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란 무엇인가 - 무위인無位人에 관하여 개념어총서 WHAT 5 
이정우 지음 / 그린비 / 200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주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객관적 선험철학적 답변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유령적 질문들의 끊임없는 괴롭힘에 시달린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즉 세계]에 대해서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 세 가지 유령적 질문들은 각각 <존재론>, <인식론>, <윤리학>에 할당된다. 그것들은 각각 존재, 앎, 실천의 문제에 잇닿아있다. 하지만 서로 다른 영역들에 할당된 세 가지 질문들을 공통적으로 묶어내는 끈이 있다. 그것은 <나>[주체]라는 것이다. <나>[주체]라는 것은 인간으로서 삶을 살아가는 존재자들 모두에게 들이닥치는 필연적인 숙제와 같다. 신(神)의 강권적 힘에 의해서 인간의 삶이 틀지워지던 중세까지도, 인간에 의한 주체에 대한 물음은 희미하게 존재하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인간이 자기 발로 서기 위해서는 그것에 대한 물음을 어떻게든 해결해야만 했다. 그래야만 인간은 신의 정원을 온전히 떠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놓고 본다면 주체에 대한 물음은 근대철학의 비조이었던 데카르트부터, 그것에 대한 물음 자체가 무의미한 것처럼 보이는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철학적 문제설정으로 철학자들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지난한 문제였다. 그런 의미에서 "주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인간을 인간되게 함에 대한 근본적인 (불)가능성에 대한 문제제기다. 현대에 들어서 이 질문이 더 이상은 유효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게 되었을지라도 그것이 끈덕지게 살아남는 것은 무엇일까? 이정우의 『주체란 무엇인가?』는 바로 이 질문에 응답하기 위해 씌어졌다. 그는 주체의 자유를 강하게 역설하는 철학보다는 다소의 결정론처럼 보이기는 해도 <객관적 선험철학 objective transcendental philosophy>[이는 객관적인 선험적 장에서 주체가 어떻게 생산되고, 거기서 주체는 어떻게 규정되며, 또 그런 만큼 어떤 주체가 가능할까를 고민하는 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이라고 지칭하는 것을 통해서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사유하고자 한다. 이 책은 <주체란 무엇인가?>에 대한 객관적 선험철학적 답변이라고 할 수 있다. 저자는 <주체란 무엇인가?>에 대한 해답으로 <이름-자리로부터 탈주>[저자의 말대로 이를 단순히 이름-자리를 거부하거나, 벗어나고자 하거나, 부정하거나 하는 태도로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 그것은 들뢰즈-가타리 식으로 말해 배치를 의미하는 것으로 기존의 배치를 새롭게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을 뜻한다.]하는 주체로서의 <가로지르는 주체> 혹은 <무위인 無位人>이라는 주체 개념을 제시한다. 이것은 이정우식 주체론에서의 <주체란 무엇인가?>에 대한 입장으로서, 그가 볼 때 진정한 의미에서의 주체는 바로 <무위인>으로서의 주체이다. 이 책의 부제가 <무위인에 관하여>인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술어적 주체의 '너머'와 차이생성, 그리고 정체성의 문제

주체의 개념에서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술어적 주체>[주어로서의 주체인, 자신에게 붙은 술어들을 통해서 성립하는 주체]이다(14). 이 주체는 <나>라는 자기의식을 기반으로 하여, 술어들이 주체를 주체이게끔 하는 주체이며, 나[自]를 타[他]와 구분하는 것을 함축함으로써 성립하는 주체이다(17).  중요한 것은 술어적 주체를 구성하는 갖가지 규정들은 삶을 형성하는 각각의 범주들에서 추출됨으로써, 그리고 그렇게 추출된 규정성들이 계열화됨으로써 성립한다는 것이고, 그 나머지의 여집합은 부정된다는 것이다(20). 가령 "386세대는 ~이다"라고 할 때 이 규정성들의 묶음에 계열화되는 것들이 있고, 거기로부터 배제되는 것들로서의 부정되는 집합들이 있다. 그렇게 놓고 본다면, <나>는 나를 둘러싼 우주와 사회, 그리고 세계의 무수한 술어적 주체를 구성하는 계열들의 집합으로서 존재하게 된다. 물론 그 때 나를 규정하는 자아적 계열들의 집합으로서의 술어적 주체는 타자와의 변별적 차이[혹은 부정]의 구획점으로 존재한다. 이정우는 이를 <이름-자리들의 체계>라고 규정하면서, 그것이 아무-것도-아니라는 것[그것의 구속으로부터 언제든 탈주할 수 있을 만큼의 잠재성의 벡터가 극한에 이른 상태]에 대한 깨달음의 상태를 장자의 <만물제동>에 빗댄다(23). 이것은 아마도 들뢰즈-가타리 식의 <기관 없는 실체>를 의미할 터인데, 그것은 분절 자체의 무존재성인 동시에, 어떤 분절도 존재할 수 있다는 잠재성의 영역을 표지하는 것이다[다시 말한다면, 이러한 상태는 어떤 규정적인 <이름-자리>로부터 탈주하는 힘의 벡터의 극한 점에서 "나는  어떤 ~도 아니다."가 될 수도 있고, "나는 어떤 ~도 될 수 있다."도 될 수 있는 그런 상태를 지칭한다]. 그런데 이런 개인적 의식[자아의식]을 바탕으로 하는 술어적 주체는 집합적 수준[우리]으로 나아가서 존재할 수도 있다. 그것은 <확장된 나>로서의 우리이다. 이정우는 여기서 <나>[개인]와 <우리>[사회] 사이의 구성과 해체의 이율배반적 관계가 존재한다고 본다.  

