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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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지금 나의 깨달음, 앎을 가지고 다시 스무 살이 된다면... 나는 더 행복해질까? 젊고 에너지가 넘치던 그때로 돌아가서 무모하고 어리석었던 실수들을 바로잡을 수 있다면 나의 삶은 한층 근사해질까? 그렇다고 여겼던 것은 삼십 대이고 그건 아니라고 체념하게 된 것은 사십 대이다. 시간은 내 바깥을 흐르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를 통과하여 흐른다는 것은 바로 하루키의 이야기다. 즉, 지금의 나를 스무 살의 나로 변환시키는 행위는 그 시간의 통과 자체를 무용한 것으로 만들기 때문에 지금 나의 기억과 의식을 가지고 다시 스무 살을 경험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네가 나에게 그 도시를 알려주었다."로 시작하는 이야기는 열일곱 살 소년과 열여섯 살 소녀의 아름답고 아련한 사랑의 이야기로 뻗어나간다. 문장 하나하나가 산문시의 그것처럼 정제되어 있고 빛난다. 순식간에 소녀에 대한 마음으로 어쩔 줄 몰라하는 소년을 눈앞에 불러온다. 


마치 수천 가닥의 보이지 않는 실이 너의 몸과 나의 마음을 촘촘히 엮어가는 것 같다. 네 눈꺼풀이 한 번 깜박일 때도, 입술이 희미하게 떨릴 때도 내 마음은 출렁인다.

-pp.12


소년의 마음에 소녀의 몸이 연결되는 것. 소녀의 이야기로 축조된 높은 벽에 둘러싸인 도시. 진짜 소녀가 있다고 주장하는 그곳. 그 여름의 열일곱 살과 열여섯 살은 가상의 도시를 함께 건설해 나간다. 이 도시는 기묘하다. 모든 욕망과 꿈이 실현되는 이상적인 곳이 아니라, 간소하고 엄격하고 건조한 곳, 사람들이 그림자를 지니지 않은 곳이다. 시계탑에는 바늘이 없고 소녀가 일하는 도서관에는 책이 없다. 이야기는 현실 세계에서의 소년의 성장과 소녀와의 헤어짐, 그 가상의 도시에서의 소녀와의 재회로 넘나든다.  그 도시에서의 소녀는 어른이 된 소년을 알아보지 못하고 그의 '꿈 읽는 자'로서의 역할을 보조할 뿐이다. 



현실에서 소년은 차곡차곡 나이를 먹어 어느덧 마흔다섯 살이 되고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시골의 작은 도서관의 관장으로 취임하며 그 도서관의 설립자이자 고문인 노인 고야스를 만나게 된다. 치마를 입는 노인의 캐릭터는 상당히 독특하고 매력적이다. 주인공이 이런저런 도서관 일로 헤맬 때나 , '그 도시'에 대한 해결되지 않은 감정으로 고민할 때마다 나타나 실질적인 조언을 해준다. 고야스가 주인공의 나이에 사고로 아내와 아이를 잃고 사재를 털어 설립한 도서관의 관장으로 재직하지만 그 자신도 결국 심장마비로 사망한 유령이라는 반전은 그 둘의 관계를 무너뜨리지 못한다. 무엇보다 주인공이 고민하는 그림자와 본체와의 분리와 통합에 대한 그의 해석은 현실에서 우리의 페르소나를 가지고 기능하는 사회 생활에 대한 심오한 조언 같아 귀 기울여 듣게 된다.


"본체와 그림자는 상황에 따라 역할을 맞바꾸기도 합니다. 그럼으로써 사람은 역경을 뛰어넘어 삶을 이어갈 수 있는 것이랍니다. 무언가를 흉내내는 일도, 무언가인 척하는 일도 때로는 중요할지 모릅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누가 뭐래도 지금 이곳에 있는 당신이, 당신 자신이니까요."

