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 그 자체로서의 주체의 죽음과 삶에 대한 온전한 매듭
이창동 감독의 다섯 번째 영화 시(2010)에는 양가적인 코드가 다수 등장한다. 죽음/삶, 기억/망각, 비언어(적인 것 혹은 사물)/언어(적인 것), 주체/타자, 죄/구원 등. 이러한 양가적인 코드들을 매개하는 단 하나의 기표는 바로 시(詩)다. 이창동 감독은 "시가 죽은 시대에 있어 시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도발적인 문제를 던짐으로써 시(詩)가 가진 문학적 본질을 구원하고자 애쓴다. 감독은 이를 양미자라는 주체가 "시(詩)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의 끝에 완성한 단 한 편의 시[단언컨대 그것은 양미자 삶 전체에서 단 하나 뿐인 시였다.]인 <아네스의 노래>에 이르기까지의 어떤 삶의 여정을 통해서 구체화한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 영화에서 시(詩)가 의미하는 것은 "타자 그 자체로서의 주체의 죽음과 삶에 대한 온전한 매듭"이다. 다시 말해 시(詩)는 양미자라는 주체가 타자[혹은 사물]에 대한 완전한 타자-되기를 시도함으로써, 또 그 과정에서, 그리고 그 끝에서 이룩한 한 삶의 끝과 또 다른 삶의 시작을 알리는 기호이자, 주체가 온전한 의미에서의 타자-되기[아네스인 소녀-미자]의 고통의 끝에서 잉태한 생산물로서의 기호이자, 타자의 삶을 살아가는 주체의 삶의 현존 그 자체를 지시하는 단 하나의 기호이자, 주체가 타자에게 저지른 죄악을 그 스스로[물론 이는 타자-되기를 통해서 속죄가능한 것이다.] 회개하고, 구속하게끔 하는 단 하나의 기호다. 어쩌면 이창동 감독은 전작 <밀양>(2006)에서는 해결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던 죄와 구원의 문제를 이번 작품에서 해결이 가능한 것으로 간주하고, 그것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였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오직 '죽음'으로써만 그렇게 된다. 이것은 인간 존재자의 한계 그 자체이자, 그 한계를 극한까지 밀어붙인 것의 결과물이다.
원환으로 되돌아오는 시간 속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 다가서기 혹은 타자[사물]에 대한 온전한 주체의 열림
시(詩)에는 두 개의 시간이 존재한다. 바로 죽은 소녀 박희진[아네스]의 시간과 그 죽음이라는 타자[사물]와의 되기를 시도하는 양미자가 갖는 시간. 이 두 개의 시간은 하나의 사건 속에서 공회전한다. 바로 박희진의 죽음이라는 사건에서 말이다. 즉 시를 촉발시킨 것은 바로 박희진의 죽음이라는 특이적 사건 속에서 열린다. 그러난 이 두 개의 시간은 따로 떨어져서 존재하는 직선적 시간 두 개가 아니라, 원환 구조로 되어있는 하나의 시간 속에서 공회전하는 두 개의 시간적 양태일 뿐이다. 따라서 시(詩)에서의 시간은 원환으로 되돌아오는 시간으로써만 존재할 뿐이다. 이 특이적 시간은 주체인 양미자가 타자인 박희진과의 되기를 가능하게하는 시간 그 자체이다. 따라서 소녀의 죽음과 양미자의 죽음이 의미하는 것들은 이 시간 속에서 배분되는 감각적 기호들이다. 그리고 이 시간 속에서 주체인 양미자는 타자인 박희진의 죽음과 삶에 대해 다가설 수 있었고, 그에게로의 온전한 열림, 즉 되기를 시도할 수 있었다.
