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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서 아름다운 것들은 나의 기갈에 물 한 모금 주지 않았다. 그것들은 세계의 불가해한 운명처럼 나를 배반했다. 그러므로 나는 가장 빈곤한 한 줌의 언어로 그 운명에 맞선다. 나는 백전백패할 것이다.

-김훈 <자전거 여행> 책 머리에 중


 


백전백패할 것을 알고 또 만인앞에 공표하고 그럼에도 한 줌의 언어로 그 운명에 맞설 것을 약속한 사람을 쉽게 저버릴 수 없음을 나는 안다. 삶이 치사하고 남루하고 던적스러움을 눈물을 흘리며 응시함에도 결국 남은 시간 사랑과 희망을 얘기하고 싶어하는 초로의 사내는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형해이다. 결국 그렇게 될 것을 알기 때문에 그의 언어들은 읽는 이를 무장해제 시키고 만다.

생명은 결국 긍정이다. 실존적 고통은 무한한 낙관주의와 긍정을 저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헤어나올 수가 없다. 지금 아프지만 우리는 또 노래하고 꿈꾼다. 김훈은 그걸 고약하게도 너무 잘 안다. 건조하고 예리한 그의 단문들에 자꾸 쓸리우는 듯한 환각은 무언가를 너무 적나라하게 들키고 만 것 같은 낭패감 때문일런지도 모른다. 긴박하고 박진감 넘치는 서사가 썰물처럼 쓸려 나가고 해안가에 남은 그의 연필 자국들은 내가 이미 밟아 놓은 흔적과 앞으로 밟고 지나가게 될 삶 그 자체다. 사실 우리 삶이 뭐 그리 드라마틱하겠는가. 누군가가 나의 삶을 기록하게 된다면 어쩌면 날카로운 회한과 망상과 소망의 어휘 몇 묶음이 고작일런지도 모른다. 우리가 자꾸 이야기를 찾아 읽고 서사에 집착하는 것도 결국 그게 아닌 것임을 알기 때문인 것 같다. 삶이 드라마틱한 여정과 정교한 플롯으로 채워질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삶은 생각보다 지루하고 비상식적이고 아귀가 맞지 않는다. 그 결을 쓰다듬으며 부조리와 모순을 하나 하나의 언어로 차례차례 걷어내다 보면 그것은 하나의 이야기라기보다는 체념을 위한 설득의 얘기에 가까워진다. 여기에 반하는 행위는 도발적이고 매혹적이다. 그게 문학이고 예술이다.


<내 젊은날의 숲>에서는 유독 서사가 휘하다. 민통선 안 국립 수목원 전속 세밀화가인 ‘나’는 언뜻 김훈 그 자신을 연상시키듯 주변을 냉연하고 관조적으로 읊조린다. 말단 공무원으로 뇌물을 공공연하게 받아 상사에게 상납하다 구속된 아버지가 서서히 시들어 가는 모습과 자폐아 아들을 둔 싱글파더 수목원 연구실장이 꽃이 제 색깔을 내는 그 필연성을 설명하고자 그 무위의 시도를 계속하는 모습이 이제 곧 사회로 첫발을 내디딜 학군단 장교의 모습과 서로 교차하고 비껴가는 모습이 나를 통과하여 펼쳐진다. 세상으로부터 겉돌고 헤매는 자들의 메마름, 황폐함을 얘기하는 것은 ‘내’가 도저히 종이 위해 온전하게 옮겨 놓을 수 없는 개별적 생명의 현재성을 지난하게 찾아 헤매는 일과도 같다. ‘나’는 끊임없이 한계를 확인하고 그것에 쓸리우며 멀고 무관한 삼인칭인 ‘그’를 내 눈앞의 이인칭인 ‘너’로 바꾸어 놓고자 한다.

복수초의 노란 꽃 안에서도 오십 년 전 ‘아’와 ‘피아’의 구별이 무너졌던 전장에서 죽어가며 상추쌈을 그리워했던 학군단의 백골 위에서도 안실장의 자폐증 아들의 빛이 내리는 머리 가마 위에서도 울리는 ‘쟁쟁쟁’ 소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 안에 움켜쥐고 싶은 사랑과 희망에 대한 가능성의 울림이다. 그 ‘쟁쟁쟁’ 소리는 도저히 화폭에 옮겨 담을 수도 언어로 형상화할 수도 없지만 삶의 골조이자 생의 동인이다. 모든 불가능한 것들을 소망하게 되는 발원지이자 아름다운 것들을 꿈꾸게 되는 몹쓸 환각 지대다.

작가는 육십이 넘어 그 환각 지대에 발을 담궜다. 언어로 도저히 가둘 수 없는 것들이기에 그것들은 더 아름답다. 우리의 인식의 한계의 지평 저너머에 옹크리고 있는 그것들이 결국 우리 삶 그 자체를 지배한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는 말은 전 우주를 다 채우고도 모자랄 만한 것임에 분명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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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0-11-22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훈 진짜 멋지네요.. 라고 하면 안 되고, 블랑카님 페이퍼 댓글이 이모양이라 죄송하지만, 존나 멋있네. 라고 해줘야 할 것 같아요. ㅎ

blanca 2010-11-23 22:36   좋아요 0 | URL
하이드님, ㅋㅋㅋ 저 그 용어 좋아라 합니다. 이런 댓글이 더 좋은데요 ㅎㅎ

굿바이 2010-11-23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배교자는 오늘도 웁니다 ㅜ.ㅜ

blanca 2010-11-23 22:52   좋아요 0 | URL
굿바이님의 배교는 어떤 것에 대한 것일까요? 힌트좀 주셔요...혹 김훈 작가일까요?

2010-11-23 12: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23 22: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poptrash 2010-11-23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다면 저는 백일전백일패... 쿨럭

blanca 2010-11-23 22:54   좋아요 0 | URL
poptrash님, 저도 쿨럭. 저는 백전은커녕 한 십전하면 나가떨어질 깜냥입니다.

