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로우 고스트 
영화
평점 :
상영종료


 

 

1. 

김영탁 감독은 <헬로우 고스트>(2010)를 통해서 정말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 영화를 둘러싼 수많은 저 무시무시한 언표들을 보라. 유령, 환대, 푸닥거리, 죽었으되 살아있는 것, 삶과 죽음, 유령과 함께 삶을 살아가기, 삶/생명과 죽음에의 의지, 고립, 개인주의, 가족(주의), 고독(혹은 왕따), 자살, 사랑...  

 

2.  

실로 셀 수도 없이 언급될 수 있는 위의 언표들은 우리에게 익숙한/낯선 철학적 주제에 쉽게/어렵게 연관될 수 있다. 그리고 감독은 아마도 이와 같은 언표들을 비교적 훌륭한 아이디어로 한데 묶어내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아이디어를 보충할 보석과 같은 시나리오의 구상, 구성, 조탁엔 게을리했다. 그래서 각각의 시퀀스 간의 관계엔 개연성이 부족해서 이렇게, 저렇게 구멍이 뚫렸으며, 등장인물들의 감정의 선들은 뚝뚝 끊겨, 보는 이로 하여금 스크린에의 몰입을 방해한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약점을 극복할 만한 두 가지 장치가 존재한다. 하나는 가족(주의)라는 인간 종의 보편적 정서에의 호소이고, 다른 하나는 허약하고 헐거운 이야기들의 관계성들을 파편화 하는 극적 반전이다. 하지만 이 두 가지 장치는 이 영화가 위에서 제시된 이질적이고, 다양한 철학적 언표들을 일관성 있게 묶어내는 데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일시적 수단에 불과하다. 그것은 감독 자신의 무능력을 부정하려는 의도적/비의도적 수단에 다름 아니다.

 

4.  

그러한 감독의 무능력을 부정하려는 의도적/비의도적 수단에 속은 사람에게 내린 유령/귀신의 축복은 두 가지다. 실소失笑이거나 혹은 눈물이거나. 다시 후자는 두 가지로 구분된다. 영화에 감동해서 흘리는 눈물이거나 혹은 영화가 지루해서 하품을 하며 흘리는 눈물이거나.



 
 
 
궁정사회 한길그레이트북스 56 
노르베르트 엘리아스 지음, 박여성 옮김 / 한길사 / 2003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엘리아스는 사회학의 기본적인 출발점을 ‘상호의존적 관계에 놓인 인간’으로 삼는다. 이를 위해 그가 제시하는 개념이 바로 ‘결합태’Figuration인데 엘리아스에 따르면 인간들은 상호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는 특성 때문에 서로 간에 있어 상호적으로 결합되지만, 다양하고 유동적인 ‘세력균형’의 상태를 내포하고 있는 관계망을 형성하면서 살아간다. 즉 “인간은 기본적인 상호의존성 때문에 여러 가지 상호 결합되어 있으며, 따라서 가족, 학교, 도시, 사회계층, 국가 등 유동적 세력균형을 내포하고 매우 다양한 형태의 상호의존 구조 또는 ‘결합태’를 갖는 무수한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결합태 개념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바로 ‘세력’macht이다. 그러므로 “이 결합태 개념의 핵심에는 바로 ‘세력’Macht 관계가 내포되어 있다. 변화무쌍한 결합태들의 중심에는, 다른 말로 표현하면 결합과정의 중심에 변화무쌍한 긴장, 즉 ‘세력균형’의 변화가 개재해 있는 것이다. 이 세력균형은 어느 한 편에 유리하게 이루어지다가도 다음 순간에는 다른 한 편에 유리하게 바뀌기도 한다. 이러한 변화무쌍한 세력균형이야말로 모든 결합태의 끊임없는 흐름이 갖는 구조적 특성이 된다.” 요컨대 ‘결합태’는 필연적으로 상호의존적일 수밖에 없는 존재이자, 주체성과 타자성의 복잡한 고리의 실천적 효과로 형성될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의 인간들 상호간의 수많은 관계 맺음의 양상으로서의 배치와 그것이 사회적 장場에 등록되는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데 효과적인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엘리아스는 그의 책 『궁정사회』에서 ‘결합태’ 개념을 활용하여 서구사회에서 장기 역사적으로 형성된 ‘궁정사회’라는 독특한 결합태가 어떻게 형성, 변이, 해체되었는지에 대해서 규명한다. 우리는 이 책에서 엘리아스가 제시한 궁정사회적 결합태의 특성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측면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1. 인간들 간의 상호의존적인 결합적 관계와 그것에 의해서 형성되는 ‘사회체’의 특성으로서의 결합태의 추상적․잠재적 측면은 특정한 사회적 맥락[혹은 배치] 속에서 나타나는 상이하고 다양한 변형의 양태인 결합태로서 현실화된다. 가령 서구의 역사에서 ‘궁정사회’라는 독특한 결합태[특히 ‘앙시앵 레짐’기]는 ‘기사-종자-승려-농노-’라는 결합태의 양태를 취하는 ‘중세적 결합태’와 ‘노동자-사무원-경영자’ 또는 ‘고위층-중간층-하위층 관료’ 같은 ‘근대적 선진 산업국가의 결합태’와 차별적인 특성을 보인다. 
 

