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좌파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그 논쟁을 전반적으로 긍정 평가하면서도 무언가 중요한 것이 빠졌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그건 바로 한국적 특수성이다. 최근 논의되고 있는 강남좌파론은 이 점을 소홀히 한 채 강남좌파를 미국의 ‘리무진 진보주의자(limousine liberals)’ 모델로 해석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 나름의 의미는 있겠다고 인정은 하면서도, 어딘가 좀 공허하다는 느낌이 드는 건 어인 이유에서일까? 그 점에 대해선 <제1장 강남좌파는 강남에 사는 좌파인가?: 강남좌파 논쟁은 엘리트 논쟁>에서 자세히 밝히겠지만, 그로 인한 문제는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와 ‘소통(疏通)’에 대한 고민의 결여다.

 
   

 

 

 

아, 강준만 선생이 오랜만에 본격 정치비평으로 돌아왔다. 이제서야 정치의 계절을 마주하는 기분이다. 얼마 전 불거진 강남좌파 논란, 사실 강준만은 5년 전 지면을 통해 강남좌파 현상의 명암을 분석한 적이 있다. 5년이 지나서야 벌어진 논란은 어떤 맥락에서, 어떤 문제를 담고 있을까. 하나의 키워드에서 시작한 논의는 강남좌파의 아홉 가지 유형 분석으로 이어지며, 유시민, 손학규, 박근혜, 오세훈, 문재인 등 차기 대권 주자에 대한 인물비평을 함께 담아낸다. 독자로서 두 가지 내용 모두 빨리 읽고 싶은 마음이다. "모든 정치인은 강남좌파"라는 일갈로 시작하는 머리말을 공개한다. 책은 내일(7월 21일) 출간 예정이다.

 

모든 정치인은 강남좌파다


강남좌파의 명암(明暗)

강남좌파는 보수 진영이 운동권 출신 486세대(40대, 80년대 학번, 60년대생) 진보 인사들을 꼬집어 쓰던 용어다. 정치적, 이념적으론 좌파지만 행동은 '강남 주민스럽다'는, 일견 부정적 뉘앙스를 풍기는 말이다. 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2006년 5월 <인물과 사상>에서 강남좌파를 "생각은 좌파적이지만 생활 수준은 강남 사람 못지않은 이들"이라고 정의하면서 "보수언론이 노무현 정권을 공격하려는 혐의로 읽히지만 본격적인 논의가 필요하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강남좌파를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는 시각에 무리가 있다는 지적이자 강남좌파를 공론의 장으로 끄집어낸 첫 시도였다. 양홍주, <'노회찬 첼로 연주 사진' 강남좌파 전파에 일조: 강남좌파 형성 과정과 중심 인물들>, [한국일보], 2011년 2월 26일.

