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와 헤겔이라는 거목이 독일 출신이어서 그런지, 철학 하면 독일, 독일 하면 철학을 떠올리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요즘에도 그런가 하면 쉽게 고개를 끄덕이기 어렵다. 독일 철학사를 다룬 책을 찾아보면 대략 이 정도인데, 앞서 말한 명성에 비하면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던 차에 잘 알려진 독일 현대철학자 비토리오 회슬레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부터 현대의 요나스와 하버마스에 이르기까지 독일어로 수행한 독일 철학의 역사 전체'를 정리한 <독일 철학사>를 썼고, 곧 한국어판이 출간된다는 소식이 도착해 출판사로부터 원고를 입수했다. 옮긴이의 말 일부로 비토리오 회슬레가 누구이면, 이번 책이 어떤 내용인지 간략히 소개하고, 본문 1장 '도대체 독일 철학의 역사는 존재하는가? 그리고‘독일정신’이 존재한 적이 있었던가?'를 미리 공개한다.

 

 

 

 

 

 

 

 

 

 

 

 

 

 

[옮긴이의 말]

비토리오 회슬레는 누구인가?

저자 비토리오 회슬레는 1960년 이탈리아의 밀라노에서 태어나 독일 튀빙겐 대학에서〈진리와 역사—파르메니데스에서 플라톤까지의 발전에 대한 범례적인 분석에 비추어본 철학사의 구조에 관한 연구〉(1984)로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는 이〈진리와 역사〉로 한스-게오르크 가다머로부터 “2500년 서양 철학사에서 드물게 나오는 천재”라는 극찬을 받기도 했다. 이후 뉴욕 신사회연구소의 교수, 에센 대학의 교수 및 하노버 철학연구소의 소장을 역임했으며 1999년부터 지금까지 미국의 노터데임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2013년에는 프란체스코 교황으로부터 교황 아카데미에 초빙을 받기도 했다.
  회슬레는〈진리와 역사〉이후 교수 자격 취득 논문인〈헤겔의 체계—주관성의 관념론과 상호 주관성 문제〉(1988)를 비롯해《생태학적 위기의 철학—모스크바 강연》(1990), 《현대의 위기와 철학의 책임》(1990), 《근대 세계에서의 실천철학》(1995), 《철학사와 객관적 관념론》(1996), 《도덕과 정치—21세기를 위한 철학적 윤리학의 기초》(1997), 《객관적 관념론, 윤리학, 정치학》(1998), 《철학과 과학》(1999), 《플라톤 해석》(2004), 《철학적 대화—시학과 해석학》(2006), 《이성으로서의 신》(2013) 등의 수많은 저서와 편저서 그리고 논문과 강연을 통해 이론철학과 실천철학, 철학의 역사, 철학적 신학, 과학과 예술을 비롯한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자신의 철학적 사유를 펼치고 있다. 회슬레의 저작은 대부분 출간하자마자 유럽과 미국의 철학계에서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키고 여러 언어로 옮겨졌으며, 몇몇 경우에는 회슬레의 주장을 주제로 연구 논문집이 출간되기도 했다. 우리말로 읽을 수 있는 회슬레의 저서와 논문으로는《죽은 철학자들의 카페》(김선희 옮김), 《헤겔과 스피노자》(이신철 옮김), 《환경위기의 철학》(신승환 옮김), 《객관적 관념론과 그 근거짓기》(이신철 옮김), 《헤겔의 체계 I》(권대중 옮김), 《비토리오 회슬레. 21세기의 객관적 관념론》(나종석 옮김), 《현대의 위기와 철학의 책임》(이신철 옮김) 등이 있으며, 그 밖에 회슬레의 철학 사상에 대한 여러 연구 논문도 찾아볼 수 있다. 한편, 옮긴이는 지금《철학적 대화》를 번역하고 있는데, 방대하고 난해한 저작이긴 하지만 하루빨리 마무리할 수 있기를 바란다.

 

