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우 데스 - 일상 속 내 아이를 서서히 죽이는 오리인형의 진실
릭 스미스.브루스 루리에 지음, 임지원 옮김 / 동아일보사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샤워솜에 바디샴푸를 듬뿍 바른다. 부걱부걱 거품이 피어오른다. 젖은 머리에 오백 원짜리 동전만큼 샴푸를 발라 헹군다. 그 머리에 다시 헤어컨디셔너를 바른다. 헹구고 다시 헤어 트리트먼트를 바른다. 나온다. 다시 바디로션을 바른다. 갈라진 발뒤꿈치에는 발전용 각질크림을 바른다. 

화장대 앞에 앉는다. 스킨, 로션만 얼굴에 바르면서 너무 피부에 소흘한 것이 아닌가 하는 죄책감이 들어 굴러다니는 에센스 샘플병을 찾아 바른다. 머리를 말리기 전에 끝이 다 갈라진 머리칼에 헤어에센스를 뿌린다. 음이온이 나온다고 선전하는(믿을 수는 없지만) 헤어드라이기로 머리칼 틈새 틈새 손을 넣어 머리를 말리기 시작한다. 

이 일련의 과정. 많은 의미를 두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내 몸을 소흘히 하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주기는 한다.
그. 러. 나. 

   
 

 나는 하버드 공중보건 대학원의 수전 듀티 박사에게 전화를 걸어 실험계획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 듀티는 2005년,400명의 남성 소변의 프탈레이트 농도와 그들이 사용하는 목욕용품의 종류 간의 상관관계를 살펴본 흥미로운 논문을 발표했다. 그녀는 매우 명확하고 놀라운 상관관계를 밝혀냈다. 더 많은 제품을 사용하면 할수록 소변 중의 MEP 농도가 높게 나타났던 것이다.
P.80

 
   

 

디에틸프탈레이트(DEP)는 제품에 들어 있는 다른 성분들의 윤활유 역할을 한다고 한다. 로션이 피부에 잘 스며들게하고 향이 오래 지속되도록 해준다. 우리들의 집 안의 목욕용품, 각종 세제 들에 들어있다. 목욕이나 각종 접촉을 통해 우리 몸에 침투해 들어와 호르몬을 교란시킨다. 특히 아이들의 발달 장애 및 신경학적 문제와 성인 남성 기능의 생식 기능 저하, 고환암 등과 관련되어 있는 근거들이 나오고 있다. 

나는 몸에서 오염물질을 씻어 내기 위하여 더 많은 화학 물질들에 내 몸을 축이고 더불어 우리가 마실 물을 오염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자, 이제 목욕을 했으니 먹을 차례다. 가스 레인지 위에는 코팅이 군데군데 벗겨진 난스틱 후라이팬, 일명 테팔이 올려져 있다. 코팅 후라이팬을 사용하면 웬만한 요리는 초보라도 가능하다. 들러붙지 않고 뒤집개로 뒤집는 일도 간단하다. 수명은 짧다. 그 벗겨진 코팅제가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지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머리가 아파온다. 스텐 후라이팬은 워낙 고가이고 관리도 어렵다는 얘기에 애초에 고려 대상도 아니었다.(이 책 이후로 저렴한 스텐 후라이팬을 주문했다) 부엌 조리기구 찬장에는 이렇게 코팅이 벗겨졌지만 버리기 아까워 둔 후라이팬이 두 개나 더 있다. 이 후라이팬은 주로 튀김을 하거나 생선을 굽는 데에 사용해 왔다. 참치 통조림에서 참치를 꺼내어 전을 부친다. 아이는 가방에서 영수증을 꺼내어 그 뒤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그냥 일상이다. 거창한 의식이 아니다. 그런데 이토록 사소하고도 자잘한 일상들에서 나는 테플론과 수은을 먹고 먹이고 비스페놀A로 오염되고 있는 아이를 방치하는 셈이 되었다. 그리고 정작 그런 화학 물질을 방출하지도 환경을 오염시킬 의도도 없었던 무고한 남반구의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사소하다면 사소한 일들. 그리고 관성. 뭘 그 정도를 가지고. 이건 쉬운 일이다. 좀더 편하기를 바라고 좀더 무감각해지기를 원한다면 인생은 쉽지만 무의미해진다. 그리고 정말 내 몸을, 내 아이의 몸을 대우하는 일을 포기하는 일이기도 하다. 

작가인 엘리자베스 스톤은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나의 심장이 내 몸 밖으로 나가 바깥세상을 걸어 다니게 될 것을 영원히 결정하는일"이라고 했다.(p.326) 나의 심장만이 아니다. 무고한 수많은 어린 심장들에는 수많은 독성물질들이 쌓여가고 있다. 어떤 물질이 그 이하에서는 안전하다,는 논리로 대중들을 안심시키려는 기업들, 정부 기관. 저자는 '수용 불가능한 안전성'을 평가하지 않고 '수용 가능한 유해성'을 내세우는 그들에게 분노한다. 그리고 마침내 아이들 우윳병에서 용출되는 비스페놀A에 대적하기 위하여 아이 엄마들과 주의회로 향한다. 단단하고 가벼운 플라스틱 용기를 만드는데 사용되었던 비스페놀A에 노출되었던 생쥐에게서 태어난 암컷 생쥐의 난자는 40%나 손상되어 있었다. 단 한번의 노출이었다. 주지사 앞에서 아이들은 난장판을 만들었다. 엄마들은 젖을 먹이고 아이들을 달랬다. 캐나다는 세계 최초로 비스페놀A 노출을 제한하는 국가가 되었다. 레이첼 카슨의 본능적 직관을 칭찬했던 저자는 그 직관 앞에서 용감하게 행동한다. 뭉클했다. 

