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live, Again (Library Binding)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 Center Point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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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이듦이란 참 묘하다. 그 사람이 가졌던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욱 강조되는 경우가 빈번하다. 중장년때 교육과 사회적 시선 때문에 억눌렀던 여러 고약한 기질이 노년에 드러나기도 한다. 자기다움은 이제 더 이상 영원히 숨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지점으로부터 더욱 진하게 표출된다. 애거서 크리스티는 이것이 오히려 그래서 다행한 일이라 했다. 우리의 올리브 키터리지라면 애저녁에 그녀의 오지랖, 성마름, 고집불통의 성정으로 유명했으므로 그녀의 노년은 더욱 다채로울 것이라 짐작 가능하다. 


열세 편의 이야기는 그녀의 재혼 상대(그렇다, 그 유명한 약국 이야기의 주인공이었던 전남편 헨리의 죽음 후 올리브는 마을 주민 잭과 재혼에 성공한다) 잭의 "체포"로부터 슬슬 발동을 걸기 시작한다. 아내와 사별하고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잭이 우연히 교통 경찰의 단속에 걸리는 에피소드에 그의 삶 전체를 농밀하게 압축시키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능력은 여전히 놀랍다. 그녀는 서너장의 짧은 이야기에 한 사람 전부의 인생을 밀어넣을 수도 있다. 우리는 이 짧은 이야기로 올리버의 재혼 상대를 생생하게 그려볼 수 있다. 평범하지만 고지식하고 올리브 같이 세고 기이한 여자도 포용할 수 있는 넓은 품을 상상한다. 


십 대 소녀가 파트타임으로 청소일을 하며 경험하게 되는 묘한 이끌림을 다룬 이야기 <Cleaning>은 그녀가 어떤 식으로 자신의 상실과 성장을 소화해내는지에 대한 과정에 대한 섬세한 묘사이기도 하다. 소녀가 한 행동, 소녀가 느낀 감정은 올리브의 시선을 통과하지는 않지만 그 자체로 설득력을 갖는다. 터무니없어 보이는 그때의 치기들에 대한 묘사는 우리가 잊어버렸던 그것들을 떠올리게 한다. 


<Motherless Child>는 올리브의 장성한 아들 가족이 그녀의 집을 방문하여 머무르며 일어나는 좌충우돌을 통해 부모가 되어 자녀를 키우고 그 자녀를 독립시킨다는 것이 가지는 의미를 톺아보게 한다. 성장한 아이들은 부모와 불화하고 부모의 마음에 차지 않는 배우자를 데리고 온다. 온화하고 따뜻한 정기적인 재회의 풍경은 올리브의 것이 아니다. 그녀가 종반부에 불현듯 비호감 며느리가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올리브 자기 자신을 빼닮았다는 것을 깨닫는 반전이 재미있다. 아들은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엄마와 꼭 닮은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그 아들은 바로 본인이 그렇게 키운 것이다,는 각성은 올리브를 전율케 한다.


죽음을 앞둔 예전의 제자를 찾아가는 올리브는 더 이상 훈계하거나 조언하려 들지 않고 죽음 앞에서의 두려움을 가감없이 공유한다. 이러한 공명은 이 이야기들의 배경인 작은 해안 도시 코스비의 아름다운 자연 풍광에 대한 반짝반짝한 묘사와 어우러져 진한 감동을 자아낸다. 마지막 2월의 빛의 아름다움에 함께 감탄하는 대목은 근사한 마침표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스의 이야기는 마냥 동화스러운 것이 아니다. 경제적 격차, 지역색, 정치관이 충돌하며 빚어지는 그 불화의 지점을 그녀는 잊지 않고 포착한다. 그 불통의 지점은 그러나 끝이 아니다. 그녀의 인물들은 그것이 몰고온 그 사소한 오해와 반목을 성찰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로 손을 잡고 서로의 고충, 상실을 나누려 노력한다. 그러한 성의와 노력은 우리가 아무리 살고 또 살아도 도저히 알 수 없는 삶과 죽음의 신비를 공유한다는 더 높은 차원에서의 연대에서 가능할 것이다. 항상 정력적이고 에너지가 넘칠 것 같았던 올리브가 점점 신체적으로 정서적으로 죽음으로 향하는 길로 발을 딛는 여정에 대한 묘사는 숨을 턱턱 막히게 한다. 우리 모두가 걸어야 할 그 미래상을 우리의 올리브를 통해 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도 여전히 올리브다운 올리브는 건재하는 것으로 작가는 아량을 발휘한다. 죽음에 대하여 삶이 남긴 그 숱한 부스러기들을 끊임없이 상기시키지만 그렇다고 삶 자체를 폄하하거나 무의미함으로 쓸어담지 않는다. 그것은 올리브의 힘이기도 하고 작가 자신의 삶과 사람들에 대한 근원적인 애정과 신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다. 