《독일 철학사》개괄
회슬레는 이《독일 철학사》에서 중세부터 현대에 이르는 독일 철학의 역사에 대한 개관을 제공한다. 요컨대 독일 철학사의 진행을 유럽에서 이뤄진 그 밖의 철학사와 분리하는 것이 도대체 어느 정도까지 정당한지에 대한 물음을 해명하는 데서 시작해 몇 세기에 걸친 철학의 도정을 추적한다. 이 책은 원전에 대한 철저한 지식을 토대로 이루어지는 독일 철학 전체에 대한 해석인데, 옮긴이가 알기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부터 현대의 요나스와 하버마스에 이르기까지 독일어로 수행한 독일 철학의 역사 전체에 대한 서술은 우리가 지금까지 만나보지 못한 새로운 철학사 구상의 전개다.
  회슬레의 이러한 새로운 독일 철학사 구상에 따르면, 독일 철학의 특수한 도정은 중세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와 니콜라우스 쿠자누스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이어서 종교 개혁을 통해 새로운 강조점을 제시하는데, 종교 개혁은 바로 그것이 지닌 반-철학적 논점으로 인해 사유의 새로운 시작을 가능케 하며 독일의 두드러진 특징을 이루는 철학과 문헌학의 결합을 산출한다. 라이프니츠와 칸트 그리고 18세기 후기 정신 과학의 정초는 피히테와 셸링, 헤겔의 독일 관념론에서 이루어지는 종합의 전제이다. 독일 관념론에 이어 쇼펜하우어, 포이어바흐, 마르크스, 니체와 더불어 그리스도교 및 지금까지의 이성 형이상학의 급속한 해소가 뒤따르며, 프레게와 논리실증주의, 신칸트학파와 후설 현상학에서의 철학의 새로운 근거짓기는 20세기 초의 가장 영향력 있는 시도로 서술된다. 그에 이어 20세기 전반부의 국가사회주의 철학(마르틴 하이데거, 아르놀트 겔렌, 카를 슈미트)과 마지막으로 20세기 후반 독일연방공화국의 철학(한스-게오르크 가다머, 카를-오토 아펠, 위르겐 하버마스 그리고 한스 요나스)이 따라 나오는데,‘독일 정신’의 역사 전체에 대한 회고로 이해할 수 있는 이《독일 철학사》는 흥미진진한 서술과 핵심을 찌르는 판단을 결합하는 가운데 마침내 21세기에 독일 철학의 생존과 관련한 조심스러운 회의로 끝을 맺는다.

 

 

 

[1장. 도대체 독일 철학의 역사는 존재하는가? 그리고‘독일정신’이 존재한 적이 있었던가?]

 

