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고를 때 리뷰에서 찾아 헤매는 대목은 무엇보다 그 책이 재미있는지의 여부, 그 여부를 초월할 만한 가치가 있는지에 관한 얘기다. 책장이 술술 잘 넘어가느냐, 어렵게 얻은 숨통 트이는 시간을 그 책에 할애해도 아깝지 않느냐.
책에 대한 책에는 그런 얘기가 잘 나오지 않는다. 대부분 가독성에 대한 얘기는 슬쩍 피한다. 추천도서목록은 위압적이기 쉽다. 그 추천 도서 목록을 피하는 독서에 약간의 죄책감과 자괴감을 얹어 주는 경우까지 있다. 책에 관한 책은 자기가 읽고 자기식으로 해석해 내는 책들에 대한 일종의 지적 허영이나 과시로 흐르기 쉽다. 그 책을 읽지 않는 자는 모두 유죄가 되는 분위기는 숨이 막힌다.
이 책은 자기가 읽은 책에 대한 자기식의 해석과 자화자찬의 대척점에 서 있다. 정말 읽을 책을 찾아 헤매는 독자를 위한 사려 깊은 안내서다. 이미 읽은 책들조차 이 책을 통해 재독의 욕구를 느끼게 할 만큼 매혹적인 책지름신이기도 하다. 작가, 비평가, 출판사의 편집장, 라디오쇼의 사회자까지 거친 저자는 그가 사망해던 그 해에 증보를 거듭한 이 책의 완결판을 펴내게 된다. '평생독서계획'이라는 제목 만큼이나 이 책에서 다루는 책들은 장기적인 영향력을 미치고 독자들의 지속적인 흥미를 이끌어 낼 책을 선별해서 소개하고 있다. 실제로 수정판을 거치면서 도서 목록은 계속해서 수정작업을 거친다. 시간의 혹독한 평가를 이겨내지 못한 지나치게 통속적이고 대중적인 책들은 빠지기도 하고 그 시점에서는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했어도 후에 재평가된 책들은 다시 이 책의 초대를 받게 된다.
기원전 2,000년경의 <길가메시 서사시>로부터 치누아 아제베의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까지 133명의 작가들에게는 각각 12매의 원고가 할애된다. 그 작가들의 생애, 뒷얘기, 대표작, 추천작 등이 얘기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자가 재미없는 책은 솔직히 재미없다,고 신랄하게 얘기한 점, 과감히 축약본을 읽으라고 권하는 대목들, 건너뛰고 읽어도 무방하다고 독려해 주는 얘기들은 귀를 솔깃하게 한다. 이런 얘기를 기다렸다. 저자가 이 책들은 자기 계발의 도구가 아니라 자기 발견의 도구로 사진 필름의 현상액 같은 것이라고 묘사했던 '독자들과의 간단한 대화'는 정말 정직한 얘기였던 것이다. 다만 사마천의 <사기>, <금명매>, 미시마 유키오의 <가면의 고백> 등을 삽입한 것은 그런 대로 동서양의 균형을 맞추기 위한 노력이었다고 생각되지만, 아무래도 미국적이고 미국인의 정서에 맞는 책들 위주였다는 한계는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달과 6펜스>에서 인간에게 연민과 눈물어린 따뜻한 시선을 보냈던 서머싯 몸의 이 책을 읽으면 단박 그의 소설이 그 자체는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이 책도 책에 관한, 그리고 그 책을 쓴 작가들에 대한 얘기다. 다만 아주 신랄하다. 그 신랄함은 작가의 생애에도 닿아있고 그 작가들의 작품의 허술한 지점에도 파고든다. 소설은 즐기면서 읽는 것이라 어떤 소설이라도 그것을 읽는 이에게 즐거움을 주지 못하면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사정없이 뱉어 놓고 난 다음 서머싯 몸은 발자크도 플로베르도 심지어 톨스토이까지도 눈치 보지 않고 욕할 부분을 잡아 채어 주무르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뒷담화가 참 묘한 게 욕먹는 당사자를 꼭 한 번 확인해 보고 싶다는 아이러니한 욕망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책을 읽고 나면 대체 서머싯 몸은 그 책의 어디를 그렇게 물고 늘어졌나, 꼭 다시 확인해 보게 만든다. 노이즈 마케팅이 생각난다. 사생활을 까발리고 욕먹을 짓을 했다고 한껏 욕해서 관심을 불러일으킨 다음 이 당사자가 어떤 것을 내놓았나 몰려 가게 만드는 그 교묘한 상술은 이미 여기에서 예고된 것 같다.
