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담 보바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
귀스타브 플로베르 지음, 김화영 옮김 / 민음사 / 200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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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7년 프랑스 제2제정의 법정에는 두 작품이 풍기문란죄로 소환되었다. 보들레르의 <악의 꽃>과 이것이다. 플로베르의 <마담 보바리>. 보바리는 자신의 이야기를 변론해 준 변호사에게 <마담 보바리>를 바친다.

 

<마담 보바리>는 '결혼 생활 만큼 진부해지'는 간통의 파국에 대한 이야기이다. 간통이 골격을 이루는 이야기는 끊임없이 재생되어 왔다. 그리고 그것이 해피엔딩인 경우는 거의 없다. 삶을 지나가는 숱한 파국의 이야기가 그렇듯 그 이야기들은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런데 플로베르가 이야기하는 엠마 보바리의 경우는 조금 다르다. 직접적으로 혼외정사를 묘사한 대목이나 간통을 옹오하는 이야기는 발견할 수 없는데 묘한 에로티시즘을 자아내는 것은 어쩌면 플로베르의 이 이야기를 법정으로 불러내려 한 이들이 정확하게 그의 이야기를 이해하고 느꼈음을 방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또 플로베르가 엠마가 평범하고 안온한 가정생활에서 결코 그녀의 욕망과 환상을 충족시킬 수 없어 곁길로 뛰어나가는 것들이 간통 그 자체만을 이야기하려 했던 것이 아니었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에 대한 노골적인 사례이기도 하다.

 

이야기의 시작은 엠마 보바리로부터가 아니다. 그녀의 남편 샤를르 보바리의 소년 시절의 동급생들이 기억도 못 할 만큼 유순하고 평범해 보이는 모습, 창턱에 팔을 괴고 바깥 풍경을 바라보며 꿈을 꾸는 소년은 미래의 아내의 배신과 자신의 몰락, 어이없는 죽음을 상상하지 못한다. 시골의 의사가 되어 첫 결혼에 아내와 사별하고 자신의 환자의 딸이었던 엠마에게 반해 그녀에게 구혼하는 장면, 그녀와의 아름다웠던 신혼생활에 대한 묘사는 아릿할 만큼 아름답다. 단조로운 시골 생활, 과한 공상과 환상, 허위에서 허우적대다 우연히 초대받아 가게 된 귀족의 무도회에서 엠마의 허영심과 외도에 대한 욕망은 비도덕적인 출구로 향하게 된다. 그녀가 화려한 저기에 시선을 둘수록 여기에서 그녀를 둘어싸고 있는 것들은 헐벗고 초라하게 전락한다. 외도의 초입은 순간적으로 그녀가 가져왔던 환상이나 환각을 구체환 한 것같은 착각을 주지만 이윽고 그것들 역시 플로베르의 말처럼 진부함으로 지리함으로 치닫는다. 플로베르는 '여기'를 버리고 '저기'를 택하는 것 역시 '저기'를 '여기'로 변환시키는 삶의 그 가혹한 어쩌면 다행한 속성에 기초한 것임을 예리하게 간파하고 있는 작가다. 번역자의 말처럼 그렇다면 우리 모두 엠마 보바리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꿈꾸는 한, 그리고 그 꿈이 어떤 착각, 환상과 만나는 지점이 있는 한 엠마 보바리 같은 패배는 남의 것으로 남아 있을 수 없다.

 

이 이야기에는 다양한 인간 군상이 축도처럼 집약된다. 플로베르의 인간형들은 그래서 누구라도 조금이라도 닮지 않고는 못 배겨낸다. 특히 약제사 오메는 보바리 의사 집안 일에 뻔질나게 훈수를 두고 때로 적극적으로 돕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사리사욕을 채우고 그 부부의 불행에서 상대적인 즐거움을 느끼는 속물이자 위선자로의 전형으로 그려진다. 보바리 부부가 모두 몰락하여 죽고 나서도 끝까지 부와 명예를 거머쥐고 자신이 바란 바의 대부분을 실현시키는 승리자는 오메이다. 하지만 플로베르가 그의 성공을 묘사하며 정말 삶에 있어 그가 성공을 거두었는 지에 대한 판단은 유보하며 은근히 조롱하는 듯한 조소하는 듯한 시선을 거두지 못하는 것은 그것이 보이는 성공 안에 진짜 '산다는 것'에 대한 성찰이 빠져 있는 것이 과연 잘 사는 것인가에 대한 반문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 자신이 그런 한계 안에서 그러한 시선으로 그러한 만족으로 자신의 삶을 채우다 죽는다,는 것이 전적으로 무의미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을 것이다. 사는 일은 단순하게 이분법적으로 심판할 수 없는 지대다.