-pp.452


주인공은 그 도시에서 분리된 그림자만 벽 바깥으로 탈출시킨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 도시에서 거주하려면 기꺼이 자신의 그림자를 포기해야 한다. 이 그림자는 현실에서 우리가 사회의 구성원으로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 입는 일종의 역할의 옷이 아닐까 싶다. 내가 믿는 나, 그렇다고 믿으며 기능하는 나의 모습이 그림자일 것이다. 그것이 무의미한 껍질이라 폄하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그게 바로 나라고 섣불리 단정 짓지도 않는 그 경계에서 하루키는 삶과 자아를 다룬다. 현실과 가상의 세계의 끊임없는 왕복은 결국 우리의 의식 속 심해를 탐구하는 과정의 은유다. 내 안에 가상의 도시를 짓고 벽을 세우고 때로는 그 벽을 넘어 탈출하기도 하고 다시 회귀하기도 하는 그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묘한 설득력을 지닌다. 


하루키 월드는 어떤 논리적 정합성으로 독자를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 근저에 있는 깊은 의식에 대한 천착의 울림으로 그 이야기에 직관적으로 빠져들게 하는 힘이 있다. 이게 말이 되나? 같은 질문은 부차적인 것이 되어버린다. 말이 되기 이전에 어, 어, 하면서 빨려 들어가게 된다. 그 세계는 모두에게 낯선 곳이 아니라 그런 것일까? 우리는 모두 우리의 내면에서 만난다.


옐로 서브마린 파카를 입은 열여섯 살 소년의 등장은 결국 이 현실과 도시의 세계의 통합을 위한 것이었다. 정규 교육 과정에서 이탈하고 세상과도 소통하지 못하는 소년은 오직 도서관의 책을 읽으며 자신의 내면에 개인화된 서고를 만들어 나간다. 어느 날 그가 사라지고 주인공이 그 도시에서 소년과 재회하며 역할 분담을 하게 되는 결말은 결국 이 형상화된 인물들이 어쩌면 주인공의 내면의 여러 요소들을 인물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짐작을 하게 한다. 심지어 유령 고야스까지도. 


"그래요. 이 도시에는 현재뿐입니다. 축적도 없습니다. 모든 것은 덮어쓰이고 갱신됩니다. 그게 지금 우리가 속해 있는 이 세계입니다."

-pp.738


소년의 축적에 대한 이야기는 이 761페이지의 이야기가 결국 말하고자 한 핵심이다. 우리는 매일매일 뭔가를 쌓아나간다고 착각하며 살아가지만 결국 삶의 어느 순간, 내가 쌓은 것은 내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아프게 깨닫게 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무의미한가? 그렇지 않다는 이야기를 소년은 하고 있다. 이 세계는 현재뿐으로 순간순간 갱신되고 있다. 그 새로움은 그 자체로 순간을 만들고 그 속의 나는 매시간 다시 태어난다. 그 이행은 진실의 유동성을 만들어 나간다. 고정되고 영원불멸인 진실은 없다. 진실은 끊임없이 변하고 갱신된다. 그것은 하루키의 말이기도 하다.


중편의 소설을 발표하고 사십 년이 흐른 후 장편으로 개작한 이야기는 이제는 노년으로 접어든 하루키 월드의 집대성으로 보인다. 그때 쓸 수 없었던 이야기는 작가 인생의 흐름과 더불어 숙성되어 더 깊이 있고 넓은 이야기로 확장, 심화되어 독자 앞에 나타났다. 삼십 년을 더 산 하루키가 인지한 세계와 깨달음을 내가 온전히 다 이해하고 체화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먼저 깨달은 그가 언어의 병기를 써서 만들어 낸 이야기의 세계는 내 전체를 흔들었다. 무릇 좋은 이야기란 이런 것일 테다. 완벽하지 않아도 독자의 마음에 울림을 자아내는 이야기에는 작가의 삶 그자체가 들어가야 한다. 


시간을 들여 읽을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는 이야기다. 더불어 그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작가 후기' 또한 명문이다. 그의 둔중한 마침표가 마음의 현을 건드린다. 