2011년 2월 [한국일보]가 게재한 <강남 좌파, 누구냐 넌!>이라는 제목의 특집 기사 중 일부다. 위 기사에 지적된 바와 같이, 나는 [인물과 사상] 2006년 5월호에 쓴 <강남 좌파: ‘엘리트 순환’의 수호신인가?>라는 제목의 글에서 강남좌파 현상에 주목하면서 그 명암(明暗)을 3가지씩 제시한 바 있다. 그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우선 긍정론이다.
  첫째, 상류층 사람이 진보적 가치를 역설하는 건 하층계급에 큰 힘이 된다. 상류층 사람이 점하고 있는 위치의 파워 덕분이다.
  둘째, 갈등의 양극화를 막는 데에 도움이 된다. 모든 상층계급은 보수, 모든 하층계급은 진보라면 갈등이 살벌해지겠지만, 상층에도 진보가 있고 하층에도 보수가 있다는 건 양쪽의 충돌 예방에 도움이 된다.
  셋째, 상류층에 속하면서도 하층계급을 생각하는 마음이 고맙다. 그걸 위선으로 보겠다면, 이 세상에 위선 아닌 게 뭐가 있겠는가.
  다음은 부정론이다.
  첫째, 권력․금력까지 누리면서 양심과 정의의 수호자로 평가받는 이른바 ‘상징자본’까지 갖겠다는 건 지나치다. 빈털터리라도 세상을 향해 큰소리 치면서 사는 맛이라는 게 있는 법인데, 그런 ‘도덕적 우월감’까지 상류층이 누린다는 건 부당하다.
  둘째, 진보를 보다 많은 권력․금력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다. ‘강남 좌파’의 진보 프로그램은 하층계급의 절박함을 모르기 때문에 진정성이 결여돼 있으며, 상징적인 제스추어로 끝날 가능성이 높다.
  셋째, ‘강남 좌파’의 진보 프로그램은 말로만 강경한 속성이 있어 실천보다는 당위의 역설로 그칠 가능성이 높고, 오히려 해낼 수 있는 실천마저 어렵게 만들 수 있다. 
  자, 사정이 이와 같은데 무조건 ‘강남 좌파’를 탓할 수만 있겠는가? 각 인물별, 사안별로 구체적인 평가를 내리는 게 공정한 대응일 것 같다. 이론상으론 그렇다. 문제는 한국사회․한국인의 특수성이다. 현재 한국사회는 ‘정치혐오’를 넘어서 ‘정치저주’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정치를 비롯한 공적 영역에 대한 국민적 불신이 높다. 이런 상황에선 ‘강남 좌파’의 이론적 정당성이 인정받기 어렵다. 그건 마치 ‘국민정서’니 ‘위화감’이니 하는 단어들이 누구를 평가할 때에 이론적으론 부당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한국적 현실에선 정당하게 여겨지는 것과 같은 이치다. 2005년 11월 투명사회협약실천협의회가 여론조사기관 TNS에 의뢰해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일반인 응답자의 82.1%가 사회 지도층을 신뢰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는 걸 참고할 필요가 있겠다.
  ‘배부른 진보’가 일부러 배가 고픈 척 할 필요까진 없지만, 자신의 포만감을 과시하는 건 금물이다. 그리고 공적 영역을 향해서만 진보를 외쳐댈 게 아니라 자신의 사적 영역과 행태도 진보적 가치의 지배를 받게 해야 한다. 사회를 향해선 기부문화의 활성화가 필요하다고 외치면서 자기 봉급은 고스란히 저축하는 고위 공직자들을 그 누구도 알뜰하다곤 생각하지 않는다. 공적 영역에 대한 극도의 불신이 해소되는 날까진 과도기적 처방 차원에서라도 ‘강남 좌파’는 자신의 욕망을 통제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강남좌파는 엘리트에 관한 문제
위와 같은 내용의 글을 쓴 시점으로부터 5년여가 지난 지금, 강남좌파에 대한 논쟁이 뜨겁다. 그 논쟁을 전반적으로 긍정 평가하면서도 무언가 중요한 것이 빠졌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려웠다. 그건 바로 한국적 특수성이다. 최근 논의되고 있는 강남좌파론은 이 점을 소홀히 한 채 강남좌파를 미국의 ‘리무진 진보주의자(limousine liberals)’ 모델로 해석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 나름의 의미는 있겠다고 인정은 하면서도, 어딘가 좀 공허하다는 느낌이 드는 건 어인 이유에서일까? 그 점에 대해선 <제1장 강남좌파는 강남에 사는 좌파인가?: 강남좌파 논쟁은 엘리트 논쟁>에서 자세히 밝히겠지만, 그로 인한 문제는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와 ‘소통(疏通)’에 대한 고민의 결여다.