 

번역자 김화영의 작품 해설은 그 자신의 작품에 대한 깊이 있는 천착에 기반해 한 편의 명강의를 연상시킬 정도로 값지다. 무엇보다 무심코 읽어내려갔던 것들에 대한 신중하고 사려 깊은 분석과 플로베르의 작품 창작 과정에서의 에피소드 들이 어우러져 작품 자체에 대한 친절한 안내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외동딸 엠마를 홀로 키우다 시집 보내고 자살로 보내야 했던 아버지 루오 영감에 애정이 갔다. 이 소박하고 따뜻한 농부는 전처와 사별한 그래서 장래에 자신의 사위가 될 보바리를 위로하며 자신의 경험에 기반한 귀중하고 다감한 조언을 남긴다. 그것은 꼭 슬픔이 아니더라도 삶의 길목마다 만나는 그 모든 떨쳐내기 힘든 부스러기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 지에 대한 하나의 지침이 될 수도 있을 듯하다. 그래서 기억해 두고 싶다.

 

그런데 말씀이죠, 아주 서서히 하루가 가고 이틀이 가고, 겨울이 가고 다시 봄이 오고, 여름이 지나 가을이 오고, 한 조각 한 조각, 한 알 한 알, 흘러가더군요. 사라졌달까 떠나갔달까 아니 가라앉았다고 할까요, 여기 가슴 밑바닥에, 글쎄 뭐랄까......여전히 뭔가 묵직한 것이 남아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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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15-12-19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내영화로 본데다 최근 읽은 김영하 작가의 산문에도 언급되어있어서 조만간 읽어야지 하고 있었는데 블랑카님의 리뷰에 조급해집니다.ㅜㅜ 미미여사 책을 후딱 읽고 바로ㅠㅠ;

blanca 2015-12-19 22:33   좋아요 0 | URL
아, 달밤님은 영화도 보셨군요. 아, 꼭 읽으셔야 해요. 후회 없으실 겁니다.^^;; 책장은 가볍게 넘어가고 감동은 묵직합니다. 이러니 책 선전 같네요.

2015-12-21 0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21 15: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25 02: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2-27 11: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랑의 사막 마카롱 에디션
프랑수아 모리아크 지음, 최율리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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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야기가 회상의 구조를 택한다. 청년과 중년이 만나는 경계인 삼십대 중후반의 나이는 특히나 과거의 일들을 복기하기 좋은 시점이다. 더 이상 젊지도 그렇다고 아직 늙었다고 하기는 애매한 나이에 청춘의 이야기는 하나 하나 되짚어 나가며 비로소 완성된다. 막상 현실에 퐁당 발을 담궜을 때에는 가질 수 없었던 통찰과 조망들은 산란하고 가벼운 사실의 조각들을 한데로 묶어내어 조금만 뒤로 물러서면 아주 그럴듯한 그림이 된다. 다시 돌아가는 길이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기도 하다.

 

레몽도 그랬다. 술집에서 레몽은 이제는 늙어가는 첫여자와 해후한다. 마리아는 레몽이 열입곱이었을 때 이미 이십 대 후반에 이르렀고 어린 아들을 잃었고 한 사내의 정부이자 레몽의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었다. 세월의 풍화는 아름답던 여인을 여지없이 깎아 놓았지만 그 여인을 상대로 정염과 복수심을 불타올리던 미성숙한 사내의 치기까지 다 잡아먹지는 못했다. 이윽고 레몽은 그 찬란했던 격정으로 가득했던 채 열아홉도 되지 않았던 나이에 전차에서 한 성숙한 여인의 시선과 마주쳤던 시간들을 회상한다. 둘의 시선은 은밀하게 교환되고 어설프게 만나게 되지만 소년의 서투름과 치기는 이미 성숙하고 닳아버린 여인에게 환영받지 못함으로 깊은 상처와 패배로 남게 된다.

