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무라카미 하루키.가와카미 미에코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가 도스토옙스키보다 오래 살면서 소설을 쓸 줄은 생각도 못 했죠. 그 사람, 사진 보면 완전히 할아버지잖아요. 그보다 더 나이를 먹어버렸다니 놀랍습니다.

-도스토옙스키보다 나이가 많다니 충격이긴 하네요.


<수리부엉이는 황혼에 날아오른다 p.245>


인터뷰는 자신을 규정하거나 포장하거나 단순화하거나 이상화하기 쉽다. 언어로 설명하기 모호한 부분에 욕심을 내기 시작하면 때로 과장이나 거짓이나 속단이 되어 버린다. 인터뷰로 한 사람을 설명하기란 그래서 어렵다. 애초부터 작은 기대와 많은 한계를 감안하며 시작하는 게 좋다.


하지만 이런 대화라면 그냥 무장해제되어 버린다. 인터뷰의 대상은 하루키. 인터뷰를 하는 작가는 가와카미 미에코. 아버지와 딸의 나이차다. 가와카미 미에코는 가수로 데뷔했다 소설가가 된 특이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하루키의 팬이다. 하루키의 작품들을 공들여 제대로 읽은 느낌이다. 그럼에도 하루키를 지나치게 이상화하거나 어려워하지 않는 그 느낌이 좋다. 하루키의 우물에 가닿는 그녀의 신공이 놀랍다. 여기에서 하루키는 진지하고 머뭇거리고 솔직하다. 이제 곧 일흔이 될 그는 자주 불러오는 삽십대 중반의 주인공의 감성과 직관과 개방성을 아직도 지니고 있어 놀라웠다. 흔히 말하는 꼰대 마인드가 없다. 


글을 쓰는 일의 그 성실함에 대한 언급은 하루키 작품 속 남자들과 언뜻 어울리지 않는 듯 어우러진다. 꾸준히 성실히 쓴다. 술을 진탕 마시고 영감에 의존하여 일필휘지로 완성해 내는 작품과 하루키는 멀다. 언제나 성실히 열 장 가량 매일 쓴다. 열 번 이상 고친다. 고치고 또 고치며 문장을, 문체의 정밀도를 높여 나간다. 결국 궁극의 문장을 향한 그의 거리는 죽는 그 순간까지 좁혀질 것이다. 


시스템이 양산해 내는 악에 대한 일침이 와닿는다. 악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도 악을 근원적으로 완벽하게 몰아내기도 힘들다,는 인식은 인간의 내면에 꿈틀대고 있는 악을 탐사하고 그 악을 형상화하는 그의 글쓰기의 우물이다. 그 이후에 대하여 할 수 있는 얘기의 자리가 아쉽다. 그는 이야기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세상을 향해 발언한다. 그 이상에 대한 요구는 단호하게 거절한다. 그의 이름을 딴 문학상에 극도의 거부감을 나타내는 모습도 일맥상통하는 얘기다.


하루키 이야기 속의 남자 인물들이 여성들을 대하는 태도나 구도에 대한 설명하기 힘든 불편함에 대한 언급은 사실 항상 느꼈던 바라 궁금했다. 하루키의 대답은 싱겁고 사과는 빠르다. 자기는 모르겠는데 그랬다면 미안하다,고. 의식하거나 의도한 바는 아니라는 변명이다. 그의 해명에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여하튼 이런 질문을 피하지 않고 해 준 가와카미 미에코와 그런 질문을 피하지 않고 받아 준 자유로운 분위기가 이 인터뷰 내내 흐른다. 인터뷰의 내용은 그래서 쉽게 우회하거나 얄팍해지지 않는다. 


