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61 | 6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만들어진 모성 동녘선서 102
엘리자베트 바댕테르 지음, 심성은 옮김 / 동녘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극심한 산고 속에 아이를 세상에 내어놓고 나는 안도했다. 진통이 더이상 내가 감내할 수 없는 수준임에도 그것은
온전히 나의 것이기에 떨쳐 낼 수 없었다. 나는 그 어떤 곳으로 도망갈지라도 그 몸서리쳐지는 고통의 마침표를 함께 챙겨서
가지고 가야 했다. 그리고 엔딩.  안도하고 또 안도했다. 한쪽 눈을 가까스로 뜨고 나처럼 도톰한 입술을
오물거리며 다가오는 그 무력한, 그 속수무책의 생명체에 어떻게 감동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나는 진통의 와중에도 지르지 않았던 비명을 나의 아기와 마주하며 지르고 말았다. 눈물이 흘렀다. 

여기까지. 나의 모성애는 어쩌면 여기까지였나 보다. 딸내미가 돌까지 나 아닌 그 누구에게도 안기지 않고
두 돌까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밤새 깨고 악을 쓰며 울어대는 저력을 과시했을 때 나는 깨닫게 되었다.
 

모성애가 얼마나 허위적인 개념이고 얼마나 불완전하며 불확실한 것인지. 그리고 비교적 온순하고 안정되어 있다고
착각했던 나의 성격이 얼마나 치사하고 다혈질인지도 새삼 알게 되었다. 주변의 조언을 구하기에는 모두가 너무 힘들고
비슷한 과정을 겪고 있었다. 다 스스로가 모성애가 부족하고 나쁜 사람이라는 새로운 깨달음에 압도되어 상대의 고통을
귀담아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 육아서적들. 한 권을 끝내는 그 동안 만큼은 참고 또 참고 견딜 수 있었다. 육아서적들은
공통점이 있었다. 초기 삼사 년 간 어머니의 역할이 한 인간의 전생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 그러니 영유아기의 어머니는
자신의 그 절대적인 영향력을 주지하고 그저 무조건 인내하고 최선을 다할 것. 그러니 나는 또 죄책감을 느끼며 아이의 수면습관을 잡아 보겠다고 일지까지 기록해 가며 참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리고 아이가 세 살이 된 지금 나는 깨달았다. 요즘 시중에 나오는 그 수많은 육아서들의 맹점이 기실은 엄마들의 죄책감을
더 자극하고 있다는 것
을. 유아기 때의 중요성이 부각될수록 주양육자의 희생의 강도와 완전함에 대한 강박은 더 증대된다.
아이를 전업으로 돌보든,  조부모에게나 기관에 맡기든 나름대로의 안타까운 아킬레스건은 다 있기 마련이다. 조기교육이
각광받고 유아기 때의 정서적 지적 자극에 대한 과도한 스포트라이트가 가지고 있는 음지는 어쩌면 결정론적인 사고를 조장하여 초중등 자녀를 둔 부모의 열패감을 불러일으키거나 유아를 돌보고 있는 엄마들에게 무조건적인 모성애를 강요하게 되는
것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이 책의 저자인 엘리자베트 바댕테르는 파리 이공과대학 철학교수로 재직했고 프랑스 전법무장관의 아내로 세 아이를 둔 어머니다. 그녀는 극렬한 페미니스트라기보다는 남성과 여성의 상보적인 역할을 강조하였고 이 책을 통하여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이어져 내려온 여성에 대한 모성애의 강요가 어떤 허점과 허구를 가지고 있는지를 프랑스의 역사 사회적 배경 등을 통해
조망한다. 중상류증의 다른집 아이들에게 젖을 물리기 위해 자신의 아이에게 젖을 물리지 못했던 하층민 출신 유모들에 대한 얘기는 사교계의 장식품 역할이 주는 환각에 취해 정작 자신의 아이들은 그 유모들에게 맡기고 돌아보지 않은 상류층 부인들의 얘기와 맞물려 비감어리다. 특히나 에밀의 <루소>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어떻게 여성성의 올가미를 만들고 집 안에 여성들을 유폐시키기 위해 활용되었는 지에 대한 설명은 흥미롭다. 어제는 <만들어진 우울증>에서 박수받고 오늘은 <만들어진 모성>에서 비난받는 프로이트에게 심심한 위로를. 

발자크의 문학작품들, 각종 사회통계 자료들을 적시에 인용하여 시대순으로 모성애에 대한 관념 및 풍조를 고찰하며 흥미롭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작가의 예리한 통찰력이 놀랍다. 다만 팔십년 대에 초판이 나온 만큼 현 상황에 꼭 들어맞지 않는 부분이 있고,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정하였기 때문에 느끼는 위화감, 부성애를 촉구하는 이상주의적이고 뒷심이 부족한 듯한 결론에 약간의 아쉬움을 가져본다.  