이 이야기가 부디 끝이 아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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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9-13 09: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역시 블랑카 님의 리뷰 너무 좋네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다 하셨지만 그럼에도 제가 이 책을 읽게 될 재미를 조금도 해치지 않을 것 같아요.

blanca 2023-09-13 13:07   좋아요 2 | URL
다행이네요. 물론 부족하고 아쉬운 대목도 있어요. 작가가 이미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었고 그 이야기를 위해 인물을 활용하는 느낌이 있더라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키는 평범한 사람을 넘어서는 지점을 통과했고 그걸 전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여느 다른 소설들과는 정말 달랐어요. 일단 문장들이...특히 첫 챕터는 그 누구도 이 사람을 흉내는 내더라도 하루키만의 아름다움을 만들어낼 수는 없겠구나 싶더라고요.

보물선 2023-09-13 09: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벌써 다 읽으셨네요! 리뷰 좋아요♡

blanca 2023-09-13 13:08   좋아요 1 | URL
벽돌책이었는데 워낙 문장이 좋아서 그냥 쭉쭉 나가더라고요. 아쉬워요. 무엇보다 작가 나이를 생각할 때 저는 역주행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안 읽어본 작품들을 하나하나 독파해 나가야겠어요.

호시우행 2023-09-13 10: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 찜했어요.

blanca 2023-09-13 13:09   좋아요 0 | URL
호시우행님 즐거운 독서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럴 거라 믿고요.

책읽는나무 2023-09-13 1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장 하나 하나가 하루키의 소설을 직접 읽는 듯한 느낌입니다.
문장 속에서 블랑카 님의 세상을 보는 시선 또는 소설을 대하는 자세랄까요? 그런 모습을 본받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blanca 2023-09-13 13:11   좋아요 1 | URL
이 소설은, 정말 묘한 구석이 있는 게 제가 고민하던 문제들을 다 들킨 기분이 들더라고요. 보통 그런 진지함을 기대하며 소설을 읽지는 않잖아요. 그래서 읽다가 멈추고, 줄치고, 플래그 붙이고 그랬답니다. 그리고 저를 본받으시면 안 됩니다. ㅋㅋ

새파랑 2023-09-14 08: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이야기가 끝이 아니었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돌아가고 싶은곳이 있다는건 행복한거 같아요. 그게 가상의 기억? 꿈? 이더라도요 ㅋ

이 책 다시 읽고 싶어집니다^^

blanca 2023-09-14 10:03   좋아요 1 | URL
주인공이 다시 젊어지는 장면 있잖아요. 강에 발을 담그고 과거로 과거로. 이 장면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요. 마치 주인공처럼 다시 과거로 돌아가는 듯한 느낌이었어요.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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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 살 아이를 키우는 나를 툭 건드린 이야기. 아이 안에 하나의 도시를 건설해 주는 건 전적으로 내 몫이 아니었다. 아이는 아이의 세계를 택하고 자신만의 가장 좋은 도시를 만들어 나갈 것이다.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세계에서.

"그러니 어쨌거나, 네, 그가 어느 쪽 세계를 택하느냐를 두고 당신이 고민할 필요는 없답니다. 그애는 스스로 판단해서 앞으로의 삶을 선택할 겁니다. 그래봬도 심지가 굳은 아이니까요. 자신에게 어울리는 세계에서 확고하고 힘있게 살아나갈겁니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이 선택한 세계에서, 당신이 선택한 인생을 살아가면 됩니다. - P5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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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rsona 2023-09-11 09: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살까말까 고민중이었는데 방금 블랑카님 이 글 읽고 샀어요. ㅎㅎ 잘 읽을게요!^^

blanca 2023-09-11 10:08   좋아요 2 | URL
저는 하루키를 좋아해서...일단 좋아할 준비가 된 상태로 읽어 별점이 상당히 주관적이랍니다.^^

책읽는나무 2023-09-11 09: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육아서로도 읽히는군요?^^
저도 살까 말까 며칠 고민했었는데....어제 구매 완료해버렸네요.
이 책은 도서관에서라도 꼭 빌려 읽어보고 싶네요.