여전히 올리브의 목소리는 귀에서 쟁쟁거린다. 그 다음의 이야기를 기대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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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9-12-12 13: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그 다음의 이야기가 있을 줄은 몰랐는데 여기 이렇게 있네요! 게다가 또다른 이야기들로 생생하게 말입니다. 저는 번역본 기다렸다가 읽을래요. 너무나 기다려지는 책입니다.

blanca 2019-12-12 17:12   좋아요 0 | URL
제가 아마 다락방님 덕분에 올리브 키터리지 읽었을 걸요? 아, 너무 좋고 너무 짠하고 막 그래요... 이제 오늘 부로 새 책을 살 명분이 생겼습니다. ㅋㅋ

목나무 2019-12-12 15: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올리브 키터리지>에 반해 이 작가의 책은 무조건 전작하겠다 마음먹었죠. 그리고 번역된 책들은 구입은 다 하고 두 권 정도 아직 읽지 못하고 있는데... 아~~ 이 책은 언제쯤 번역되어 나올지.... 기다림의 설렘과 즐거움을 맛볼 수 있게 이렇게 미리 귀뜸해주셔서 감사해요 blanca님~ ^^ 기다리는 동안 읽지 못한 작가의 나머지 두 책도 읽으며 행복하게 기다려야겠어요. ^^

blanca 2019-12-12 17:14   좋아요 1 | URL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정말 작가인 것 같아요. 저도 전작을 해보겠다고 결심했었는데 중간에 그만둬서 어떤 책을 읽고 안 읽었는지 감이 잘 안 온답니다. <올리브 키터리지> 드라마도 진짜 좋대요. 오, 그 기다리는 기분 알지요. 그런 작가가 있다는 건 큰 행복인 것 같아요...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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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길어진다고 해서 다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오히려 한정된 시간, 분량 안에 집적해야 한다는 채근이 더 농밀하고 말해져야 할 것을 다 담고 있는 경우도 있다. 앤드루 포터는 그것을 영리하게 포착한 작가다. 구태여 덧붙이지 않아도 중언부언하지 않아도 정말 중요한 이야기는 그 이야기가 담겨 있는 시점을 예리하게 포착한다면 반드시 할 수 있다. 그리고 듣는 사람은 화자가 그러했는지 아닌지를 직관적으로 알 수 있다. 

 

"로버트가 마침내 내게 말을 걸어온 것은..."으로 시작하는 표제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은 어쩌면 아주 뻔한 불륜 스토리가 될 수도 있었다. 젊은 여학생과 노교수의 로맨스는 숱하게 반복되어 온 서사다. 성차, 연령차, 심지어 위계의 헤게모니까지 개입하는 이 설정은 전형적이지만 우리의 복잡하고 굴곡어린 삶의 층위의 속살을 여지없이 드러낼 수 있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미 많이 살아버린 사람과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전망을 앞둔 이의 만남은 시간이 가로지르는 삶의 어떤 단면을 극명하게 대조하여 보여주기 좋은 장치다. 앤드루 포터는 적절하게 힘을 주고 빼야 하는 지점을 의식하며 되도록 뒤로 물러나 로버트와 '내'가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많은 것들을 공유하지 않아도 나눌 수 있는 그 은밀한 교감을 독자가 스스로 알아차리도록 만든다. 일주일에 한번 결혼할 전도유망한 남자가 있는 여자가 나이 든 교수와 절대 넘어가지 않는 그 팽팽한 선과 통념의 경계 안에서 그 누구도 이 둘을 결코 비난할 수 없게 되는 공감을 자아낸 것은 작가의 저력일 것이다. 


소년의 시선으로 붕괴되는 아버지의 삶과 어머니와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회상하는 <코요테>에는 설명하기 힘든 서글픈 아름다움이 있다. '회상'은 앤드루 포터 이야기의 근간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기억은 독자의 허를 찌른다. 사실 그건 이랬던 거야. 라고 마치 약올리는 듯한 반전이 곳곳에 있다. 기억은 왜곡되고 현재 시점에서의 과거의 복기는 언제나 허술하고 맹탕이고 왜곡되어 있어 진실의 맹점은 언제나 우리를 가격한다. 아버지는 떠나고 어머니는 남고 소년은 성장한다. 아버지의 나이가 되어 다시 그 시간을 되돌아보면 소년은 남은 어머니보다 떠난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하고 공감하게 된다. 그렇게 소년은 상실을 치유하며 어른이 되어간다.


