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좌안의 피아노 공방
사드 카하트 지음, 정영목 옮김 / 뿌리와이파리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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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아요, 팔아. 자리도 비좁고!
아버지는 내키지 않는듯 머뭇거린다.
그래도 할머니가 사 주신 건데......

좁은 집에서 세 형제가 십 년 가까이 방치하고 있던 밤색의 삼익 피아노는 그렇게 실려 나갔다. 

   
 

 우리는 피아노에 꿈을 투자한다. 지나가다 내키면 건드려본다. 그 위에 가장 좋아하는 사진이나 귀중한 물건을 올려놓아 집안의 성전으로 꾸며 놓는다. 이런 피아노가 우리 삶에서 사라지면 그것은 사실 대체할 수가 없다. 거기 포함되어 있는 우리 삶의 흐름의 한 부분을 돌이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
-p.217

 
   

 

만 다섯 살도 되지 않아 피아노 가방에 바이엘을 넣고 가정식 피아노교습소를 들락거리게 됐다. 어렸을 때 너무나 피아노가 배우고 싶었지만 팍팍한 생활로 좌절당한 엄마는 벼르고 있었다는 듯 이사만 갔다 하면 제일 먼저 근처의 피아노 학원을 수소문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엄마의 딸은 절대음감과는 거리가 멀었고 아버지가 눈물의 피아노라고 우스꽝스러운 농담을 던질 만큼 언제나 야단맞고 흐느끼며 피아노를 쳤다. 그 부작용의 여파로 지금도 나는 아이의 의사에 반하는 조기 음악 교육에 반대한다. 공부하는 것보다 피아노 연습하는 게 더 싫고 지겹고 힘들었다. 소질이 있냐, 소질이 있다, 피아노 선생과 엄마 간에는 희망없는 모종의 공모와 속임과 속아줌이 있었다. 콩쿨 예선에서 바로 탈락한 것은 정말 다행한 일이었다. 소위 좀 쪽팔려서 조금 울고 말았지만 의외로 야단치는 사람도 없고 기대했던 사람도 없었던지 하나의 해프닝이 되어 버린 일. 나는 피아노에 소질이 없었다.

   
 

 이런 종류의 발표회는 모든 피아니스트 지망생이 제2의 호로비츠가 될 수 있다고 하는 엄청난 신용사기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극소수의 독주자만이 정상에 이르러 음악을 업으로 삼는다. 그럼에도 어린아이에게 재능이 좀 있다고 하면 지레 그런 능력, 그 모호하고 진귀한 재능을 가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오랜 세월에 걸쳐 수없이 많은 어린 음악가가 억지로 되풀이하여 사람들 앞에서 연주를 하는 그 엄청난 시련을 겪는 체계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p.90

 
   

 파리의 한 동네 좁은 거리, 피아노를 수리하고 중고 피아노를 사고 팔기도 하는 아뜰리에를 방문하며 저자는 (작중 화자)는 '피아노'를 살아 숨쉬는 하나의 유기체로서, 유년기의 역사를 오롯이 복원해 내는 하나의 매개체로 다시 만나게 된다. 피아노의 역사, 구조가 지루하거나 사변적으로 흐르지 않고 매우 흥미롭고 평이하게 그려진다. 언제나 한 발치 물러서서 조금은 겁먹은 상태로 바라봤던, 다시 끌려 들어갈까봐 스리슬쩍 도망칠 준비를 했던 피아노 건반 위에 다시 손을 올렸다. 쉬운 연습곡을 조율이 안 된 상태로 다시 치게 되었다. 형편없었지만 색다르고 소중한 느낌이었다. 전적으로 이 책 덕택이었다. 소설이라기보다는 성인이 되어 재회한 피아노와의 사연을 담담하게 고백한 에세이에 가까워 보인다. 중고 베이비 그랜드를 데포르주 공방에서 구입하고 다시 교습을 받게 되며 '나'는 피아노에 헛된 꿈을 투자하고 비현실적인 기대를 거는 대신 '나'를 투명하게 보태고 자기 규율이 주는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맛보게 된다. 그건 어린 시절과는 분명 또다른 피아노가 주는 즐거움이었다고 고백한다. 초등학교 4학년 어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좌절감을 맛보며 덮었던 바하인벤션은 중학교 1학년때 쉬운 대중음악곡이나 초보용 재즈 연습곡으로 돌아왔다. 당시만 해도 번성했던 레코드점에서 <라붐>의 주제곡 악보를 삼백원 주고 사와 연습하여 음악 실기 시험 시간에 치며 아이들의 호응을 얻어내며 참 오랜만에 피아노 배우기를 잘 했다,고 으쓱했다. 그런 대중음악들을 연습하기 시작하면 손을 망친다,고 겁을 줬던 사람들도 있었지만(망칠 손도 없었지만) 즐기며 평이한 유행가들을 가끔 쳐대며 유년 시절 울며 억지로 피아노를 쳤던 시간들 덕을 조금씩이라도 봤다. 

   
 

 마지막 화음들이 허공에 머물다 서서히 물러나는 동안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내가 소유하기는 했지만 결코 정복하지 못한, 언제 보아도 낯설어 보이는 악기 안을 들여다보았다. 당연히 음악이 중요했다. 모차르트는 모차르트였다. 그러나 나는 내 피아노로 어떤 음악을 연주한다는 게 얼마나 깊은 만족을 주는 일인지 다시 깨달았다. 감정적으로, 육체적으로, 지적으로, 영적으로. 그 만족은 무한했고, 그것이 내 삶에 주는 영향은 깊디깊었다. 나는 방 건너편에서 피아노를 바라보면서, 그 모퉁이가 텅 비었을 때를 기억해보려 했다. 전생의 일 같았다.
-p.345

 
   

 

텅빈 모퉁이. 그 모퉁이를 채웠던 밤색의 삼익 업라이트 피아노는 지금 어디에서 누군가의 손 밑에서 또다른 의미와 역사를 만들어 가고 있을까. 아님 아예 죽어버렸을까. '너'의 행방을 궁금해하며 너가 있었던 그 시간들을 마치 '전생의 기억'처럼 더듬거리며 그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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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02-04 2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설 잘 쇠셨죠? 쓰신 페이퍼 차분히 읽고 갑니다..
번역도 괜찮고, 영화의 카메라같은 저자의 시선이 높지 않고 편안한 위치여서 부담 없이 푹 빠질 수 있었던 책이었다는 생각입니다. 지금 책장에서 뽑아 다시 들고 있는데요. 언제인지.. 밤 11-12시쯤 하던 드라마 같은 느낌도 듭니다.

마치 흙속에 묻혀 있던 무엇인가가 나오듯, blanca님의 기억의 알맹이들이 두두둑 나오는 소리도. 잘 듣고 가고요.

(음악도 한 곡 띄울려고 했는데 되질 않네요.. 코드 붙이는 방식이 바뀐것인지.)




blanca 2011-02-05 22:01   좋아요 0 | URL
바람결님 덕분이죠. 고마워요. 저는 너무 잔잔해서 지루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웬걸요, 정말 말씀처럼 저자의 시선이 참 편안해서 물 흐르듯이 읽히더라구요. 피아노에 얽힌 추억들이 마구 오버랩되면서 참 특별한 독서를 했답니다. 바람결님, 저 이사오면서 컴퓨터 스피커를 버린 게 잘못된 건지 소리가 안 나온답니다. 오디오 카드도 다시 설치해 보고 했는데 정말 알 수가 없네요. 게다가 라디오 클래식 채널도 안 잡히고 참, 총체적 난국 상황이랍니다. 지금 정말 음악이 고파요.