blanca 2023-09-11 10:11   좋아요 1 | URL
전혀 기대 못했는데...제가 사춘기 아이로 고민했던 지점을 하루키한테 들킨 기분이었어요. 아, 이게 맞는 걸까? 내가 다 알아 해줘야 하나? 저 아이가 가는 길은 옳은 것인가. 나는 내 인생은...뭐 이런...그런데 하루키가 그 질문을 다 아는 것 같잖아요. 아, 여튼 저는 이 대목에서 눈물 또르르. 여튼 제가 지금 소설 병렬 독서 중인데, 하루키 정도 살아야 아는 것들이 있는 것 같아요. 쉽게 쓰는 것 같은데 무겁고 진지한 그런 부분들은 억지로 되는 게 아닌 것 같아요.

고양이라디오 2023-09-11 17: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벌써 읽으셨군요!!

즐독하셨다니 기쁩니다^^b

blanca 2023-09-12 08:57   좋아요 1 | URL
마지막 3장 남겨두었어요. 다시 재독해야 할 것 같기도 하고 되도록 천천히 읽으려 합니다.

새파랑 2023-09-11 20: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하루키는 하루키여서 그냥 좋은거 같습니다 ㅋ 읽으면서 남은 페이지가 줄어드는게 너무 슬펐습니다 ㅜㅜ

blanca 2023-09-12 08:58   좋아요 1 | URL
새파랑님, 저 그게 너무 싫어서 지금 3장 못 읽고 있어요. 49년생 하루키가 또 장편을 쓸 수 있을까요? 이상하게 책을 읽으며 자꾸 마음이...책장이 빠르게 넘어가는 것 자체가 좋은 게 아니라 기분이 가라앉아요.
 
에고이스트
다카야마 마코토 지음, 유라주 옮김 / 민음사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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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랑은 자기 중심적이다. 모든 삶의 주체는 에고이스트다. 그렇다고 해서 사랑이 아니라고 삶이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애잔하고 또 아련한 이야기의 끝은 수많은 질문들을 남긴다. 그 모든 일들이 결국 내 삶을 살기 위한 거였다 하더라도 내가 너를 사랑한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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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 독학을 시작한 지 4개월이 지났다. 특별한 계기가 있는 것은 아니고 언젠가 꼭 한번 공부해보고 싶다고 생각하다 이제는 더 이상 미루면 안될 것 같아 덤비게 된 것. 유튜브를 보며 히라가나와 가타가나를 외우고 EBS 초급 일본어를 듣는다. 성시경의 일본 노래 가사를 활용한 일본어 강의도 듣는다. 그리고 두둥, 일본어 책을 샀다. 하루키의 <후와후와>
















아마 초등학교 1학년 정도 수준이 되지 않을까?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감도 못 잡는 수준이 내 일본어 수준이긴 하지만...그러나 역시 하루키는 하루키다. 어렵다. 한 문장도 사전 없이 제대로 해석할 수가 없다. 블로그에 단어를 정리해둔 것을 찾아 그 단어를 모조리 적고 다시 읽어도 역시 매끄럽게 읽히지 않는다. 이건, 나이 때문일까?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일은 나의 세계를 확장하는 일인데 그 확장도 가능한 연령 한계치가 있는 것일까? 돌아서면 전날 외운 단어를 까먹는다. 오늘의 내가 어제의 나보다 일어를 더 잘하는지 모르겠다. 사실 더 못하는 것도 같다. 하기사 영어 공부한 세월을 생각하면 고작 육 개월도 공부하지 않고 바로 원서를 술술 읽고 싶어하는 게 말도 안된다 싶기도 하고...게으른 욕심쟁이.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는 킨들에 원서로 먼저 다운 받아 놓았다. 아마존 리뷰도 극찬 일색이고 일단 분량이 적어서 바로 시도해봤지만 번번이 실패하곤 했다. 그 입구 허들이 높다고 해야 하나. 영 몰입이 안 되었다. 일단 클레어 키건의 문장은 암시적이고 함축적이다. 번역본을 봐도 쉽지 않다. 그 함축의 미가 클레어 키건 자신이 의도한 바이기도 하다. 이건 원작으로 읽어도 마찬가지다. 소녀의 마음은 언어의 필터로 다 걸러지지 않는다. 그 밑에 가라앉은 것들을 읽는 이들 각자가 알아 소환해야 한다. 쉽지 않다. 