독일 철학의 역사는 존재하는가? 이 물음은 어처구니없는 것으로 보인다. 모든 아이는 독일인이 작가와 사상가의 민족이라는 것을, 최소한 그랬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독일 철학은 전 세계에 독일의 음악과 문학작품 못지않게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 물음에‘예’라고 대답하는 것은 결코 단순한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의심할 여지없이 독일어로 말하는 수많은 철학자가 존재했다 할지라도, 그것만으로는 아직 의미 있는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는 그들의 역사가 존재한다는 것을 결코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이름이 P로 시작되는 수많은 철학자가 존재하지만, ‘이름이 P로 시작되는 철학자들의 역사’는 특별히 의미있는 기획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그 이유를 파악하기란 어렵지 않다. 거기에는 정신적 유대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의 개별적 대상, 가령 한 사람의 삶에서 지속적인 것과 논리 정연한 발전을 인식함으로써만 그의 역사를 이야기할 수 있으며, 다수의 사람이 공동 주제로 연계되어 있어야만 그들의 역사를 이야기할 수 있다. 플라톤(Platon, BC 428/7∼BC 348/7)에서 프로클로스에 이르는 고대 플라톤주의의 역사는 플라톤에 대한 특수한 관계에 의해 특징지어지고, 그럼으로써 다른 사람 및 제도와 구별되는 사람과 제도의 역사다. 그러나 모든 독일 철학자에게 그리고 오로지 그들에게만 공통된 어떤 것, 예를 들어 하나의 방법과 하나의 주제가 존재하는가? 최소한 독일 철학의 발전은 고유한 법칙을 지닌 자기 내부에서 완결된 생기 사건이었는가?
  마지막 물음에서 시작하자면, 대답은 명백히 부정적이다. 철학사에서 의미와 연관을 추구하는 사람, 철학사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은 최소한 유럽 철학사를 하나의 통일로서 고찰해야만 한다. 〈근세철학의 역사에 대하여(Zur Geschichte der neueren Philosophie)〉라는 자신의 1827년 뮌헨 강의를‘철학에서 국민적 대립에 관하여 ’라는 장으로 끝을 맺은 프리드리히 셸링(Friedrich Schelling, 1775∼1854)은 분명히 종교적 진지함과 선험주의(Apriorismus)를 독일 철학이 두 개의 매우 중요한 이웃 철학, 그러니까 프랑스 철학 및 영국 철학과 구별되는 점으로 보고 있지만, 한편으로는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참으로 보편적인 철학은 하나의 개별 국민의 소유물일 수 없다. 어떤 하나의 철학이 여전히 참된 철학이 아니라고 가정해도 좋을 것이다.”게오르크 헤겔(Georg Hegel, 1770∼1831)과 셸링을 프랑스에 알린 프랑스 철학자 빅토르 쿠쟁은 애국주의적 촌뜨기들로부터 적을 조국에 끌어들인다는 비난을 받았을 때, 정당하게도 철학에는 진리 이외에 다른 조국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사실 니콜라우스 쿠자누스(Nicolaus Cusanus, 1401∼1464)는 카탈루냐 사람 라이문두스 룰루스 없이는,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Gottfried Leibniz, 1646∼1716)는 프랑스 사람 르네 데카르트(René Descartes, 1596∼1650)와 네덜란드 사람 바뤼흐 드 스피노자(Baruch de Spinoza, 1632∼1677) 없이는,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스코틀랜드 사람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76)과 스위스 출신의 프랑스 사람 장-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 없이는 이해할 수 없다. 또 이 세 사람 모두는 서로 다른 형식으로긴 하지만 고대 철학의 고유한 사유와도 관련이 있었다. 아니, 그리스도교 중세 철학과 관련해서는 이슬람과 유대 사유의 영향도 중요했다. 이를테면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1260?∼1327/28)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와 똑같이 자주 마이모니데스 및 아베로에스와 대결하지만 또한 페르시아 사람 아비켄나와도 대결하며, 지구화한 우리 세계 대부분의 현대 철학자보다 더 자주 다른 문화권의 사상가들에 대해 논의한다. 요컨대 독일 철학의 고유한 역사를 박제화하는 것은 사유의 세계 공화국에 실제로 존재하는 지시 연관들을 보지 못하게끔 하거니와, 그렇게 만들어진 독일 철학의 역사는 분명히오직 세계 수학의 비자립적 부분으로서만 존재하는 독일 수학의 역사와 비슷하게 잘못된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와 마찬가지로 오로지 독일 철학자들에게만, 또는 최소한 그들 모두에게만 공통된 특징을 찾아내는 것도 쉽지 않다. 확실히 18세기의 독일 철학 거의 전부는 계몽(Aufklärung)의 결정적 이념을 수용하거나 최소한 그것을 의식적으로 비판하는 것에 의해 규정된다. 그러나 계몽은 그 분야 최고의 새로운 역사학자인 조너선 이즈라엘이 보여주었듯 철저히 유럽적인 현상이었다. 그러한 이념은 서유럽 대부분의 나라에서 발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영향작용사적인 연관과 실재적인 이념사적 상호 관계는 여러 국민을 포괄했다. 역으로 개별적인 독일 철학자들은 서로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가령 무엇이 칸트와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를 결합하는가? 두 사람 각각을 흄과 결합하는 것이 둘을 서로 결합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자연스럽지 않은가?
