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의 항상 습진을 달고 살았던 왼손 중지에 생긴 염증으로 왼손을 이 주 동안 쓰지 못했다. 고작 손가락 하나인데 살짝 뭔가 닿기만 해도 소스라치게 놀랄 정도의 통증이다보니 아예 왼팔은 옆구리에 붙이고 다니는 지경까지 갔다. 생각보다 한 손만 사용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세수도 양치도 머리를 묶는 일도 그랬다. 아이의 패딩 점퍼 지퍼를 채워주며 부들부들 떠는 엄마를 내려다 보며 아이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항생제를 먹고 소독을 하고 연고를 발라도 여전히 차도가 없어 손가락에 주사까지 맞았다. 손가락 주사는 마취 주사를 먼저 맞고 맞는다는 사실까지 알게 됐다. 설명하기 힘든 고통이었다. 그렇게라도 나으면 싶었다. 그러나 통증은 끈덕지게 돌아왔다. 누구한테 이 고통을 호소해야 할지 대체 어느 병원 어느과로 가야할지도 오리무중이었다. 손가락 관절이 통증이 아니라 손가락 피주의 통증이니 사례도 많지 않았고 사람들한테 왠지 손가락이 아파서 힘들다고 얘기하기도 계면쩍었다. 이 세상에 수많은 통증으로 고생할 사람들이 떠올랐고 그 사람들의 고통의 십분지 일이나마 통감하게 되었다. 남들은 뭐 그 정도 가지고 그러냐고 말할 통증이 그 사람 삶 전체에 회색 구름을 드리울 수 있다는 것까지도. 집안일을 마무리하고 잠들기 직전 손가락 통증이라는 단어를 검색어에 넣고 온라인의 온갖 사례를 읽고 그 다음에 내가 가야 할 곳과 내가 받을 수 있는 치료는 무엇일까 생각하다 보면 걱정이 되어 잠도 안 왔다. 내가 이렇게 나약한 인간이라는 것도 싫었다. 더 심한 통증으로 고생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난 손가락이 따가워 살기 싫어지다니.... 이렇게 계속 아프다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생각까지 들었다. 다행히 어제 아침부터 드디어 그 손가락을 쓸 수 있게 됐다. 


중병의 발병과 회복은 내게 '정상적'인 삶이 대단히 비싼 것이라는 놀라운 진실을 가르쳐줬다. 어떻게든 정상에 가까운 삶을 재구축하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내가 그동안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들에 실제로 얼마나 큰 비용이 드는지 절감했다. -데이비드 파젠바움 <희망이 삶이 될 때 >















응당 환자를 치료하는 입장인  의사 당사자가 중병에 걸려 투병하는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이미 폴 칼라니티가  <숨결이 바람될 때>라는 호소력 있는 작품으로 대중들에게 많은 사랑과 공감을 얻은 바 있다. 그래서 솔직히 그 아류일 거라 단정하고 시작했다. 하지만 한때 풋볼팀 주전 쿼터백이었던 파젠바움이 이름도 생소한 희귀병인 캐슬만병의 자신의 삶 전체를 흔드는 데 대처하는 이야기는 폴 칼라니티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경로의 이야기이다. 일단 칼라니티가 걸렸던 폐암 역시 난치병이지만 적어도 캐슬만병 같은 도저히 정체를 파악할 수 없는 미지의 것은 아니었다. 또 캐슬만병은 주기적으로 재발하며 그를 죽음의 문턱까지 끌고가는 양상을 보여 암의 병세와는 다른 경로를 보인다. 이 병의 정체를 파악하고 치료약을 찾는 과정을 환자이자 의사인 파젠바움 자신이 하는 이야기는 비장한 투쟁의 행로다. 그에게 희망은 막연한 낙관이 아니라 증거 수집을 통한 과학적인 예측이자 불굴의 의지가 한데 어우러진 용광로 안에 스스로를 던지는 행위 그 자체였다. 중환자실에서 죽어가면서도 그는 치료약을 찾기 위한 자신의 생체 샘플을 만들 궁리를 한다. 그것은 비단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온 세계에 흩어져 고통 받고 있는 희귀 난치병 환자들 전체를 위하여 협업 네트워크를 만들어 가장 효율적이고 지속적인 치료약을 찾기 위한 대승적 차원의 꿈과도 만났다. 감정적으로 굴복하고 절망하는 대신 그가 초인의 의지로 보여준 치료를 위한 열의와 이성적인 대처는 비단 그가 발병 전 체력을 열심히 단련했고 본인이 의사인 것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었다. 그건 가족의 지지와 사랑, 앞날이 불확실한 심지어 죽을 수도 있는 연인의 곁에 끝까지 남아준 흔들리지 않는 사랑 덕분이었다. 그녀와 결혼하여 아이를 가지는 꿈을 포기하지 않는 그의 마음이 오래 투병하고 있는 가족을 떠올리게 해 그대로 전해져 와서 아팠다. 