 

이 이야기가 전부라면 <사랑의 사막>은 진부해져 버리고 말것이었다. 하지만 레몽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이 소년의 어처구니 없는 격정을 이해할 만한 것으로 만들고 깊이를 더하고 있다. 부자는 한 여자를 상대로 승산없는 싸움을 하고 있었다. 여자에게는 너무나 늙어버린 너무나 어린 두 남자는 상대할 가치가 없는 것으로 결론난다. 두 남자는 한 남자의 사랑의 연대기의 대척점에 서 있다. 너무 어린, 혹은 너무 늙어버린 시점에 만나게 되는 정염, 정열. 그것이 설령 플라토닉한 것일지라도 에로틱한 것일지라도 사회적 시점에서는 다 관용어린 시선을 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게다가 레몽의 아버지는 지역사회에서 존경받는 저명한 의학박사였고 부엌을 두고 사사로운 권력 투쟁에 열중하는 어머니와 아내가 있었다. 후일 레몽이 마리아와 재회하여 그녀의 남편을 치료하기 위해 아버지를 다시 불렀을 때 노인은 여전히 마리아에게 만남을 구걸하는 추태를 보인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고백한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 수없이 마음 속에서 저질렀던 현실화되지 않은 불륜들이 과연 진정한 의미에서 실제 불륜을 저지른 사람보다 나은 것인지 반문한다. 근친을 저지를 뻔 했던 부자의 대화는 인간의 내면이 사회적 외연 안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축소하고 가장하고 죽이며 견뎌나가는 지에 대한 자조섞인 이야기다.

 

시간과 제도와 욕망 앞에서 인간은 흔들린다. 닳는다. 그것에 대한 통찰의 한 매개로 '사랑'이 택해졌다. 아버지는 이제 완전히 노쇠했고 가망 없는 사랑과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그 대신 가까스로 가정을 지켜내었다. 아들은 해소되지 않은 정염에서 아직도 자유롭지 못한 패배자로 다시 그 여인 앞에 섰다. 그 여인은 어떻게 하여 자신의 정부와 그의 아들을 합법적인 가정의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였다. 늙어버린 여자는 한때 자신을 흔들었던 아들뻘 되는 남자 앞에서 자신의 의붓아들을 자랑한다. 그들의 욕망, 언어, 감정은 모두 철저하게 어긋난다. 그 참혹함 속에서 프랑수아 모리아크는 삶의 한 단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모든 것을 말할 수 없다면, 아무것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p.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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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바 2015-07-28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카롱 에디션으로 다시 나왔군요! 전 그 전의 표지가 더 좋아요.. 처음 읽은 모리아크의 책인데 삶의 정수를 보여주더군요. 세월도, 엇갈린 마음도 사막처럼 막막하기만 한.. 테레즈 데케루와 더불어 인생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끔 하는 작품이었습니다.

blanca 2015-07-28 23:12   좋아요 0 | URL
마카롱 에디션이 예쁘긴 한데 표지가 너무 얇아 금방 구겨져 아쉬워요. 솔직히 저는테레즈 데케루는 좀 어려웠는데 이 작품은 참 흡인력이 있더라고요.

