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기사회 - 한국인은 지금 어떤 마음이 고픈가 아케이드 프로젝트 Arcade Project 2
주창윤 지음 / 글항아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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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장을 뒤적이다가 서울여대 주창윤 교수 산문집 《허기사회》를 펼쳤다. 2013년에 읽은 책인데 다시 읽으니 생각이 다시 정리된다. 안 그래도 이 책 편집자였던 신식 씨가 생각났다. 


지난 늦봄에 다리치료를 받으러 병원을 다니면서 소염진통제를 2주 가까이 먹었다. 다리 통증이 가시고 부드러워져서 살 것 같았다. 근본을 치료하는 건 아니지만 때로는 허황된 처방을 원할 때가 있다. 뻔히 알면서 심리적 기대가 필요한 것이다. 이 방법은 약효가 짧다. 진통제란 뿌리까지 드러내어 원인을 찾고 뽑는 역할이 아니라 거죽만 슬쩍슬쩍 다독인다.

 

저자가 우리사회를 ‘허기사회’로 진단한 이유는 이렇다.

 

“관계적 결핍은 자아와 사회의 긴장 관계가 무너지면서 자아와 사회가 분리되어 자아로 회귀하는 것이다. 자신을 향한 과거로의 회귀는 퇴행이며, 이상적 자아에 대한 과잉 동일시는 나르시시즘이고 진정성의 상실은 분노로 표출된다. 이것들은 IMF 이후 진정성의 토대가 무너지고 신자유주의가 확장되면서 부상했다. 생존이 화두가 되는 사냥꾼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우리 사회는 소진 상태에 빠져들어 가고 있다. 열심히 노력해도 살아가기 힘들다는 무기력증은 허기를 촉발시킨다. 우리는 지금 허기사회에서 살고 있다.”

 

그 가운데 퇴행이 나르시시즘을 부추긴다는 대목이 흥미롭다. 나르시시즘과 자기기만. 둘 다 누구나 몸에 박힌 점처럼 갖고 있다. 완벽한 은폐가 힘들다. 몸의 점은 성형외과에 가서 없앨 수 있지만 중증 나르시시즘과 자기기만은 서울대병원 정신과 의사도 못 고친다. 중증 나르시시즘에 빠지면 자기기만은 번들제품처럼 딸려온다. 이거 두 개를 한 개 가격에 드립니다, 고갱님.

 

이를테면, 살아오면서 한 번도 거짓말 한 적 없다거나 한 번도 남을 욕한 적 없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한 번도’라는 단호한 기준은 물론 자기주장에 그친다. 순백의 눈송이처럼 사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순백은 다른 색에 비해 가장 빨리, 가장 깊이 오염된다. “순수주의는 자신의 근거를 의심하지 않는 이데올로기다”라고 가리킨 《자색이 붉은색을 빼앗다》에서 김영민 선생이 말한 것처럼 자기의심이 결여된 중증 나르시시즘과 자기기만은 자기를 지키는 이데올로기에서 타자에게 전이되며 확장된다. ‘기승전나르시시즘’은 타자 주체성을 흔들고 훼손하며 이성을 가린다. 마침내 공동화가 된 나르시시즘과 자기기만은 계약서나 허가서 한 장 없이 타자를 자기 세계로 물들이고 조종한다는 점에서 ‘선의로 포장된 악’이다.

 

남을 향한 거짓말은 용서 되지만 자신조차 속이는 자기기만은 중증 나르시시즘이다. 자아도취, 순결강박증, 우월감, 일그러진 욕망을 정화하기는커녕 수렁으로 밀어 넣는 게 나르시시즘이다. 약간의 나르시시즘은 어느 울적한 날에 자기 위안을 선사한다. 일종의 자존감이면서 자위다. 자기계발 용어로 치면 긍정 에너지라고 부를만하다.

 

《허기사회》에서는 나르시시즘을 세밀하게 분석하지 않는다. 그 대신 나르시시즘을 부추기는 요인은 “욕망의 억압으로 인한 상실과 무기력”이라고 진단한다. 주장과 진단이 성급해 감질나지만 독자를 설득하는 전개가 읽을 만하다. 103쪽 밖에 안 하는 얇고 편하게 읽을 만한 책에 너무 섬세한 기대를 갖지 않는 게 좋다. 정신분석 전문도서를 읽은 독자라면 저자가 내리는 나르시시즘 진단 원인을 톺는 것만으로도 새로운 관점을 가질 수 있다. 이 책에서는 흥미롭게도 나르시시즘을 ‘욕망의 억압’으로 해석한다는 점일 것이다. “주체의 배제가 심화될수록, 일상적인 꿈이 경제적· 문화적 억압에 의해 상실될수록, 그리고 내가 외부세계로 사랑을 발산하지 못할수록 자기애는 증가하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은 그동안 내가 생각했던 욕망과 나르시시즘 관계를 증명해준다.