내게 필요한 것을 스스로가 크리스마스트리 아래에 갖다 놓지 않는 한 아무도 그것을 갖고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난 뒤에는 산타클로스를 기다리지 않아야 했다.

-<희망이 삶이 될 때> 에필로그


그가 꿈꾸던 것이 결국 이루어지는 에필로그를 읽으며 눈물이 핑 돌았다. 기도하는 그 사람도 그러하기를 바라며 마음에 위안을 얻는다. 이러한 사례는 희망의 명백한 증거가 된다. 이 책은 의사의 그렇고 그런 투병기가 아니라 한 사람이 위기 앞에서 어떻게 그것에 대처하며 삶을 계속해나가는지에 대한 장엄한 서사시다. 고통을 딛고 난 이후의 삶이 가지는 여운이 길다. 또 배우고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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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12-17 14: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네요, 블랑카님.
마지막에 쓰신 ‘꿈꾸던 것이 결국 이루어지는 에필로그‘란 글귀에 이 책을 읽어야겠다고 마음 먹게 되었어요. 저는 그런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blanca 2019-12-18 13:38   좋아요 0 | URL
이 책 기대이상이랍니다. 진부하지 않고요. 생각할 거리를 많이 줘요. 일단 내가 지금 고민하는 것들을 일거에 아주 사소하고 별 것 아닌 것들로 보이게 해 주니까요. 그 어떤 해피엔딩보다 감동적이었답니다.

moonnight 2019-12-18 13: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어볼래요 blanca님@_@;;; 손가락 증상이 좀 좋아지셨다니 천만다행이에요. 조마조마했어요ㅜㅜ;

blanca 2019-12-18 13:58   좋아요 0 | URL
이 주 동안 항생제를 계속 먹었더니 이제는 위가 아프네요... 여튼 사례가 많지 않으니 온갖 상상하느라 힘들었답니다. 감사해요^^ 머리 감을 때 양 손으로 거품낼 수 있는 행복에 감사합니다.^^;;

프레이야 2019-12-23 1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통증이 나아지셨다니 다행이에요. 충분히 앓고 시간이 지나야 나아지는 것들,,,
시간이 지나도 나아지지 않는 것들이 마음에 걸리지만요. 몸이 아플 때면 또 여러 생각이 들곤해요.
고통을 딛고 난 이후의 삶, 그런 삶을 영위하고 있는 주변 사람들을 보며 제 자신을 돌아봅니다.
미리 크리스마스~~^^ 이 책 담아가요.
아, 갑자기 분홍공주 생각이 ...

blanca 2019-12-24 13:59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오늘 벌써 크리스마스 이브네요. 흑, 올 한 해 진짜 일도 많고 탈도 많고 특히 몸이 여러 군데 말썽을 부렸어요. 내년엔 프레이야님도 저도 건강하고 평안한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분홍공주는 ㅋㅋ 사춘기라지요. 오늘 방학해서 어떻게 좀 훈련을 시킬까 고민 중이랍니다. ㅋㅋ 프레이야님 행복한 성탄 전야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Olive, Again (Library Binding)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 Center Point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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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이듦이란 참 묘하다. 그 사람이 가졌던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욱 강조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중장년때 교육과 사회적 시선 때문에 억눌렀던 여러 고약한 기질이 노년에 드러나기도 한다. 자기다움은 이제 더 이상 영원히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지점으로부터 더욱 진하게 표출된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이것이 오히려 그래서 다행한 일이라 했다. 우리의 올리브 키터리지라면 애저녁에 그녀의 오지랖, 성마름, 고집불통의 성정으로 유명했으므로 그녀의 노년은 더욱 다채로울 것이라 짐작 가능하다. 