"우리가 열여섯 살이던 그해 봄"을 회상하는 <외출>에서 스치듯 지나간 아미시 공동체 소녀와의 사랑은 "아래쪽에 무엇이 있는지 염두에조차 두지 않았던 우리의 대책 없음에, 우리의 눈먼 행동에 아직도 몸이 떨려온다."고 마침표를 찍게 한다. 작가는 또래 집단에서 소외되는 소년, 사회 전체적으로 고립된 아미시 공동체 출신의 소녀가 만나게 함으로써 사회적으로 소외된 외톨이들의 교감과 성장통이 남기는 상흔을 섬세하게 형상화한다. 이 둘이 만난다고 해서 완벽하게 소통하는 것도 아니다,라는 차가운 깨달음과 함께. 뼈아픈 성장이 남기는 아련한 추억은 남아 예술이 된다. 


<코네티컷>에서 어머니가 이웃 부인과 가진 관계의 색깔 또한 그렇다. 둘은 동시에 각자의 상황으로 불행했고 이 시점에서 나눈 관계는 사회적 통념에 어긋난다. 여지없이 소년은 이것을 기민하게 알아챈다. 어떤 상식, 통념, 기대를 허물어뜨리고 생의 속살을 알른알른 내비치는 앤드루 포터의 시선은 가닿지 못하는 곳이 없다. 그의 이야기의 힘은 여기에서 나온다.


이야기는 해도 해도 끝이 없다. 꼭 해야 하는 이야기, 미처 하지 못한 말들을 제대로 할 수 있다면. 그 이야기는 언제나 새롭고 뭉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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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9-11-13 12: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몇 년 전, 21세기북스 출판사의 것으로 이 책을 읽었어요. 다 좋았는데 표제작이 제일 좋았습니다.
너무 안타깝고 아름다운 사랑 같아서 마음이 아팠었죠.
남자 교수의 절제된 사랑이 존경스러웠고... 그의 죽음을 나중에야 알게 된 여 주인공이 통곡하며 우는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그땐 남편의 존재 따위를 의식하지 않고 실컷 슬퍼할 수 있는 용기를 갖고 있었던 거예요.
여기서 만나니 반가운 책입니다.


blanca 2019-11-14 12:47   좋아요 0 | URL
페크님, 이미 읽으셨군요. 댓글 읽으니 그 내용이 연상되어 또 뭉클해집니다. 명작이란 이런 건가봐요...
 

동네 서점은 아주 성실하다. 이를테면 아이 문제집을 사다 혹시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있어요? 하면 반드시 그 책의 정체를 파악하고 재고를 확보해 둔다. 그래서 잊어버릴 때쯤 그 책을 발견하게 한다. 그 책을 사면 다시 빈 곳에 똑같은 책을 채워둔다. 내 뒤에 누군가가 이 책을 사 간다면 다음에도 또 이 책은 반드시 돌아온다. 설령 아무도 사지 않을 책이라도 주인에게 어떤 강고한 철학이 있는듯 누군가 찾는 책은 반드시 다음에 있다. 그 사람을 보면 어떤 감동이 느껴진다.

지금 표제작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읽으며 감탄하는 중이다. 작가 이력을 확인해보게 될 정도다. 레이먼드 카버와 체홉과 줌파 라히리가 한곳에서 회합하는 느낌이다. 좋다고 소문난 책은 반드시 읽어볼 가치가 있구나. 이 정도면 잊지 않고 이 책을 읽어야 할 부책감을 안겨준 서점 주인장에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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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9-11-07 18: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만 읽으면 무슨 물리학 책 같은데 말입니다.
저는 동네서점 가 본지가 언젠지 모르겠습니다.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고. 요즘 동네 서점이 옛날 아날로그 시대의
그것이 아닌 것 같은데 그 시절이 그립긴 합니다.
예전에 단골 서점 아저씨가 조카 대하듯 저를 맞아주곤 했는데...ㅠ

blanca 2019-11-08 09:49   좋아요 1 | URL
이 책 있냐고 물으면 다들 표정이 ㅋㅋ 저도 제목 보고 물리학 책인 줄 알았습니다. 어릴 때만 해도 정말 동네 서점들이 활황이었지요. 이제는 정말 찾기 힘들게 됐습니다. 중고서점도 그렇고요. 약속 장소를 그런 곳으로 정하곤 했는데 다 옛말이 되었다는 게 참 서글프네요.