  그러므로 ‘독일 철학(deutsche Philosophie)’이란 다름 아닌 정신적으로 수준 높은 동일성을 창출하고자 하는 독일 국민과 독일 국민국가의 욕구에 힘입은 인위적인 구성물이 아닐까 하는 의혹이 떠오른다. 《독일 정신과 기지(Deutscher Sinn und Witz)》(1828)나 《독일 고전 사상가들의 정신(Geist deutscher Klassiker)》(1850) 같은 제목을 달고 있는 책들이 19세기 전반부에는 여전히 드문 반면, 그 세기 후반부에는 독일 통일과 관련해 늘어나고〔《독일 정신과 독일 검(Deutscher Geist und deutsches Schwert)》(1866), 《엘자스의 독일 정신과 독일 특성(Deutscher Geist und deutsche Art im Elsass)》(1872), 《독일심정과독일정신(Deutsches Herz und deutscher Geist)》(1884)〕20세기 전반부에는 그야말로 홍수를 이룬 것은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더 나아가 독일 정신을 추구한 것은 우리가 오늘날 기껏해야 경계하며 조심스럽게만 다루는 책들, 이를테면 히틀러를 후원하고 그에게서 경탄을 받은, 유대인 출신의 잘 알려진 반유대주의자 아르투르 트레비취의 《독일 정신 또는 유대교: 해방의 길(Deutscher Geist—oder Judentum: der Wegder Befreiung)》(1919) 같은 책들뿐만이 아니다. 아울러 에른스트 트뢸취와 한스 바론 그리고 에른스트 로베르트 쿠르티우스 같은 뛰어난 학자들도 독일 정신에 관한 책을 저술했다.
  그사이 독일 정신을 다룬 저술이 뜸해진 것은 단지 국가사회주의의 재앙하고만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재앙 이후 독일 정신을 파악하고자 하는 노력이 철저하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중요한 기록은 토마스 만의 소설 《파우스트 박사, 한 친구가 이야기하는 독일 작곡가 아드리안 레버퀸의 생애(Doktor Faustus, das Leben des deutschen Tonsetzers Adrian Leverkühn, erzählt von einem Freunde)》(1947)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노력은 오늘날 유럽연합 같은 초국가적 통일체가 형성되고 그 본질이 지구화인 시대의 자기 이해에는 더 이상 맞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런 획기적인 전환은 다만 오늘날의 독일 철학에 대해 일군의 외면적으로 결합된 대상들 그 이상인 독자적 형성물로서 언급하는 것이 잘못되었음을 의미할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런 점이 또한 과거에 대해서도 타당하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만약 독일 정신이 존재한 적이 있다면 바로 그게 과거의 것인 까닭에, 이제 그게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한 물음을 좀더 먼 거리와 객관성을 가지고 추적할 수 있다. 사실 중세 말 이래의 다양한 서유럽 문화를 연구하는 정신사학자는 몇몇 유럽 문화에서 세계에 대한 일정한 문제 제기와 접근 방식이 다른 문화에서보다 더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쉽지 않다. 분명 모든 문화에는 항상 다른 문화의 주된 흐름에 자신의 것에 대해서보다 더 가까이 놓여 있는 예외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것은 대부분의 문화에 종종 다른 문화의 그것과는 다른 세계관적 주된 흐름 같은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점에 아무런 변화도 주지 못한다. 이런 점은 바로 곁의 이웃보다는 다른 대륙의 사람들과 더 빠르게 그리고 더 자주 의사소통하는 인터넷 시대에는 급속히 변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구술 문화에서는 물리적으로 가까이 존재하는 사람들과 정신적으로 결실 있는 모든 직접적 상호 작용이 이루어지며, 이런 점은 다수의 그러한 상호 작용에 대해 또한 문자성(文字性)의 발생 이후에도 여전히, 아니 20세기에 들어서까지도 타당하다. 확실히 다른 문화에서 온 책과 다른 나라 학자와의 편지 교환은 중세와 근세에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하지만 이는 자기 문화에 속한 사람들과의 상호 작용에 비해 양적으로 열등하다. 아니, 근세 역사가 결코 정신적 지구화의 연속적 증대에 의해 규정받지 않는다는 점은 명백하다. 