이 책의 미덕은 진정성에 있다. 저자들은 자신들의 몸에 실제로 수은, 프탈레이트, 비스페놀류 등을 축적시키는 단기 생체 실험을 자행한다. 단 며칠의 조금 과장된 생활용품들에의 노출로 우리 몸 속의 독성물질은 어마어마하게 치솟는다. 각종 문명의 이기들을 사용하며 우리 몸에서 좋은 향기를 내뿜을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도 타인들에게도 얼마간은 유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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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11-10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예전에 바디샴푸가 몸에 안 좋은 화학물질 때문에 건강에 안 좋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군인 시절 때 샤워하면서 처음 사용하고 난 뒤에 지금까지도 계속 사워할 때 없으면 안 되는 존재가 되었어요. ^^;;
예전에는 비눗칠만으로 샤워를 했었는데 요즘에는 향기 나는 고급스런 이미지를 가진 바디샴푸들이
많이 나와서 그런지 비눗칠로 하는 샤워는 깨끗하지 씻겨지지 않을 것이라는 오해를 가진 사람들도 보곤 했어요.
바디샴푸를 쓴다고 해서 완전히 깨끗하게 씻겨지는 것도 아닌데 말이죠. ^^

blanca 2011-11-10 22:21   좋아요 0 | URL
비누로 하는 게 사실 거품도 잘 안 나고 번거로운 면이 있더라고요. 그런데 이게 다 피부로 흡수되어 호르몬을 교란시킨다고 하니 참 난감하네요. 예전에 티비에서 샴푸 안 쓰고 머리 감는 사람도 나오긴 하더라고요. 몇 년 지나니 아무렇지도 않다고 하는데 제가 샴푸를 최소량으로 해서 한 번 감아봤는데 머리까 가렵더라고요--;;

노이에자이트 2011-11-10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언젠가부터 목욕할 때 물만 끼얹고 비누도 안 쓸 때가 많아요.그래도 제 몸에서는 은은한 향기가 난답니다.미남의 향기....

blanca 2011-11-10 22:22   좋아요 0 | URL
노자님, 인증샷 기다릴게요 ㅋㅋ

노이에자이트 2011-11-11 16:08   좋아요 0 | URL
에그머니...무슨 장면을 찍으라는 말씀이신지...19금 발언을 어찌 그리 태연하게 하시나요? 당혹 당혹~

blanca 2011-11-11 21:25   좋아요 0 | URL
노자님도 참, 제가 노자님이 하도 스스로 미남이라고 하셔서 정말 미남인지 얼굴 인증하라는 얘기였는데 19금이라니요--;;

노이에자이트 2011-11-12 16:07   좋아요 0 | URL
음...그냥 상상으로 그려보세요.이기광이 조금 더 나이 들면 저같이 될 거에요.이젠 그림이 그려지시죠?

아이리시스 2011-11-10 16: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블랑카님.. 오리인형 다리가.. 다리가.. 저렇게 예쁜 오리의 다리가..ㅜㅜ
이거 보니까 끝까지 산재가 아니라 우겨왔고, 우기고 있는 삼성이 생각나요. 난자가 손상된 생쥐처럼 되고 있는 거잖아요. 그래도 바디샴푸를 안쓸 수는 없고, 대안은 안나와요, 블랑카님? 이 책, 궁금해요. 나부터 생각해야지 아이는 무슨.. 이라고 적고, 아.. 내 아이..ㅜㅜ

blanca 2011-11-10 22:26   좋아요 0 | URL
저도 삼성에서 이쁜 아이 두고 백혈병으로 죽어간 아버지 기사 생각나더라고요. 수많은 화학물질을 직접 취급하는 사람들은 오죽하겠어요. 가슴이 답답해 오더라고요. 독성물질로 인구가 조절되고 있다는 얘기도 있는 것을 보면 참으로 씁쓸했어요. 일단 우리가 쓰는 모든 것들이 식수로 돌아오니 최대한 안 쓰거나 줄여 써야 겠는데 극소량도 전반기에 걸쳐 호르몬 체계를 교란시킨다네요. 여기에도 나오긴 하는데 소극적으로는 일단 안 쓰고 줄여 쓰며 자신과 가족의 건강을 챙기고 정부와 기업들에 어필하는 적극적인 행동이 뒷받침되어야 한다고 하는데 쉽지는 않지요. 저도 저 표지의 다리 한참 있다 알았어요.--;;

비로그인 2011-12-12 18: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달의 당선작, 축하드려요 블랑카님 :)

리뷰 제목이 뭔가 싶어서 궁금한 마음에 읽었네요 ㅎㅎ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이 떠오르는 책이에요. [침묵의 봄] 읽을 때 처음에는 오호, 그렇군. 이랬다가 점점 지루해지면서... 결국 살충제는 나쁘다! 그리고 BBT는 해롭다! 두 문장으로 정리했던 기억이... 대체 방안을 찾는게 정말 중요한데, 생활 용품은 어떻게 대체할 수 있을까요? 저는 로션/스킨도 안 바르고 머리 감을 때 린스 안 하는 걸로 나름 실천한다고 생각하지만... 꾸준히 유해한 성분을 쓰고 있을 거에요. 크- 난센스에요 난센스.

그러면 이 책에는 구체적인 대안 같은 것도 들어있는 건가요?

blanca 2011-12-12 22:03   좋아요 0 | URL
말없는 수다쟁이님, 저도 환경운동하는 사람들한테 고전이 되어버린 레이첼 카슨 책을 읽으려고 했지만 빌려보려고 잠시 들춰보고 말았어요. 요새는 조금 지루해 보인다 싶으면 선뜻 용기가 안 나더라고요. 아, 대안이요! 물론 구체적이거나 실질적인 것은 많이 없지만 그냥 저 개인적으로 좀 달라지긴 했어요. 프라이팬도 코팅은 안 쓰고 되도록 세제, 화장품은 멀리 하고 있답니다. 그리고 플라스틱 용기에 담긴 음식들은 되도록 사지도 먹지도 않으려고 하고요. 참, 환경운동하시는 분들 중에 샴푸 없이 머리 감고 화장 아예 안하시는 분들도 있더라고요. 샴푸 없이 머리 감는 것 그건 저도 아직--;; 그런데 신기한 게 하다 보면 머리가 적응을 한다고는 하더라고요.