비로그인 2010-11-23 19: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면서도 가는 길이 있습니다. 이미 뻔히 알고 있는데, 그 길로 가야만 하는 경우.

blanca 2010-11-23 22:55   좋아요 0 | URL
쥬드님...그런데 그건 머리로 알고 가슴을 따르는 일일까요? 아니면 가슴으로 고통스러워하며 머리를 따르는 일일까요....그 앎이 의외의 해피엔딩으로 막이 내리기를 바랍니다...

2010-11-23 21: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23 22: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11-24 0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오랫동안 음미하고 갑니다^^

blanca 2010-11-24 22:34   좋아요 0 | URL
후와님 좋은 글이라고 하시니 진심으로 부끄럽네요...의욕만 앞서지 항상 너무 모자라요...

cyrus 2010-11-24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여유만 있다면 자전거 여행을 해보고 싶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blanca 2010-11-24 22:35   좋아요 0 | URL
저도 그런 생각했었어요...자전거에 몸을 싣고 몸전체로 대지 위를 굴러가고 호흡하고 싶은 소망. 하지만 저는 자전거 안장에 앉기만 하면 바로 앞으로 고꾸라진답니다. 겁이 너무 많아서 자전거를 배우지 못했어요. 언젠가는 또다시 도전해서 신나게 가로수길을 달리는 꿈을 가져 봅니다.^^
 

스타벅스에서는 4100원짜리 카페라테가 팔리고, 역 앞 별다방서는 3천원에 하룻밤 잠자리를 판다,(한겨레21호 '방이 아닌 방에 살기')는 기사를 읽으며 며칠 전  라떼를 사들고 백화점 매대 판매 여직원의 뒤에서 마셔야 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자리배치가 공교롭게 그렇게 되어 앉아서 서 있는 그녀의 생업의 뒷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경험은 어쩐지 미안하고 죄책감이 드는 그것이었다.  

머리로 입으로 펜으로 대의를 지껄이고 사회적 약자들의 아픔에 공감하는 척 하기는 비교적 쉽고 폼새 나는 일이다. 하지만 작가도 사회운동가도 정치인들도 종교인들도 정작 그들의 땀과 눈물, 냄새를 여실히 느끼고 손을 잡으라 하면 머뭇거리고 외면할지 모른다. 실제 자발적 노숙자 생활을 경험했던 조지 오웰도 그것에 익숙해지기는 힘든 일이라고 고백하고 있다. 도스토예프스키도 사랑은 멀리 떨어져 할 때나 가능한 것이라고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얘기하고 있지 않은가. 

 

히로세 다카시의 <제1권력>에서도 록펠러 평전에서도 업든 싱클레어의 <정글>은 20세기 미국의 정재계와 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과 경악, 반향을 일으킨 것으로 언급되고 있다. 르포도 기사도 아닌 소설가의 픽션이 대통령이 직접 조사관을 파견해 상황을 파악하게 하고, 식품의약품위생법, 육류검역법을 제정하게 하고 오늘날의 FDA를 설립하게까지 한 것이다. 리투아니아의 목가적 환경에서 시카고의 가축 수용장 지대로 이민 온 가족이 비숙련 노동자로 전락하여 파멸의 나락으로 치닫는 과정을 마치 르포르타쥬처럼 생생하게 묘사한 이 작품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된 최하층 노동자들의 삶과 절망, 패배감을 마치 끌로 새기듯 문장 하나 하나가 거칠고 예리하게 형상화하고 있어 백 년이나 지난 오늘 읽어도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아무리 이건 소설이다,라고 자기암시를 넣어도 리투아니아에서 사랑하는 여인을 데리고 와 결혼하여 가정까지 이룬 청년 유르기스가 겪는 그 수많은 부조리들, 빈곤들, 패배들, 억압들이 속수무책으로 스며들어 와 독서 자체를 고통스럽고 처절한 것으로 그의 삶에 동화시켜 버린다.  

   
 

 그의 영혼은 고통과 절망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는 그때 문명 세계를 그 어느 때보다도 냉정하게 바라보았다. 그 세계는 바로 가지지 못한 자들을 예속시키기 위해 가진 자들이 만든 야만적 질서만이 중요시되는 세계였다. 그는 가지지 못한 자였다. 그에게는 모든 바깥 세상과 모든 인생이 하나의 커다란 감옥이었다.-p.377

 
   

그가 일하는 가축 도살장 지대의 생생한 묘사는 지난 광우병 파동 때에도 화제가 되었다. 소위 "다우너"를 몰래 도살대로 올려 보내는 특별 승강기에 대한 언급은 1세기의 시간 차를 무색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결핵에 걸린 소는 살이 쪄서 오히려 환대 받았고 '불고기 햄'을 각종 고기 찌꺼기와 부패한 부위들을 화학 약품으로 처리하여 만드는 과정에 대한 묘사는 과연 그 공정이 오늘날 어느 정도 개선되었는가에 대한 의문을 떠올리게 한다. 실제 작가는 대중들이 이러한 대목들에 분노하여 먹거리의 위생 문제를 공론화한 것에 "나는 사람들의 심장을 겨냥했는데 위에 명중하고 말았다"라는 말로 정작 얘기하고 싶었던 저임금 비정규 노동자들의 고통에 대한 관심을 환기했다. 사실 이 문제는 결국 자본주의가 가져오는 인간소외 문제라는 접점을 가지고 있다. 도살장의 톱니바퀴로 전락시킨 노동자나 그들의 손에서 인간이 도저히 먹을 수 없는 것들을 가공하게 한 것이나 결국 인간, 생명이 가지는 그 본연의 절대적 가치를 경시한 탐욕과 오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한 세기가 지난 오늘날에도 이러한 인간의 소외는 개선은 커녕 더욱 가속화되어가는 실정이다. 다만 그 방법이 더욱 고도하고 교묘하여 정작 소외되는 인간 자신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본주의의 부속품으로 스리슬쩍 끼워져 들어가는 것이 성공적인 삶이라 안위하는 지경에게까지 이른 것이 조금 다른 정도가 아닐까. 인산 비료가 풀풀 날려 온 몸의 땀구멍에 다 스며들어가는 대신 반도체 공장에서 온갖 유독 화학 물질에 서서히 건강한 세포들이 잠식되어 가고, 부패한 잡육이 뒤섞인 소세지나 햄대신(자신할 수는 없지만), 각종 유해 화합 첨가물이 교묘하게 들어간 음식들을 먹는 풍경으로 대체되었다.   