열세 편의 이야기는 그녀의 재혼 상대(그렇다, 그 유명한 약국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던 전남편 헨리의 죽음 후 올리브는 마을 주민 잭과 재혼에 성공한다) 잭의 "체포"로부터 슬슬 발동을 걸기 시작한다. 아내와 사별하고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잭이 우연히 교통 경찰의 단속에 걸리는 에피소드에 그의 삶 전체를 농밀하게 압축시키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능력은 여전히 놀랍다. 그녀는 서너장의 짧은 이야기에 한 사람 전부의 인생을 밀어넣을 수도 있다. 우리는 이 짧은 이야기로 올리버의 재혼 상대를 생생하게 그려볼 수 있다. 평범하지만 고지식하고 올리브 같이 세고 기이한 여자도 포용할 수 있는 넓은 품을 상상한다. 


십 대 소녀가 파트타임으로 청소일을 하며 경험하게 되는 묘한 이끌림을 다룬 이야기 <Cleaning>은 그녀가 어떤 식으로 자신의 상실과 성장을 소화해내는지에 대한 과정에 대한 섬세한 묘사이기도 하다. 소녀가 한 행동, 소녀가 느낀 감정은 올리브의 시선을 통과하지는 않지만 그 자체로 설득력을 갖는다. 터무니없어 보이는 그때의 치기들에 대한 묘사는 우리가 잊어버렸던 그것들을 떠올리게 한다. 


<Motherless Child>는 올리브의 장성한 아들 가족이 그녀의 집을 방문하여 머무르며 일어나는 좌충우돌을 통해 부모가 되어 자녀를 키우고 그 자녀를 독립시킨다는 것이 가지는 의미를 톺아보게 한다. 성장한 아이들은 부모와 불화하고 부모의 마음에 차지 않는 배우자를 데리고 온다. 온화하고 따뜻한 정기적인 재회의 풍경은 올리브의 것이 아니다. 그녀가 종반부에 불현듯 비호감 며느리가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올리브 자기 자신을 빼닮았다는 것을 깨닫는 반전이 재미있다. 아들은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엄마와 꼭 닮은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그 아들은 바로 본인이 그렇게 키운 것이다,는 각성은 올리브를 전율케 한다.


죽음을 앞둔 예전의 제자를 찾아가는 올리브는 더 이상 훈계하거나 조언하려 들지 않고 죽음 앞에서의 두려움을 가감없이 공유한다. 이러한 공명은 이 이야기들의 배경인 작은 해안 도시 코스비의 아름다운 자연 풍광에 대한 반짝반짝한 묘사와 어우러져 진한 감동을 자아낸다. 마지막 2월의 빛의 아름다움에 함께 감탄하는 대목은 근사한 마침표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스의 이야기는 마냥 동화스러운 것이 아니다. 경제적 격차, 지역색, 정치관이 충돌하며 빚어지는 그 불화의 지점을 그녀는 잊지 않고 포착한다. 그 불통의 지점은 그러나 끝이 아니다. 그녀의 인물들은 그것이 몰고온 그 사소한 오해와 반목을 성찰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손을 잡고 서로의 고충, 상실을 나누려 노력한다. 그러한 성의와 노력은 우리가 아무리 살고 또 살아도 도저히 알 수 없는 삶과 죽음의 신비를 공유한다는 더 높은 차원에서의 연대에서 가능할 것이다. 항상 정력적이고 에너지가 넘칠 것 같았던 올리브가 점점 신체적으로 정서적으로 죽음으로 향하는 길로 발을 딛는 여정에 대한 묘사는 숨을 턱턱 막히게 한다. 우리 모두가 걸어야 할 그 미래상을 우리의 올리브를 통해 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여전히 올리브다운 올리브는 건재하는 것으로 작가는 아량을 발휘한다. 죽음에 대하여 삶이 남긴 그 숱한 부스러기들을 끊임없이 상기시키지만 그렇다고 삶 자체를 폄하하거나 무의미함으로 쓸어담지 않는다. 그것은 올리브의 힘이기도 하고 작가 자신의 삶과 사람들에 대한 근원적인 애정과 신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여전히 올리브의 목소리는 귀에서 쟁쟁거린다. 그 다음의 이야기를 기대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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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12-12 1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그 다음의 이야기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여기 이렇게 있네요! 게다가 또다른 이야기들로 생생하게 말입니다. 저는 번역본 기다렸다가 읽을래요. 너무나 기다려지는 책입니다.