비로그인 2012-01-07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홀함과 치밀함의 접점이 오락가락입니다. 한동안은 모든 화학약품을 끊어내 버리겠다고 다짐을 하기도 하였건만 지금은 화학약품으로 온몸을 도배하고 있습니다. 자외선 차단용 선크림을 바르지 않으면 피부가 상한다는 말에 나의 이번 여름이 오싹해지고(맨얼굴로 땡볕 아래를 한두시간 걷는 것은 일상다반사였으니) 향수를 뿌리지 않으면 허전하여 계속계속 뿌리고, 지금은 손에는 핸드크림 입술에는 립글로스를 바르고 앉았습니다. 결국 모든 물질은 피부를 통해 흡수되거나 쌓일 것인데 흡수되지 않도록 차단하면 다른 식의 변이가 일어나게 되어요. 결국은, 결국은, 결국은, 이것은 시거를 피우며 구강암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가벼운 레종이나 말보로 라이트를 피우며 폐를 한바퀴 연기로 돌려 폐암을 선택할 것인가의 문제가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그런데 댓글을 쓰다 보니 왼쪽에 제 닉네임이, `미천한 사람 주드'로 눈에 확 들어오지 뭡니까(알아요, 토마스 하디!). 결론은, 좋아요, 좋아요, 좋아요, 블랑카님!

blanca 2012-01-08 10:23   좋아요 0 | URL
쥬드님, 그럼요. 제가 한동안 암것도 안하고 얼굴을 내버려 두니까 각질이 말도 못하더라고요. 저는 향수를 안뿌리지만 저는 향수를 뿌린 사람의 반경 안에 들어가 그 냄새를 맡으면 괜시리 기분이 좋아집니다. 이 부분에 관심이 많지만 항상 딜레마를 느낀답니다. 섬유유연제 안 쓰려고 구연산을 쓰다 섬유 유연제만 못한 그 느낌에 실망하기도 하고.

저는 미천한 사람 쥬드를 아직도 읽지 못했어요. 읽을까요, 쥬드님? 자꾸 망설이네요....

비로그인 2012-01-10 12:27   좋아요 0 | URL
오락가락 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 생각하며이젠 이쯤 된 거 뭘 어쩌겠어, 하며, 그나마 머릿결을 좀 더 보호해 준다는 샴푸에 한 달가량을 의탁하기로 했어요.

몸은 썩을테지만 조금이라도 더 생생하게 살아있고 싶어요. 입맛은 가버릴텐지만 조금이라도 더 생생하게 느끼고 싶다는 열망에서, 이렇게 살아있는 것 아닐까요.

미천한 사람 주드, 어찌 읽으실지 모르겠습니다. 하디의 남녀들이 그러하듯 나락으로 늪지로 사면초가의 어둠으로 뚜벅뚜벅. 걸어간 남자의 이야기인데 그것을 읽어버리면다시 돌아올 길을 찾기가 좀 힘들어 지실지도 모르겠어요. 이상한 추천이지요? 제 추천이 좀 이렇습니다. 간단히 '일독을 권합니다' 라고 말하지를 않지요.
 
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리영희, 임헌영 대담 / 한길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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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리영희를 때로 이영희라 불렀다. 그의 세계관과 역사관을 몰랐고 관심도 없었다. 아니, 그의 사상의 세례를 받아야 할 만큼  사회와 맞닿아 있는 지점의 자유를 갈구하는 절박함을 경험해 본 적이 없다. 나는 자잘한 현실을 관념의 구역에 밀어넣고 슬쩍 눙치며 방관하기를 즐겼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니 나는 비겁했다,고 고백할수밖에 없다. 

그리고 마침내 '대화'를 펼치게 되었다. 잠들기 전 책 속에서 자신의 삶을 회고하며 대화 형식으로 들려주던 그의 말들은 밤이면 나의 머리와 마음을 뛰어다니며 흔들리는 배를 탄 듯 멀미를 일으켰다. 그건 걸핏하면 용공분자로, 빨갱이로, 의식화의 원흉으로 매도되었던 그가 회고하는 75년간의 삶이 결국 나의 피를 타고 흐르는 의식의 혈육적 문화역사를 재생하고 흔들어 깨우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나'를 아는 일은 결국 '우리'와 '과거'를 두루마리 풀듯 주루룩 펼치지 않으면 막다른 한계에 머리를 박고 돌아서고 또 되돌아서는 일이 될 수밖에 없다.

 

지식인과 지성인의 경계  

기능적인 지식인에서 현실로 포박해 들어가는 지성인이 되는 길에는 아주 얇은 경계막이 있다. 그 막을 찢는 일 그 자체는 그리 힘들지 않을런지도 모른다. 어떤 계기로 인하여 용기백배해서 그 막을 찢어 발겨 버리고 난 뒤 우리는 우리 삶의 파열을 때로 감수해야 한다.  그러니 지성인이 되는 일은 자신의 삶 그 자체를 제물로 바칠 수도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하는 일과 다름아니다. 편안하고 그럭저럭 굴러가는 나의 일상들과 그 일상들에 저도 모르게 깊이 몸을 담그고 있는 나의 전존재가 일거에 파도에 휩쓸릴 수도 있다는 그 가능성 하나에 우리는 주춤하고 그 경계에서 서성거릴 수밖에 없다. 그 막을 통하여 고통스럽게 '현실'을 엿보는 일은 비겁한 지식인이 감수해야 할 하나의 천형이다. 종국에는 우리는 아파하지도 않고 스리슬쩍 염탐할 수 있다. 결국 이것은 '타락'의 한 형태다. 알았기에 그리고 그 앎에 멈추었기에 우리는 스스로를 지탄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나는 언제나 내 앞에 펼쳐진 형실 상황을 묵인하거나 회피하거나 또는 상황과의 관계설정을 기권으로 얼버무리는 태도를 '지식인'의 배신으로 경멸하고 경계했다.사회에 대한 배신일 뿐 아니라 그에 앞서 자신에 대한 배신이라고 여겨왔다. 이런 신조로서의 삶은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나 그렇듯이 바로  그것이 '형벌'이었다. 
-p.7

리영희는 1977년 저서들로 인한 반공법 위반으로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끌려갔던 기억을 30년이 지나간 뒤에도 잊지 못한다. 대공분실 옛자리인 남영역 앞을 지나가면 지금도 소름이 돋아 눈을 감는다고 한다.  그 형벌은 기억을 통한 감각까지 점령하였다. 진실 앞에서 행동하는 일은 이렇게나 처절한 자기희생적 투신을 요구한다. 나는 그럴 수 없고 그러지 못할 것이다. 대신 그의 희생이 남긴 열매를 생래적으로 얻은 권리로 여기고 주머니에서 흘러 떨어져도 주워담지 않고 그저 지나가 버리는 그런 무감각을 이제는 흔들어야 겠다. 그것은 산모가 흘린 피가 얼룩진 강보에 싸인 것이다. 시선을 맞추고 온몸과 마음을 다해 보듬고 키워야 한다.