유르기스가 아내 오나를 잃고 결국 아이까지 진창 속에 빠져 죽게 되는 비극을 겪은 후 본인이 사기, 타락, 부패한 금권선거운동원의 일원으로 전락하는 과정은 아니러니하지만 슬픈 필연 같다. 그가 고통과 굴욕에 무뎌졌던 것처럼 다음에는 악덕에 무감각해지는 모습을 보는 것은 마치 가장 나쁜 인생의 드라마를 근거리에서 지켜봐야 하는 친구처럼 가슴을 먹먹하게 한다. 이해하고 감내하는 것만이 인생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듯 그는 갑자기 사회주의에 투신하게 된다. 이 결말은 도식적이고 나이브하다는 평을 많이 받게 된다. 실제 번역자는 초역에서 이 결말을 생략해 버리는 모험을 감행한다. 작가가 갑자기 자신이 실제 경도됐던 이념을 교조적으로 주입하려고 하려는 대목은 지루하고 생뚱맞은 면면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소설의 사회적 역할론이야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이 작품의 결말은 조금 아쉬운 것이 사실이다. 문제의 해결책과 대안을 모색하는 것을 소설의 서사에 첨언처럼 간주한 것이 작품의 완결성을 높였다기 보다 완성도를 떨어뜨린 것같다. 

이 책은 1979년 문학평론가이자 시인인 채광석의 번역으로 출간되었으나 곧 판금조치를 당했다고 한다. 채광석은 그 자신이 민중적 민족 문학에 투신했다 불의의 교통사고로 절명한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여전히 정글로 기어들어간다. 언젠가 반드시 우리 손으로 만든 정글에서 그 가시덤불에 뒤얽혀 우리도 절명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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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2 1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12 21: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11-12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업톤 싱클레어는 도스토예프스키를 '자본주의를 지키는 불독'이라고 해버렸지요.아주 화끈하게! 미국에선 프랭크 노리스와 함께 20세기 초 미국노동문학의 대표자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선 싱클레어만 알려졌어요.

blanca 2010-11-12 21:59   좋아요 0 | URL
노자님, 이 책 그런데 묘하게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과 겹치는 부분이 많아요. 싱클레어가 도스토예프스키를 미워하면서 숭배한 것이 아닌가 싶게 결말까지 흡사하더라구요. 교조적 연설. 프랭크 노리스는 몰랐어요. 한 수 배웁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11-13 16:13   좋아요 0 | URL
사실 도스토예프스키의 <악령>도 그렇고 그의 작품이 반혁명적 반동적이잖아요...싱클레어가 그런 걸 싫어했지요.

정글에서 제일 인상적인 장면은 통조림에서 사람손가락이 나온...으...공포영화 수준이었죠.

비로그인 2010-11-14 0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제목이 참 아프게 다가옵니다. 오늘은 마음이 좀 쿡쿡 쑤시는 밤이 될 것 같습니다.
아픔을 조금이나마 잊으려면 더 늦게 깨어 있어야겠어요..

blanca 2010-11-14 22:37   좋아요 0 | URL
맘이 아프시면 안되지요...괜히 어쭙잖은 페이퍼로 미안해지는걸요. 일요일저녁 기분 좋게 보내시라는 인사가 좀 무리일 수는 있겠지만 바람결님, 오늘밤 평안하고 따뜻하게 마무리하기를....

후애(厚愛) 2010-11-15 0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겁고 행복한 한주 되세요~
감기조심하시고요.^^

blanca 2010-11-15 21:55   좋아요 0 | URL
후애님도요. 감기는 심하게 앓고 난 후라 다시는 안 걸리려고 작심 중인데 잘 될지는 모르겠어요^^;; 여기 한국 지금 무지 추워졌어용--;;

마녀고양이 2010-11-15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이런 책 잘두 읽네.

나는 요즘 우울해서여, 할리퀸 7권 외국 로맨스 2권 읽어치우고
다른 것은 손도 안 댔어요. 덕분에........ 수업 진도가 엉망이예요! ^^

blanca 2010-11-15 21:57   좋아요 0 | URL
ㅋㅋㅋ 마고 언니, 근데 우울함 안 되요. 저는 감기가 나아서 그나마 기분이 많이 좋아졌어요. 지난 일 주간은 정말 세상이 검게 보이더라구요. 어질어질하고..이제 마고님과 저 이 감기로 이번 겨울 감기는 그만 걸리고 힘차게 즐겁게 한 해 마무리해요.(사실 저도 잘 될지는 모르겠어요--;;)

비로그인 2010-11-16 23: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겁고 슬퍼서 읽기 어려운 책이었을텐데...
블랑카님~~잠수하는 동안 아름다운 블랑카님의 글이 참 그립더라구요.
역시나 감동 이따만큼 받고 가요^^

blanca 2010-11-17 20:14   좋아요 0 | URL
그립다,는 말은 언제나 감동적입니다. 마기님....
 