2. 궁정사회적 결합태는 ‘궁정예법’Étiquette/Etikette이라는 특이한 장치에 의한 수단화와 거리두기 메커니즘을 통해서 규정된다. 이는 크게 다음의 두 가지 측면들에 직접적으로 연관된다. 1) ‘궁정예법’Étiquette 장치는 ‘궁정사회’라는 독특한 결합태를 형성하는 궁정사회의 욕망의 집단적 배치를 구성하는 물질적 요소들과의 관계와 연관된다. 2) ‘궁정예법’ 장치는 궁정인들이 궁정사회에서 부여받은 사회적 지위의 상징적 징표이자, 그들의 사회적 삶을 규정하는/규제하는 코드와 담론의 실천적 배치에 다름 아니다. 
 

3. ‘궁정예법’ 장치는 궁정사회의 합목적적 관계, 합리성을 표상한다. 
 

4. ‘궁정예법’ 장치는 사회적 행위자들의 행위의 자기제한성의 범위와 척도를 규정한다. ‘궁정예법’ 장치 때문에 사회적 행위자들은 한편으로, 자신의 서열에 한정적인 행위만을 제한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 특수한 행위의 행사[권력의 행사라고도 할 수 있을]를 통해서 자신의 사회 내 권력적 위치를 확인, 규정, 차별화, 거리두기를 시도한다. 또한 ‘궁정예법’ 장치 안에서/통해서 궁정인들은 권력행사의 ‘기술’technic[사람을 관찰하는 기술, 다루는 기술, 궁정적 합리성의 중요한 측면으로서의 행위의 자발적/내적 통제]을 습득, 행사, 발전시키기도 한다. 
 

5. ‘궁정예법’ 장치는 ‘궁정사회’에서 상호의존적 관계에 의해서만 살아가는 인간들의 예속성과 자율성이 동시에 공존하는 삶의 형태를 드러낸다. ‘궁정예법’ 장치에 연관되는 ‘궁정사회’적 결합태[혹은 배치]는 주체와 타자들 사이의 상호의존적 관계에 기초한 권력행사와 권력관계의 평형상태를 통해서 유지되는데, 거기서는 어느 누구도 절대적 권력과 자유를 누릴 수 없었다. 따라서 ‘궁정사회’적 결합태[혹은 배치]는 언제나 변화하고 유동적인 ‘세력’[힘/권력]관계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닫힌 체계가 아니라 열린 체계, 역동적 형태를 띠었다. 
 