 

인간 그 본질로서의 무게  

그의 인간관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자유는 '인간' 생명의 원초적 본성이며 평등은 개개인의 집단적 생존이 형성된 뒤에 생명이 요구하는 '추후적, 사회적 조건'이라고 얘기한다. 이는 결국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어떤 식으로 조화 통합하여야 되는지에 대한 암시를 준다. 인간의 하반신적, 동물적, 물직절 조건을 자본주의로, 상반신적, 인간적, 정신적 자율성을 사회주의로 담아내어 그 둘을 조화시켜 나가려는 노력 그 자체에 의미를 두는 모습은 여즉까지 그를 빨갱이라고 낙인찍어 비난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그를 철저히 오해하고 그의 사상을 오독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는 공산주의도 반공주의도 사상적 자폐증으로 곧 자살이라고 비판한다. 인간의 본성에도 또 그 본성이 충족되고 난 다음의 연민과 사랑을 바탕으로 한 연대에도 그의 시선은 머무른다. 인간을  그 자체로 사랑하는 일이 때로는 비난받을 수 있다는 것은 비극이다. 이기주의는 결국 자멸로 이르는 길이다. 자본주의를 신념처럼 고수하다 쓰나미처럼 연이어 경험해야 했던 그 비극의 현장에서 그의 얘기는 깊은 울림을 가진다. 완전한 자유는 타인과의 경계 위에 걸처져 있다. 손을 잡지 않고는 그것을 실현할 수 없다.  

 

우리의 못남을 돌아보며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권력에 빌붙었던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이 고스란히 미군정의 권력 대리자로 등용되어 분단을 고착화하고 극우 반공주의의 폭압성으로 민족의 주체성을 갉아 먹고 제국주의에 철저히 유린 당하고 있는 역사적 과거에 대하여 그는 통탄한다. 우리의 것은 우리의 것으로 그들의 것은 그들의 것으로 돌려 주어야 하는 그 기본적 일이 이렇게나 요원하게 느껴지는 것은 질곡의 역사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뼈아프게 방증한다. 우리 손으로 찢어야 하는 노비문서, 우리가 우리의 못남을 스스로 부정함으로써 긍정으로 재탄생하는 그 필요불가결한 과정을 망실하고 우리의 상황은 언제나 지극히 가변적이고 의존적이며 불투명하다. 그래서 우리는 서로를 의심하고 비난하고 자학한다. 이건 차라리 하나의 업 같다. 

그는 민중적 공감과 저변의 대중 속 운동의 목표와 방향, 행동양식이 상향적으로 기능했던 모택동식 사회혁명에 감응하는 바가 컸다. 또한 마치 닮은꼴 복제처럼 미국의 분단획책에과 이간질로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어야 했던 베트남이 결국 너무나 자명한 열세에도 불구하고 민족적 지도자 호지명의 기치 아래 통일을 이루어 내고 말았던 사례에 경도된다. 이러한 국제정세의 변화는 그가 국내 정세의 절망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가지는 하나의 등불이 된다. 기본적으로 그는 역사의 전진을 믿는 것 같다. 그것은 결국 인간 본질에 대한 긍정으로 귀결된다. 이러한 국제 정세에 대한 명철한 이해를 기반으로 한 나름의 문제의식, 분석으로 가공한 그의 글은 진실을 나누고자 했던 그의 소망의 결실로 민주화투쟁의 도화선이자 사상적 지주가 된다.

글을 쓴다는 것은 '우상'에 도전하는 행위다. 그것은 언제나 어디서나 고통을 무릅써야 했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영원히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 괴로움 없이 인간의 해방과 행복, 사회의 진보와 영광은 있을 수 없다. 
                                                                                                   -<우상과 이성> 서문 중

 

고통을 무릅쓰지 않고 다가갈 수 없는 것들을 듣는 일은 힘들다.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면죄부를 주어야만 견딜 수 있는 우리네 같은 범인들에게 그의 생은 하나의 비수 같다. 그럼에도 가슴을 들이대는 것은 읽는다는 것이 그가 우상에 도전하고 민족적 미신에 도전한 일을 조금이라도 나눠 갖는 일이기 때문이다. 진실은 피한다고 피해지는 것이 아니기에 우리는 그의 삶을 들어야 한다. 듣고야 말아야 한다.

 

 p.s.  분량과 내용면에서 얼핏 지루한 첫인상을 줄 수 있는데 막상 읽게 되면 그의 입담과 드라마틱한 삶, 편집의 미덕이 어우러져 읽는다,는 행위 자체를 잊게 된다. 1929년 금광으로 유명한 평북 운산 북진에서의 출생으로부터 최근까지의 그의 삶이 현대사와 어우러져 펼쳐지는 장대한 드라마는 하나의 대하 소설 같다. 현대사에 대한 갈증도 더불어 해소할 수 있을 것 같다. 말과 글이 일치하는 리영희가 쉽고 체계적으로 역사적 사실들의 얼개를 짜 보이는 일은 하나의 감동적인 강의를 듣는 경험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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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09-15 00: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때 이분의 책들을 읽기는 했었는데...그저 의무감이었지 되돌아오는 울림은 그리 크지 않았어요.
그런데 얼마전 손석희의 시선집중에서 이분과의 대담이 있었는데,
뻐꾸기 시계가 찬조출연한 그 대담,의외로 재치발랄 참 좋았어요.
다시 읽어봐야지,불끈~!하고 있어요~^^

blanca 2010-09-15 21:09   좋아요 0 | URL
손석희의 시선집중에 나오셨군요. 저는 처음이에요. <태백산맥> 읽고 현대사에 관심을 많이 가지게 되었어요. 그냥 그러고 말았는데 또다시 이 책을 읽으며 저의 비겁함을 조금은 반성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굿바이 2010-09-15 09: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영희선생님의 <우상과 이성>은 제게 정말 불벼락같은 책이었습니다. 물론 워낙 여기저기 일명 쎈(?)책들이 많아서 오히려 선생님의 글이 묻히기도 했지만, 저는 잠 못 드는 밤, 참 많았습니다.
이렇게 극진히, 온전히, 뼛속까지 긁어내며 이 시대를 우는 지식인이 얼마나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blanca 2010-09-15 21:10   좋아요 0 | URL
굿바이님! 하긴 그때 그 시대에서의 리영희샘의 글과 지금의 감상은 사뭇 다를 수밖에 없겠어요...시대의 등불이라는 진부한 표현이 이 분을 그 자체로 표현한 얘기 같아요. 베트남 전쟁사 관련한 책을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만 하고 있어요^^;;

마녀고양이 2010-09-15 15: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상적 자폐증 이라는 문구에 깊은 공감을 느낍니다.