프레이야 2011-02-05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설날 잘 보내셨어요?
저도 피아노를 포함해 악기에 소질 없어요.ㅎㅎ
끈기부족이 제일 큰 원인인 거 같아요.
아주 어릴 적 엄마가 사주신 장난감 피아노가 기억나요.
치면 제법 띵똥띵땅 소리가 그럴싸했어요.

blanca 2011-02-05 22:10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도 잘 보내셨죠! 전 올해부터 조금 일이 손에 익는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저는 예체능에 두루 소질이 없답니다. 딸내미는 안 닮았으면 좋겠어요.

2011-02-05 1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05 2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1-02-05 13: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도 정영목 씨 번역 책이군요.
예전에 저는 어렸을 때 피아노 치는게 좋아서 피아노 학원에 가게 되면 즐거웠었는데
이제는 유년 시절의 기억으로 남게 되었네요. 글의 제목처럼
예전 그 때가 그리워지기도 하네요 ^^

blanca 2011-02-05 22:12   좋아요 0 | URL
시루스님은 그러셨군요. 저는 그런 경험이 없어서 참 아쉬워요. 이왕 하는 거 즐겁게 다녔으면 참 좋았을 텐데 아쉬워요. 정영목 씨가 은근히 눈에 많이 띄네요. 요즘에 정말 번역자 들을 한 번씩 확인하게 됩니다.

잘잘라 2011-02-06 21:08   좋아요 0 | URL
정영목 씨 번역, 좋아해요^^

다락방 2011-02-05 17: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 이 아름다운 책을 blanca 님도 읽으셨군요! 반가워요!
:)

blanca 2011-02-05 22:14   좋아요 0 | URL
안그래도 다락방님이 이 책 얘기 하셨죠! 그 빵냄새 나는 골목 부분 인용도 해 주셨고요. 차암 좋더라구요. <올리브키터리지>도 이 책도 저를 한 방에 훅 가게 하네요^^ 현대 영미소설을 안 읽는 편이었는데 요즘 아주 즐겁습니다. 읽을 책이 왜이리 많죠!

순오기 2011-02-06 00: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의 피아노 얘기에 공감할 분들이 많을 거에요~
나는 피아노를 배우는 세대가 아니어서, 우리 애들에게 답답함을 면하라고 배우게 했지만, 대회는 한번도 안 내보냈어요. 피아노 대회라는 게 어떻게 되는 건지 잘 알기 때문에 아이가 원하지 않으면 참여시키지 않았어요.
피아노 대회에 참가 시키기 위한 피아노 교육의 폐해를 잘 그려낸 <피아노를 쳐 줄게>라는 그림책이 있어요.
아직 리뷰를 쓰지 않았는데 포토리뷰로 올릴거지만...

blanca 2011-02-06 21:24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잘 하셨어요. 저희는 잘 모르고 그렇게 힘들게 고생 한 번 진하게 했어요. 그런 그림책이 있어요? 요즘에도 그런 풍경이 사라지지 않았나 보군요. 포토리뷰 기다리겠습니다.^^

2011-02-06 00: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06 2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1-02-06 0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두 라붐 사서, 연습했었는데... 아하하.

피아노 말이죠, 어릴 때 배우는데 정말 능력의 한계가 여실히 느껴지더라구요. 그런데 어른이 되어서
다시 배우고픈 욕구가 엄청 솟는거예요. 코알라 핑계대고 그럭저럭 괘안은 디지털 피아노를 샀는데,
우리 코알라는 냉큼 피아노 관두고, 저는... 아직두 미련을 못 버려서 언젠가는 다시 배울거야 하는 중~ ^^

정말이지, 지난 날을 생각하면 이젠 전생의 기억 같아요. 에고.

잘잘라 2011-02-06 21:10   좋아요 0 | URL
흐하하하. '전생의 기억'같다는 말, 실감나요. ㅎㅎ

blanca 2011-02-06 21:27   좋아요 0 | URL
마고님도 라붐 ㅋㅋㅋ 저도 그래요. 다시 한 번 제대로 즐기며 배워 보고 싶어요. 아이를 위해서도! 디지털 피아노 사셨어요? 저는 피아노가 집에 없어요. 언젠가 또 다시 사게 되겠죠. 저는 어제도 전생 같아요--;;

노이에자이트 2011-02-06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하모니카를 조금 불줄 압니다.패티 김의 '이별'을 연주하면 여자들이 쓰러집니다.

blanca 2011-02-06 21:28   좋아요 0 | URL
노자님 댓글을 저를 빵 터지게 하네요 ㅋㅋ 저보다 젊으신 걸로 아는데 패티 김의 '이별'이라니요 ㅋㅋ

노이에자이트 2011-02-06 23:28   좋아요 0 | URL
으하하...제 애창곡으로는 연령 추정을 할 수 없다니까요.70년대 가요는 물론이고 60년대 가요도 많이 알아요.청소년들보다 최신곡을 더 많이 알고 있기도 하구요.

블랑카 님 또래들도 패티 김의 '이별'은 거의 모르지 않을까...음...길옥윤 씨가 작곡한 노래가 좋은 게 많아요.그리고 정훈희 씨 20대 때 노래 중 '너무나 사랑했기에'(김학송 작곡)는 기타로 연주하면 좋답니다(근데 저는 기타는 못쳐요).한번 검색해 들어보세요.기타 간주가 애절한 곡이랍니다.

잘잘라 2011-02-06 2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피아노에 꿈을 투자한다. 지나가다 내키면 건드려본다. 그 위에 가장 좋아하는 사진이나 귀중한 물건을 올려놓아 집안의 성전으로 꾸며 놓는다.....」 공감 백배, 페이퍼에 몰입해서 어릴때 살던 성북동 개량한옥 작은 방까지 다녀왔어요. 아... 피아노 치구 싶네요. 외워서 칠 수 있는 건 동요 몇 곡 뿐이지만요. ㅎㅎ

blanca 2011-02-06 21:29   좋아요 0 | URL
메리포핀스님 성북동 개량한옥이 어린 시절!!! 정말 눈물나게 부러워요. 그럼 어린 시절 한옥에 사셨건 거예요? 지금 언제라도 가보실 수도 있고요? 외워서 칠 수 있는 곡이 저는 없답니다. 무참하지요. 친 세월이 몇 년인데 저는 피아노 조기 교육의 철저한 실패 사례인듯 합니다.--;;

잘잘라 2011-02-07 11:12   좋아요 0 | URL
성북동 그 집, 지금은 없어요.
앞 집에서 우리집을 사서 두 집 다 허물고 3층 건물 새로 지었거든요. ㅜㅜ

blanca님! 피아노.. 아픈 과거(?^^)는 잊고 새로 시작하시는 어때요?
저는 떠돌이 신세라 피아노는 사서 둘 데두 없구,
해서 기타 배울 생각이예요. ^^

blanca 2011-02-07 21:49   좋아요 0 | URL
아아아. 그렇군요....저도 피아노 없어요. 바이올린이나, 해금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봤어요. 이제는 현악기로^^ 클래식 기타 배우실 거예요? 메리포핀스님,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치시는 날 꼭 페이퍼 올려주세요. 저의 로망입니다.^^

잉크냄새 2011-03-15 11: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악기 하나쯤 연주할수 있으면 인생이 더 풍요롭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항상 품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구입한 오카리나는 먼지만 쌓이고 있지만요...

blanca 2011-03-15 22:04   좋아요 0 | URL
잉크냄새님 오랜만이에요. 오카리나가 먼지에 쌓인 풍경을 어느 집에서도 보았던 기억이 나네요^^ 지금도 늦지 않았을 것 같은데요. 오카리나 소리 참 좋아요.
 