나는 이 도시가 가진 제왕다운 풍모에 감탄하고 말았다. 자신이 역사의 한 페이지를 확실히 장식하고 있다는 걸 아는 데서 비롯된 당당함과 도도함, 즐거움과 위대함이 있다. 내가 할머니가 된다면 로마처럼 나이를 먹고 싶다. 
 -엘리자베스 길버트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

 

그러나 다시 한 번 로마에서 살고 싶은가 하고 묻는다면, 나는 아니오, 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여행하러 오는 거라면 몰라도 사는 것은 이제 질렸다.  
-무라카미 하루키 < 먼 북소리>

 

 

 

 

 

 

 

 

이제 막 실패한 결혼과 길고 지독한 이혼 과정을 거친 후, 결국에는 가슴 아픈 실연으로 끝나버린 열정적인 연애 사건까지 겪은 삼십대 중반의 전문직 미국 여성은 로마를 찬미한다. 그녀에게 로마는 도시 전체가 아름다운 이탈리어를 가르쳐 주기 위해 공모하고 터무니없이 ,가슴아프게, 어리석을 정도로, 아름다운 남자들로 넘쳐나는 요정의 도시다.  

이질적인 문화에 둘러싸여 고립된 생활 속에서 자신의 근원을 파내기 위해 로마로 들어선 일본인 작가는 차를 잠시 주차하면서도 카스테레오를 뜯어 들고다니며 어깨에 맨 가방까지 사수하며 주변의 모든 시선을 잠재적 사기꾼과 도난꾼의 그것으로 의식해야 함에 지치고 만다. 엉망진창인 공공서비스, 타인의 고난에 대한 무신경함, 날치기, 사기, 도난 등이 끈끈하게 엉겨 있는 그곳에서 하루키는 독자를 상대로 드잡이라도 할 태세다. 행간에 배어 있는 그의 분노, 억울함, 짜증이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리즈가 아름다움의 창조와 감상에 스스로를 바치는 진지한 과업을 수행하고 있다고 상찬한 바로 그 로마인들을 향한 것이라니. 이건 마치 어느 한 사람을 두고 두 명이 번갈아 와서 쟤는 순 허풍만 떨고 불성실한데다 도벽까지 있대, 같이 놀지마! 라고 하고 다른 한 명은 걔 정말 활달하고 재미있고 섹시하지 않냐, 고 추어주는 격이다. 

그렇담 빨라죠 아이스크림을 세상에서 가장 눈물나게 귀엽게 핥아 먹는 공주님이 거닐던 그 광장의 이미지 한 컷으로 로마를 기억했던 나 같은 사람으로서는 그래, 너희들 얘기도 맞지만 내가 한 번 직접 만나 보고 판단할게, 라고 말할 수밖에. 하지만 조만간 가능할 것 같지는 않으니 계속 걔의 뒷담화를 좀 적나라하게 해보자, 라고 독려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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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11-03 23: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하하하하하 blanca님. 이렇게 콕 집어내시다니... 너무 재미있잖아요!! 못된 것들 같으니라구. 하핫.
음, 저는 하루키의 손을 들어주겠어요.

blanca 2010-11-04 12:34   좋아요 0 | URL
브론테님, 그런 거예요? 이 둘의 얘기를 들어보니 정말이지 직접 가보고 제가 판결을 내려주고 싶은 심정이라니까요. 한 명은 줄곧 욕을, 다른 한 명은 기가 막히게 칭찬을 해대니 직접 만나 보고 싶을 수밖에요^^;;

... 2010-11-04 13:42   좋아요 0 | URL
로마는 최고예요. 뭐라 말할 수도 비교할 수도 없어요.
하지만 그 곳에서 산다고 가정하면..... 하루키의 말이 옳다고 느껴져요. 무엇보다 전 "로마처럼 나이를 먹고" 싶지는 않네요. 로마대신 들어갈 수 있는 도시/장소가 얼마나 많은데... ^^ 아무튼 재미있었어요, blanca님.

하이드 2010-11-03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뜩 드는 생각이 남자와 여자의 차이인걸까요? 먼북소리를 그리스 로마 여행하면서 읽었어요. 엄살없는 하루키인데 이 책은 좀 어둡죠. 엘리자베스 길버트는 초긍정녀에요. 부러워요. 근데 이번 결혼해도 좋아에 앙코르 여행 나오거든요. 아주 힘든 상황에 여행하는 그녀는 제가.기억하는 앙코르와 다른 모습을 보고 오지요. 책만 독자와 작가가 함께.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여행도 장소와 여행지가 함께 만들어나가나봐요. 제경우에는 무지.아팠을때 여행했던 터키에 대해 어두운 기억을 가지고 있어요.

blanca 2010-11-04 12:37   좋아요 0 | URL
하이드님, 아 남녀의 차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그리스 가셔서 그리스인 조르바 얘기 하셨던 것 같은데. 그 때 정말 나도 하이드님처럼 그러고 싶다,고 생각했거든요. 그 페이퍼 보고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었나 봐요. 결혼해도 좋아,도 읽어보고 싶어요. 터키. 그렇군요. 맞아요. 그 때 그 심정, 마음과 장소는 묘하게 결합하는 것 같아요. 먼 북소리에는 어울리지 않게 하루키의 엄살이 많이 나오더라구요. 참 의외였어요...

양철나무꾼 2010-11-04 0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넘 귀여우세요,blanca님~^^
전 하루키는 읽었고,먹.기.사.는 못 읽은 고로...하루키 손을 들어주겠어요.
로마 여행이요?
전지금 에베레스트에 미쳐있어서 말이죠~^^

blanca 2010-11-04 12:37   좋아요 0 | URL
에베레스트라굽쇼?!! 우아. 저 귀여운 건 어떻게 아셨죠? ㅋㅋㅋ 양철나무꾼님의 다이나믹하고 다양한 관심사에 저까지 들썩입니다.

