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떠올릴 때 내가 수정 보완할 거리들을 찾아 헤맬 때가 있다. 정말 땜질하고 잘라내고 덧붙여서 완벽한 그림을 만들 수 있을까. 그 그림 속의 나는 좀더 온전하고 완벽한 존재가 되는 걸까? 나는 정말 그러고 싶은 걸까.

















만약 우리가 같은 시간, 같은 장소, 같은 상황에서 과거에 이미 겪었던 일을 다시 겪으며 살 수 있다면, 그러면서도 처음보다 실수도, 오점도, 공백도 없이 훨씬 더 잘살 수 있다면......그건 마치 정정한 곳투성이의 육필원고를 깨끗하게 다시 베껴 쓰는 것 같을 거야......

-파트릭 모디아노 <잠자는 추억들>


파트릭 모디아노가 나의 그런 마음을 언어로 절묘하게 표현했다. 이 이야기는 노년에 접어든 작가가 파리의 공간을 배경으로 십대 후반에서 이십 대 초반 사이 만난 여인들에 대한 기억을 적어 내려간 일종의 오토픽션이다. 전적으로 자전적이라 보기도 그렇다고 완전히 만들어낸 이야기라 보기도 힘든 그 어느 중간 지점의 우리 모두의 보편적인 청춘의 만남에 대한 공감지대에 놓인 그런 매력적인 이야기다. 나보다 이미 나이가 들어버린 여인들을 만나고 헤어지는 이야기는 그러나 사랑에 대한 낭만적인 추억거리가 아니다. 신비주의에 빠진 여인, 남자를 죽였을지도 모르는 여자와의 의도치 않은 도피 등은 흐릿하고 신비롭다. 파리의 거리를 거니는 젊은 시절의 파트릭 모디아노는 다시 돌아가도 그 시절의 실수, 실패를 반복할 것이다. 지금의 위대한 작가의 모습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는 청년은 때로 무책임하게 귀환을 기약하며 도망쳐 버린다. 그 탈주는 비겁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다시 그 자리에 정말 약속한 대로 돌아갔다면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지 못할 것이다. 청춘의 무책임은 때로 이미 예비된 미래의 현실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존 버거의 '한때'에 관련한 단상들은 어떠한가. 수많은 한때를 소환하며 그 덧없음을 환기시키지만 그렇다 해도 그 덧없음이 무의미와 동의어는 아님을 방증하는 이야기들은 무겁고 저릿하다. 존 버거가 이야기하는 과거는 그런 의미에서 지극히 현재적이다. 우리 존재의 기저에 깔려 끊임없이 떠오르는 그 추억들을 제외하고 우리는 우리를 이야기할 수 없다. 

















어느 한순간을 깊이 경험할수록 경험은 더 많이 축적된다. 그런 순간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아 있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이 경우 낭비로서의 시간의 흐름은 저지된다. 살아 있는 시간은 길이의 문제가 아니라 깊이와 밀도의 문제다.

-존 버거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 가슴>


덧없지만 덧없게 될 것을 알지만 영원할 것처럼 깊이와 밀도를 부여하는 현재에서 우리는 비로소 제대로 살아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 누구도 시간을 이길 수 없지만 그렇기에 시간 안에서 부유하는 우리의 추억들은 어떤 의미를 부여받는다. 수정할 수도 덧붙일 수도 삭제할 수도 없는 우리가 만나서 그 공간과 시간을 채웠던 만남들에 대한 기억의 복원은 우리 내면을 채우는 존재의 밀도의 기원일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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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2-04-28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과거를 돌아보면 똑같은 상황에 처하면 그렇게 안 할 거야, 하는 것도 있지만... 이럴 땐 반성을 하죠.
똑같은 상황에 또 처해도 그렇게밖에 할 수 없을 거야, 하는 것도 있더라고요. 사람은 참 안 변한다는 생각이 들죠.

blanca 2022-04-29 12:44   좋아요 0 | URL
맞아요. 다시 돌아가도 다른 선택을 한다는 보장은 없을 것 같아요. 이젠 받아들이기가 숙제인 것 같아요.
 