  5년전 내가 던진 “강남 좌파: ‘엘리트 순환’의 수호신인가?”라는 물음은 여전히 유효하다. 즉, 강남좌파는 좌우(左右)를 막론한 한국 엘리트의 본질과 맞닿은 문제라는 것이다. 강남좌파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제기하는 문제의 핵심은 ‘엘리트의 위선’이다. 강남좌파는 이념에 관한 문제라기보다는 엘리트에 관한 문제라는 인식의 전환이 있어야만 강남좌파의 관한 논의가 생산적일 수 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생각해보자. 좌우(左右)를 막론하고 리더십을 행사하는 정치 엘리트가 되기 위해선 학력·학벌에서부터 생활수준에 이르기까지 어느 정도 사회적 성공을 거두어야 하므로, 정치 영역에서 활동하는 모든 좌파는 강남 좌파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무조건 강남좌파 자체를 비판하는 건 좌파를 싸잡아 비판하겠다는 우파의 정치적 책략이라는 혐의를 피하기 어렵다.
  아니 우파라도 서민을 상대로 포퓰리즘(populism: 민중주의) 자세를 취하는 게 ‘정치의 문법’인 바, 우파 정치인에게도 강남좌파 요소가 농후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농후하다뿐인가. 우파는 강남좌파를 ‘위선의 화신’인 양 비난하면서 정치적 이익을 취하려고 하지만, 그들 역시 말로는 늘 국가와 민족이 잘 되게 하겠다는 이타적 자세를 취함으로써 사실상 강남좌파 행세를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모든 정치인은 강남좌파다”는 전제하에 우리 모두의 삶에 보탬이 될 진지하고 성실한 논의와 연구를 해보자. 강남좌파적 특성이 두드러지는 사람이나 세력이 있을 것이다. 그 장단점은 무엇인지 그 점이 갖는 사회적 함의는 무엇인지, 그런 걸 차분하게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그렇게 차분하게 생각해보는 걸 막는 또 하나의 장벽이 존재한다. 그건 바로 정치를 과도하게 ‘의인화(personification)·개인화(personalization)'하는 ‘인물 중심주의’다. 본문에서 자세히 논하겠지만, 나는 이것이야말로 한국정치가 당면한 최대의 과제라고 생각한다. 쉽게 설명해보자. 정치적으로 해결해야 할 우리 사회 각 분야의 주요 의제를 10가지만 뽑아보자. 예컨대, ①빈곤층 복지 강화, ②부유층 세율 인상, ③부동산 투기 근절, ④지역균형발전 추진, ⑤공정거래법 강화, ⑥병역 비리 척결, ⑦국가보안법 폐지, ⑧학벌주의 완화, ⑨전관예우 강력 억제, ⑩방송의 독립 등 10가지 의제에 대해 단순하게 찬반 표시를 해보자.
  이 10가지 의제에 대해 모두 찬성한 사람들이 있다고 가정해보자. 이들은 정치적으로 같은 편이 되거나 아니면 적어도 상호 우호적인 게 옳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예컨대, 노무현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서로 원수가 될 수도 있다. 아니 될 수도 있는 정도가 아니라 그게 지금 우리 사회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이다. 좌우(左右)로 편을 갈라 싸우는 사람들은 위 10대 의제에 대해서도 ‘10대 0’으로 갈라질까? 그렇지 않다. 생각을 같이 하는 점도 있다. 생각을 달리 하는 것보다는 같이 하는 것이 더 많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도 싸울 땐 원수처럼 싸운다.
  왜 그럴까? 정치, 특히 대선은 권력을 놓고 다투는 승자 독식게임이고, 그 승자는 바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의제나 이슈가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지지하는 사람이 중요하다. 그래서 위 10가지 의제에 대해 100% 생각이 같은 사람이라도 자신이 지지하는 정치인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면 원수처럼 싸워야만 한다. 그게 바로 우리 시대의 정치를 지배하는 게임의 법칙이며, 그 이데올로기가 바로 ‘인물 중심주의’다.