전반적으로 쓰는 일에 대한 작업 비밀을 어떻게든 솔직히 알기쉽게 설명하려는 그의 의도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지점에서 가 서 멈추지만 결국 어떤 일이든 최선을 다하며 사는 것에 대한 이야기로 수렴하는 것 같다. 사는 법을 가르칠 수 없는 것처럼 글 쓰는 법도 가르칠 수 없다는 이야기가가 요체가 될 것 같다. 가르칠 수 없지만 겸손하게 최선을 다해 후배 작가에게 그것을 이야기해 주려는 그의 사려깊음이 과정이 아니라 어쩌면 결론일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모어 번스타인의 말 - 피아니스트의 아흔 해 인생 인터뷰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시모어 번스타인.앤드루 하비 지음, 장호연 옮김 / 마음산책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나이가 들면 그 때의 그 어떤 날을, 어떤 사람과의 만남을, 고대하며 일주일 내내 행복해질 수 있었던 그 설레는 느낌은 다시 맛보기 어렵다. 생일과 어린이날, 크리스마스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은 이제 그 때 내가 챙겨야 할 사람들, 준비해야 하는 일들로 채워진다. 나이가 들면 그 때의 내 앞에 한없이 펼쳐져 있을 것만 같은 시간과 공간은 간데 없다. 대신 여기 내가 서 있는 시간과 공간이 나를 포박한다. 나이가 들면 이제, '절대', '정말', 같은 부사앞에서는 잠시 멈칫하게 된다. 나이가 들면 분명 잃게 되는 다시는 찾기 어려운 것들이 생긴다.


나이가 들면 이제 어떤 사람의 행동이나 말로 내 생활 전반이 흔들리거나 누군가가 나를 부정했다고 해서 내 전존재를 무의미하게 느끼게 되거나 어떤 일에 실패했다고 해서 그대로 무릎 꺾여 다시는 일어나기 힘든 경우는 그 전보다 줄어든다. 어떤 이론이나 논리로 상황을 깔끔하게 재단하거나 일어날 일을 예견하는 일이 가능하다는 섣부른 믿음은 저만치 뒤로 밀려난다. 지혜나 깨달음의 축적이나 경험을 통한 학습된 효과로만 설명하기 힘든 현상이다. 나에게 일어나는 많은 일들이 물론 나의 삶을 구성하기는 하지만 그것들만으로 내 전존재나 내 삶 전체를 조명하는 것은 아니라는 어렴풋한 자각에서도 비롯되는 일이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잘 모르겠다. 나이듦과 노인이 된다는 것, 죽음이라는 그 확연한 예정된 종말로 서서히 다가서는 일, 그리고 삶.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는 설명하기 힘든 힘, 섭리. 그래서 아흔이 가까운 거장 피아니스트와 환갑이 넘은 시인이 나누는 <말>을 듣는 과정에 저도 모르게 빠져들게 되었다. 게다가 어린 시절을 선망으로 물들였던 <스탠 바이 미>의 그 배우 에단 호크에게 헌정된 인터뷰집이라니...


배우 에단 호크와 피아니스트 시모어 번스타인의 친분은 에단 호크가 그를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를 기획하게 되면서 비롯된다. 둘은 할리우드와 클래식 음악계, 적지 않은 나이차를 건너 뛰어 자신의 재능과 삶을 통합하려는 그 고단하지만 의미 있는 여정에서 만나 진한 공감을 나누게 된다. 자기 분야에서 남다른 재능과 노력, 열정으로 일가를 이룬 사람들이 그것에 안주하거나 그것의 부산물들을 절제 없이 향유하는 대신 더 거대한 생의 과제와 영혼의 탐사, 성숙에 진지한 관심을 기울이며 나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세속적 견지에서 보는 '성공'이라는 열매는 때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을 망치거나 그들이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나가는 데에 오히려 거대한 난관으로 작용했는지 수많은 예가 있지 않은가.


여든여덟 살의 노인이 30년간 은퇴했다가 다시 나와서 독주회를 열고 계속해서 가르치고 삶과 죽음, 우주를 둘러싼 그 수많은 답해지지 않은 문제들에 대해 독선적으로 자신의 논리나 아집을 강요하는 대신 겸허하게 "나는 대답이 없어도 됩니다."라고 자인하는 모습은 그 자체로 깊은 가르침을 주는 울림을 준다.


잘 늙어가고 싶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7-07-18 08: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죽음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은 직접 겪어보면 알 수 없는 어려운 일입니다. ˝나는 대답이 없어도 됩니다˝라는 번스타인의 말이 비트겐슈타인의 격언(˝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침묵해야 한다˝)과 일맥상통합니다.

blanca 2017-07-19 06:45   좋아요 0 | URL
비트겐슈타인이 그런 말을 했군요. 비트겐슈타인은 꼭 도전해 보고 싶다고 생각만 하고 있어요. 철학도 삶도 흥미롭더라고요.
 