지금까지가 술어적 주체에 관한 공간적 지평의 탐색이었다. 그런데 술어적 주체는 또한 공간적 지평뿐 아니라 시간적 지평을 통해서 생각할 수 있다. 나라는 술어적 주체가 특정하게 정해진 시간에 배분되는 공간적 지평에서 <이름-자리>를 할당받는 것을 우리는 <이름-자리의 공간적 지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시간이라는 선험적 지평과의 관계맺음을 통해서 변화한다. 즉 <이름-자리의 공간적 지평>으로부터의 탈주가 일어나는 셈이다. 이는 나라는 술어적 주체가 특정하게 정해진 시간에 배분되는 공간적 지평, 즉 <이름-자리>에서 그 바깥으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33). 이것이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이름-자리> 주체의 변동/변화/생성을 시간이라는 선험적 지평을 통해서 사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주체는 결코 고정적이거나 단일한 것으로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항상 사이(-), 변화, 생성, 과정 중에 있는 주체, ~로 되어가는 주체가 문제가 된다[들뢰즈의 <사건의 철학>에서 문제인 것은 항상 생성의 철학이다. 그것은 차이나는 것의 반복으로서의 영원회귀를 존재의 일의성의 테제로 사유하는 철학, 즉 주사위 놀이를 하는 철학이다. 이러한 사건적 철학에서의 주체는 특이존재, 즉 일반성이나 특수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특이존재로서의 주체를 사유할 수 있게 한다. 하여 들뢰즈 철학에, 더 나아가 포스트구조주의에 주체론이 부재하다고 비난하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우리는 언제나 <정체성의 구축>이라는 문제설정에 직면한다. 왜냐하면 주체가 주체로서 구성될 수 있는 것은 그 정체성의 구축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주체가 동일성을 완전히 거부해 버릴 때, 그 주체는 주체일 수 없다[지젝이 실재와 상징계 사이의 틈에서 주체가 구성된다고 말한 것은 정확히 이 대목에서다]. 하지만 주체는 시간에서의 끊임없는 변화를 긍정할 때, 즉 시간의 선험적 지평 속에서 끊임없는 생성하는 차이들을 겪어낼 때[즉 차이생성하는 그 경험을 경험할 때] 주체로서 성립한다(37~8). 그러한 주체는 이전의 자신에게 부여된 낡은 <이름-자리>에 고정되거나 단일한 상태로 머물러있는 주체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항상 일시적인 어떤 동일성의 틀[들뢰즈 식으로 말한다면 수동적 묶어내기. 이에 대해서는 『차이와 반복』을 참조]에 묶이게 된다. <이름-자리 주체>의 선험적인 시간적 지평에서의 종합은 두 가지 수동적 종합, 즉 생명체의 자기보존을 위한 종합으로서의 동일성[코나투스의 욕망]과 사회적 동일성[사회학에서 말하는 사회화]을 필수적으로 수반한다. 이것은 <나>[주체]와 <나>가 속한 사회 속에서 주체로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수동적 조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는 사건들의 열린 총체를 가로지르면서 생성하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43)인 주체성으로서 성립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주체가 그 수동적 조건들에 완전히 붙들려있거나 포획될 때 그것은 전적인 예속화/죽음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건들의 열린 총체를 가로지르면서 생성하는 주체/주체성은 독단적 주체성이 아니라, 항상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객관적인 선험적 장[빈위들/사건들의 총체]이 형성하는 객체성과의 마주침을 통해서만 존재한다. 이정우는 이를 <주체성과 객체성의 이율배반적인 마주침의 시간적/공간적 특질>(46~7)로 간주한다. 주체는 자기를 규정하는 객관적인 선험적 장 안에 던져진 존재자, 즉 <이름-자리>를 부여받은 존재자이지만, 동시에 그로부터 탈주하려는 존재자이다. 다시 말한다면 "시간 속에서 변이해 가는 뫼비우스적 이율배반적 구조에서 주체는 규정되는 존재인 동시에 규정에 대해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는 존재이다. [...] 자기를 만들어 가는 주체는 자신의 이름-자리를 스스로 만들어 가려 한다. 주체-되기는 곧 이름-자리와의 투쟁, 술어적 주체와의 투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52~3)  이것은 푸코가 <진실>과 그것에 대한 역사적 <변이형>이라고 말한 것에 다름 아니다. 특정한 시대의 에피스테메에 속한 주체들은 그 시대의 이율배반적 구조의 금붕어들이지만, 그 시대와의 적극적 투쟁을 통해서, 그로부터 벗어나려는 특이존재자들[이름-자리의 바깥으로 나아가는 자들]로서 자신의 주체성을 능동적으로 구성하는 주체들일 수 있다. 물론 그런 주체들은 기존의 지배권력의 규정들, 예속화의 장치들인 'doxa'로부터 탈주하는 'para-doxa'의 존재자들로 살아가는 존재자들이다[독사와 파라독사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는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를 참조].   