6. ‘궁정사회’적 결합태[혹은 배치]는 왕이 매개가 되어 궁정귀족과 시민계급 간의 ‘세력’[힘/권력]관계의 평형상태가 최고조에 이르게 되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긴장과 갈등의 잠재적 위험을 합리적으로 개혁할 수 있는 통로가 막힌 상태에서, 부르주아 시민계급이 주도한 폭력적 혁명을 통해서 해체되게 된다. 이로써 부르주아적 시민사회의 결합태가 형성되게 된다.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 The Good, the Bad, and the Weird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을 케이블에서 봤다. 김지운 감독의 이 영화가 개봉되었을 때 장안의 화제였다고 하는데 굳이 봐야할 필요성을 못느꼈던 탓에 챙겨보지 않았다. 그리고 언젠가는 케이블이나 공중파에서 해줄 것 같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에 더욱더. 아니나 다를까 그동안 케이블에서 이 영화를 주기적으로 상영해주었다. 그 동안 부분적으로만 보다가 오늘을 스토리 전체를 볼 수 있었다.   

2010  <악마를 보았다>
2008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2005  <달콤한 인생>
2003  <장화, 홍련>
2000  <반칙왕>
1998  <조용한 가족> 

 

1. <달콤한 인생>의  만주 벌판 버전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이 영화는 그가 2005년에 만든 <달콤한 인생>의  만주 벌판 버전이다[김지운 감독의 극장 장편의 필모그라피는 위에서 제시한 바와 같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비평을 어느 누구[어떤 비평가/네티즌]도 한 것 같다. 그의 영화 가운데 <악마를 보았다>와 <장화, 홍련>을 뺀 나머지 모든 영화를 다 본 상태에서 말하는 것이지만, 김지운 감독의 영화적 상상력의 정점은 <반칙왕>에 있었던 것 같다. 물론 이 영화는 <달콤한 인생>의 스토리, 등장인물, 주제, 소재 등과 여러 면에서 다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달콤한 인생>의 가장 중요한 [영화의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의] 감각적 충격 그 자체를 그대로 떼어다가 붙여놨다. 다시 말한다면, 이 영화는<달콤한 인생>의 포스트모던한 액션 활극의 모던적 변형이라고 할 수 있다. 단, 액션의 형식은 포스트모던한 방식이지만, 그것을 채우는 내용은 모던한 방식이다.   

 

2. 삼각형이라는 형식에 대해서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은 삼각형이라는 세 가지 항(項)이 만들어내는 형식으로 이루어진다. 첫째, 현상금 사냥꾼 박도원(정우성), 둘째, 마적단 두목 박창이(이병헌), 셋째, 열차털이범 윤태구(송강호). 이 세 가지 항이 만들어내는 삼각형이라는 형식은 사실 매우 폐쇄적이다. 왜냐하면 삼각형이라는 형식은 그 자체적으로는 욕망이 작동될 수 없는 구조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나머지 하나가 개입되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 없이는 삼각형을 구성하는 요소들과, 그것들 간의 관계로서의 욕망의 작동은 전혀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 그것을 작동시키는 것은 바로 <보물지도>다. 하지만 그 조차도 아무런 의미 없는 허상임이 밝혀지자, 느닥없이 영화는 과거 박창이와 윤태구의 악연을 불러낸다. 네 가지 항[욕망의 삼각형과 그것의 외부적 요소]으로 작동되던 욕망은 박창이와 윤태구의 악연이라는 이항구조로 전환된다. 거기에 박도원은 의도하지 않게 끼어들어가 부적절한 욕망의 삼각형을 구성한다. 이제 욕망의 삼각형은 그것을 작동시켰던 네 번째 항으로서의 <보물지도>가 사라진 이후에, 완전히 내부적으로만/폐쇄적으로/닫힌 체제로만 작동되는 그런 형식을 취한다. 결론은?  