어떻게 죽을 것인가 - 현대 의학이 놓치고 있는 삶의 마지막 순간, KBS 선정 도서
아툴 가완디 지음, 김희정 옮김 / 부키 / 201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7 어려운 대화    두렵지만 꼭 나눠야 하는 이야기들

8 용기     끝이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순간

 

목차를 본다. 마지막에 이르러 내용을 읽기도 전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두렵지만 꼭 나눠야 하는 이야기들". 그것은 힘들게 묻어버린 기억들을 들추어 낸다.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을 두고 그 사람이 없는 세상을 논한다는 건 머리로는 상상할 수 있지만 마음으로 감내하기 힘들다. 늙어가고 기력이 떨어지고 더 이상 독립된 생활을 하기 힘들어질 노부모의 미래에 대한 이야기도 우리는 쉽게 꺼내지 않는다. 진심으로 달갑지 않은 주제다. 저자 아툴 가완디도 이것이 사람들의 기대를 저버리는 주제일 수도 있다,고 시작한다. 더 많은 희망과 낙관을 이야기해도 질리지 않을 만큼 생은 때로 과대평가되어 왔다. 그 자명한 유한성은 예술이나 우리가 소비하는 각종 영상들의 마디마다 활용되어야 할 일이지 우리 자신의 이야기로 돌아와서는 안 되는 거였다. 시인 필립 라킨의 "결국 그들의 방문을 받지 않은 거리는 없다."<앰뷸런스>, 이 단 하나의 문장이 인용되어 있는 초입에서 머뭇거렸다. 대단히 불편한 이야기가 될 것 같았다. 쉽지 않은 나날들에 이러한 이야기까지 사실 듣고 의식하며 살고 싶지 않은 기분은 망설임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우려는 사실 중간 중간 계속 대면하고 직면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들을 가감없이 들어야 하는 데에서 더한 우울감으로 이어졌다. 때로 후회가 들기도 했다. 정말 이런거야? 사는 게 이런 거야? 그럴 거면 왜 태어나 왜 이렇게 아등바등 사는 거야...결국 이런 거면서...

 

미국인 의사 아툴 가완디는 그 이국적인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인도 출신의 이민 2세대다. 아버지, 어머니, 그 자신이 다 의사다. 이러한 가족적 배경은 현대 서구 의학이 사람이 죽어가는 과정에서 결론적으로 어떠한 실수와 실패를 저지르고 있는지와 난립하는 요양 병원, 요양원이 노인들의 어떠한 핵심적인 바람을 놓치고 있는지 비판적인 시선으로 살펴볼 수 있게 한다. 늙고 병약해져 결국 죽음에 이르는 과정까지를 가족적 지지 안에서 경험하는 전통적인 동양 사회의 모습은 그의 할아버지대에서 직접 경험한 것이었다. 물론 그 자신 또한 나머지 가족들의 희생과 다툼 등을 들어 그게 최선이라고 단언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제 현대의 죽음이 어떻게 최신의료기술이라는 미명 아래 과도하게 관리, 제어 당하며 그것을 겪는 인간의 존엄을 앗아가는지에 대한 자신의 환자, 심지어 아툴 가완디의 아버지와의 그 힘들었던 마지막 시간들을 절절하게 그려내며 이야기하는 모습에서는 절로 숙연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우리는 너무 불편하고 너무 두려워서 마냥 다 맡겨놓았던 그것들을 고통스럽고 처절하게 다시 찾아오는 과정을 이 이야기를 통해 대리경험할 수밖에 없다. 딸과 떨어져 낯선 사람들과 자신의 의사와는 관련 없는 그 일과들을 강제로 수행해야 하는 요양원에 들어가기 두려워했던 아흔네 살의 루 할아버지의 이야기, 만삭에 폐암 말기임을 알고 아이를 조기 출산하고 아무 성과 없었던 암치료로 마지막까지 고통 당해야 했던 새라, 그 자신이 유능한 의사였지만 생의 말기에 아들을 붙잡고 울먹이며 내가 고통 당하지 않게 해달라고 매달렸던 아툴 가완디 자신의 아버지.  그가 여러번 강조했듯이 생의 말기에 이르러 죽음을 앞둔 이들은 비록 고통스럽고 슬펐지만 자신만의 이야기들을 써내려갔다. '한계'와 '끝'을 직시하는 것은 뼈아프다. 하지만 분명 의미가 있다는 믿음은 소중하다. 단지 아프다는 이유만으로 늙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는 숱하게 그들에게서 그 자신을 빼앗아 왔다. 이제 그들은 치료받고 관리받고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철저한 객체가 되어버린다. 많은 자녀들이 부모들이 원하고 편안해하는 곳보다 내 마음이 편할 곳으로 요양원을 생각한다는 요양원의 대안적인 기관인 어시스티드 리빙 설립자의 이야기는 일말의 진실을 담고 있다.

