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반올림’을 만난 가족들

“제가 백혈병에 걸렸다는 말을 듣고 많이 울었어요. 그때는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민머리에 앙상한 여자 아이가 말한다. 스물두 살이라는 제 나이보다 한참이나 어려 보이던 유미는 몇 달 후, 죽었다. 

열아홉 살 유미는 일기를 썼다. 대학수학능력시험 날이었다. 유미는 시험을 보러 가지 않았다. 대신 기숙사 침대에 엎드려 일기를 썼다. 회사에 입사하던 날, 유미는 기숙사 방에 침대가 있다며 좋아했다. 시골집 유미의 방에는 침대가 없었다. 재래식 화장실을 쓰는 고향 집에서 회사가 내준 아파트형 기숙사로 짐을 옮기며 유미는 자신이 출세했다고 믿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것이 착각임을 깨달았다.

입사 초반엔 퇴사하고 싶단 생각을 정말 많이 하면서 울었다. 만날 울고 엄마한테도 퇴사하고 싶다면서 계속 울었다. 그러면서도 엄마 때문에 퇴사하지 못하고 참고 일했다. 차라리 친구들처럼 대학이나 갈걸. 싫은데도 참고 일하는 건 엄마한테 미안해서이다. 엄마가 대학 가라고 했는데 끝까지 우겨서 이 회사 왔는데, 엄마한테 미안해서 퇴사 못하겠다. 슬픈 책이라도 읽고 아주 펑펑 울고 싶다.(2003년 유미의 일기)

수원은 대도시다. 바다 냄새 나는 고향 속초와 달리 사람도, 놀 곳도 많았다. 오프 날이 되면 유미는 회사 동기들과 시내에 나갔다. 스무 살 여자아이들은 CGV 영화관, 이마트, 피자헛을 돌아다녔다. 때로는 피시방에 갔다. 보안을 이유로 기숙사 안에서 인터넷을 쓰지 못하게 해 유미는 투덜거리며 나가곤 했다. 가수 ‘신화’ 소식도 궁금했고 친구들의 싸이월드 미니홈피도 들러야 했다. 그렇게 회사 밖을 맴돌았다.
  기숙사로 돌아오면 선배와 동기 들이 곤한 얼굴로 침대에 누워 자고 있었다. 그네들을 깨우지 않으려고 유미는 까치발로 걸었다. 다들 겨우 든 잠이었다. 교대근무로 낮밤이 바뀌어 자는 것도 일이었다. Day(오전근무), Swing(오후근무), G. Y.(밤근무), 서로 출근하는 시간이 다르니 자는 시간도 달랐다.) 출근 준비하는 룸메이트 때문에 겨우 든 잠을 깨면 왠지 서러워 눈물이 났다.
  몇 날 며칠 계속되는 12시간 맞교대, 휴일도 가리지 않는 잔업, 물량달성을 외치는 상사들 앞에서 열아홉 살 신입사원 유미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은 자두는 것뿐이었다.
  잠이 오지 않는 날에 유미는 침대에 엎드려 다이어리를 펼쳤다. 그곳에 일기를 썼다. “참고 또 참았다. 내가 막내니까. 엔지니어가 뭐라고 했을 때는 정말 짜증나서 눈물이 났다.” 작은 실수에도 엔지니어는 윽박을 질렀다. 기계가 멈추면 속이 타들어가는 것은 정작 오퍼레이터(생산직) 자신인데 말이다.
  입사 초, 생소한 설비와 외국어로 된 공정 이름, 온갖 화학식 앞에서 유미는 기가 죽었다. 낯선 일이니 실수가 많았다. 선배들은 호되게 몰아쳤다. 그래야 일을 빨리 배운다고 했다. 공장은 빠르게 돌아갔다. 그 와중에 일이 더딘 신입사원은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았다. 모든 것이 실수 없이 신속하게 돌아가야 하는 그곳에서, 유미는 자신이 바보처럼 여겨졌다.
  ‘엄마 말대로 공부를 할걸 그랬어.’ 유미는 후회했다. 그러나 곧 고개를 저었다. 다이어리 장을 넘겨 그곳에 월급을 어떻게 쓸지 적었다. 엄마에게 돈을 보낼 때는 안도가 됐다. 아빠는 이번에 집을 새로 옮길 거라고 했다. 지금 집은 낡았다. 유미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가족들이 살던 집이었다. 할머니는 바깥에 있는 화장실에 갈 때마다 고생스러워했다. 유미는 집에 갈 때 가져갈 할머니 선물을 다이어리에 적었다. 매달 적금도 넣어야 했다. 내년 봄에 친구랑 쌍꺼풀 수술 상담도 받으러 가기로 했다. 사고 싶은 것도, 하고 싶은 것도 많았다. 2, 3년만 일해서 돈 모아 대학이라도 갈까? 유미의 계획은 끝이 없었다. 옆 침대 룸메이트가 뒤척였다. 유미는 움직임을 멈췄다. 슬슬 졸음이 밀려왔다. 창문을 닫고 자야 하는데…… 눈이 감겼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서 옅은 화학약품 냄새가 났다. 회사 냄새였다. 싫었다.

