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서(抄書) : 책의 내용 가운데 중요한 부분만을 뽑아서 씀. 또는 그렇게 쓴 책

(국립국어원)



정약용 책 500권의 비밀



다산 정약용은 생전에 500권이 넘는 책을 썼다. 18년 동안 유배생활을 하던 시기에 집중적으로 작업이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500권은 한 생애에 이루어지기 어렵다. 비밀은 바로 초서(抄書)에 있었다. 정약용은 책을 읽다가 인상적인 구절은 옮겨적고 연관된 다른 구절과 배치하는 편집 방법으로 많은 책을 낼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이 순수 정약용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정약용과 비교되는 조선시대 철학자로는 『송자대전』의 주인공 송시열이다. 송시열은 자신의 생각으로만 책을 써냈다고 한다.





책을 쓰는 방법론에서 서로 전혀 달랐던 우암 송시열(위)과 다산 정약용(아래)



나는 책을 많이 쓰지는 않았지만 다산의 방법을 무의식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그러니까




책에 대한 기록들은 서로 연결된다.



예를 들어 <논어>의 한 구절은 프랑스 영화감독의 자서전과 묘하게 일치한다. 논어 11편인 '선진(先進)'편의 제목이기도 한 구절이다.




공자가 말했다. 옛사람들이 몸에 익힌 교양은 촌사람식이었다. 지금 사람들의 교양은 완전히 문화인풍이다. 어느 쪽이 진정한 교양인인가 하면 옛사람들 쪽일 것이다. (논어 '선진'편)





'선진'은 과거를 살았던 선배나 부모 세대를 말한다. 문화 혜택도 교육 기회도 경제적 여유도 적을 수밖에 없었던 부모 세대가 지금보다 교양인일 수 있다니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런데 프랑스 영화감독 '장 르누아르'의 자서전을 보면 단번에 이해가 된다. 영화 문화의 퇴보를 걱정하는 대가의 통찰력이 돋보이는 문장을 논어 구절과 함께 감상해보자.




맥 세네트(1880~1960, 초기 미국 무성영화 코미디의 두드러진 개척자)의 관객은 이상적인 대중들이었다. 그들은 주로 새로 정착한 이민자들로 이루어진 노동자 계층이었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영어를 거의 할 줄 몰랐기 때문에 무성영화는 그들에게 잘 맞아떨어졌다. 이 초창기 관객의 자손들이 오늘날의 관객들을 이룬다. 이들은 대학을 나왔고, 광고, 신문, 주간 영화평에 둘러싸여 살고 있다. 이들이 행동의 기준으로 삼는 원칙들은, 가장 "예술적"이고 가장 오락적임과 동시에 가장 효과적인 홍보매체에 의해 주입된 것이다. 그들을 위해 영화 산업은 영웅주의나 사랑, 혹은 - 무엇보다도 최악으로 - 심리학을 공장처럼 쏟아내고 있다. 

(장 르누아르 자서전, <나의 인생 나의 영화 장 르누아르>)



만약 메모를 하지 않았다면 동양고전과 서양 문화의 아이디어가 접점을 찾는 일도 어려웠을 것이다. 순간 뇌리에 스치다가 이내 사라졌겠지. 책과 책이 연결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말한 사람은 르네 데카르트다.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망설이는 사람은 데카르트의 말에 귀를 기울이라.




일단 한 권의 책을 집어들고 읽어보라. 다음 읽을 책이 자연스레 이어질 것이다.





'김소진 사전'이 준 영감





20년 동안 메모 독서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다듬어진 방법. 서지정보와 읽은 시간은 나중에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작고한 김소진 소설가에 관한 유명한 에피소드는 '자신만의 데이터'에 관한 중요한 실마리를 준다. 소설가 김소진은 자신만의 사전을 만들었다. 물론 '김소진 사전'이 국어사전의 맥락을 뒤집지는 않았겠지만,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자기 언어를 가지고 쓴다는 게 얼마나 절대적인지 알지 않은가? 나도 김소진을 흉내내 책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우리말을 예문과 함께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한국어를 아름답게 구사하고 싶으니까.