 

아툴 가완디가 힘들게 시작한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의 이야기들은 놀라울 정도로 생생하고 가치 있는 이야기였다. 이제 환자의 사례가 아니라 그 자신의 이야기가 되어버린 그 죽음 앞에서의 어렵고 때로는 잔인하고 숭고한 대화들은 사실 우리를 예습 시키는 것이다. 어떻게 과연 할 수 있을까. 아버지가 어머니가 고통스럽게 죽어가는데 지금 가장 두려운 것이 가장 우려되는 상황이 무엇인지를 묻고 어떻게 당신의 이야기가 끝나기를 바라는지를 되물을 수 있을까. 하지만 지나고 남는 것들은 사실 그러한 것들일지 모른다. 현대의료행위가 그 수많은 인공장치로 그 시간을 계속 지연시키며 끝내 제대로 된 작별 인사나 갈무리도 하지 못한채 아직도 우리는 그 수많은 석별들을 당하고 만다.

 

그의 아버지가 존재하기를 멈추는 대목은 차마 제대로 읽어낼 수가 없었다. 나에게는 용기가 부족하니까. 아흔네 살의 루 할아버지가 저자를 앞에 놓고 "내 삶에 끝이 있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어쩌겠소?  지금까지 잘 살았으니 됐지."라고 했던 이야기가 겹친다. 아툴 가완디는 아버지가 죽어가는 과정 내내 밤새 곁에서 책을 읽으며 그 처절한 소진 과정을 지킨다. 그리고 아버지의 당부대로 아버지 유골의 일부를 수천 년 간 그들의 조상이 그래왔던 것처럼 갠지스 강에 뿌린다. 아들은 갠지스 강에서 아버지의 삶의 이야기의 마침표를 성의 있게 찍는다. 당신이 원했던 일이다.

 

노력을 멈추고 '한계'를 인정해고 수용해야 하는 시기는 고통스럽게 온다. 태어나는 힘보다 더 끈질기게 엉겨붙어 그것은 죽음을 학습시킨다. 모두가 기피하는 바로 그 힘겨운 이야기를 그 고통스러운 시간을 분명 나도 언젠가 지나갈 것이다. 나라고 특별할 리 없으니 말이다. 덜 늙고 더 오래 살아도 의미 있는 차이는 아니다. 가족들, 친구들, 그리고 마침내 나까지 저마다의 삶의 충실한 이야기를 마지막까지 제대로 완결할 수 있기를 바라게 된다. 그래도 역시 그것을 의식하는 일은 힘들다. 버티는 게 때로 포기하는 것보다 더 쉽다. 무언가를 하는 게 하지 않는 것보다 덜 가책이 되는 순간이 있다. 이 모든 것들을 제대로 돌아보고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관성에 저항하는 것은 불편하고 고통스럽지만 그래야 나아가는 지점이 분명히 있다. 나이가 들어 배워야 하는 것들은 어쩌면 다 이렇게 절절하고 엄혹한 것일까.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oonnight 2015-11-20 02: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툴 가완디의<나는 고백한다 현대의학을>을 너무나 재미있게 읽어서 이 책도 나오자마자 사놨는데 아직도 못 읽었어요. 왠지 두렵ㅜㅜ 어떻게 사는가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죽을 것인가도 열심히 생각해야만 하는 일이겠지요.

blanca 2015-11-20 13:40   좋아요 0 | URL
저도 개인적으로 이 저자 책들이 참 좋더라고요. 이과적 지식과 문과적 글쓰기 소양을 고루 갖춘 작가인 듯해요. 사실 읽고 나면 자꾸 생각나고 우울감이 드는 것도 사실이에요...