‘인물 중심주의’ 이분법의 재앙
우리 인간이 원래 이분법적인 동물이라는 점도 작용하는 걸까? 우리는 이론적으론 매사를 둘로 나눠서 보는 이분법이 무모하다는 걸 쉽게 인정하면서도 실제로는 늘 그런 이분법에 따라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선악(善惡)·흑백(黑白) 구도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인터넷 토론 문화를 보라. 중간은 없다. 내가 옳다고 믿더라도 나의 정당성이 7이면 저쪽에도 3의 정당성은 있다는 걸 전제로 해서 주장을 펴면 어느 정도의 소통이 가능하겠건만, 인터넷을 지배하는 건 늘 ‘10 대 0’의 게임이다. 나는 10이요 너는 0이라는 식의 ‘배설(排泄)’ 뿐이다. 배설이 소통을 대신하는 불통(不通)의 공간에선 같은 편의 속을 후련하게 만들어주는 ‘카타르시스’ 제공에 능한 사람들이 대표 논객으로 활약하기 마련이다.
  극단적인 이분법 악플에 능한 네티즌은 악한 사람일까?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일 가능성이 높다. 적(敵)에게 가혹한 사람일수록 친구에겐 잘하는 법이다. 적에 관대한 사람은 친구에게도 헌신하지 않는 법이다. 이는 정치의 기본 원리이기도 하다. 독일 법학자 카를 슈미트(Carl Schmitt, 1888~1985)는 <정치성의 정의>라는 책에서 정치성을 ‘친구와 적’을 구분하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마이클 딥딘(Michael Dibdin, 1947~2007)의 소설 <죽은 늪(Dead Lagoon)>에서 베네치아의 민족주의 선동가는 “진정한 적이 없다면 진정한 친구도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아닌 것을 증오하지 않는다면 우리 것도 사랑할 수 없다.”고 했다.   적에게 증오의 언어를 잘 퍼붓는 사람이 열정적이다 못해 광신적인 지지자들을 많이 거느릴 수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물론 우리만 그런 건 아니지만, 우리가 다른 나라들에 비해 인물 중심주의가 매우 심한 편인 건 분명하다. 예컨대, 2007년 2월 한국일보와 미디어리서치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한나라당 대선주자인 전 서울시장 이명박이나 전 대표 박근혜가 탈당해 신당을 만들어 독자 출마하더라도 지지자의 약 70%가 “계속 지지하겠다”고 답했다. 2007년 5월 조선일보 조사에선 이명박 지지자의 61.6%, 박근혜 지지자의 64.2%가 ‘계속 지지’를 밝혔다. 또 한나라당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가 2007년 4월 9일 실시한 여론조사에선 한나라당 지지자 가운데 71.2%가 당이 아닌 후보를 보고 투표하겠다고 응답했다.
  이건 무얼 말하는가? 한국은 ‘정당 민주주의’ 국가라기보다는 ‘지도자 민주주의’ 국가라는 걸 의미한다. 교과서적 원리와는 달리 한국의 정당 정치는 사실상의 인질 정치다. 정당 중심의 투표를 하는 유권자들도 엄밀하게 말하면 정당을 지지한다기보다는 불공정과 편파를 자행할 힘이 있는 집단에 표를 주는 것이다. 즉, 정부 인사․예산권의 지배력이나 접근권에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통령이나 힘 있는 몇몇 정치인만 움직이면 하루 아침에 뚝딱 만들 수 있는 게 바로 정당이다.
  2007년 5월 이기호는 “그저 감정으로 뭉친, 친목계나 진배없는 정당들. 문제는 그 정당들로 인해 전국민이 친목계화 되어간다는 점이다”고 주장했다. 한심한 정당들에 대한 분노엔 십분 공감하지만, 과연 정당의 친목계화가 전국민의 친목계화를 부른 걸까? 혹 그 반대는 아니었을까? 한나라당이 대선후보 경선 규칙 문제 때문에 한동안 분당 위기로 치달았던 것도 바로 인물 중심의 줄서기 때문이었으며, 이는 한국사회 전반에 널리 퍼져있는 관행이요 문화다.
  왜 그럴까? 오랜 세월 동안 정당은 포장마차나 천막과 다를 바 없다는 걸 체험한 학습효과도 적잖이 작용했겠지만, 그보다는 한국인 특유의 ‘인물 중심주의’ 문화가 더 큰 원인이 아닌가 싶다. 유력 정치인을 지지하는 각종 ‘사모(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클럽들의 과도한 전투성에 대해 우려하는 목소리가 사회적으로 왕성하게 터져 나올 법도 하건만, 언론과 정치평론가들이 ‘사모’ 클럽의 규모와 전투성을 해당 정치인의 대중성 수준으로 긍정 평가하는 이상한 일들을 하고 있는 것도 바로 그런 ‘인물 중심주의’ 문화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런 인물 중심주의 문화의 토양에선 이성적인 정치적 논의와 토론은 물론이고 소통 자체가 매우 어려워진다. 아니 거의 불가능해진다. 매사를 자신이 지지하는 인물에 대한 유·불리의 관점에서만 평가하기 때문이다. 소통의 재앙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이 시도할 강남좌파론도 그런 장벽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 노릇을 어찌 할 것인가? 답이 없다. 그런데 실은 그게 바로 이 책의 한 주제이기도 하다. ‘민주화 이후의 엘리트주의’는 ‘민주화 이전의 엘리트주의’와 무엇이 다른가? 이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그런 인물 중심주의에 대한 이야기도 본문에서 해보도록 하자.


