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chinko (National Book Award Finalist) (Paperback) - 애플TV '파친코' 원작/2017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작
이민진 / Grand Central Pub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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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으로 다른 나라에서 산다는 건 잘 견디다가도 한번씩 무릎이 꺾이는 경험을 견뎌야 하는 것과 같다. 역사적으로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속에 아직 제대로 청산되지 않은 숙제들을 안고 있는 일본에서 한국인으로 산다는  건 더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문제들로 더 한층 그럴 것이다. 식민지 시대부터 생계나 강제징용 같은 상황으로 한국을 떠나 일본에 거주하다 해방 후에도 그대로 남아 있게 된 '자이니치'들의 이야기는 차별과 소외의 역사다. 일단 그들의 이주는 여타 다른 나라로의 이민과는 달리 자유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라 상황이나 강제적이었던 경우가 많고 분단된 국가로 인한 국적 선택 문제로 인해 색깔론으로 변질되거나 이용된 경우도 빈번하다. 한 마디로 제대로 재일 일본인의 이야기가 공론화되거나 이야기된 경우는 최근까지도 극히 드물었다. 한국이나 일본에 거주하는 한국인이 아닌,  재미교포 작가가 <파친코>라는 소설로 4대에 걸친 자이니치의 파란만장한 가족의 서사를 다룬 것은 이례적이라 할 만하다. 


이야기는 1910년 한일합병기 부산 옆 작은 섬 영도에서  장애를 가진 청년 훈이 영진과 만나 딸 선자를 낳는 얘기로부터 선자가 유부남이었던 한수를 만나 사랑에 빠져 아들 노아를 갖게 되고 어머니 영진이 운영하던 하숙집에서 만난 이삭과 결혼해 일본으로 건너가 가정을 꾸리는 것으로 전개된다. 엄혹한 일제 식민지 시대에 일본에 피지배 민족으로 거주한다는 건 빈곤과 멸시, 차별의 일상화와 다름없었다. 이러한 한계 속에서 많은 한국인들이 그나마 가질 수 있었던 일자리는 사행산업인 파친코에서 파생된 것이 많았다. 소설의 제목 '파친코'는 이러한 재일 한국인들의 차별적 입지와 고난의 은유다. 이야기의 속도는 가파르고 인물들의 묘사는 생생하다. 개인적 삶이 원하든 원치 않았든 역사적 격랑 속에서 좌지우지되는 모습은 우리의 역사가 수많은 갑남을녀의 생존과 어떻게 어우러져 흘러와 오늘날까지 왔는지에 대한 가족적 서사시다. 


작가가 이미 그 자신이 국외자라는 점은 이야기 속 인물들의 정서를 이해하는 데에 양날의 검이다. 일단 인물들에 대한 묘사와 공감력이 설득력과 핍진성을 띠지만 한국적 정서를 백프로 이해하고 역사적 입지의 취약한 부분을 냉철하게 관조하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예를 들면 재일 한국인들을 지나치게 수동적이고 소극적으로 전형화 하는 대목은 아쉬움이 느껴진다. 이야기를 끌고 나가는 힘이 끝부분에 이를수록 약해지는 감도 아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구한 역사를 끌고 가는 힘이 소수의 엘리트가 아닌 그 파고를 온몸으로 감당하며 저다마의 삶을 최선을 다해 지탱해 나가야 하는 다수의 익명의 평범한 이들의 잊허진 이야기와 만난다는 각성은 이야기의 전면에 유유히 흐르고 있고, 이것은 <파친코>의 큰 미덕이다. 더불어 많은 사람들이 자주 이야기하지 않는 불편한 진실에 대한 접근도 그렇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 태어나 꿈꾸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때로 절망하고 또 다시 일어나 묵묵히 걸어나가다 마침내 죽음 속으로 잊혀져 가는 수많은 그들이 비록 국경을 벗어나 있지만 내 안의 뿌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은 값지고 뭉클한 것이었다. 영웅이 되거나 이름을 드날리지 않아도 저마다의 운명과 그 안에 주어진 과업을 묵묵히 수행해 나가는 그들의 삶이 그 어떤 것보다 감동을 주는 것도 그런 연유에서일 것이다. 마지막 선자가 돌아온 곳에서 선자가 소녀 시절 만나 사랑을 나누었던 한수와의 추억을 회상하는 장면은 애잔하다. 결국 위험한 사랑에 빠졌던 소녀가 일본으로 건너와 그 사랑의 결실을 낳고 키우고 살아나가는 인생의 여정은 피할래야 도저히 피할 수 없었던 자신을 배반했던 사랑과 닮은 역사의 흐름 안에서 흘러간 것이다. 다시 첫문장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다. "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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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8-08-20 08: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blanca님 서재에서 처음 듣는 책이고 처음 듣는 작가인데요. 책소개에서 작가소개 읽어보니까 이력 자체가 무척 특이하네요.
이 책도 참 관심이 가기는 하지만, 저는 blanca님 리뷰가 더 좋네요.
이 책을 읽게되더라도 그 생각은 변함 없을 것 같아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blanca 2018-08-21 02:13   좋아요 0 | URL
저도 처음 접한 작가예요. 완성도면에 있어 아쉬운 부분도 있지만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힘이 있는 작가라 일단 책장이 잘 넘어가더라고요. 이 책을 읽으며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에 대해서도 생각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어요. 댓글 감사합니다. ^^**