2015-08-05 01: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8-05 15: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사물들 마카롱 에디션
조르주 페렉 지음, 김명숙 옮김 / 펭귄클래식코리아(웅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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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어떤 이벤트 준비는 소비로 시작된다. 휴가를 가도 기념일을 맞아도 심지어 내 자신이 너무 우울하고 지칠 때에도 작고 소소한 것들을 사게 된다. 거창하고 값비싼 것이 아닌 한 자루의 연필일지라도 사물은 신기한 착각, 잠시 위로를 준다. 샬랄라한 원피스를 입고 갈 곳도 없고 꼭 구태여 가운뎃 손가락에 포인트 반지를 끼지 않아도 사람들은 나의 손가락에 시선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여자는 인터넷 쇼핑몰을 기웃거리고 백화점 행사장에 목을 들이민다. 명품관은 '언젠가'는 이다. '사물'에 지나치게 탐닉하는 것도 '사물'을 지나치게 경멸하는 것도 다 '속물성' 지근거리에 있다. 인간으로 태어나 살고 욕망하고 꿈꾸고 과절하는 과정에서 '사물'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은 하나의 지향이지, '지금', '여기'에서 단 하나의 흔들림 없이 딛고 설 수 있는 단단한 지반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한때 나도 그럴 수 있다고 믿었고 거의 모든 것의 소비에서 멀어졌던 시기가 있었는데 그것은 또다른 결핍에서 비롯된 일이었기에 아무 사물도 남지 않은 거의 소비가 없었던 시간들은 돌이켜 볼 때 더 큰 슬픔을 남긴다. 그때는 '일'에 지나치게 함몰되어 있어 '무언가를 욕망'한다는 것조차 잊어버렸던 시간. 그 시간들은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그래서 그 시절 회사에 가지고 다녔던 다 낡아빠진 가방을 보면 지금도 자랑스러운 게 아니라 어쩐지 가슴 한켠이 시큰하다.

 

사물들에는 '이야기'가 없다. 하지만 여자는 '이야기'를 꿈꾼다. 그것은 명백히 환각이자 착각이지만 그럼에도 일상이 조금은 덜 단조롭고 덜 무기력해지는 듯한 느낌이다. 소비를 지양하는 책을 사대는 또 다른 모순 속에서 잠시 사물에서 멀어져 보고자 하지만 그 사물들은 구심력으로 다시 여심을 당긴다.

 

조르주 페렉의 <사물들>은 아주 얇은 책이다. 하늘색 마카롱 빛깔 표지가 손안에 쏘옥 들어온다. 지금까지 보아 왔던 그 어떤 소설과도 다른 아주 독특한 경이로운 이야기. 소설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도 소설에 빠져 있는 사람도 누구나 잠시 이 책에 머물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굉장히 건조한 척 담담한 척 이야기하는 실비와 제롬의 그 사물들에 허덕이는 탐닉, 좌절의 여정이 너무나 우리의 그것과 닮아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부자가 되고 싶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는 누구나 이 명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돈은 있어도 너무 없어도 그것에 끄달리게 된다. '돈' 이야기 앞에서 초연하려면 그것을 의식하지 않을 정도의 최소한도의 자립이 가능한 경제적 여유가 전제되어 있어야 한다. 문제는 이 자본주의 사회가 생존의 조건에서 더 나아가 행복의 조건까지 모두 돈의 가치로 교묘하게 환원하여 사람들을 세뇌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정말 필요해서 사는 물건보다 정말 가능해서 꿈꾸는 미래상보다 항상 잉여의 것들이 욕망의 언저리를 부유하고 있다.

 

부자가 되고 싶고, 더 부자가 되고 싶은 집착은 대개 사소한 물건에 지나치게 열을 올리는 행위로 드러났다.

-p.27

 

실비와 제롬은 파리의 사회심리 조사원이다. 프티 브루주아 출신의 젊은 남녀는 파리의 상점가, 벼룩시장이 열린 곳들을 기웃거리며 각종 사소한 것들을 사모은다. 물론 그들의 지향과 꿈은 더 높은 곳에 있었다. '지금', '여기'는 그들에게 임시 거처, 유예된 곳이다. 그들은 자신이 가질 수 있는 것보다 물론 더 많이 욕망했다. 조르주 페렉이 쫓는 그들의 일상은 우리가 소진해 버린 청춘들과도 닮아 있다. 찰나적인 즐거움이 난무하는 이십 대, 그만큼의 불안과 제어할 수 없는 욕망이 흘러넘치는 시간들의 묘사. 시간은 흐르고 친구들은 '안정'을 찾아 떠나간다. 실비와 제롬은 용단을 내린다. 튀니지의 교사 자리로 탈출을 시도한다. 그곳은 파리 만큼 사물들이 지배력을 발휘하는 곳은 아니었다. 실비와 제롬은 마침내 욕망을 잊기 시작하고 그 지루하고 고요하게 흐르는 일상에 함몰되며 무기력으로 빠져든다. 안정, 안온함, 자족과는 다르다. 그것은 권태였다. '돈'에서 탈출하여 '돈'으로 뛰어들어갔지만 '그곳'은 그들이 바라보던 곳이 아니었다.