왜냐하면 중세와 비교해 근세의 특징을 이루는 의사소통과 운송 수단의 진보에는 다른 한편으로 중세와 근세 초기의 공동 학문어(Wissenschaftssprache)인 라틴어의 상실이 맞서 있기 때문이다. 보편적 학문어인 영어의 발생 덕분에 현대는 많은 측면에서 19세기보다 중세에 더 가깝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잊지 않고 있다. 흄은 독일어를 못했고, 칸트는 영어를 못했다. 1820년대에도 오로지 아주 소수의 영국 지식인만이 독일어를 읽을 수 있었다. 확실히 근대 언어 중에서 프랑스어는—물론 중세의 라틴어와 비교할 수 있을 만큼 지배적이지는 않았지만—18세기에 이르기까지 유럽 교양인들의 공용어였다. 어쨌든 에드워드 기번도 자신의 첫 번째 책을 프랑스어로 썼다. 흄이 비로소 자기의 주요 저서를 영어로 집필해야겠다고 확신한 것은 7년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한 후 영어의 중요한 미래를 예언한 셈이다. 국민이 일차적 동일성 요소로 떠오름에 따라 의도적으로 강화된 언어 장벽이 국민국가의 시기에 철학적인 국민 문화를 산출했다는 것은 처음부터 개연적이다. 이런 점은 철학이 복잡한 방식으로 전체로서 문화와 결합되어 있는 만큼 더욱더 그러하다. 왜냐하면 개별 인간의 최종 목표의 해명은 물론 집단의 그것도 철학의 틀 내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일의 계몽철학이 분명히 유럽의 계몽철학과 공동의 특징을 지니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독일어 사용을 넘어서 그것을 이웃 나라의 그것과 구별해주는 특수한 형태화를 획득했다는 작업가설은 그 자체로 많은 것을 함축한다. 이런 점은 헤게모니를 장악한 독일의 거의 모든 지식인이 인구가 가장 많은 유럽 국가에서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던 종교적 신앙 고백, 즉 독일 정신을 다른 어떤 것과도 다르게 주조해낸 루터교 출신인 만큼 더욱더 개연적이다. 그들의 성장 배경인 루터교는 또한 칸트와 니체에게 공통된 특징 가운데하나이기도 하다. 게다가 앞의 사상가로부터 뒤의 사상가로의 이행은 빠르게 이루어졌다. 이를 위해 필요했던 유일한 징검다리 인물인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 1788∼1860)는 독일인이었다.〔독일 정신을 형성한 루터교의 엄청난 중요성 때문에 나는 한참 동안 종종 베를린에서 지냈고, 가령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를 독일어로 인용한 쇠렌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1813∼1855)를 편입할 것을 고려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왜냐하면 키르케고르는 독일어로는 아무것도 쓰지 않았고, 특수하게 덴마크적인 환경에 대한 지식 없이 오로지 칸트와 헤겔만을 다시 수용해 해석하는 것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이 책의 관심사를 설명했다. 목표는 독일 철학에 대한 간결한 개관, 이를테면 항공사진을 제공하는 것이다. 아울러 그러면서 이 철학을 다른 유럽 국민의 철학과 구별 짓는 특유성을 부각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독일 정신에는 결정적으로 정신 개념(Geistbegriff)에 대한 추사유(Nachdenken)가 속한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독일 철학의 모든 전환에서는 그것 없이는 역사를 현실적으로 이야기할 수 없는 그럼직한 발전 노선이 명백해야 한다. 이 책이 지향하고 있는 독자는 일차적으로 전문적인 철학자가 아니라 일반적인 교양 시민이다. 이 책은 예를 들어 수학자와 법학자의 관심을 끌어야 하는 까닭에, 그때그때마다 그런 분과에 속하는 어떤 것을 발견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주해를 포기했으며, 비록 내가 이차 문헌에 많은 것을 빚지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들을 인용하지 않았다. 심지어 가끔은 우리가 인터넷을 통해 대부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인용문의 정서법을 현대화했다. 사후에 출간한 텍스트의 경우 비록 잘 알려져 있는 제목이 나중의 사람들로부터 유래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 잘 알려진 제목에 따라 인용했다.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박식한 세부 사항이 아니라 커다란 노선이다. 독자는 이차 문헌의 또 다른 책에 많은 시간을 들이기보다는 독일 철학의 고전적 사상가들 자체에 대해 읽도록 고무되어야 한다. 내게 본보기가 된 것은 하인츠 슐라퍼의《독일 문학 소사(Die kurze Geschichte der deutschen Literatur)》(2002)였다. 물론 나는 항상 하인리히 하이네의 따라잡기 어려운 천재적 저작《독일의 종교와 철학의 역사에 대하여(Zur Geschichte der Religion und Philosophie in Deutschland)》(1834)를 염두에 뒀다. 하겐 슐체21의 뛰어난 역사학적 논고《도대체 독일 역사는 존재하는가?(Gibt es überhaupt eine deutsche Geschichte?)》(1998)가 지금 이 1장에 미친 영향은 명백하다. 