감은빛 2018-08-22 00: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에 대해선 얼핏 듣고 번역본을 보관함에도 넣어두긴 했는데,
왠지 구매가 망설여지는 느낌이 있었어요.
어쩌면 한국계 작가가 영어로 쓴 텍스트를 다시 번역한 책을 읽는다는 건,
왠지 뭔가 빠진 것 같고, 어딘가 어색할 것 같은 느낌.
근데 또 원서로는 읽을 실력과 여유가 없어서 시도하기가 어려울 것 같아요.

블랑카님의 감상과 평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blanca 2018-08-22 04:28   좋아요 0 | URL
리뷰 읽어주셔서 감사한 걸요. 아, 보관함에 넣어두셨었군요. 책장이 굉장히 잘 넘어가는 책이에요. 재미있어요. 저도 분량 때문에 부담스러웠는데 금세 다 읽게 될 정도로 이야기의 힘이 있더라고요. 이 책 그 자체도 그렇지만 무언가 어떤 계기가 없으면 놓치기 쉬운 것들을 다시 돌아볼 수 있게 되어 좋았어요.

hnine 2018-09-12 07: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어로 표기되긴 했지만 이 책 제목을 보고 일본의 그 도박게임 빠찡꼬인가보다 담박에 알아차렸답니다 ^^
이 작가의 이전 소설 <백만장자를 위한 음식>을 읽었던 기억이 있어요.

blanca 2018-09-13 03:11   좋아요 0 | URL
(백만장자를 위한 음식)은 어떻게 읽으셨는지 궁금하네요. 안 그래도 읽어볼까 하던 참이었거든요.
 