‘편향성이 이익이 되는 장사’
정치에서 이분법적 대결구도는 이념에 바탕을 두고 있다. 아니 당사자들이 그렇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이 책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할 것이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여야와 각 진영의 열성 지지자들은 대선의 향방에 따라 이 나라가 흥하거나 망할 것처럼 엄청난 의미를 부여하면서 혈투를 벌일 임전태세(臨戰態勢)를 다지고 있다. 이 책은 누가 대통령이 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며, 누가 되건 ‘정치의 이권화’·‘엘리트의 지대(地代) 추구(rent-seeking)’·‘승자독식주의’를 없애거나 완화시키지 않는 한 대선은 ‘밥그릇 싸움 도박판’ 이상의 의미는 없다고 주장할 것이다.
  대선과 정치가 ‘밥그릇 싸움 도박판’이 될 때 국민이 가장 큰 피해자이지만, 두 진영사이의 이해득실을 따진다면 패자(敗者)는 보수라기보다는 진보 진영이다. 진보적 가치의 역설이 거짓말이 아니라면 말이다. 진보진영은 정치행태에 있어서 ‘김대중-노무현 정권 10년’ 이전과 이후에 아무런 차이가 없어도 되는 건지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그 이전엔 옳고 바람직한 일이었더라도 그 이후엔 달리 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세월과 시대가 어떻게 달라지더라도 변치 않는 항상심으로 초지일관하는 게 미덕인가?
  우리는 이명박 정권을 비롯하여 역대 서너 정권들을 거치면서 확인하고 또 확인한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 정당과 정치인들이 표방한 이념과 노선이 중요한 게 아니라 각기 생각이 다른 정치세력과 유권자들 사이에서 어떻게 타협과 화합을 이뤄내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 이게 어디 한국만의 사정인가. 미국에서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는 이른바 ‘당파싸움 망국론’ 논쟁의 핵심도 바로 그게 아닌가. 이 책이 강남좌파론을 소통과 연결시켜 논하고자 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이 책은 소통에 대한 열망으로 씌어졌다. 소통은 인기가 없는 주제다. 언론시장에서건 출판시장에서건 속된 말로 “편향성(당파성)이 이익이 되는 장사”이기 때문이다. 정치인도 다를 게 없다. 노골적이고 공격적인 ‘편향성(당파성)’을 보여주는 정치인에게 열정적인 지지자들이 많은 법이다. 그러니 시장논리상 소통은 거의 불가능하거나 어렵게 돼 있다. 좌우(左右)를 막론하고 지금 ‘편향성(당파성)’으로 주목을 받고있는 이들이 그게 자기가 잘 났거나 똑똑해서 얻은 성공이 아니라는 걸 깨달으면 좋겠다. 그 성공을 정당화하거나 미화하기 위해 엄청난 대의(大義)와 명분을 동원하는, 자기 자신도 인식하지 못하는 자기기만도 더 이상 저지르지 않으면 좋겠다. 이들이 자제해야 소통도 활성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이하랴. 때론 세월이 약인 것을.
  사실 진정한 소통을 열망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소통을 근거로 합리적․생산적 경쟁체제를 꿈꾸는 사람들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수백만 명은 넘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국민 대다수의 생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은 파편화돼 있으며, 조직화되기 어렵다. 동기부여에 있어서 그런 염원은 비교적 소극적인 것이기 때문에 열정이 없다. 무엇보다도 소통을 위한 참여에 대한 반대급부로 줄 게 없다. 공직을 줄 수도 없고, 다른 인정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도 없고, 통쾌하고 후련한 카타르시스도 주지 못한다. 특정 이념․노선․당파성을 내세워 지지자들의 피를 끓게 만드는 탁월한 논객들은 많지만, 이 방면의 논객이 거의 없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정치에서 아무런 사적 이익을 취하지 않으면서 소통을 열망하는 소통파를 어떻게 조직화할 것인가, 이게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다. 우선 공감대부터 넓혀 나가는 일이 필요하겠다. 이 책을 내게 된 이유다.  

                                                                                                                                      - 2011년 7월, 강준만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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