줄거리 자체는 복잡할 게 없다. 여름 방학 동안 막내 동생을 임신한 엄마를 떠나 나이 든 친척 집에서 지내는 소녀의 얘기다. 대단한 극적 긴장감도 없다. 그 친척 부부는 친절하고 따뜻하다. 그런데 특별한 점은 이 친절이 이 소녀에게 가지는 의미와 무게다. 줄줄이 딸린 동생들, 언니들 사이에서 소녀는 따뜻한 환대나 배려를 받아본 기억이 없다. 그러한 소녀가 이 눈부신 여름 동안 단 하나의 유일한 아이가 되어보는 경험이 이 소녀의 성장에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 그건 완전히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누구나 한번쯤 몹시 춥고 소외당했던 유년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나만이 유일하게 흠뻑 사랑 받는 기회는 애석하게도 흔치 않다. 그리고 이 소설을 읽는 이는 누구나 그런 특별한 경험을 거슬러서 하게 된다. 그게 이 소설을 읽다 갑자기 툭 떨어지는 눈물의 의미일 것이다. 치유의 시간이다. 아일랜드 작가들은 그런 면에서 아주 특별한 것 같다. 트레버가 그랬고 샐리 루니가 그랬다. 많은 것들을 이야기하지 않는데 그 행간에 거대하고 심오한 뭔가가 불거져 나와 마음의 어떤 현을 '딩'하고 건드린다. 그 공명감은 길게 여운을 남긴다. 잘 쓴 이야기란 이런 것이다. 많은 것들을 부연 설명하거나 과장하지 않아도 바로 건너가서 건드린다. 억지로 될 일이 아니다. 


내가 그 여름에 이 친척 부부에게 맡겨질 수 있었다면...나도 이 소녀처럼 그랬을까 싶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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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3-08-21 11: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일본어 독학 시작하신 블랑카 님, 멋져요! 저도 일전에 일본어 해볼까 했는데 마음을 접었어요. 지금은 도무지 시간이 나지 않는다는 핑계를 댑니다. 독서도 못하고 있어서 ㅠㅠ

일본어 공부 응원합니다, 블랑카 님. 다른 누구보다도 블랑카 님의 외국어 공부는 더 응원하게 되네요. 이렇게나 책을 잘 읽어내시고 감상을 잘 적어주시는데, 외국어를 익힌다면 그 폭이 마구 확장되실 것 같아요. 부디 공부 놓지 마세요!!

blanca 2023-08-21 15:10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진짜 어제 외운 단어, 오늘 보면 처음 보는 느낌처럼 새롭습니다. 그래도 조금씩 오래 하는 걸로 하려고요. 사실 성시경이 마흔 넘고 노안 오고 일어 공부를 시작해서 그렇게 잘하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일어 공부를 하루에 세 시간씩 이 년 이상 했다는 얘기 듣고 자극 받았어요. 연예인이 본업인 사람도 해내는데 나라고 못해내랴, 싶었는데 현실은...성시경이야 일본 팬들이 있지만 저는 일본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없어서 ㅋㅋ 일단 의욕을 오래 가지는 게 관건인 것 같기는 해요.
 