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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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백 페이지도 안 되는, 옮긴 이가 섬뜩하고 무시무시한 감동이 찾아 온다고 속보이는 칭찬을 하는, 노벨 문학상의 유력한 후보인 작가가 쓴, 그렇고 그런 책인 줄 알았던, 이 책. 

   
  그는 이제 없었다. 있음에서 풀려나, 스스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어디에도 없는 곳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이 마지막 대목을 읽으며 결국 옮긴이의 속보이는 그 칭찬에  동조하게 되었다.  광고회사의 잘 나가는 아트 디렉트였고, 세 번 결혼을 했고, 이제 일흔하나인 그는 오른쪽 경동맥 수술을 위해 수요일 아침 일찍 병원으로 갔다. 그는 아직 떠나고 싶지 않았고, 아니 영영 떠나고 싶지 않았고 다시 충만해지기를 갈망했지만, 심지어 수술실로 들어가면서도 내일을 그렸지만 그는 이제 없었다. 

소설을 읽으며 자신의 과거 추억을 복기한 경험이 있긴 했지만 머나먼 미래, 그것도 '나'라는 존재가 없어 울 수도 웃을 수도 불평할 수도 없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이상 알아 보고 안아 줄 수도 없는 상황을 섬뜩하고 슬프게 그려 보기는 처음이었다. '있음'을 치우고 난 후에는 그 어떤 것의 의미도 '나'를 걸러 건져 올릴 수 없게 된다. 여전히 남은 사람들은 지겨워하며 일상을 누리고 곁에 있는 이들에게 서슴지 않고 상처를 내는 언사들을 날릴 것이고 영원히 살고 영원히 소유할 것처럼 모든 것들을 오만하게 움켜쥘 것이다. 

소설의 처음은 소설의 말미에 희망을 품고 수술실에 들어간 '그'의 장례식으로 시작한다. 어린 시절 탈장 수술 때문에 어머니와 함께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가던 길, 거기에서 목도한 옆침대 소년의 죽음, '에브리맨'이라는 상호의 아버지의 보석가게, 그리고 하필 겨우 서른 넷에 머나먼 얘기인 것 같은 죽음을 의식했던 일 등 그의 죽음 전에 삶을 채웠던 기억의 편린들은 조각조각 그 '있음'과 '없음'의 간극을 메운다. 흔해 빠진 죽음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었지만 그것은 추상화된, 일반화된, 간접화법으로만 떠오를 수 있는 단어였다. 불멸의 보석을 팔았던 그의 아버지와 그 보석상의 이름인 '에브리맨'과 그는 모두 그 무한한 '무'에 도달한 그 시점에서도 결코 그것과 화해할 수 없는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죽음은 부당하다. 논리적이도 유의미하지도 타당하지도 않다. 그건 바뀌지 않는 진실이다. 그럴듯한 논거들을 갖다 붙여 정당화해도 그건 다 사기다. 왜냐하면 그것을 얘기하는 순간에도 우리는 살아 있지 않는가. '있음'의 지점에서 '없음'의 지점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척 하는 것은 그럴듯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스콧 니어링이 백 살 앞에서 스스로 곡기를 끊고 자발적인 죽음을 택하고 "좋아"한 것은 불가능하고 도저한 일을 이루어 냈기 때문에 회자되는 것이지, 모두가 가능한 일은 특히 에브리맨이 가능한 선택지는 결코 아니다. 이 작품이 섬뜩했던 것은 죽음으로 시작해서 죽음을 수긍하지 않는 주인공의 헛된 미망으로 끝을 맺기 때문이다. '그'는 소위 사회적인 시선으로 매우 성공한 축에 꼈던 사람이다. 전도유망한 아트 디렉트였고 퇴직 후에는 고급 은퇴자 마을에서 미술을 가르쳤다. 그건 우리가 부러워하는 삶의 전형일 수도 있다. 그런데 그래도 끝은 역시나 허망하다. 더 허망했다. 

희망을 얘기하고 의미를 덧붙이는 이야기가 날아가고 난 자리에 슬몃 끼여든 이 적나라한 무의미한 삶에 대한 폭로.  

   
  "그냥 오는 대로 받아들여. 버티고 서서 오는 대로 받아들여라. 다른 방법이 없어."   
   

정말 그런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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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02-01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번역서를 고를때, 역자를 좀 유심히 보는 버릇이 있어요.
정영목님은 그런 의미에서 제가 왕 애정하는 역자세요.
그분이 번역하신거면 그냥 읽고봐요, 후회하는 법이 없죠.
그런 의미로 지명도와 다르게 제겐 별로인 분이 김석희 님이세요~^^

참,참,참...참 고우시더군요~
신문을 들추다가 '와락~' 신문을 끌어안았다니까요.
올핸 님을 롤 모델로 삼아도 좋을 것 같아요.
(전 일주일에 4권,한달에 열 여섯 권 정도 읽어요.)

님 명절 잘 보내시구요~^^

blanca 2011-02-01 20:50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님, 저는 예전에 첨부된 글들은 안 읽었던 것 같은데 요새는 꼭 옮긴이의 글을 읽게 되더라구요. 저는 아직 양철나무꾼님처럼 역자 이름과 성격들을 잘 구분해서 알지는 못해요. 이 책의 감동에 역자의 공도 있었군요. 신문은--;; 그저 감사하고 부끄럽습니다. 양철나무꾼님도 구정설 잘 보내세요!

2011-02-04 13: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1-02-01 0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필립 로스의 소설은 <더 플롯 어게인스트 아메리카>(영문이 안 나오네요 ㅠㅠ)를 사전 찾아가며 따문따문 읽은 기억이 있는데...
이 소설 당기네요. 특히 이 대목이요. "어린 시절 탈장 수술 때문에 어머니와 함께 버스를 타고 병원으로 가던 길, 거기에서 목도한 옆침대 소년의 죽음," 어린 시절 탈장 수술 때문에 어머니와 함께 버스를 타고 병원에 갔었고, 거기서 앞 침대의 할아버지가 주검이 되어 실려나가는 걸 목도한 경험이 있거든요. 그러니 저로서는 꼭 읽어야 하는 소설이네요.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명절 잘 쇠세요 블랑카님^^

blanca 2011-02-01 20:52   좋아요 0 | URL
후와님! 정말 그런 경험이 있으셨어요? 그럼 꼭 꼭 반드시 읽으셔야 합니다. 분량도 얇고 재미도 있어서 시간도 별로 안 걸려요. 후와님의 평이 꼭 들어보고 싶어요. 게다가 주인공과 같은 추억의 공유라니요. 후와님도 즐겁고 따사로운 명절이 되시기를...

비로그인 2011-02-01 0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우선! 양철님의..
-> 신문을 들추다가 '와락~' 신문을 끌어안았다니까요.