내가 없으면 안되는 무력하고 연약한 생명체에 전적으로 희생하기를 강요당하는 것이 전적으로 불합리한 일은 아니다. 다만 모성애도 불완전하고 불안한 감정일 수 있고 그것에 전적으로 의지하여 모든 양육의 책무와 결과론적 책임을 어머니에게 떠맡기지는 말아달라는 것. 또 나쁜 엄마, 혹은 무책임한 엄마라고 스스로를 재단하며 자신의 욕망을 체념하는 데에 익숙해지지 말 것. 이런 전언들은 결국 나에게 가서 꽂힌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루체오페르 2010-02-20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하며 리뷰 잘 봤습니다. 다시한번 어머니의 위대함과 당신에 대한 미안함,고마움을 느낍니다.

blanca 2010-02-20 22:03   좋아요 0 | URL
이 댓글이 저를 더 감동시킵니다. 미안함과 고마움이라니 완전 위로됩니다.^^
 
면도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압도되었다. 완전히. 정말 완벽하게. 리뷰를 쓰고자 하는 <면도날>이 아니라 고등학교 때 읽은 <달과 6펜스> 얘기다.
고갱을 모델로 한 그 소설의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나는 슬퍼서가 아니라 그 웅혼한 작품성에 완전히 압도되어 울었다.
눈이 멀고 문둥병까지 걸려 그림을 그려나가는 그 사내의 그 무모한 열정과 이상주의적 삶에 대한 치기가 속물 근성의
그 연약한 거죽을 통째로 벗겨 버린 듯한 착각. 이 한 권의 책이 서머싯 몸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지의 절대적인
기반이 되었다.  

<면도날>을 읽고 나는 알라딘의 리뷰어들에게 감사했다. 칭찬일색의 그 리뷰들이 이 책을 챙기게 했고 오백여 페이지의
그 책을 다 읽고 난 새벽 한 시경 나는 예전 그 때와는 또다른 감동으로 한참을 오도카니 앉아 있게 됐다. 서머싯 몸은
흔히 대중적인 작가로 불리운다. 그 이유는 단 하나, 그의 소설은 여하튼 재밌기 때문이다. 책장이 휘리릭 넘어가며
일으키는 그 가벼운 바람은 진중한 작품성도 왠지 가벼운 것으로 치환해 버린다. 재밌기 때문에 되레 그의 인생에
대한 통찰과 사려깊은 성찰은 천덕꾸러기처럼 돼 버렸던 것이 아닌지, 그런 생각을 해본다. 그러니 나도 진부한 칭찬으로
이 책의 지름신을 강림케 하련다. 작품성과 재미,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소설이니 얼른 읽으라고.  

1차 세계대전에 비행기 조종사로 참전중 동료의 죽음을 목격하고 귀환한 래리 대럴이라는 젊은이가 삶과 신의
의미를 찾아 구도의 길을 떠나는 여정을 중심으로 사교계의 노회한 신사이자 대단한 속물이지만
비열한 사람은 아니라고 몸이 변호한 엘리엇 템플턴, 그의 조카이자 래리의 약혼녀였다 지극히 상식적인 물신주의에 경도되어 래리를 떠나 안온하고 부유한 결혼생활을 택하는 이사벨 등이 얽히고설켜 만들어 나가는 이야기다.
인상적인 것은 작중 화자가 대놓고 서머싯 몸 자신임을 밝히고 등장인물들을 때로는 관조하고 때로는 다둑이고 때로는 비난하면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간다는 것이다. 마치 논픽션인 것같은 효과와 더불어 서머싯 몸 자신의 이야기들도 다소 들어볼 수 있는 아주 유쾌한 경험이었다. 참고로 그는 못생긴 사람과는 대화를 나누는 것이 절대 익숙해지지 않으며 작가는 열과 성을
다해 몇 달에 걸쳐 완성해 놓은 책을 독자는 이 세상이 하나도 할 일이 없어질 때까지 아무 데나 놓아둔다는 생각에
몹시 우울해진단다.