LAYLA 2010-11-04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하루키 손을 들어주겠습니다 ㅋㅋㅋ 관광객으로 넘쳐나는 곳은 어디라도 피곤한 면이 있는거 같아요. ㅋㅋㅋ

blanca 2010-11-04 12:38   좋아요 0 | URL
라일라님, 하루키 손 들어주시면 저 이탈리아 안 가봐도 되는 거예요?^^;; 사실 아주 가보고 싶진 않아요. 저 같이 소심한 인간은 날치기 한 번 당하면 그 자리에서 엎어져서 울지도 몰라요--;;

oren 2010-11-04 0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10년 가까이 흘렀지만 '로마'에 처음 닿던 날의 감격을 잊지 못한 一人으로서 댓글 하나 남겨봅니다.
* * * * *
내가 로마 땅을 밟게 된 그날이야말로 나의 제2의 탄생일이자 나의 진정한 삶이 다시 시작된 날이라고 생각한다.
- 괴테,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中에서

"어제 처음 로마에 도착한 사람도 하루만 지나면 마치 태어났을 때부터 로마에 살고 있었던 듯한 얼굴로 시내를 돌아다닌다. 그들을 맞는 로마 사람들도 그들을 이방인으로 보지 않는다."

"베네치아와 피렌체에도 고대가 그림자를 떨구고는 있지만, 고대에 신경을 쓰지 않고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로마는 다릅니다."
- 시오노 나나미,《황금빛 로마》 中에서

blanca 2010-11-04 12:40   좋아요 0 | URL
oren님 반갑습니다. 로마는 곳곳에 유적이 있어 건물을 지을 때 땅을 깊이 파지도 못한다면서요.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을 꼬옥 한 번 읽어보고 싶었는데 서둘러야 겠습니다. 과거가 현재처럼 살아 움직이는 도시로서 로마를 경험해 보고 싶습니다.

프레이야 2010-11-04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마에 가보지 못한 사람으로서 할 말이 없는, 그러나 즐거운 페이퍼에요.^^
리즈는 천품이 밝은 여성 같았어요. 때론 우울에 점령당하기도 하지만 극복하는 과정이
책에서 참 인상적이더군요. 물론 타자들의 도움이 있었지만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이 크겠지요.
블랑카님 당장은 저도 어렵고 다음에 우리 가보고 얘기할까요? ㅎㅎ
가보기 전 상상만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 같구요.
그래도 로마라면 오래전 첫사랑을 만나 실망할 일, 뭐 그 비슷한 일은 없을 거 같아요. 하하하.

blanca 2010-11-04 12:41   좋아요 0 | URL
프레이야님, 저두요 ㅋㅋㅋ 맞아요. 리즈 참 낙천적이죠? 본인은 아니라고 할 지 모르지만 참 건강한 사람인 것 같아요. 한 몇 년이 흐르고 정말 로마기행을 함께 하고 공동 페이퍼를 작성해 볼까요? 떨립니다...

다락방 2010-11-04 09: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로마에는 가보지 않았지만, 두 책을 다 읽어본 사람으로서 하루키 손을 들어주겠습니다.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를 싫어하기 때문에 사실 하루키 손을 들긴 했지만, 뭐, 편파적 애정은 누가 어떻게 할 수 없는거니까요. 하핫;;
먼 북소리에서였나, 로마(였나 아니였나) 우체국 가서 우편물 붙이던 에피소드가 엄청 기억에 남아요. 하나의 소포가 무게를 잴때마다 요금이 달라져서 하루키도 신경질 내고, 직원도 결국 여러번 달라진 요금의 평군을 내어 하루키에게 돈을 달라고 했던 일이요. 그게 근데 로마가 맞는지는 잘 기억이 안나네요. 하핫. 갑자기 그 에피소드 생각이. 훗

blanca 2010-11-04 12:43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저번에도 생각했던 거지만 인상적인 대목을 정확하게 기억해 내시는 능력이 놀라워요. 맞아요. 우체국 ㅋㅋㅋ 로마 맞아요. 저는 리뷰를 작성하면서도 책 내용이 생각이 안 나는 수준이랍니다.--;;

비로그인 2010-11-04 1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만 리즈의 편을 드는군요.
이혼하고, 정신이 너덜거리고, 열중할 뭔가가 필요하고, 그런 여자라면 로마가 아니라 대구라든지 부산, 서울에라도 빠질 겁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결국 하루키 편이로군요.

blanca 2010-11-04 12:44   좋아요 0 | URL
쥬드님! 아아...그래요. 그럴 수 있을 것 같아요. 댓글을 자꾸 되뇌게 되네요. 결국 하루키 편이라는 얘기도.

마녀고양이 2010-11-04 1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먹기사 영화가 워낙 마음에 안 들었기에 무조건 하루키 편.. 이라고 하고 싶다가도
로마의 휴일 오드리를 생각하면, 다시 한번 곰곰히................

이런거 저런거 다 떠나서, 물빛이 그리 이쁘다네요.
블랑카님, 우리 남편들 팽개치고 같이 놀러갈까요, 로마? 아하하.
위에 프레이야 언니두 간다 하시네... 큭

blanca 2010-11-04 12:45   좋아요 0 | URL
마고님, 그 영화는 워낙 지루하다는 평이 ㅋㅋㅋ 물빛이요? 그 단어도 참 이쁘네요. 진짜 로마 기행 뜹시다. 가기 전에 오드리 햅번처럼 머리 자르고 가서 꼭 빨라죠 아이스크림 먹을 거에요. 플레어 스커트 입고 ㅋㅋㅋ

마녀고양이 2010-11-04 21:05   좋아요 0 | URL
로마계 하나 만들까봐... 아하하.