 

어떻게 되었을까. 에필로그는 엄정한 가정법을 동원한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계속될 수도 있었다."

 

파리로의 귀환, 다시 '사물'과 '욕망'이 조우하는 지점으로의 끊임없는 내달림. 그리고 또 다른 '그곳'으로의 탈출을 꿈꾸는 그들의 모습은

 

언제나 여기 지금 우리와 얼마쯤 닮아 있어 섬뜩하다. 에필로그는 마치 우리 모두의 그것과 닮아 있다.

 

 수단은 결과와 마찬가지로 진리의 일부이다. 진리의 추구는 그 자체로 진실해야 한다. 진실한 추구란 각 단계가 결과로 수렴된 수단의 진실성을 의미한다.-카를 마르크스 p.139

 

에필로그 뒤의 첨언. 이야기와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것인지 솔직히 납득이 잘 안 가면서도 삶의 모든 추구의 과정 자체에 대한 무게에 대한 조언으로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작금의 어지러운 상황들에 가하는 엄중한 경고 같아 더 와닿았다. 조르주 페렉 앞에서는 모든 것이 들켜버리고 만다. 예리한 문장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지대 앞에서 읽는 이들은 무장해제 당하고 만다. 다시 한번 멈추고 심호흡 하고 생각이라는 것을 하며 살아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시간이 나의 삶을 모두 좌지우지 해버리고 말것이라는 깨달음. 그가 기획한 이야기의 구성 자체가 우리 삶의 흐름을 축약해 놓은 듯한 느낌이기 때문이다. 가정법들. 그러니 "~ㄹ수도 있었다"의 무게를 항상 의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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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5-04-15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는 언제나 부자일 수 있는데
막상 `부자`는 저 멀리,
아주 아득한 곳에만 있다고 여겨...
그만 오늘 이곳에서 내가 어떠한 부자인가를 미처 못 보고
그냥 달리고 또 달리는구나 싶기도 해요...

blanca 2015-04-16 13:12   좋아요 0 | URL
맞아요. 가끔씩 멈추어 서면 보이는데 또 달리다 보면 그런 헛된 끄달림에 시달리고 있고...
지금 여기에서 `나`인 것으로 충분히 행복해 하도록 노력해야겠어요.

cyrus 2015-04-15 19: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맞는 말인 것 같아요. 돈이 없는데도 돈으로 원하는 것을 소유하려고 하죠.

blanca 2015-04-16 13:14   좋아요 0 | URL
죽기 직전에도 다 해탈하고 깨닫는 것이 아니니까. 평생을 노력하는 수밖에 없는 듯해요.
어떤 강렬한 감정의 기저를 들여다 보면 대부분이 어떤 욕망, 결핍이 있더라고요.
그럼 아직 멀었구나,하며 또 한숨쉬고. 그래도 cyrus님은 제가 그 나이 때 몰랐던 많은 것들을 읽고 생각하고
느끼는 모습이 참 부럽답니다.