내 책은 철학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전제하지 않으며, 복잡한 기술적 논증에 대한 서술을 의식적으로 포기한다. 철학에서는 그러한 논증만 문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또한 그러한 논증도 문제되는 까닭에, 이 책은 철학사학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이념사학적이다. 내게 문제가 되는 것은 특히 철학이 불러일으키거나 개념화한 의식사적 변화이다. 만약 그렇게 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 책을 독문학적인 것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데, 여기서 독문학(Germanistik)은 단순히 독일 문학만이 아닌 독일 문화에 대한 포괄적인 학문으로서 이해해야 한다. 따라서 나는 또한 언제나 거듭거듭 독일 문화의 다른 성취, 특히 다른 문화의 그것과 다르고 독일 철학과 어렵지 않게 연관시킬 수 있는 문학과 정신과학의 다른 성취도 참조한다. 그에 못지않게 내 관심을 끄는 것은 독일 철학사와 정치적 역사의 연결이다. 독일 정신의 종교적 전제는 중심 역할을 수행하는데, 나는 독일 신비주의로부터 종교개혁으로의 도정과 루터교의 고전 독일 철학으로의 변형 및 19세기에 이루어진 독일의 탈그리스도교화를 이해하고자 한다. 이 책은 또한 서유럽 근세의 틀 안에서 독일 문화의 특수한 역할은 무엇이었는지 파악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유용할 것이다.
  이것으로 짧은 이 개관을 규정하는 두 가지 선택 기준 가운데 하나를 언급했다. 그러나 무엇이 독일 철학의 특수한 도정을 해명할 수 있는 저작들을 선택하는 출발 자료인가? 도대체 무엇을 독일 철학으로 간주할 수 있는가? 이 단순한 물음의 어려움마저도 독일이 뒤늦게야 정치적으로 통일되었다는 점, 아니 오늘날에도 여전히 독일연방공화국 외부에 전적으로나 부분적으로 독일어를 말하는 국가들이 존재한다는 점과 관련이 있다. 앞에서 결합 지절로서 언어에 관해 말한 것에 근거해 내게는 언어가 가장 중요한 정의 기준인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물론 첫째, 오스트리아 철학자들도, 심지어 죄르지 루카치(György Lukács, 1885∼1971)처럼 독일어로 저술하는 헝가리 철학자까지도 독일 철학으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둘째, 오늘날에는 독일에 속하지만 그들의 시대에는 독일 민족의 신성로마제국 일부인 영토에 살았던, 오로지 라틴어로만 저술한 철학자를 배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결과 독일 출신 중세 철학자 중 압도적 다수가 여기서 의미하는 독일 철학에 속하지 않는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의 이념에 따라 고유한 하위 그룹을 형성하기에는 다른 중세 철학자들과 충분히 구별되지 않으며, 또한 고전 독일 철학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지도 못했다. 독일의 철학적 언어를 최초로 창조한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중요한 예외다. 따라서 여기서 의미하는 독일 철학은 주로 1720년부터 2000년까지의 시대를 아우른다. 나는 1770년부터 1930년까지의 특별히 혁신적인 시기에 집중하고자 한다. 물론 나는 분명 일차적으로는 독일어로 저술했지만 그와 더불어 때때로 19세기에 이르기까지 특히 격식을 차린 학문적 기회에 여전히 사용한 오랜 학문어인 라틴어와 유럽의 문화어인 프랑스어 또는 새로운 학문어인 영어로 쓰기도 한 사상가들의 비독일어 저작도 언급했다. 칸트의 라틴어 저술이나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 1818∼1883)의《철학의 빈곤(Misère de la philosophie)》(1847) 그리고 한스 요나스(Hans Jonas, 1903∼1993)의《생명의 현상(The Phenomenon of Life)》(1966)은 모두 독일 철학사에서 분리할 수 없다. 라틴어로 쓴 자격 논문은 독일 대학의 본질적 구성 요소였다. 프랑스, 벨기에, 영국으로의 망명과 프로이센 국적 포기에도 불구하고 마르크스는 계속해서 독일 문화에 뿌리박고 있었다. 아울러 독일 문화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마지막으로 요나스는 앞서 언급한 자신의 책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데 협력했으며, 마침내 자신의 마지막 위대한 저작을 모국어로 저술했다. 그뿐 아니라 심지어 나는 단지 이따금씩만 독일어로 글을 쓴 두 철학자를 여기서 다뤘다. 한 사람은 자신의 저작 대부분을 (학문적인 대중이나 학자는 아니지만 교양을 갖춘 대중을 위해) 라틴어나 프랑스어로 저술한 라이프니츠다. 왜냐하면 그의 사유는 칸트 철학의 출발점을 형성하며, 아니 누구보다도 라이프니츠에 의해 고무된 볼프(Christian Wolff, 1679∼1754)가 독일의 철학적 전문어를 형성하지 못했다면 여기서 정의한 언어적 의미에서 독일 철학은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니콜라우스 쿠자누스를 도저히 건너뛸수 없었다.