blanca 2019-12-12 17:12   좋아요 0 | URL
제가 아마 다락방님 덕분에 올리브 키터리지 읽었을 걸요? 아, 너무 좋고 너무 짠하고 막 그래요... 이제 오늘 부로 새 책을 살 명분이 생겼습니다. ㅋㅋ

2019-12-12 15: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올리브 키터리지>에 반해 이 작가의 책은 무조건 전작하겠다 마음먹었죠. 그리고 번역된 책들은 구입은 다 하고 두 권 정도 아직 읽지 못하고 있는데... 아~~ 이 책은 언제쯤 번역되어 나올지.... 기다림의 설렘과 즐거움을 맛볼 수 있게 이렇게 미리 귀뜸해주셔서 감사해요 blanca님~ ^^ 기다리는 동안 읽지 못한 작가의 나머지 두 책도 읽으며 행복하게 기다려야겠어요. ^^

blanca 2019-12-12 17:14   좋아요 1 | URL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정말 작가인 것 같아요. 저도 전작을 해보겠다고 결심했었는데 중간에 그만둬서 어떤 책을 읽고 안 읽었는지 감이 잘 안 온답니다. <올리브 키터리지> 드라마도 진짜 좋대요. 오, 그 기다리는 기분 알지요. 그런 작가가 있다는 건 큰 행복인 것 같아요...
 

책값을 아끼는 방법 중 하나는 한국에 아직 발간되지 않은 원서를 아마존에서 주문해서 읽는 것이다. 일단 도착까지 오래 걸리고 읽는 속도도 느려질 수밖에 없다. 영어 공부까지 덤으로 하겠다고 결심한다면 모르는 단어를 모조리 찾겠다,는 일념으로 덤벼야 한다. 번역본이 없으니 모르는 문장은 구글링까지 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에너지가 소진되다 보니 차마 다른 책을 주문할 엄두가 안 난다. 책값은 굳고 영어 실력은 는다. 

















소설읽기의 재미를 잃은 사람이라면 <올리브 키터리지>를 권한다. 소설은 난해하거나 지루하면 아무리 이야기가 훌륭해도 소설 특유의 힘과 매력을 잃어버린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면에서 이 책은 훌륭하다. 일단 재미있다. 공감할 수 있다. 외국 작가의 작품임에도 동떨어졌다거나 문화적으로 거리감을 느낄 새가 없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인간 보편의 정서를 묘사하는데 이골이 난 작가다. 누구나에게 벌어질 수 있는 일, 들 수 있는 생각, 오만, 편견, 질투, 비교, 욕망을 그녀 만큼 직관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작가는 이 시대에 별로 많지 않은 것같다. 이를테면 올리브의 남편 헨리를 스쳐 지나가는 불륜의 감정도 그녀의 펜끝에서는 도저히 비난하거나 경멸할 수 없고 오히려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것에서 더 나아가 아픈 공감의 감정으로까지 확장된다. 차마 말할 수 없었던 그 모든 놓친 것들을 그녀는 예리하게 포착한다. 그녀의 주인공들은 독자를 단숨에 아군으로 만들어버린다.


사실 [Olive, Again]이라는 제목은 그리 새로울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았다. 전편의 문을 열었던 헨리가 죽고 홀로 된 올리브는 노년에 재혼한다. 거기에서 또 거의 한 세기가 지나는 동안 그려지는 연작 소설은  전편처럼 올리브를  중심으로 메인 주의 크로스비라는 작은 해안가의 마을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야기들로 엮어진다. 올리브 키터리지는 여전히 괄괄하고 화통하고 유머러스하고 따뜻하다. 그녀를 스쳐 지나가는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에는 각자의 삶의 난제와 고민과 절망과 그것을 딛고 살아나가는 그 생의 힘에 대한 눈부신 경의가 있다. 이야기는 전편보다 더욱 깊어지고 조금 더 어두워지고 확장된다. 죽음과 상실과 노년에 대한 두려움이 그것이다. 모두 두려워하지만 차마 터놓고 얘기하지 못했던 것들이 이 매력적인 노부인 앞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우리가 차마 얘기하지 못했던 것들과도 겹친다. 노인요양시설에 가는 것에 대한 공포, 나이듦이 가져오는 자립의 한계, 빈부격차에 따른 소통의 단절, 불륜이 결혼생활에 가져오는 상흔 등 각각의 단편은 근사하게 집약된 삶의 고충의 형상화다. 그럼에도 여전히 삶과 사람들에 가지는 식지 않는 애정의 열정은 올리브 키터리지 특유의 생동감 있는 에너지를 분출한다. 