여름은 오래 그곳에 남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2
마쓰이에 마사시 지음, 김춘미 옮김 / 비채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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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6일부터 19일까지 조금씩 읽었다. 되도록 천천히 제대로 음미하며 읽고 싶은 소설이었다. 이야기 속의 화자이자 주인공인 스물셋의 건축학도 사카니시 도오루처럼 이십대여도 그의 스승격인 노건축가 무라이 슌스케 같은 노년이어도, 아니 이 모든 현재진행형 이야기가 사실은 과거의 회상이었다는 반전 아닌 반전의 시점인 오십대인 중년이어도 다 같이 공감하고 느끼고 배울 것이 있는 진짜 이야기였다. 무엇보다 눈부신 청춘의 매력과 그것의 의미를 가까스로 짚어가게 되는 중년과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노년의 광활한 시계가 눈부시게 촘촘하게 직조되어 있어 갑자기 눈앞이 탁 트인 기분이었다. 어느새 나는 이 아름다운 건축 사무소의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모든 가능성의 영역들이 얼마나 광범위한지, 언뜻 덧없어보이지만 그 현장에 참여했던 모든 사람의 저마다의 삶에 어떻게 각인되었는지를 엿보는 데에 빠져들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제대로 끝내는 것에 대한 것이다. 화자는 "황당할 정도로" 젊지만 그 손끝을 만들어 낸 노련한 선생의 삶의 완결에 어떻게 참여하게 되는지에 대한 묘사다. 표고 1,000m가 넘는 고요한 숲 속, 설계 사무소의 아침을 깨우는 연필을 사각사각 깎는 소리, 커피를 내리는 냄새 등에 대한 묘사의 생생함은 모든 감각을 일시에 깨우며 건축에 문외한인 사람들마저 이 설계 사무소가 이미 칠십 대 중반에 접어든 건축가 무라이를 중심으로 참가하게 된 국립도서관 설계 경연에 어떻게 사력을 다해, 진심을 쏟아붓는지, 그리고 그것이 마침내 어떤 결과를 맞게 되는지에 대해 가슴을 두근거리며 엿보는 심경이 되는 것이다. 중간중간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아스플룬드 같은 불멸이 된 건축가들의 일화들은 곁가지 같으면서도 이야기의 핵심적 주제인 인간과 건축의 접점이 어떻게 조율되고 진화하고 마침내 퇴장하는지에 대한 설득력 있는 예증이 되어주어 어느 하나 버릴 것이 없다. 인간이 잠시 기거하는 공간을 만들어 내는 과정의 그 정성과 진심이 인간과 인간의 삶과 주고받는 것들에 대한 이야기는 결국 생과 사와 시간과 그것들이 스치고 지나가는 흔적들이 가지는 의미에 가만히 다가간다.


"각인된 것은 상실되지 않는다."

이 하나의 문장은 모든 덧없는 것들, 스러진 것들, 끝내 이기지 못한 것들에 대한 충실한 진혼이 될 것이다. 문득 내 삶이 너무 덧없다 느껴질 때, 이 모든 노력이 무의미하고 이 모든 헛됨이 나를 진력나게 할 때, 이 청년이 지켜보고 증언한 한 평범하지만 어떤 숭고한 결기를 끝내 포기하지 않은 노년의 시가 공명할 것 같다. 더불어 번역의 힘은 우리 말의 그 건축과도 닮은 정치한 아름다움을 상기시킨다. 매해 돌아오는 여름이면 이 아름다운 이야기가 기억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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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축복
켄트 하루프 지음, 한기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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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종 라떼를 텀블러에 담아 사 마셨던 집 앞의 자그마한 커피숍 여주인은 이사 나가던 날 진심으로 서운해 했다. 아직 아기 티가 나는 둘째 아이를 이제 더 이상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을 빌어. 많은 얘기를 나눈 사이는 아니었지만 어느 날 울고 나와 늦게 커피 주문을 받는 그녀에게 하지 않은 질문은 우리 사이를 조금 좁힌 것도 같다고 생각했다. 아지트처럼 가곤 했던 도서관의 따뜻한 사서 선생님은 갑작스런 퇴직 앞에서 손수 믹스 커피를 나에게 타주며 섣불리 작별 인사를 하지 않았다. 일상이었던 나날들과 작별하며 그렇게 나이가 든다. 정말 대단치도 아무렇지도 않았던 시간들이 뒤돌아 보면 거기 그렇게 다른 평행 우주의 차원에서 과거의 나를 품고 무한 반복될 것만 같다.



아까 상점 앞에서 내가 울었던 것 말이오. 나로 하여금 울음을 터뜨리게 한 그 일 말이오. 거기서 내가 보고 있던 것은 바로 내 인생이었소. 어느 여름날 아침 앞쪽 카운터에서, 나와 다른 누군가 사이에 오간 사소한 거래 말이오. 몇 마디 말을 주고받는 것. 그냥 그뿐이었소. 그런데 그게 전혀 쓸모없는 일이 아니었던 거요.