이 책 반드시 읽어봐야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왜이리 안 되는지요.
욕심이 많아서인가봐여.... 역시 좋은 리뷰입니다.
블랑카님의 리뷰를 보면, 어떻게 저런 짜임새있는 글을 쓰는지 종종 감탄하고 맙니다.

blanca 2010-09-15 21:11   좋아요 0 | URL
마기님이 강추하시는 글 보고 대뜸 집어들게 되었어요. 마녀고양이님, 의외로 책장 완전 팍팍 넘어갑니다. 저는 지루할 줄 알고 각오좀 했는데 그럴 필요 없더라구요.^^

기억의집 2010-09-16 2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사에 비겁한 사람 여기도 있어요.^^
리영희선생님의 작품에 열심히 밑줄 치고 포스트잇 붙이고.... 저의 애아빠의 리영희선생님의 글을 읽는 모습입니다. 저는 남편의 모습에 궁금해서 읽어야지 한 게 벌써 몇 년째인지 모릅니다. 블랑카님의 글을 읽고 또 불근! 해야겠는데요.

blanca 2010-09-16 22:25   좋아요 0 | URL
아아아...옆지기님이 그러시군요. 부부가 다 같이 책을 좋아한다는 것만으로도 넘 부러워요. 저는 제가 읽은 책의 감동을 나눌 수가 없어 참 아쉬워요. 리영희 선생의 책은 줄을 그으며 읽을 수밖에 없더라구요. 현대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주시니 넘 좋았어요.

기억의집 2010-09-17 11:22   좋아요 0 | URL
어머, 아니예요. 저의 애아빠는 그 때 이영희 전작을 어쩌다 다 읽겠다고 불을 뿜었을 때였어요. 역사의식이 좀 투철해서...

애아빠의 천국은 집에 와서 소파에 늘어지게 기대 리모콘으로 원격tv 조종하는 거에요. 개인적으로 저 또한 직장 다니면서 책을 많이 읽으라고 권하지도 않고요.

blanca 2010-09-17 19:53   좋아요 0 | URL
쇼파에 드러누워 티비 원격조정 ㅋㅋㅋ 넘 똑같아요.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다 백혈병으로 숨진 박지연 씨의 어머니는 삼성에서 합의금을 받는 조건으로 산재 소송 포기 압력을 받았다고 한다. 치료비로 큰 빚을 진 그는 소송을 포기하지만 뒤늦게 후회했다고 한다. 아이의 죽음을 땅에 묻고 진실을 숨기려는 그들에게 이용당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한겨레21 819호 참조> 

인간은 자유를 누릴 자격이 있으니, 물건 취급 받아서는 안 되며, 존엄성을 가진 존재로 존중받아야 한다.
-p.139  

인간의 존엄에 관한 응시가 특별한 것처럼 보이는 시대에 살고 있다. 물질적 풍요와 사회적 성취가 개인의 미덕을 실증하는 것 같은 환각에 너도나도 취해 살고 있다. 어쩌면 우리가 중시하는 가치를 분배하는 기준에 대하여 묻는 것은 지극히 도발적이고 원론적인 문제로 회귀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존재하는 방식이 곧 그래야만 하는 방식으로 오도되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숨이 막힐 때마다 나의 노력이 부족하지 않았나를 돌아보아야 함을 강요받고 있다.  

하버드 대학의 극장식 강의실에서 천여 명의 학생들 앞에서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찌른 채 정의란 무엇인가를 묻는 그도 사실은 이 사회에서는 혜택받은 소수에 해당된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례적으로 이 책을 집어들게 된 것은 사실 정의가 무엇인가가 진심으로 궁금해서라기보다는 하버드 대학의 뜨르르한 강의를 나도 간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다는 하나의 허영 때문일런지도 모른다. 솔직히 나도 그랬다. 그리고 내용이 명성보다 빈약할 거라 지레 짐작했다. 정의란 무엇인가로 가는 길은 칸트식으로 말하면 전혀 주체적이지 않은 욕망에 반응하는 행위였다.

아리스토텔레스, 벤담, 존 스튜어트 밀, 칸트, 존 롤스에 이르기까지 이름만 들어도 버석거리고 하품부터 나오는 인물들의 사상에서 정의에 관련된 핵심만을 추출하여 착착 들러붙게 설명해 주는 그의 입담은 명불허전이다. 고등학생 때 이런 책을 접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을 정도다. 깊이 그 자체를 놓고 본다면 이론이 있을 테지만 이 책이 강의에 기반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상당히 만족스럽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요체는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 질문을 던질 때 짚고 넘어가는 대목들에 대한 이정표다. 특히 개인의 절대적 자유와 정부의 윤리적 가치적 중립을 지지하는 현대 사회에서 공동체 안에서의 개인의 정체성과 잘 산다는 것에 대한 열린 토론에 대한 주목은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흘려보낸 것들을 뒤늦게 챙겨 보려는 시도처럼 느껴진다. 요컨대 그는 정의에 대하여 고민하는 것을 좋은 삶에 대한 논의를 간과하고는 거의 불가능하고 바람직하지 않다고 역설한다. 이 책은 좋은 삶에 대한 논의에서 출발하여 그것에서 끝마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공리주의 그것의 허점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지향하는 공리주의의 약점은 알려진 바와 같다.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지 않고 행복을 계량화했다는 점이다.  이 공리주의를 주창한 벤담의 죽음과 관련한 에피소드가 흥미롭다. 교수가 강의 시간에 우스갯 소리를 해서 조는 학생들을 깨워주려는 시도처럼 마이클 센델의 얘기는 독자들을 유머로 오히려 바짝 조인다. 벤담은 자신의 시신을 방부 처리하여 보존 전시하라고 유언했다. 그래서 현재 유니버시티 칼리지 런던에 가면 그의 사색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한다. 1980년 국제벤담학회 창설 모임에서는 이 방부 시신이 참석했다. 엽기적인 대목은 그의 두 발 사이에 놓여 있었던 진짜 머리를 학생들이 훔쳐 가 자신들의 요구 관철을 위해 이용했다는 점이다.  