언니 같던 중학교 친구가 집에서 아주 멀리, 멀리 기대하지 않았던 고등학교에 배정되어 멘붕에 빠진 나를 다독이며 선물을 줬다. 나의 적응을 도와줄 친구를 연결해 준 거였다. 아주 이쁜 친구야. 나는 역시 우리 동네에서 뜬금 없이 아주 먼 동네에 함께 던져진 다른 친구와 함께 그 백설공주를 닮은 친구에게 다가갔다. 우리는 삼총사가 됐다. 그리고 한 명을 더 만났다. 사인방이 됐다. 우리는 이십대에도 심지어 삼십 대에도 그 인연을 이어갔다. 첫애를 낳고 방금 내 몸에 벌어진 사건으로 멘붕에 빠진 나를 제일 먼저 찾아준 것도 그 친구들이었다. 
















박상영 작가의 에세이를 읽으며 그 친구들과의 시절을 떠올리게 됐다. 내가 왜 이 작가를 좋아할까 생각해 보니 여러 면에서 서로 닮은 점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교 시절, 대학교 시절, 그 시절에 내가 가졌던 생각들까지. 교집합이 많아서 뜨끔했다. 다른 점이라면, 박상영 작가는 자신의 꿈을 이뤘고 그 우정도 잘 지켜냈다는 점. 난 두 가지 다 하지 못했다. 슬프게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시절 내가 친구들에게 받은 사랑, 지지는 여전히 지금 나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어떤 것은 사라져도 없어지지 않는다. 오해로, 다툼으로 멀어진 친구, 지구편 반대끝으로 가버린 친구, 이제는 바빠서 어쩌다 한번씩밖에 얼굴을 볼 수 없는 친구. 모두 다 하찮은 자기변명이자 구실이 되겠지만, 그래도. 우리의 해산은 그런 식으로 설명될 수밖에.


그런 날들이 있었다.

이제는 그 맥도날드도 사라지고 없다.

-<순도 100퍼센트의 휴식> 박상영


가파도 레지던시에서 공동생활을 한 김연수 작가와의 에피소드는 마치 눈앞에 그려지는 것처럼 생생해서 서정적인 단편 한 편을 읽는 느낌이었다. 박상영 작가는 언어를 감각적으로 그려내는 데에 탁월한 재능이 있다. 언어로 사람을 불러낸다. 정말이다!이를테면 이런 묘사. 김연수 작가의 조용조용한 목소리가 귓전에서 들린다.


내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답했다.

"왠지 가짜로 만들어놓은 것 같아. 관광객들 보라고."

김연수 작가님께서는 꿈결 같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씀하셨다.

"상영이는 의심이 많구나(음량1). 사람에 대한 신뢰가 없어(음량0.5)......"

-<순도 100퍼센트의 휴식> 박상영


무려 한 세대를 넘는 나이 차가 전복된 순간이다. 세상에 대한 냉소는 어린 상영 작가가, 그럼에도 긍정은 연수님이. 다 같이 밥을 나누어 먹자고 한 솥 가득 밥을 하는 김연수 작가, 또래 친구와 더 재미있게 가벼운 몸으로 놀라고 상영 작가의 짐까지 들고 먼저 사라지는 김연수 작가. 


그 정경이 눈앞에 그려지는데 왜 이리 웃음이 나오는지 모르겠다. 그건 나의 한때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나는 젊을 때 더 냉소적이었고 그게 제법 쿨한 건줄 알았다. 그런 나를 다독이고 세상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주문한 건 의외로 나보다 훨씬 연배가 높은 선배님들이나 기성 세대였다. 내가 나이 들어보니 그런 따뜻함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지하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회사 다닐 때 나는 숱하게 난을 죽였다. 나는 나의 소임을 다하지 못했다. 집에서 식물을 키우게 된 이후로도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그 쉽다는 고무나무, 심지어 산세베리아도 내 손에서는 묘하게 말라 비틀어지거나 잎을 축 늘어뜨렸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고 나는 또 새로운 나무를 들였다. 4년째 잘 크고 있는 아레카 야자도 사실 그리 잘 크고 있다고는 하지 못하겠다. 이상하게 한쪽으로 쏠리는 비대칭의 모습, 아무도 우리 집,내 눈에만 잘 크고 있는 나무에 대해 칭찬하지 않는다. 그 옆에 난이도 중이라는 바나나크로톤은 묘하다. 나는 절대 난이도 중급 이상의 식물을 키우지 못하는데, 다행스럽게도 죽을 듯 죽을 듯하며 죽지 않고 살아가고 있다. 이 역시 예쁘게 잘 크지는 않는다. 멀리서 보면 살아 있는 게 분명한데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좀 헷갈린다. 잎사귀가 적고 줄기 부분은 말라 있다. 죽어가는 중인가? 싶은게 1년이다.