주인공 래리 대럴이 사랑과 세속적인 부를 모두 놓아두고 떠나는 그 구도의 여정이 지나치게 이상화되어 있는 감도 없지
않아 있지만 그 대척점에 서서 생을 마감하게 되는 엘리엇의 얘기가 그것을 중화해 준다. 엘리엇은 지극히 리얼하고
지극히 유쾌하고 지극히 속물이지만 그래서 미워할 수 없고 관심을 계속 기울일 수밖에 없는 우리 주변 사람이다.
미국인으로서 프랑스의 상류층에 입성한 그는 파티를 숨구멍처럼 여기며 사교계를 그의 삶전체의 무대로 간주한다.
그런 그가 죽어가면서까지 공작 부인이 여는 가장 무도회에 초대장을 받지 못한 것에 격분하다 몸이 재치있게 공작부인의
비서를 사주해 만들어낸 초대장을 받고 참석하지 못함을 애석해하며 죽어가는 모습은 가슴이 아프면서도 무언가에
끝까지 전체를 걸 수 있는 그 순진하고 정열적인 무모함에 경탄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유언은 정말 귀엽지 않은가? 

"엘리엇 템플턴 씨는 하느님과의 선약 때문에 노베말이 공작 부인의 친절한 초대에 응할 수가 없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p.397 

 

끝없이 존속한다고 해서 좋은 것이 더 좋아지지는 않으며 하얀 것이 더 하얘지지는 않죠. 새벽에 아름다웠던 장미가
정오에 그 아름다움을 잃는다고 해도 그것이 새벽에 가졌던 아름다움은 실제로 존재했던 거잖아요.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어요. <중략> 그것이 존재할 때 그 안에서 기쁨을 취하지 않는 것은 훨씬 더 어리석은 거예요.
변화가 존재의 본질이라면 그것을 우리 철학의 전제로 삼는 것이 현명하죠.-p.459 

시간의 흐름 속에서 기차 차창으로 뒷걸음치던 풍경마냥 자꾸만 스러져 가는 그 수많은 추억들의 덧없음과 비례하는
생생하고 절절한 기억들의 무게 속에서 인생의 덧없음을 우두망찰하는 요즈음 나에게 래리 대럴은 얘기한다.
그것이 존재할 때 그 안에서 기쁨을 취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거라고. 구도의 여정을 밤을 새워 들려주고 난 래리는 작중 화자이자 작가 서머싯 몸과 함께 아침에 갓 배달된 바삭바삭한 크루아상과 카페오레로 아침 식사를 한다. 래리의 얘기와
몸의 냉정하지만 사려깊은 추임새가 엮어낸 하룻밤을 마감하는 그 아침의 크루아상과 카페오레의 그 아늑하고
그리운 냄새들이 나의 코앞에 와서 당도했다. 나도 그들과 밤을 지새운 듯한 피곤함과 또 래리의 구도의 여정 끝에
함께 당도한 듯한 그 아름다운 지향의 웅장한 아름다움(착각일지라도)이 뒤섞여 그 밤 나는 잠을 설쳤다.  

그리고 구정 전날 제사 일손을 거들면서 어머님의 주름 속에 알알이 박힌 그 수많은 추억들과 고단함에 진정한 애정과 연민을 느끼며 고개를 숙이게 되었다. 모든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이것이 아주 짧은 시간만 유효한 사이비 약발일지라도 나는 몸에게 숭배를, 감사를 바칠 수밖에 없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톨스토이,도스토예프스키, 체호프의 고장에 가 보고 싶은 욕심 때문에 정보국의 무리한 비밀 첩보 임무를 맡았다는 그런 사람에게 어찌 안 그럴 수 있겠는가!


댓글(5)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마녀고양이 2010-02-16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머셋 몸 작품 중 못 읽은 책이네요... 서머샛 몸 작품 무척 좋아하는데. 캡쳐하신 글 와닸네요. 찰나와 영원. 영원한 기쁨은 없는 것을 슬퍼하지 말고, 찰나의 기쁨이 있다는 것을 감사하며 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 책, 장바구니에 넣어야겠습니다.

blanca 2010-02-16 14:08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명절 잘 치르셨는지요? 이 책은 피곤한 와중에도 열심히 읽었답니다. 무엇보다 몸 책은 재미있으니까요. 분량이 좀 있어서 처음에는 부담스러웠는데 금방금방 넘어가더라구요. 다음에는 '인생의 베일'을 읽어볼까 하고 있답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2-17 16: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읽으셨군요.모옴의 중단편집도 재미있으니 하나하나 독파해 보세요.그런데 계속 읽다 보면 모파상의 인물묘사를 연상케 하지요.모옴도 모파상의 작품을 좋아했으니까요.결국은 읽다 보면 인간이란 존재 자체를 싫어하는 기분이 들 수도 있어요.그런 걸 극복하지 않으면 독서가 독이 될 수도 있죠.