 

인간 간에 사고 팔 수 있는 것들에 대하여 

다음으로 등장하는 자유지상주의는 사실 오늘날까지도 진행중이다. 이는 최소국가론을 지지하고 자유시장을 떠받든다. 공리주의와 자유지상주의는 둘다 자유시장의 홍위병들로 이용된다. 여기에서는 주목해야 할 사례가 제시된다. 미국의 군대가 경제적 교육적 혜택을 받기 위한 하류층 젊은이들로 채워진다는 대목이다. 시장을 이용하여 군 복무를 할당하게 되면 정책 입안자들의 자녀가 연결될 확률은 극히 미미해지고 점점 전쟁을 더 쉽게 일으키고 인명살상을 더 하찮은 것으로 간주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수의 시민과 그들 이름으로 싸우게 되는 군인 사이의 연결 고리가 끊어지는 지점에서는 평화 대신 호전적 기운이 스멀스멀 기어나오게 되는 경향이 있다. 예리한 지적이다. 자유로운 계약 관계에 의하여 돈이 오고 가는 관계가 그 자체로 정의로울 수는 없다는 방증 같다. 초입에 거론했던 삼성의 행태도 이와 연관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돈이 오고 가고 박씨의 죽음이 산업재해가 아닌 것으로 묻힌다는 가정은 그녀를 위시한 투병중인 나머지 직원들의 인간적 존엄성에 대한 거대기업의 대우가 정의롭지 못하고 부당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 한다.    

 

칸트가 말하는 진정한 자유란

자, 이제 우리는 주민들이 그가 산책나오는 모습을 보고 시계를 맞췄다는 그 유명한 에피소드를 가진 칸트로 돌아가 볼 차례다. 그의 인간 존엄에 대한 통찰은 가슴벅차다. 칸트가 인간이 그 자체로 숭고하고 존중받을 귀중한 존재임을 역설한 대목도 보편적 인권 개념의 태동을 알리는 장중한 서막이지만 그보다 자유롭게 행동한다는 것을 재정의한 부분은 꼭 유념해서 들어 둘 필요가 있다. 그가 얘기한 자유로운 인간은 천성이나 사회적 관습에 따라서가 아니라 내가 나에게 부여한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인간이다. 욕구에 반응하여 행동하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전혀 자유롭지 않다. 내가 오늘부터 믹스커피를 끊기로 했다면 그것을 안마시는 것이 진정한 자유를 만끽하는 것이지 욕구에 반응하여 벌써 두 잔째를 들이키고 있다면 지극히 타율적인 인간이란 얘기다.(내얘기다) 동정심에서 나온 선행도 그의 눈으로 보면 불순하다. 어떤 목적을 지향하는 수단으로서의 행동과 다른 인간에 대한 특별한 애착, 공감에서 나오는 행동들도 칸트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것이다. 그는 특정하다,는 어휘를 경멸한다. 엄격한 도덕주의자가 지향하는 절대 보편의 세계는 불가능하고 이상적일 것 같으면서도 지극히 매혹적이다.   

 

노력하면 다 된다고?

 이제 존 롤스가 나온다. 평등한 출발선 그 자체마저도 불신하는 그는 재능있는 사람도 기실은 그것이 도덕적 우연에 불과하다고 역설한다. 노력을 한다고? 그 노력할 수 있는 것도 능력이다. 최선을 다했으니 그것을 받아도 온당하는 말은 그에게 넌센스다. 저자는 한 몫 더 거든다. 성공을 우리 노력의 결실로 여길수록 뒤처진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은 줄어든다,는 그의 지적. 우리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현사회에서 능력위주 시스템이 가지는 맹점에 대하여 직시하게 만드는 그의 지적은 결국 인간의 존엄 그 자체에 대한 응시로 귀환한다. 그러니 칸트와 롤스는 만난다.   

 

자유로운 개인을 붙잡는 지점 

이제 결국 마이클이 강의실에서 천 명을 불러모은 위력을 실감해야 하는 대단원이 오른다. 다 좋다. 개인의 자유를 지지하고 인간의 존엄을 응시하고 그런데 이게 과연 공동체의 선과 어떻게 연결된단 말인가? 상충하는 대목 아닌가? 공동체 속에서 인간의 자유를 어떻게 누리게 해 줄 생각인가 우리는 궁금해진다. 답변은 몽환적이기도 하고 낭만적이기도 하고 물렁거리기도 한다. 

그는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의 입을 빌려 이야기하는 존재로서의 우리가 서사의 탐색으로서 살아가는 삶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그 전에 나는 어떤 이야기의 일부인가에 먼저 답변해야 가능하다고 한다. 도덕적 고민은 내 의지를 드러내는 것이라기 보다는 내 삶의 이야기를 해석하는 것에 가깝다는 통찰은 역사 속 공통체의 일원으로서의 현재의 후손들이 과거의 잘못을 배상하고 사죄해야 하는 근거가 되어 준다. 연결된 지점에서 우리는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개인의 절대적 자유만을 주창하다 보면 우리는 왜 일본이 과거사에 대하여 우리에게 사과하고 배상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거를 찾아 낼 수가 없다. 그것은 그들이 그들이기 위하여 우리가 우리가 되기 위하여 반드시 필요한 통과의례다.   

 

좋은 삶 그 막연하고 아리송한...그러나 의미있는...