이 신문은 경향신문이겠죠? 아~주 익숙한 주소가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ㅎ
그런데 이게 네 번하고 끝이라니, 좀 이상하기도 하고 그렇네요 좀 더 많은 사람을 인터뷰해도 괜찮을 것 같던데..^^

음. 왠지 남기신 글은, 요새 좀 집중해서 보고 있는 실비아 플라스의 삶을 다룬 영화의 장면을 닮은 것 같아서 마음에 닿습니다. 새벽에 앉아 있으려니 술이 덜 깬 것 같아 머리속이 어슴푸레 하지만, 그 영화의 색이 주는 느낌은 꽤나 닮은 구석이 있네요.


blanca 2011-02-01 20:54   좋아요 0 | URL
실비아 플라스의 일기는 솔직히 참 힘겹게 읽었어요. 분량도 너무 많고 나중에는 좀 집중이 안되더라구요.(재미가--;;) 그런데 다 읽고 나니 맘 한켠이 어찌나 시리던지. 아이를 두고 그렇게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는 그 맘이 감히 상상이 안되더라구요. 영화를 봤으면 더 저릿했겠죠. 기네스 펠트로가 아이들을 그네에 태우며 미소짓는 장면 캡쳐한 것만 봐도 슬프던걸요. 그건 저도 나중에서야 제가 끝인 줄 알았답니다.^^;;

마녀고양이 2011-02-01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말이죠, 경향신문 가서 바로 찾았어........ 방금여~
흐흐,,,,, 봐따봐써. 언제 했대여... 아이 이쁘당.... 반가와요.

음, 책 리뷰 보고, 있음 없음에 뭉클해서 생각에 잠기다가 댓글 보고
검색하고 그 바람에 그 감성 다 날아갔네... 어쩔 수 없어요. 즐거운 설 연휴!!

blanca 2011-02-01 20:55   좋아요 0 | URL
마고님 ㅋㅋㅋ 저 느무느무 부끄럽고 그래요. 잊어주세요--;;; 내일 가열차게 일할 예정입니다. 마고님도 즐거운 연휴 보내세요.

2011-02-01 1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01 2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01 17: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2-01 20: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1-02-01 2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외국문학 작품을 읽게 되면 번역가 이름과 이력을 유심히 보게 되는데
유독 정영목이라는 분의 역서를 많이 읽었던거 같아요.
지금도 민음사 <오스카 와일드 단편선>을 읽고 있는데 이 책 번역 역시 그 분이더군요 ^^
제가 아는 분도 필립 로스의 이 소설을 강추하셨는데 이번 기회에 읽어봐야겠어요.
최근에 <울분>이라는 제목의 신간도 나왔더군요.
설 연휴 잘 보내시구요,, 명절 증후군 조심하세요 ^^

blanca 2011-02-03 22:46   좋아요 0 | URL
아, 그러고 보니 지금 읽는 책도 정영목시의 번역이네요. <오스카 와일들 단편선> 좋은가요? 궁금했는데. 시루스님 아주 자알 보냈습니다. 힘좀 썼죠 ㅋㅋㅋ 생각보다 안 힘들어서 제 저질체력이 개선되었나 좋아하고 있답니다. 시루스님도 잘 보내셨죠?
 
맨발로 글목을 돌다 - 2011년 제35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공지영 외 지음 / 문학사상사 / 2011년 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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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발로 골목을 돌다>인 줄 알았다.
기성 유명 작가이고 읽히는 재미와 반비례해 문학적 성과에 있어서는 때로 혹평을 받는 공지영이 대상을 받았다.
아주 힘들 때 밤을 서성이다 인터넷 화면보다 훨씬 못해 실망했던 티테일블에 엎어져 있던 에세이집에서
그녀는 힘든 고백을 하며 울고 있었다. 나는 한잠도 자지 못했고 그녀의 아픔을, 이제는 마침표를 찍은
과거형의 고통들은 선뜩하게 나의 가슴으로 배어 들고 있었다.
독자와 작가로서가 아니라 그 순간 만큼은 우리 둘다 어느 지점에서 절절하게 교감하는 여자들이었다. 
지천에 허벅지게 피어난 산수유를 배경으로 독사진을 찍고 이제 그만 아파하기로 했다.
산수유를 처음 봤을 때 상상했던 붉은 빛이 아니라 개나리 같은 노란색임을 알고 나는 배신이라도 당한 기분이었다.

<맨발로 글목을 돌다>였다.
글목은 사전에는 없는 공지영만의 어휘였다. '글이 모퉁이를 도는 길목'
작가에게는 삶이 선회하는 곳이기도 했다.
작품 속 '나'는 적나라한 '작가 공지영'이었다. 소설의 일본판 출간 기념으로 일본을 방문한 길, 공항에서 처음 만난 H는 북한에 납치되어 이십사 년간을 살고 돌아와 한국작품을 일본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게 된다. 그의 삶 속에서 벌어진 그 무자비한 폭력은 그의 선의에 의해 수긍되고 적절히 체념된다. '나'는 삶을 덮치는 그 가혹한 운명의 파고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던 지난 날들을 갈피 갈피 사이로 끼워 놓으며 '살아가고 쓴다는 것'의 의미를 더듬는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우는 것이 하찮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에, 가슴을 좀 웅크리고 편한 자세를 취해보았는데, 그때 문장들이, 장대비처럼 내게 내렸다. 

 
   

폭력으로 망가진 결혼생활의 회고, 위안부 할머니들과의 대면, 언어로 하는 일들이 맞닥뜨리는 궁극의 한계, 평범하고 행복하고 무난한 결혼생활로 잔인한 비교우위를 보여주는 친구의 모습, 고통이지만 정확히 과녁을 맞추는 것들이 주는 쾌감, 수용소에서 끝까지 살아 남았지만 노년에 자살하고 마는 프리모 레비,  <토니오 크뢰거>... 

이 짧은 소설 안에는 공지영 작가의 무수한 고백들과 좌절들과 그럼에도 밀고 나아가 생을 긍정하는 그녀의 모습이 고스란이 축약되어 있다.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서사 대신 작가 자신의 삶에 대한 진성성 어린 고백들이 서사의 도식을 해체하고 포박해 들어온다. 소설 아닌 소설은 그래서 심사위원들도 독자들도 뭉클하게 만들고 말아 버렸다.  

정지아의 <목욕 가는 날>은 친정 엄마와 함께 목간을 가는 자매의 정감어리고 훈훈한 정경이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따사롭게 그려진다. 늙고 무기력해진 어미와 이제 장년의 어미를 복기하는 듯한 두 딸이 서로를 어루만지는 풍경은 주머니 속에 던져 넣고 오래도록 조물락대고 싶어진다. 

김숨의 <아무도 돌아오지 않는 밤>은 역시나 놀라웠다. <간과 쓸개>라는 단편에서 노년의 심리의 결을 사무치게 그려냈던 저력은 병든 시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며느리의 이중적 심리 상태를 적나라하고도 여실하게 보여주고 끝내 돌아오지 않는 남편과 시아버지의 사연을 꿀꺽 넘겨버리고 마침표를 찍어 버리는 능청스러움으로 애닯게 한다. 오랜만에 결말이 궁금해 초조하게 하는 단편이었다. 

김언수의 <금고에 갇히다>는 금고를 열었다고 신나서 뛰어다니다 실수로 버팀목을 발로 차버려 금고 안에 갇혀 버리는 도둑 두 명과 여자의 얘기다. 상황 설정 자체도 극적이고 코믹하지만 유통되고 가치가 매겨지지 않는 물질들의 무력함을 일거에 조롱해버리는 작가의 기지가 번뜩였다. 도둑들이 심심하다고 화툿장을 찾아 헤매다 금으로 만든 주사위를 가지고 뱀놀이를 하는 풍경을 보고 빵 터져 버렸다.  