blanca 2010-02-17 18:19   좋아요 0 | URL
모옴의 중단편집이 재미있군요. 그런데 모옴은 어떤 이상적인 인간을 꼭 대척점에 놓아 두는 것 같아요. 이게 조금 작위적이기는 한데. 맞아요. 박완서. 모파상. 모옴. 인간 속의 잔인하고 절망적인 속성을 너무 적나라하게 파헤쳐서 읽고 나면 이상하게 기분이 츱츱해지는 단점이 있더라구요. 노자님의 고언을 들어야 이들의 독서가 마무리되는 듯한 느낌이 듭니다.^^;;

노이에자이트 2010-02-18 16:20   좋아요 0 | URL
하긴 박완서도 우리 마음 속 누구나가 갖고 있는 속물근성을 잘 끄집어 내지요.특히 모옴의 성격묘사를 보면 아주 악랄한 면이 있는 것 같아요.착한 사람이 남 도와주려다가 오히려 당하는 이야기를 통쾌하다는 듯이 그리거든요.달과 6펜스에도 그런 인물이 나오죠.마누라를 뺏기는...
 
만들어진 우울증 - 수줍음은 어떻게 병이 되었나?
크리스토퍼 레인 지음, 이문희 옮김 / 한겨레출판 / 2009년 10월
평점 :
절판


생리 하루 전 우울감은 바닥을 쳤다. 체호프의 <슬픔>에서 그 단어만을 우울로 치환하면 나의 얘기였다. 나의 가슴을 찢고 그 우울을 밖으로 쏟아 낸다면 온 세상이 잠길 정도였다. 우울은 분노의 또다른 이름이라는 얘기를 체현하듯 사람마다 분노를 자아내는 그 자질구레한 역겨운 구석을 찾아 헤맸다. 그리고 무언가가 흐르면서 갑자기 그 우울감도 바닥에 가라앉고 다시 예의 그 단순한 나의 감수성이 되살아나 즐거워할 구실을 찾아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월경전불쾌증후군 아니, 이 책에서는 불쾌장애라고 시니컬하게 명명되어지지만 그것을 경험하면서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의 고통을 아주 약간이나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우울감의  벼리는 바로 무서운 고독감이다. 소통을 갈구하는, 아니 소통을 갈구하라고 내모는 사회에서 다 웃고 있는데 혼자 울고 있는 것 같은 그 소외감은 치명적인 고통스러움을 동반한다.  

<만들어진 우울증>수줍음 같은 일상적 감정을 심리적 갈등이나 사회적 긴장이 아니라 뇌의 화학적 불균형이나 신경전달물질의 결함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약물치료라는 단순하고 근시안적 해결책에 집중하는 미국의 정신의학계와 또 그것과 필연적으로 유착되어 있는 다국적제약회사들의 상업적 흑심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더 나아가 이러한 개성에 대한 억압이 사회 전체의 규범 강요와 어떻게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짚어주고 있다.  

특히 저자 크리스토퍼 레인은 미정신의학협회의 정신장애 진단 및 통계 매뉴얼(이하 DSM) 개정작업을 주도한 로버트 L.스피처 박사가 환자들이 호소하는 고통 그 자체보다는 그들의 적응행동을 정신질환으로 범주화하는 데에 골몰했다고 지적한다. 실제 DSM의 진단 매뉴얼에는 인터넷 중독, 강박적 구매장애, 폭식 장애, 월경전불쾌장애를 추가할 것이 확실시된다고 한다. 이 매뉴얼의 진단에 따르면 현대인들의 과반수가 정신장애를 앓고 있어 시급히 SSRI류의 약물을 투여받아야 하는 것으로 결론난다.  

사실 이 책은 미국의 약물만능주의에 초점을 맞추어 얘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실정에 완벽하게 부합하지는 않는다. 기분의 불균형에 대한 시급한 치유책을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는 서구인들과는 달리 우리나라를 포함한 동양권의 문화는 우울하다,거나 분노가 치밀어오른다,는 감정의 발로 자체에만도 상당한 거부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극단적 감정이 휘몰아치는 불균형 상태도 병이라기보다는 개인의 부정적 기질이나 불운 정도로 치부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이러한 경향성도 정신의학계 의 미국의 진단매뉴얼 도입과 다국적제약회사의 공격적인 마케팅 등으로 가파르게 그들의 약물신화에 경도되어 가고 있다. 비근한 예로 남발되는 ADHD 진단과 그에 따른 빈번한 약물투여만 봐도 그렇다. 이제 우리는 공공장소를 쿵쿵거리며 뛰어다니는 사내아이들을 활발한 기질이나 훈육의 부족으로 이해하기보다는 치료가 필요한 아픈 아이로 보는 시선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이 전적으로 나쁘다고만은 볼 수 없지만 어느 쪽으로든 과하게 닮고 치우치는 경향성은 위험을 담보하고 있다.  