달몰이
조에 부스케 지음, 류재화 옮김 / 봄날의책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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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어떻게 분류할 수 있을까. 어떤 특정 규격과 기준, 범주에 넣기 곤란한 책이다. <달몰이>의 작가 조에 부스케는 1차 세계대전에 자원입대했다 독일군의 포탄에 맞아 하반신이 마비되어 남은 생을 자신의 침실에 갇혀 지내게 된다. 나는 그러한 자기 상황에 대한 절망, 연민, 승화의 개인적 경험담일 거라 여기고 책을 펼쳤다. 구체적인 고통의 현시들이 줄을 이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 책은 그런 이야기와 멀다. 그보다는 자유로운 몸으로 산 세월보다 침실에 유폐되어 보낸 시간이 더 긴 작가가 내면으로 침잠하여 삶과 고통, 죽음에 대하여 사색하여 길어낸 진실들에 대한 거대한 산문시에 더 가깝다. 그 발견들과 그것을 표현한 언어의 깊이와 밀도가 놀라울 정도로 아름답다. 나는 지금 산문을 읽는 것인가, 시를 읽는 것인가가 가끔 헷갈릴 정도로 정제된 언어의 향연이다. 


"그가 죽어야만 한다는 것을 알게 된 시간에 비로소 그가 시인이라는 것을 안다."는 그의 이야기는 그런 의미에서 진실이다. 스무 살에 포탄을 맞고 "나의 유령"이 된 조에 부스케는 그 순간부터 시인이 된다. 그는 그에게 일어난 재난을 그의 바깥에 흐르고 있는 삶의 하나의 사실로 받아들인다. 그 사실들을 관통하며 우리는 생을 명사가 아닌 동사로 경험한다. 우리에게 우리는 실재가 아니다. 나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다. 과거의 내가 겪은 일들은 내 바깥에 있다. 나는 생을 통과한다. 나는 결국 허무로 수렴한다. 나에게 일어나는 불행들은 특수한 것이 아니다. 불행은 나를 지명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나에게 와닿아 떠나간다. 내 앞에 선 사람들, 내 옆에 선 사람들, 내 뒤에 올 사람들 모두가 경험하는 생의 근본적 속성이다. 조에 부스케는 자신의 불운을 이렇게 해석한다. 자신의 생을 특별하거나 특수한 것이 아닌 보편적이고 거대하고 심원한 하나의 본질에 합류되는 것으로 전제한다면 그 고통마저 그러한 차원의 것이라고.


네 고통도 의인화해야 그것을 이겨내는 격조차 생긴다.


'나'와 '나의 세계'와 '나의 삶'을 혁명적일 만큼 새로운 시각으로 조망하게 하는 책이다. 고통의 심연에 빠져 마땅한 것으로 보이는 사람이 어떻게 자신의 야망을 "사는 것"으로 치환하는지 보여주는 전범 같은 책. 


"우선 내가 내 심장에서 뜯어낸 책 한 권을 다시 만드는 일"이 바로 이 <달몰이>다. 내가 초래한 것들이 삶이고 내가 사는 것이 나의 삶이라 생각하는 모든 이에게 권하고 싶은 책. 그 경계를 뛰어넘을 때 볼 수 있는 것들을 시인의 빛나는 언어로 보여준다.질 들뢰즈의 <의미의 논리>에서 발췌된 조에 부스케의 덧붙여진 해석은 멋진 미주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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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4-18 10:2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덕분에 읽게 된 책 ˝랭스˝.
조에 부스케도 읽게 되면 다 블랑카님 덕분이겠습니다.

이 글이야 말로, 리뷰인지 산문시인지 모호하고, 모호해서 더욱 아름답네요.