올해의 <이상문학상 작품집>은 예전의 그 읽는 재미와 여운을 다시 상기시켰다. 참신해야 한다는 강박도 한동안 멀미를 일으켰다. 다시 이야기다운 이야기로 회귀한 느낌이다. 다만 바로 들어와 꽂히는 영상 이미지와 대적해야 하는 지금의 상황에 대한 명료한 대안은 여전히 찾기 힘든 것 같다.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글을 쓰고 읽는 행위는 생의 상처를 치유하려는 노력과 만나는 것 같다. 무언가를 어루만지려는 노력이 계속되는 한 이야기는 쭈욱 계속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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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01-30 0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국 공지영은 자신의 이야기로 이상문학상을 탔군요. 궁금했어요, 어떤 이야기일까. 그러면서도 뭔가가 마음에 계속 걸려있어 이 책을 사진 않을 거란 생각을 줄곧 했었거든요.

"다시 이야기다운 이야기로 회귀한 느낌"은 황순원문학상 작품집에서도 그랬어요.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의지, 그런게 느껴졌거든요.

blanca 2011-01-30 13:03   좋아요 0 | URL
황순원문학상!도 그렇군요. 저는 이런 돌아옴이 더 좋아요. 전위적, 해체적, 이런 것들이 전 영 낯설고 그렇더라구요. 구수하고 재미있고 진진한 이야기들이 좋아요. 그 예전의 즐거움, 재미. 사실 그 땐 이 정도로 자극적인 재미들이 없었으니 상대적으로 더 재미있게 느꼈을 수도 있지만요.

반딧불이 2011-01-30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상하게 공지영의 책은 관심이 안갔어요. 그래서인지 읽은 책이 하나도 없는데 이번 책은 보고싶은 생각이 드네요. 블랑카님 리뷰때문일까요? '글목'이라는 단어도 마음에 들고요.

blanca 2011-01-30 13:02   좋아요 0 | URL
반딧불이님, 일단 공작가의 글은 잘 읽힌답니다. 그게 비판의 지점이기도 하고요. 한번 접해보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글목! 저는 골목으로 알고 시작해서 더 기억에 남네요^^

순오기 2011-01-30 0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09년 8월 공지영작가 강연회 가느라고 열심히 찾아 읽었는데...이상문학상을 받아서 좀 놀랐어요.
리뷰를 보니 읽어보고 싶네요~ '글목'이라니 신선한 느낌!!
추운날 이사하느라 고생하셨어요~ 그곳에서도 편안하고 곧 익숙한 느낌을 갖게 되겠죠.^^

blanca 2011-01-30 13:00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공지영 작가 강연회 가셨었어요? 서재에서 한 번 찾아볼게요. 아저씨들과 아주머니가 고생 많이 하셨어요. 정리안되던 저의 살림의 각을 잡아 두시고 가셔서 찬장 문을 열어 볼 때마다 괜히 맘이 뭉클해요. 기억난 김에 아줌마 칭찬글을 올려야 겠어요^^;; 예, 그렇게 되겠죠? 방금 새로운 버스 노선을 발견하고 좋아하는 중이랍니다.

세실 2011-01-30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누가 뭐래도 전 공지영 팬입니다. 그녀의 아픔을 감싸주고 싶었어요. 그래야만 할꺼 같아서요.....
그녀의 이야기였군요.

blanca 2011-01-30 12:59   좋아요 0 | URL
세실님, 공지영 팬이셨군요. 저도 잘 몰랐을 때는 그저 잘 읽히고 재미가 있다, 이 정도로 그녀의 글을 생각했었는데 과거의 아픔들을 알게 되니 또다르게 보이더라구요. 그녀에게는 글이 세 아이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으로서의 생계수단이기도 하다는 면. 아픔을 뚫고 나온 절절함. 이런 것들. 그리고 트위터에서 가끔씩 날려주는 날것의 말들도 그렇고요.

stella.K 2011-01-30 12: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전체적으로는 별 세개군요.
하긴 요즘 작가 재미없더라구요. 고만고만한데 상을 준다는 게 쉽지 않은 것 같아요.(너무 심했나...ㅜ)
공지영은 제 취향은 아닌데 그녀가 이제 이상문학상을 받았다는 게 새삼스럽더라구요.
이건 김연수 보다 늦은거라 더하더라구요.
작가로서 존재감은 공지영이 먼저인 것 같은데, 비교할건 못 되지만
김연수는 이제야 꽃을 피우는 것 같고, 공지영은 그전부터 꽃이 피우긴했는데
잘 몰라본 것 같다는 그런 느낌이 들더라구요.

blanca 2011-01-30 12:56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말씀 잘 해주셨어요. 제가 별점을 잘못 매겼어요--;; 죄송합니다. 네 개를 입력한다는 게 세 개를... 이상문학상은 공지영 작가가 참 늦게 받았죠. 과거 이상 문학상 수상작품들을 보니 참 흥미롭더라구요.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도 보이고. 최근 몇 년간 재미가 좀 덜해진 것 같긴 해요. 다 못 읽은 경우도 있었으니까요. 이번 것은 잘 읽히고 재미도 있었어요. 김연수 작가는 상을 참 많이 받았더라구요. 저번에 한겨레에서 보니가 문학성에서 아주 높은 평가를 받고 있기도 하고요.

노이에자이트 2011-01-30 1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혹시 김숨의 소설 '투견'읽어보셨어요? 기분이 참 묘한 소설이에요.식용견 농장 이야긴데...음산하기도 하고...

blanca 2011-01-31 22:23   좋아요 0 | URL
신형철의 평론집에 소개된 걸 보았어요. 그것만 읽어도 정말 음산하던걸요. 김숨이라는 작가 저력이 있는 것 같아요. 나오는 작품마다 놀라워요.

cyrus 2011-01-30 2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번에 처음으로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읽어보게 되었는데요,,
이 상의 권위를 어느 정도 알겠더라구요. 원래 저도 스텔라님처럼
한국소설 잘 안 읽는 편인데,, 제 생각이지만 우수상 작품들도 대상 못지 않게 좋더군요.
왜 이상문학상 작품집이 많이 읽혀지는지 알게 되었어요.


blanca 2011-01-31 22:24   좋아요 0 | URL
시루스님, 저도 요 몇 년 간은 식상하다, 지루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올해는 정말 좋은 작품 일색이더라구요. 역시 기성작가들의 힘일까요? 올해는 신인이 한 명 정도밖에 안 보였어요.

무해한모리군 2011-01-31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 황순원문학상작품집을 읽고 있어요. 신선했습니다.. 이상문학상 작품집은 공지영이라는 이야기를 듣고(사실 그닥 선호하는 작가가 아니라서.. 하긴 제 또래가 공지영을 선호해요 한다면 그 친구가 다소 특이한 거겠지요 ^^;;) 사지말까 생각했는데.. 읽어보고 싶네요. 연휴때 한번 도전해봐야겠어요.

blanca 2011-01-31 22:25   좋아요 0 | URL
휘모리님, 황순원문학상작품집 재미있어요? 저는 지금 책 다 떨구고 휘모리님 추천하신 만화책 주문할 생각에^^ 신나 있어요. 공지영 작가도 이제 나이가 제법 들었죠. 386세대라는 수식이 예전에는 젊음으로 통했는데 그렇게 되버렸네요.