다락방 2019-11-07 21: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너무나 좋아하는 단편입니다, 블랑카님 ㅜㅜ

blanca 2019-11-08 09:50   좋아요 0 | URL
헉, 다락방님 이미 아셨어요? 이 단편을! 와, 저 이것 읽다 아까워서 중간에 접었잖아요. 이 작가 천재 아닙니까. 게다가 데뷔작. 사람들 마음 속에 들어갔다 나온 것 같아요...

psyche 2019-11-08 00: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동네책방. 서점이 없는 동네 (블랑카님도 잘 아시겠지만)에 살다보니 더욱 부럽네요.

blanca 2019-11-08 09:52   좋아요 0 | URL
프쉬케님, 하지만 그곳은 또 도서관이 그리고 아마존이 있잖아요. 저는 요새 사실 프랑스 자수에 빠져 손에 바늘 찔려 난리랍니다. 프쉬케님 손으로 만드시는 것에 재능있으시잖아요. 그래서 프쉬케님 떠올렸어요...
 
2019 김승옥문학상 수상작품집
윤성희 외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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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은 중언부언할 수 없다. 섣불리 거창해질 수 없다. 한정된 지면과 시간 안에 하고 싶은 이야기와 하려는 말을 최대한 응축하여 쏟아부어야 한다. 그래서 쉽게 성공하기 어렵다. 할 수 있거나 실패하거나 둘 중 하나다.


그런 면에서 이번 김승옥문학상 수상 작품들은 명료하고 농밀하다. 하려는 이야기가 모호하거나 지리멸렬하지 않지만 읽는 자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이고 핍진성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쉽고 재미있게 읽히고 서걱거리지 않은 반가운 이야기들이었다. 한동안 너무 어려운 문학, 모호한 메시지, 파격이 진부하게조차 느껴지는 이야기들이 쉽게 접근하기 어려운 시간들이 있었다. 다시 다가갈 수 있는 이야기들이었다.


대상작인 윤성희의 어느 밤의 화자는 "일주일 전, 나는 아파트 놀이터에서 킥보드를 훔쳤다."로 재기발랄하게 시작한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녀는 삶의 그 수많은 고충들에 이미 시달릴 대로 시달린 할머니라는 반전을 가지고 있다. 예기치 않은 사고에 구원자가 되어준 청년과의 조우는 저마다의 상실과 고통의 몫을 소화해야 하는 양세대의 화해와 소통의 지점을 확인시켜 준다. 아이의 새 킥보드를 어이없이 도난당한 경험이 떠올라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어디에선가 그 킥보드를 타고 있을 그 누군가가 연상됐다.


권여선의 <하늘 높이 아름답게>에는 종교 공동체 안의 나이 든 여인들의 시선이 교차하고 중첩한다. 가장 가난하고 불행해 보였던 한 여인의 죽음은 뜻밖의 성찰의 시간을 가져온다. 저마다의 사적인 삶은 사회적인 여성에 대한 편견과 차별의 역사와 분리될 수 없었다. 여자 노인으로서 한국 사회의 격랑을 통과해 온다는 것이 가지는 그 무게와 의미가 조명되는 순간이었다. 


편혜영의 <어쩌면 스무 번>은 여전히 편혜영 답다. 울울한 정서, 인간의 내면의 그 어두운 욕망, 기만. 큰 사건 사고가 없어도 절대 늘어지거나 긴장이 늦추어지는 법이 없는 그녀만의 서사의 그 팽팽함은 여전하다. 여기에 병든 노인의 부양에 관한 문제가 드러난다. 그것이 한 가족 구성원들의 은밀한 욕망과 패배감과 연결될 때 빚어질 비극의 깊이는 상상불가다.


개인적으로 초기에 줄거리를 따라잡기 힘들었던 황정은의 <파묘>가 참 좋았다. 쉽게 들어오지 않는 등장인물들의 실명의 명명이 가지는 의미가 차차 밝혀지고 '파묘'라는 일회적 사건을 둘러싸고 노출되는 한 가족사의 요약이 가지는 응축도가 대단했다. 단 한 문장도 낭비되거나 부족한 면이 없이 예리하게 조탁되어 이야기의 얼개를 이룬다. 