  “차라리 그렇게 빨리 간 게 다행이에요. 너무 힘든 병이야. 너무 고생을 해.”
  황상기 씨가 잡은 운전대 아래로, 딸이 사준 열쇠고리 인형이 흔들거린다.
  “애가 음식을 삼키지를 못해. 새 모이만큼, 그냥 먹는 흉내만 내. 항암치료 받으니까 입안이 다 헐어서 음식을 입에 넣을 수가 없어. 먹지 못해 삐쩍 말라서 몸무게가 20킬로그램밖에 안 됐어요.”
  그는 뜸을 들이다 말한다.
  “우리 유미는 굶어 죽은 거야.”
  끝없이 반복되는 항암치료와 방사선치료를 지켜봤다. 서둘러 간 것이 다행이라고 모진 소리를 하게 하는 시간이었다. 병실에 누운 딸을 보면 가슴에서 울컥 뜨거운 것이 치솟아 올랐다. 그럴 때면 유미의 회사에 전화를 걸었다. 욕을 했다.
  그는 유미의 병이 회사로부터 온 것이라 확신했다. 회사가 아니고는 그 무서운 병이 어디서 온단 말인가. 유미는 열아홉에 반도체회사에 들어갔다. 회사에 들어간 지 2년 만에 딸아이는 병이 들어 돌아왔다. 친척 누구도 백혈병은커녕 암에 걸린 전력이 없었다. 백혈병은 10만 명 중 2, 3명이 걸린다는 희귀병이라고 했다. 아이는 겨우 스물한 살이었다. 한창 젊고 건강할 나이였다.
몇 해 전 유미의 선임이 유산을 해서 회사를 그만둔다고 했다. 몸이 약했나 보네, 그렇게 넘겼다. 유미가 병에 걸려 집으로 돌아왔다. 왜 우리한테 이런 일이 일어난 거죠, 유미 엄마는 말했다. 얼마 후, 유미와 2인 1조로 일했던 선배가 백혈병에 걸렸다. 이상했다. 유미의 병도 백혈병이었다. 후회는 분노로 변했다.
  화를 내는 그에게 회사는 말했다.
  “산재라니요. 증거 있으세요? 큰 회사를 상대로 싸우려면 싸워보시든가요.”
  답답한 마음에 그는 국회의원을 찾아갔다. 지방 방송국도 찾았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다. 내 딸이 직업병에 걸렸다고 하니, 다들 말했다. “증거를 가져오세요.” 그는 울었다. “힘없는 개인이 증거를 어떻게 찾아요?”
  규모가 있는 언론사가 자신의 말을 믿어주지 않자 그는 아픈 딸에게 더듬더듬 인터넷을 배웠다. 인터넷으로 작은 언론사를 찾을 생각이었다. 서툴게 마우스를 쥐고 검색을 했다. 전화번호가 보이기에 무작정 전화를 걸었다.
  “내 딸이 백혈병에 걸렸어요. 삼성반도체에서 일을 했는데…… 그런데 병에 걸린 게 내 딸만이 아니에요.”
  그렇게 월간 《말》지의 윤보중 기자와 연락이 됐다. 비슷한 경로로 《수원시민신문》의 김삼석 기자와도 만나게 됐다. 유미의 일이 세상에 알려졌다. 그러나 세상은 유미의 일에 관심이 없었다. 좀 더 많은 기사가 나오면 내 딸이 억울하다는 걸 사람들이 알게 될까? 그러는 사이 회복돼가던 유미의 병세가 갑자기 악화됐다.
  2007년 3월 6일, 유미가 고열에 시달렸다. 이제 어떤 해열제도 듣지 않았다. 내성이 생긴 터였다. 병원에서 돌아오는 길, 유미는 몸이 뜨겁다 하다 차다 하다 했다. 가쁜 숨을 쉬었다. 그러고 더는 숨을 쉬지 않았다. 그는 차를 갓길에 세웠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내 딸이 죽었다.
  요즘도 그는 유미가 누웠던 차 뒷좌석을 문득 돌아보곤 한다. 택시를 모는 그는 그 자리에 유미만 한 아이를 태우고, 유미가 살아 있다면 그만할 나이의 아가씨들을 태운다. 처음에는 그냥 생각을 말자 했다.
  그러나 잊지 못하는 것이, 딸에게 한 마지막 약속이다.
  “유미야, 너 병 걸린 이유, 누구 때문인지 아빠가 꼭 밝힐게. 그 억울한 거 꼭 풀어줄게.”
  황상기 씨는 유미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사회·인권단체들을 만났다. 아픈 유미를 보며 무작정 언론사에 전화를 걸던 때와 같은 심정이었다. 유미의 사연에 관심을 갖는 단체들이 있었다. 반도체산업이 알려진 대로 청정산업이나 굴뚝 없는 공장이 아니라는 인식이 차츰 사회단체들에 생겨났다. 그렇게 반도체산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삶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2007년 반도체 노동자 직업병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이 만들어진다.

