너 언론인인데 날뛰는 것이 고마운 주진우, 정치평론이나 하지 김용민, 마지막으로 초선 국회의원과 낙선한 주제에 인터넷 대통령으로 칭송받는 정봉주, 그리고 이들에 대한 ‘영웅적 열광’ ! 이 모든 것이, 이들에 담론적 이니셔티브를 뺏긴 것과 어우러지면서 당신들의 우월적 심리를 불편하게 했겠지요.


이 모든 것이 한 표적으로 모였으니 얼마나 고마운 상황이었겠습니까? 1타 4피의 천재일우의 기회로 봤던 것이지요. 그래서 ‘진보의 인사’인 당신들의 조급한 ??는(글씨를 못 알아보겠습니다.) 춤을 춘 것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나꼼수’가 지위를 잃는다 해도 당신들은 절대로 그 자리에 서지 못합니다. 당신들은 걸어야 할 ‘목숨’이 아까운 분들이고 설사 건다고 해도 거는 ‘시늉’ ‘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총구를 우리에게 향한 그 어설픈 ‘총질’을 중지해주기 바랍니다. 부부싸움을 하는, 친구간 우정싸움을 하는, 이념 전쟁을 하는 우리끼리 다투다 우리끼리 정리할테니 말이죠.

우리 진영의 어설픔 때문에 서론이 길어졌네요. F3가 면회 왔습니다. 몇 차례에 걸쳐 ‘여성부 명단 밝혀라’ , ‘관리 대상 여성 명단 공개하라’ 고 접견 서신을 넣었으며, 그 편지를 사진을 찍어 SNS에 올렸습니다. 제 지지자들은 편지를 통해 ‘정 의원님이 여성편력이 심한 것으로 오해될 수 있으니 하지 말라고 하라’고 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제시할 심적, 환경적 여건이 안되었기 때문이죠.


이것을 인터넷기사를 통해 접한 사람 중에 누가 가장 기분 나빴으며, 가장 모욕감을 느꼈을까요?
바로 제 사랑하는 집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제 집사람 송지영씨는 한 번도 그 일을 입 밖에 내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생각 할 수도 있었겠죠. ‘오죽 정봉주의 행실이 그랬으면 감옥에 있는 데에도 저런 말을 할까?’ 라고 생각 할 수도 있었겠지만 한 마디도 하지 않았죠. 두 가지 이유입니다. 첫 째는 주진우의 본래 의도가 그러지 않을 것이란 믿음과, 둘 째는 거기에 성차별적 마초이즘이 녹아있다고 보지도 않았던 겁니다.

이번 ‘코피사건’은 삼국에서 지적하는 것이 맞을겁니다.
문제는 삼국에서 지적하는 것에 대해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일단, 삼국에서 요구할 수준으로 양성평등적 교육을 받을 기회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이를 깊이 성차해 볼 기회가 그다지 많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집사람 송지영씨와 내동하거나, 혹 송지영 우월적 삶을 살고 있는 저 또한 마찬가지일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 사과의 문화나 사과의 행위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저같은 대인의 풍모를 갖고있는 사람에게만 익숙한 문화입니다. 그런데, 접견(=면회)를 왔습니다. “여성문제를 조심하고 함부로 말하지 말라!” 고 하자, “주진우는 ‘비키니 전투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김용민이 기록한다.”는 말을 듣고 무릎을 쳤습니다. 이를 F3의 촌철살인에 감복을 한 것이죠. ‘비키니 전투에서 사망!’ 이라는 표현에 모든 합의가 담겨 있고 저는 이 사건이 종결됐다고 봤습니다. 그런데 상황은 그렇지 않고 일은 더 커졌고 급기야 ‘지지철회’를 선언하는 상황까지 온 것입니다. 제가 두려워하는 것은 ‘분열’입니다.