˝우리는 생을 명사가 아닌 동사로 경험한다.˝ 이 문장은 특히 아름답지만, 솔직히 그 뜻을 제가 다 헤아리지는 못했습니다. 어쩌면 생각해본 적이 없이 관성적으로 매일을 채워와서 어렵게 느껴지는 지도.


blanca 2022-04-18 12:27   좋아요 1 | URL
그 문장은 저의 독창적인 생각이 아니라 조에 부스케의 생각을 제 식으로 표현한 것에 불과해요. 이 책 정말 놀라웠어요. 한 번 읽어서는 안 될 것 같아 표시한 곳 위주로 필사를 해봤는데 역시 기분이 정말 오묘해졌습니다. 제대로 잘 읽어냈는지 확신이 안 서지만 정말 대단한 책입니다.

수이 2022-04-18 11: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이 별 다섯개 주신 책들은 제가 다 좋아하는 책들이거나 좋아할 것만 같은 책들이더라구요. 달몰이는 아직 안 읽었으니;;; 읽어봐야겠어요.

blanca 2022-04-18 12:28   좋아요 0 | URL
제가 후회하는 게 별 다섯 개 책을 엑셀로 좀 추렸어야 하는 건데...이 생각이 갑자기 불현듯 떠올라서...언젠가 작업을 좀 해 보려고 해요. 누가 가장 좋았던 책 뭐였냐고 물으면 머리가 하얗게 되어버려서요. ^^;;

짜라투스트라 2022-04-18 15: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무 좋네요 진짜 한 번 읽어봐야 할 듯^^

blanca 2022-04-24 11:53   좋아요 0 | URL
네, 짜라투스트라님 정말 좋았어요. 소장하고 두고두고 읽겠다고 생각할 만큼요.
 

시대의 역사는 승자 독식이 되기 쉽다. 승자의 언어와 승자의 시선과 승자의 해석이 사실을 직조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일제 시대의 역사는 우리가 주체로 제대로 된 진상 조사, 사료 고증이 아직 많이 부족한 형편이다. 있었던 사실이 지워지고 폄하되고 없었던 허구가 비집고 들어간다. 아직도 제대로 이야기되지 않은 많은 일들이 있었다.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습 이후 이미 한일합병 이후 30년이 훌쩍 지난 시대의 청년들을 상상해 본다. 독립된 주권 국가가 아닌, 일본의 지배하에 태어나고 일본어 이름으로 개명을 강요당했던 세대가 일본의 군속인 포로감시원으로 차출되어 그들에게 협조했다고 하면 과연 그들은 죄가 있는가, 없는가. 그것이 설사 자원에 의한 것이었다 하더라도 과연 그것은 자유의지였을까, 아니면 시대적 상황에 따른 강요에 의한 것인가. 그렇다면 그들은 결백한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다층적이고 비극적이며 도발적이다. 


이 책은 1942년 8월 부산항을 떠나 남방에서 오년 동안 포로감시원으로 일했던 최영우의 이야기를 외손자인 저자가 할아버지가 남긴 글을 해제하고 보충 재구성했다. 최영우는 실제로 일본의 항복 이후 싱가포르 및 자카르타 인근 형무소에서 용의자로 조사를 받고 구금된다. 일본은 패전국으로 전범이 되고 그럼으로써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지만 피식민지인으로서 식민지 국가의 전범 행위에 협조한 셈이 되는 이 아이러니하고 혼란스러운 지위에 많은 사람들이 놓였다. 왜 기꺼이 용감하게 저항하거나 거부하지 않았나, 라는 질문은 너무 가혹한 것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윤리적인 질문과 생존은 충돌한다. 생존이 급한 일이 되지 않는 영역 안에서 우리는 자유롭고 저돌적으로 윤리적이고 진보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 문제는 이것이 상충되는 지점에 놓일 때다. 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생존을 택했다. 그리고 손자는 그의 선택 아닌 선택과 그것으로 잃어버린 시간을 담담하게 복원한다. 그 이야기에는 어떤 지워지지 않는 비애가 있다. 그 비애는 사는 일이 그런 참혹한 선택의 기로와 만날 수밖에 없게 되는 일이다. 그리고 나의 자유 의지보다 시대 상황과 주변의 여건이 엄청난 위력을 행사할 때 내가 잃어버리는 것들에 대한 상실감이다. 