우리가 존경하는 것은 자신의 삶을 더 큰 삶의 일부로 이해하고 감당하는 기질이다.<중략> 인격을 갖춘다는 것은 여러 부담을 인식하며 사는 것이다.
-p.330 

결국 마지막은 다시 처음과 맞물린다. 우리는 좋은 삶에 대하여 진지하게 공론화해야 한다. 그 좋은 삶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더 큰 삶의 일부로서이다. 모호하고 두루뭉술한 결론일 수 있다. 그러니 이 책은 다시 물음표를 찍으며 마친다. 수많은 질문들을 촉발하는 불온하고 혼란스러운 책으로서 이 책을 권할 수밖에 없다. 딛고 선 땅이 흔들리고 삶의 좌표가 요동치는 경험은 그 자체로 특별한 것일테니. 질문할 수 있다는 것은 현재의 틀을 부수고 더 넓은 지평으로 나아갈 수 있는 하나의 가능성의 점화일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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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2010-07-21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한창 회자되는 책이라서 관심이 있었지만, 근거없는 편견때문에 미뤄두었던 책입니다.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물음에 명확한 답을 기대하는 저로서는, 좋은 삶을 먼저 짚어야 한다는 말이 김빠진 맥주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매우 현실적인 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좋은 삶이 어떤 것이냐?라는 물음으로 돌아오는데, 아마 개인의 문제가 공동체 안에서 고민되고 해결될 수 있는 여지가 있는 삶이 아닌가 싶습니다.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의 비판> 서문에 쓰인 "인간은 언제나 해결할 수 있는 과제만을 스스로 부과한다..."라는 말이 그러하듯이, 좋은 삶이라는 질문을 던진다는 것은 뭔가 현안을 해결할 수 있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blanca 2010-07-21 21:39   좋아요 0 | URL
굿바이님 저도 내용 완전 빈약할 거라 단정짓고 원래 안읽으려고 했는데 하도 난리들이라 궁금해서 읽어 봤답니다.^^ 그런데 의외로 일단 재미있고 정치철학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쏙쏙 들어오게 해주더라구요. 그리고 아무래도 사례를 아주 적절하고 재미있게 들어주니 딱 강의실에 앉아 있는 느낌이더라구요. 결론은 질문을 던지다 김빠지는 부분도 없지 않아요. 저는 이 쪽 책을 많이 안읽어서 그런지 부담 안가지고 생각 안해 봤던 문제들을 한번 되돌아 보는 기회가 되어 좋더라구요.

herenow 2010-07-22 0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책을 다시 집어들도록 자극하는 서평인데요.
도입부분 완전 공감했습니다.
평소엔 대충 넘어가는 것들에 대해 의미를 되짚어보게 하는 책이죠.
좋은 글 감사합니다. ^ ^*

blanca 2010-07-22 21:13   좋아요 0 | URL
herenow님, 아, 네임이 너무 좋네요. 사진도. 반갑습니다. 소문 난 잔치 먹을 것 없다,는 속담이 무색해질 정도로 저한테는 참 괜찮게 느껴지더라구요. 아무 생각없이 지나가는 것들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갈 수 있어 참 좋았습니다. 대학생 때 이런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면 참 좋았을 것 같아요.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만들어진 모성 동녘선서 102
엘리자베트 바댕테르 지음, 심성은 옮김 / 동녘 / 2009년 2월
평점 :
절판


극심한 산고 속에 아이를 세상에 내어놓고 나는 안도했다. 진통이 더이상 내가 감내할 수 없는 수준임에도 그것은
온전히 나의 것이기에 떨쳐 낼 수 없었다. 나는 그 어떤 곳으로 도망갈지라도 그 몸서리쳐지는 고통의 마침표를 함께 챙겨서
가지고 가야 했다. 그리고 엔딩.  안도하고 또 안도했다. 한쪽 눈을 가까스로 뜨고 나처럼 도톰한 입술을
오물거리며 다가오는 그 무력한, 그 속수무책의 생명체에 어떻게 감동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나는 진통의 와중에도 지르지 않았던 비명을 나의 아기와 마주하며 지르고 말았다. 눈물이 흘렀다. 

여기까지. 나의 모성애는 어쩌면 여기까지였나 보다. 딸내미가 돌까지 나 아닌 그 누구에게도 안기지 않고
두 돌까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밤새 깨고 악을 쓰며 울어대는 저력을 과시했을 때 나는 깨닫게 되었다.
 

모성애가 얼마나 허위적인 개념이고 얼마나 불완전하며 불확실한 것인지. 그리고 비교적 온순하고 안정되어 있다고
착각했던 나의 성격이 얼마나 치사하고 다혈질인지도 새삼 알게 되었다. 주변의 조언을 구하기에는 모두가 너무 힘들고
비슷한 과정을 겪고 있었다. 다 스스로가 모성애가 부족하고 나쁜 사람이라는 새로운 깨달음에 압도되어 상대의 고통을
귀담아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 육아서적들. 한 권을 끝내는 그 동안 만큼은 참고 또 참고 견딜 수 있었다. 육아서적들은
공통점이 있었다. 초기 삼사 년 간 어머니의 역할이 한 인간의 전생을 지배할 수 있다는 것. 그러니 영유아기의 어머니는
자신의 그 절대적인 영향력을 주지하고 그저 무조건 인내하고 최선을 다할 것. 그러니 나는 또 죄책감을 느끼며 아이의 수면습관을 잡아 보겠다고 일지까지 기록해 가며 참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리고 아이가 세 살이 된 지금 나는 깨달았다. 요즘 시중에 나오는 그 수많은 육아서들의 맹점이 기실은 엄마들의 죄책감을
더 자극하고 있다는 것
을. 유아기 때의 중요성이 부각될수록 주양육자의 희생의 강도와 완전함에 대한 강박은 더 증대된다.
아이를 전업으로 돌보든,  조부모에게나 기관에 맡기든 나름대로의 안타까운 아킬레스건은 다 있기 마련이다. 조기교육이
각광받고 유아기 때의 정서적 지적 자극에 대한 과도한 스포트라이트가 가지고 있는 음지는 어쩌면 결정론적인 사고를 조장하여 초중등 자녀를 둔 부모의 열패감을 불러일으키거나 유아를 돌보고 있는 엄마들에게 무조건적인 모성애를 강요하게 되는
것이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이 책의 저자인 엘리자베트 바댕테르는 파리 이공과대학 철학교수로 재직했고 프랑스 전법무장관의 아내로 세 아이를 둔 어머니다. 그녀는 극렬한 페미니스트라기보다는 남성과 여성의 상보적인 역할을 강조하였고 이 책을 통하여 아리스토텔레스부터
이어져 내려온 여성에 대한 모성애의 강요가 어떤 허점과 허구를 가지고 있는지를 프랑스의 역사 사회적 배경 등을 통해
조망한다. 중상류증의 다른집 아이들에게 젖을 물리기 위해 자신의 아이에게 젖을 물리지 못했던 하층민 출신 유모들에 대한 얘기는 사교계의 장식품 역할이 주는 환각에 취해 정작 자신의 아이들은 그 유모들에게 맡기고 돌아보지 않은 상류층 부인들의 얘기와 맞물려 비감어리다. 특히나 에밀의 <루소>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어떻게 여성성의 올가미를 만들고 집 안에 여성들을 유폐시키기 위해 활용되었는 지에 대한 설명은 흥미롭다. 어제는 <만들어진 우울증>에서 박수받고 오늘은 <만들어진 모성>에서 비난받는 프로이트에게 심심한 위로를. 

