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는 인간 : 먹는 존엄성






4월 21일 금요일

맑고 미세먼지 많음

 

인터넷에서 인종청소를 검색하다가 제노사이드 논쟁이 시작된 미얀마 로힝야족 기사를 봤다. 그동안 심각한 인권유린을 접했던 터라 처음 알았을 때만큼 충격은 적지만 차별과 학살을 인정하지 않는 아웅산 수치 행보를 보면 노벨평화상 수여에 회의가 든다. 4월 11일 자 연합신문 기사에는 미얀마 서부에 있는 로힝야족 난민수용소를 폐쇄하기로 했다고 한다. 로힝야족 참극을 처음 알게 된 2012년 유혈사태 보다 더 나빠진 것 같다. 이슬람교도인 로힝야족을 불교도가 장악한 미얀마 정부가 차별하면서 촉발된 이 사태에서 군인과 경찰이 로힝야족 여성을 성폭행하고 집을 불태웠다고 전한다. 최근에는 아이들과 여자들을 들판에 모아놓고 사살한 다음 불을 질러 시신을 훼손한 일이 발각되었는데 차별과 학살이 아니라고 강변하는 수치는 버마 군부정권을 미얀마 민주정부라고 이름만 바꿔 계승했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이미 40여 년 전 군부독재가 로힝야족을 ‘벵갈리’라고 비하하면서 차별하고 탄압하기 시작했는데 수치는 이 과정을 모두 알고 있는 인물이다. 그러고 보면 수치가 군부독재에 저항해서 오랫동안 가택연금 당했다고는 하나 대체 미얀마 인민을 위해 어떤 공로가 있었는지 모르겠다. 아버지 후광 외에는 본인이 만든 게 없는 박근혜처럼 아웅산 딸이라는 정체성이 추종에 작동한 건 아닌지 의심이다. 크리스토퍼 히친스 말마따나 각 대륙마다 그들만의 종교가 필요했듯이 사람들은 그들만의 우상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2012년부터 방글라데시로 피난 간 로힝야족은 공식집계에 잡힌 숫자만 7만여 명이 라고 하니 북아프리카와 아랍인들이 죽음의 보트를 타고 유럽 난민 길에 오르는 것만큼 참혹하다.

 

난민에게 가장 고통스러운 일은 굶주림과 질병일 것이다. 얼마 전 읽은《먹는 인간》에 나온 방글라데시로 피신한 로힝야족 난민촌 사례와 2차 대전 당시 필리핀에서 패전한 일본군이 먹은 인육은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이다”-이 말은 호모 호미니 루푸스(라틴어: Homo homini lupus)는 “사람은 사람에게 늑대다”라는 의미의 라틴어로 희극 아시나리아(기원전 195년)에서 “lupus est homo homini”라고 한 것으로 위키 백과에 쓰여 있다-라고 한 토머스 홉스 말에 반론을 걸 수 없는 이야기다. 4·3 항쟁 때 서북청년단과 민보단이 주민들에게 한 짓도 똑같다. 로힝야족이 박해를 피해 방글라데시로 피난 왔을 때 방글라데시 사람들이 보여준 친절과 선의가 원조기관이 난민에게 많은 식량을 배급하자 태도가 돌변한 것을 보면 친절과 선의란 내가 상대방보다 더 많이 가졌을 때나 보여줄 수 있는 행동인 듯싶다.

 

오만이나 악의 문제가 아니라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상대방을 인정할 수 없는 태도 이면에 어떤 우월의식이나 열패감이 뒤섞인 것은 아닐까? 이를테면 가끔 기분을 어둡게 만드는 이야기들-나보다 훨씬 공부를 못했던 동창이 돈 잘 버는 배우자를 만나 부자로 살거나, 또는 책 한 권 읽지 않음에도 사회적 명성을 얻고 돈까지 잘 버는 지인, 나를 괴롭혔던 직장 상사가 비리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건재한 모습 등등, 나는 그런 인간이 아니다 라고 자위해봤자 소용없다는 것쯤은 익히 알만함에도 말이다-을 인정하지 않을 때 어떤 결과가 닥칠지는 뻔하다.

 

로힝야족이 방글라데시에서 원주민의 삶을 불편하게 한 건 사실이다. 땔감이 줄고 물고기가 줄었으니 방글라데시 원주민 입장에서 로힝야족 난민은 터전을 차지한 불청객으로 비춰질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는 로힝야족을 탄압한 미얀마 기득권층에게 책임을 물어야 하지만 현실은 약자끼리 투쟁한다. 약자는 대항하는데 부담스런 강자보다 만만한 약자를 공격하면서 서열을 정비한다. 멀리 찾을 것도 없이 사회면 뉴스를 차지하는 대개가 약자끼리의 전투장임을 확인하는 일이 그렇다. 큰 가해자는 밀쳐두고 약자끼리 피해자와 가해자가 된 괴기함.

 

피카소 작품〈한국에서의 학살〉에서 총을 겨누는 가해자가 누구인지 늘 궁금했다. 피카소가 공산당 당원이었으므로 가해자가 미군일 것이라는 막연한 추정은《권력이 묻고 이미지가 답하다》를 읽고 나의 선입관이었음을 알았다. 피카소는 이 그림 때문에 많은 의혹을 샀지만 인터뷰를 한 일이 없었다고 한다. 가해자를 감정이 없는 로봇처럼 그린 의도를 보면 이 그림에는 특정하지 않은 가해자가 있을 뿐이다. 사람은 대개 자기가 받은 피해와 상처에 집중하지 자기가 남에게 준 상처와 피해를 헤아리는 일에는 인색하다.(아, 진부해) ‘이타성’은 인간의 자기중심 성향, 즉 에고에 따른 성찰 결과로 나온 말이지 않나. 피카소는 미노타우로스를 분신처럼 그렸으므로 폭력 주체를 누구보다 잘 이해했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살인자 파란여우를 닉네임으로 쓰는 내가 알게 모르게 저지른 패악을 잘 인지하고 있을까? 로힝야족에게 선의를 행사하다가 배척으로 돌아선 방글라데시 사람들이나〈한국에서의 학살〉에 그린 감정 없는 가해자에 나를 대입해본다. 이럴 땐 또 먹거나 마셔야 한다. 

 

모차렐라 치즈를 듬뿍 넣은 프리타타 한 접시를 다 먹었고 부른 배를 진정시키며 일기를 썼다. 오늘도 굶주린 로힝야족이 있고, 흙바닥에서 작은 빵 한 조각을 구워 온 식구가 먹은 방글라데시 주민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배부름을 말한다.《먹는 인간》에 나온 “인간이 타고난 애처로운 맛의 상극”이 입안에서 맴돈다. 먹는 입을 갖고 태어난 운명이란 쌉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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