 

욕망은 허기와 완벽한 커플이다. 굶주릴수록 강렬히 원한다. 이루지 못하는, 어쩌면 이룰 수 없으나, 그럼에도 이 불우한 상태를 벗어나고픈 간절함으로 허상에 집착해 정신승리를 시전하다 보면 나르시시즘은 어느새 묵직한 그림자로 옆에 와 있다. 자기 욕망을 솔직하게 펼치는 것이야 소망을 피력하는 긍정적 행위이다. 그런데 실시간 중계가 되면 나르시시즘 살포가 된다. 자기 욕망을 상설전시관에 비치된 모조상품처럼 대중에게 무차별적으로 확산시키면서 정신승리에 빠지는 동안 나르시시즘은 개별에서 집단으로 덩어리가 커진다.

 

그래서 저자는 사회 분위기를 이끄는 멘토나 힐링이 근본적인 처방전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진단에 스민 염려와는 다르게 사회는 명성에 취약하다. 심지어 명성의 일갈을 근본 처방전처럼 단정한다. 내가 통증을 억제하려고 먹은 진통제가 사실은 통증 근원을 은폐하는 가짜 약임에도 가짜 약에 취해 통증을 없애주기를 바란 것처럼 말이다. 저자가 꼬집은 가짜 약장수들, 이를테면 청춘과 여성을 팔고 사회 약자를 팔아 사적 이익을 취한 이들은 대개 ‘인생사, 자기 마음먹기 달렸다’고 강조한다. 불교에서 자기수양을 뜻하는 자기마음을 활용하면서 이들은 모든 문제를 자기 세계로 축소한다. 비약일수 있으나 사회 문제를 개인의 영역으로 끌어와 봉합한 이들은 나르시시즘을 이용해 대중에게 책임을 전가한 나치 괴벨스를 떠올리게 한다.

 

따지고 보면 김난도나 김미경, 혜민 류의 싸구려 위안이 필요한 만큼 살기 팍팍하다. 그러나 뻔뻔한 충고에 길들여지면 더 큰 허기에 허덕이지 않을까. 개복수술이 필요한 데 일회용 반창고나 당의정 처방으로 문제가 해결될 리가 없다. 싸구려 위로는 현실을 은폐하는데 그치지 않고 급봉합해서 더 큰 질병에 대처하지 못하게 한다. 이처럼 자기기만은 자신을 속이고 타인마저 속이면서 개인의 사고를 교란시켜 집단의식을 마비시킨다. 그게 집단 나르시시즘이다.

 

내가 내린 결론은 이렇다. 욕망으로 부풀린 나르시시즘은 나쁘진 않다. 문제는 자기기만을 반복하며 타자의 욕망을 건드려서 정신승리를 취하는 행위가 어디까지 나아갈 것인가에 있다. 이 점을 잘 이용해 집단에 퍼트리는 사람이 있다. 나처럼 가짜 약을 원하는 대다수는 힐링 단물이 허망하게 빠지면 다시 허기로 허우적댄다. 혼자만 시부랑탕이 되면 외롭다. 그래서 집단 나르시시즘에 동조한다. 거기에는 타자의 욕망을 능숙하게 활용하는 그분이 있다. 


 “사이버 공간에서는 아무나 제사장이 된다....집단적이기에 자신은 책임을 느끼지 않는다.”

 

저자 생각과는 다르게 나는 아무나 제사장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나르시시즘은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너무 자주 잊는다. 자신이 무리에 소속되었다는 안도감은 희생양이 될 위험으로부터 방어해준다. 그래서 패거리에 속하지 않은 대상을 악의적으로 품평하며 공격하는 행위를 사교행위로 합리화 한다. 집단 나르시시즘은 무의식적 동조에서 무자각, 마침내 몰지각의 무아지경까지 확장된다. 집단 나르시시즘이 꼭 국가적 대형 사건이나 역사 속 독재자에게만 해당 되는 건 아니다. 둘레를 둘러보면 ‘한 무리의 무리’들은 있게 마련이니까. 무리가 있는 곳이라면 친목 카르텔이 존재한다. 암묵적(때로는 노골적) 관용이 허용된 무리는 무리에 소속하지 않은 경계 바깥의 인물(사상, 취향, 등등이 다른. 어쨌든 저 인간 마음에 안 들어!)을 공격하면서 집단 나르시시즘을 완성한다.

 

그래서 저자는 “희생양 메커니즘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가운데 허기로 인한 욕망의 과잉을 부추긴다.”고 한다. 개인 나르시시즘이 집단화가 되면 ‘회복 가능한 자기기만’이 아닌 ‘집단 질병’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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