Jeanne_Hebuterne 2015-04-15 22: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데굴데굴 굴러서 구렁텅이 안에 쏙 빠지는 것이 한순간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아, 내가 지금 어디에 있지!`하고 눈을 치켜뜨던 순간.
그 두 순간이 한끝 차이라는 것을 조르주 페렉은 참 쉽고 간단하게 보여주는 것 같아요. 문제는 자성과 자각, 생각은 늘 그것이 남의 것일 때에만 쉽다는 것. (제겐 그랬어요ㅠㅠ 저 그리고 오늘 후레쉬베리 사서 블랑카님의 이 좋은 리뷰를 읽으며 그만 한번에 여섯 개 `마셨`어요ㅠㅠㅠㅠ 누굴 탓하겠어요 그냥 다 내가 많이 먹어서......)

blanca 2015-04-16 13:16   좋아요 0 | URL
`한끝 차이` 이 말 좋네요.^^ 맞아요, 어느 책에서 인간들이 사실은 대부분 아주 비슷한 평균적 대응, 반응을 보이는데 자기만은 특별할 거라 생각한다는 지적이 떠올라요.

후레쉬 베리. 저도 그래요. 한 개로 절대 끝나지 않아요.--;; 여섯 개는 좀 과한대요 ㅋㅋ 저는 며칠 전에 아이가 베란다에 던져 놓은 후레쉬 베리 두 개를 발견하고 원샷했지요. ㅋㅋ

프레이야 2015-04-19 2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블랑카님의 좋은 리뷰가 그리웠어요. ^^

blanca 2015-04-20 13:32   좋아요 0 | URL
저도 프레이야님이 그리웠답니다. 돌아오신 거 맞죠!
 
폭풍의 언덕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6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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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등장인물들의 대화가 마치 귓전에 들리듯이 생생하게 꿈틀댔다. 한번에 다 읽어버리기 아까워 그리고 한번에 다 감당할 수 없는 격정의 양에 질려 되도록 음미하듯 읽고 싶었다. 분명히 어렸을 때 이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러나 축약본에다 아직 그것들을 듣고 보고 느낄 깜냥이 안 되었던 터였던지 막연하게 음침하고 괴이한 느낌만을 받았었다. 이제 나와 나의 삶이 충분히 숙성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아니 죽을 때까지도 그것은 불가능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이 악덕의 화신 같은 사내와 당당하고 도발적이었던 여인이 나누었던 불멸의 사랑을 보이는 대로 들리는 대로 지켜볼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폭풍의 언덕>의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사랑은 날것으로 묘사되는 것이 아니라 캐서린의 친정집에서 함께 자랐다 그녀가 린턴가와 결혼함으로써 그 집에 함께 와 그녀의 딸까지 돌보게 되며 한 가문의 영락에 얽힌 사연을 지척에서 지켜보고 때로는 그 사건의 중심에 뛰어들어 결정적 증언을 하기도 한 나이 든 하녀 넬리 딘의 회고담 속에 녹아 있다. 넬리 딘의 이야기를 듣게 되는 '나'는 록우드라는 런던의 신사로 린턴가의 오랜 저택 '티티새 지나는 농원'을 폭풍의 언덕에 사는 히스클리프로부터 세낸 청년이다. 4마일 정도 떨어진 '폭풍의 언덕'의 히스클리프를 위시한 세 남녀의 기묘한 동거와 우연히 그 집에서 묵게 되어 비몽사몽 간에 만나게 된 캐서린의 유령으로 인해 록우드는 이웃집의 내력을 하녀장 넬리 딘에게 조르게 되고 그녀는 담담한 어조로 폭풍의 언덕의 어쇼가에 업둥이로 들어오게 된 히스클리프의 사연을 풀어내게 된다.

 

집시의 외모로 거리를 헤매던 히스클리프가 어쇼 남매와 맺게 되는 인연은 파국의 전조가 된다. 사내애 어쇼는 히스클리프가 아버지의 사랑을 찬탈했다고 여기고 그를 몹시 미워하게 되고 캐서린은 히스클리프와 붙어 다니며 가망 없는 사랑을 키우게 되나 이웃집 '티티새 지나는 농원'의 반듯한 도련님 에드거와 결혼하며 히스클리프와 '폭풍의 언덕'을 떠나게 된다. 캐서린이 당시 하녀 넬리에게 독백처럼 내뱉는 히스클리프에 대한 사랑은 하나의 시 같다. 어쩌면 캐서린의 이야기는 우리가 젊은 시절 소진해 버리는 그 많은 실패하는 첫사랑에 대한 하나의 소고 같아 가슴이 저릿하다. 누구나 그 때는 '그 아이'가 없는 세상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에 유리 조각이 박히는 듯한 아픎을 느끼지 않았던가.