최영우는 친척이 못 알아볼 정도의 몰골로 돌아온다. 이후의 그의 삶에서 이전의 그가 가졌던 희망, 활기. 꿈들은 돌아올 곳을 찾지 못한다. 그의 기록은 이후 없다. 어쩌면 가졌을 내일에 대한 희망, 과거에 대한 회한조차 손자는 알 길이 없다. 손자는 그러나 할아버지가 보냈던 그 고통의 시간을 세상 바깥으로 마침내 들고 나온다. 자랑스럽고 빛나는 이야기만이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숨기고 싶을 수 있고 잊고 싶기도 한 이야기들도 이 세상에 자리가 있다. 역사는 잊혀진 자들의 이야기로 균형을 이룬다. 그들에게 걸맞는 언어와 이야기를 부여하려는 노력은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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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의 우물 1 펭귄클래식 22
래드클리프 홀 지음, 임옥희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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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버지니아 울프의 <올랜도>가 출간되었다. 같은 해에 평생 남장을 하고 다녔던 작가 레드클리프 홀의 <고독의 우물>은 출간 즉시 여성들의 동성애를 그렸다는 이유로 금서 처분을 받는다. 2022년에 1928년에 출간된 성소수자의 이야기를 읽는 일은 우리 사회가 당시의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던 편견의 시선에서 얼마만큼 더 자유로워지고 진보했나를 자문하게 했다. 


그리고 비단 이 이야기는 성소수자의 이야기로서만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 세상이 부여하는 관습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고 그것은 때로 엄청난 소외감과 고독을 유발한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경험하게 되는 근원적 고독, 소외감, 상실에 대한 처절하리만치 아름다운 애가로 읽힐 수 있을 것이다. 


레드클리프 홀의 문장은 각별히 아름답다. 특히 주인공 스티븐이 태어나 자라는 고든 가의 시골 영지 모턴의 자연 풍광의 묘사는 절창이다. 스티븐이 그 아름다운 자연을 바라보며 느끼는 감동과 분리가 되지 않는 슬픔은 자신의 몸이 자신이 지향하는 남성성에 부합하지 않는 데서 오는 간극과 모순에서 느끼는 혼란과 닿아 있다. 아들을 바랐던 아버지 필립 경과 어머니 애너에게서 태어난 이 엉뚱한 아이는 결국 자신이 지향하는 남성성으로 자연스럽게 이행한다. 여성의 몸을 한 남성은 여성들과 사랑에 빠진다. 그 사랑은 번번이 어긋나고 매번 실패한다. 무엇보다 세상에 떳떳하게 인정받을 수 없었다. 세상이 요구하는 준거틀에 부합할 수 없었다. 세상이 누리는 양지에서 자랑스럽게 드러낼 수 없었다. 


그녀는 자기 안에 시체를 짊어지고 다녔다. 안젤라에 대한 사랑의 시체였던가?


무엇보다 미망인이 된 어머니의 반응은 충격적이다. 평범한 여성으로 남자와 사랑에 빠져 결혼하고 가정을 이루기를 바랐던 애너는 딸이 남성의 옷을 입고 같은 여자와 사랑에 빠지는 행태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녀는 심지어 그 이유로 딸을 사랑할 수 없었고 거부감을 느꼈다. 스티븐이 결국 목숨보다 사랑했던 유년의 집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러한 어머니의 단죄 때문이었다. 이후로도 스티븐은 사랑하는 제인을 그곳에 데려갈 수 없었다. 자신의 사람을 지키기 위해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곳을 보여줄 수 없다는 사실은 그녀를 내도록 괴롭혔다. 