약을 팔기 전에 병을 팔아라! 다국적 회사의 항우울제 마케팅의 그 교묘하고 은밀한 공격성은 경악스러웠다. 일단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우울감을 장애로, 질환으로 인식하도록 유도하고 나면 그 진단 사이클은 자체 순환하게 되어 있다는 얘기. 놀랍지 않은가? 그러고 보면 우리는 언젠가부터 우울증 자가진단 매뉴얼을 쉽게 접하고 거기에 체크해 가며 스스로를 우울증 환자로 자가진단하는 풍경을 연출하게 되었다. 





이 광고는 마치 공익 광고같다. 수줍어하는 아가씨와 직장 업무에서 좌절하는 젊은 남자의 좌절감을 쓰다듬어주고 마법의 신효한 해결책을 제시해 줄것을 예고한다. 그러나 가만히 이 광고를 들여다보면 우리는 그것이 사실은 일상적 감정이 아니라 장애라고 속삭이고 스미스클라인의 팍실이라는 약물을 투여받을 것을 교묘하게 설득하는 작업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말미에 조너선 프란젠의 <교정>의 인용은 웅변적이다. 

"정신 '건강'이란 소비경제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이야. ....... 돈을 소비하려는 욕망의 부재는 값비싼 약물치료가 요구되는 질환의 한 증상이라고." -p.289 

저자가 현 미국의 약물투여가 성형 정신약리학으로까지 변질되었고 이 약물들이 인격조작이라는 극단의 환상까지 키워가고 있다고 성토하고 있는 것에서 더 나아가 구성원 개개인의 독특한 개성적 기질을 용인해 낼 수 없는 국가의 전체주의적 강요와도 맞물려 있다는 지적은 뼈아프다. 여기에서 이 책의 가치가 드러난다. 이 책은 단순히 프로이트와 이별한 미국의 정신의학계의 기계적인 정신질환 분류표 작성과 제약회사의 상업적 흑심만을 비판하는 그렇고 그런 대안없는 욕쟁이 할멈이 아니다. 환자 개개인의 고통의 그 심층적인 심연에 대한 이해 대신 쉽고 간편하게 매뉴얼에 그 환자의 증상을 귀속시킴으로써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치료 풍토와 사회적 규범의 틀 안에서 그것의 내재화에 순응하지 않는 수많은 외톨이들에 대한 강박적 따돌림에 대한 통찰력 있는 비판으로 나아간 그 지점에서 저자의 인간애의 지평은 확대된다.  

마음이 아픈 사람도 몸이 아픈 사람과 같이 배려받고 치료받을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데에는 극렬히 동의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특이한 기질을 가졌거나 조직에 융화될 수 없는 몇 몇의 특별한 사람을 내치는 데에 둔감해져 있는 것이 아닌가를 돌아봐야 할 것 같다. 개인들이 느끼면 사회는 휘청거린다,는 올더스 헉슬리 소설 속 얘기처럼 우리는 느껴야 하는 것이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10-02-12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can't. I just can't.

제가 저 광고와 저 구절을 얼마나 연속적으로 많이 떠올렸는지! 그런데 이런 것이었는지!

blanca 2010-02-12 09:47   좋아요 0 | URL
Jude님 저 광고 어디서 보셨어요? 저는 처음으로 봤는데 그게 항우울제 광고라는게 참 충격적이더라구요. 알고 계셨다면 더 놀라셨을 것 같아요. 광고 자체만 놓고 보면 더없이 뭐랄까 상업광고가 아니라 공익광고 같은 느낌이라서요.

마녀고양이 2010-02-12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책 샀는데, 아직 못 읽었어여.. 개인적인 경험으로 볼때, 우리나라는 심리 상담이 절대적으로 부족하져. 외국도 그렇지만 우리나라는 더 약으로 해결을 보려해여, 부작용도 만만치 않은데도 불구하고. 결국 이 약들은 호르몬제잖아여? 그래서 더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도 빨리 읽어야지

blanca 2010-02-12 16:52   좋아요 0 | URL
마녀고양이님 좋아하실 것 같아요. 참, 댓글에 쓰려다가 상담대학교 합격 정말 축하드려요! 약물 치료가 불가피할 때도 있지만 또 약물치료와 심리치료가 사려깊게 병행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너무 예민하고 중요한 부분이라 뭐라고 말하기는 참 망설여지는 대목인 것 같습니다.