그래서 양미자가 던지는 "시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나(주체로서의 양미자)는 타자[혹은 사물]로서의 박희진의 삶과 죽음에 어떻게 다가갈 수 있으며, 또 그것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으며, 그리고 어떻게 나와 그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 경계 없음의 상태에까지이를 수 있을까?"라는 물음으로 치환된다. 미자에게 있어 시(詩)는 이 질문의 가능조건이자, 이 질문을 극한의 상태에까지 몰고가는 비존재적 힘(혹은 고통)이자, 그 힘의 최종적인 산물로서의 기호 그 자체다. 그리고 그 시를 통해서 죽음/삶, 기억/망각, 비언어(적인 것 혹은 사물)/언어(적인 것), 주체/타자, 죄/구원 등의 이항적 기호들은 모두 그 경계를 허물어버린다. 이것이 바로 시가 가진 힘이다.
하지만 시가 가진 이런 힘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그건 양미자가 삶[그런 만큼 죽음]에 대해서 가진 처절한 고통의 몸부림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주체가 사물 혹은 타자에게로의 온전한 열림을 얻기 위해서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해질 때까지의 극한의 고통의 상태로 자기를 내어맡기는 열정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타자의 주체로의 다가옴도 아니고, 주체의 타자로의 다가감도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주체와 타자의 관계 맺음의 양상 속에서 주체와 타자가 서로가 서로에게 온전하게 열리는 욕망의 해방의 공간 그 자체에 배분된 삶의 충만함 그 자체로서의 기호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양미자의 죽음은 그녀가 삶이 고통스러워서 선택한 죽음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차라리 양미자의 박희진 되기 그 자체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것은 양미자가 남긴 생애 단 한 편의 시인 <아네스의 노래>를 통해서 증명된다. 아네스가 누군가? 그는 박희진이다. 아니 보다 정확히 박희진-되기를 시도한 양미자이자, 그것에 성공한 양미자-박희진, 박희진-양미자이다. 아네스는 박희진도 아니고, 양미자도 아니다. 차라리 아네스는 박희진-되기에 성공한 양미자다. 결국, 양미자가 남긴 단 한편의 시 <아네스의 노래>는 주체 양미자가 타자인 박희진의 죽음과 삶에게로의 온전한 열림을 얻기 위해서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해질 때까지의 극한의 고통의 상태로 자기를 내어맡기는 열정의 결과물로서의 기호이다.
시가 죽은 시대에 시란 무엇인가?
이 영화가 시라는 한 문학적 장르에게 던지는 물음에 답해보자. 이는 "시가 죽은 시대에 시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설정으로 되풀이된다. 이 질문을 접한 사람이라면, 어떤 이는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 테제를 떠올릴 것이고, 또 어떤 이는 랭보가 시 쓰기를 그만 둔 어떤 날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우리시대가 정말로 시가 죽은 시대라고 규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문학 장르 가운데서 주체와 타자와의 마주침을 가장 극한의 상태[경계 상태]에 서 있는 시의 숭고함이 더 이상은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 맺음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 더 이상은 아무런 가치와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이들이 우리 시대를 시가 죽은 시대라고 규정하는 것은 우리시대를 '데카당스'의 시대로 규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것은 맞는 말이지만, 틀린 말이다. 진정 우리 시대가 시대 죽은 시대라고 규정하고, 그것을 믿고, 이데올로기적으로 규정하는 자들은 우리시대를 '데카당스'의 시대로 규정하는 자들이며, 그렇게 규정함으로써 얻어지는 모든 이해관계의 썩은 찌꺼기들에 은닉하면서 살아가는 하이에나들이다. 즉 그들은 시대를 스스로 부패하게 하는 자들이며, 그렇게 부패된 세계에서 떨어지는 악독(惡毒)의 찌꺼기들에 목을 축이는 자들이다. 하지만 그것을 믿지 않는 자들, 즉 시가 아직도 새로운 삶의 긍정적인 감각적 역량을 촉발시키는 위대한 기호라고 굳게 믿는 자들은 스스로를 반시대적이라고 규정한다. 아니 오히려 그들은 항상 반시대적이었던 시라는 기호 자체가 가진 감각적 역량 그 자체를 언제나 긍정하는 자들일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묻는다.
"시가 어느 시대라도 죽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