최은미의 <운내>는 이 작품집에서 가장 파격적이고 놀라운 이야기였다. 두 소녀의 성장기에는 어떤 무시무시한 한국적, 무속적인 은밀함이 스며 있다. 하지 않고 참은 이야기의 여백에 끼어드는 상상력의 여파가 두려울 정도다. 쓰는 행위에 이미 읽을 자들의 역할이 가정되어 있는 영리한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면 작품들은 한결 같이 여성, 노인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특히 한국의 전통적인 가부장적 사회 구조가 여성의 개인적 삶에 가하는 어떤 폭력에 대한 예리한 관조가 있다.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는 사실 공적인 이야기의 변주이기도 하다. 그러한 면에서 이야기들은 흩어져 있는 듯해도 결국 집약한다. 수상작들이 모여 일련의 메시지를 전하는 놀라운 성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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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웅불
다카하시 히로키 지음, 손정임 옮김 / 해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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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춘기 소년들의 세계는 흔히 약육강식이 지배하는 성인들의 사회의 알레고리로 읽힌다. 하지만 구태여 꼭 그렇게 치환되지 않더라도 절제와 자제와 위장이 본능과 탐욕을 아직 제대로 이기지 못하는 시기의 이야기는 인간의 심연에 있는 어두운 구석을 여과없이 드러낸다. 그것은 구태여 과거의 것이라 치부될 것도 나와 상관 없는 세계의 것이라 무시할 수도 없을 만큼 지금 현재 여기에서의 우리의 비겁한 모습을 드러내는 생생함을 품고 있다. 권력을 남용하고 약자를 짓밟아 사익을 추구하는 행태는 낯설지 않다. 또 그 회색 지대에서 그 광경을 방조하고 때로 그 과정에서 파생되는 이득을 알게 모르게 누리는 많은 우리들의 모습도. 


<배웅불> 작가의 문장과 이야기의 구성은 대단히 치밀하고 밀도있게 직조되어 시종일관 팽팽한 긴장감을 잃지 않는다. 대체 이 촘촘한 이야기는 어디까지  뻗어나갈 것인가 예측불허다. 한마디로 아주 잘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생각이 든다. 대도시에서 벽지로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전학 온 소년, 그 소년을 맞아들이는 또래 집단의 역학 구도는 자연스럽게 소년을 포섭한다. 소년은 아닌 척 하지만 내도록 그 부당한 폭력적인 관계망으로 저도 모르게 서서히 빨려들어가게 된다. 이쯤 되면 과연 그 소년에게는 죄가 없었나 묻게 된다. 그리고 결말은 그에 대한 답을 신중하게 준비하고 있다.


이런 이야기라면 이미 <파리대왕>에서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서 경험한 익숙한 서사다. 강하고 악하고 매력적인 지배자가 있고 그 대척점에 서 있는 듯 보이는 '나'의 입지는 더없이 약하다.  '나'는 도덕적으로도 힘의 역학 관계 안에서도 길항 작용에 성공하지 못한다.  결국 그 악에 수시로 굴복하는 이야기였다. 


<배웅불>은 일본적인 색채가 강한 작품이다. 전통적인 풍속의 하나인 오봉에 조상의 영혼을 배웅하는 의미로 피우는 '배웅불'은 그 자체로 괴괴한 배경이자 음침한 복선으로 작용한다. 



그들은 살인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살인하고 말지도 모른다. 죽일 마음 없이 사람을 괴롭히고 죽여버릴지도 모른다.


학교폭력 뿐만 아니라 이 사회에 횡행하는 셀 수 없이 많은 끔찍한 사건들이 애초부터 강력한 의도로 빚어진 경우는 많지 않을 것이다. 비판의식 없이 상황에 매몰되어 도덕적 성찰 과정을 방기하다 보면 어느새 벌어지고 마는 많은 비극들을 돌아보게 만드는 이야기였다. 괴롭힘을 당하던 미노루가 마지막에 주인공에게 던진 "나는 처음부터 네가 제일 열 받았었어!"라고 한 이야기는 긴 여운을 남긴다. '그'는 수많은 '우리'와 닮아 있다. 폭력을 사주하지도 약자를 괴롭히지도 않고 오히려 때로 선행을 베푸는 많은 사람들, 그러나 저도 모르게 그런 시스템 자체 안에 순응하며 나날을 살아나가며 약자들을 양산하고 핍박하게 되는 거대 헤게모니의 하나의 부속품이 되어가는 '우리들'의 모습.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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