다 읽기도 전에 작가의 맺음말에 이 책을 완성하는 데 기여한 어린 시절 친구들에 대한 고마움에 대한 표현에 괜시리 가슴이 먹먹해졌다. 환갑이 훌쩍 넘어도 내 곁에 남아 이런 감사를 받을 친구가 있다면 그 사람 인생은 얼마나 값진 것이 될까. 나는 그럴 수 있을까 생각하니 잠시 쓸쓸해지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초등학교 시절 친구는 없는 것 같다. 항상 곁에 있었던 친구는 지금 지구의 반대편 끝에 있다. 여러 모로 올리브 키터리지와 그녀를 만들어 낸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부러워지는 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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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12-10 14: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리브가 다시 돌아 왔군요...

속히 번역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blanca 2019-12-10 15:57   좋아요 0 | URL
아마 곧 번역되지 않을까 싶어요. 올리브 키터리지 특유의 너스레를 잘 살릴 수 있는 번역을 기대해 봅니다.

stella.K 2019-12-10 14: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단편 소설 읽는 감이 좀 떨어졌나 봐요.
오래 전 누가 선물해 줘서 받아두고 두 번 정도 읽기를 시도하다가
매번 손에서 멀어졌어요. 좋긴한데 넘 잔잔한 느낌이라.
다시 끌어다 놔야겠어요.ㅠ

blanca 2019-12-10 15:59   좋아요 1 | URL
아, 스텔라님 말씀이 무슨 얘기인지 알 것 같아요. 저는 한국 여러 작가 단편 모음집 읽을 때 특히 그래요. 주인공들 이름도 계속 잊어버리고 몰입이 안 되면 이야기 자체가 이해하기 어려워지더라고요. 장편보다 읽는 데 더 오래 걸리는 것 같아요. 이 책은 그나마 연작이라 서로 서로 연결되는 인물들 스토리가 많아 몰입이 아주 어렵진 않았어요.

수연 2019-12-10 15: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블랑카님 글 읽으니 읽어보고싶은 마음이 확 들어요!

blanca 2019-12-10 15:59   좋아요 0 | URL
그래요? ^^ 기분이 좋네요.

단발머리 2019-12-10 15: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글 읽으니 이보다 더 좋은 영어공부법 + 책값 절약하는 법이 없을 듯 합니다.
얼른 <Olive, Again>을 읽고 싶으나, 사실 <My name is Lucy Barton>도 몇개월째 ‘읽고 있어요‘ 중인지라,
침만 삼키고 있네요. 꿀꺽!

blanca 2019-12-10 16:00   좋아요 0 | URL
ㅋㅋ 다 읽고서 영어로 리뷰까지 써야겠다고 결심하면 한 몇 달은 새 책 구입 않고도 견딜만해진답니다. 영어 실력은 덤으로 따라오지요. 저 한동안 책을 너무 사대서 반성하는 마음에서 시도한 거랍니다. ^^;;;

psyche 2019-12-11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반가워라! 도서관에서 대기 걸어넣고 기다리다가 드디어 차례가 되서 빌려왔어요. 무척 기다린 책인데 막상 책을 빌려오고 나서 거의 손을 못대고 있네요. 대기자가 많아 연장도 안될테니 빨리 읽어야할텐데...

blanca 2019-12-11 09:26   좋아요 1 | URL
오, 프쉬케님, 어서 시작하세요. 후회 안 하실 겁니다. 감동적이에요. 저 이제 한 챕터 남았는데 아까워서 못 읽을 정도랍니다. 자,자, 어서요.

coolcat329 2019-12-11 23: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머! 속편이 나왔군요. 빨리 번역되면 좋겠어요.

blanca 2019-12-12 12:21   좋아요 0 | URL
저는 전편보다 오히려 훨씬 더 좋았어요. 빨리 나오기를 고대해 봅니다.