Kitty 2010-02-16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극히 단순한 O형 인간이지만 이 분야에는 좀 관심이 있어서
이 책을 장바구니에 넣었다뺐다하고 있는데 좋은 리뷰 잘 읽고 갑니다 ^^

blanca 2010-02-17 12:28   좋아요 0 | URL
제 친구 대부분이 O형인데. 저는 악명높은 ㅋㅋㅋ B형이랍니다. 키티님, 이 책 저도 오래 망설이다 하이드님 서재에서 보고 자꾸 눈에 밟혀 사고 말았답니다. 한 권쯤 두고 읽어도 괜찮을 만큼 내용이 좋더라구요.
 
고통과 환희의 순간들
프랑수아즈 사강 지음, 최정수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09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토요일 오후 두시 대형서점 풍경. 수많은 책표지에 떨어지는 그 수많은 무심한 시선들. 그 시선들은 약간의 설레임과
아주 약간의 책 그자체에 대한 관심과 그리고 또  익명의 옆사람들에 대한 무해한 호기심들을 담고 있었다. 

나는 메뚜기처럼 서가 사이를 요령좋게 뜀박질하는 아이와 책 표지를 동시에 챙기느라 분주해서 그 대열에 참가할 수는 없었다. 너무나 많은 책들. 그래서 되레 개별의 특별한 관심을 받을 수 없고 그저 반지르르한 표지만으로 자신을 호소해야만 하는 그 가벼운 한계. 그 속에서 나를 이끌던 이 책. 프랑수와즈 사강의 '고통과 환희의 순간들'

'슬픔이여 안녕''브람스를 좋아하세요'를 읽고 나서 적잖이 실망했었다. 줄거리 대신 가벼운 그 솜사탕 같은 느낌만 남았고 나는 사강을 그 시대의 패리스 힐튼 정도로 기억하게 되었다. 파티걸. 과대평가된 미모의 작가. 그러니까 문단계에도 항상 젊고 도발적이고 사랑스러운 요정을 필요로 하니까. 열아홉살의 베스트셀러 작가는 스피드,마약, 도박에 중독되어 수많은 스캔들의 중심에 서는 수순을 밟게 되었다.  

문학은 그 자체로 전부였다. <중략> 문학은 모든 것이었다. 최선의 것, 최악의 것, 운명적인 것이었다. 일단 그것을 알고 나면 해야 할 다른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p.204 

이런 문학에 대한 열정을 지닌 그녀가 도박에, 스피드에, 그리고 운명에 중독될 수밖에 없었던 그 자신을 변호하는 책은 아니다. 그녀는 변호하지 않는다. 합리화하지 않는다. 도박과 스피드가 우리가 흔히 연상하는 악덕과 무모한 광기의 대명사가 아니라 섬세한 사려깊음과 미덕과 용기로의 이끌림을 포함한다는 얘기가 그녀의 매력과 맞물릴 때는 그럴 수도 있겠다,는 아주 위험한 동조를 자아낸다. 기약 없는 사랑과 의미 없는 무분별에 도착되어 있는 그녀의 얘기는 빌리 홀리데이, 테네시 윌리엄스, 오손 웰스, 장 폴 사르트르에게 가 닿는다. 특별하고 의미있는 추억들은 그녀만의 청량하고 달콤한 문장들에 둘러싸여 하나 하나의 인물에 대한 아름다운 오마주가 된다. 특히나 정확히 삼십년 전 같은 날에 태어난 사르트르가 죽기 일 년 전 그녀와 가진 아름다운 추억은 너무 아름다워 기억의 갈피짬에 꼭 끼워두고 싶어진다. 

사르트르는 이미 그녀와 재회했을 때 실명 상태였다. 이 사려깊은 맹인과 이 아름답고 도발적인 젊은 작가가 열흘마다 저녁 시간을 함께 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 이 책은 충분히 그 역할을 다했다고 느껴질 정도이다. 사강이 사르트르에게 보낸 편지를 여섯 시간에 걸쳐 녹음하여 건네 주었다는 얘기. 사르트르는 그 녹음 테잎을 들으며 저녁 시간을 보낼 것을 약속한다. 그리고 이별. 영원한 이별. 둘이 만났을 때 그 둘을 제외한 그 어떤 다른 사람의 얘기도 나누지 않았다는 그들의 그 충만한 시간도 영원히 사라지고 말았다. 기억의 창고를 제외하고는. 