발자크의 문학작품들, 각종 사회통계 자료들을 적시에 인용하여 시대순으로 모성애에 대한 관념 및 풍조를 고찰하며 흥미롭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작가의 예리한 통찰력이 놀랍다. 다만 팔십년 대에 초판이 나온 만큼 현 상황에 꼭 들어맞지 않는 부분이 있고, 프랑스를 배경으로 한정하였기 때문에 느끼는 위화감, 부성애를 촉구하는 이상주의적이고 뒷심이 부족한 듯한 결론에 약간의 아쉬움을 가져본다.  

내가 없으면 안되는 무력하고 연약한 생명체에 전적으로 희생하기를 강요당하는 것이 전적으로 불합리한 일은 아니다. 다만 모성애도 불완전하고 불안한 감정일 수 있고 그것에 전적으로 의지하여 모든 양육의 책무와 결과론적 책임을 어머니에게 떠맡기지는 말아달라는 것. 또 나쁜 엄마, 혹은 무책임한 엄마라고 스스로를 재단하며 자신의 욕망을 체념하는 데에 익숙해지지 말 것. 이런 전언들은 결국 나에게 가서 꽂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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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체오페르 2010-02-20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하며 리뷰 잘 봤습니다. 다시한번 어머니의 위대함과 당신에 대한 미안함,고마움을 느낍니다.

blanca 2010-02-20 22:03   좋아요 0 | URL
이 댓글이 저를 더 감동시킵니다. 미안함과 고마움이라니 완전 위로됩니다.^^
 
나쁜 사마리아인들 - 장하준의 경제학 파노라마
장하준 지음, 이순희 옮김 / 부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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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불온서적 리스트에 들어감으로써 오히려 마케팅 효과를 누린 책이다.
장병정신교육에 안좋다고 판단되어 군내 반입이 금지되고 회수까지 될 수 있단다.
다 읽고 나서는 조금 허무했다. 신자유주의의 폐단을 지적했다고 해서
그것이 과연 자본주의의 발전에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위험성으로 확대 경고되어야 하는 것인지 의문스러웠고,
그 경고가 나온 호들갑스러운 두려움이 연약한 열등감과 강대국들에 대한 과잉 충성의  발로가 아닌가 해서
씁쓸했다. 사실 우리나라는 이 책에서 언급되는 개발도상국도, 이미 부른 배를 두드리며 신자유주의의 교주로 군림하는
나쁜 사마리아인도 아니지만, 일단 신자유주의의 교리에 동감하고 있으면서 나쁜 사마리아인들이 개발 도상국 부리듯
시키는 일들도 비교적 고분고분하게 하고 있으니 어쩌면 가장 찔리고 아픈 독자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케임브리지대학 경제학과 교수인 장하준 교수가 영어로 쓴 책의 번역본이다.  
사실 사마리아인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르게 부정적인 늬앙스를 가지고 있다. 곤경에 처한 사람을 이용하는 성향이
있는 부정적인 민족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성경에서 얘기되다 강도당한 행인을 도운 에피소드가 부각된 경우이다.
그러니 착한 사마리아인은 역설적으로 사마리아인들이 착하지 않다는 얘기도 되겠지만, 여하튼 여기에서는 그것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차용되었고, 미국,영국 등의 강대국들이 개발도상국들에게 규제철폐와 민영화, 그리고 국제 무역과 투자에 대한
개방이라는 신자유주의의 핵심적인 아젠다를 강요하며 불공정 게임에 끌어들이는 행태를 비난하고 있다.
정작 그들은 자국의 부가가치가 높은 제조업을 육성하는 기간 동안 철저하게 보호무역을 해오다 시장확대의 한계에 부딪히자
개발도상국들에게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문을 다 열어젖히라고 강요하는 격인 것이다. 그는 어리고 연약한 아이들에게
비용을 들여 교육을 시키면서 투자하고 보호하며 생계의 전장에 나갈 것을 유예하는 것은 당장 비용이 발생하더라도
결국 그 아이가 적당한 능력을 갖추는 성인으로 성장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비유로 든다.  
개발도상국들이 자국내 유치산업을 일정기간 보호하는 것은 충분히 타당한 것이며 생산성의 증대에도 결론적으로 도움이 된다.  

날로 강화되고 있는 지적 재산권에 대하여그가 들려주고 있는 이야기들이 주목할 만하다.
인터넷에서 사진 하나를 퍼와도 음악 하나를 올려도 갑자기 경찰서에 출두할 수 있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발달된 무개념 복제문화의 타락에 대한 방증이 아니라 선진국들이 자신들의 아이디어를 독점하고 거기에 접근하고자
하는 개발도상국들의 시도를 어느 정도 차단하기 위한 음모가 숨어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지적소유권 제도가
새로운 아이디어의 창출을 격려하되 사회에는 최대한 낮은 비용을 부과한다는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신자유주의 그 자체보다는 그것을 통해 권력의 헤게모니를 틀어쥐려고 하는 강대국들의 빤한 행태를 비난하고 있고,
거기에 무비판적으로 부화뇌동하는 우를 범하지 않을 것을 조언하고 있다. 이 조언은 알아듣기 쉽고 친절하다.
다만 번역투의 문장이 조금 거슬리고(자꾸 한국인 저자임을 떠올리는 한계때문일 수도), 똑같은 얘기를 반복하여
지루한 감이 있는 것이 한계라면 한계이다. 좌편향이냐 우편향이냐를 가름할 건덕지도 없는 책인 것은 분명하고
기본적인 경제지식을 쌓기 위해서라도 읽어 둘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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