욕망의 삼각형과 그것의 외부에서, 그것을 작동시키는 단 하나의 요소이자, 텅 빈 형식으로  작동하는 기표로서의 <보물지도>가 만들어내는 네 가지 항의 관계로서의 욕망의 작동의 방식은 영화의 끝에서 다시 이항적 구조로 환원된다. 바로 박도원과 윤태구가 만들어내는 원한의 이항적 구조. 물론 이 영화의 후속편이 만들어진다면, 이 이항적 구조를 욕망의 삼각형과 그것을 외부에서 작동시키는 기표가 더해져서 새로운 이야기가 만들어질 것이다.  

 

3. 만주라는 대륙에 대해서 

이 영화를 보면서 느낀 점이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만주>라는 대륙이 과연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지닐 수 있을까?"하는 것이다. 이 영화의 시간적 배경이 [적어도] 1930년이라고 한다면, 그리고 공간적 배경이 그 시대의 <만주>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 영화가 주는 이미지의 충격만으로도 <만주>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고민해봐야 한다. <만주>는 정치적/문화적/사회적/군사적/경제적/인종적/국가적/민족적/계급적/언어적 다양성이 중층적으로 결정되던 도가니(meltingpot)였다. 우리가 <만주>라는 이 괴물적 도가니에 대해서 보다 실재적인 인식을 가질 수만 있다면[즉, 현재화된 역사로서의 <만주>에 대한 보다 실재적인 인식을 가질 수만 있다면], 우리는 아시아적[좁게는 동남/북아시아적이고, 넓게는 서아시아까지 모두 포함해서]평화공동체를 건설하는 데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P.S  

1.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두 가지다. 두 장면 모두 영화의 종결부에서 나온다. 하나는 박창이와 윤태구의 과거의 악연이 밝혀지던 그 순간에 표정이 변하던 윤태구의 모습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 광활한 만주 벌판을 말 한마리에 의지해서 장총을 쏘던 박도원의 모습이었다. 전자에서 송강호는 이 영화에 산만하게 흩어졌던 시/공간과 사건들의 파편 전체를 자신의 클로우즈업된 얼굴 하나로, 단 한 번에 응집시킨다. 우리는 이 단 하나의 장면을 통해서도 왜 송강호라는 배우가 위대한 배우인지를 실감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후자에서 정우성은 한국적인 웨스턴 무비를 가장 이상적으로 그려내는 데에 있어 한몫 한다. 그의 모습에서 <황야의 무법자>에서의 클린트이스트우드의 모습을 상기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게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정우성은 한국적 웨스턴 무비를 장식하는 데 있어 가장 환타스틱한 단 하나의 배우-이미지를 만들어낸다. 단 한가지 흠이 있다면, 그런 그의 모습이 너무나 멋있다는 것, 그 뿐이다.  

  

 2. 

<만주족>, <만주국>에 대해서 다룬 책들 가운데 주목할 만한 책들[사실은이 분야에 대해서 아는 책들이 별로 없기 때문에 검색을 통해서 눈에 띄는 책들을 선별했다]은 아래와 같다. 

      

     

    



 
 
 
- Poetry 
영화
평점 :
상영종료


 