  사람들은 만약 우리가 언어적 기준 대신 영토적이거나 민족적 기준을 근저에 놓는다면 문제가 사라질 거라고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쿠자누스와 라이프니츠가 신성로마제국의 영토 안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독일어가 그들의 모국어였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칸트가 본래의 프로이센이 속하지 않았던 신성로마제국의 영토를 결코 밟아본 적이 없었다는 점을 전적으로 도외시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기준에 대해서는 그것이 인위적 경계를 긋고 있다는 반론을 반복할 수 있다. 국가를 포괄하는 공통된 학문어가 존재하는 한 정치적 형성물에 따른 경계 긋기는 대단히 자의적이다. 독일 철학자들을 결합해주고 또 사람들이 독일 정신의 개념을 추구할 때 염두에 두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추정은 어떤 인과적 메커니즘이 이 정신의 주창자들을 결합할 때에만 처음부터 잘못이 아니거니와, 그러한 것은 언어에 의해, 그것도 철학에서는 모국어가 아니라 학문어에 의해 가능해지는 특별히 집중적인 수용이며 아울러 계속해서 그러하다. 존재론적으로 일차적인 것은 민족이 아니라 개인과 그들의 (사실상 종종 사회적으로 공유한) 속성이다. 오로지 공동의 언어적, 종교적, 정치적 지배 같은 사회적으로 공유한 속성의 증대에 근거해서만 민족 같은 어떤 것을 형성할 수 있으며, 또는 그것들이 쇠퇴할 경우 다시 해소될 수 있다.
  우리는 독일의 역사를 1871년의 독일 통일에서 시작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1800년 이래로 강력한 독일 국민의식이 형성됨으로써 많은 이들이 공동의 국가를 열망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식은 한편으론 이웃 나라들의 발전에 의해 환기되었고, 다른 한편으론 가령 1760년 이래로 독일어권 문화가 그것을 다른 유럽 문화와 구별해주는 길을 발견했다고 하는 느낌을 표현했다. 이 새로운 길은 독일 역사의 이전 시기를 다시 수용함으로써 생겨난 게 아니었다. 독일 중세나 심지어 초기 게르만에 대한 포괄적 관심은 19세기에야 비로소 이뤄졌다.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1832)는 중고지 독일어(mittelhochdeutsche) 문학보다 그리스, 라틴,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 문학에 대해 서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잘 알았다. 아니, 그는 엄청나고도 천부적인 언어적 재능에도 불구하고 중고지 독일어 읽기를 배우는 수고를 무시했다. 독일 정신이 존재한다면, 우리는 도발적으로 그것이 1750년 이후에야 비로소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다. 비록 그것이 그 이전 것 위에서, 특히 루터교 위에서 구축되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비록 루터교가 종교적인 것을 중세에는 알려지지 않은 방식으로 국민적인 것과 결합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일차적으로는 종교적 운동이며 단지 이차적으로만 국민적 운동이었다. 독일 정신과 관련해 여기서 주장하는 연대는 또한 외부적 관점에서도 타당하다. 19세기 초 이후에야 비로소(1813년 독일에 관한 스탈 부인의 유명한 책이 출간되었다) 유럽은 단지 중세의 숭고한 유물인 신성로마제국의 전통적 담지자로서 독일 민족에 대해서가 아니라, 특수하게 독일적인 문화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독일이 프랑스, 에스파냐 또는 영국의 양식에 따른 근대 국민국가로 부상하는 것을 그토록 어렵게 만든 것은 특히 신성로마제국의 담지자라는 그러한 영예로운 특수 역할이었다. 독일은 제국의 붕괴에 이르기까지 유럽의 다른 커다란 국가들과 전적으로 동일하게 정치적이었다. 유럽연합의 시민인 우리가 오늘날 국민국가의 시대보다 더 많은 존경의 눈길을 지니고 바라보는 제국의 그리스도교-보편주의적 기획은 독일이 가령 프랑스나 영국보다 더 강력하게 과거에 사로잡히는 동시에 유토피아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뒷받침했다.
  만약 우리가 세계 발전의 정치적이고 문화적인 중심이 2500년이 지난 후 유럽으로부터 결정적으로 옮아가고 있는 것을 목격하고 있는 21세기 초에 지난 천년을 되돌아본다면, 아주 단순하게 말해서 유럽의 커다란 국민들 가운데 독일이 일정한 정신적 헤게모니를 행사한 마지막 국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중세 전성기에는 이탈리아와 프랑스가 유럽의 주도적 문화였다. 16세기에는 에스파냐가 지도적인 힘이었다. 17세기에는 우위가 프랑스로 넘어갔으며, 프랑스는 물론 18세기에 영국에 그 자리를 내주어야만 했다. (네덜란드는 17세기에 중요한 조역을 담당했다.) 각각의 국민 문학에서 정점으로 여겨지는 다른 유럽 국민의 저술가들은 단테처럼 중세에서나 카몽이스, 셰익스피어, 세르반테스처럼 근세 초기에서 유래한다. 그에 반해 독일은 16세기에 극문학에서는 한스 작스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으며, 1800년경에야 비로소 문학적 걸작들을 산출했다. (오직 러시아만이 그보다 더 늦게 따라왔다.) 