 

내 삶에서 가장 큰 슬픔이 그 애였여. 모든 것이 사라진다 해도 그 애만 있으면 나는 계속 존재하겠지만, 모든 것이 그대로라 해도 그 애가 죽는다면 온 세상이 완전히 낯선 곳이 되어버릴 거야. 내가 이 세상의 일부라는 느낌이 없을 거야. <중략> 그 애는 내 마음속에 항상, 항상 있는 거야. 기쁨을 주려고 있는 게 아니야. 내가 나 자신에게 항상 기쁨을 주지는 않잖아. 그 애는 기쁨을 주려고 있는 게 아니라, 나 자신으로 있는 거야.

-p.132

 

히스클리프는 지금까지 보고 들어 왔던 숱한 로맨스의 남자 주인공과는 사뭇 다르다. 그는 집시 같은 겉모습에 욕설과 악담과 폭력 그 자체다. 사랑하는 캐서린과도 격앙되어 저주와 폭언을 주고 받는다. 심지어 캐서린에 대한 애증은 그녀의 시누이와의 사랑없는 결혼의 강행과 그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학대하는 것으로까지 이어진다. 그는 상식적이지도 않고 연민을 자아낼 구석도 없다. 에밀리 브론테는 끝까지 히스클리프의 개과천선을 기대했던 독자의 기대를 배신한다. 그는 여전히 그다. 그와 사랑에 빠졌던 캐서린 또한 자신은 천국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21세기에도 이러한 이야기는 쉽게 용인될 수 없을 것 같다. 하물며 국교회 목사의 딸로 목사관을 평생 거의 벗어나지 못했던 19세기 초의 에밀리 브론테가 그려낸 이러한 인물형이 그 당시 어떤 파장을 불러일으켰을 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얼마나 위험한 도발적인 이야기를 해내었는 지 상상이 가 섬찟했다. 에밀리가 그려낸 두 남녀는 로맨스의 주인공들로도 현실의 인간형으로도 적절하지 않다. 그런데 이러한 광포한 그들의 사랑이 결실을 맺지 못하고 마침내 그들이 낳은 딸과 아들이 사랑하게 되는 과정에서 그려지는 저간의 이야기들은 얼마나 격정적이고 얼마나 아름답고 얼마나 애잔한지 책장을 뚫고 나올 것만 같다. 에밀리 브론테는 '죽음'에 세상의 '관습'에 고착된 '도덕관'에 도전장을 준엄하게 내민다. 그것은 억지스럽지도 않고 역겹지도 않다. "온 세상이 그 애가 한때 살아 있었지만 이제 내 곁을 떠나버렸다는 사실이 적혀 있는 비망록"이라고 되뇌이며 죽음을 맞는 히스클리프의 죽음은 늙은 충복 앞에서 희화화되기도 하지만 흔히 '끝'이라고 여기는 '죽음'도 뛰어넘어 간직하려는 그 무모하고 무력한 '사랑'에 대한 힘과 소망을 보여주는 것같아 울림이 크다. 밝은 곳만을 이야기하고 듣는 일은 쉬운 일이다. 어둡고 음험한 곳에서 벌어지는 질투와 욕망의 잔재를 끌어모아 잉걸불을 피어 낸 그녀의 위대한 펜 끝에서 가슴이 떨렸다.

 

위대한 이야기는 감히 불멸을 꿈꾼다. <폭풍의 언덕>은 그 어떤 모든 지평과 한계를 뛰어넘어 저 너머에 살아 스스로 생명력을 발한다. 죽음 앞에서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온몸으로 반기고 천천히 다다가는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담대함은 에밀리의 실제의 삶, 죽음과도 닮았다. 그렇다면 그녀의 메시지는 시공간을 가르고 우리라는 과녁에 적중했다. 그녀는 우리가 감히 꿈꾸는 것들, 감히 밖에 내어 표현하지 못했던 것들을 싸안고 펼쳐 보여준다. 그녀 앞에서 '감히'는 무력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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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미인초 현암사 나쓰메 소세키 소설 전집 5
나쓰메 소세키 지음, 송태욱 옮김 / 현암사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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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는 사실 항상 별 이야기를 대단하게 풀어내는 게 아님에도 도저히 물릴 수 없는 어떤 강한 흡인력을 가진다. 톨스토이처럼 역사와 시간을 가로지르는 장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도 아니고 에밀 졸라처럼 사회 현상에 현미경을 대고 정밀하게 묘사하는 것이 아님에도 그가 쏟아내는 이야기들은 어떤 고풍스러운 격과 우아함을 가진다.