알베르토 망구엘은 쉰세번째 생일을 맞은 날, 예전부터 좋아해온 몇몇 책들을 다시 읽어보기로 결심한다. 이 책은 그런 망구엘의 결심을 따라 1월부터 12월까지 망구엘이 카사레스의 <모렐의 발명>을, 키플링의 <킴>을, 샤토브리앙의 회고록 등을 읽어나가는 여정이다. '이 책을 강추한다', 따위는 아쉽게도 없다. '이런 어려운 책을 나만 읽고 이해했다',는 식의 자기자랑도 생략되어 있다. 그저 그 나이의 그 만큼의 깨달음, 그리고 상념, 겹치는 독서이력 등을 잔잔하고 아름답게 하나씩 펼쳐 보이고 있다. 예쁘고 단아한 책이다. 독서는 편안하고 고독하며 느릿한 감각적인 행위라는 그의 정의는 그의 책에도 해당된다.
이제 우리나라의 차례다. 하지만 아쉽게도 우리나라의 책들에 대한 얘기는 아니다. 시사다큐 전문프로듀서인 저자는 우울한 날 다른 인간을 할퀴고 싶지 않아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를 펼쳐 든다. 그리고 토성의 영향 아래 태어나 우울함을 태생적으로 지닌 이들을 떠올리며 위로 받는다. 남자들이 미워죽겠는 날은 <개선문>이나 <장미의 이름> 같은, 남자들이 예뻐 죽겠다는 책을 찾아 읽으면 된다고 얘기한다. 이 책은 어쩌면 쓰는 사람 자기 자신을 위한 독백이 될 수도 있는 지점과 그런 상황을 공유하는 특별한 경험을 했거나 하고 있거나 할 것으로 기대되는 읽는 사람들을 토닥거리는 지점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것으로 보인다. 책과 저자의 일상은 한데 엉켜 있고 그 책이 재미있다거나 아주 유익하니 꼭 읽어 달라는 당부는 툭툭 털어버린지 오래다. 이것이 이 책의 미덕이기도 하고 이 책을 펼쳐 들지 않을 수도 있는 이유가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을 펼치면 줄긋고 싶은 문장들이 우수수 떨어진다. 그리고 두고두고 참고하게 된다. 나와 비슷한 연배의 여인이 같은 책을 어떻게 그녀의 일상에 뭉클하게 끼워 넣었는지를 확인하는 일은 즐겁다.
김연수가 권하는 추천도서목록은 아니다. 아니 어쩌면 맞을지도 모르겠다. 이 책은 발췌독의 자료다. 그가 추린 소설들의 인상깊은 대목이 인용되어 있고 김연수의 시 같은 짧은 소회가 간략하게 덧붙여져 있다. 김연수의 글은 앞서의 인용된 작품과 크게 관련되어 있지 않을 때도 있다. 뒤라스의 <연인>의 한 대목, 그리고 사랑은 3D업종이라는 김연수의 얘기. 이런 식이다. 처음에는 고개를 갸우뚱하다 그가 추린 작품들의 대목에 흠뻑 젖게 된다. 저자의 글은 짧고 저자가 읽은 책의 원문은 길다. 신기한 게 막상 그 인용된 소설을 읽으라고 하지도 않는 저자의 글들을 읽으며 그 책을 읽겠다고 메모하게 된다. 그건 인용의 힘이기도 하고 저자의 성실한 삶에 대한 뜬금없는 고백때문이기도 하다. 진정성은 그냥 교감하게 되는 것 같다.
읽을 책들의 목록은 늘어만 간다. 살아 온 만큼 더 살면 기력이 쇠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 때는 이제 내가 살아온 삶과 읽어낸 책들의 기억을 소환하며 하루 하루를 지내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평생독서계획> 저자 클리프턴 패디먼의 얘기처럼 책을 읽는 행위는 남녀가 서로 사랑하고 가정을 꾸리고 여타 다른 체험들을 하는 것과 대등한 행위라는 말이 맞다. 한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지는 것과 어느 책을 읽고 그 책의 내용에 흠뻑 빠지는 것은 같은 무게다. 먼저 사랑을 경험해 본 친구의 조언은 언제나 어느 정도는 위안이 되는 법이다. 그런 책들에 관한 얘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