때때로 무엇을 해야 할지,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궁금해질 때가 있다. 그 답을 나에게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은 그 벼락 맞은 남자밖에 없었다. 내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뿐이었다. 사르트르는 1905년 6월 21일에 태어났고, 나는 1935년 6월 21일에  태어났다. 이 지구에서 그 없이 삼십 년을 더 보낼 수 있을 것 같지 않다(그러고 싶은 마음도 없다).-p.192  

 

독서에 대한 얘기도 매우 인상적이다. 프랑스인들이 밟는 고전적인 독서의 경로가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카뮈의 '이방인', 랭보의 시들,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며 그 지점마다의 그녀의 깨달음과 추억들을 보여준다. 특히 그녀가 우리가 사랑에 빠지면 흔히 저지르는 오류인 연애 관계 속에서 상대방의 눈에 비친 자신의 미화된 영상에 대한 집착이 아닌 상대방의 진정한 본성을 추구하는 길을 걸어야 함을 책과 독자의 관계에서도 강조하는 것은 기억해 둘 만하다. 우리는 흔히 아름다운 책에 경도되어 있는 나 자신의 모습에 흠뻑 빠지게 되니까. 그래서 특히나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그 책에 그 사람에 경도되어 있는 자신을 나타내 보이는 그 행위에 중독되기 마련이니까.  

사춘기 소녀가 무신론자의 그 아슬아슬한 공포 속에서 기우뚱대다 기댄 어깨는 카뮈였다고 한다. 솔직히 카뮈가 대머리였다면 그렇게 '반항인'에 깊이 경도되지는 않았을 거라는 대목은 무척 귀엽다. 산비탈 위 하얀 설원 위에 앉아 카뮈의 인간 본성에 대한 믿음 안에 편하게 기대는 그녀의 모습은 영롱하다. 누구나 독서에 얽힌 특히나 유년이나 사춘기 시절에는 더더욱 소중한 추억들을 가지게 마련이지만 그녀의 추억은 더 강렬하고 더 의미있는 표지자 같다.  

나는 사강을 아주 좋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를 파티걸이 아닌 문학 그 자체를 아주 진지하고 사려깊에 받아들이는 예술가로서 기억하게 되었다. 다시 '슬픔이여 안녕'을 읽어보게 될 것 같다. 이제는 열아홉살 그녀가 하고 싶었던 그 얘기가 사실은 그 시대의 달콤한 꿈에 대한 것이었다는 사연을 가지고. 

나는 지나치게 나 자신으로서 강렬하게 살았던 것이다. 그런 만큼 다른 누군가가 내 대신 살게 할 필요가 있었다. 다시 말해, 나 자신의 존재가 완벽하게 느껴지도록, 다른 누군가가 살아가는 모습을 책을 통해 읽을 필요가 있었다.-p.211

 








댓글(6)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오기 2010-02-08 16: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강~ 그녀는 우리 여고시절 에밀 아자르와 더불어 열광하게 만들었죠.
하지만 한때 유행처럼 지나친 작가라 그후 다시 찾지는 않았는데 이 페이퍼를 보곤 솔깃하네요.
님이 쓰는 글들은 어찌 그리 맛이 나는지...너무 좋아요.^^

blanca 2010-02-07 19:24   좋아요 0 | URL
근데 순오기님 저는 왜 여즉까지 에밀 아자르를 몰랐나 몰라요. 어디 갔다 온건지^^;; 순오기님이 너무 좋다니 제가 더 좋네요^^;;

후애(厚愛) 2010-02-08 0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서재에 방문해 주시고 댓글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세요~

blanca 2010-02-08 13:52   좋아요 0 | URL
이렇게 또 친절하게 와주셨군요. 이미 반나절이 지나갔는데 지금부터 행복하게 지내겠습니다.^^ 후애님은 지금 취침중이시겠죠?(아마도 시차가) 행복한 꿈 꾸고 계시기를....

gimssim 2010-02-08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강의 책이 새로 나왔군요.
고백하자면 먼 옛날 사강에 열광한 건...아마 그녀의 보이시한 모습 때문이 아니었나 싶군요.
나이들어 읽는 <슬픔이여 안녕>은 어떤 느낌일까?
그리고 지금에 와서 고백하는 <고통과 환희의 순간>은 또 어떨까? 기대가 됩니다.

blanca 2010-02-08 22:25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중전님. 반갑습니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에 짧은 머리, 그리고 당돌한 행동들. 전형적으로 사람들이 좋아하는 보이쉬한 모습인 것 같아요. 안그래도 제가 너무 뭘 몰랐을 때 대충 읽고 평가한 것 같아 조만간 다시 읽어봐야 할 것 같아요. <고통과 환희의 순간>은 생각보다 훨씬 진지한 책이더라구요.
 