황유미. 1985년생, 여성. 2003년 삼성반도체 기흥공장 입사, 3라인 디퓨전 공정 세척 업무, 1년 8개월간 근무. 2005년 6월 백혈병 발병, 2007년 백혈병으로 사망. 당시 23세
 


“제수씨, 요즘 회사에 백혈병 얘기가 돌고 있어요. 이게 회사에서 일하다가 걸릴 수도 있는 병이라고 하네요. 민웅이도 그 병이었잖아요. 인터넷에서 찾을 수 있다는데 혹시 모르니까 한번 제수씨가 알아보세요.”
  남편 선배의 전화였다. 이 사람이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백혈병이 회사 때문에 걸렸다고? 애정은 어떤 대꾸도 못 했다. 생각도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홀로 아이 둘을 키우는 살림이었다. 생각은커녕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도 버거웠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인생은 달라졌다. 다른 데 관심을 두기에는 삶이 녹록치 않았다.
  그러나 남편 선배의 전화를 받은 후 자꾸 컴퓨터에 눈이 갔다. 보름 정도 지났을 때 애정은 컴퓨터 앞에 앉았다. ‘삼성반도체 백혈병’을 검색하니 ‘황유미’라는 사람의 기사를 볼 수 있었다. 황유미라는 젊은 여자가 기흥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죽었다고 했다. 남편과 같은 회사, 같은 병이었다.
  그날 그녀는 잠들지 못하고 뒤척였다.
  ‘말도 안 돼. 삼성이 어떻게 우리한테 그럴 수 있겠어.’
  삼성은 그녀가 열아홉 살 때부터 일해온 회사였다. 그곳에서 남편을 만났다. 삼성은 그녀에게 지금의 가족을 만들어준 울타리 같은 존재였다.
  ‘그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며 사기 치는 게 아닐까? 나 같은 사람 이용해서 돈이라도 뜯어내는 거 아니냐고.’
  애정은 복잡한 얼굴로 잠든 아이들을 내려다봤다. 아빠 얼굴을 모르는 두 아이 희준과 예인. 말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게 되면서 희준이는 부쩍 아빠를 찾았다. 안 되겠다 싶어, 한 날은 희준이에게 아빠를 보러 가자고 했다. 아이는 몹시 좋아했다. 희준이를 데리고 간 곳은 남편 유골이 있는 납골당이었다. 납골당에 도착한 아이는 엄마 눈치를 봤다.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납골당 곳곳을 뛰어다니다가 아이는 결국 물었다.
  “아빠한테는 언제 가요?”
  왜 죽었을까. 그저 이상하다 생각했다. 건강하던 사람이 왜 갑자기 그랬을까. 내 운이 나쁘다고 생각했다. 왜 하필 나냐고 그랬던 적이 있다. 왜 그리 빠르게 세상을 떠났는지 알 수 없었다. 저 사람들을 만나보면 이유라도 알 수 있지 않을까. 아빠를 잃은 아이들이 적어도 아빠가 죽은 이유는 알아야 하지 않을까.
  ‘그냥 만나만 보면 되잖아. 나는 이제 두 아이의 엄마라고. 어린애가 아니야. 사실인지 아닌지, 그 사람들이 거짓말을 하는 건지 아닌지 이제 알 수 있는 어른이야.’
  아침이 오고, 그녀는 반올림에 전화를 걸었다.