영문학사 최초의 레즈비언 소설이라는 문구는 <고독의 우물>을 반 정도밖에 설명하지 못한 말이다.  그 틀 안에서 이 이야기를 받아들인다면 여러 한계가 보인다. 무엇보다 주인공 스티븐이 아주 어렸을 때부터 남성이 되고 싶어했으며 여성과 사람에 빠질 때마다 자신을 남성적 위치에 상정한다는 것이 가지는 의미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그녀는 여성으로서 여성과 사랑하지 않는다. 당시 이성애적 사랑에 빠질 때 남성이 점유하는 위계에 집착한다. 연인을 보호하고 경제적으로 지원하며 생활을 통제하고 싶어하는 모순에 빠진다. 이 이야기 안에서 남성성은 때로 폭력적이고 위압적이지만 강력하고 우월한 것으로 그려진다. 즉 레즈비언의 이야기이면서 여성과 여성성을 존중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또한 성적 소수자들의 아픔과 소외감에 집중하면서 정작 흑인들을 검둥이라고 부르고 하대하는 장면들을 그린 것은 시대적 상황을 감안하더라도 작가가 실제 귀족주의자였고 파시즘을 지원한 경력 등으로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당연히 여러 소수자적 집단에 속할 수 있다. 남성이자 백인인 성소수자가 될 수도 있고 흑인 이성애자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분류에 따라 어떤 곳에서는 우위를 점하거나 어떤 곳에서는 약자적 소외감을 경험할 수 있다. 그렇다고 자신의 모든 행동과 말이 자신의 소수자적 정체성만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소수자가 인종차별을 정당화할 수 없는 것도 같은 맥락의 이야기다. 이 대목은 이 작품의 높은 완성도를 볼 때 상당히 아쉬운 대목이다. 


<고독의 우물>은 인간이 사회적 정상성 기준에 부합하지 못할 때 느끼는 고독을 처절할 정도로 섬세하고 아름답게 형상화한 작품이다. 스티븐이 끝내 극복해내지 못하고 만 것들의 잔향이 여전히 오늘날에도 심연을 드리운다. 대다수가 정상이라고 상정하고 만들어 놓은 틀 바깥으로 내쳐지는 수많은 주변인들의 고독과 그 소외감을 상상해 본다. 사랑은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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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2-04-08 12: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남자들의 사랑을 그린 모리스, 를 읽은 적이 있어요. 포스터의 작품 같아요. 장편소설.
뒤에 반전이 있어 멋진 작품으로 기억하게 됐어요.
요즘 드라마에도 동성애 사랑을 그린 거 예고편인가 본 것 같아요. 세상이 진보하고 있는 중이네요. 늦은 감이 있지만.

blanca 2022-04-08 12:34   좋아요 2 | URL
페크님, 저도 <모리스> 정말 좋아해요. 다시 읽어봐야겠어요.

새파랑 2022-05-07 07: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축하드려요~!! 저도 이 책 읽으려고 계속 꺼내놨는데 아직 못읽었네요 ㅜㅜ 이번달에는 읽어봐야 겠습니다 ^^

blanca 2022-05-07 09:10   좋아요 1 | URL
오, 새파랑님 덕분에 알았네요.감사합니다!

서니데이 2022-05-07 17: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blanca 2022-05-08 08:24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나는 겁이 많다. 원체도 모험심이 부족했지만 나이가 들수록 새로운 시도, 새로운 길,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일에 점점 더 두려움이 늘어가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하루가 다르게 늙어가는 기분이다. 나이가 든다는 건 그냥 가만히 앉아 세월을 맞는 일이 아니라 인간이 결국 연약하고 유한한 몸에 갇혀 있다는 사실을 체현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에는 품이 들고 상실이 들이친다. 그러니 나라는 사람은 나날이 더 겁쟁이가 되어가는 것 같다. 헌 마음에 부대낀다. 
