김금희 작가는 이런 나와 대척점에 있다. 사실 뭘 키워도 잘 키우는 사람의 식물 이야기가 나에게 어떤 감동을 줄까 싶었지만 역시 좋은 이야기를 많이 쓰는 작가의 사물, 생물에 대한 관찰은 삶과 일상에 대한 깊은 관조적 시선과 맞닿아 공명한다. 식물에 대한 이야기는 나와 비슷한 나이가 주는 공감대에서 내가 미처 정리하지 못한 감정들에 대한 언어적 서사를 부여한다. 맞아, 이런 거였구나, 싶은 대목이 너무 많아서 뭉클했다. 내가 용서할 수 없었던 내 자신에 대한 이야기. 이제는 그만 놓아줘야 하는 내가 내 자신을 너무나 가혹하게 다뤘던 한 시절에 대한 정리. 열심히 한다고는 했는데 그 열심이 더 나의 평안을 훼방했던 고였던 시절에 대한 갈무리. 


나는 다시 한번 아무도 이쁘다 해주지 않는 나의 식물 둘을 바라본다. 주광성을 고집하며 끈질기게 휘어가는 그들의 가지의 생명력을 본다. 


그런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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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3-08-13 13: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 읽다가 아 맞다 하면서 저의 화분들에 물주고 왔어요. ^^ 이번에 여행갔다오니까 몇녀석이 말라서 다 죽어가고 있더라는....ㅠ.ㅠ 박상영작가의 에세이는 여행에 대해서 저와 완전히 다르게 느끼는것 같아서 오히려 관심이 가네요. 한번 읽어봐야겠어요.
나 자신을 너무 가혹하게 대하던 시절이 사실 우리 대부분은 가지고 있지 않나요? 중요한건 거기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는거같아요. 오늘도 나를 사랑하고 나의 게으름을 사랑하기 위해 부단히 또 노력중인 이 아이러니.... ^^

blanca 2023-08-13 20:14   좋아요 1 | URL
여행 갈 때 식물 물 주는 일이 문제죠. 저는 그런데 대부분 과습으로 식물들을 죽였던 것 같아요. 요새는 좀 게으르게 했더니 더 잘 자라는 것도 같아요. 저 같은 경우 어떤 시절은 나이가 들수록 더 잊혀졌던 기억들이 떠오르기도 하는 것 같아요. 잘 갈무리 해야 할 것 같아요.

자목련 2023-08-16 16: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상영 작가의 에세이가 궁금하지 않았는데, 김연수 작가의 등장하는 그 부분은 무척 궁금합니다. ㅎㅎ
식물은 식물이 주는 기쁨만큼 사랑을 주지 못하고 있어요, 저도...

blanca 2023-08-16 16:33   좋아요 0 | URL
자목련님, 이 에세이에서 김연수 작가 분량이 꽤 많아요. 그 묘사가 너무 좋아 하나의 단편 같고요. 우리가 생각한 딱 바로 그 캐릭터 대로 움직입니다. 다정하고 재미있는 사람이요. 박상영 작가가 김연수 작가와 세대를 넘어서 정말 좋아하고 교감한다는 느낌이고요. 진담인지는 모르겠지만 김연수 작가 모델로 소설도 쓸 생각이라 하더라고요. 여튼 둘의 묘한 어우러짐이 정말 좋아서 계속 얘기해줬으면 싶겠다 싶을 정도였고요. 박상영 작가 친구들이 김연수 작가 팬이 많더라고요. 이 부분 얘기도 재미있어요. 여튼 두 작가 다 너무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