소설가 김소진은 잘 다듬어진 한국어를 구사하는 작가로 유명하다. 자신만의 사전을 만들어서 그것을 소설쓰기에 반영했다고 한다.



가끔 독서 메모를 담아 둔 엑셀 파일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많은 분들께 엑셀 파일을 보내드렸다. (엑셀파일 용량이 9MB) 보내면서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나만의 독서 경험이므로 데이터의 가치가 다를 수밖에 없으니까. 4회독을 하면 내 뇌에 각인되면서 결정적인 순간에 구절들이 나를 붙잡아주는 효과를 준다. (4회독의 방법은 "4번 읽을만한 책을 소개합니다"를 참조) 이 느낌은 장기하가 부른 '그때 그 노래'에 담긴 가사가 잘 살려준다.




아무리 그래도 이건 너무 심했지. 

이게 그때 그 노래라도 그렇지. 

달랑 한 곡 들었을 뿐인데도, 

그 많고 많았던 밤들이 한꺼번에 생각나다니.





독서 메모를 다시 읽을 때는 읽을 당시의 느낌과 맥락이 신기하게 되살아난다. 심지어 10년 전에 읽었던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의 독서메모를 엑셀로 옮기는 작업을 할 때는 마치 어제 책을 읽었던 것 같은 생생한 느낌이 들었다. 이것이 바로 자기만의 데이터가 주는 신비로움이다.




책 읽으면서 처음 메모하기 시작한 것은 1998년이었다. 그때는 공책 한 권에 메모를 했다. 스피노자의 <에티카>라는 책이 워낙 난해하기도 했지만 7월과 8월 여름 내내 한 권의 책밖에 읽을 수 없었다. 그때 읽었던 경험이 20년 가까운 시간 동안 어마어마한 도움을 주었다. <미디어의 이해>라는 명저를 남긴 마셜 매클루언은 감각에도 계급이 있다고 말했다. 가장 낮은 계급의 감각은 시각이다. 시각은 사기를 잘 당한다. 틱 나한 스님은 '눈'의 사기에 속지 말라고 경고했다. 만약 눈이 어떤 음식의 정량을 바라보았다면 그것의 반만 먹는 게 '진짜 정량'이라는 것이다. 착시도 빈번해서 독서를 교란시킨다. 현실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독서는 가장 약한 감각인 '시각'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시각을 넘어서야 독서가 힘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내가 공부방에서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소리 내 읽기를 시키고, 그림책 필사를 시킨다. 시각보다 큰 감각은 청각이다. 그리고 감각 중에서 '장군'에 해당하는 감각은 '촉각'이라고 한다. 마셜 매클루언은 연인들이 키스를 할 때 눈을 감는 까닭은 촉각의 강력한 느낌을 시각으로부터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 말했다. 메모 독서는 가장 강력한 감각인 촉각을 이용한 독서 방법이다.




눈으로 책 읽기는 '구경'이지만, 메모하면서 책 읽기는 '참여'다. 책의 기록에 기록으로 동참하는 파트너가 되는 것이다. 차원이 다른 독서경험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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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8-01-09 13: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매우 도전이 되는 페이퍼다.
난 책은 읽어도 정리나 요약을 잘 못하겠더라구.
특히 나이들고 팔이 아파서 항상 건너 뛰게 되더군.
암튼 정리를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스럽긴 해.ㅠ

승주나무 2018-01-09 13:20   좋아요 0 | URL
네. 저도 요번에 <공자, 인간과 신화>라는 책을 메모하고 워드까지 하느라 며칠을 소비했어요. 할 때는 힘들고 그만두고 싶었지만 책 내용이 가슴속에 나무처럼 솟아난 것 같아서 기분은 좋아요. 정리 고민 잘 해결되길 바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