고백합니다. 대한민국에서 진보의 가치를 지향하면서도 양성평등적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성적 약자의 위치에 있는 ‘여성문제’에 대해서도 다른 어떠한 진보적 가치보다,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거의 없습니다.


http://www.82cook.com/entiz/read.php?bn=15&num=1186126&page=1

삼국에서 지적하는, 여성계에서 지적하는 수준에 도달하지 못했음은 물론, 도달해야 한다는 절박한 현실적 필요성을 느낀 적도 없었습니다. 이런 부족하고 저열한 수준에 머물러있음을 반성하면서 사과하겠습니다. 그리고 고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이 모든 문제가 저 정봉주의 구속으로 인해 발생한 문제입니다. 근원적 원인 제공하는 저 정봉주입니다. ‘나꼼수’는 지금 그것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정봉주’의 부재로 정상적인 상태가 아닙니다. ‘나꼼수’에서 발생한 문제는 저의 죄가로 돌리고 저의 사과로 받아주시길 바랍니다.

미권스 또한 많이 격앙되고 흥분된 상태일 겁니다. 비상상황으로 운영할 것을 요구했지만, 자신과 생각과 견해가 다른 사람을 ‘알바’로 단정하거나 ‘일방적 배척’의 권한까지도 위임한 것은 아닙니다.


소통하고 민주적 협의 과정을 거쳐야 하는데 잘 그렇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지금은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제한 된 입장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최소화하기만을 바라는 생각에 마음 조아리고 있습니다. ‘미권스’로 인해 상처받은 분들이 계시면 (운영상의 미숙함 때문에) 다 (지금은) 정봉주가 부족한 탓으로 돌려주세요. 그래야 제가 감옥을 마음 편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 정봉주 나가고 싶습니다. 저 강해보이지만 강한사람, 아닙니다. 2평도 되지 않는 독방, 누워서 팔을 벌리면 양 쪽이 닿는 좁은 독방에서, 하루에도 수 십번씩 눈물을 떨굽니다. 설날, 가족이 보고 싶어서, 팔순 노모가 아프시지나 않을까 걱정되어서, 부인이 생각나서, 눈물을 훔치지 않을 때가 없습니다. 그저 여리고 약한 인간일 뿐입니다. 중3아들과 초6딸을 보면 한없이 무너질 것 같아서 편지도 보내지 말라고 하는, 면회를 오지 말라고 하는 너무나도 여리고 약한 인간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나가고 싶습니다. 민주통합당의 모습, 정치적 상황을 보면 일찍 나가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 지는 것 같아 하루하루 지날수록 걱정만 커집니다. 나가야 할 텐데, 여러분이 ‘분열’하면 나갈 길은 점점 더 멀어집니다. 저 하나 뿐만 아니라, 진보진영에 기대를 거는 많은 국민들을 위해서 ‘분열’하지 말아주세요.

조국 교수가 말했더군요. 민주통합당이 ‘오만’해 진 것 같아 걱정된다구요.


저는 ‘진보진영’전체가 오만해지고 있는 것 같아 ‘더’걱정입니다. 우리 진영끼리 피,아 구분없이 난투극을 벌리려 하고 있고 또 그런 것을 자신의 도덕성, 고결함의 표상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바로 오만함의 ‘표상’ 일 수 있습니다. 4.11 총선 분위기가 좋아지고 문재인 이사장 대선후보 지지율이 오차 범위 내에서 여당 후보를 추적하는 양상을 보면서 ‘희망’을 갖을 수 있지만 위험합니다. 야권 후보로 단독 레이스가 아닌 ‘누군가’ 뛰어들어 2강 혹은 3강 체제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이 되어야지, 지금 낙관적 태도를 취하는 것은 ‘오만함’의 또 다른 측면으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과’라고 하는 것은 표면적으로는 ‘잘못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이지만, 그 내면은 상처받은, 혹은 상처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하겠다는 ‘공감’의 표시입니다. 이성적 대화이기도 하지만 감정의 근저에서 소통하겠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사과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제 몫입니다. F4는 일심동체입니다. 문제의 근원인 ‘정봉주의 사과’로 ‘코피사건’을 종결짓기를 바랍니다. 그 이후 어떤 정치적 목적도 없는 순수한 마음의 말씀입니다.


정봉주도 조속히 구출해내고 코앞에 닥친 4.11 총선대첩과 12월 정권탈환을 위해 ‘분열’을 종식시켜 주세요!
‘공감’은 극대화하고 ‘차이’는 최소화하는 미덕을 발휘해주시기 바랍니다.
장문의 글이지만 ‘참고로’ 원고료는 사절하겠습니다 ^.^


꼭 이깁시다!
2012. 2. 8
우주를 품은 21세기 융합지도자 정 봉 주
홍성교도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