작가의 집 - 책들이 탄생한 매혹의 공간
프란체스카 프레몰리 드룰레 지음, 이세진 옮김, 에리카 레너드 사진 / 윌북 / 2009년 11월
평점 :
품절


그 집은 우리를 볼 줄 아는 눈과 마음과 혼이 있었다. 그 집에는 합의, 요청, 깊은 공감이 있었다. 그 집은 우리의 일부였고 우리는 집의 신뢰를 얻어 은총과 축복의 평화 속에 살았다. -마크 트웨인 p.128  

죽어있는 사물의 틈새 마다 삶의 숨결을 불어넣다 보면 어느 순간 그 사물이 살아서 삶의 이야기를 들려 주는 듯한 환상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우리는 그래서 집을 예사롭게 보고 지나갈 수가 없다. 특히 읽고 쓰는 것을 사랑하는 이들이 그것의 역사를 부려 놓는 서재에 대하여 가지는 그 소망과 애정의 깊이는 한정없다. 아름답고 특별한 서재를 가진 이들의 사연과 더불어 그것을 염탐하는 재미는 황홀하다.  

『보그 이탈리아』의 편집장을 지냈던 저자의 글과 『엘르 인터내셔널』등에 사진을 싣는 작가의 사진이 만나 이루어낸 공동성과는 아슴푸레한 추억의 그리움이 감싸는 반짝이는 사연들의 향연이다. 버니지아 울프, 마크 트웨인, 헤르만 헤세,  어니스트 헤밍웨이,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등을 제외하면 생소한 작가들이지만 그들의 독특한 서재와 각각 말미에 실린 작가에 대한 간략한 설명이 만나는 지점에 서는 것은 안온하고 유쾌했다. 더불어 새로 알아가는 작가들의 생애와 그것이 어떤 형태로든 축약된 그들의 저작에 대한 관심은 부록으로 얻는 셈이다. 



 

이탈리아의 소설가 알베르토 모라비아의 서재가 인상에 남는다. 바다를 면한 통유리창 앞에서 읽고 쓰는 것에 대한 로망은 누구나 한번쯤 가져봄직하다. 하지만 그의 서재가 뇌리에 박힌 것은 친구 파졸리니와의 '두 집 살림'덕택이다. 

두 친구는 집을 반쪽씩 차지했다. 파도의 리듬처럼 이해,우정,애정이 갈마드는 짧은 시기가 시작됐다.-p.446 

연인과 공간을 공유하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지지만 친구와 공간을 공유하면서 서로의 영역과 인생을 존중해 주는 일은 특별한 지향처럼 받아들여진다. 나의 절친한 친구와 각자의 연인을 둔 채 함께 읽고 쓰고 한다는 것은 각자의 인생이 평행선처럼 나란히 놓여지며 때로 교차하는 일이라 어렵고도 특별히 충만된 삶이다. 모라비아는 이 친구 파졸리니의 죽음으로 비극을 맞게 되지만. 

항상 하늘색 종이에 글을 썼다는 버지니아 울프와 한 때 그의 동성 연인이었던 비타 색빌웨스트의 집,서재를 같이 놓고 비교해 보며 읽는 재미도 가질 수 있다. 헤르만 헤세의 '클링소어의 마지막 여름'의 배경이 된 카사카무치의 집 사진을 같이 펼쳐 놓고 작품의 배경을 받아들인다면 생생하고 절절한 독서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작가들이 가고 남아 그들의 펜끝에서 흘러나오던 수많은 이야기들의 마침표 만큼 허전하고 아쉬울 그 공간은 때로는 연인이, 때로는 자식들이 남아 그들의 삶 자체로 갈무리하고 있다. 과거로 흘러간 이야기들은 언제나 한 겹의 환상이 덧씌워져 꿈처럼 아득한 아름다움을 발산한다. 삶이 꺼지고 남은 그 잔영이 드리워진 그들의 서재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 서재에서 시작하고 끝났을 그들의 읽고 쓰는 것에 대한 사랑이 전해져 와 그들의 문장들을 예사롭게 보아 넘길 수 없게 된다. 아름다운 책이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오기 2010-02-06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외국 작가들의 집, 책들이 탄생한 매혹의 공간이라니 관심이 확 쏠리네요.^^
서해문집에서 나온 '작가의 방'에서는 우리나라 대표작가 6인(이문열, 김영하, 강은교, 공지영, 김용택, 신경숙)의 서재를 보여주지요.

blanca 2010-02-06 23:59   좋아요 0 | URL
순오기님이 얘기하신 비슷한 책을 읽었던 것도 같은데 작가 이름들을 보니 다른 책이군요. 솔깃합니다. 이런 류의 책은 그저 보는 것 만으로도 괜히 흐뭇해져요. 언젠가는 저도 아담한 서재를 꼭 가지고 싶어요.

순오기 2010-02-07 16:56   좋아요 0 | URL
작가들의 서재는 정말 부러움의 절정이지요.^^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61 | 62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