-켄트 하루프 <축복> 중에서



이야기는 작가 켄트 하루프가 설정한 가상의 아름다운 마을 홀트에서 암으로 죽어가는 한 노인을 중심으로 그의 곁을 지키는 늙은 아내와 나이 든 딸, 이웃 조손 가정, 마을에서 입지를 잃어가며 가족에게도 소외되는 목사의 나날들이 교차하고 만나며 풀려 나간다. 대드의 시선은 자신의 과거의 삶을 반추하는 것과 이웃들의 보여지는 현재를 끊임없이 오고가며 마을의 서서를 완성한다. 이루지 못한 사랑들, 가족 간에 풀리지 못한 숱한 오해와 실망은 그 자체로 온전히 켜켜이 쌓여 각자의 삶의 한 장을 이룬다. 작가는 섣불리 끼어들지도 상황을 재단하지도 않는다. 대신 읽는 이들은 이 마을의 지극히 평범하게 넘어지고 절망하고 또 다시 묵묵히 나날의 숙제를 해 나가는 그들을 통해 우리를 보고 우리의 과거를 되짚고 미래를 상상하게 되며 켄트 하루프가 하고 싶어했던 얘기에 저도 모르게 젖어들게 된다. 산다는 일의 그 지리멸렬한 일상이 가지는 지엄한 무게가 이렇게 아름답게 형상화될 수 있다는 사실에 뭉클했다.




8월 어느 날 밤의 일이었다. 대드 루이스는 그날 새벽 세상을 떠났고 이웃집 어린 소녀 앨리스는 저녁에 길을 잃었다가 어둠 속에서 마을의 가로등 불빛을 보고 집을 찾았다. 그렇게 그 아이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로 돌아온 것이다.

그리고 가을이 되면서 날씨는 차가워지고 나뭇잎이 졌으며, 겨울이 되자 산맥에서 바람이 불어왔고 홀트 카운티의 고원지대에는 밤새 폭풍이 불고 사흘 내리 눈보라가 쳤다.

-켄트 하루프 <축복> 중에서




대드 루이스의 마지막은 <스토너>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조용하고 평화롭고 슬픈 죽은 자의 시선과 그의 곁을 지키는 산 자들의 시점은 섬세하게 얽혀 장엄한 끝의 시간을 완성한다. 사는 일을 쓰는 것과 그것의 마침표를 언급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통과하는 일인데도 언제나 놀랍고 항상 슬프다. 이야기는 그것을 뛰어넘어 보려 하지만 그 주위를 맴돌며 한계를 인정할 때 가장 빛난다.


오늘도 사라지는 시간들. 여전히 주워담고 싶은 말들. 되돌리고 싶은 실수들. 그게 사실은 축복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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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아주 먼 섬
정미경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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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일도 사는 일도 고단하고 허덕일 무렵 이 이야기가 왔다. 정미경은 이 작품을 미완의 유작으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차마 그녀가 온몸을 삭아내리며 써내려 간 이 이야기를 쉽게 읽을 수 없었다. 쓰는 일을 때로 부수적인 것으로도 가능하다고 여겼던 나의 오만이 수만 가지 결 속에 웅크린 그 결코 스러지지 않을 엄중한 실재 앞에서 무너졌다. 그녀 앞에서 이야기는 장치에 불과할 수 있다는 깨달음은 곁가지였다. 그 이야기를 지탱하고 그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것은 그녀의 명징한 처절한 언어였고 그것은 쉽게 치기로 호기로 쓰여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그녀를 삭아내리게 하고 태워버리는 것이었다.


흘러가는 건 시간일까. 아니면 살아 있는 것들이 그물처럼 얽혀 있는 시간의 눈금 위를 걸어가는 건가.

-p.7


시작의 문장에서 나는 흠씬 두들겨 맞는 기분이었다. 결국 이미 짜여진 시간의 날줄과 씨줄 위를 걷는 것이 삶이라면 그것은 얼마나 처연하고 허무한 것인가 하고. 이 문장은 낯설지 않았다. 그렇다면 수긍하는 지점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당신의 아주 먼 섬>은 그렇게 쉽거나 단순하지 않다. 그저 운명에 몸을 내맡기고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그러한 사람들의 절대 숙명의 엘레지가 아니다.