  

주체성과 타자성의 이율배반성, 그리고 <되기>의 문제

그런데 주체/주체성은 항상 타자/타자성의 문제를 제기한다. 내가 주체로 서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객체로 만들어야 한다. 즉 내가 주체화된다는 것은 누군가가 객체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와 너의 관계는 끊임없는 술어적 주체의 관계의 그물망으로 직조된 관계이므로, 그 속에서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객체화[그 과정은 곧 주체화]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주체화와 객체화의 이율배반적 특성의 극한은 "내가 살기위해 누군가를 죽여야만 한다."는 신자유주의적 시장법칙에서 잘 발견된다]. 이런 상황에서 나[또는 우리]는 스스로 서기 위해서 항상 누군가[또다른 우리]와 무한한 투쟁적 관계[주체화/객체화]를 형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원래 주체를 의미하는 어원인 <sub-jectum>(서브-젝튬: subject)에는 이런 이중적 의미('아래로 던져진 것'이자 '주체')가 깃들어 있다(77). 이중적인 체인 <sub-jectum>은 인간이라면 필연적으로 직면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한다면, <주체> 개념에는 내가 주체로서 독립적으로 설 수 있는 주체성과 그 과정에서의 타자와 맺는 관계를 함축하는 타자성의 관계론적 특질을 필연적으로 내포한다. 현실(the real)에서 나는 주체성을 확립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으며, 그런 만큼 또 다른 나(타자)도 그런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타자가 주체로 서고자 하는 욕망인 <타자의 주체성>, 즉 <타자성>을 의미한다. 이는 주체성 없는 타자성은 없고, 타자성 없는 주체성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입장에서 타자의 주체성은 나의 주체성의 성립의 과정에서 타자를 객관화(예속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이는 타자의 입장도 동일한다. 따라서 주체성과 타자성의 교차적 지점에서는 긴장과 갈등의 관계를 수반할 수밖에 없다. 헤겔이 말한 <인정욕망>이나 호네트가 말한 <인정투쟁>이 바로 이에 해당할 것이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나의 주체성과 너의 타자성의 관계설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이는 나의 주체화와 너의 객체화의 관계설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다름 아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은 주체화가 타자 없는[주체의 타자의 객체가 극단적인] 방향으로 이루어지는 경우와, 그 반대의 경우의 관계설정도 함축한다. 내가 온전한 주체로 서기 위해서는 나라는 자기고립적 주체로만을 상정해서는 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은 항상 타자와의 관계설정을 고려해야만 한다[따라서 천상천하 유아독존적 주체는 절대 성립할 수 없다. 그것은 항상 타자와의 관계를 필연적으로 수반하기 때문이다]. 이것을 주체 앞에 놓여진 객관적 상황이라고 해도 좋고, 주체들의 집합체로서의 우리 앞에 놓여진 개관적 상황이라고 해도 좋다. 가령 내가 내 앞에 놓인 객관적 상황에 절대 굴복할 수 없다는 강한 의지로 점철된 나머지 나의 주체화의 밝은 빛으로 그 상황을 어떠한 여백도 없이 채운다고 가정해보자. 그 때 나의 주체화는 온전한 빛으로만 구성되지만, 거기엔 어떤 타자에 대한 배려도 인정하지 않는다는 강한 권력에의 의지[욕망]이 담겨있다. 이정우는 그런 그릇된 주체화의 욕망을 일본의 니시다 기타로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고 본다. 그에게 "주체화란 빛의 형상인데, 그것은 자신을 짓누르는 객관적 상황에 굴복하지않고 그 상황을 주체 안에 녹여 넣음으로써 주체는 자신을 보존하고 확중한다.  그 극단적 경우는 주체가 겪는 한순간의 '생명사건'을 이데아와 결합시키는 경우이다."(83) 니시다의 철학이 자신 앞에 놓여진 객관적 상황[소여된 것]을 수동적으로 매몰되기 보다는 능동적으로 주체에 몰아넣는 것으로 해석되는 것은 바로 그런 경우다. 가령 일본이 서구[미국]에 의해 객관화된 것을 경험한 이후, 자신앞에 놓여진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객관적 상황[소여된 것]에 수동적으로 매몰되기 보다 능동적으로 주체화의 형상에 녹여내는 것. 니시다 철학이 그의 제자들에 의해서 일본이 직면한 역사적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대동아공영권[능동적 주체화의 극단적 양식으로 한국과 아시아를 극단적으로 객체화하는 것]을 주장하는 데 왜곡되어 활용된 것은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니시다의 철학과 그것의 왜곡은 차이의 체계=동일성의 체계로 환원되는 것의 이미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차이의 철학[동일성으로 회귀/환원되는]이 아니라 차이생성의 철학[동일성으로 회귀/환원되지 않는]을 확립하는 것이 문제다. 이것은 들뢰즈-가타리가 『천 개의 고원』에서 말했던 <되기>[=becoming, 생성]의 문제이다. 이정우는 "차이생성하는 타자들 사이에서의 미분적 되기(dAdB의 미분적 관계)가 곧 타자-되기라고 할 수 있다. 이 타자-되기가 모든 윤리적 행위의 존재론적 근거다."(87)라고 말한다. 들뢰즈-가타리에게 <되기>란 A와 B가 어느 하나로 귀속됨이 아니다. 그것은 서로 마주하고, 특정한 관계 속에 들어감으로써, 자신이 서로 가지고 있던 배치의 양상을 바꾸는 것이다. 즉 함께 연속적인 변이에의 경험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주체와 타자의 관계설정이 전자로 귀속되는 주체화, 후자로 귀속되는 객체화가 아니다. <되기>는 주체와 타자 모두가 함께 변이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되기> 혹은 무위인의 윤리학과 계열학