꿈꾸는섬 2010-11-04 1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블랑카님 저는 로마에도 가보지 못했고 두 책 다 읽어보지도 못했지만 하루키를 좋아하니 하루키의 손을 들어주고 싶어요.^^

blanca 2010-11-04 12:46   좋아요 0 | URL
꿈꾸는섬님 근데 하루키랑 김영하랑 라이프스타일 완전 비슷한 것 같아요. 약간 작품도 그런 것 같고. 와이프들 성격도 그렇고. 신기했어요. 하루키도 좋아하시는군요. 전 담생에는 하루키 같이 살고 싶어요 ㅋㅋ

꿈꾸는섬 2010-11-05 10:12   좋아요 0 | URL
20대때 좋아하던 언니가 광팬이었어요. 저도 덩달아 좋아하게 되었죠.
ㅎㅎ김영하랑 하루키랑 라이프스타일이 비슷하군요. 둘 다 좋아하는 작가에요.
하루키 같이 살고 싶다...꼭 그리 되시길...

2010-11-04 17: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04 2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순오기 2010-11-06 0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쎄~ 둘 다 맞겠죠?^^
세상 모든 일엔 양면성이 있으니까~
하지만 엘리자베스 길버트처럼 믿고 싶은 마음.

blanca 2010-11-07 16:34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 맞아요. 그 양면성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의 차이일 것 같아요. 저도 엘리자베스처럼 긍정적이고 낙천적인 사람이 되고파요.

후애(厚愛) 2010-11-06 0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오랜만에 놀러왔지요?^^;;
즐거운 주말 되세요~ ^^

blanca 2010-11-07 16:35   좋아요 0 | URL
후애님, 환영합니다.즐거운 주말 보내고 계신거죠? 검사를 이번 주말에 받으신다는 것 같았는데...결과가 잘 나와야 할 텐데요...

알로하 2010-11-11 14: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먼북소리는 읽었는데 저는 그리스부분만 기억에 남네요. 먹고 기도하고~도 빨리 읽어봐야겠어요.^^

blanca 2010-11-11 16:13   좋아요 0 | URL
알로하님, 반갑습니다. 먹기사,도 꼬옥 한번 읽어 보세요. 같은 장소를 다르게 바라보는 시각이 아주 재미있답니다.^^
 

터치폰의 최대 단점은 한 방에 훅간다는 것이다,라고 쓰고 싶었다. '한 방에 훅간다'는 표현을 정말이지 써보고 싶었다.
그러니까 예기치 않게 전화를 걸면 안되는 사람(오 년동안 연락 한 번 없었던 사람, 전직장의 상사 같은)의 전화번호에 살짝 집게 손가락이 닿아 그 사람과 수인사를 나누고 되게 말아버리는 상황 같은 것이 생긴다. 통화음이 가기 시작하면 더욱더 정신이 없어져 종료 버튼을 어떻게 활성화시켜야하는 지 같은단순한 매뉴얼도 머얼리 떠나 버린다. 다른 사람이 구경좀 하자고 가져갔다 벌어지는 사단도 꼭 이런 것들이다. 왜 나쁜 예감은 틀리지를 않나. 그 사람은 이리저리 구경하다 또 통화 버튼을 스치고 만다. 이 정도면 가히 미칠 지경이다. 화도 못 내고. 발신음이 두 번 가는 동안 상대의 기지국을 찾아 헤매는 시간이 될 수도 있다는 기사를 읽고 마음대로 종료시켜 버린다. 설마 부재중 통화가 뜨지는 않았을 거야,라고 가슴을 쓸어내리지만 알 도리는 없다.  

이래저래 화가 나서 끓여 먹은 라면 세 젓가락에 가열차에 깨서 울어대는 아이 소리. 가까스로 다독여 놓고 나오니 밤 열 시 반에 갑자기 벨 눌러 주시는 택배 기사님. 이 책을 가지고.  괜시리 겁나 양 다리를 쫘악 늘여 여차하면 튈 기세로(아이를 나두고?)  받아들고 제목을 읽으니 더욱더 우울해진다.

김훈도 공지영도 신간을 내고 께작께작 읽는 하루키의 <먼 북소리>도 나쁘지 않은데 갑자기 책이 너무 많고 건성으로 너무 많이 읽었다,는 우울한 자각이 엄습한다. 11월인 게다. 올해도 나는 누구 엄마로 그것도 그다지 최선을 다하지 못한 엄마로 한 해를 보내고 만다. 잘 살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오리무중이다. 열심히 정성스럽게 하루하루를 채워 나가고 싶은데 방법도 방향도 모르겠다. 되지 않을 꿈을 꾸는 일도 피곤하고 그렇다고 다 포기하고 손 놓자니 사는 것 같잖고 정작 가장 원하는 게 뭔지도 모르겠고 소소한 재미들도 다 값없게 느껴지고 다만 카푸치노에 계피가루 뿌려 먹는 게 맛있다는 것만 알았고. 포도농사와 사과농사가 풍작이라 맛있다는 것밖에 모르겠고.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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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11-03 08: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요. 제 고민을 소소하게 들어주고, 꼭 해야 할 말, 내가 꼭 기다리는 말을 잘 표현해 주는 진중한 사람이요.

새벽 세 시에 전화가 오지 뭡니까. 받아봤더니 어떤 낯선 나라의 지하철 소리가 들렸어요. 아무리 귀를 쫑긋, 해봐도 그 사람의 목소리가 아닌, 지하철 소리요. 낯선 나라에 삽니다. 그래서 그 아름다운 지하철 소리를 감상했어요. 네가 모르는 일 분간, 나는 너와 함께 있다, 라고 살짝 이야기하면서요.

새벽 세 시에 깬 잠은 다시 쉽게 들지 않는 법이지요.

blanca 2010-11-03 13:28   좋아요 0 | URL
지하철소리...쥬드님 그 전환 실수가 아닌 표현일 것 같아요. 너 듣고 있지? 나 여기 있어. 널 생각하며...

마녀고양이 2010-11-03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웃느라. 미안.