2015-11-21 0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22 15: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07 23: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08 20: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이먼드 카버 : 어느 작가의 생
캐롤 스클레니카 지음, 고영범 옮김 / 강 / 2012년 7월
평점 :
절판


9월 3일부터 읽기 시작했다. 오늘 새벽 감기로 뒤채다 견딜 수 없어 타이레놀을 찾아 일어났다. 약을 삼키니 이제 마저 읽고 싶어져 바닥에 퍼더 앉아 그가 죽음으로 가는 과정을 따라갔다. 이미 죽을 것임을 알고 일어나는 모든 현재진행형 일들이 사소하게도 느껴지고 엄혹하게도 느껴지고 너무 무기력하고 가련하게 보여 중간 중간 멈춰야 했다. 이제 레이먼드 카버는 바야흐로 미국 단편의 거장으로 그 자신은 자신의 작품을 축소하고 사소한 것으로 보이게 한다는 이유로 싫어했던 미니멀리스트 그 자체로  가는 시점이었다. 모든 실현되지 않을 여행 계획들, 출판할 책들이 죽음의 지평선 너머로 가라앉으려 하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그와 함께 했던 동반자 시인 테스 갤러거는 그의 작품을 위해 자원해서 삶을 헌납했던 메리앤의 헌신의 모습과는 또 달랐다. 그녀는 '그'를 완성시켰다. 그가 마지막으로 사랑을 이야기했던 그리고 그의 사후 그의 작품들을 정리하고 간행하고 세상에 정련된 모습으로 보여주었던 그 여자가 결국 그의 마침표에 동했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어 가고 있었다.

 

십여 년에 걸친 자료수집, 생존자들과의 면담, 저자 자신의 언어에 대한 성실함과 레이에 대한 애정, 경탄은 레이먼드 카버의 작품들 만큼이나 그의 삶을 의미 있는 것으로 복원해 내었다. 이것은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사이의 틈새를 허룩하게 방치하며 검증된 낱낱의 사실들의 공허한 나열도 아니고 성급하게 그 막간에 개입하여 소위 소설을 써 나가는 오만도 아닌 가장 균형 있는 지점에서 이 모순적이고 매력적이고 천진한 작가의 삶을 관조하고 언어의 결들에 실어 나르고 있다. 그러니 그 모든 성실한 취재의 틈마다 생략된 잊혀진 이야기들은 공백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레가토를 따른다. 레이가 자신을 대신해 가족을 부양하느라 웨이트리스로 심지어 백과사전 세일즈까지 했던 전처 메리앤과 왜 결국 결혼 생활을 끝낼 수밖에 없었는 지, 편집자 고든 리시의 오만에 왜 그다지도 미온적으로 반응했었는 지에 대한 의문들은 그러니 그 자체로 가지고 이 사내의 삶의 여정에 동행해도 괜찮다. 모든 상상력의 여지와 생략과 말줄임표 사이에 진실의 핵이 숨어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캐롤 스클레니카는 잘 알고 있으니까.

 

레이먼드 카버와 같은 이름의 아버지는 노동자였고 아들처럼 알코올 중독자였지만 아들에게 불성실한 아버지는 아니었다. 그 자신의 한계를 직시하고 이웃의 사내에게 주말마다 사냥에 아들을 데려가 자연 속에서 체험하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려는 노력까지 했다.  이 시간은 오 년 동안이나 지속되었고 레이가 작가로서 성장하는 데에 분명 무언가를 남겼다. 아버지는 소멸로 가는 그 여정에서도 손에서 일을 놓지 않았다. 육체 노동은 이제 글쓰는 일로 세상에 이름을 남길 거구의 아들을 둔 이 아버지의 존재감이었다. 레이는 그 자신조차 아버지의 역할과 책임의 한계 앞에서 혼란스러워했다. 알코올 중독자가 된 딸을 아파하면서도 그 딸이 재정적으로 너무 기대어 올 때는 부담스러워했고 자신과는 다르게 착실하게 성장한 아들의 모습을 자랑스러워하면서도 그 아들과의 관계에 대한 부담감을 은연 중 내비치는 단편으로 아들을 아프게 한다.