타자 그 자체로서의 주체의 죽음과 삶에 대한 온전한 매듭 

이창동 감독의 다섯 번째 영화 시(2010)에는 양가적인 코드가 다수 등장한다. 죽음/삶, 기억/망각, 비언어(적인 것 혹은 사물)/언어(적인 것), 주체/타자, 죄/구원 등. 이러한 양가적인 코드들을 매개하는 단 하나의 기표는 바로 시(詩)다. 이창동 감독은 "시가 죽은 시대에 있어 시란 도대체 무엇인가?"라는 도발적인 문제를 던짐으로써 시(詩)가 가진 문학적 본질을 구원하고자 애쓴다. 감독은 이를 양미자라는 주체가 "시(詩)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의 끝에 완성한 단 한 편의 시[단언컨대 그것은 양미자 삶 전체에서 단 하나 뿐인 시였다.]인 <아네스의 노래>에 이르기까지의 어떤 삶의 여정을 통해서 구체화한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이 영화에서 시(詩)가 의미하는 것은 "타자 그 자체로서의 주체의 죽음과 삶에 대한 온전한 매듭"이다. 다시 말해 시(詩)는 양미자라는 주체가 타자[혹은 사물]에 대한 완전한 타자-되기를 시도함으로써, 또 그 과정에서, 그리고 그 끝에서 이룩한 한 삶의 끝과 또 다른 삶의 시작을 알리는 기호이자, 주체가 온전한 의미에서의 타자-되기[아네스인 소녀-미자]의 고통의 끝에서 잉태한 생산물로서의 기호이자, 타자의 삶을 살아가는 주체의 삶의 현존 그 자체를 지시하는 단 하나의 기호이자, 주체가 타자에게 저지른 죄악을 그 스스로[물론 이는 타자-되기를 통해서 속죄가능한 것이다.] 회개하고, 구속하게끔 하는 단 하나의 기호다. 어쩌면 이창동 감독은 전작 <밀양>(2006)에서는 해결이 불가능한 것처럼 보였던 죄와 구원의 문제를 이번 작품에서 해결이 가능한 것으로 간주하고, 그것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였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오직 '죽음'으로써만 그렇게 된다. 이것은 인간 존재자의 한계 그 자체이자, 그 한계를 극한까지 밀어붙인 것의 결과물이다.   

 

  

원환으로 되돌아오는 시간 속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에 다가서기 혹은 타자[사물]에 대한 온전한 주체의 열림 

시(詩)에는 두 개의 시간이 존재한다. 바로 죽은 소녀 박희진[아네스]의 시간과 그 죽음이라는 타자[사물]와의 되기를 시도하는 양미자가 갖는 시간. 이 두 개의 시간은 하나의 사건 속에서 공회전한다. 바로 박희진의 죽음이라는 사건에서 말이다. 즉 시를 촉발시킨 것은 바로 박희진의 죽음이라는 특이적 사건 속에서 열린다. 그러난 이 두 개의 시간은 따로 떨어져서 존재하는 직선적 시간 두 개가 아니라, 원환 구조로 되어있는 하나의 시간 속에서 공회전하는 두 개의 시간적 양태일 뿐이다. 따라서 시(詩)에서의 시간은 원환으로 되돌아오는 시간으로써만 존재할 뿐이다. 이 특이적 시간은 주체인 양미자가 타자인 박희진과의 되기를 가능하게하는 시간 그 자체이다. 따라서 소녀의 죽음과 양미자의 죽음이 의미하는 것들은 이 시간 속에서 배분되는 감각적 기호들이다. 그리고 이 시간 속에서  주체인 양미자는 타자인 박희진의 죽음과 삶에 대해 다가설 수 있었고, 그에게로의 온전한 열림, 즉 되기를 시도할 수 있었다.  

그래서 양미자가 던지는 "시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나(주체로서의 양미자)는 타자[혹은 사물]로서의 박희진의 삶과 죽음에 어떻게 다가갈 수 있으며, 또 그것을 어떻게 인식할 수 있으며, 그리고 어떻게 나와 그의 구분이 존재하지 않는 경계 없음의 상태에까지이를 수 있을까?"라는 물음으로 치환된다. 미자에게 있어 시(詩)는 이 질문의 가능조건이자, 이 질문을 극한의 상태에까지 몰고가는 비존재적 힘(혹은 고통)이자, 그 힘의 최종적인 산물로서의 기호 그 자체다. 그리고 그 시를 통해서 죽음/삶, 기억/망각, 비언어(적인 것 혹은 사물)/언어(적인 것), 주체/타자, 죄/구원 등의 이항적 기호들은 모두 그 경계를 허물어버린다. 이것이 바로 시가 가진 힘이다.  