1. 한방에 훅간다는 표현 너무 잼나죠? 이리저리 쓸 수 있는 정~말 쓸모있는 표현!
2. <나이들수록 왜 시간은 빨리 흐르는가> 샀어요? 나두 사놨는뎅, 아직 못 읽었어요.
지금 충분히 블랑카님 잘 하고 계시는데요, 분홍공주님 아직 어린데, 그 시간을 타서
많은 책들을 읽으시잖아요. 안 그래도 어제 지인과 블랑카님 리뷰는 나이(?)보다 더욱
깊이가 느껴져서 좋다, 그런 글 표현 재능은 타고나야 한다 부럽다.. 이런 얘기했는걸!

오늘 좋은 일 가득 생길거예요!

blanca 2010-11-03 13:30   좋아요 0 | URL
마고님 따라한거잖아요 ㅋㅋ 고마워요. 정말. 격려가 필요한 시점이었어요.

프레이야 2010-11-03 13: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블랑카님이 무지하게 화가 났군요. 토닥토닥~ 안아주고 싶어요.
화를 안 내는 것보다 내는 게 좋대요. 그러나 5분이상 화를 내고 있으면 내탓이라네요.
화를 내고 다스릴 줄 알아라는 말인데 블랑카님은 이런 멋지고 귀여운 글로 이미 잘 다스리고 있네요.
역시 사랑스러운 블랑카님.^^
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에게 우리 이렇게 말해주자구요, 정말.
너 그러다 한방에 훅 간다!! ㅎㅎㅎ

근데 왜 이런 글에 추천 세 번 안 눌러지는거얌 ㅋㅋ
화풀리라고 기합 대신 세 번 누르고 싶은데..
아니 이미 풀리신 거죠?^^

blanca 2010-11-03 13:32   좋아요 0 | URL
프야님이 주신. 에너지가 왔어요. 기분이 나아진 이유가 있었군요! 화도 나구 자학도 하고 그랬거든요--;;

like 2010-11-03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이들수록 시간이 빨리간다는 내용 졸업학기 교양 심리학 강의에서 들었는데, 아예 책 한권으로 나오는 군요.(살 날도 줄어가는데 시간마저 빨리 가는것처럼 인식된다며 씁쓸했던 기억이 나는데, 그 원인은 잊어버렸네요~)

아직 계피가루 뿌려먹는 카푸치노맛은 잘 모르겠지만,오늘 우유거품 잘내는 비법을 조금 알게됬다는...

blanca 2010-11-03 20:45   좋아요 0 | URL
아, 이런 강의를 들으셨어요? 카푸치노는 사먹는 카푸치노요^^;; 집에서 핸드드립해 먹다 넘 맛이 없어서 어쩌다 한 번씩 사먹고 있어요. like님은 우유거품까지 내실 수 있어요? 우아!

비로그인 2010-11-04 10: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릴적에는 매일이 새로운데, 나이가 먹으면 매일이 똑같아서.
그 똑같은 하루를 반복하고 있는 내가 마치 시계의 톱니, 아니 톱니를 잘 돌아가게 하는 흔해빠진 윤활유에 지나지 않다는 생각이 들때가 종종 있습니다.

blanca님 얘기를 들으니 갑자기 적당한 온도의 빈 방에, 약간의 먹을거리와 함께 나 홀로 있을 시간이 주어진다는 것에 감사하게 되네요.

잠시 책등이 다 휘어진 버지니아 울프의 자서전을 손에 들어 봅니다. 좁은 방이지만 방을 거닐고 있는 시간보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고, 앞서지도 뒤쳐지지도 않는, 딱 적당한 속도와 적당한 걸음걸이의 문장들이네요.

일상에서 blanca님의 속도에 맞는 뭔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아지시길요 ^^

blanca 2010-11-04 12:58   좋아요 0 | URL
아, 바람결님! 저 안그래도 버지니아 울프의 자서전에 관심이 있었어요. 나이가 먹으면 매일이 똑같다 는 말 동감가면서도 참 서글퍼져요. 저는 중년 이후에 더 재미있고 드라마틱한 삶을 살아보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건 너무 큰 꿈일까요? 바람결님, 그럼요. 무언가를 원할 때 원하는 시간에 할 수 있다는 그 평범한 여건이 때로는 참 큰 행복이자 사치일 수 있어요. 아이를 낳고 정말 여실히 느꼈답니다...

2010-11-03 2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1-04 1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비로그인 2010-11-04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책 좋아요. 삼년 전쯤 읽고 정말 좋아했던 책입니다.
그런데요, 전 지금 시간이 안가서 미칠 지경이에요. 그러면서 시간 가는 게 또 너무 아까워요.
상대적으로 젊은 내 시간이 가는 게 슬퍼요.

blanca 2010-11-04 13:02   좋아요 0 | URL
쥬드님....저는요. 시간이 안가서 미친다,는 말 너무 슬퍼요. 그 느낌을 알아요. 경우도 달랐지만. 쥬드님 맞아요. 소중하고 이쁜 시간들이 흐르면서 정말 가야 하는 시간은 고여 있는 느낌. 쥬드님을 안아드리고 싶네요....

비로그인 2010-11-05 15:28   좋아요 0 | URL
조금이라도 젊을 때, 일도 더 많이 하고 싶고, 여행도 가고, 사랑도 더 하고 싶어요.
그런데 시간이 너무 이런 일들 없이 사라지는 것 같아요. 그리고 기다리는 일들은 더디게 드문드문 찾아오죠.
늘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그대로 알아 주시는 블랑카 님. 고마워요. 이런 종류의 의사소통은, 어긋나면 그걸로 끝이고 어긋남의 유무를 바로 알아챌 수 있는데 블랑카 님은 늘 제가 앞뒤를 뭉텅 잘라먹고 말해도 귀신같이 알아내어 주시곤 해요.
 