 

레이의 작품들에는 거의 대부분 부부가 나온다. 그리고 아내의 모습에는 열다섯 살, 도넛상점에서 처음 시선을 마주친 아내 메리앤의 모습이 많이 투영되어 있다. 제재소에서 일하고 돌아온 소년에게 함께 보바리 부인과 안나 카레니나를 읽게 한 소녀는 그가 글을 쓰는 데에 전념할 수 있도록 둘째를 가지고도 과수원에 일하러 나가 타자기를 사들고 온다. 자신의 학업이나 꿈은 항상 레이 앞에서 후순위였다. 마침내 남편이 성공하여 자신을 떠나 '자신은 여전히 빗 속에 있을 때에도' 그녀는 레이를 걱정하고 배려했다. 다른 여자 옆에 있어도 레이는 그러한 아내와 공유한 시간과 꿈들, 눈물들을 저버릴 수 없었다. 시인 테스 갤러거가 진정한 의미의 작가로서 레이를 완성시키는 데에 일조를 담당했다면, 메리엔은 레이를 작가로서 나아가게 한 원동력이자 레이가 삶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그 사소한 에피소드들을 작품화 하는 데에 강력한 동기를 작용한 추동력처럼 보인다. 그러니 죽어가면서도 레이는 전처의 천사 같았던 그 모습을 제발 염두에 달라고 테스에게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장례식에서 동반자 역할을 할 수 없었던 그리고 그의 사후 작품에 관련된 모든 권리에서 대부분 소외되게 된 메리앤이었지만 이러한 레이의 진심만은 어떤 형태로든 짐작하고 헤아릴 수 있었을 것이다. 아직 성인이 되기 전 부모가 되었던 소년, 소녀는 들이닥치는 삶의 과제들을 외롭게 해결해 나가야 했던 그들은 그러한 것들 대부분을 이야기화해 나가며 싸우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마침내 전설로 만들어 버렸다.

 

레이먼드 카버의 알코올 중독 시절 쏟아낸 많은 작품들이 편집자 고든 리시의 과도한 개입에 의하여 더 완성도를 가지게 되었는 지, 카버 특유의 색깔과 신선함을 잃게 되었는 지에 대한 의견은 확정적인 것이 아니다. 또한 어디까지가 리시의 편집이자 창작인 지에 대한 경계도 그러하다. 이는 저자의 "출판이란 언제나 예술을 상업적으로 전환시키기 마련인데 거기에 리시의 과도한 편집과 카버의 알코올 중독이 합쳐지면서 이 모든 과정이 고통스러울 정도로 모호해졌다."는 표현이 많은 것을 담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 '모호함'의 지대에 레이먼드 카버의 것들이 놓여 있기에 논쟁의 끝은 명료한 것이 되기 힘들다.

 

그 무엇보다 레이먼드 카버가 알코올 중독에서 해방되는 과정이 그 자신의 표현 만큼이나 팬으로서 자랑스럽고 감동적이었다. 아버지처럼 대부분의 시간을 취해 있었던 그가 마지막 잔을 입술에 대고 술을 마시지 않는 날들이 하루 하루 차곡 쌓여가는 과정이 마침내 술에 대한 그의 승리로 귀결되는 묘사가 아름답다. 드디어 레이먼드 카버는 삶과 글들을 주무를 수 있다고 착각해도 괜찮게 되는 시점, 그 원숙한 지점에 도달하고 걸작 <대성당>을 낳는다.

 

서른다섯의 하루키는 이미 죽음에 임박해 있는 작가와의 조우를 계기로 그를 초대하기 위하여 그 거구를 누일 침대를 일본에서 제작한다. 이 모든 것들은 삶에서 밀려오는 그 잔인하고 때로 신비로운 우연 앞에서 좌절된다. 그것 또한 레이먼드 카버의 삶의 방식이기도 했다. 이 모든 것들을 통과하며 그 모든 것들을 잉크처럼 푹 담가 써 내려갔던 그의 모든 이야기들은 레이먼드 카버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이 모든 게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헛된 시도는 아니었다-여행."이었을 것이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희선 2015-09-20 0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다 해도 한사람의 삶이 끝나가는 걸 보면 마음이 가라앉기도 하죠

알코올 의존증은 고치기 힘들다고 하더군요 마시지 않다 다시 마시면 다시 돌아가고... 처음부터 그렇게 안 되도록 하면 좋겠지만 그게 어려운 일일지도 모르겠네요 그것을 고쳤다는 말을 보고 이런 말을 했군요 딸도 그랬다니... 이것도 유전되는 걸까요 그것보다는 그런 모습을 봤기 때문에 그렇게 된 걸지도 모르겠네요 부모를 보고 나는 그러지 않겠다 하는 사람도 있고, 닮는 사람도 있잖아요