거의 매일 이곳으로 오지만 풍경은 매번 달라진다. 문득 뒤를 돌아보면 내가 걸어오지 않았던 또다른 풍경이 보인다. 애잔하게 나부끼는 삘기, 하늘, 바다, 섬과 섬, 섬 뒤의 섬. 정모에게 이것들은 풍경도 색채도 아닌 시간이다. 언젠가 이 시간은 멈출 것이다. 그때도 바람은 남아 있을 것이다.

-p.58


돌아보면 항상 그렇다. 결국 시간. 모든 사람, 공간, 사물은 결국 그 시간의 풍화로 해체된다. 시간의 결은 예리하고 엄혹하다. 그것이 남길 것에 항상 회의했다. 바람이 남아 있을 것이라는 작가의 말이 마치 예언 같다. 무겁지도 대단치도 않은 바람이 남아 그 존재가 살아냈던 시간을 증언해 줄 것이라는 예언은 저릿하게 아름답다. 


섬으로 돌아온 정모가 꿈꾸었던 세상에서 하나뿐인 소금도서관은 과연 시간의 풍화에 견뎌낼 수 있을까. 삶이 그러했듯 확실한 것은 없다. 전적으로 옳은 것도 언제나 빛나는 것도 없는 게 삶이지만 그래도 돌아보면 그게 생이었을 것이다.


"속 끓일 것 없다. 지나고 보니 아픈 것도 낙이고 힘든 것도 낙이야."

-p.176


팔십 년을 넘게 산 할미가 이십 년을 채 살지 않은 소녀에게 하는 이야기는 사십 년을 산 나에게 들어와 박힌다. 이제야 이 할미의 이야기를 가슴으로 이해하기 시작한 나이에 상실이 없는 삶이란 꿈꾸어서도 안 된다는 뒤늦은 체감의 지점에서 나는 오늘도 딛고 선 땅이 흔들리는 것을 느낀다. 이것은 위로가 되는 이야기다. 앞으로도 경험해야 할 수많은 상실과 고통의 진동이 파르르 전해져 온다. 견딜 수 있을거야. 그래야 비로소 늙어 죽을 수 있는 것이다. 늙어 죽는 자는 전사다. 


작가의 남편이 말미에 붙인 발문이 비로소 미완의 작품의 마침표를 찍는다. 갑작스럽게 사랑하는 아내이자 작가를 잃은 그가 다시 덧붙인 정현종의 <견딜 수 없네>는 그의 아픈 상실을 대변한다. 차마 표현할 수 없었던 수많은 답답한 감정이 시인의 언어를 만나 마침내 흘러나온다. 


<중략>

흘러가는 것들을

견딜 수 없네.

사람의 일들

변화와 아픔들을

견딜 수 없네.

<중략>

-정현종 <견딜 수 없네> 중



나도 사실은 견딜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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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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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한 하늘, 이국의 언어. 분명 아름답고 찬란한 구석이 있지만 늙어버린 나는 뭔가 내내 불편하여 서성이게 된다. 그건 내가 들어갈 수 없는 '풍경'의 환시 같은 거다. 나는 구경꾼, 손님, 방랑자, 깍두기다. 나의 눈빛은 내내 불안정하고 숨결은 거칠다.

나는 아무래도 여기에서는 행복할 수가 없다.


내가 나온 곳으로부터 내가 결국 가 닿아야 하는 곳으로 오랜만에 이 책이 왔다. 모국어란 때로 참 엄정하다. 내가 무시하는 것들, 내가 지나친 것들을 적확하게 지적한다. 떨칠 수 없는 모정과도 닮았다. 늙은 엄마는 장성한 자식을 다르게 대하지 않는다. 학교 가방을 처음 메고 나간 아이처럼 하지 않아도 되는, 해도 별 수 없는 말들을 주워섬긴다. 아이는 다 흘려듣는 듯하지만 그 말들은 차곡차곡 쌓여 아이에게 무게를 더한다. 내가 그렇다. 그 어떤 내용이라도 이러한 모국어라면 나에게 결국 관통하여 들어와서 남고야 마는 완강함이 있다. 나는 도저히 저항할  수가 없다.