결국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주체화∞객체화의 관계설정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설정하는 <우리-되기>의 문제를 어떻게 설정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내가 객체화되지도 않고, 타자가 객체화되지도 않는 그런 진정한 주체[론]을 확립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이 문제가 해결될 때에만 <우리-되기>를 통해 <공통적인 것>의 구성을 통해서 기존의 상징계에서의 배치를 역전시켜 혁명을 꿈꿀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도래할 민중>의 <도래할 혁명>이자 <도래할 민주주의>인 것이다. 이에 대해 이정우는 "저항 주체들이 서로에게 그늘을 만들기보다는 전체로서의 저항을 생각하면서 상생의 관계를 맺을 때에만 진정한 '우리'-되기가 성립할 수 있다."(99)고 말한다. 왜냐하면 단순히 <이름-자리>의 형식적 차원에서의 바꿈(이합집산)으로만은 진정한 의미에서의 혁명을 이루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문제는 기존의 낡은 <이름-자리>의 실질적 전복을 이루어내는 것, 즉 기존의 낡은 <이름-자리>의 바깥으로 나아가는 것[혁명]이다. 이정우는 이를 <무위인의 윤리학>이라고 말한다. 즉 "무위인이란 이런 위[<이름-자리>]를 가지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이런 위의 경계들을 가로지르면서 이-것들을 창조해 내는 사람이다. 이-것들의 창조는 타자들 사이에서의 '되기'를 전제하며, 타자-되기, 숱한 형태의 '우리'-되기를 통해서 가능하며, 때문에 존재론적 행위인 동시에 윤리적 행위이기도 하다."(100) 
 

이 작지만 알찬 책을 통해서 우리는 "주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우리의 삶과 생명, 그리고 사회생활 전체, 더 나아가 국제적, 전 지구적 관계에 대한 존재론적, 윤리적, 인식론적 문제설정을 함축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온전한 주체로서 세우면서도, 타자를 객관화시키지 않는 방향으로서의 주체를 어떻게 구성해낼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 더 많은 고민을 해야 한다. 그것은 비단 우리 자신의 개인적 삶뿐만 아니라 사회, 전 세계에 공통적으로 해당하는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볼 때 이 책은 그러한 문제들에 대한 중요한 참조점을 제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