독일 문화의 역사는 최소한 문학과 철학에서는 가장 뒤늦은 서유럽 문화의 역사다—조형예술에서는 틸만 리멘슈나이더와 알브레히트 뒤러가 1500년경 최상의 것을 성취했으며, 하인리히 쉬츠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는 17세기와 18세기 초 독일 음악에 세계적 가치를 가져다주었다. 그런데 빛나는 문학적 성취와 철학적 성취의 동시성에 고전 독일 철학의 특수한 매력을 위한 근거 가운데 하나가 놓여 있다. 이 철학은 그 시기의 다른 유럽 철학들과 마찬가지로 근대 과학과 계몽의 문제 지평을 전제한다. 그러나 그것은 서방의 이웃 나라들에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본원적 위대함을 지닌 문학의 형성과 동일한 시점에 전개된다. 처음에 인용한, 작가와 사상가의 민족으로서 독일인이라는 널리 회자되는 말은 물론 독일인의 높은 교양 수준을 일반적으로 특징짓기 위해 19세기에야 비로소 만들어졌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그 말이 철학적 발전과 문학적 발전의 밀접한 결합을, 즉 이러한 형식으로는 이전에 오직 그리스에서만 존재했고 헤겔과 셸링 그리고 횔덜린32의 청년기 우정이 본보기로 보여주는 그러한 결합을 지시한다고도 이해할 수 있다.
  더 이상 유럽의 것이 아닐 천년의 첫머리에서도 어째서 독일 철학사의 새로운 이야기가 의미 있는지에 대한 본래적 근거는 오로지 그리스인들의 그것만이 능가할 수 있는 이 철학적 전통의 비상한 질이다. 물론 이는 강력하지만 거친 가치 판단이므로 독자는 주의해야 할 것이다. 즉 독자는 이 책에서 독일 철학사에 대해 많은 것을 발견하겠지만, 반은 에세이고 반은 역사학인 이 책은 독일 철학을 의식적으로 그 정점으로서 독일 관념론에 비추어 해석하며, 불가피하게 지금 이 저자의 철학에 의해 각인되어 있다. 모든 역사학자는 선택해야만 하거니와, 내 두 번째 선택 기준은 사실상 철학의 질이다. 여기서 완전성은 결코 추구하지 않았다. 나는 위대한 것들에 집중하고자 하며, 그저 자신의 시대에서만 영향력이 컸던 학교 철학자들을 무시하고자 한다. 호라티우스가 시인들에 관해 말하는 것, 즉 사람들도 신들도 그들에게 평범하기를 허락하지 않았다는 것은 좀더 높은 수준으로 철학자들에게 적용할 수 있다. 게다가 오로지 고전적 사상가들만이 세대를 포괄하는 독일 문화를 형성했다. 여기서는 오로지 중요한 통찰을 획득했거나 최소한 독일 문화의 특성에 빛을 비추어 그들이 없다면 독일 문화의 발전 과정이 그럼직할 수 없는 사상가들만 다루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이 한 철학자의 중요성을 이루는가? 철학은 진리와 관계하며, 따라서 무조건적으로 우리는 한 철학자가 처음으로 일정한 진리를 인식했을 때 그에게 높은 지위를 돌린다. 그러나 동시에 철학은 아주 복잡한 시도이고 그 속의 진리는 무언가 아주 다층적인 것이므로 우리는 한 철학자가 물론 나중에 잘못된 것으로서 밝혀졌지만 오직 바로 그것에 관여하고자 한 그의 용기 덕분에 그렇게 밝혀진 사상을 끝까지 사유했을 때에도 그를 중요한 철학자로 인정해야 한다. 현상의 발굴, 자기 시대를 개념화하는 능력, 철학적 타당성 요구에 대한 반성, 개념 형성의 섬세함, 논증 분석의 정확함, 학문의 성과에서 본질적인 것에 대한 간취, 현실의 다양한 영역 간의 다리 놓기, 짜임새 있고 많은 경우 문학적으로도 빛나는 텍스트의 저술은 그 모두가 오로지 드물게만 통합되어 나타나는 철학적 덕목이다. 정의(Gerechtigkeit)는 위대함을 많은 경우 방법적으로나 내용적으로 서로 정반대인 두 사상가에 대해서도 인정할 것을 명령한다.
  그러나 가치 판단은 불가피하게 주관적이지 않은가? 그런데 이러한 확신은 그 자체가 나중에야 비로소 형성된 하나의 철학적 입장이다. 최소한 독자는 이 책의 끝에서 어떻게 그러한 확신에 도달했으며, 왜 그것이 자명하지 않은지 알게 될 것이다. 그러나 독자가 저자의 주도적인 인식과 관심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한다면, 그런 독자에 대해서는 그것이 철저히 개인적인 것임을 고백해야 할 것이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나고 자란 나는 독일어를 외국어로 배웠으며 독일의 언어, 문학, 철학 그리고 정신과학에 대한 열광적인 습득은 내가 루터교 종교 교육을 향유한 청소년기의 대부분을 채웠다. 10여 년 전 이래로 나는 미국인들 사이에서 한국인과 결혼해 살며 미국의 유수한 가톨릭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독일에 대한 나의 눈길은 더 이상 내부적인 것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물음, 즉 어떤 요인이 독일 철학을 인류사에서 두 개의 가장 매혹적인 철학 중 하나로 떠오를 수 있도록 했는가 그리고 이러한 철학적 전통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1933∼1945년의 도덕적-정치적 대재앙이 생겨날 수 있었는가 하는 것을 파악하고자 하는 외국인의 그것과 마찬가지다.
  이 책은 나의 아버지 요한네스 회슬레와 내 친구들인 칼 아메릭스, 롤런드 갈레 그리고 특히 노터데임 고등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지내는 동안 비판적으로 읽어준 케어스텐 더트에게 엄청난 도움을 받았다. 그것에 대해 여기서도 그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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