황민웅. 1974년생, 남성. 1997년 6월 삼성반도체 기흥공장 입사, 1라인 백랩(연마) 및 5라인 CMP 설비 엔지니어, 7년 4개월간 근무. 2005년 백혈병으로 사망. 당시 32세
정애정. 35세, 여성. 삼성반도체 기흥공장 5라인에서 11년간 근무. 고 황민웅의 아내

 

부산 서면역을 지나던 중이었다. 친구가 희진의 팔을 잡아 세웠다.
  “저기서 뭐 하네. 삼성? 불매운동 같은 거 하나 봐.”
  희진은 삼성이라는 말에 고개를 홱 돌렸다. 역사 앞에서 사람들이 서명을 받고 있었다. 등 뒤로 걸린 현수막에 삼성 로고가 크게 그려져 있었다.
  “가자. 저런 건 서명을 해줘야 해.”
  희진은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마음과 달리 발길은 조심스러웠다. 다리가 아팠다. 아픈 건 다리만이 아니었다. 눈은 침침하고 조금만 무리 해도 팔이 저리고 말을 더듬었다. 이게 다 삼성 때문이었다. 삼성 불매운동을 한다면 몇 번이라도 서명을 해줄 테다. 그녀의 작은 복수였다.
  4년을 일했다. ‘뼈 빠지게’라는 말이 어떤 건지 알게 될 만큼 일했다. 그리고 몸에 이상이 왔다. 다발 경화증.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병이었다. 워낙 희귀병이라 원인도 알려진 바가 없었다. 스트레스가 주원인일 거라고만 했다. 삼성에서 일하면서 스트레스는 모자라지 않을 만큼 받았다. 돌이켜봐도 지긋지긋했다.
  하루에 적어도 500개 이상의 LCD 패널(LCD를 완성하기 전 형태)을 검사했다. 하루에 12시간을 부려 먹을 때도 많았다. 불량 하나에도 사람 잡아먹을 듯 굴었다.
  의사는 스트레스를 받지 말라고 했다. 스트레스를 받거나 피곤해지면 재발이 된다고 했다. 재발은 장애 있는 몸으로 평생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었다. 한 번 재발이 돼 오른쪽 시력을 잃었다. 끔직했다. 병상에 누워 있는 내내 울었다. 다시는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스트레스를 조금도 주지 않는 회사가 어디 있을까. 게다가 자신처럼 몸이 불편한 사람을 받아주는 회사가 과연 있을까. ‘평생 벌이를 할 수 없는 걸까’ 하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생각을 말아야지. 스트레스 받지 말아야지. 헛웃음을 치는 희진에게 앞서 가판으로 간 친구가 되돌아왔다.
  “불매운동이 아닌데?”
  그제야 삼성 로고 옆에 걸린 현수막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삼성전자·반도체에 근무하다가 예상치 못한 질환을 겪으신 분들의 제보를 기다립니다.”

이희진. 1984년생, 여성. 2002년 삼성전자 LCD사업부 천안공장 입사, 4년 3개월간 LCD 패널 화질·색상 패턴 검사 업무. 2008년 다발 경화증 확진 

 

희수 씨는 삼성반도체에서 일한 사람들이 백혈병에 걸렸다는 시사 프로그램을 봤다. 내 아내도 이 일과 관련이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아내는 삼성반도체에서 6년을 일했다. 그는 담당 간호사를 붙잡고 물었다.
  “아내도 직업병일 가능성이 있을까요?”
  간호사는 말했다.
  “저 사람들은 백혈병인 혈액 쪽 암이고요, 이윤정 씨는 뇌 쪽이니 관계가 없어요.”
아내는 뇌암에 걸렸다. 의사는 시한부 1년을 선고했고, 아내는 머리를 열고 수술을 받았다. 삼성에서 일한 6년을 빼고는 다른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는 아내였다. 삼성이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병에 걸렸다는 거지? 멀어지는 간호사를 보며 그는 생각했다. 정말 아무 상관이 없을까?

이윤정. 1980년생, 여성. 1997년 삼성전자 반도체 온양공장 입사, 6년간 고온 테스트 업무. 2003년 퇴사. 2010년 뇌암(악성 뇌종양) 진단 

 