레이먼드 카버 소설 예전에 한권 읽기는 했는데 거의 잊어버렸습니다 소설은 못 봤지만, 이건 한번 보고 싶기도 하네요


희선

blanca 2015-09-20 22:34   좋아요 0 | URL
그만큼 어려우니 카버가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웠던 일이 술끊기에 성공한 것이었다고 고백한 것 같아요. 마지막으로 술잔을 입에 대고 그 날들이 쌓여 마침내 금주에 성공하는 장면이 그의 소설들 만큼이나 극적이고 감동적이었어요.
 
보르헤스의 말 - 언어의 미로 속에서, 여든의 인터뷰 마음산책의 '말' 시리즈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 윌리스 반스톤 지음, 서창렬 옮김 / 마음산책 / 2015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흑백 사진 속의 노인은 원피스 차림의 아름다운 실루엣의 젊은 여인의 한쪽 팔짱을 끼고 다른 한쪽 손은 지팡이를 짚고 있다. 한쪽 눈은 흡사 감겨 있는 듯하고 성해 보이는 눈의 시선도 불안정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당당함이 있다. 살짝 고개를 숙인 여인은 아마도 그의 마지막 연인이자 그가 그렇게나 소원하던 망각과 소멸로 가기 전에 결혼한 서른여덟 연하의 비서 마리아 코다마인 듯하다. "여름날의 더딘 땅거미처럼" 시력을 잃어버린 보르헤스는 그녀의 얼굴을 죽을 때까지 알지 못한다.

 

여기에는 자신에게 주어진 명성과 경탄에 아연해하고 수많은 공적 자아, 대중, 성공을 하찮게 여길 줄 아는 여든의 보르헤스의 '말'이 있다. 그의 삶과 글쓰기에 관련된 공개 대화, 대담에서 그는 자신이 보르헤스인 게 싫다고까지 고백하기도 하고 언제 죽을 지 모르니 빨리 질문하라고 너스레를 떨며 재촉하기도 하고 대답하기 싫은 질문에는 촉각을 곤두세우기도 하며 언어로 한 인간을 형상화할 수 있다면(물론 당사자는 반문할 것이다.), 가장 실제적이고 평이한 형태로 그 자신을 드러낸다. 거울, 미로, 글의 환상에 천착했던 보르헤스는 이제 땅에 내려와 자신을 해명하고 상찬하기보다는 깎아내리고 대신 그 자신보다도 더 위대하다고 생각되는 단테, 스티븐슨, 에밀리 디킨슨을 친절하게 이야기한다. 이미 위대해져 신화로 걸어들어가는 눈먼 작가는 소멸 앞에서 당당하고 겸손하고 성실하고 도덕적이고 회의한다. 바리톤의 그의 실제 목소리를 상상하며 때로 그를 도발하는 인터뷰어들의 여정에 동참하는 일은 그 자체로 보르헤스와 함께 사적인 만남을 갖는 듯한  환상을 자아낸다. 그렇다면 대중은 환상이고 각각의 개인으로 대면하고 있다는 보르헤스의 이야기는 진실일 것이다.

 

나는 울적할 때-간혹 울적한 기분에 빠져든답니다-죽음을 커다란 구원으로 생각하지요. 어쨌든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에게 일어나는 일이 도대체 뭐가 중요하겠어요? 나는 죽음을 희망으로, 완전히 소멸되고 지워지는 희망으로 생각하는데, 그 점이 의지가 되는 거예요. 내세는 없다는 걸 알고 있으니, 두려워할 이유도 희망을 가질 이유도 없지요. 우리는 그저 사라질 뿐이고, 그래야 하는 거예요. 나는 불멸을 위협적인 것으로 여기는데, 사실 그건 허망한 생각이에요. 아무튼 나는 개인적으로 불멸하지 않는다는 걸 확신해요. 그리고 죽음은 행복일 거라고 여긴답니다. 망각보다, 잊히는 것보다 좋은 게 어디 있겠어요? 이게 바로 죽음에 대한 내 생각이에요.