올해 들어 유달리 자꾸 뒤를 돌아보게 된다. 그리고 그 시기가 바로 뒤편이 아니라 스무 살 고 언저리를 맴돈다. 올해들어 나의 기억, 누군가의 기억을 덜 신뢰하게 되었다. 유년시절의 참혹한 기억을 되뇌는 그녀에게 나는 그 기억이 한층 비극적인 것으로 윤색됐을 수도 있다고 정말 그런 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고 얘기해 주었다. 올해들어 나는 고유 명사에서 번번히 미끄러진다. 어떤 얘기를 누군가에게 아주 그럴 듯하게 해주고 싶은데 고유 명사 부분에서 자꾸 주춤추줌하며 스타일을 구기게 되었다.  

그.리.고. 삶에서 기억이 차지하는 그 커다란 비실재적인 공간의 허무함과 집착에 놀라게 되었다. 나는 결국 지금 이곳에 만질 수 없는 것들이 허룩하게 뭉쳐진 덩어리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깨달음은 삶 그자체를 불신하게 만들기도 한다. 결국 죽음 앞에서 우리는 기억만을 남긴다. 다 헛것이었어. 결국 삶은 기억의 덩어리, 추억으로 마침표를 찍고 마는 거야. 

 

네덜란드의 심리학자 다우어 드라이스마의 이 얇은 책은 기억의 그 매혹적인 오류와 부푼 부피감을 적시한다. 사례 중심의 평이한 문장들이 참 좋았다. 무엇보다 의문을 가지고 있던 스무 살 언저리의 그 기억의 돌연한 귀환에 대한 현상이 나만이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안도하게 되었다. 그것은 하나의 보편적인 현상이었다. 특히 노년으로 갈수록 그들의 청춘 언저리의 기억들이 득달같이 뒤쫓아 오는 망각의 역현상에 대한 얘기는 참으로 흥미로웠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또렷해지는 기억들은 그 근처에 머무는 것들이 아니라 더 먼 곳 아득한 곳에서 미숙함, 열정, 아쉬움 등으로 둘러싸인 채 도사리고 있던 이십 대의 그것들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이 과학적으로 완전히 규명되지는 않은 채 그저 그 시기가 가장 기억하기 위한 최적의 메커니즘을 지닌 시기여서일 것이라는 추정이 있을 따름이다. 우리가 지금은 떠올리지 못하는 스무 살의 기억들이 여든이 넘어 되돌아 올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은 당혹스럽기도 하고 묘한 기대감을 갖게도 한다.  

강남역 타워레코드 앞에서 그 사람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달려갔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첫사랑의 가능성은 인광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다음은 뚜욱뚝 끊기고 만다. 닭갈비를 먹으러 가서 어색하게 서로 웃었던 것도 같다. 그 공백은 상처에 새살이 돋아나듯 나의 주름 사이로 다시 차오를지도 모른다. 그때쯤이면 우리는 타워레코드에서 뒤편의 닭갈비집으로 가면서 나누었을 그렇고 그런 호구조사나 안부교환의 사연을 기억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모든 추억은 시간 속에 존재하는 두 극 사이의 접촉을 의미한다. <중략> 추억은 불러냄으로써 변화한다.  
   

 

누군가를 호명함으로써 우리는 그를 내 안에서 불러낸다. 정말 진짜 온전한 그를 그대로 내 앞으로 걸어오게 하는 대신 내가 이미지화하고 이상화하고 상상해 낸 나만의 그를 불러 세운다. 사랑은 그렇게 시작하고 그래서 끝나고야 만다.  

이 책에서는 우리 생애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노년이 가장 적은 기억거리를 가지고 있다는 역설을 끄집어 낸다. 노인들은 자신의 중년 이후의 삶을 복기하는 대신 어리고 여렸던 그래서 끊임없이 넘어졌던 시간들을 움켜쥐려고 한다. 자서전 분량의 비대칭은 청춘 시기에서 비롯된다. 이 역설은 대체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우리는 청춘을 상찬하고 상품화하는 메커니즘이 이러한 기억의 역설과 기묘하게 만나는 지점에서 아연해지고 만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어서 이렇게 된 것일까? 

지금 이런 고민을 하는 나 대신 이런 고민을 하게 될 지 전혀 몰랐던 어리숙한 나의 귀환을 나는 기다려야 한다. 앞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종착역이라는 것을 알 때 돌연 방향을 틀어 다리를 절뚝거리며 한참이나 걸어 강남역으로 가는 모습은 서글프고도 기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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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0-10-30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알쏭달쏭.

물음표와 마침표.
네. blanca님 딱 저는 그 물음표와 마침표 사이만을 떠올릴 수밖에(그 선까지 밖에 나갈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그런가 봐요.

blanca 2010-10-31 21:54   좋아요 0 | URL
제 해석이 맞다면 사이라는 건 항상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그런 곳이기도 하잖아요. 바람결님이 계신 곳이 가고 있는 방향으로 조금씩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양철나무꾼 2010-10-31 12: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재밌는게요~
남자들은 노인이 되면 김영감,이영감...이렇게 부르는데,
여자들은 영자야,순이야...이렇게 이름을 부르잖아요.

추억을 끄집어 내게 되는 글,잘 읽고 갑니다~^^

blanca 2010-10-31 21:55   좋아요 0 | URL
양철나무꾼님, 저는 벌써 제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을 좀 드물게 만나게 됩니다. 누구 엄마로 불리게 되구요. 노인이 되면 다시 제 이름이 돌아오는 건가요....

2010-10-31 1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10-31 22: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0-11-03 08: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억은 그래서 참 좋아...
내 거 잖아요.
형편없던 나에 대한 추억은 망각하고,
아름다운 추억은 더욱 아름답게, 그는 더욱 왕자답게, 그렇게 윤색할 수 있잖아요.

믿지못할 기억이지만, 기억 왜곡이 가능한 점은 어쩌면 신이 주신 선물이 아닐까 싶기도 해요~

blanca 2010-11-03 20:46   좋아요 0 | URL
마고님, 그렇죠? 기냥 맘대로 기억하고 다 좋았다궁 그랬다고 나한테 얘기할래요....신이 주신 선물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네요,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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