하지만 시가 가진 이런 힘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그건 양미자가 삶[그런 만큼 죽음]에 대해서 가진 처절한 고통의 몸부림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주체가 사물 혹은 타자에게로의 온전한 열림을 얻기 위해서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해질 때까지의 극한의 고통의 상태로 자기를 내어맡기는 열정에서 비롯된다. 이것은 타자의 주체로의 다가옴도 아니고, 주체의 타자로의 다가감도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주체와 타자의 관계 맺음의 양상 속에서 주체와 타자가 서로가 서로에게 온전하게 열리는 욕망의 해방의 공간 그 자체에 배분된 삶의 충만함 그 자체로서의 기호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양미자의 죽음은 그녀가 삶이 고통스러워서 선택한 죽음으로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차라리 양미자의 박희진 되기 그 자체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것은 양미자가 남긴 생애 단 한 편의 시인 <아네스의 노래>를 통해서 증명된다. 아네스가 누군가? 그는 박희진이다. 아니 보다 정확히 박희진-되기를 시도한 양미자이자, 그것에 성공한 양미자-박희진, 박희진-양미자이다. 아네스는 박희진도 아니고, 양미자도 아니다. 차라리 아네스는 박희진-되기에 성공한 양미자다. 결국, 양미자가 남긴 단 한편의 시 <아네스의 노래>는 주체 양미자가 타자인 박희진의 죽음과 삶에게로의 온전한 열림을 얻기 위해서 삶과 죽음의 경계가 모호해질 때까지의 극한의 고통의 상태로 자기를 내어맡기는 열정의 결과물로서의 기호이다.   

 

시가 죽은 시대에 시란 무엇인가?  

이 영화가 시라는 한 문학적 장르에게 던지는 물음에 답해보자. 이는 "시가 죽은 시대에 시란 무엇인가?"라는 문제설정으로 되풀이된다. 이 질문을 접한 사람이라면, 어떤 이는 고진의 <근대문학의 종언> 테제를 떠올릴 것이고, 또 어떤 이는 랭보가 시 쓰기를 그만 둔 어떤 날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는 우리시대가 정말로 시가 죽은 시대라고 규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문학 장르 가운데서 주체와 타자와의 마주침을 가장 극한의 상태[경계 상태]에 서 있는 시의 숭고함이 더 이상은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아니 오히려 그것은 주체와 타자와의 관계 맺음에 대해 사유하는 것이 더 이상은 아무런 가치와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이들이 우리 시대를 시가 죽은 시대라고 규정하는 것은 우리시대를 '데카당스'의 시대로 규정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것은 맞는 말이지만, 틀린 말이다. 진정 우리 시대가 시대 죽은 시대라고 규정하고, 그것을 믿고, 이데올로기적으로 규정하는 자들은 우리시대를 '데카당스'의 시대로 규정하는 자들이며, 그렇게 규정함으로써 얻어지는 모든 이해관계의 썩은 찌꺼기들에 은닉하면서 살아가는 하이에나들이다. 즉 그들은 시대를 스스로 부패하게 하는 자들이며, 그렇게 부패된 세계에서 떨어지는 악독(惡毒)의 찌꺼기들에 목을 축이는 자들이다. 하지만 그것을 믿지 않는 자들, 즉 시가 아직도 새로운 삶의 긍정적인 감각적 역량을 촉발시키는 위대한 기호라고 굳게 믿는 자들은 스스로를 반시대적이라고 규정한다. 아니 오히려 그들은 항상 반시대적이었던 시라는 기호 자체가 가진 감각적 역량 그 자체를 언제나 긍정하는 자들일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묻는다.  