-p.160

 

1975년 크리스마스, 인터뷰어 윌리스 반스톤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시민들의 시위 속에서 보르헤스와 만찬을 함께 하고 마리아 코다마를 먼저 보내고 난 후 노시인과 바람 부는 거리를 천천히 걷는다. 그들은 밤새 걸어 새벽에야 보르헤스의 아파트에 도착했다고 한다. 보르헤스와의 구체적인 기억을 잃을 것을 두려워하는 윌리스에게 노작가는 망각의 축복을 이야기한다.

 

2013년 윌리스는 이야기한다. "그의 목소리를 들었거나 그의 글을 읽은 사람은 평생 그를 기억할 것이다."라고. 이는 보르헤스의 소망에 전적으로 역행하는 일이다. 그는 철저하게 잊히기를, 완전히 소멸되고 지워지기를 희망했는데 끊임 없이 부활하고 있다. 그를 읽는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그를 인용하고 그를 계승하는 셀 수 없이 많은 작가들에게 그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과거가 되었고 현재에 미끄러져 들어온다. 죽음에 대한 담담한 그의 이야기는 얼마간 위안이자 희망이 되지만 그의 미래에 대한 반어적인 예시가 되고 말았다.

 

모든 불가능과 한계에 대한 이야기. 모든 확신에 반문하고 회의하는 이야기. 해답은 없음을 전제하는 이야기. 구원은 없음을 수긍하는 이야기. 보르헤스다운 '말'이다.


댓글(8)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프레이야 2015-09-03 15: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 늘 새겨 읽게되는 리뷰
반가워요. 보르헤스의 말, 담아갑니다. 가을이 와요. 이미 왔나요^^

blanca 2015-09-03 23:18   좋아요 0 | URL
덥다가도 문득 공기가 달라졌음을 느껴요. 유난히 힘든 일들이 많이 지나간 시간들이 이제는 그 만큼의 좋은 일들을 몰고 왔으면, 바라 봅니다.

AgalmA 2015-09-03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거의 대부분의 작가는 ˝소멸˝을 원하는데, 그건 인생 때문일까, 글을 쓰면서 도달하게 되는 종국의 필연일까 늘 가늠하게 돼요.
작가는 언제나 글이 구원이길 바랐으나 매번 실패라고 생각해서 일까 싶고요. 타인의 열광과는 상관없이.
불가능과 한계....좋은 작품들에선 언제나 그게 문신처럼 보이더라는.
카프카는 사라지길 원했으면서 왜 브로트에게 유작의 처리를 맡겼는가 의견이 분분하죠. 저는 작가가 작품으로 자살할 수는 없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댓글이 심란한 점 죄송합니다;


blanca 2015-09-04 06:54   좋아요 0 | URL
보르헤스는 유명세가 자신의 실재와 많이 떨어져 있다고 스스로 판단했던 것 같아요. 아니면 그의 개인적 성향 때문일 수도 있고요. 하지만 인간인 이상 유한한 존재로서의 자각이 불멸의 욕구와 절대적으로 어긋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글은 영원히 남는 경우가 있잖아요. 그걸 알면서도 끊임없이 썼다는 것은 남고 싶은 욕망에서 자유롭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어디까지나 제 개인적인 생각이긴 해요.^^

yamoo 2015-09-12 14: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 감사히 잘 읽고 갑니당~~ㅎ


blanca 2015-09-12 15:02   좋아요 0 | URL
^^ 감사합니다. 아직 허룩하죠. ^^;;

희선 2015-09-20 0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은 잊히지 않기를 바라기도, 보르헤스는 사람들이 잊기를 바랐군요 라디오 방송에서 보르헤스가 책을 많이 읽어서 눈이 보이지 않게 됐다고 하는 말을 들었는데, 저는 그 말 듣고 무슨 병이 있었던 건 아닐까 했습니다 책 읽기 좋아하는 사람이 눈이 보이지 않게 돼서 힘들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네요 눈이 보이지 않아도 다른 것을 느꼈다고 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때 잘 들어뒀다면 좋았을 텐데...


희선

blanca 2015-09-20 22:36   좋아요 0 | URL
보르헤스의 실명이 유전적이었다는 건 아는데 정확히 어떤 질환에 의한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죠, 듣기로 갈음한다 해도 한계가 엄연히 있으니까, 늙어 죽을 때까지 좋은 시력을 유지하는 것도 대단한 행운인 듯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