요즘 젊은 작가 중 이슬아는 가장 전면에 부각된 인물일 것이다. 이렇게 안 읽는 시대에 글을 써서 유명해지고 생계도 가능하다는 걸 청년들에게 보여주는 드물지만 희망적인 사례의 대표 주자일 것이다. 그녀가 나이 든 육체 노동자들을 인터뷰한 책이다. 응급실 청소 노동자, 인쇄소 기장과 경리, 수선집 사장의 인터뷰는 나를 흔들었다. 이런 유형의 인터뷰가 새로운 것은 아니다. 심지어 르포 형식의 이야기들도 있어 왔다. 그러나 이슬아 작가가 그들과 나눈 대화는 그러한 전형적인 틀을 깨부수는 것이었다. 우리가 기대하게 되는 노동 현장에서의 애환, 소외감, 한탄이 아니라 그들이 그 화려하지 않은 자리에서 살아낸 각자의 삶으로 직조한 서사의 결정체가 이슬아 작가의 목소리로 빛난다. 


응급실에서 환자들이 흘린 피, 남들이 기피하는 각종 쓰레기를 종일 치우면서도 "세례를 받아서 이제 더 으른이 되어야죠."라고 말하며 웃는 육십대의 청소 노동자 순덕 할머니는 그 피곤한 육체 노동의 와중의 유일한 휴일날 집에서 쉬는 대신 또 자신의 몸을 움직여 봉사할 일을 찾는다. 


표고버섯을 키우는 농업인 윤인숙 할머니는 "스트레스를 안고 꿍해있으면 나 자신이 너무 상해버리잖아. 새 마음을 먹는 거지. 자꾸자꾸 새 마음으로 하는 거야."라고 스트레스를 받는 딸에게 말한다. 여느 철학자보다 더 심오한 인생 조언이다. 


팔십대의 수선집 '미래로' 사장님에게는 슬아 작가에게 고백하는 늘그막에 찾아온 찬무 할아버님과의 애틋하고 아름다운 러브스토리가 있다. 연인의 수선집에 '미래로'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예뻐해줬던 할아버지와의 마지막을 마감하며 사장님은 그럼에도 돌아가고 싶은 시절은 없단다. 왜냐면 "지금이 제일 좋아," 이 얼마나 도발적이고 기대치 않았던 명답인가. 


저마다의 분야에서 하는 청소, 옷 수선, 농사에서만큼은 그 누구보다 완벽하다고 자부하는 그리고 지금이 정말 너무 좋다,는 이 할머니들의 이야기에 나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사는 일은 그렇게 엄중하고도 존귀한 일임을 잊었다. "새 마음"을 먹어야겠다. 오늘도 내일도 또 흘려보낸 어제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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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2-03-31 08:4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침에... 블랑카님 글 읽으니 너무 좋네요. 이슬아는 항상 응원하는 작가인데 이런 근사한 책이 있었군요. 어른들의 사연, 말씀이 하나 하나 마음에 꽂히네요. 새 마음이 필요한 저에게 너무 딱이네요. 감사해요, 블랑카님!!

blanca 2022-03-31 09:03   좋아요 1 | URL
단발머리님, 요새 좀 의기소침해 있었는데 이 책 읽고 정신이 번쩍 들더라고요. 어르신들의 삶에 대한 자세를 들으니 저는 아직도 더 ˝으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슬아 작가 인터뷰집 다 읽어보려 합니다.

파이버 2022-04-02 19: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금이 제일 좋다‘라니 하루하루를 의미 있게 쌓아와야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의 나에 대해서 자부심을 가지려면 얼마나 어른이 되어야 할까요. 어르신들 말씀이 정말 멋있어요.

blanca 2022-04-03 10:33   좋아요 1 | URL
파이버님, 저는 이제 나이 드신 어르신들의 밝은 표정을 보면 그 어떤 유명인사나 화려해 보이는 사람보다 더 대단해 보여요. 나이 드는 게 그냥 시간만 간다고 절로 되는 게 아니더라고요. 늙고 견디고 죽음까지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평범한 삶이 가장 특별하고 빛나는 것이라는 생각을 요즘 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