"시가 어느 시대라도 죽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2010-06-16 23:45   댓글달기 |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6-17 0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유령 작가 - The Ghost Writer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발화주체와 메타적 발화주체

우리에게도 유명한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유령작가>(2009)는 '정치에 있어서의 유령(적인 것)의 힘'이 가진 실천적 효과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유령작가>는 두 중요한 행위주체들의 관계맺음과, 그 과정에서 파생되는 정치적 욕망의 형성과 균열, 그리고 그 속에서 기생하면서 살아가는 유령적 존재자들의 정치적 효과 그 자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즉 발화주체인 정치가(politician)와 그것을 글쓰기의 형태로 기록하는 메타적 발화주체인 작가(writer)는 이 둘 사이를 유령처럼 유영하는 정치적으로 은폐된/감추어진 이야기(들)를 놓고 벌어지는 정치적 사건 속에서 진실(truth)을 감추고, 말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이 혼탁한 정치적 게임에 참여하는 모든 주체들은 이미/미리 앞서 유령적 존재자들이 되곤 만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욕망을 주체적으로 형성해내지 못하며, 오직 타자의 욕망을 예속적으로 욕망할 뿐이다. 오직 회고록 작가인 고스트(이완 맥그리거만)이 자신의 욕망을 주체적으로 형성해내려고 하지만, 그는 그의 선임 작가와 마찬가지로 정치적 희생양이 됨으로써, 말할 수 없는 정치적 유령으로 전락해버린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자들의 정치적 게임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정치적 게임의 장에서 행위주체들은 어느 누구도 자신의 욕망을 주체적으로 구성해낼 수 없다. 전직 영국의 수상이었던 아담 랭(피어스 브로스넌)은 그의 정치적 파트너/조원자/조정자인 그의 아내 루스 랭과 그의 동료이자 하버드대학 교수이자 CIA와 연루되어, 이 사건을 배후조정한 에멧의 욕망을 욕망할 뿐이다. 그렇다면 루스 랭은? 그녀 역시 에멧에 고용되어, 그의 욕망을 욕망할 뿐이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욕망의 삼각형의 구조는 그들 스스로의 힘에 의해서는 작동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작동시키는 것은 그 이면에 숨은 정치적 상징계의 커다란 욕망 그 자체다. 그것은 전혀 드러나지 않은 채로 글쓰기의 형태로 씌어진 채 은폐되어 있을 뿐이다. 그래서 회고록 작가인 그가 해야 할 일은 아담 랭의 정치적 회상들을 쓰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욕망의 삼각형을 작동시키는 정치적 상징계의 허구성 뒤로 숨어있는 정치적 진실을 파헤치고, 그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정치적으로 말할 수 없던 것들을 말하는 것이자, 정치적으로 은폐되어 있던 것을 말함으로써, 정치를 정치답게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그것을 발견했지만, 죽음을 당해 말할 수 없었던 전임 작가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정치적 푸닥거리다.

회고록 작가인 고스트는 이것을 부분적으로 수행한다. 그는 약간은 수동적인 방법으로 이 정치적 게임의 진실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 정치적 게임은 아담 랭의 회고록 초고에 마치 비밀 코드처럼 은폐되었다. 회고작가인 그는 그것을 영화의 끝 부분에서 발견하고, 수동적인 방법으로 그것을 폭로하지만, 이를 알아챈 앤 랭의 부인과 에멧에 의해 죽음을 당함으로써 이 사건에 대한 진실을 완전하게 말하기에 실패한다. 따라서 회고 작가의 고스트(이완 맥그리거)의 죽음[또 그런 만큼 그의 전임 작가의 죽음]은 그 자신의 존재를 정치적인 유령으로 만드는 것인 동시에, 이 정치적 게임에 연루된 정치가들의 존재 그 자체를 유령적인 것으로 만드는 하나의 매듭의 역할을 한다. 뿐만 아니라 그의 죽음은 정치가 그 자체로 유령적인 게임일 뿐임을 방증한다. 결국, 이 영화는 어느 누구든 이 잔인하고, 치열한 게임에 말려든다면, 그 때부터 그는 인간이 아닌, 하나의 유령적인 존재자가 될 뿐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하지만 인간이 인간이었던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인간은 원래부터 유령이 아니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