프레이야 2011-01-31 09: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골목이 아니라, 글목!
어감이 좋으네요. 예전엔 그저 그랬는데 갈수록 느낌이 좋은 작가에요.
지리산행복학교를 찜해놓고 있어요.

blanca 2011-01-31 22:27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지리산행복학교 사인회 하러 나온 공작가를 교보에서 봤답니다. 저는 예전 상사가 '봉순이 언니' 읽어 보라고 해서 참 재미있게 읽었던 기억이 나요. 나오는 족족 신간을 챙겨 봤던 시절도 있었는데 요새는 좀 심드렁했었어요. <맨발로 글목을 돌다>는 줄을 많이 긋데 되더라구요.

마녀고양이 2011-01-31 1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긴 한동안 참신해야 한다는 강박증, 우리나라 문학계를 지배하는 듯 했어요.
이번 이상 문학상 작품집 좋은가 보네요. 방금 사이러스님 서재에서도 보고 왔는데.... ^^

블랑카님 이사 잘 했지만, 좀 외로운가 봐여? 곧 내 집처럼 될거예요~
분홍공주님 유치원 잘 알아보셨나요? 어제가 막바지 추위였대요.
즐거운 설 연휴 되세요.

blanca 2011-01-31 22:29   좋아요 0 | URL
그러셨어요? 전 집에 정이 많이 들었나 봐요. 오늘도 지나쳐 오는데 불쑥 들어가 보고 싶어지더라구요. 오시는 분들도 인상도 좋고 그러셔서 행복하게 잘 사시겠지만. 저는 이상한 욕구가 예전에 살던 집들을 어떻게 바꿔서들 사시나 한 번씩 방문해 보고 싶은 충동을 가끔 느낀답니다. 신혼때 살던 집도 너무 궁금하고.ㅋㅋ 마고님도 잘 보내세요!!
 

1월 22일 토요일. 아침 눈발이 날렸다.
1월 22일 토요일 기다리던 아이를 가지고 낳고 3년을 키워낸 집에서 이사를 나가게 되었다. 
나의 이사를 정작 주도하는 아저씨들에게 괜히 면구스럽기도 계면쩍기도 해서
구석에서 핸드폰을 조물딱거리다 
1월 22일 아주 오랜만에 박완서 샘이 인기검색어 1위에 오른 것을 알았다. 

가슴이 철렁했다.
 

"<두부> 정말 좋더라. 정말." 

거짓말과 칭찬을 동격으로 싫어하는 여동생이 <두부>에 반하며 박완서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내가 사는 책을 동생은 사지 않고 동생이 선수친 책은 내가 뒤따라 읽으며 샘의 책을 모았다.
둘 다 결혼을 하고 책장이 분리되면서 우리는 똑같은 책을 한 권씩 가지게 됐다.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빌려줄까?" 

"이미 읽었어."

  

 

 

 

 

 

 

 

혼수로 해 온 거실탁자의 상판 유리가 깨지고 내부순환 도로의 교통상황을 실시간으로 확인할 수 있고
파아란 하늘과 구름을 눈썹에 달고 인터넷을 할 수 있는 멋진 방이 발치에 잔잔한 곰팡이 포자들을
무수히 숨기고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그 교통상황은 귀로도 확인가능할 정도로라는 것을
수긍해야 할 때쯤 이사가 끝났다.  

침대에 누웠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왜 아픈지 하나하나 헤아려 갔다. 

내가 떠나온 집은 나의 것도 아니었고 이별한 친구처럼 작별인사마저 없었다는 점.
그럼에도 나는 부른 배를 부여잡고 뒤뚱거리며 올라가 만났던 너.
안아달라는 아이를 끌고 밀여 올라가서 만났던 너.
잘 돌보지 않았다고 야단맞아야 했던 너. 

를 헤어진 연인마냥 미워하고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점. 

그리고 그런 너를 떠나오며
동생과 나누던 무수한 에세이들.
아이를 안고 읽었던 그 누군가를 속이거나 의식하지 않는 삶의 이야기들과
아직은 한번쯤 더,라고 기대했던 그 분이 하필 이제 영영 가버리셨다는 거.  

명치 끝이 계속 서늘했다.
모든 익숙한 것들과 반드시 언젠가는 헤어져야 한다는 그 명제는
나의 것이기도 했다.  

이사하는 와중에 잃어버린 줄 알았던,
거의 일 주일을 넘게 읽다 말다 눕혔다 꽂았다 하는
프리모 레비의 <주기율표>가 얌전히 책장에 꽂혀 있는 것을
보고 조금 실망했다.
없어져서 다 읽지 못했다고 하고 싶었나 보다.
변명거리로 맞춤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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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1-01-25 01: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사하셨군요. 추운 날 고생하셨어요.
'주기율표'는 저도 끝을 못 내고 눕혀뒀어요.
전 박완서님의 '나목'을 쓸어봤답니다.
알라딘 서재 어여쁜 님이 주신 거라 더더 생각하면서요.

blanca 2011-01-25 22:45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저 그냥 안끝내기로 했어요^^;; 집중도 안되고 너무 질질 끌다 말다 하니 의욕도 안 생겨서 오늘 새로 온 책들 읽기로 했답니다. '나목' 그런 소중한 사연이 있었군요. 저는 교과서였나, 참고서에 발췌된 것으로만 읽었다 최근에서야 전문을 읽었답니다.

양철나무꾼 2011-01-25 0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결혼 초창기에, 남편이 사업을 말아 잡수셔서 이사를 엄청 많이 했어요.
그래서 새로운 집이랑 정들고 말고 할 것도 없이 마구 옮겨다녔었어요.
글에서 님의 애잔한 마음이 느껴져 짠 하지만요, 또 정 붙이고 그렇게 살다보면 추억이 되어 있겠죠.
이사하시느라고 고생하셨겠어요, 이젠 용이랑 돼지랑 블루스 추는 꿈만 꾸시면 되는 건가요?^^

blanca 2011-01-25 22:47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님,ㅋㅋ 슬픈 사연을 재미있게 말씀하셔서 죄송하지만 웃었답니다. 안 그래도 삼일 지내니 또 정이 차차 들어가네요. 다만 대중교통이 너무 불편해서 다리품좀 팔아야 할 것 같아요. 그런데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이긴 한데 용이랑 돼지랑 블루스 추는 꿈이라면^^;; 무슨 의미이신지. 제가 형광등이라는 소리를 좀 들어서 망설이다 질문합니다.

무해한모리군 2011-01-25 09: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태어난 집에서 스무해를 살아서 서울살이에 가장 힘든 점이 이사예요.
집 뿐만 아니라 동네, 타고다니던 버스에 마저 정을 붙이고 마는 저같은 촌년에겐 정말 도전이예요.

blanca님 여튼 날도 추운데 고생 많으셨어요.
곰팡이들이랑 헤어지신건 잘된거 같아요.
새집에서 더 행복한 기억들이 많아지시길.

blanca 2011-01-25 22:49   좋아요 0 | URL
휘모리님! 안그래도 오이지군과의 결혼 축하인사를 드려야 하는데 시기를 놓치니 자꾸 멋쩍어 못드렸어요. 정말 축하드려요. 이쁜 새댁이 되셨군요. 스무해나 사셨어요? 맞아요. 도전 맞아요. 고작 사 년 살고도 맘이 참 휑하던걸요. 행복한 기억 만들어 갈게요. 감사합니다.

stella.K 2011-01-25 11: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제 이사한 거군요.
난 벌써 하신 줄 알았는데.
어제 고 박완서님 추모 특집하는 거 보다 잤어요.
그걸 보다 자다니...ㅠ
그러고 보면 박완서님 책 제목은 정말 기가막히게 잘 지으시는 것 같아요.
얼마나 서민적이고, 사람의 마음을 파고 드는지.