'지난봄, 우리는 영우를 잃었다.'는 문장은 <입동>을 시작하는 이야기가 아니면서 그 중심에서 완강하게 버티고 있다. 다섯 번의 이사 끝에 부부가 당도한 곳은 안정적인 보금자리가 아닌 또 하나의 상실을 담보한 허공이었다. 차곡차곡 열심히 벌어 외부의 시선으로 볼 때 점점 그 중심으로 접근하고 있다고 여겼던 안도감은 어이없는 사고로 일거에 부서지고 만다. 시시하고 안온한 일상조차 기적이자 어마어마한 붕괴 지점을 눈가림하고 있는 허룩한 이음매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이 평범한 부부의 이야기는 다리를 후들거리게 만든다. 누구나 이러한 상실과 이러한 상실을 경험했을 때의 타인들의 몰이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그 잔인한 현실에 대한 자각의 지점 때문일까? 담담한 문체가 뼈로 스민다. 부부는 그 상처로부터 나아갈 수 있을까?, 라고 묻는 지점에서 현실은 그리 허룩하지 않음을 작가는 넌지시 이야기한다. 시간이 모든 것을 이기고 나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김애란의 시선은 상실과 소외로 가 닿는데 그 뻗침이 작위적이거나 연민을 담보한 것이 아니라 그냥 그 속으로 스며 따뜻하게 이동하다 보니 그 경계를 자연스럽게 허물어뜨려 공감하게 하는 힘이 있다. 조손가정의 아이가 우연히 만나게 된 유기견과 함께 지내게 되며 그 개의 아픈 마지막을 동행하는 이야기 <노찬성과 에반>, 다문화 가정의 아이가  노인 폭행 사건의 방관자가 되는 이야기를 엄마의 시선으로 그린 <가리는 손>은 다 같이 아직 채 성장하지 않은 소외 계층의 아이들이 어떻게 소극적 악에 무감하게 되는지가 설득력 있게 그려져 있다. 우리는 무조건적 선을 기대하며 최소한의 선조차 제공해 주지 않은 것은 아닌가 하는 자성을 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마냥 찬란해야 할 것만 같은 젊음을 누리지 못한 채 취업 시장의 어둑한 곳에서 분투하고 있는 젊음에 대한 작가의 천착은 여전히 유효한 듯 <건너편>에서는 공무원 시험 장수생이 가정을 이루고도 결국 자신이 지향했지만 한없이 거절당했던 그 지점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하는 모습이 생생하다. 중년을 향해 가는 그 수많은 젊음들은 거기에서 그렇게 작가의 방식대로 늙고 성숙하고 살고 있어 정이 든다. 흔들리고 절망하고 그럼에도 그 기적적인 일상성에 매몰되지 않으려 애쓰는 그들이 기특하다.


그녀의 애도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어디로 가고 싶은신가요>에서 제자를 구하려다 떠난 남편에 대한 원망은 그 남편이 '죽음'으로 뛰어든 것에 대한 원망이 아니라 '삶'이 '삶'에 뛰어든 남편의 시선으로 비로소 진화하는 마지막 이야기다. 그것은 분명 많은 설명을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다. 삶은 언어로 담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시간성 안에 걸린 그 이야기는 끊임없이 환기되고 복기되고 다시 이해되며 그렇게 비로소 마침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니. 섣부른 치유와 화해와 이해를 강요하지 않는 담백함이 빛난다. 그녀의 이야기가 날아서 들어온 이유다.


나는 내일도 또 실망할 것이다. 탄생으로부터는 또 하루 더 멀어지고 죽음에 하루 더 가까이 가고 사람들의 거죽은 더욱 두꺼워지고 나의 거죽은 더욱 허룩해질 테니까. 그럼에도 이러한 이야기가 있어 참 많은 위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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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8 22: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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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19 02:1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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