프레이야 2019-12-14 2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올리브가 돌아왔군요. 어서 만나고픈 이야기에요. 내 이야기의 소재가 되어둔 친구 가족 지인들을 떠올려보게 되네요 스트라우트의 말을 보니까요. 영어로 리뷰까지!! 블랑카님.

blanca 2019-12-15 09:41   좋아요 0 | URL
우아, 프레이야님이다! 오늘 드디어 가지고 있는 책들을 거의 다 읽어 정당하게 ^^;; 책들을 지릅니다. ^^ 연말 잘 마무리하고 계신가요?

프레이야 2019-12-15 12:33   좋아요 0 | URL
네. 블랑카 님의 리뷰는 늘 좋아요. 전 올해 세번째 책을 내고 이제 좀 쉴까하는데 연말 마무리할 것들 거의 하고 지금 서안 와 있어요. 생각보다 미세먼지 수준이 나쁘지 않고 좀 흐린 정도네요. 커피 한잔중이에요. 분홍공주가 많이 컸겠어요
 

도저히 오지도 가지도 않을 것 같았던 2019년도 이제 한 달여가 남았다. 그리고 이제 새로운 세기가 온다. 여전히 읽고 썼다. 기억은 희미하고 기록은 남는다,는 이야기가 맞다. 그래서 또 남긴다.



리처드 플래너건이 하는 전쟁 포로 이야기는 작가 자신의 아버지의 증언과 죽음과 맞물려 있다고 한다. 이야기는 허구가 아니고 과거형이 아니고 타인의 것이 아니다. 상황이 인간의 의지를 압도할 때 그럼에도 남는 의미가 있는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물음은 여운이 길다. 감히 앉아서 읽기에 황송했던 책이었다고까지 할 수 있을까. 그가 얘기하는 한국인 경비병에 대한 이야기에 가슴이 먹먹했다. 김치를 그리워하는 그 마음은 분명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대한 작가의 깨달음이 전해져 왔다.









연령과 인습과 상식을 뛰어 넘는 사랑이 가지는 의미에 대하여 어떤 개인적 편견을 뛰어넘어 공감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분명 작가의 성취일 것이다. 구태여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수많은 것들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의 저력에 압도당할 수밖에 없다. 여전히 책은 죽지 않았고 이야기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지를 보여주는 작품. 억지로 쥐어짜지 않고 나오는 삶들의 형상화에 절로 경탄하게 되는 이야기들.










자신이 속물이라고 어렵게 고백하는 책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면 그것을 그냥 대놓고 이야기하지만 감히 그 화자를 미워할 수 없게 만드는 이야기. 작가의 자전적인 성장기는 소년이 왜 그렇게밖에 될 수 없었는지에 대한 짙은 호소력을 지닌다.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소년의 삶은 그 틈새에서 우리 자신을 발견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저자에 대한 찬반양론이 있다. 그럼에도 그가 자신의 인생을 통해 이야기하는 삶에 대한 조언은 깊은 울림을 가진다. 전체를 흔드는 위기에 봉착했을 때 과연 어떻게 그 전장을 뚫고 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충고는 공허하지 않고 가식적이지 않다. 그 자신이 어마어마한 고통과 시련을 통해 연마한 것들에 대한 가감없는 고백이기 때문이다. 젊은 사람도 나이 든 사람도 제목이 가지는 것 이상의 저마다의 깨달음을 얻어갈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지금 힘들거나 혼란스러운 상황이라면 이 책이 가지는 의미는 더욱 깊어질 수 있지 않을까.








뻔한 책이 아니다. 쉽고 재미있게 읽히지만 가벼운 책도 아니다. 요리의 노하우도 걷기의 노하우도 심지어 삶의 노하우도 있다. 하정우는 분명 뭔가를 겪었고 알고 표현할 수 있는 배우이자 작가라고 생각한다. 빌려 읽지 말고 사서 읽으시기를...












너무 우울하거나 힘들 때 읽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책이다. 모든 허식과 망상과 환상이 일순간에 타격되고 적나라한 인간의 두려움과 삶의 허약함이 일순간 드러나면 한없이 공허해지고 두려워질 테니까. 그럼에도 우리가 가질 수밖에 없는 죽음이 가져오는 그 폭력성과 무자비한 무의미를 직시한다는 것은 의식이 있는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비극적인 통찰이기도 하다. 저자 자신이 스스로의 죽음을 대면하며 토로하는 이야기들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내가 끄달리던 숱한 그 사소한 번뇌, 집착이 얼마나 가볍고 추악하게 느껴지는지 모른다. 심연의 끝에 가닿게 만드는 책.