여담이지만, 예전엔 두부 좋은 줄 몰랐거든요. 그냥 덥덥하고 밍밍한 게.
그런데 요즘들어 부쩍 두부가 좋아졌어요.
아무래도 추모하는 마음으로 박완서 선생님 책 한 권 읽어줘야 할 것 같아요.
언제고 블랑카님 동네 좀 사진 찍어 올려주세요. 궁금해요.^^


blanca 2011-01-25 22:51   좋아요 0 | URL
스텔라님! 네, 그랬답니다. 저도 요새 두부 좋아지던데 어쩜 같아요. 이제 맛을 알겠어요. 예전엔 정말 맛없는 음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요새는 김치만 걸쳐 먹어도 어찌나 맛있는지. 된장찌개에 넣은 두부는 한 마디로 화룡점정^^;;이지요. 저도 잠깐 그 프로 보긴 했는데 졸리던걸요. 그 분을 좋아하는 마음과는 별개로요^^;; 그러고 보니 동네 사진 좀 찍어야겠네요!

책가방 2011-01-25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지금 사는 집에서 10년을 살았네요.
이젠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과 새로운 환경을 접해보고 싶어요.
여긴... 너무 재미없어요 ..ㅜ.ㅠ;;

blanca 2011-01-25 22:52   좋아요 0 | URL
책가방님, 저도 이사 좀 가고 싶다고 생각하고 그랬는데 막상 떠나오니 참 섭섭하더라구요. 다만 이사를 하며 버릴 것 버리고 정리할 것 정리하는 과정이 또 좋긴 하더라구요.

비로그인 2011-01-25 17: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생 많으셨어요. 전 담 월요일에 이사랍니다. 추운 때 낯선 집으로의 이사는 좀 황량하고 심란하지요?
봄이 오면 그 용문고등학교 고갯길이 그리워지시려나요?

blanca 2011-01-25 22:54   좋아요 0 | URL
만치님은 월요일이군요.만치님 기억력 정말! 우아, 어쩌면 이제 몇 개월 지나면 만치님만 용문고등학교를 기억하실지 모르겠어요. 저 기억력은 정말--;; 아, 그 고딩들의 시끄러움도 그리워지네요 ㅋㅋㅋ 정말 쉬는 시간, 점심 시간마다 얼마나 아우성을 치는지. 합창대회 연습기간에는 정말 대박이었답니다. 대회하기 직전 연습하던 모습 보고 혼자서 얼마나 웃었는지.

cyrus 2011-01-25 19: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추운 날씨 속에 이사하느라 고생이 많으셨어요.
블랑카님은 집에 책을 많이 소장하셨을거 같은데,, 이사하는데 힘들지 않던가요?
아직 이사 걱정할 정도는 아닌데,, 방 안에 있는 책이랑 책장을 보니
괜시리 막막해지네요ㅎㅎ;;

blanca 2011-01-25 22:55   좋아요 0 | URL
cyrus님 안 그래도 이사할 때 책 많으면 정말 힘들다면서요. 저는 게다가 정리도 잘 안 되어 있어서. 아저씨들이 알아서 구멍구멍마다 잘 꽂아 놓으셨더라구요. 찾기는 힘든데 되레 정리가 되더라니까요. 안그래도 그래서 책을 사기 전에 조금씩 주저하게 됩니다. 이사를 겪어 보니 참 부담스럽더라구요.

카스피 2011-01-25 20: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운날 이사하셨네요.고생이 많으셨겠네요.새로운 집에세 아가와 즐겁게 보내시길 바랍니당^^

blanca 2011-01-25 22:56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 고맙습니다. 안그래도 아이는 이 집이 더 좋다네요 ㅋㅋ 몸고생은 아저씨들이 다 하셨고 저는 맘고생을 좀 많이 했답니다.

꿈꾸는섬 2011-01-26 0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추운날 이사하시느라 고생이 많으셨겠어요.
저도 이사하는 날의 그 쓸쓸한 감정을 알아요.ㅜㅜ
게다가 박완서 선생님 소식은 더더욱 가슴 아픈 일이죠.
전 요새 <못 가본 길이 아름답다> 읽고 있어요. 선생님께서 이 글 쓰시면서 죽음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아요.ㅜㅜ

blanca 2011-01-27 18:47   좋아요 0 | URL
꿈꾸는섬님 이 책 읽고 계시군요. 이사는 하기 전보다는 지금 맘이 더 정리되고 무언가 할 일을 한 것 같아 가뿐한 느낌도 있고 그래요.약간 낯선 느낌도 있지만요. 책을 통 못 읽네요.

세실 2011-01-28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사는 참 번잡스럽기는 하지만 새로움에 대한 설레임도 교차하지요. 저도 슬슬 떠날때가 되었는데....ㅋ
두부 음 집에 있을듯한데 찾아봐야 겠습니다.
전 박완서 작가님 책중 '그남자네 집'이 참 좋았어요.

blanca 2011-01-29 23:44   좋아요 0 | URL
세실님, '그 남자네 집' 저도 참 좋아해요. 우연찮게 그 남자네 집이 저희 집 근처이기도 했구요^^;; 갑작스레 알고는 다시 읽어 보기도 했답니다. 역시나 좋더라구요.

2011-01-28 21: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29 23: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29 15: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1-29 23: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1-01-29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blanca님~


저는 아직도

문 앞에서 나를 맞아 주던 봄 바람.

고개를 젖히면 조각처럼 보이는 하늘.

사계절 마당을 늘 어슬렁 거리던 고양이.

수줍게 바람에 흔들리던 이름 모를 식물들.


이런 것들이 아른거려요. 사진에 담으면 잊을까, 마음에 새기고 왔습니다. 마음에 새기니 더 기억에 꺼내기가 쉽네요.
이사는 끝나셨겠지만 마음은 아직 그자리에 머물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툭툭. 엉덩이에 묻은 흙을 털어내지만 여전이 조금은 바지에 묻어 있는 것처럼.. 그렇게요.

blanca 2011-01-29 23:50   좋아요 0 | URL
혹 유년 시절의 집 얘기인지요. 바람결님 같은 집에 대한 기억을 저도 가지고 싶었는데 애석하게도 없어요. 지금도 가슴이 조금씩 저릿해요. 상황에 밀려 이렇게 되어 더 그런가 봐요. 작지만 아주 따사로운 집이었는데. 그리워지네요.
 

아이폰의 어플 ireaditnow(알라딘 서재 모분이 만드셨단다)는 일종의 독서기록장 어플이다. 별점도 매기고 간략한 코멘트도 덧붙이고인용도 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인터넷에서 책 이미지를 바로 불러와 읽는 진행 상태를 기록해 둘 수 있고 독서량 통계도 낼 수 있는 아주 사랑스러운 어플리케이션이다. 