 

'우미인초'는 양귀비과의 꽃이라 한다. 항우와의 헤어짐으로 자결한 우희의 무덤에서 피어난 데에서 유래한 이름이라 한다. 봄날 한철 일어나는 남녀 간의 사랑, 이별, 오해, 죽음 등이 어우러지는 이 이야기는 사실 그 눈부신 한때의 젊음과 대비되는 '죽음'으로 응결되는 것이다.

 

시간을 쌓아 날을 이루는 것도, 날을 쌓아 달을 이루는 것도, 달을 쌓아 해를 이루는 것도, 결국 모든 것을 쌓아 무덤을 이루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p.27

이십 대 후반의 세 청년 고노, 무네치카, 오노에게는 각각 나쓰메 소세키의 일부가 투영되어 있는 듯하다. 부잣집의 상속자지만 계산적인 계모와 영약한 여동생 후지오에 둘러싸여 무기력하게 나날을 소비하는 고노, 고노의 여동생 후지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계속 외교관 시험에 떨어져 적극적으로 다가가지 못하는 무네치카, 사생아로 태어나 영특하지만 뜻하는 바를 제대로 펼치지 못하고 후견인의 역할을 한 사람의 딸과의 정혼의 약속을 부담스럽게 느끼는 오노에 대한 묘사들은 오늘날 우리들의 내면에서 흔들거리는 각종 사념, 욕망, 번뇌의 형상화이기에 낯설지 않다. 우리는 누구나 한번쯤 우리에게 잇속과 계산기를 차고 등장하는 사람에게서 상처받아 본 기억, 그냥 일상과 현실을 소비만 했던 기억, 과거의 오랏줄에 현재를 포박당했던 슬픔 한 자락씩을 가지고 있다. 화려하고 아름다움 봄날의 정경과 각자의 고민과 번뇌들은 묘한 대조를 이루면서 삶 전체와 죽음에 대한 면밀한 통찰을 가능하게 한다.

 

자신의 재능을 결박하는 것 같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후지오라는 발판을 밟고 도약하며 정혼자를 배신하려 했던 오노가 갑자기 진지함을 설파하는 무네치카 앞에서 도의와 인정으로 돌아서는 장면은 갑작스럽기는 하지만 결국 보이는 형이하학적 세계에 함몰되어 헛된 것들에 끄달리는 우리들을 준엄하게 꾸짖기 위한 나쓰메 소세키의 의도인 것 같아 무게감이 있다.

 

"다른 사람도 나도 가장 싫어하는 죽음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영겁의 함정"이라는 작가의 이야기는 결국 이 아름답고 덧없는 우미인초가 아름답고 이기적이고 욕망에 끄달렸던 후지오의 장례식장의 병풍에 나오는 것으로 귀결된다. 모든 눈부신 것들은, 모든 어리석은 것들도 종국에는 다 스러지고 만다. 이것을 잊지 않는다면 삶은 더 멀리 더 거대하게 보일 수 있다. 눈 앞의 종종걸음으로 가닿을 수 있는 '저기'의 뚜렷한 실체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일상은 단단한 돌처럼 영속적이지도 안전하지 않다. 우리는 결국 죽음으로 가고 있다. 이 사실을 잊으면 사치하게 된다는 작가의 이야기가 의미심장하다. 시어 같은 소세키의 단아하고 유려한 언어들이 엮어내는 삶의 혜안은 사변적이지 않아 와닿는다. 즐겁고 진지하게 들을 수 있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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