“아버지, 억울해요.”
  아들 진혁은 눈을 감기 전 말했다. 눈을 감은 아들의 이목구비가 반듯했다. 백혈병은 사람 못쓰게 만드는 병이라는데 얼굴 하나는 곱게 갔다. 그나마 위안이었다. 그는 잠든 것처럼 평온한 아이의 얼굴을 우두커니 바라봤다.
  아이는 정말 착했다. 속 썩인 일이 어쩌면 그렇게 하나도 없었는지 모를 정도였다. 그래, 그리 수더분했으니 힘들다 내색도 없이 일만 하다 갔겠지. 12시간 잔업을 군말 없이 했다. 어차피 10시간을 일하나 12시간을 일하나 잠잘 시간밖에 없는 건 똑같다면서 돈이라도 더 벌겠다고 했다. 아들이 젊은 나이에 한 일이라고는 돈 버는 것밖에 없었다. 그러니 ‘억울했다’.
  그도 억울했다. 건강했던 아들이다. 아들은 일요일이면 조기축구도 빠지지 않았다. 회사 봉사활동에도 매달 나가는 눈치였다. 운동 좋아하고 활동적이던 아이. 덩치도 좋고 건강만은 자신하던 아이. 다 키워놓은 아들이, 자신의 전부였던 아들이 사라졌다.
  1시간이고 2시간이고 둘러앉아 떠들썩하던 밥상 풍경은 사라졌다. 그와 늙은 아내가 묵묵히 밥상을 지켰다. 착한 아들은 마지막까지 부모 걱정을 하다 갔다. 친구도 많고 활달한 아버지는 안심이 되지만, 어머니가 크게 속앓이를 할까 걱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아들의 말은 틀렸다. 그는 괜찮지 않았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돈도 친구도 허무했다. 외아들 앞세운 부모가 무얼 위해 산다는 말인가.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며 그는 이가 몽땅 빠져버렸지만 아픈 줄도 몰랐다. 모든 것이 헝클어졌다.
  아들의 죽음 앞에 산재신청을 할 생각도 잠시 했다. 젊은이들이 흔히 걸리지 않는 병이었다. 전자회사에서 일을 했으니 약품사용을 안 했을 리 없었다. 그도 예전에 중공업에서 일했다. 냄새만 맡아도 토악질이 날 정도로 독한 물질들을 생산 현장에서 얼마나 빈번하게 쓰는지 그때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산재신청을 하지 않았다. 순순히 산재를 인정할 기업이 아니다. 숨넘어가는 아들에게서 사직서를 받아 간 무서운 곳이었다. 노부부에게 싸울 기력 따윈 없었다. 그는 아내에게 말했다.
  “그냥 이렇게 있는 거 다 쓸 때까지만 살자.”
  그러던 어느 날, 반올림이라는 단체가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들같이 젊은 나이에 병에 걸린 이들이 많다고 했다. 마침 삼성이 삼성일반노조 위원장을 허위사실 유포죄로 고소한 사건이 있었다. 삼성SDI에 다니다가 백혈병에 걸린 사람이 있다고 말한 것이 고소의 이유였다. 삼성SDI에서 백혈병으로 죽은 사람이 없다고? 그럼 내 아들은? 삼성SDI는 아들이 다닌 회사였다. 그도 증인이 필요하면 나서주자 했다. 아들 죽인 회사가 더럽게 구는 꼴을 더는 볼 수 없었다.

박진혁. 1978년생, 남성. 2004년 삼성SDI 언양공장의 부품세척 하청업체인 (주)KT&G 입사. 급성 림프구성 백혈병으로 2005년 사망. 당시 28세 

 

유미 씨의 아버지, 황상기 씨가 처음 삼성을 찾았을 때 홍보그룹 관계자는 말했다. 겨우 6명이 백혈병에 걸렸을 뿐이라고. 몇 만 명이 근무하는 회사에서 6명이면, 그것은 그저 우연이라고.6) 이제 황상기 씨는 말한다.
  “거짓말만 해요. 처음에는 나한테 여섯 명밖에 없다고 했어요. 자 이제 봐요, 몇 명인지. 또 이야기해보라 그래요, 어떤 거짓말을 하는지.”
  그의 딸이 세상을 떠나고 4년이 지난 지금, 삼성전자에서 일하다가 병에 걸렸다고 반올림에 제보를 한 이는 130명을 넘어섰다. 사망자는 2011년 현재 50여 명이다. 제보되지 않은 죽음이 더 있을 것이다. 딸의 죽음을 산재라 의심했던 황상기 씨는 생각을 바꿨다.
  산재가 아니다.
  “정말 그들이 몰랐을까요? 거기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무슨 약품을 사용했는지, 삼성은 몰랐을까요? 회사가 알았다면, 알고도 그대로 두었다면 이건 산재가 아니에요.”
  산재일 리가 없다.
  “살인이에요, 살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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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 2014-08-31 00: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언제나 힘없고 착한 분들이 피해를 보는군요...안타깝네요...뭐라 말할수가 없습니다..작업장의 유해성을 밝혀낼 사람이 있을까요..? 안타깝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