나름대로 책을 좋아하고 어설픈 다독가라고 자평하지만 기록에 인색하니 읽은 책을 또 읽고 열심히 읽은 책 얘기를 남에게서 듣고 생소해하는 지경에 이르니 허무해서 시작한 서재활동은 그러나 보여진다,는 것을 의식하는 피로감이 있었다. 그리고 리뷰를 다 작성하기는 여력도 없고 능력도 없고 해서 숭덩숭덩 건너뛰니 독서 목록과 어느 기간 동안 얼마 만큼 읽었다,는 수치상의 합산 개념을 가질 수 없어 아쉬웠다. 이 어플은 정말 맞춤하였다. 한 달에 몇 권을 읽나, 별점 다섯 개인 책은, 세 개인 책은 어떤 게 있나, 이런 식의 조망이 가능해지니 신기하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괜히 스마트한 척 주변 사람들한테 자랑도 하고 했는데. 

바보처럼 인터넷에 연결해서 동기화를 잘못 하는 바람에 다 깡그리 모조리 아주 시원하게 날아가 버렸다. 

아이러니하게도 애플에서 세 번째 무기한 병가를 내고 퇴장했다는 스티브 잡스의 어느 대학에서 했다는 연설문이 출력되어 옆에 놓여있고. 

최고의 최신의 삶을 살아간다고 회자되는 그가 대학생 미혼모에게서 태어난 입양아였고 췌장암진단으로 죽음 가까이 다가가 본 경험을 통해 죽음이 당신이 무엇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의 함정을 벗어나는 최고의 길이라고 얘기하고 있었다. 

온라인으로 이미지화되고 저장되는 것들은 어쩌면 실물이 아닌 하나의 허상, 환상일지도 모른다. 한 번도 가져 보지 못한 것들을 가지고 있다는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가질 수 없는 것들을 간직하고 있다고 믿고 견디는 것은 아닌지.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들을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오만을 부리는 것은 아닌지. 

아주 시원하게 다 날려 버리고도 또 무언가를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건지. 잃어버린다는 것이 대체 무언가를 소유한다는 개념과 어긋나는 건지 하나인 건지 모르겠다. 놀라웠던 것은 다 날아가 버린 것들을 애타게 그리워하지 않는 내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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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1-01-21 0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럼요~ 날아가 버린 것을 애타게 그리워하지 않는 쿨함이 정신건강에 좋습니다!^^

blanca 2011-01-21 21:35   좋아요 0 | URL
여기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계획을 세워 놓았다 갑자기 이사 가게 된 것만 봐도 그런 것 같아요. 이제는 하나씩 버리고 추리는 연습도 해야 할까봐요, 순오기님.

양철나무꾼 2011-01-21 0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이폰으로 바꿔봐 했던 게 아이폰의 어플 ireaditnow때문이었는데 말이죠.
시원하게 날아가 버린 건...시원하게 잊어버리는 게 정신 건강에 좋다는 순오기님 말씀에 한표요~!^^

이사 준비하시느라 바쁘시죠?
이사 끝내고 차근 차근 다시 시작해 보세요.
그때쯤 제가 혹 아이폰을 장만하기라도 하면, 선배로서 조언도 해주시구요~^^

blanca 2011-01-21 21:38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님도 아이폰 장만하시려구요? 저는 먼저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에 걸맞는 내공은 전무하답니다.--;; 오죽하면 다 날려 버렸겠어요 ㅋㅋㅋ 스마트폰에 저장해 놓는 것들도 컴퓨터처럼 백업을 해야 겠더라구요. 결국 정말 소중한 것들은 수고를 해서 담아 놓고 관리해 주고 해야 하는 것 같아요. 저 내일 이사인데 집안 정리도 안되고 지금 무언가 중요한 일을 안 해 놓은 것 같고 서재에서 이러고 있고 --;;

turnleft 2011-01-21 03: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허거걱.. 죄송합니다. 미리미리 백업 기능을 제공했어야 하는데.. ㅠ_ㅠ
혹시 iTunes 에서 아이폰 이름에 오른 클릭 하신 후 Restore 선택해 보셨나요? 그럼 최근 백업한 데이터로 되살려지기는 하는데..;;

blanca 2011-01-21 21:39   좋아요 0 | URL
TurnLeft님이 왕림해 주시다니 영광입니다.^^;; 그런데 이제 소심증이 왔어요. 이 좋은 정보를 막 날아갔을 때 알고 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 이후로 또 이거저거 깔고 그래서 불안불안하답니다. 다시 시작할게요. 좋은 어플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한 제 탓이지요.

비로그인 2011-01-21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중한 기록이 있었어요. 내 기억의 한자락.
내가 들었던 말들과 내가 했던 말들을 다 기록했어요. 유아원 때, 집에 가기 전 동화책 한 단락을 읽어주는 걸 듣고 집에 가자마자 그걸 그대로 기록하게 하는 기억력 훈련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지요.
그걸 내도록 곱씹으며 몇 번을 다시 봤는데, 아, 세상에.

정품을 사용하다가 탈옥을 하다가 다시 정품으로 돌아오는 그 순간, 백업도 소용없이 그게 다 날아갔지 뭡니까.

행여나 아니 올까 그 님이 아니올까 기다리는 이 마음 허무해라

그 마음이었어요. 그 마음이었어요.

다 잃었다고 생각하고 털석 주저앉아 버렸는데, 제 기억 속에서 어떤 부분은 이제 잊혀져서 기억이 나지 않고 어떤 부분만 더 빛을 발합니다. 결국 기록하지 않고 있는다는 건 잊는다는 것이 아니라 더 생생하게 보관하는 일일거란 생각을 했어요. 양각과 음각이 있어 더 도드라지고 더 생생해집니다. 그걸 생각하면 지금도 볼에 홍조가 생기고,내 표정이 들뜨곤 해요.

결론-이제 탈옥 안합니다(응?)

blanca 2011-01-21 21:43   좋아요 0 | URL
쥬드님도 저와 똑같은 경험을 하셨군요--;; 순간 정말 벙찌다,는 표현이 절절하게 와닿더라구요. 게다가 쥬드님은 그토록 소중한 기억의 기록이었다니 순간 얼마나 허무하셨을까요. 양각과 음각. 이 말이 너무 좋아요. 책을 몇 권 읽고 별점 몇 개를 줬다는 데에 지나치게 매달리지 말란 가르침일까요?

결론 그러나 또 시작합니다.^^;;

saint236 2011-01-22 11: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쿨럭...저도 그래서 아이튠즈는 거의 사용 안합니다. 노래 넣을 때나 영상을 넣을 때는 다른 프로그램으로...동기화로 몇번 날린 기억이 있어서...컴퓨터에 데이터화해서 집어 넣는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대단한 휘발성을 가지고 있더라고요.

blanca 2011-01-22 20:33   좋아요 0 | URL
saint236님, 정말 그래요. 저도 두 번째랍니다. 눈 깜짝할 새에 그렇게 되더라구요. 백업을 해 두는 습관을 들여야 하는데 그게 또 쉽지가 않네요.

like 2011-01-24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오래전 아이팟에 녹음한거 날라가서 국제전화까지 한적있어요..ㅎㅎ 편리하긴해도 저장매체로서 안정성은 최악이라는 글을 보면서 동감100%

blanca 2011-01-24 22:50   좋아요 0 | URL
저는 솔직히 제 잘못이라고만 자학했는데 댓글들에 위로를 받아요^^;; 아이팟! 넘 귀엽더라구요. 드라마도 다운받아 보는 거 보고 넘 귀엽고 간지럽고 하더라구요 ㅋㅋ 저 하도 저장 관련해서 식겁한 적이 많아서 이제는 정말 백업좀 열심히 하려고 하지만 역시나 안 하는 중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