그리고 2020년의 읽기를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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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19-12-04 13: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처드 플래니건의 소설에 등장하는
한국인은 포로가 아니라 포로 감시원
이지 싶습니다.

blanca 2019-12-04 14:02   좋아요 0 | URL
헉, 경비병입니다. 감사해요. 수정하겠습니다.
 

사십 대에는 사십 대의 이야기가 있다. 당연히 이십 대에는 이십 대만이 공감할 수 있는 사연이 있다. 어떤 연령대를 통과해야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그리고 때로는 그 안에 있어야만 공감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육십 대의, 이만 여구가 넘는 시신을 부검한 법의병리학자가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차마 짐작조차 할 수 없는, 하지만 그 고백의 무게와 깊이에 자꾸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힘이 있었다.
















리처드 셰퍼드는 부검을 통해  정확한 사인을 밝히는 일을 하는 영국의 법의학자다. 아홉 살에 생모를 잃고 어머니의 역할까지 함께 그러안은 아버지의 양육 아래 그가 법의병리학자가 되기로 결심한 계기는 우연히 친구가 학교에 갖고 온 [심슨 법의학]이라는 책이었다. 이 책의 제사에 인용된 알렉산더 포프의 <비평론>의 "아무리 어려워도 진실을 말하는 것을 두려워 말라"는 그의 안치소에서, 법정에서 하나의 금언이 된다. 여러 죽음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잔혹한 비인간성을 대면하게 되는 에피소드들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도 결국 진실의 힘과 그것을 입밖에 내어 말할 용기다. 죽음이 만연한 직장에서 집으로 돌아온 후에는 아내와 아이들 앞에서 아버지라는 페르소나를 다시 재창조해내어야 하는 그 간극의 어려움에 대한 표현도 진솔하다. 셰퍼드는 뒤늦게 의학 공부를 시작한 아내와 함께 두 아이를 돌봐야 하는 상황에서 가족에게 "이런 생활에 어떻게 사랑을 끼워 넣을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고 토로한다. 자신의 일에 대한 사랑과 열정만으로 삶 자체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라는 깨달음은 그가 이야기하는 그 숱한 죽음들에서 진실의 체를 거르는 일과 더불어 그의 생애 전반을 통해 학습된다. 비단 죽음 뿐 아니라 그것과 교차되는 그의 생애의 내레이션의 교훈 또한 여운이 길다. 종반부에 그가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통과하는 여정의 그 생생한 고통은 읽는 이에게도 전해져 올 정도로 절절하다. 그가 속한 학계와 사회의 변화와 그 자신의 노화, 삶의 경로의 전환, 미처 해결하지 못하고 간 죽음들의 진실들의 귀환은 긴밀하게 서로 얽혀 이야기의 현란한 태피스트리를 완성한다.


그는 이 책이 하나의 치유의 여정이었음을 고백한다. 자신의 투병을 고백하면서 그가 객관화했던 죽음들은 공포나 환멸이 아니라 공정한 진실을 규명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으로 그리고 당사자들에게는 결국에는 종국의 안식으로 수렴한다. 때로 섬뜩하고 끔찍했던 이야기들의 마침표는 화자의 것이다. 저마다의 사연은 그 비극성으로 마음을 산란하게 했지만 차갑지만 고요한 여운을 남긴다. 이 책 안에서 진실의 정의가 필요했던 미제의 살인 사건들은 결국 정의의 축으로 이동하여 안도를 준다. 그를 괴롭혔던 억울한 혐의들도 무혐의로 종결된다. 그리고 그는 자신에게 결국 그렇게 많은 두려움과 공포를 남겼던 그 숱한 죽음의 현장으로 다시 돌아간다. 마치 삶과 죽음은 결국 만난다는 하나의 비장한 은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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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11-27 17: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글을 읽으니 이 책의 분위기는 [뉴욕 검시관의 하루]와 비슷한가, 싶어지네요. 저도 읽어볼게요.

blanca 2019-11-28 11:45   좋아요 0 | URL
아, 저는 [뉴욕 검시관의 하루]는 아직 못 읽어봤어요. 한번 찾아봐야겠네요. 무엇보다 책이 재미있더라고요. 순간순간 섬뜩섬뜩하기도 하고요.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흥미진진한 추리 단편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